소설리스트

미궁기담-679화 (679/813)

679 히아리드 대평야

=…….=

스톱 버튼을 누른 것처럼 굳어버린 안느의 모습은 환인에게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는다.

니오네브레스에 처음 왔을 때의 자신이었다면 지금 그녀의 모습에서 일말이나마 배신의 가능성을 읽고 내치거나 버렸을 테지만…….

지금은 왜인지 그녀의 심정이 이해되고 약간이지만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공감이라니.’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아닌가.

아무튼, 시간을 주고 기다려준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정신적 충격 탓에 혼란스러울 뿐, 시간을 기다려주면 자신의 안느로 돌아올 테니까.

환인은 격변한 자신의 사고관에 작게 실소를 지으며 유르파가 가져다준 수프를 조금씩 마셨다.

대성녀와 통신을 하며 다 식은 수프지만, 이상하게도 따스하게 느껴진다.

=………….=

환인이 그러는 사이 안느는 5초 동안 주위를 잊을 정도로 엄청난 상념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가 ‘만약’이라는 조건을 붙였지만, 그의 성격상 이런 질문을 그냥 할 리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메리아놀과 척을 질 각이 그의 안에 성립한 상태이고, 연인이라 불러주는 자신을 배려해 질문이라는 형식적인 행동을 해준 게 틀림없겠지.

그렇게 생각했더니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차츰 정돈되어가지만 널뛰는 마음은 가라앉질 않는다.

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걸까. 좋은 경험이라곤 거의 없는 모국인데. 메리아놀을 떠난 뒤 고향 땅은 한 번도 밟지 않았었는데…….

문득 자신이 너무 오래 침묵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던 안느는 표정이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지 다시 굳은 표정을 지었다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길게 심호흡했다.

신선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수차례 폐에 공급되자 긴장한 것처럼 널뛰던 심장도 산소 공급으로 한층 차분해지고 뇌도 덩달아 활성화된다.

그리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다시금 되뇌었다.

=……도령.=

눈을 뜬 안느는 자신을 조용히 기다려주는 환인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해 말했다.

=나는 도령을 만나기 전까지 플뢰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어. 개념은 플뢰지만 플뢰가 아닌 변이종 정도? 그야 그런 식으로 나라를 떠나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는데 남남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잖아.=

“그렇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운 그의 반응에 안정감을 느낀 안느는 조금 더 편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플뢰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도령과 함께하면서 받아들이게 됐어.=

“날 도와주면서 느낀 건가.”

=응. 헬루멘에서 도령이 감기에 앓아눕는 걸 보고 진작에 수목화를 일찍 하지 않은 걸 후회했을 정도거든.=

지금이야 탈인간급을 넘어 인간을 초월하고 있는 그이지만, 당시만 해도 압도적인 무술 실력을 지녔을 뿐, 몸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교상 마을 오울링 인근에서 수목화 준비를 시작했고 얼마 안 가 본격적으로 정수를 몸에서 생산했지만, 헬루멘 즈음에는 정수가 그의 온몸을 돌기 전의 일이었다.

거기에 진실을 보는 주시자의 선천 능력에 그를 위한 수목화도 했고, 가야가 전해준 아버지의 이야기도, 기플라족이 자신을 대하는 행동도.

=전부 내가 플뢰라서, 플뢰 종족이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라고 생각해. 이런 내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도 이상한…… 으음, 내 마음을 생각한대로 잘 표현하지 못하겠네.=

뒷머리를 긁적인 안느는 휴우, 한숨을 내쉬며 아까보다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내 발로 도령을 떠나거나 배신하는 일은 없다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 하지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머뭇거리던 안느는 그의 담담한 시선에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을 떠올렸다.

만약 그가 정말로 분노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민간에 공격을 퍼붓는다면 자신은…….

=난…… 도령이 손에 무고한 피를 안 묻혔으면 좋겠어.=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은발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흘러내리는 걸 보면서 환인은 빈 머그컵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표현하지 못하겠다는 마음, 대강 짐작이 간다.

자신이 민간에 혼령주를 떨어트리며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면 그녀는 자신을 말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의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겠지.

병든 식물처럼 말이다.

“안느.”

=……응?=

“나는 메리아놀을 상대로 싸움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한다면 전쟁이 되겠지. 날 지키기 위해서, 영도를 지키기 위해서, 너희를 지키기 위해서.”

=…….=

“내가 지구인이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책임 대부분은 국가 지도부에게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국민도 그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런 사상은 무책임한 데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역학 관계를 단순하게 뭉뚱그려버리는 무식한 생각이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환인에게 중요한 것은 안느의 정신 건강이지, 알지도 못하는 저 먼 섬나라의 귀쟁이들 목숨이 아니다.

허울 좋은 핑계이고 구차한 변명일지라도 그녀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면 얼마든지 주워 담을 수 있다.

“나 역시 무차별 학살을 가할 생각은 없다. 이는 영도와 메리아놀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고 나아가 전면전을 벌일 불씨가 될 테니까. 마침 잘됐군. 유르파, 가서 모두 모여달라고 해주겠습니까.”

=응?! 응!=

굉장히 중요한 대화가 오가는 모양새에 숨죽인 채 ‘나는 나무다. 나는 나무다.’ 존재감을 지우던 유르파는 그의 부탁을 듣고 벌떡 일어나 아가씨들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이실리테, 유르파, 환연, 백려강, 아영, 노른. 여기에 안느까지.

여자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환인은 지하굴 미궁을 돌파하며 깨닫게 된 사실을 입에 담았다.

“……해서, 팔라툼의 사도인 광상녀가 내게 언급했던 시련이라는 점까지 고려해 천원을 다스리는 존재가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어, 어어. 오빠가 중간에… 갑자기 멈춰 섰을 때였죠…?=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영은 무언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혀끝에 말이 걸린 것처럼 어버버 거리다가 말하길 포기하고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그건 다른 여자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천원을 다스리는 존재. 천원의 주인.

이 묘사가 가리키는 존재는 입에 함부로 담을 수조차 없는 절대적인 분들이잖아.

다섯 신. 이 세상의 절대자인 신들께서 그를 원하고 계시다고?

노른을 제외하고 여자들이 반쯤 넋이 나가 있을 때 환인은 그녀들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렸다.

“물론 세계를 지탱하고 떠받치는 고귀하고 신성한 분들이 직접적으로 날 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다면 천원의 관리자, 이를테면 성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 같은 존재가 그러겠지.”

=그… 그것도 엄청난 건데…….=

「환인. 그럼 하늘로 올라가는 거야? 나도 따라갈 수 있어?」

노른이 엉금엉금 기어와 환인의 다리 사이에 앉으며 묻는다.

자그맣고 귀여운 녹색 날개의 소녀를 환인은 포근하게 안아주며 자신의 대답을 긴장한 모습으로 기다리는 여자친구들에게도 말했다.

“갈 생각 없다. 니오네브레스에서 내 목적은 이전에도 하나였고 앞으로도 하나뿐이다.”

=귀환…….=

이실리테의 혼잣말에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눈썹을 역팔자로 만들어 분노를 드러냈다.

“이 결론이 나왔을 때, 솔직히 말하지. 나는 분노했다. 내 삶에, 내 인생에 멋대로 관여하려는 놈들이 왜 이렇게나 많은가. 멋대로 건드려놓고서는 없었던 일로 하려는 것처럼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개자식들이 왜 이렇게 당당한가.”

그의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과격한 언사에 여자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 그를 엿보던 어떤 용도, 다른 차원에서 임시 계약한 반인반정령의 눈으로 훔쳐보던 어떤 정령도 움찔하고 제풀에 찔려 몸을 사렸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참지 않으려 한다. 이때까지는 힘이 부족해서, 역량이 모자라서, 힘의 규모에 밀려서 너희들을 지키고 날 지키기 위해 몸을 사려왔지만…….”

환인은 오른손을 들어 영기에 심핵력과 위상력까지 버무린 기운의 구체를 만들어냈다.

황금빛과 잿빛에 푸른빛이 복잡하게 뒤엉켜 일렁이는 빛의 구체.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의 심핵이 에너지를 합치려던 걸 보고 흉내 낸 순환 작용이다.

여기에 영혼 구슬을 집어넣어 쏘면 탄도 미사일은 우습게 상회하는 위력이 나올 테지.

웅웅거리며 옅은 기파를 뿌리는 그 구체에 여자들, 특히 유르파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떴다.

=사, 삼위일체……!=

=삼위…일체? 유르파 언니 그게 뭔데요?=

=전혀 다른 에너지 셋을 반발이나 상충 현상 없이 한데 모으는 경지를 말해! 순수한 에너지는 에너지 총량의 법칙에 따라 주어진 한계 이상의 힘을 다룰 수 없는데 이게 이위일체가 되면 순수한 에너지에 비해서 불안정하고 난폭하지만 그 총량이 막대해져. 하지만 삼위일체가 되면 혼돈 속의 질서처럼 세 에너지가 서로 맞물리고 이어지며 순환해 그 총량이 미지수가 되며 한계도……!=

얼마나 흥분했는지 말이 알아듣기도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쏟아진다. 하지만 엄청 대단하다는 것 하나는 알겠다.

대체 언제 저런걸 할 수 있게 된 걸까? 여자들은 그의 불가사의함에 혀를 내둘렀다.

거의 24시간 항시 붙어 지내기 때문에 그가 특별한 훈련을 하지 않는 건 잘 알고 있는데…… 매일 꾸준히 하는 명상이 이유일까? 아니면 유일 직업인 성제라서?

환인은 유르파가 너무 흥분해 헐떡이는 틈에 말을 이었다.

“이제 참고 몸을 사릴 필요는 없다. 대성녀님도 그러더군. 영도는 언제나 내 뒤에 있을 거라고.”

팟— 환인이 손을 움켜쥐자 그 안에서 일렁이던 기운이 폭사하듯 흩어졌다가 그의 손을 통해 다시 스며든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르파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 래서 첫 대상으로 메리아놀을 생각한 거구나? 반년 넘게 암살 시도에 대한 아무런 해명도 없으니까.=

“예.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지요.”

여자들은 안느를 힐끔거렸다. 그녀가 저러고 있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안느와 이야기하던 중에 너희도 들어둬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거다. 지금부터 할 말은 아직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거기도 하고. 안느, 고개를 들고 날 봐라.”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안느를 부른 환인은 지금까지 계속 보관해오고 있던 물건, 자신이 니오네브레스로 들어오게 된 원흉을 꺼내 들었다.

메리아놀 종족 연합 주화.

시중에 평범히 유통되지 않으며 메리아놀 주도 패시지의 귀족들 사이에서만 거래된다는, 위상석 가루를 섞어 만든 특수 주화다.

“니오네브레스로 막 넘어왔을 당시 친분을 맺은 상인을 통해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연합주도화폐청에서 제작한 일반 금화가 아니다. 위상결정순도도 5등위가 아닌 5와 2/3의 순도지.”

=으응? 그 정도면 특수 거래용인데요?=

호기심을 드러내는 아영에게 금화를 넘겨주자 자홍접의 보라색 장갑을 하얀 장갑으로 바꿔 끼고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뭐지. 뭔가 특수 용도로 쓰기 위한 술법적인 마킹이 되어있는 거 같은데…….=

=응? 나도 좀 보여주렴.=

똑같이 세밀한 세공 장갑을 끼고 주화를 넘겨받은 유르파는 응? 1차로 눈썹을 찡그렸다가 2차로 응?! 하고 깜짝 놀란다.

=이거 말도 안 되게 고차원적인 도약 술식의 흔적이야! 자기, 이거 어디서 구한 거니?!=

“그것이 제가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오게 된 원인입니다.”

=……아?=

=어?=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고 이실리테와 노른을 제외한 나머지 여자들이 오늘 놀란 것 중 가장 크게 놀랐다.

=뭐, 뭐야. 자기가 실수나 자연 현상으로 우리 세계로 넘어온 게 아니라, 누군가 타의에 의해서라는 거야?=

=아니 그러면 잠시만요. 차원 간 소환이 진짜 성공했다는 말인데?=

=저기, 그러면 오라버니가 6급 미궁 안에 소환 된 것도…….=

=…….=

=…….=

=…….=

환인이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오게 된 진실을 알게 된 여자들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가 처한 일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분노해서기도 하지만, 강제로 다른 차원의 생명체를 이쪽으로 소환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의 섭리에 벗어나는 행위였던 것.

환인은 유르파에게서 주화를 넘겨받아 아스펜드에 보관하며 말했다.

“내가 메리아놀로 향하고 있는 이유를 직접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지. 진짜 이유는 날 이 세계로 소환한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편 무사히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저는, 주인님이 함정 해제술을 배우고 겸사겸사 땅신 교단을 방문하시려는 줄만 알았어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는 르아웬 아기오시스 추기경의 이야기대로 땅신 교단을 방문할 생각도 있었으니까.”

있었으니까…… 지금은 방문하지 않겠다는 건가?

“반년째 암살 사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는 것, 엘위드리스에 관한 입장문 발표도 없는 것, 엘위드리스의 생존자가 자신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있는 것, 여기에 내가 소환하게 된 이유까지.”

하나하나 손을 꼽아준 환인은 이제 분노가 아니라 담담한 태도로 말을 끝맺었다.

“현재 메리아놀만큼 분노를 터트리기에 적합한 대상이 없다. 니오네브레스의 4대 국가 중 한 곳과 드잡이질을 벌이면 니오네브레스 대륙의 모든 사람에게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겠지. 날 건드리면 곱게 끝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 그래서 메리아놀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대응할 생각을 하신 거네요.=

=참고로 그 대응이라는 건 어떤 겁니까…?=

위축된 강아지처럼 반쯤 손을 든 아영의 질문에 환인은 미리 생각해뒀던 시나리오를 말했다.

“최소한의 명분은 갖춰야 하니 일차적으로 영도를 통해 메리아놀 왕실에 독촉장을 보낼 거다. 그리고 사흘 안으로 답장이 없으면, 라드세아-벨티칼-히스론드에 공식 입장문을 발표한다. 메리아놀이 국가로서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바, 나 자신의 자위권을 위해서 무력행사에 들어가겠다고.”

=주인님. 주인님의 몸에 박혀있는 파편인은 괜찮으신 거예요? 지하굴 미궁에서 힘을 쓰시는 것은 봤지만 전쟁에도 괜찮으신 것인지…….=

“문제없다. 파편인에 적응한 지금 곤란한 것은 힘 조절을 해서 약한 위력의 기술을 펼칠 수 없다는 것뿐이니까.”

=저어, 오라버니. 그러면 만약 메리아놀의 민중이 왕실의 선동에 넘어가서 오라버니를 적대하고 공격하면…….=

“적에게 내릴 것은 죽음뿐이다.”

=자기라면 우리가 말 안해도 전부 고려하겠지만, 종족연합주화를 쓴 게 꼭 메리아놀의 고위 귀족 인사들이라는 법은 없어. 그저 특정하기 쉬운 매개체가 특수 거래용 주화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건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겠지요.”

=…아, 그런가. 하긴 메리아놀이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것은 차원 방랑자의 ‘안전한 보호’인데 예언자 가문까지 보유한 메리아놀이 그걸 감지해내지 못한 거 자체가 문제니…….=

=오빠오빠. 독촉장을 보내기 전에 하얀 늑대들한테 지령을 내리시는 건 어때요? 지금 하얀 늑대들은 대외 국가 정보 수집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걸 특수 지정해 집중적으로 메리아놀의 내부 정보를 모으는 거요. 싸움은 적을 알수록 유리한 고점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

“그래. 그렇게 해라.”

여자들의 질문과 의견을 하나씩 대답해주던 환인은 경색된 안느의 표정이 점점 풀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정리를 끝내가는 모습.

예상대로 잠시 후 단단한 결의가 깃든 얼굴로 안느가 말했다.

=도령. 날 메리아놀로 보내줘. 가서 설득…….=

“말도 안 되는 소리.”

설마 예상이 빗나갈 줄이야. 환인은 예상보다 더 착하고 선한 안느의 면모에 후우, 그녀가 움찔할 정도로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끊었다.

“내 약점이자 역린을 잠재적인 적에게 쥐여줄 이유가 어디 있지? 말해봐라.”

=아니 그게, 도령도 말했었잖아! 말 한마디면 천 냥 빚도 갚는다고? 그러니까 전직 왕녀이기도 한 내가 돌아가서 아버지랑 어머니를 잘 설득하면…… 아, 아버지도 이번 대의 왕이니까…….=

열의를 가지고 그를 설득하려던 안느는 자신이 말할수록 환인의 눈썹이 역으로 곤두서는 것을 보며 말을 흐렸다.

“안느.”

=으, 응?=

“내가 메리아놀 협의체 고위 인사라면 네가 귀국한 순간 얼씨구나 하고 붙잡아서 감금한 다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데 쓸 거다.”

이때까지 그녀를 아끼는 환인의 모습이 여러 차례 노출되었고 안느 또한 그를 위해 수목화까지 한 상황이다. 최고급 떡이 입안으로 굴러들어왔는데 먹지 않으면 병신이다.

“일차적으로 널 미끼로 써서 날 조종하려 들 테고 그게 안 되면 너로 함정을 파 날 죽이려 들게 틀림없다.”

=그건 너무 극단적인…….=

“메리아놀 협의체 놈들의 머릿속이 꽃밭이라면 극단적이겠지. 하지만 예지를 빗나가게 하고자 날 암살하려 든 놈들도 플뢰다. 과연 예지조차 통하지 않게 된 나를 메리아놀 수뇌부가 어떻게 생각할까. 6개월간 이야기를 질질 끈 놈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까.”

언제나 상대가 말을 끝내길 기다려주며 배려하던 평소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상황에 안느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환인뿐만 아니라 아영도 너무 무른 생각이라며 그녀를 나무란다.

=원래 잠재적인 적대 대상을 두고 가장 먼저 얻어야 할 건 정보지만, 그 정보를 모으는 이유는 약점을 잡기 위해 섭니다. 안느 언니 정도라면 오빠의 약점이다 못해 심장이죠. 언니가 하는 말은 오빠의 심장 반쪽을 적한테 주자는 말이랑 똑같아요.=

=나도 주인님과 아영의 의견에 동감이야. 그리고 네가 떠나면 주인님의 수목화는 어찌할 건데?=

=저도 조금……. 언니의 의견은 상대의 선함에 너무 기대는 계획이라고 생각해요.=

이실리테에 이어 사려 깊은 백려강까지, 유르파도 말만 안 할 뿐이지 반대 입장이 분명한 표정에 안느는 시무룩해졌다.

=내가 그렇게 머릿속이 꽃밭이었나…….=

그런 여자들 사이에서 줄곧 입 다물고 듣기만 하던 환연이 끼어들었다.

「너무 그렇게 나무라지 마. 안느 쟤가 우리 파티에서 유일한 양심이라 유별나게 느껴지는 거뿐이니까.」

=그건 그렇지.=

=응.=

환인도 잠깐 침착을 잃은 걸 반성하며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그녀를 달랜다.

“안느, 네 계획이 통할 상대라면 첫 번째로 보낼 독촉장에서 상대가 이성적으로 나올 거다. 아니라면 한 번 제 발로 떠난 왕녀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따위’ 정도로 여기겠지.”

=응…….=

“그리고, 방금도 말했지만 전면전의 불씨가 될 수도 있는 민간인 공격은 메리아놀과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하지 않을 거다. 나도 영도를 전화에 휩쓸리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무모한 생각은 하지 말아다오.”

=그, 그럴게.=

한숨을 후, 내쉬며 머그컵을 입에 가져갔던 환인이 빈 머그컵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놓으니 이실리테가 재빨리 새 컵에 뜨거운 커피를 내려 가져다준다.

분위기와 주제가 환기되는 시점.

여자들은 그에게 천원과 관리자, 그리고 하늘의 뜻에 대해 더 듣고 싶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심장의 밑바닥을 잠식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함부로 말했다가 정말 그게 현실로 이뤄져 하늘로 떠나버린다면, 자신들은 그를 따라갈 방법 따윈 없으니까.

그녀들의 시선이 환인의 다리 사이에 앉아있는 녹색 머리카락의 꼬마 숙녀에게 향한다.

노른이라면 신수가 되어 쫓아갈 수 있으려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너무 늦었군. 불길도 이쪽으로 더 번질 기색은 없으니 여기서 머무르며 공간 도약진을 그리도록 한다. 환연은 기플라족이 머무를 흙집을 만들어주고 유르파는 한시라도 빨리 도약진을 완성해주십시오.”

「응.」

=그렇게 할게. 려강이 아가씨는 나 좀 도와줘~.=

=네, 언니.=

“나머지는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서도록 하지. 대체로 불을 보고서도 다가오는 것들은 위험한 것들일 확률이 높다. 기플라족을 영도로 보내기 전까지는 집중해서 불침번을 설 수 있도록 해라.”

=알았어…….=

=옛.=

그렇게 모두에게 할 일을 지시한 환인은 안느가 이실리테와 함께 멀어져가는 걸 보며 환연이 들어있는 안주머니 쪽을 툭툭 건드렸다.

「…안느가 헛짓거리 안 하게 감시하란 거지?」

“그래. 내가 특별히 따로 말하기 전까지는 계속 지켜봐다오.”

「애가 너무 착해도 문제라니까. 아영이처럼 적당히 때 묻으면 좋을 텐데.」

“그게 안느의 장점이니까.”

헹, 안주머니 속에서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환연도 딱히 더는 입에 담지 않았다.

이틀.

철야 작업을 통해 공간 도약진을 그린 유르파는 통신 수정구를 연결한 채로 상대 쪽 술식연구기관장 아야빗=우마크레 영성과 토론하며 저쪽의 공간 이동 술법진과 동조율을 올려나갔다.

그사이 대평야의 괴물들도 부단히 일행을 습격해왔다.

불은 정말 땅속의 원유와 이어져 있는지 이틀이 지나도록 기세가 감소하긴커녕 조금씩 불길이 강해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호기심이나 관심을 가진 괴물들이 접근하며 일행을 습격한 것.

거기다…….

「환인. 저쪽에 뭔가 정령력이랑 뭔가가 섞이는 거 같은데…… 릴라이스가 이상한 게 태어날지도 모른다고 해.」

“이상한 거라니.”

「막말로 나랑 비슷한데 훨씬 더 사악한 게 태어날 수도 있고 뭐 그렇다네. 가볼 거야?」

“됐다. 미궁이 있던 자리에서 태어나는 불 속성의 반정령이라니, 듣기만 해도 꺼려지는군.”

「릴라이스가 그러는데 환인 너한테는 인외적인 게 종종 이끌릴 거래. 기린하고 용하고 떡치고 나랑도 구멍 맞추면서 네 기운이 혼돈의 존재가 입맛 다실 정도로 좋아할 법하게 됐다고…….」

“……릴라이스와 합체는 아직 멀었나.”

「야. 합체해도 이 몸은 내 몸이거든? 때리면 나한테 충격 오니까 엉뚱한 생각 하지 마!」

“엉뚱한 생각은 안 했다.”

「섹스로 혼내주기 뭐 이런 거 생각한 거도 아니지?」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합체하면 심핵력 맛이 어떤지 좀 보여줄까 했을 뿐이다.”

「그게 더 위험한 거 같은데…….」

아무튼, 습격해온 괴물과 마수 중에는 제법 돈이 나가는 것들도 많았기에 그 부산물은 전부 기플라족을 통해 보내기로 했다.

200명이나 되는 종족이 새로이 정착하게 되면 기반 시설을 재활용한다 해도 비용 지출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그 부산물이면 어느 정도 벌충은 될 테지.

그리고 동조율 조정이 끝났을 때 놀랍게도 아야빗 영성이 직접 포탈을 타고 넘어왔다.

=화아……. 이게 공간 도약진이군요?=

처음에는 물건으로 이동 실험을 해볼 생각이던 유르파가 기함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니 농담으로 말한 건데 진짜로 넘어오시면 어떻게 해요?!=

=유르파 영혼 기사의 실력을 믿고 있으니까요.=

뭐가 문제냐고 베이지색 토끼 귀를 쫑긋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아야빗은 자신의 허리에도 오지 않는 귀여운 종족들을 보며 웃음 짓고는 쿠알과 악수를 나누었다.

=당신들이 기플라족이네요? 이야기대로 귀엽게 생겼는걸요. 영도는 여러분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할 거에요. 포탈 너머에서 대성녀님이 여러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시니까 얼른 넘어갈 준비를 하도록 하죠.=

=네, 넵!=

=어휴 정말! 유지 테스트를 하면서 조금 쉴 생각이었는데!=

=저도 도와줄 테니 너무 혼내지 말아요. 그런데 정말…… 아름다운 술식이네요. 이걸 전부 혼자서 짜내다니, 유르파 영혼 기사는 정녕 천재였어요!=

=혼낸 것도 아니고 천재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도약진은 우리 성제님 거니까 함부로 가져다 쓰면 미움받을 거니까 거기 베끼고 있는 거 이리 주세요.=

=어머, 흐응~.=

인토족의 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에게 날아들었지만, 환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외교통상기관장이자 차기 대성녀인 샤스라=슈아우트 영성과 통신을 이어나갔다.

[……해서, 이렇게…….]

“그 부분은 좀 더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압박을 준다고 할 정도로 강렬한 어휘를 씁시다.”

[확실히. 이쪽이 굽히고 나간다는 느낌이 들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러는 식으로 표현하는 게 확실히 느낌이 더 사는군요. 다음 문장은…….”

메리아놀 왕실로 보낼 5700자의 1차 독촉장.

독촉장이라 쓰고 선전포고문이라 읽어도 무방할 서신이 두 사람 사이에서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감기가 올랑말랑...

독자님들도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