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8 땅속 마을 베르헨
기플라족과 함께 환인 일행을 배웅한 유르파는 일행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옹기종기 모여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말했다.
=자, 여러분? 지금부터 곧장 짐 정리를 시작합니다~.=
=예? 지금이요?=
=환인 님은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하셨잖아요.=
=맞아. 늦어도 일주일이라고 하셨어.=
=그런데 곧장 짐정리를 하는 거지…?=
환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오는 의문이다.
쿠알이 손을 들고 유르파에게 질문한다.
=떠나야 한다는 건 이장님이랑 은인님이 잘 설명해주셔서 이해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은인님은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하셨는데 유르파 님은 바로 준비해야 한다고 하시니까 조금 이해가 안 가서.=
순박한 기플라족이기에 반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궁금해하는 태도.
이장 대리인 쿠알의 질문에 유르파는 그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잘 설명했다.
=미궁 하나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직업자들, 일반적인 모험가 파티라면 아마 한 달? 두 달?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 성제님과 영혼 기사님들은 절대 평범한 분들이 아니랍니다.=
그가 말한 일주일은 정말 예상치 못한 사고와 난관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온 것까지 가정했을 때의 시간일 것이다.
산란못 미궁에서 200명에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구출하고 무지막지한 넓이의 개방형 미궁을 전체적으로 깨끗하게 토벌하는데 걸린 시간이 대충 10일.
=하, 지, 만! 이번에는 심핵 토벌이 핵심 목표로 그 과정에 시간이 걸릴만한 일은 거의 없죠.=
영혼들로 지도를 만들 때 유르파는 환인에게 물었었다. 이형종한테 잡혀간 마을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본 게 있느냐고.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지하굴을 대부분 확인했지만, 사람의 모습은커녕 흔적조차 없었다.
그 말은 뼈도 남기지 못하고 잡아먹혔다는 이야기.
=그… 그러면?=
그걸 솔직하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는 일이라 유르파는 눈을 동그랗게 뜬 쿠알에게 검지만 세워 보였다.
=성제님이니까 이르면 내일 돌아오실지도 몰라요.=
=내일.=
=내일…?=
=여, 여기서 아르주앙들이 사는 곳까지 내려가는 데만 하루가 걸리는데……?=
유르파의 설명을 알아들은 쿠알은 당황해하는 동족들을 향해 짝짝. 손뼉을 강하게 쳐서 시선을 모으며 말한다.
=다들 유르파 님 말씀대로 하자.=
=응.=
=가자가자.=
집과 가족이 있는 기플라족은 집으로, 단체 생활을 하느라 기숙사 같은 곳에서 지내는 기플라족은 기숙사로.
아르주앙들에게 경비 경계 임무를 줘 두 개 통로를 지키게 한 유르파는 혹시 모를 잔여 이형종의 재습격을 대비해 용아병을 소환했다.
환인 일행이 폭군룡의 미궁 부산물로 챙겨왔던 아룡의 뼈를 재료로 팔라툼에서 얻은 고급 부여 비술서의 기술로 만들어낸 인공 골렘이다.
=위력도 2.5급 정도에 지속시간도 그다지 긴 편이 아니지만…… 자기들이 돌아올 때까지는 쓸 수 있겠지.=
2.5급, 그것도 최대 2마리밖에 소환하지 못하는 데다 지속시간도 1~2일정도 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소재는 4~5급의 강화 이형종으로 불리는 아룡종의 뼈를 필요로한다.
쓰면 쓸수록 손해만 누적되는 기술이지만, 뼈로만 이뤄진 작은 집 크기의 뼈 공룡이다.
기능도 뼈의 튼튼함과 수복력에 집중해놨고 덩치도 크니 입구 틀어막기 용으로 쓴다면 쏠쏠하게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쓸 일이 없는 비술인데 이렇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쉿……!
쓰슷…?!
아르주앙들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뼈 공룡의 존재에 깜짝 놀라 더듬이를 격렬하게 흔들었지만, 유르파가 직접 소환한 소환체라는 이야기에 안정을 되찾고 통로 감시에 집중한다.
하지만 높이 3m, 길이 6m에 달하는 뼈 공룡은 상상도 못 한 존재인지 그들의 더듬이 한 짝은 뼈 공룡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와아아…!
탱- 카강-…
티디딩—
=……?=
밤늦게까지 공간 도약진을 연성하고 있던 유르파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함성과 소음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녀를 지키고 서 있던 이모렐이 여섯 장의 날개를 조그맣게 흔들며 말했다.
=유르파 님. 이형종이 몰려온 듯합니다.=
=아니 갑자기?=
혹시 몰라 대비한다는 느낌으로 용아병을 소환해놨는데 진짜 기적의 한 수였네!
서둘러 방호 술법이 걸린 로브를 뒤집어쓰고 빗자루와 부적 다발을 챙긴 유르파는 급한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모렐 씨는 동쪽 통로를 지원하러 가주세요. 저는 서쪽으로 갈게요.=
=안됩니다. 성제님께서 제게 부여한 임무는 유르파 님의 호위입니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즉각 거절하는 그녀의 태도에 유르파가 당황 절반, 황당 절반의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을 안인데 무슨 위험이 있다고요. 입구가 안 뚫리게 막는 게 더 중요하죠.=
=사흘 전 마을 한복판에서 이형종이 굴을 파고 나온 것을 잊으셨습니까. 뭐라고 말씀하시든 저는 유르파 님만 지킵니다.=
으. 유르파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다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올랐다.
그녀의 말이 맞다.
자기한테는 처음 본 기플라족 200명보다 자신이 더 중요할 것이다.
만약 자신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자기의 분노가 얼마만 할지 짐작도 안 간다. 게다가 이모렐은 그와 계약한 청옥. 그의 지시에만 따르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난 7급 비술사인데.’
그의 과보호가 아주 조금 불만이면서도 기쁜 이율배반적인 기분에 유르파는 입매를 가늘게 만들며 가까운 통로 쪽으로 먼저 날아갔다.
그녀의 눈에 통로 입구는 제법 안정적이었다.
마을 입구 통로는 폭이 4m 정도 된다. 그리고 유르파가 소환한 용아병은 폭이 약 3m.
용아병이 거대한 대가리를 좌우로 흔들며 딱딱, 물어뜯기만 해도 5m 정도는 가볍게 커버할 수 있는 데다 기플라족이 날린 화살은 용아병의 뼈 사이를 날아가 건너편에 뭉쳐진 이형종을 맞추고 있다.
사흘 전 이실리테와 안느가 있을 때와 다르게 이형종이 죽어 나가는 속도가 무척 느리지만, 막는 데는 지장이 없는 상황.
유르파는 부여용 떡갈나무 지팡이를 들어 올려 신체 강화의 비술을 용아병과 용아병의 좌우를 지키는 아르주앙들에게 내렸다.
환인의 정령 강령 수준은 절대 아니고 그저 근력이나 체력을 1.2배가량 늘려주는 수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버티기에 급급하던 용아병이 이형종 무더기를 힘으로 밀어내며 터엉, 텅— 거대한 아가리를 딱딱거려 이형종을 씹어버린다.
콰삭, 끄이이익—
쿠지직, 키샤아아아-!
거기에 더해 염동력으로 격염激炎의 부적을 몇 장, 동굴 안으로 날려 불을 질렀다.
취이이잇-!
키르르르륵!
키샤아앙……!
철도 시뻘겋게 달구는 샛노란 불길이 정체된 이형종 무리의 머리 위로 쏟아지자 괴성과 몸부림으로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총천연색의 키틴질이 시뻘겋게 익거나 체액이 끓다가 푸직- 퍼벅 터져나가고, 열기에 몸 일부가 익어버린 이형종은 발광하면서 피아 가리지 않고 가시 다리를 휘둘러 찌르거나 동료를 물어뜯는다.
‘이쪽은 됐어!’
서쪽 통로를 먼저 지원해준 유르파는 황급히 이형종이 점차 쌓이는 동쪽 통로로 날아가며 여섯 장의 푸른 날개로 쫓아오는 이모렐에게 물었다.
=갑자기 이형종이 왜 공격해온 걸까요?!=
=미궁의 지배를 받던 이형종이 갑자기 미쳐 날뛴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지하굴 미궁의 심핵을 부쉈구나!=
=성제님께서 빠르게 이동 중이신 것도 느껴집니다. 몇 시간이면 복귀하실테지요.=
=응!=
그러면 된다.
잠깐 사이 잠들어있던 기플라족이 모두 깨어나 활이며 석궁을 들고 동, 서쪽 통로로 달려가고 있다.
자신의 지원도 있고 버티는 것쯤은 어렵지 않겠지.
유르파는 동쪽 서쪽 통로 입구를 오가며 부적을 아낌없이 뿌리고 지원 비술을 펼쳐 기플라족을 도와나갔다.
이모렐도 만약을 대비해 유르파를 데리고 탈출할 힘은 남겨둔 채 여섯 장의 날개를 활짝 펼쳐 빛의 창을 날리거나 위상력의 파동을 뿜어내 이형종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등 조금씩 손을 거드는 중.
그렇게 2시간이 흘렀을 때, 유르파는 속으로 안타까움에 부르짖고 있었다.
‘숫자가 너무 많아!’
이미 수백 마리를 죽였지만, 이형종의 파도는 그칠 기미가 없다.
이성과 본능이 모두 거세된 것처럼 오직 마을을 향해 밀어닥치기만 하는 이형종들.
소환한 용아병도 피해가 누적되어 몸 곳곳이 부스러진다.
유르파가 위상력을 보내 강제 수복을 진행 시킨 것만 4번. 이 이상 손상을 입으면 소환 매개물의 내구가 떨어져 강제로 소환이 취소될 수 있다.
게다가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위상력을 아껴가며 부적 위주로 싸웠지만, 2시간 정도 지나자 위상력도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기플라족도 2교대로 나뉘어 체력을 보충하는 동시에 화살도 만들어가며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재수 없이 튄 산성액이나 독액 파편에 맞아 쓰러지는 기플라족도 하나둘씩 나오는 상황.
유르파가 직접 만든 해독제, 치유 물약으로 치료하고 있지만 그건 양보단 질에 치중한 것이라 대부분 상급 물약.
숫자가 많지 않다.
=읏……!=
활을 쏘려던 기플라족 한 명이 어깨에 산성액을 맞아 뒹구는 장면에 유르파는 답답함을 느끼며 그쪽으로 날아갔다.
차라리 자신 혼자였다면 이렇게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적을 한데 모아 부적을 난사하면 싹 쓸려나갔을 테니까.
자신이 아니더라도 저 천인체는 5급 미궁의 중핵. 거기에 빙의한 이모렐이면 저런 2급 언저리 이형종은 수백 마리가 몰려와도 어쩌지 못할 테지.
그러나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뼈저리게 다가온다.
이모렐이 자신을 두고 저 통로로 돌진해 한차례 훑기만 해도 편해질 텐데 그녀는 죽어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차라리 자신이 돌진할까도 해봤다. 그러면 이모렐이 쫓아오며 이형종을 다 해치우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이모렐은 그랬다간 곧장 자신을 끌어안고 지상으로 탈출하겠다는 협박을 했기에 그러지도 못했다.
어깨가 다 녹아 뼈가 드러나고 있는 기플라족의 상처를 상급 회복 물약으로 치료한 뒤 후방으로 빼내던 유르파에게 이모렐이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응?=
그 순간이었다.
쿵! 쿵쿵쿵쿵!!
쿠구궁! 쿠우웅—!!
전신에 잔뜩 금이 간 용아병의 앞 천장에서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주먹이 내려와 쾅쾅, 아래 있던 이형종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린다.
주먹이 땅에 내려꽂힐 때마다 주변 땅이 들썩거리는데 체구가 작은 기플라족은 조금씩 몸이 떠오를 정도의 진동.
그렇게 내려꽂히던 주먹은 이내 통로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차이점은 그렇게 꽂힌 바위 주먹은 사라지지 않고 통로를 성기게 막아버렸다는 것.
이형종이 바위 주먹의 감옥 너머에서 괴성을 지르며 벅벅, 바위를 긁어대고 있을 때 푸지직, 파자자작— 무언가 갈아버리고 찢어버리는 소리가 그 너머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잠시동안 통로를 메아리치던 그 소리는 통로를 가로막고 있던 바위 주먹이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며 멈추었고.
=……!=
찢어지고 터져서 곤죽이 되어버린 이형종 시체를 가르며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에 유르파의 표정이 환해졌다.
=자기!=
그녀뿐만 아니라 사력을 다해 버티던 기플라족과 아르주앙도 만세하듯 두 손을 번쩍 들며 그의 칭호를 연호한다.
“버티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이실리테, 노른. 반대쪽 통로로 가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려라.”
=네, 주인님.=
「알았어.」
“안느와 아영은 다친 사람들을 찾아서 치료하고 백려강은 마을을 돌면서 마을 사람들을 공터로 모아 다오.”
=응.=
=옙.=
=넷.=
“유르파, 공간 도약 준비는 아직 안 했겠지요.”
=아? 자기가 떠난 뒤에 바로 작업을 시작해서 30% 정도는 완료했는데…….=
뭔가 급하게 정리하려는 모양새에 유르파는 지하에서 모종의 사건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사람들을 갑자기 모으고 떠나려는 거라면…….
=……혹시 땅이 붕괴할 수 있는 거니?=
“환연의 부탁을 들어주는 땅의 상급 정령 말로는 지반이 붕괴할 가능성이 반반이라더군요. 그 때문에 미궁의 벽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며 올라온 터라 무너질 가능성이 조금 더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구나. 도약진은 금방 새로 그릴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아, 그럼 기플라족의 짐을 챙기는 거 도와줘야겠네. 난 저쪽 도와주러 갈게!=
“예.”
유르파는 혹시 몰라 만들어두었던 대량의 아공간 주머니와 가방을 꺼내 하나둘 마을 공터에 모이는 기플라족에게 달려갔다.
그들이 챙긴 짐은 비록 무게는 얼마 안 나가더라도 부피가 큰 것들이 다수.
급하게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아공간 주머니는 필수다.
여자친구들을 보낸 환인은 방랑자의 안식처로 가 집을 거두고 쿠에들의 등에 여자친구들의 짐을 올리며 환연에게 말했다.
“환연, 땅의 정령에게 부탁해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만들어달라고 해라.”
「음, 마을 안에 만드는 것보다 통로에 만드는 게 낫겠지? 동굴에 대현자가 무슨 짓을 해놨는지 모르니까.」
“그래.”
쿠궁, 드드드—
동쪽 통로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진동에 놀란 아르주앙과 기플라족 십수 명이 ‘또 적인가?!’ 하는 표정으로 후다닥 달려갔다가 동그래진 눈으로 되돌아온다.
그쪽을 잠깐 바라보던 환인은 이형종의 정리를 끝내고 돌아온 이실리테와 함께 마저 짐을 챙긴 뒤 유르파가 땅에 그려놓은 진법을 발로 훑어 지워버렸다.
나중에 이곳이 우연히 발견될 수도 있을 텐데 술법진의 흔적이 남아있어봤자 좋을 것이 없을 테니까.
“내려가지.”
마무리까지 확인하고 광장으로 내려간 환인은 초등학교 1~2학년들의 체험학습 광경처럼 어린아이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에 작게 실소를 흘렸다.
=안전하고 살기 좋은 데로 이사하는 거야?=
=저기 성제님이 돌아오셨잖아. 이제 가는 거 맞을 거야.=
=근데 진짜 하루도 안 돼서 돌아오셨네…….=
=나 아까 성제님 냄새 맡아봤는데 엄청나게 독했어. 막 독 냄새하고 산성 냄새하고 깊은 흙냄새랑…….=
=나도 성제님처럼 강해지고 싶다아.=
=나는 안느 님. 예쁘고 강하고 성술까지 쓰시잖아.=
두 번이나 대규모 습격을 받은 데다 부상자도 다수 발생했고 평생을 살아온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지만, 얼굴에는 구김살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은인님! 인원 확인이랑 짐 확인 전부 끝냈어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나가겠습니다. 이쪽으로.”
지체할 틈 없이 환연이 부른 빛 정령의 광량에 의지해 기플라족을 밖으로 이끈다.
=흐에엑. 너, 넓어어.=
=하늘이 너무 높아서 무서워…….=
=춥당…….=
=저 위에 박혀서 빛나는 거 뭐야?=
=별이라는 거래.=
지하의 마을에 있을 때는 괜찮던 기플라족은 오히려 밖으로 나오자 눈에 띄게 불안해 했다.
밤이 되면 그저 새까맣기만 하던 마을, 지하라서 사계절 전부 따스하고 포근한 마을과 달리 까마득할 만큼 높은 데다 대낮처럼 환한 은하수가 펼쳐진 하늘, 거기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서늘한 공기는 그들에게 대자연의 공포를 안겨다 주었던 것.
“계속 움직이겠습니다. 지하굴의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 이동할 예정이니 잘 따라와 주십시오.”
=네에에~!=
=넵!=
파아앗—
그들의 심적 평온을 위해 평온의 파동을 한차례 펼쳐준 환인은 초등학생 인솔 교사가 된 기분으로 뒤를 졸졸 따르는 기플라족을 데리고 한밤중의 대초원을 걷기 시작했다.
기플라족은 두려움을 떨쳐내며 그의 뒤를 따라 열심히 움직였다.
혼자였다면, 그들 종족만 있었다면 두려움에 떨었을 테지만 성제님과 영혼 기사님들이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
물론 평온의 파동 효과도 컸고 성제님의 녹색 신수와 여섯 날개의 아름다운 사람이 날아서 따라오며 머리 위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도 컸다.
그 후 1시간 동안 꾸준히 걷던 그들은 불안감을 주는 미약한 진동이 발밑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 불이다.=
=무슨 빛이지……?=
처음에는 그저 지평선과 이어진 밤하늘만 존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빛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드드드드— 약한 진동이 연이어 밀려오는 지금은 밤하늘의 어둠을 밀어낼 정도로 노란빛이 지평선 일부를 뒤덮고 있었다.
“노른! 이리 와라!”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노른의 등에 탄 환인은 직접 불빛이 올라오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불이 올라오는 방향은 자신들이 탈출한 베르헨 마을 방향이었다.
불이 날 이유는 전혀 없는데 대체 무슨 현상일까.
의문을 갖고 가까이 가던 환인은 갑자기 불어닥친 매캐한 냄새에 눈을 찌푸렸다.
「싫은 냄새!」
「독하네. 뭐가 타는 냄새야?」
좀 더 가까이 가자 지반이 반경 수십 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게 내려앉은 것과, 그런 지반 곳곳에서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원유가 흘러나오다 붕괴에서 불이 붙은듯한데…… 지하굴 인근에 원유도 매장되어있었나.”
환인의 지식으로 갑자기 저리 불이 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하지만 아주 없다고는 못한다.
땅속에 밀도 높은 금속이 매장되어있고 지반 붕괴에 휘말려 떨어지다 서로 부딪쳐 불똥이 튀고 그렇게 튄 불똥이 기름에 옮겨붙어 불이…….
‘너무 허황된 가설인데.’
아무리 자신이 금화를 줍고 다른 세상으로 트립되었다지만 기초 과학은 현실과 다를 바 없다.
아무튼, 환인은 바람의 막을 몸에 감은 노른을 타고 수십 킬로미터 범위로 내려앉은 지반 주위를 전체적으로 갈아엎었다.
불티가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지만, 50m를 날아서 불이 붙을 정도면 대평야의 대화재는 신의 뜻이라고 봐야지.
그러면서 영혼의 눈으로 주변을 면밀하게 확인했지만 수상쩍다거나 이상한 기운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청옥의 영혼 열넷을 불러 혹시 자신이 놓친 것이 있나 면밀히 살폈지만,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없다고 알려왔다.
「환인. 땅의 정령이랑 바람의 정령들도 이상한 거 못 찾았어.」
「이제 돌아가?」
“그래. 돌아가자.”
20분이나 써서 정령과 영혼 양쪽을 다뤄 주변을 살폈다.
이런데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허황된 가설이라 내린 게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행과 기플라족이 모여있는 곳으로 되돌아간 환인은 상황을 설명한 뒤 날이 밝을 때까지 여기서 쉰다고 알렸다.
=불이 났다면 좀 더 멀리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불이 번지지 않도록 조치는 해놓았다. 불을 끄는 것은 원유에 불이 붙은 이상 흙으로 뒤덮어도 불가능한 일이지.”
땅속의 기름이 모두 타버릴 때까지 저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여기에 임시 야영지를 꾸리고 공간 도약진을 설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음. 어디까지나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수긍한 안느는 환연을 불러 기플라족이 머물 장소를 다지러 갔고 이실리테와 백려강은 추위에 떠는 기플라족이 간단하게 마실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환인은 그사이 이장 대리인 쿠알을 불러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 검고 찐득한 액체요? 네, 그거 벽을 조심해서 안 파면 흘러나오고 그랬어요. 불이 붙으면 되게 위험한 거라서 마을 안으로 절대 못 가져오게 막기도 했구요. 저 불은 그게 불붙어서 나는 거였구나…….=
“처음부터 마을을 짓기에는 위험한 장소였군요.”
=네에…….=
서쪽 지평선을 돌아보는 쿠알의 표정은 말 그대로 나라 잃은 사람의 허망해하는 표정 그 자체였다.
마을을 버리고 떠나는 중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전 삶의 터전이 남아있는 것과 송두리째 사라진 것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니까.
쿠알을 돌려보낸 환인은 기플라족이 옹기종기 모여 모포를 몸에 감고 잠들거나 뜨거운 수프를 홀짝이며 마시는 것을 응시했다.
높은 하늘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듯 자다 깨길 반복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머리 끝까지 모포를 뒤집은 채 하늘을 피하는 모습도 보인다.
=자기~ 수프 좀 마시고 해~.=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기플라족을 바로 영산에 방생하는 것은 힘들겠군요.”
=응? 어응. 저래서야 환경에 짓눌려서 제 생활을 찾지 못할 수 있을 거 같긴 해.=
“…….”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영도의 시각을 확인하고 대성녀에게 연락을 넣었다.
기플라족이 이러이러한 상황에 처했으니 바로 영산 한 귀퉁이에 이들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주기보다, 영도에 이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준 뒤 바깥에 어느 정도 적응한 다음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200명이라지만 단체 생활에 익숙하고 몸집도 아담하니 어려울 것 없는 일이군. 즉시 그들이 머물 기숙사를 준비해놓겠소. 그보다 그대, 몸은 괜찮소?]
“예.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심핵력과 영기도 2배가량 증가했고 파편인도 일부 녹았으니까요. 힘은 이전에 없었을 만큼 충만합니다.”
[벌써 5급 미궁의 심핵력을 셋이나 모았으니……. 그런데 왜인지 소녀에게는 메리아놀과 싸우겠다는 것처럼 들리오만?]
“싸우면 안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물론 영도에 피해는 가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는 것이오? 성제가 메리아놀과 척을 져 싸워야 한다면 그 선봉에는 소녀와 영도가 있을 거요.]
단호한 표정으로 그리 말한 대성녀는 안심하라는 듯이 어머니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성제. 영도와 아드지의 모두는 성제가 그간 보여준 활약에 모두 그대를 믿고 흠모하고 있소. 차기 대성녀 후보인 샤스라의 존재가 희미할 정도로 말이오. 그러니 성제는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말기를 부탁드리겠소.]
“……예.”
바짝 메마른 마음이 촉촉하게 변해버릴 만큼 그녀의 따스한 감정이 전해져온다.
오히려 그랬기에 환인은 대성녀, 닌실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주먹을 꾹 쥐었다.
성제로 알려진 자신을 공격하거나 적대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영도와도 척을 지거나 벽을 세우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집단에게 예의와 체면을 차릴 필요는 없지.’
핏— 통신 수정구가 종료되자마자 따스함을 품고 있던 환인의 눈빛이 살벌하게 어두워졌다.
가뜩이나 재수 없고 신경질 나는 일이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세워지고 있어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쯤에 어쭙잖은 착한 사람 탈은 벗어야겠군.’
암살 사건에 대한 답을 할 시간은 줄 만큼 주었다.
같이 갈 사람도 이제 정해졌고 이쪽의 신분도, 지위도, 뒤를 받쳐줄 무력 집단도 모두 모인 상태.
저쪽에도 사도라는 비대칭 전력이 있지만, 이제 자신도 거기에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명분도 여기에 있으며 영도의 대성녀도 자신을 지지한다 선언했으니…….
처음부터 메리아놀에서는 큰 사건을 일으킬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결단은 빨랐다.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은 하나뿐.
=도령~.=
“안느인가. 마침 잘 왔다.”
=응?=
기플라족의 잠자리를 봐주고 돌아온 안느는 그녀로서 처음 보는 살벌한 환인의 표정에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뭐지, 방금 누구랑 통신했기에 도령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안느는 환인이 던진 질문에 표정이 크게 굳었다.
“만약 내가 메리아놀과 척을 진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나는 웹소설 글쟁이인데 왜 포샵을 배우고 있는거지...
정체성의 혼란이 온다아앙
[작품 설정]
불타는 하늘
화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