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77화 (677/813)

677 지하굴 미궁

여자들은 환인이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중핵의 죽음을 확인하고 부산물을 부산스럽게 챙기기 시작했다.

독에 주의해서 여자 허리 굵기만 한, 작살처럼 생긴데다 곳곳에 역으로 난 가시가 있는 부속지를 챙기고 그나마 멀쩡한 복갑과 이실리테의 검폭에 거의 다 박살 나다시피 한 등갑도 어느 정도 큰 것들 위주로 모은다.

그렇다 해도 한 마리 분량으로 따지면 40%도 안 된다. 30%나 될까.

아영이 멀쩡한 부분이 드문 크립틱 호러 센티피드를 보며 아까워죽겠다는 듯이 언니들을 나무랐다.

=언니들은 다른 파티 가면 진창 욕먹을 거예요.=

=아하하. 그래도 미궁 형태가 중핵한테 딱 맞춘 것 같은 장소잖아. 이럴 땐 안전을 위해서라도 화력으로 빨리 해치우는 게…….=

=오빤 정령을 강령시켜준 거 말고 아무것도 안 하신 거 알고 있죠? 저도 축복이랑 방호 빼곤 없고요.=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든든하게 중장갑을 차려입은 전사나 투사가 성술사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고 적을 붙들어 맨다.

엽사가 다종다양한 지식, 그리고 미궁 정찰과 조사로 알아낸 중핵의 약점을 파악해내면 공격력에 모든 걸 쏟아부은 파티원이 약점만 신속하게 공략해서 적에게도, 파티에게도 피해가 적게 정리하는 게 기본인 것.

=그런데 언니들이랑 벨하고 노른하고 환연은 힘자랑하는 것처럼 막 필살기를 때려 넣고…… 그러는 와중에 연계 협력은 뛰어나고…….=

=…….=

=…….=

명백히 오버파워, 위력이 넘친 상황이라는 걸 지적하자 안느와 백려강이 조금 민망해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정령으로 키틴질 껍질을 세척하는 환연에게 자기 덩치만 한 복갑 두 장을 날라다 준 백려강이 독샘과 산성샘을 조심해서 채취하는 아영에게 물었다.

=있잖아, 빠르고 안전하게 해치우면 좋은 거 아니야…?=

=벨 너는 미궁 공략 초보자니까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몇 번 고등급자들로 파티 이뤄본 안느 언니는 그러면 안 되죠. 아무리 오빠가 부자라도 그렇지.=

아영은 땀을 삐질 흘리면서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안느를 흘겨보았다.

=중핵은 심핵을 제외하고 미궁 공략의 수입 중 20%를 차지하는 게 중핵이야. 5~6급 미궁이라면 공략에 개월 단위로 걸리기에 일반 이형종 부산물과 위상석이 막대하게 나오는데 거기서 20%,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가지?=

=아……. 지금처럼 단기간에 미궁을 돌파하려면…….=

=수익의 99.9%나 다름없어. 특히 이 크립틱 호러 센티피드는 미터당 거의 15금화, 시기 잘 맞으면 20 금화에 팔려. 그만큼 전사 엽사 술사 가리지 않고 전부 좋아하는 거로 꽉 채워진 괴물이란 말이야.=

백려강은 그녀의 설명에 잠깐 계산해봤다. 그러니까 대충 머리부터 꼬리까지 70~80m니까…….

=1600금화!=

=여기서 중핵의 위상석이나 특수품은 제외한 거야. 그런데 이런 꼴이 됐으니…….=

마치 두툼한 게 다리를 먹기 좋게 손질한 것처럼 머리부터 꼬리까지 뚜껑이 따인 센티피드. 이실리테의 필살기, 검폭의 흔적이다.

복갑도 멀쩡하지 않다. 이실리테의 검섬이 세로로 통로를 가르며 나아간 탓에 숨구멍이 붙어있는 옆구리와 부속지가 잔뜩 베여나간 것이다.

백려강의 벽력 화살(5초간 위상력을 집중한 화살)이 속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한편 내장을 전기로 한차례 싹 훑어버려 독샘과 산성샘도 변질이 일어났다.

환연의 상급 땅 정령이 돌주먹으로 센티피드를 두들겨 엉망진창이고 노른의 녹광검과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에 부속지도 너덜너덜하고…….

피독 장갑을 끼고 내장 무더기를 헤집던 아영은 더 이상 건질 독이 없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면서 채취한 독액을 시약병에 조심스레 옮겨 담기 시작했다.

=벨, 기대해도 좋아. 이걸로 사람은 1초 만에 죽어 나자빠지는 독화살을 만들어줄 테니까. 그런데 이 양으로는 20발이나 만들 수 있을까 모르겠네.=

태연하게 사람 잡는 독화살을 언급하는 그녀의 태도에 백려강과 안느가 어색하게 웃는다.

=크흠! 그런데 아영아. 이거 7급이 맞는 거 같아? 뭔가 좀 약한 느낌이던데.=

=약했다고요? 언니 이거랑 밖에서 싸워보신 적 있어요?=

=아니 다른 7급에 비하면 뭔가…… 내 성장이랑 너희들 강함을 생각해봐도 너무 간단했단 느낌이어서.=

덩치나 그 속도나 힘을 생각하면 중핵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름에 괜히 호러가 들어간 게 아니다. 그 교활함으로 정말 상소리가 나올 정도로 공략대를 괴롭히는데 이놈은 그냥 대놓고 돌진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다른 이형종과 싸울 때 멀리서 독 숨결이나 독가시, 독침을 날리거나 곤충의 키틴질 껍질에 독액을 묻혀 돌진시키기만 해도 성가셔서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였을 텐데.

아영도 꽁시랑거리는 것을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아직 언니들 진심이 어느 정돈지 모르고 이거랑 직접 부딪힌 것도 아니라서요. 그런데 안느 언니가 잘못 느꼈을 리는 없으니까…… 혹시 이 미궁은 6급 언저리인 게 아닐까요?=

=흠. 등급 낮은 미궁이 크립틱 호러 센티피드를 중핵화 시키면서 약체화했을 수 있단 거네. 실제로도 나오는 이형종이 죄다 5급 정도였으니까.=

=그런 거면 실질적으로 6급일 테니까…… 그렇게 고가로 분류되진 않겠네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아영은 쌓여있는 내장 무더기에 강력한 정화를 걸었다

7급 성술사의 신성한 빛이 그녀의 두 손에서 한차례 강하게 발광하고는 내장 무더기로 옮겨간다.

빛이 사그라질수록 내장 무더기에서 올라오던 지독한 독향에 독이 썩는듯한 악취가 사라져가니 백려강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장은 버리는 거 아니야? 정화를 왜 거는 거야?=

=남부 벨티칼식 센티피드 내장 젓갈은 어떤 술 하고도 잘 어울리거든. 그런데 이건 중핵의 내장이잖아? 이실리테 언니 요리 솜씨면 틀림없이 어마어마한 게 나올 거야.=

술안주라는 부분에 안느의 귀가 쫑긋해지고 복갑을 씻던 환연의 눈빛도 초롱초롱해진다.

=진짜? 어떤 술 하고도 잘 어울린다고?=

「고기 요리하고 생선 요리는 맛 성분 때문에 어울리는 술이 확연하게 갈리는데 어떻게 그래?」

=먹어보면 알 거예요. 엄청 맛있게 하는 레시피도 저한테 있으니까요!=

아영이 으흐흐 웃으며 자기 보존 주머니에 슈슈슉, 내장의 깨끗한 부분만 담아나가니 주정뱅이의 기질이 있는 두 여자도 덩달아 으흐흐 웃는다.

독분비샘, 중장, 말피기관, 심장, 부속샘, 저장낭, 대악샘.

=……!=

반대로 백려강은 지네의 내장 젓갈이라는 부분에서 표정이 꽁꽁 얼었다.

호족 영애 출신의 가치관이 아직 남은 백려강에게 지네 내장 젓갈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종류의 음식이었던 것.

“……글쎄…… 이러한 현상의 원리…… 알면 그건 인간이 아니…… 되겠…….”

=…미궁에서 발견되는 상자… 그 속에 담긴 물건…….=

얼어있던 것도 잠시. 백려강은 저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다가오는 환인과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

“…그건 미궁 안에서 죽… 자들의 소지품이 ……부 변질 된 것이라는 설… 크다는 듯하다.”

=주인님은 미궁이 살아있는 생물 같다… …셨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의 물건을 보고 비슷한 걸 만들어내는 걸……. 그렇다면 심핵은 혹시 신님의 뜻이 깃들어있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글쎄. 사람의 욕망과 바램을 이뤄준다는 것은 사람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테니 사람을 잡아먹고 그 지식을 습득하여 신비로운 에너지로 그 소원을 이뤄준다고 해도 설명이 되겠지.”

가까이 다가올수록 대화가 또렷하게 들린다.

백려강에게 지네 내장 젓갈이나 술안주 이야기보단 저런 이야기 쪽이 훨씬 호기심 가는 부분이라 두 명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이실 언니. 특수품 찾으셨어요?=

“그래. 중핵의 꽁무니 속에 있더군.”

대답해주는 환인의 손에는 구두 상자와 비슷한 크기의 키틴질 상자가 들려있었다.

대형 보석함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검붉은 색의 반투명한 소재는 반질거리는 광택이 더해져 백려강의 눈에도 무척이나 고가의 상자로 보였다.

그걸 호기심에 살펴보던 백려강은 이실리테에게 눈을 돌렸다.

=방금 대화하신 건 아이템이 미궁에서 생겨나는 원리 이야기였나요?=

=네. 미궁에서 가끔 발견되는 보물상자와 중핵이 주는 특수품, 심핵을 부수면 얻을 수 있는 보상과 대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서요.=

무작위의 아이템이 나온다면 그건 왠지 모르게 이해할 수 있다. 우연이 겹쳐져 미궁이 만들어놓거나 습득한 물건…… 이라는 식으로 해석이 되니까.

=하지만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식은 아무래도 신의 뜻이 개입되어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했는데. 주인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쪽이 더 이치에 맞는 것 같아요.=

=철학자들이 굉장히 관심 있어 할법한 주제 같아요.=

=그래서 조금 어렵네요.=

후후 웃은 이실리테는 내장을 챙기는 아영을 보곤 눈썹을 살짝 들었다.

=아영, 혹시 내장 젓갈 만들려고 챙기는 거야?=

=엇. 이실리테 언니도 아세요?=

=하녀원에서는 각국의 특산 요리도 가르쳐줘서 기억하고 있어요. 레시피는 모르지만요.=

=그 레시피는 제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전 음식 솜씨가 별로라서요. 언니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네 내장 젓갈? 듣기만 해도 괴식怪食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름에 환인은 아주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입이 아니라 주둥이라고 불렸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취향과 호불호마저도 생겨나는 건가.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할 일을 끝마친걸 확인하고 그녀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중핵의 몸에서 나온 것은 이거다.”

보석처럼 반투명한 키틴질 상자를 열어서 꺼낸 것은 누가 봐도 여성용 고급 의복처럼 보이는 오픈 숄더 타입의 검은색 비단옷이었다.

“꽃 모양 리본 머리핀도 들어있더군.”

=위상력이 느껴지는 걸 보면 일상용 마도구네요.=

“그래. 감정은 돌아나가서 유르파에게 부탁하기로 하고, 사체 부산물 정리는 끝났나.”

=옙. 멀쩡한 복각은 몇 없지만, 장비로 가공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니랑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이건 7급이 아니라 6급 같아요.=

그런 쪽으로 관심은 없었기에 환인은 환연이 전부 깨끗하게 세척해놓은 부속지와 키틴질 껍질을 전부 아스펜드에 수납했다.

70미터짜리 괴물이 멀쩡했다면 전부 수납하는 건 무리였겠지만 남은건 30% 가량. 내장까지 제외하면 소실된 부위는 80%나 된다.

1장에 20kg은 될듯한 복갑 23장만 아스펜드에 수납, 다리나 더듬이, 옆구리 호흡기를 보호하는 가시 같은 부속지는 수송용 아공간 가방에 담으니 무게가 대폭 늘었다.

“노른, 신수로 변해다오.”

「짐 옮기는 거 필요해?」

“그래.”

여기까지 오며 조금씩 챙긴 부산물의 무게가 있는데 중핵의 부산물까지 챙기니 일행의 허용 용량을 넘어버렸다.

수납공간이야 충분하지만 무게 감소 효과를 적용해도 모든 짐을 다 합치면 600kg이 넘어가는 상황. 다섯 명이 나눠 든다 해도 1인당 120kg을 책임져야 하는 셈이다.

환인의 요청으로 신수 모습이 된 노른의 등에 짐을 실은 일행은 중핵을 갈무리하느라 지체한 시간을 벌충할 것처럼 빠른 속도로 복도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궁이 벌써 중핵을 내보냈다는 건 우리의 이동에 위협을 느꼈다는 뜻이겠지. 미궁이 어떤 수단을 쓸지 모르니 이제부터 최대한 이동에 집중한다.”

=도령. 위상석하고 부산물도 안 챙길 거야?=

“그래. 나타나는 이형종은 이제부터 내가 전부 맡을 테니 너희는 이동에 집중해라.”

그렇게 선언하며 선두로 나서는 환인의 행동에 여자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가 저렇게 말하다니, 어떤 전투 방식을 보여줄지 기대되어서다.

…끼기기기…….

끄으이익, 치이이이…….

끼아아아아아…….

그리고 벌어진 현상에 뒤따르는 여자들은 흠칫했고 환인의 몸에 붙어있던 환연은 질색하며 노른의 머리 위로 도망쳤다.

「야잇! 그거 뭐야!?」

“……?”

「뭔 말인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 하지 말고! 네 몸 주변에 떠오른 거 다 뭐냐고!」

“지금까지 죽인 이형종의 혼이다. 그런데 이게 보이나.”

=도, 도령은 여태까지 그걸 보고 있었던 거야……?=

그의 몸 주변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절지류 이형종의 영혼. 그것들이 맴돌며 귀곡성을 질러대니 오한은 물론이고 강심장이던 안느마저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환인은 그런 그녀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왼팔의 영혼 구슬 보관고에서 매번 빼 쓰기 귀찮을 듯해 영혼 구슬을 꺼내 장전을 준비해놓은 건데 이게 그렇게 학을 뗄 일인가.

「환인 전방 472m 지점에 이형종 일곱 마리야.」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해 물어보려던 그는 환연의 경고에 영혼 일곱을 영혼 화살로 가공, 얼마 지나지 않아 영혼의 눈으로 보이는 통로 저편의 희끄무레한 이형종을 향해 곧장 발사했다.

끼기기기긱—!

끼리리릭—!!

츠쓰스스슷— 따다다다닥—!!

영혼 화살에 맞은 이형종이 그 즉시 추락하더니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뒤틀다 절명한다.

하지만 여자들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히익…….=

=흐에엑…!=

=읏…….=

영혼이 화살처럼 주우욱 늘어져서는 날아가 이형종을 꿰뚫는 장면.

여자들은 그걸 보곤 자신이 화살을 맞은 양 움찔거리면서 신음을 흘렸다.

“…….”

조금만 상태가 심각해지면 달리는데도 지장이 생길 정도의 모습은 무시무시한 것을 본 것처럼 움츠러드는 느낌이다.

환인은 드물게 그녀들의 심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의 눈에는 그저 희끄무레한 회백색의 화살이 날아가 이형종을 꿰뚫는 장면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일행을 멈춰 세워 이유를 묻고 상황을 파악할 시간은 없다.

중핵을 죽인 마당이니 미궁이 모아둔 에너지로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최대한 빨리 심핵 방에 도달해 심핵을 무력화하는 것이 먼저다.

여자들이 환인의 영혼 활용에 적응하고 환인도 영혼 화살 발사, 죽어서 망가진 듯한 영혼의 회수, 재가공, 영혼 화살 발사의 사이클에 익숙해지자 이동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근접 전투직인 이실리테와 안느는 처음부터 자동차의 일반 도로 안전 운행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고 백려강과 아영은 부단한 훈련과 신체 강화로 일반인의 전력 질주 속도로 몇 시간이나 달릴 수 있다.

환인도 그리모암의 강력 덕분에 이실리테와 안느처럼 신체가 대폭 강화된 상태.

여기에 출몰하는 이형종을 환인이 모두 즉살해버리니 일행은 1시간이 채 되기 전에 심핵의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형종이 잔뜩 모여있는 건 아닐까 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네.=

=오면서 오빠가 잡은 이형종 숫자만 77마리였으니까요.=

=하지만 저쪽하고 저쪽에 통로가 있잖아. 저쪽 이형종은 안 잡았으니까 안느 언니가 말씀하신 것도 이해가 돼.=

=그것들 전부 우리가 있던 통로로 몰려온 거였겠지.=

아영의 이야기에 여자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쿵, 두쿵, 두쿵—

대신 가로세로 높이 20m 정도 되는 정사각형의 방 정중앙, 황금 구체를 속에 품은 거대한 수정이 회색빛 파동을 심장 박동처럼 내뿜고 있다.

그 파동은 심장이 두려움에 쿵덕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병력이 남아있다면 심핵이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지.

=미궁이 무서워하는 거 같은데 진짜 살아있나 봐요…….=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의 심핵은 분노에 물든 것처럼 맥박치며 빛을 뿌렸는데, 지하굴 미궁의 심핵은 두려워하는 것처럼 박동하고 있다.

여자들은 성큼성큼 수정 기둥을 향해 걸어가는 환인의 뒷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형종을 물리치던 광경, 제정신인 사람이 보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주인님. 저희는 여기 대기할까요?=

“그래. 만약 내가 다시 전이에 휘말려 사라진다면 유르파와 함께 영도로 돌아가서 날 기다려라.”

=아잇, 불길한 소리 하지 마! 그거 도령네 세계에서는 깃발이라고 한다면서!=

“깃발이 아니라 플래그.”

=아무튼! 우리 애간장 녹일 생각 아니면 조심해, 응? 대성녀님도 말씀하셨었잖아.=

“걱정하지 마라.”

안느의 부탁에 환인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가까이 오지 말란 것처럼 두킁, 두쿵거리는 심핵을 향해 다가가며 심핵을 살폈다.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은 5급이었다. 심핵을 보호하는 수정도 거대하긴 했지만, 눈앞의 수정만큼은 아니다.

20m 높이 천장이 무색할 만치 얼음 기둥처럼 솟아오른 10m짜리 수정 기둥. 심핵인 황금색 구체도 주먹만큼이나 크다.

‘7급은 아닐 테고. 5급과 6급의 차이가 이 정도인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공명하듯 가슴에 새겨진 문양도 뜨거워진다. 이 감각에 환인은 오히려 안심했다.

‘공명 현상은 심핵이 내 영기를 흡수한 것과 관련 없는 거였군.’

거인숲 미궁의 심핵을 부수기 전에도 문양이 웅웅거렸다. 여기도 그랬고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의 심핵도 크게 공명했었다.

단순히 자신이 몸에 담은 심핵력과 미궁의 심핵이 공명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거인숲 미궁의 심핵은 황금빛 운무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건 산란못과 잊혀진 옛 도시 미궁처럼 회색 운무다.

이 차이는 또 뭘까.

씨, 씨이, 씨이이이이—

의문 한 가지를 해결했지만 다른 의문 한 가지가 생겨 미간을 약간 찌푸렸던 환인은 무언가 가늘고 기다란 게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가 나며 수정을 운무처럼 휘감은 회색빛이 회전하려 하는 기색에 눈을 가늘게 떴다.

망설이지 않고 제2 천공기사단의 술법 기사들이 펼치던 집흡방출식, 심핵의 에너지를 뽑아 무력화시키는 술법을 펼친다.

……! ……!!

회전하려는 기미가 멈추는 대신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안간힘을 쓰려는 느낌이 심핵에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저항이 제법 완강하다. 이래서야 흑마술사가 했던 것을 저 심핵에 시연해보려는 건 무리다.

이형종을 직접 조종하는 타입의 미궁 같은데 자칫 자신이 조종당하면 대참사가 벌어질 테니까.

‘방금 회전도 그럴 시도였다면…… 어쩔 수 없군. 미궁 장악 실험은 2급 언저리의 작은 미궁을 찾아서 할 수밖에.’

환인은 집흡방출식을 중단했다.

집흡방출식으로 심핵의 에너지를 갈취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렇게 흡수하는 건 가슴의 심핵 문양 에너지의 최대치를 늘려주지 않는다.

환인은 씩씩거리며 에너지를 지키려는 듯한 심핵을 응시하다 번개같이 광명창……이 아닌 마도기-천칭, 파르히스트에서 얻었던 전 속성 친화(약)의 기능이 있는 묵빛 롱 스틱을 꺼내 회전의 묘리를 살려 수정 기둥을 찍었다.

콰직.

6~7급 근접 직업의 힘이 깃든 지팡이가 수정 기둥과 심핵을 깔끔하게 꿰뚫는다.

그와 함께 심장 박동처럼 두쿵거리는 파동이 씻은 듯이 멈추고 붉은빛으로 방을 가득 채운 경락 또한 삽시간에 빛을 잃고 시커메졌다.

‘난 지구로 귀환하고 싶다. 내 여자친구들과 함께!’

그러니…… 힘을 내놔라!

강한 염원이 깃든 일격. 몸체에 구멍이 난 황금색 심핵은 그 염원에 응하듯이 천천히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환인의 몸으로 스며들어 간다.

환인은 빛가루가 몸 안으로 흘러들어올수록 가슴의 문양이 시원한 느낌으로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거인숲 미궁의 심핵은 빛을 터트리며 소멸했는데…….’

단순히 흡수하는 방식의 차이인가.

힐끔, 천칭을 내려다보니 역시나 묵빛의 스틱에도 황금빛 가루가 조금씩 흘러 들어가고 있다.

다음번에는 방벽으로 부숴볼까 아니면 광명창으로 한 번 더 부셔볼까.

여자친구들의 무기를 가져와 부수는데 써도 나쁠 것 같지 않다.

그렇게 이것저것을 생각하며 영혼의 눈으로 주위 변화를 예리하게 살피지만, 전이 현상이나 천원으로 의식이 끌려가려는 징조 같은 것은 없다.

파삭—

2/3 가까이 빛가루로 변했던 심핵이 결합 구조가 무너진 것처럼 한순간 전부 가루로 변하더니 일제히 환인의 가슴 쪽으로 날아든다.

동시에 가슴에서 느껴지던 은은한 통증이 작열통처럼 확 타올랐다.

마치 생살에 불로 달군 인두를 지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

몇 초 지속되지 않은 고통이었지만 너무 강렬했던 탓에 환각처럼 통증이 남아 은은하게 아프다.

코트 단추와 셔츠 단추를 풀고 가슴을 내려다본 환인은 문양이 완전한 나무 한 그루의 형상으로 변했음을 알아차렸다.

처음 문양이 새겨졌을 때에는 뿌리만 있어 이게 뭐였는지 알지 못했다.

두 번째는 나무 그루터기였으며, 세 번째는 나무가 본격적으로 자라듯 줄기가 뻗어 나가며 나무 기둥도 굵어졌다.

그리고 문양은 이제 온전한 나무가 되었다.

다만 언제나 황금빛을 뿜어내던 색은 은색이 되어 얼핏 보면 피부색과 그다지 분간이 안 간다.

환인은 이러한 변화가 무얼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릇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빈 그릇에 에너지를 채울 차례겠지.

영혼 구슬 하나를 꺼낸 환인은 거기에 심핵력을 담아보았다.

‘심핵력 총량은…… 이전의 2.3배인가.’

거인숲 미궁의 심핵을 부수며 2배가량 증가했었는데 거기서 또 2.3배가량 늘었다.

당연히 영기도 늘었는데 이러한 변화 때문일까. 몸 안 곳곳에 박혀있던 파편인도 약간 더 녹아 사라졌다.

몸에 거치적거릴 만큼 걸려있던 쇠사슬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듯한 홀가분함.

“…….”

이정도면 혼령주를 연달아 23번은 펼칠 수 있을 정도인가.

고개를 든 환인은 메리아놀을 잠깐 생각하다가 전전긍긍하듯 안절부절못하는 여자친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이실리테와 웃으며 짧게 대화를 주고 받는 안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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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챗gpt한테 webui 상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당!!!

근데 챗gpt한테 프롬프트 짜달라고 하는거 진짜 굉장하네요... 포토샵까지 동원하니까 어우;;

저번편에 중핵의 습격 장면 작게 삽화 들어갔으니까 구경해보세요!

챗gpt + webui 합작에 오가닉을 살짝? 곁들인? 삽화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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