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 지하굴 미궁
점심을 먹고 30분 휴식한 일행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출발 직후 환인이 입을 연다.
“이곳은 나선 형태의 외길에 가깝게 형성된 미궁이라 서둘러 가지 않는 이상 하루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전투랑 밥 먹는 시간도 다 포함된 거야?=
“지금 속도로 걷기만 했을 때 하루라는 이야기지. 식사와 휴식, 전투를 다 하면 넉넉잡아 이틀은 걸린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환인과 안느의 대화에 아영은 뺨을 감싸 쥐며 하으, 앓는 소리를 냈다.
내심 편치 않은 기색이 느껴지는 소리에 백려강이 그녀의 팔에 손을 얹으며 묻는다.
=괜찮아? 아까도 어딘가 불편해 보였는데.=
=……응.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지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한다.
이제 와서 폐소 공포증이라니, 어떻게 오빠 앞에서 밝힐 수 있을까.
그녀도 제법 당혹스러운 상태였다.
차기 송곳니이자 암살자의 전투 소양으로 7급 성술사가 될 때까지 미궁을 제법 다녔다.
여기보다 어둡고 이곳보다 좁은 곳도 다녀보았고 저 앞에 안느 언니에게 박살 나는 징그러운 메뚜기 이형종보다 더 끔찍한 이형종과도 격투기로 때려잡은 경험도 있다.
이정도니까 미궁 공략에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여기서 폐소 공포를 느끼다니.
‘오빠한테 단점을 보여줄 수 있어.’
아영은 마음을 다잡고 주먹을 꾹 쥐었다.
자신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짓은 할 수 없다. 여자는 배짱, 정신줄을 꽉 붙잡으면 견딜 수 있을 거야.
사실 현재 아영의 상태는 복합적인 요소가 뒤섞인 결과였다.
퀴퀴하게 묵은 공기. 보기에도 숨이 턱 막힐듯한 협소한 공간. 빛 한 점 없이 어두워 온통 검은색과 회색으로 보이는 색감에 인간의 혐오를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이형종.
여기에 사람의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헤집는 정신 침해까지.
아무리 7급 성술사라 해도 정신 침해에 한 번 말리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피폐해진다.
백려강은 그 사실을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서 정신 침해의 무서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영의 상태 변화를 놓치지 않았고, 그녀가 정신 침해에 시달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백려강은 곧장 그녀를 잡아끌고 가서 환인에게 상담을 신청했다.
=아니 나 진짜 괜찮은데…!=
=그거 괜찮은 거 아니야. 몸과 마음이 안 괜찮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머리가 무시하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돼. 나도 겪어봐서 알아.=
겪어봐서 심각한 상태라는데 무슨 말을 할까.
백려강에게 붙잡혀 억지로 환인에게 끌려간 아영은 70%의 울상과 25%의 억울함, 5%의 원망을 표정으로 드러내며 입술이 얇아질 정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환인의 질문에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어떤지, 몸 상태의 변화와 현재 심정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해봐라.”
=그게…….=
안느도 환인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환인의 예리한 시선에서 속내를 숨기기란 불가능.
아영은 반쯤 체념한 얼굴로 처음부터 자신의 심정 변화와 상태를 전부 까발렸다.
“…….”
상담을 받은 환인은 먼저 아영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백려강의 머리를 다독여 칭찬했다.
“잘 봐주었다. 네가 아영을 구한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아영.”
=넹…….=
“사소한 문제를 방치했다가 더 큰 문제로 돌려받은 경험 정도는 너에게도 있겠지.”
=…….=
“고작 이틀 정도니까. 이틀만 참으면 미궁 공략이 끝날 테니까. ……이후에 이것보다 더 심한 미궁을 공략해야 할 때가 오면 그때도 그렇게 생각하며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아니요…….=
미궁의 규모가 커지면 공략에도 당연히 시간이 걸린다.
여기 지하굴 미궁의 구조가 단조로워서 공략 예정 시일이 2일로 잡힌 거지, 보통 5급에 내부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궁이라면 정신 침해와 환경 적응에서부터 지도와 이형종 항목 작성에 공략 준비, 맞춤 대응 훈련까지 최소 한 달 이상을 잡아야 한다.
한 달 동안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아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궁 공략에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결함 요소가 있는 동료보다, 능력은 좀 떨어지더라도 결함이 없는 동료를 선호한다.
‘나… 방출되는 거야?’
그럴 리는 없겠지. 오빠의 합리적인 사고라면 유르파 언니 호위 역이나 후방 대기로 보낼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건 싫다. 현장에서 치유사 역할로 파티에 기여하고 싶은데, 하얀 늑대들의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오빠의 눈 밖에 벗어나긴 싫은데…….
그때 아영의 머리 위에 환인의 큰 손이 턱 하고 올라갔다.
이어 은은한 회백색 빛이 그녀의 자주색 머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
빛이 몸을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불안과 걱정이 차츰차츰 사라져간다. 흡사 맑고 차가운 성수에 몸을 깨끗이 씻는 기분.
성스러운 빛의 세례를 받는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아영이 기도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은 채 작은 한숨을 연신 흘린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환인은 낱낱이 살피며 그녀의 정신이 한껏 이완되는 타이밍에 맞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람의 정신은 매우 탄력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문제를 외면하고 다른데 집중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실상을 보면 문제를 파묻어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겉만 멀쩡하게 만드는 식.
정신과 치료라는 것도 흙을 좀 더 두껍게 덮어 티가 안 나게 하는 것일 뿐,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재발하는 것이 정신과 마음의 상처다.
자려고 누웠다가 십몇 년 전의 흑역사를 떠올리고 이불을 뻥뻥 차는 것도 일종의 정신적인 상처.
“문제를 인지했다면 그 수준이 사소할수록 대응이나 치료는 쉽다. 문제가 되는 상황을 아무것도 아닌 상황으로 바꾸고 인식을 개변하면 정신적인 고통은 사라지니까.”
=주인님, 사람이 원한에 복수하는 것도 그 연장선인가요?=
그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평온의 파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하는 이실리테의 질문에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해자는 발 뻗고 못 자도 피해자는 발 뻗고 편히 잔다는 말, 절반은 맞는 말이다.
피해자는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기억에 정신적으로 고통받는다.
상처가 헤집어져서 피가 나고, 그 피가 굳어 딱지가 앉았다가, 그 위를 다시 헤집어져 피가 나고 피딱지가 굳어 아물고. 수도 없이 반복해서 그 상처가 두터운 굳은살과 흉터로 뒤덮여 더는 피가 안 날 때까지.
육체의 상처도 그렇게 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그보다 더욱 섬세하다는 정신은 그리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인가.
그렇기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보복을 떠올린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주어 몸과 마음에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정신에 이롭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말이다.
사적 보복으로 죄는 더해질지 몰라도, 최소한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헤집어 피가 나는 일은 더이상 없을 테니까.
평온의 파동을 멈춘 환인이 평온해진 아영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기분이 어떤가.”
=어, 무척 편하고 가벼워졌어요…….=
“협소하고 어둡고 음침하고 기분 나쁜 공간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
=넹. 이런 걸 왜 무서워했는지 이해가 안 갈 만큼요.=
“그게 빠른 조치의 중요성이다. 약간 불편함이 느껴지는 기분을 방치해서 호흡 곤란이 올 지경에 움직임이 굼떠지는 상태로 악화시키면 평온의 파동도 어찌하지 못한다. 일시적인 치료밖에 되지 않지.”
아영은 환인이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를 눈치채고 허리를 90도 각도로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몸 상태가 이상해지면 숨기지 않을게요!=
“그래. 그거면 됐다.”
그녀의 머리를 한 번 더 다독여준 환인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일행도 이동을 개시한다.
아영은 안도감에 홋, 작게 숨을 내쉬었다가 옆에서 포근하게 웃음 짓는 백려강이 왠지 얄밉고 예뻐서 그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환연은 그의 어깨에서 아영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하곤 그에게 물었다.
「환인, 평온의 파동을 넓게 안 쓴 건 미궁 때문이지? 놈이 네 영기를 흡수해서 힘을 쌓을까 봐.」
“그래.”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의 심핵. 그것은 자신이 펼쳤던 평온의 파동에서 에너지를 흡수해 그 변화를 일으켰었다. 이곳의 심핵도 같은 짓을 하지 않는단 보장이 없다.
「그럼 지금까지 평온의 파동을 쓰며 지나온 미궁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내 알 바 아니…….”
그 순간 떠오른 한 가지 사실에 환인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응? 도령, 왜?=
“아니…… 잠시.”
그러고 보면 그때 폭주하려던 심핵을 진정시켰을 때 심핵과 공명하던 영기와 심핵력의 성질이 그리모암의 강력을 얻고 다루게 된 위상력을 삼키며 약간 변했었다.
‘변화한 성질이…… 파편인과 비슷한가.’
변화는 미미했고 승령천제날 벌어졌던 일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자신이 잊혀진 옛 도시 미궁에서 뿌린 평온의 파동 에너지를 삼킨 미궁 심핵이 다른 위상력과 섞어 강한 힘을 내려 했었다.
미궁이 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의 심핵과 공명하며 보았던 천원과 하늘의 눈의 변화.
그 후 승령천제 때 하늘에 출현했던 눈과 흡사한 구름의 형상.
이어진 파편인의 현상. 그리고 사도 광상녀가 말한 시련의 의미.
닌실과 아드네빌라 같은 신수의 존재.
광상녀가 말해준 신수의 권리와 의무.
광상녀 같은 사도의 존재.
조각조각 나 있던 정보의 톱니바퀴가 추가된 하나의 톱니바퀴로 인해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나온 결론.
‘천원에는 신수 외에 관리자 같은 존재가 있다.’
생각해보면 린덴 촌락에서 영기가 발작적으로 날뛰며 영기의 세맥을 확장할 때에도, 천원을 처음 보았을 때도 심핵력은 갖고 있었다.
그때 그 눈, 하얀 별이 은하수처럼 깔린 새카만 공간에 블랙홀 같은 홍채의 거대한… 푸른 행성보다 더 거대한 눈이 신의 눈이고.
—¹®ÀÚ ±úÁü Å×½ºÆ®.
— l̴̰̻̘̪̻̻̼͎͖͈͇̯̐́͆͂̀̈̇̽̆̿̑́̕̕ͅe̷̪̔́͂̇́͌͌́͘t̸̰́̄ ̴̪̝̓̓̀͌̏̅̃͗̾̓̂̐ͅç̵̧͙̳̰̈́̽͑͌̿́̂́̍̑̀̑̏͌́a̴̢̖͕͉̹̠͓͖̫͙̰͖͕͙̠͂̓́̏̅͒͑̎́̈͋͘g̵͎̻̳͍̙͙͚̪̞̰̩͑a̵͇͕̹̗̗͉͚̥̩̥̜̬̹͛̋̿̎͊́̑͂͒̃̽̓̏̕͝
그때 했던 말이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의미였다면.
환인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시간이 없다.’
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무언가의 대타 같은 것으로 점찍어 놓은 것이라면 큰일이다.
허가 없는 방문에도 화내거나 사자를 보내 벌하려 들지 않는 것도 자신을 무언가의 관리자로 내정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미친.’
이 니오네브레스 세계의 사람이라면 신의 점지를 무궁하고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겠지만, 지구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는 환인에게는 골이 띵할 정도의 충격적인 민폐다.
=도령 갑자기 왜 저래? 엄청 심각해 보이는데…….=
=주인님이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는 건 나도 처음 봐.=
=이실 언니가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간단한 문제가 아닌 거 같아요. 심각한 일이 생긴 게 아닐까요?=
=오빠를 저렇게 심각하게 만드는 사안이 어떤 걸지 상상만 해도 무서운데요……. 환연, 뭐 짐작 가는 거 없어?=
「왜 나한테 물어?」
=여기서 네가 오빠랑 가장 가깝고 똑똑하잖아.=
「……내가 예쁘고 똑똑하고 환인이랑 가장 자주 붙어 지내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지만, 나라고 해서 환인의 속내를 다 보는 건 아니야.」
=너도 모르는 거구나…….=
「모른다고는 안 했거든. 아까 내가 미궁 심핵이랑 영기를 언급했는데 그 뒤로 저 상태가 된 걸 보면…… 미궁 심핵하고 연관된 뭔가에서 심각한 문제나 오류를 깨달은 거 아냐?」
=무슨 오류?=
아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환연은 ‘너 바보야?’하는 얼굴로 핀잔을 주었다.
「그걸 알면 내가 환인 했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도령!=
=주인님.=
환연이 본의 아니게 겁을 주어 여자들이 굳은 얼굴로 환인에게 다가선다.
생각을 정리하며 그녀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환인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내놓은 결론을 그녀들에게 알려줘도 될지 의문이 들어 입을 열지 못했다.
환연, 노른, 유르파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나쁜 모습을 보여주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따라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는 아니다.
이실리테, 안느, 백려강, 아영이 자신을 배신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녀들은 순수한 니오네브레스인. 자신이 신과 연관점이 생겨났고 그걸 거부하기 위해 일정을 재촉한다면 그녀들의 감정은 틀림없이 혼란스러워질 터.
‘그렇다해서 계속 비밀로 할 수는 없다.’
결정을 내린 환인은 그녀들에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가서 하지. 지금은 미궁 공략에 집중한다. 안느, 속도를 2배로 올려라. 미궁을 빠르게 정리하고 이탈한다.”
=응.=
여자들은 환인을 향한 믿음에 군말 없이 경보에 가까운 속도로 통로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탓에 이형종과 더욱 빈번하게 마주쳤지만 애초에 4~5급 정도의 이형종들. 현재 일행의 적은 아니다.
쏟아지는 적은 능력과 기술을 선보일 새도 없이 환연, 이실리테, 백려강의 원거리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최대한 빨리 위상석만 챙겨 앞으로 나아갔다.
개방형 미궁, 함정도 없고 출현하는 적의 수준과 종류, 길, 지도, 심핵방의 위치도 전부 파악된 상태.
이동 속도를 2배로 높이고 적도 단숨에 처리하며 돌진하듯 나아가니 공략 속도가 배수로 빨라졌다.
=그런데 도령! 벽의 무늬가 왠지 반복되는 거 같지 않아?!=
환인의 속도 조율 아래 선두에서 달리듯이 나아가던 안느가 지적하자 환인이 차가울 만치 감정이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중핵의 흔적일 거다. 아마도 지네처럼 길고 거대한 놈이겠지. 통로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말이다.”
=으헥! 엄청 끔찍하겠네!=
“곧 마주칠지 모르니 긴장해라.”
환인의 말이 마치 예언이라도 되는 양, 그 말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뭔가 시체 썩는듯한 불쾌한 냄새에 일행의 소란스러운 발소리로도 덮지 못할 만큼 귀에 거슬리는 키릭키릭 자극적인 소리.
좌우 벽에는 안느가 패턴이라고 생각했던 흔적이 더욱 선명해졌고 그걸 반영하듯 벽의 아래쪽 바닥에는 흙가루가 가득 쌓여 바닥이 타원처럼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그 순간 환연이 소리쳤다.
「야! 뭔가가 엄청 빠른 속도로 온다고……!」
……땅의 정령이 진동으로 알려줬어, 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무언가가 섬뜩한 굉음과 함께 무지막지한 속도로 일행을 덮쳤다.
콰과과과곽—!
=흐압!=
=빛의 방호!!=
천장쪽에서 눈깜빡할사이 접근한 그것은 안느가 위상력을 담아 전개한 방어막에 충돌, 꽈아앙—!! 굉음, 섬광과 함께 아영이 반사적으로 펼친 보호막을 카드득 긁으면서 일행의 뒤로 튕겨 날아갔다.
「으엑 진짜 지네잖아!」
=크립틱 호러 센티피드! 7급짜리야!=
방패로 막은 팔이 살짝 얼얼한 것을 느낀 안느가 멀어지는 괴물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서 소리질렀다.
송곳이 역으로 무수하게 난 창 같은 수백 개의 부속지. 하나하나에 귀신의 얼굴이 그려진 듯한 복갑sternite. 70m에 달할 정도로 길고 폭이 4m에 달하는 몸뚱이.
배갑tegite에는 올라타려는 적을 찔러 죽일듯한 창 같은 가시가 정체불명의 액체로 뒤덮여 번들거린다.
=저게 중핵일 거야! 독 브레스에 독으로 된 공격도 하니까 조심…… 온다!=
…콰과과과과곽—!!
스포츠카처럼 시속 200km에 가까운 속도로 벽을 타고 재차 뛰어드는 거대 지네 중핵.
멀어졌다가 되돌아오는 데 불과 5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일행은 그사이 전투 태세를 완벽하게 갖춰놓았다.
환인의 중급 정령 강령이 일행에게 걸렸으며 아영의 7급 축복이 모두에게 내려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고 또렷한 상태.
=흡!=
공격 방향이 바뀌어 선두가 된 셈인 이실리테의 기사검에서 그녀의 필살기, 검섬劍閃이 들이닥치는 중핵 지네의 머리를 향해 단독으로 펼쳐졌다.
쉬이이이잉—
시리도록 푸르고 아리도록 선명한 반달의 검기가 이를 악문 그녀의 검 끝을 떠나 폭 4m의 통로를 세로로 가른다.
통로를 가득 채우다시피 한 중핵으로서는 절대 피하지 못할 것 같던 일격.
놀랍게도 중핵 지네는 등갑을 왼쪽 벽에 쾅, 붙이고는 드드득 긁으며 움직이는 거로 이실리테의 검섬을 피해내려 했지만…….
「노른, 바람!」
「응.」
콰아아아악—
노른이 펼친 단순무식한 바람의 폭풍이 중핵 지네의 몸뚱이를 잡아 흔들고 환연이 불러낸 땅의 상급 정령도 중핵 지네를 난폭하게 두들기며 뒤틀었다.
뀌기이이이익—!
그 결과 무수한 체절의 가장자리와 부속지가 베이고 잘려나가며 겉보기에도 유독해 보이는 녹색 액체를 마구잡이로 뿌리는, 막심한 피해를 입는다.
=모두 숙여!=
신체 제어 능력을 상실한 추정 수십 톤의 거체가 유독성 체액을 뿌리며 미사일처럼 일행에게 쇄도하지만, 온몸에 안개 같은 빛을 휘감은 안느가 푸르게 빛나는 성벽의 방패를 내밀고 일행의 머리 위를 날아서 돌진, 거체와 충돌했다.
꽈아아아앙—…!!!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고막이 터질 수 있는 굉음이었지만 아영이 펼친 빛의 방호에 걸러져 단순히 시끄러운 소리 정도로 격하되고.
=으아아압!!=
루모를 몸에 강림시키고 성체술까지 극한으로 끌어올린 안느가 그녀의 신체 대부분을 가리는 성벽의 방패로 독발톱을 막으며 중핵 지네의 돌진을 틀어막는다.
「야아! 놓치지 말고 꽉 잡으란 말이야!」
환연의 다그침에 벽에서 튀어나온 거대 골렘 같은 바위의 팔이 중핵 지네의 체절 곳곳을 붙들어 맨다.
키릭키릭키릭키릭키릭키릭키릭키릭!
「저거 맛있을까?」
촤좌좌좍—
그렇게 강제로 저지당하는 중핵 지네의 체절 틈을 향해 바람을 한계까지 압축시킨듯한 노른의 녹색 칼 수십 개가 내려꽂히고, 유리처럼 얇게 만든 이실리테의 세 자루 다중 검기 또한 이기어검술처럼 쏘아져 검섬에 잘려나간 체절 단면 속으로 파고들었다.
뀌아아아아아아아악—!!
=귀 조심하세욧!=
아영의 개인 보호막을 받은 백려강이 살짝 점프해 공격 궤도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경고, 직후 꽈과과광—!! 위상력이 수 초간 압축된 특대 벼락의 화살이 중핵의 빈틈을 향해 발사되었다.
그 위력은 자그마한 미사일 수준.
중핵의 절단면에 벼락 화살이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지자마자 뻐어어엉!! 이해 못 할 폭발을 일으키며 체절 세 개분의 등갑을 날려버린다.
퀴이이이이이익——!!!
=이게 진짜, 좀 가만히 있어!!=
치명적인 공격이 고작 몇 초 사이에 퍼부어지니 중핵은 미쳐 날뛰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안느가 두 손으로 성벽의 방패를 잡아 꽈아앙!! 대가리를 짓누르고 있어 불가능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거인의 힘에 직업자의 강화, 거기다 환인의 노트북 -> 유르파 -> 안느로 이어져 개량된 성체술, 마지막으로 루모까지 몸에 깃들인 그녀의 힘은 거인과도 비견되는 것.
대가리가 터질듯한 압력에 중핵이 미친 듯이 몸뚱이를 뒤흔들지만, 몸통 중간 즈음 체절 3개 분량의 등갑이 터져나간 것 때문에 그마저도 난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깨 좀 밟을게.=
=엉? 꺅!=
그때 위상력을 몸 안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시키고 있어 스스로 발광하듯 빛나는 이실리테가 안느의 어깨를 밟고 천장 가까이 뛰어올랐다.
그런 그녀의 두 손에는 다중 검기가 한 자루씩 쥐여있었는데 파괴적인 빛으로 재가공된 위상력의 검기가 각각 한 번씩 휘둘러지자 백색을 머금은 빛줄기가 채찍처럼 휘어져 중핵 지네의 몸통에 닿은 순간.
꽈과과광—!!!
초소형 미사일이 터진듯한 폭음과 폭발이 폭 4m의 통로를 저 끝까지 채우며 중핵 지네를 집어삼켰다.
구르르르릉…….
통로가 무너질듯한 진동이 수 초간 이어지며 천장에서 흙덩어리가 투둑투둑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지지만, 물리력을 막는 빛의 방호가 막아낸다.
이 모든 광경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던 아영은 땀을 삐질 흘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크립틱 호러 센티피드라면 그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괴물이다.
독액은 질병과 독 저항이 뛰어난 고위 직업자도 중독시켜 며칠간 시름시름 앓다 죽게 만들 정도로 강해 독을 쓰는 직종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체절을 나누는 키틴질 껍질은 특유의 광채와 강도 덕에 최상급 판금 갑주로 선호되는 재료이며 부속지도 공성용 발리스타 화살촉 재료로 최고 등급.
일반적인 크립틱 호러 센티피드도 미터당 5금화를 호가할 정도로 비싼 괴물이다. 그런데 저건 중핵이잖아? 부산물을 제대로 챙겨 판다면 미터당 10금화…… 어쩌면 15금화는 나올 만큼 고가일 터.
아영은 눈을 뜨고 자욱한 먼지로 가득 찬 통로를 잠깐 바라보다 뒤에 조용히 서 있는 환인을 슬그머니 돌아보며 말했다.
=…중핵이 시체도 남기지 못했을 거 같은데요?=
“어쩔 수 없지.”
애초에 전투에 적절치 않은 지형이었다. 거기다 7급이라면 자신이 싸웠던 야미오코보다 겨우 한 단계 떨어지는 수준(진수와 이형종의 차이는 고려하지 않음).
환인은 자신이 나설 것도 없이 7급 중핵을 정리한 것과 피해 하나 없다는 것에 만족하며 노른을 시켜 흙먼지를 날려 보냈다.
기감에 따르면 어느정도 남은 부분이 있으니 챙길 건 챙기고 중핵이 떨어트린다는 특수품을 찾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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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중핵지네: ....끼엑(시발)
[작품 설정]
중핵 지네
불쌍한 지네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