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75화 (675/813)

675 지하굴 미궁

저벅저벅저벅…….

침묵 속에서 안느의 빛 정령, 루모가 밝히는 빛에 의존해 시커먼 땅굴 속을 나아가는 환인 일행.

선두에는 안느, 그 뒤로 환인과 노른이 걷고 그의 뒤로 백려강과 아영, 최후미에는 이실리테가 걷는 보편적인 대열이다.

아영은 그런 대열의 중간에서 심리적으로 답답하게 다가오는 땅굴을 살피다가 살짝 떨며 두 팔로 몸을 감쌌다.

희미한 빛을 반사하는 토굴의 벽면. 빛이 닿지 않는 저 앞은 야간 시야 능력으로도 보이는 게 없을 만큼 어둡다.

게다가 어디선가 불어오는 기분 나쁜 바람…….

신체 피부를 90% 가까이 드러내는 매우 선정적이고 요염한 자홍접이지만, 성력으로 몸을 보호하는 게 가능한 아영은 추위에 꽤 강한 내성을 지녔다. 플뢰족 자체가 더위나 추위에 강한 편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뭔가 오한이 느껴져 몸 곳곳에 닭살이 솟는다.

아영은 그런 맨살을 쓸어내리다가 옆에서 벼락활을 쥐고 무표정으로 걷는 백려강을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뭐라도 말을 해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이 느낌을 떨치고 싶었던 것.

=있잖아. 오빠가 진짜 영웅의 상이 맞긴 한가보다.=

=……응?=

=영웅한테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잖아? 그런데 오빠는 팔라툼에서부터 계속 문제에 휘말리고 있으니까.=

=아…….=

아영은 뭔가 미적지근한 백려강의 반응에 그녀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왜그래?=

=팔라툼에서 회식할 때 언니들이 이야기해줬었잖아.=

……그랬나? 생각해보니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그때 워낙 술에 꼴아있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백려강은 그런 아영을 안쓰러운 주정뱅이 보듯이 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오라버니가 머물렀던 마을, 도시는 꼭 사람 때문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람이 아니면 괴물이나 이형종 때문에 문제가 꼭 한 번씩 생겼던 거 같아.=

언니들에게 들었던 사건을 생각하며 대강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자 아영의 표정이 볼만하게 변한다.

=그거 꼭…… 음.=

역병신 같지 않아?

뒤에서 따라오는 이실리테 언니를 생각해 재빨리 뒷말을 삼켰지만, 뒤통수를 찌르는 시선을 보면 이미 눈치챘나 보다.

뒤를 돌아보며 에헤헤, 멋쩍게 웃으니 이실리테도 작게 쓴웃음을 지으며 앞을 보라고 수신호를 보낸다.

아니 근데 진짜 그렇지 않나? 알소프 멸망에 그런 배경이 있었다니, 그보다 한 사람 때문에 도시가 사라질 수 있는 일인가? 아무리 알소프 영주의 헛짓거리가 밑바닥에 깔려있었다지만…….

아무튼, 아영은 술렁이는 기분이 깨끗하게 가신 것을 느끼며 감각 과민증을 일부 전개해 주변 지층 감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무 일 없다지만 언제 통로 한쪽이 무너지며 이형종이 쏟아져나올지 모른다. 환연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지만, 경계는 많을수록 좋은 법.

아영이 보라색 하프팜 실크 글러브를 낀 손으로 아랫배 특정 부분을 살살 쓸어내릴 때, 환인은 땅굴의 벽이며 천장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대현자가 만든 마을의 미궁과 유사점을 찾고 미궁이 현재 얼마나 뻗어 나왔는지, 그리고 대현자가 만든 마을과 미궁의 유사점 및 연관성을 찾고 있는 것.

그러면서 환인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크게 신경 쓰이는 것은 목숨의 위협과 직결되는 것이라는 게 변함없군.’

메리아놀의 예언자 가문이 몰락하며 전견시로 본 것을 폭로했다는 것.

그 소식을 접했을 때는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이엘카타의 출산 소식에 마음이 술렁거려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폭로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엘위드리스 출신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마왕처럼 보이겠지. 위험분자로 인식시켜 공공의 적으로 만들고 싶기도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다. 원한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벌이는 일이란 본디 그런 식이니까.

하지만 메리아놀에는 자신과 같은 차원 방랑자 수용소가 있다. 암살 사주에 대한 메리아놀 측의 리워드도 오지 않은 지 반년이 되어간다.

문제는 이거다. 저 두 가지가 어우러지니 메리아놀 전체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

자신을 이 세계로 소환한 자들이 메리아놀 중추를 점령해있고 전견시를 듣고나서는 그에 대한 의사를 발현해 메리아놀 왕실 측을 압박하고 있지 않냐는 거다.

자신의 출신을 문제 삼아 차원 방랑자들은 위험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

게다가 미궁과 흡사하게 마을을 조율했다는 대현자도 생각할수록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

대현자도 자신과 비슷하게 세계의 비밀을 약간이지만 베일 너머로 들여다본 느낌이다.

천원의 거대한 눈을 보았을 때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미치거나 정신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대현자도 그것을 보고 미치거나 정신 상태가 어딘가 안 좋아진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

대현자와 메리아놀의 변심.

어느 쪽이든 문제가 크다. 크다지만 가장 위협적인 것은 아니다.

메리아놀과 전쟁이라면 자신 혼자서도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겠다는 것이 이블팩션의 니라인 침공 당시의 일로 확신했기 때문.

여자친구들은 영도에 모아두고 홀로 테러리스트가 되어 노른과 함께 메리아놀 국토에 테러를 가한다면 완벽한 승리는 불가능하더라도 상호확증파괴 정도는 된다고 이미 계산을 끝마친 상황.

환인이 현재 가장 위협적으로 느끼는 것은 천원天原과 영성경이다.

팔라툼에서 벌어진 현상으로 천원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확정되었다.

광상녀가 시련이라 한 것을 보면 완전한 적대는 아니겠지만, 대체 무슨 연유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신경 쓰인다.

그도 그럴 게 천원은 신들의 정원이라 부르는 곳이다.

천원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말은 이 세계의 신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게다가 영성경은 상급 영혼사라 해도 한평생에 두 번 만나면 그 사실이 영도의 기록실에 기록이 될 정도로 나타나는 게 드문 일인데 자신은 고작 3~4년 사이 벌써 3번째 마주쳤다.

「환인. 이형종이야. 대충 3급 정도로 보이는 게 일곱 마리, 길따라 직선으로 계속 나아가면 10분 뒤에 마주칠 거야.」

생각을 끊고 환연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자 쓰스스스스…… 통로 너머에서 벌레 특유의 소리가 반향을 일으켜 들려온다.

안느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작게 투덜거렸다.

=이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 나빠.=

=원래 곤충이 좀 혐오스럽긴 해요.=

=너 그거 충인 차별 발언이다?=

=엥?=

안느를 편들어주었다가 뜬금없이 차별주의자가 된 아영이 배신감에 물든 표정을 짓는다.

“계속 간다. 기플라족의 이주가 결정되었으니 이형종을 깨끗하게 소탕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마주치는 걸 피해갈 것까지는 없겠지.”

그의 말대로 나아가던 일행은 환연이 말한 이형종 한 무리와 마주쳤다.

다리가 창처럼 뾰족한 지네, 빠직거리며 스파크를 튀기는 노란 송충이, 철갑을 몸에 두른 공벌레.

투쾅!!

마주치자마자 대형 모터사이클 사이즈의 공벌레가 대포처럼 쏘아져 왔지만.

=어딜!=

꽈아앙!!

안느가 성벽의 방패를 후려치자마자 강철판이 맞부딪친듯한 굉음과 함께 터져서 투명한 체액을 흩뿌리며 튕겨 나간다.

양동이 하나 분량은 될법한 체액이 샛노란 스파크를 튀기며 전기를 방출하려던 송충이에게 쏟아졌고 그 체액으로 전도가 발생, 창다리 지네와 까만 메뚜기 등을 지져버리며 팀킬을 해낸다.

키이익…….

게다가 번개를 다루지만 자신도 번개 내성이 낮은 듯 심각한 피해를 입은 모양새.

피니시는 노른의 손끝에서 흘러나간 산들바람이었다.

이형종들을 어루만지듯 산들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키틴질 거죽이 쫙쫙 벌어지며 속살과 체액을 뿌리다 그대로 절명한다.

「거기 송충이하고 지네 몸 안에 위상석이 있어.」

앞을 막는 장해물을 가볍게 치운 느낌으로 환연이 알려주는 위치에서 위상석을 회수한 일행은 계속해서 아래로 향했다.

지면에서부터 약 300m의 지하 지점.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던 일행 앞에 드러난 것은 원통형에서 타원형으로 변한 데다 벽마다 정체불명의 넝쿨과 이파리가 길게 늘어지는 기나긴 통로였다.

안느가 천벌의 망치 끝으로 식물을 살짝 건드려보며 말한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에도 식물이 자라긴 하네.=

“아르주앙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이런 식물이 그들의 주식이라고 하더군.”

=확실히 수분 함량이 높은 식물이야. 영양소? 측면에서는 어떨까 싶지만.=

장갑으로 길게 늘어진 넝쿨 끄트머리를 살짝 끊자 주르륵- 물기가 흘러내린다. 위쪽으로 흐르는 지하수에서 물을 끌어들여 품은듯한 식생植生이다.

=미궁의 영향을 받아서 수목이 성장한 걸까요? 식물한테는 햇볕이 필요할 텐데 어떻게 이런 곳에서 자라는 건지….=

백려강의 학문적 탐구심에 대답한 사람은 환인이었다.

“기생 식물의 일종일 수도 있겠지.”

=기생식물? 어째서?=

“광합성을 하지 않는 식물은 엽록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다른 식물이나 생물에게서 갈취하는데…….”

말하던 환인은 천칭으로 바닥 쪽의 식물을 헤집었다. 그러자 빈약하고 앙상한 뿌리와 줄기가 드러난다.

=앗, 뿌리가 마르고 있어요.=

“…아르주앙이 이 식물들을 관리하고 있었나 보군. 몇 주간 영양소를 공급받지 못해 죽어가는 중으로 보인다.”

그때 환인의 설명을 옆에서 듣고 있던 노른이 식물의 이파리를 떼서 입에 쏙 집어넣는다.

「냠.」

=어앗!=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저지른 짓에 아영이 황당해하다가 표정을 구기는 노른을 보고 피식 웃으며 물었다.

=맛있어?=

「……맛없어.」

퉤퉤 뱉는 노른에게 이실리테가 물을 주며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고 나무라고 안느는 그런 짓도 좀 하면서 커야 건강해진다고 킥킥 웃는다.

환인은 그런 여자친구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벽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아까 천칭으로 덩굴 밑줄기를 훑을 때 어렴풋이 보였던 것 때문인데, 조금 마른 흙이 부스스 떨어지자 그 자리에 희미하지만 옅은 붉은색의 실선이 가느다랗게 이어진 게 드러난다.

미궁의 경락이다.

“개방형 미궁이군.”

「미궁 경락을 발견했어?」

“그래.”

개방형 미궁의 징조는 제법 있었다. 폐쇄형 미궁의 이형종 특징인 무겁고 어두운 색감이 아니라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 등 화려한 원색이 있었다는 것. 산란장을 만들고 번식을 시도했다는 것 등.

하지만 폐쇄형 미궁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는데, 경락을 발견한 이상 개방형 미궁으로 확정되었다.

그와 함께 목적지가 바로 정해졌다.

아르주앙 대표에게 확인받은 통로, 이형종이 쏟아져 들어온 곳이다.

한층 빨라진 걸음걸이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으니 선두에서 나아가던 안느가 말했다.

=확실히 미궁이 확장하고 있는게 맞네. 아르주앙이 몰려드는 이형종에게 맞서 필사적으로 싸웠다고 했는데 이형종 시체가 흔적도 없어.=

이형종이 죽은 동족을 포식했다고 하더라도 체액 자국이나 껍질 부스러기 등이 보여야 할 텐데 통로가 부자연스러울 만큼 깨끗하다.

불확정 요소가 특정될수록 여자들의 어깨가 조금씩 가벼워져 간다.

남은 것은 미궁의 등급 확인뿐.

“여기다.”

비교적 매끈한 벽이 험하게 무너졌다가 오가는 이형종의 껍질에 마모된듯한 벽. 이형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장소에 도착한 일행은 망설임 없이 통로로 들어섰다.

=뭔가 지금까지 지나왔던 동굴이랑 다른 느낌인데요…….=

이실리테의 말대로였다.

이전은 누가 봐도 토굴, 인위적으로 땅을 파낸듯한 동굴형태였다. 그런데 넘어온 곳은 좌우 폭이 4m 남짓할만큼 좁은 데다 위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장이 높다.

벽은 바짝 말라 있는데 무언가 커다란 것으로 박박 긁어낸 듯이 거친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고 바닥에도 메마른 돌가루와 흙가루가 쌓여있다.

=뭘 어떻게 해야 이런 통로가 만들어지는 거야?=

“벽을 타고 오는 이형종이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해라. 환연도 주변 감지에 신경 쓰고.”

벽의 팬 흔적을 본 환인이 일행에게 지시를 내린 뒤 아르겐테아 정찰병 영혼을 풀어 선행 정찰을 지시했다.

팔라툼의 밀려오는 구름바다 미궁에서는 알기 어려웠지만, 잊혀진 옛 고성 미궁에서는 경락이 굵어질수록 심핵의 방에 가까워졌다.

이쪽으로 넘어온 이후 경락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으니 그 붉은 선을 따라 이동하면 심핵 방에 다다르게 될 테지만, 모종의 사태를 생각하면 지도도 만들어두는 것이 좋다.

영혼들에게 지도 작성을 지시한 환인은 곧장 경락의 붉은 선을 따라 이동했다.

혈관이 얇아지면 되돌아가고 굵어지는 쪽으로만 나아간다.

대충 외길에 가까운 통로가 이어지고, 경락이 굵어질수록 이형종의 습격 빈도가 잦아졌다.

귀뚜라미와 바퀴벌레를 합친듯한 거무튀튀한 이형종이 환인의 말대로 시속 80km에 가까운 속도로 벽을 달려 덮치는가 하면 길이 십수 미터의 다지류多肢類가 갑자기 어둠 밖에 안 보이는 천장에서 떨어지거나 벽에서 충인족 형태의 절지류 이형종이 튀어나오는 등.

「환인, 저쪽. 철 바퀴 세 마리야.」

=오빠. 벽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나 이곳 지하굴 미궁은 정령의 제약이 없었기에 환연의 땅 정령과 바람 정령의 활약에다 아영도 감각 과민증으로 접근하는 이형종을 진동으로 알아채 습격을 사전에 전부 포착했다.

그 결과는 학살.

아드네빌라가 걸어놓은 제약이 풀려 매일같이 뼈를 깎는 훈련 끝에 위상력의 제어력이 높아져 가는 백려강의 활에서 위상력을 담은 화살이 쏘아진다.

그럴 때마다 벽을 달리거나 지그재그로 뛰어다니는 이형종이 몸에 화살을 꽂고 추락해 바르르 떤다.

세 자루의 다중 검기를 수족처럼 부리게 된 이실리테가 손을 들 때마다 천장에서 떨어지던 다지류는 말 그대로 다/지/류로 변했고 벽에서 튀어나오려던 거미와 개미를 뒤섞은 듯한 충인족은 안느의 망치에 처맞고 벽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생매장된다.

퀴이이익—!!

=흥!=

쿠웅! 쾅!

벽에서 뛰쳐나오려는 충인족을 성벽의 방패로 찍어 상·하체를 분리, 이어 천벌의 망치로 대가리를 깨트린 안느가 위상력을 머금어 강렬해진 아우라를 뿌리는 모습으로 말했다.

=이 정도 강함이면 거의 4.5급인데. 도령, 경락이 얼마나 굵어졌어?=

“잊혀진 옛 고성의 5계층 정도다.”

=그럼 5급 미궁 이상이라는 말인가? 땅이 기울지도 않고 미로처럼 쭉 이어지는 거 보면 단층형일지도 모르겠네.=

영혼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수첩에 기입하며 미궁 지도를 그리던 환인이 시간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길이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심핵방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침입자를 1자형 통로로 움직이게 하며 앞뒤로 협공해서 말려 죽이는 식이겠지.”

=와, 탐험가나 모험가들이 가장 기피하는 미궁이네.=

외길이라 전투를 피할 수도 없고 끊임없이 협공을 신경 써야 하며 제대로 쉴 장소도 없이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는 미궁.

하지만 환인 일행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었다.

“점심시간이니 여기서 쉬어갈까. 요리하기에는 좋지 못한 환경이니 이실리테, 식사는 다소 간단하게 부탁한다.”

=네, 주인님.=

여행이나 미궁 안에서 언제나 요리를 해먹을 수는 없다.

이실리테의 보존 주머니 안에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둔 각양각색의 휴대식이 잔뜩.

가볍게 불을 피워 야채 스톡을 풀고 채썰거나 깍뚝썰기한 채소를 더 넣어 끓인 수프에 각자 기호에 따른 빵과 김밥, 주먹밥 등을 곁들여 점심을 해결한다.

주먹밥을 수프에 풀어 떠먹거나(환인, 이실리테, 노른), 빵을 찢어 수프에 적셔 먹거나(백려강, 환연) 수프를 훌훌 마시며 기다란 김밥을 통째로 먹어치우는(안느, 아영) 일행.

「적이야. 앞뒤로 이형종이 3마리, 4마리씩 다가오고 있어. 종류는…….」

환연의 경고에 이실리테의 등 뒤에서 다중 검기 세 자루가 떠올라 한쪽 통로로 빛살처럼 날아가고 반대쪽으로는 환연의 상급 바람 정령 둘이 웃으며 날아간다.

그리고 아영의 성력 보호막이 동그랗게 펼쳐져 일행을 감쌌다.

직후 툭, 티딕— 무언가가 날아와 보호막에 묻더니 스르륵 흘러내린다. 체액과 살점 부스러기, 돌 파편과 흙덩어리 약간이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데.=

한 손에 기다란 불고기 김밥을 쥔 아영이 그걸 보며 불만스레 중얼거리자 안느가 킥킥 웃으면서 대꾸했다.

=우린 개가 아니잖아.=

=그럼 미궁은 개 같은 놈이라서 이형종을 보낸 걸까요?=

=개도 그 말을 들으면 화낼걸?=

「생긴 건 고귀한 귀족 영애면서 참 대화 한번 고상하네. 백려강 좀 본받아!」

환연이 한심해하며 소리치자 아영은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벨은 진짜 귀족 영애잖아. 난 길바닥 서민 출신이고. 근데 안느 언니는 벨한테 숙녀의 몸가짐 좀 배우셔야 할 듯?=

=와, 혼자 쏙 빠져나가는 것 좀 봐.=

안느가 기막혀하자 아영이 히히 웃으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아까의 복수입니다. 흐흐흐.=

「이실리테. 나 스프 더 먹을래. 빵도 줘.」

둘이 그러든 말든 노른은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환인은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뒤 영혼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토대로 미궁의 지도를 축적에 맞춰 그려나간다.

=노른, 어떤 빵 줄까? 흰 빵? 식빵?=

「식빵이 좋아.」

=나도 빵 먹을래. 이슬아 난 흰 빵 줘.=

=이실리테 언니 소금 뿌린 빵 있어요? 전 그게 맛있던데.=

=응 있어.=

“…….”

대충 40% 정도 지도가 완성되었지만, 미궁의 형태가 워낙 단순하다 보니 그것만으로 나머지를 유추해내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형태는 심핵방을 중심으로 통로 4개가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도는 형태.

각 통로는 다른 어딘가와 연결되어있는데 그중 두 개는 지상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지도를 보던 환인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만약 미궁의 심핵을 부쉈는데 지반이 바로 무너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심핵을 부수더라도 미궁은 바로 붕괴하지 않고 일정 시간 유예를 준다지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환연, 만약 미궁 위쪽의 지반이 무너진다면 네 힘만으로 땅의 정령을 불러 탈출할 수 있겠나.”

린덴 촌락의 지하 개미굴 때도 가능하다 했지만, 거긴 미궁이 아니었고 여긴 미궁.

그의 질문에 환연은 잠깐 위쪽을 올려다보곤 다시 빵을 찢어 수프에 찍어 먹으며 대답했다.

「상급 정령이 가능하대. 근데 정령의 힘을 제약하는 다른 미궁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힘들지도 모른다네.」

“그런가. 참고하지.”

그렇다면 심핵을 부순 뒤 영혼의 안내를 받아 들어왔던 길까지 일직선으로 벽을 부수며 후퇴하면 되겠지.

미궁이 살아있는 지금은 엄한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길 따라 움직이고 있지만, 죽은 뒤에는 신경 쓸 필요 없을 테니까.

=주인님, 여기 커피 드세요.=

“고맙다.”

안느가 가볍게 힘을 줘 벽을 박살 내던 걸 떠올리던 환인은 이실리테가 건네주는 커피잔을 받아들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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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조아라도 본문에 이미지 삽입하게 해주면 좋을텐데..

미궁 사진 세 장 뽑았는데 한 장밖에 못올리게뜸 흐규

[작품 설정]

지하굴 미궁

지하 300층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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