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74화 (674/813)

674 땅속 마을 베르헨

습격은 환인 일행의 활약 덕분에 단 1명의 부상자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마을의 모든 기플라족과 아르주앙이 습격해온 곤충 이형종의 시체 정리에 달려들고 환인의 여자들도 그걸 돕고 있을 때, 환인은 돕지 않고 홀로 마을을 거닐었다.

천장에서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유유히 마을 공동의 벽을 더듬고 땅을 살피는 환인.

“…….”

잔디밭에 핀 이름 모를 작고 하얀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에게 접근한 사람은 허리가 구부정한 기플라족의 노인 한 명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장인가.’

다가온 노인의 인사에 살짝 묵례해주는 환인.

하얗게 센 머리와 노인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짐작대로 그는 환인이 도착하기 전에 있은 이형종의 습격에 크게 다쳤던 마을 이장이었다.

=아영 님의 치유술에 간신히 일어난 늙은이입니다…. 베르헨의 이장이지요….=

“그러셨습니까.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나이 들어 노인이 되면 체구가 왜소해지기 마련인데 기플라족은 선천적으로 어려 보이는 외형과 체구 덕분인지 노인임에도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되려 그 덕분에 일반적으로 평범한 노인처럼 보인다.

이장은 지팡이에 의존해 환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귀하신 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젯밤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겠지요…. 마을을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정도 말하는 것도 힘에 겨운 듯 이장은 얄팍한 지팡이를 짚고서 작게 헐떡인다.

=인사가 늦어 죄송했습니다…. 바로 인사를 드리려 했지만, 신님의 정원으로 갈 때가 머지않았는지…… 허허허.=

기력이 거의 쇠한 목소리.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밀랍 같은 안색. 웃음 짓지만 목소리에 힘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거의 다 불타고 자투리만 남은 촛불을 보는 기분이다.

그때 젊은 기플라족 여자 두 명이 후다닥 달려와 환인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더니 이장을 좌우에서 부축하며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타박했다.

=이장 할아버지도 진짜. 몸도 안 좋은데 왜 자꾸 나가시는 거예요!=

=제발 집에서 쉬시라니까요.=

=갈 때가 된 마당에, 마냥 누워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 할 일은 하고 가야지….=

=그런 말씀 마세요. 안 그래도 다들 불안해하고 있는데…….=

=이장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들 슬퍼할 거에요…….=

환인은 이장을 부축한 여자 기플라족의 언행을 묵묵히 바라보다 여자들에게 부축받으며 돌아가려는 이장에게 손을 뻗었다.

“잠시.”

=네?=

=어?=

그리고 뼈가 느껴질 정도로 메마른 그의 어깨를 짚은 뒤 원기를 약간, 영기를 아주 조금 흘려보냈다.

=허어…?=

효과는 극적이었다. 낯빛이 밀랍처럼 허옇던 이장의 주름진 얼굴에 불그스름한 혈색이 돌고, 거의 기역에 가깝게 구부정하던 허리가 크게 펴진 것.

=세상에, 이게…….=

=와. 우와.=

기력을 되찾은 듯한 이장의 모습에 두 여자 기플라가 짧게 탄성을 지르며 환인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본다.

환인은 좀 얼떨떨한듯한 이장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자신이 미궁을 다녀올 때까지는 이장이 살아있어 줘야 한다.

저렇게 인망이 높은 인물이 옆에서 거들어준다면 마을 사람들이 이주하도록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이장님. 잠시 이야기 좀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 마을의 미래에 대한 중대한 일입니다.”

=예에. 알겠습니다. 너희는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거라. 나는 귀하신 분의 말씀을 들어야겠으니 말이다.=

=네에? 어…….=

=수놔야. 이장님 말씀대로 하자.=

=……으응. 이장님, 저희는 저쪽 구덩이 정리하는 거 돕고 있을 테니까 이야기 끝나시면 꼭 부르셔야 해요?=

=알았다, 알았어. 그러면 가실까요?=

인자한 표정으로 둘을 보낸 이장은 노인의 연륜이 가득 묻어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환인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역류를 자주 접하지는 못했지만, 이형종이 이토록 체계적으로 마을을 습격하는 것은 보통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주변 농장을 먼저 차지해 적의 보급을 끊고 외부와 차단하는 한편 병력을 차근차근 늘린다.

그러다 농장이 궤멸당하자 그날 바로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 마을을 쳤다.

지능이 없다시피 한 곤충형 이형종이 양동 작전까지 펼쳐 마을을 기습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

환인의 이야기에 이장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무지한 늙은이지만 이런 현상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귀하신 분께서 하시려는 말씀은, 이형종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우리 마을에 있다는 것이겠군요.=

“그건 아마도 대현자가 설치한 무언가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본능적으로 미궁이 이끌리는 무언가지요.”

그렇게 말하며 위상력을 손바닥으로 모은 환인은 미약하게 기운을 방출했다.

기운 대부분은 옅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다 허공에 스며들듯 사라졌지만, 극히 일부는 미궁의 벽에 흡수되었다.

농장에서 벌어졌던 현상과 같지만 볼 수 있는 것은 환인뿐.

하지만 이장은 기플라족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미궁이 한창 영역을 확대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한번 전개된 영역은 미궁이 소멸하더라도 그 흔적이 남겠지요.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벌어지기 쉬운 법입니다.”

=이런 일이 또 벌어진다면 그때는 마을이 소멸하는 날이겠습니다…….=

이장의 눈은 오늘 새벽 환인이 이형종의 시체로 메워놓은 마을 공터의 땅굴로 향했다.

100명에 가까운 기플라족과 30여 명의 아르주앙이 열심히 사체를 나르고 있지만, 이형종 한 마리의 크기가 기플라족의 서너 배는 되는 데다 환인의 광명창에 의해 수백, 수천 토막이 나 있어 정리에 시간이 제법 걸리는 모양새.

저 구멍에서 기어 나온 이형종만으로 마을은 멸망하고 남았을 것이다.

마을의 통로 두 곳으로 들어온 이형종의 숫자도 소규모가 아니었다. 마을이 본격적인 항전 태세여서 막아낸 거지, 평소 마을이었다면 단숨에 함락됐을 병력.

그것도 눈앞의 귀한 분이 데려온 일행이 아니었다면 사상자가 나도 수십 명은 났겠지.

이장은 환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아차리곤 쓴 풀을 입에 문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 하여도 우리는 마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마을 밖으로 나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핏줄이 옅어지며 천천히 멸족당하는 것이나, 어느 날 찾아든 이형종에게 모두 잡아먹히는 것이나 같은 멸족이지만……. 적어도 후자는 자신의 뿌리와 핏줄을 지키며 사라지는 길이니까 말입니다.=

“…….”

=귀하신 분께서도 우리가 어째서 이런 장소에서 살아가는지 들으셨을 줄 압니다. 약한 종족이 절멸하는 것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자연스러운 순리이니 모쪼록 신경 쓰지 마시기를.=

어린 외모에 순박하고 수명이 짧은 종족이라 해도 연륜은 사라지지 않는 건가.

환인은 자신이 꺼내려는 이야기를 알아차리고 부드럽지만 완곡하게 거절하는 이장을 보고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그렇다고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하고 넘어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

환인은 아스펜드에서 따뜻한 꿀물차를 꺼내 이장에게 따라주며 말했다.

“제 신분은 영도의 영혼사입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그러셨습니까! 어째서 그렇게나 강한 힘을 지니셨으면서 이득도 되지 않는 일에 발 벗고 나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만, 그러셨군요……!=

감탄하는 이장에게 환인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설득을 이어갔다.

“저는 그런 영혼사 중에서도 나름대로 지위가 높은 편입니다. 여러분이 정착할 장소를 마련해드리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정도이지요.”

=으, 으음.=

“물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섞여 살아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인다면 평화로운 영산 알노르의 한쪽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인위적인 빛이 내리쬐는 지하 동굴이 아니라 실제 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태양 아래에서 말입니다.”

=…….=

환인의 제안은 이장에게 있어 꿈만 같은 것이었다.

한평생을 베르헨에서 살았다지만 바깥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처럼 분장해서 바깥 마을을 다녀본 경험이 제법 된다.

영산은 알려지기로 신수의 영역. 사람과 얽히지 않는 곳이라면…….

“만약 받아들이신다면 여러분은 소수의 희소 종족 이전 사례의 두 번째가 됩니다.”

=두, 두 번째? 첫 번째가 있단 말씀입니까?=

“첫 번째는 키가 20m에 이르는 거인족 약 60여 명입니다. 근 반 년 전 영도의 대성녀님 허락 아래 영산 인근에 보금자리를 꾸몄습니다.”

=거인족……!=

자그마한 담장에 앉아 이야기를 경청하던 이장이 흥분을 못 이겨 벌떡 일어난다. 그것도 잠시, 금방 정신을 차린 이장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고민에 빠진다.

환인은 그런 이장을 보며 거의 넘어왔다고 판단했다.

기플라족의 손재주가 비상하다는 것 정도는 마을을 잠깐 둘러보면서 충분히 확인한 사항이다.

방적기도 뭣도 없는 곳에서 수수하다곤 해도 리넨으로 어린이용 양복에 가까운 원피스를 만들어낼 정도다.

쿠알의 보석 커팅 실력은 그가 만든 보석을 본 유르파가 감탄했을 정도였으며 마을의 궁장弓匠, 시장矢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활과 석궁, 화살은 아영도 살짝 욕심을 가졌을 수준.

마을의 어린 여자아이마저도 활과 석궁을 간단히 만들어낼 만큼 종족 전체가 장인 수준의 손재주와 솜씨를 지녔다.

이들이 영도에 합류한다면 영도의 기술력 향상에 제법 큰 도움이 될 터.

=으음. 흐으음…….=

가뜩이나 주름진 미간이 잔뜩 찌푸려질 정도로 생각 중인 이장에게 시간이 필요한 듯 보여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곧바로 대답하긴 어렵겠지요. 마을 사람과 의논할 시간도 필요할 테니 제가 미궁을 정리하는 동안 고려해보시기 바랍니다.”

설득치고는 부실하지만, 애초에 이곳은 지구처럼 정보가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이 아니다. 이 정도의 조건만으로도 설득은 충분하며 무엇보다 자신은 이들의 생명의 은인.

안전과 안정, 그리고 지하가 아닌 지상에서의 생활, 이 정도만 보장해줘도 설득력은 충분하다.

환인이 몸을 돌리려 했을 때 이장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저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만약 귀하신 분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동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이곳에서 영도까지는 족히 몇 달간 움직여야 하는 거리인데 사람들의 도시나 마을을 거친다면…….=

환인은 속으로 옅게 웃으며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도의 대성녀님과 이야기를 나눠 공간 이동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알아볼 테니까요.”

재료인 위상석은 오늘 새벽 전투로 충분히 확보했다. 기술도 유르파가 있으니 영도와 조율만 한다면 중간에 니라인이나 팔라툼을 들를 필요도 없겠지.

환인은 자신에게 허리를 숙이는 이장을 뒤로하고 방랑자의 안식처로 걸음을 옮겼다.

=응~ 189명이지만 체중이나 몸집은 성인 남녀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니까 부담은 크지 않을 거야. 영도에도 공간 이동 술식이 적용되어있는 장소가 있으니 이쪽 주도로 비술을 제어하면…….=

휘리릭 비술식을 휘갈겨 쓰던 유르파가 고개를 주억인다.

=응. 가능해. 기플라족에 더해 아르주앙 47명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유르파와 잠깐 상담을 거친 환인은 곧장 영도의 대성녀 직통 라인으로 통신을 연결해 이쪽에서 있었던 일을 전달했다.

[멸족했다고 알려진 기플라족이 200명 가깝게 생존해있었다니! 이 또한 자애신의 인도로구먼.]

“전해져오는 무척이나 선량하고 착한 종족이었습니다. 다만 바깥사람이라 부르는 여타 종족을 향한 두려움과 불안이 제법 강하게 이어져 오는듯해 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성제의 이야기대로 안전하고 따사로운 영산의 한쪽을 내어주어 이웃으로 살다 보면 어느샌가 교류가 트일 테니까. 거인족들처럼 말이오.]

“거인족과 교류가 시작되었나 보군요.”

[말해 무얼 할까! 그대가 마련해준 야미오코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어주고 주술사가 야미오코의 뼈로 무기를 만든 덕에 거인 대부분이 무장을 완료하였소. 그 힘으로 얼마 전 북쪽에서 내려온 이블팩션의 침공을 정말이지 간단히 해결하였지.]

그때 수행자와 시민들의 표정을 그대도 보았어야 했는데, 하며 후후후 기분 좋게 웃는 대성녀.

이야기를 들어보니 평균 4급의 괴물이 6천에 가깝게 몰려왔는데 40명의 거인족이 출동하자 정말 맥빠질 정도로 간단히 퇴치되었다고.

[거대한 비늘 갑옷을 그대가 말한 쇄자갑 형태로 만들어 입히고 야미오코의 등뼈나 척추, 갈비뼈로 양손 해머, 양손 철퇴, 양손 창 등으로 중무장시켰더니 그야말로 4만 대군이나 다름없는 위용이었소. 영도의 시민들은 이제 이블팩션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며 기뻐하였고 거인들은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기뻐하였으니 다 좋은 일 아니겠나.]

“하지만 주변 국가도 그렇게 생각할지 의문입니다.”

[그에 관해서 말인데, 히스론드와 라드세아가 이쪽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길 바란다고 사절을 보내왔었소. 그쪽은 그대의 활약이 있어 이해되지만, 라드세아도 그러한 것이 의문이란 말이지.]

“라드세아쪽은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대성녀의 이야기에 환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라드세아와 사이가 급격하게 틀어져도 그쪽이 보낼 수 있는 병력은 한정적인 데다 이쪽은 이제 제대로 자리잡힌 거인병이 있다.

팔라툼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니 라드세아가 음흉한 속셈을 꾸린다 해도 팔라툼을 견제하느라 섣불리 수작은 부리지 못할 테고, 한다 해도 영성들의 전력도 육합등약으로 대폭 늘었으니 간단히 파훼할 수 있을 터.

[그리고…… 이번 승령천제 때 메리아놀 쪽에서 활동한 영혼사를 통해 한 가지 소식이 들어왔는데 메리아놀의 주도 패시지가 제법 혼란스러운 모양이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혹시…….”

[음. 엘위드리스 사태에서 살아남은 일부가 자네와 연관된 전견시의 내용을 폭로한 것으로 보였소. 그쪽의 고위 귀족이 친밀한 교우 관계를 맺고 있던 상급 영혼사에게 조심스레 귀띔해준 것이라 하얀 늑대 쪽으로도 정보가 들어가지 않았을 테지.]

이쪽도 그다지 좋지 못한 소식이다.

만약 파편인 덕분에 힘이 늘지 않았다면 진지하게 메리아놀로 가는 발길을 멈췄을 정도.

환인은 대책을 마련하기에 앞서 정보부터 모아야겠단 생각으로 대성녀에게 질문했다.

“이 정보를 하얀 늑대들에게 제공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일세. 그러라고 알려준 것이니까. 그대도 곧 메리아놀의 권역에 들어서니 정보와 소식은 많을수록 좋지 않겠나.]

“그 말대로입니다. 고맙습니다.”

환인의 감사에 대성녀가 어머니처럼 포근한 미소를 보내주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참, 이엘이 며칠 전 여아를 출산하였는데 소식 들었나?]

“……처음 들었습니다.”

머리를 한 대 맞았다는 환인의 표정에 영상 속의 대성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조금 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직접 전하겠다며 소녀에게 기다려달라 부탁하더니…… 아무래도 그대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어 일부러 숨긴듯하군.]

임신해 배가 남산처럼 부푼 이엘카타와 그녀의 뱃속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비추던 태아를 생각하자 그의 가슴이 또 울렁거린다.

심장뿐만 아니라 내장이 통째로 뒤집히는 듯한, 롤러코스터 같은 것을 탄 기분.

익숙하지 않던 감각 중에서도 유달리 강렬한 감정의 동요에 환인은 드물게 정면돌파가 아닌 우회를 선택했다.

‘지금은 기플라족이 먼저다. 일단 이엘카타의 일은 후순위로.’

평소였다면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점에서 찝찝한 기분에 심기가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동요는 그러한 감정마저 억누를 수준이었기에 환인은 그 이상의 감정적 혼란 없이 아영을 불러 하얀 늑대들에게 패시지 조사 추가 지령을 내리고 수중의 청색 영혼을 본격적으로 부려 지하 통로 지도를 만들어나갔다.

마을을 습격한 이형종의 정리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아무래도 습격에 많은 힘을 쏟아부었는지 그 이후 습격은 없었기에 환인도 집중해서 지하굴의 지도를 만들 수 있었고, 아르주앙 대표와 쿠알의 도움으로 지도의 세세한 점을 더욱 살릴 수 있었다.

=길이 엄청 복잡해졌어요……. 이 정도면 함부로 내려갔다간 길까지 잃을지도…….=

그렇게 이틀 만에 완성한 지도를 본 쿠알은 걱정과 우려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곤혹스러워했다.

이형종이 나타나기 전보다 통로와 갈림길의 숫자가 족히 4배 가까이 늘어났던 것.

‘이 정도면 역시 베르헨 마을은 끝이라고 봐야겠지.’

넘쳐흐른 이형종을 전부 정리한다 해도 이렇게 미궁에 가깝게 땅굴이 나버린 상황이다.

토굴을 전부 메워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고(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테니까), 가뜩이나 지상의 히아리드 대평원에는 평균 4급에 이르는 괴물들이 살고 있다.

이런 미로에 어떤 괴물이 흘러들어와 자리 잡을지 모르는데 계속 베르헨에 산다는 것은 심지에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품에 안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 유르파, 뒷일을 부탁합니다.”

환인은 실루를 품에 안은 유르파와 그녀의 뒤에 선 천인체에 빙의한 이모렐을 보며 말했다.

=응. 마을은 나랑 이모한테 맡기고 조심해서 다녀와.=

자신과 여자들이 미궁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마을의 안전은 유르파와 이모렐이 책임질 것이다.

출정 준비를 끝마친 이실리테와 여자들이 각자 커다란 모험용 배낭을 등에 짊어진 채 다가와 말한다.

=주인님. 미궁 탐사 준비는 끝났어요.=

“그래. 환연이 돌아오면 바로 출발하지.”

환인이 그린 지도를 들고 상급 땅의 정령으로 마을 한복판에 난 땅굴은 물론 공기가 통하는 통로를 제외, 농장과 이어지는 바깥통로까지 싹 다 막으러 간 환연.

때마침 작업이 끝났는지 노른과 함께 이쪽으로 날아오는 중이다.

환인은 다들 모여있는 기플라족들 사이에서 힌로의 부축을 받아 서 있는 베르헨 마을의 이장에게 말했다.

“길어도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 테니 그사이 이주 준비를 해놓으시기 바랍니다. 돌아오면 바로 영도로 향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 귀하신 분의 뜻에 따라 반듯하게 정리하여놓겠습니다….=

환인이 지도를 그리느라 바쁜 이틀간, 베르헨의 이장도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의견을 듣고 취합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189명의 기플라족과 47명의 아르주앙 전원이 영도가 있는 영산 알노르로 이주하는 것에 찬성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환인이 그린 마을 지하의 통로 전체 지도였다.

지도가 있어도 길을 잃고 말 것처럼 복잡하기 짝이 없는 굴.

그런 지하굴 바로 위에 산다는 것은 망망대해에 부표로 띄운 판잣집에서 사는 정도의 두려움을 기플라족에게 주었던 것.

이틀 전 대대적인 공습도 그들의 결정을 부추기는 요소였다.

「환인. 통로 하나 빼고 다 틀어막았어.」

“수고했다. 그러면 출발하지.”

환인은 그녀를 받아 안주머니에 넣고 탐사 준비를 끝마친 여자친구들, 이실리테, 안느, 아영, 백려강, 노른을 데리고 베르헨 마을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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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정기 연재 시각을 새벽 2시로 옮기는게 나을지도.. 흙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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