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73화 (673/813)

673 땅속 마을 베르헨

마을의 여자 기플라족은 환인이 준 대량의 고기에 기뻐하며 음식을 장만했고 남자 기플라족은 200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양의 고기에 행복해하며 자그마한 캠프파이어와 의자, 탁자를 설치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시작된 연회.

베르헨 마을의 연회는 소박하면서도 정답고 온화했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를 가운데 두고 춤추며 노래하며 웃고 떠들면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누구도 음식을 두고 다투지 않았으며 누구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이전의 힘들고 아픈 기억은 묻어둔 채 현재를 기쁘게,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

현재 마을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여자들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끼며 그들과 함께 나름의 방식으로 연회를 즐겼다.

연회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은 단연코 이실리테와 백려강이었다.

=감사합니다~!=

=자, 잘 먹겠습니다아…!=

=누나 고마워요!=

이실리테와 백려강이 한껏 솜씨를 부린 음식을 기플라족들이 앞다퉈 배급받아가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진짜 맛있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날 수 있지? 이 요리 안에 매운맛이랑 단맛이랑 짠맛이랑 다 섞여 있는 거 같아.=

=이실리테 님한테 만드는 법 물어보면 안 될까…?=

=이장님이 바깥사람한테는 함부로 부탁하는 거 아니랬어. 막 부탁하면 실례가 되나 봐.=

=우웅. 조금 더 먹고 싶은데…….=

=저기 프루나하고 소바리가 만든 음식 많으니까 저거 먹자.=

=난 춤추러 갈래! 나랑 춤출 사람~?!=

=나는 안느 언니랑 춤 출 거야!=

=늦었다! 그럼 난 아영이 언니하고 출래!=

그다음으로 인기인은 이형종과 싸우느라 다친 마을 사람 70여 명을 완벽하게 치료한 안느와 아영.

=자, 봤지? 이 두 약초를 이렇게 잘게 빻은 다음 이렇게 정화한 물을 살살 뿌려가면서 짓뭉개면 즙이 나오면서 찐득하게 뭉쳐지는데 이 찐득한 게 배탈 설사에 좋아. 또 이걸 이만큼, 이거랑 이거는 요만큼 해서 이 풀을 잘 섞은 뒤에 피가 나는 상처에 바르면 상처가 빨리 아물어.=

=오오……! 설마 이 풀을 섞는 거로 배탈 설사약이 된다니!=

=유르파 님의 약제술은 정말 굉장하네요!=

그다음으로 인기는 순박하고 귀여운 기플라족에게 각종 약초 구분법과 재배법, 효능과 효과 및 환약, 회복약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유르파였다.

노른은 자기와 키가 얼마 차이 안나는 기플라족 남자, 여자들과 함께 캠프파이어 주변에서 춤추며 놀고 있고 실루는 기플라족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는 중.

하지만 환인은 구석의 한 자리를 차지한 채 조금씩, 조용히 음식과 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탁자 옆에서 손수건을 깔고 앉아 고기를 야금야금 베어먹고 있던 환연이 기플라족들에게 둘러싸인 여자들을 구경하다 환인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환인만 인기 없네.」

“나를 보고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으니.”

환인을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낮에 농장 아홉 곳을 전부 정리한 사실이 동행했던 쿠알을 통해 모두에게 알려졌으니까.

그 덕분에 기플라족은 환인이 마을에 얼마나 커다란 일을 해주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고맙고 감사한건 맞지만, 무서운 것도 맞다.

그가 여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정확하게는 플뢰족인 안느와 아영이 같이 있을 때는 그래도 용기를 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지만, 이렇게 혼자 있으니 착하고 순박한 기플라족이라해도 힐끔거리기만 할 뿐 10m 안으로는 두 명 빼고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은인님. 먹을 것 좀 가져왔어요!=

=환인 님, 음료를 가지고 올까요?=

“고맙습니다. 저는 이제 충분히 먹고 마셨으니 쿠알 씨, 힌로 양 두 분도 가셔서 다른 분들과 어울리십시오.”

=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절 불러주세요!=

처음 권했을 때 쿠알은 사양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러 사라졌지만, 힌로는 환인의 근처에서 계속 알짱거리며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잠깐 음료를 가지러 자리를 비운 것.

그런 힌로가 뭘 원하는지 손쉽게 유추한 환인은 진심으로 곤란함을 느꼈다.

그에게 잠자리의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은 세 가지다.

하나는 남자가 있는 여자. 다른 하나는 사람이 아닌 생물, 충인족 암컷이라거나 명백하게 동물의 형상을 한 여성체. 마지막으로 너무 늙거나 너무 어린 여자.

힌로는 마지막에 해당했다.

그녀는 종족 내에서 성인으로 분류되며 아이도 가질 수 있다지만, 환인에게는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한 소녀로밖에 안 보인다.

쿠알이 가져다주었던 고기 요리를 전용 포크와 나이프로 조금씩 떼서 먹던 환연이 음료를 가지러 간 힌로의 뒷모습을 보며 말한다.

「여기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더라. 막 성비가 무너질 정도는 아닌데 일부일처라서 결혼 못 한 여자가 조금씩 나오나 봐.」

“……외부에서 씨를 받으려는 목적도 있다는 건가.”

「어느 정도는? 혼전 정조 의식이 강한 것도 아닌 거 같고 환인 너는 누가 봐도 점수가 높은 수컷이니까.」

베르헨 마을은 공산주의 체제로 형성되어있었다.

어린아이를 제외하면 마을 전체가 각자 역할을 분담한 뒤 맡은 역할에 힘쓰고 있는 것.

그렇게 수확하고 성과를 낸 것은 전부 한데 모아 마을 창고에 보관한 뒤 필요한 만큼 나누고 분배한다.

물론 개인 소유 물품이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몇 안 되는 품목이다. 높이가 50cm도 되지 않는 돌담 같은 것으로 그저 땅만 나눈 집도 다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원한다면 집을 만들어 나갈 수 있지만, 대부분은 기숙사처럼 혼성 집단생활을 하며 결혼하면 집단생활에서 독립해나가는 식.

육아 또한 당연히 공동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공산주의적인 생활임에도 문제나 트러블은 일어나지 않았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을 만큼 온화하고 선량한 기플라족이기에 가능한 일.

하지만 남자는 공유하지 않고 남자의 숫자보다 여자의 숫자가 더 많다.

결혼을 못 하는 여자가 나오니 씨만 받아 아이를 키우는 여자도 있으며 그건 기플라들 사이에서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환인 님. 여기 음료 가져왔어요.=

힌로는 어느 쪽일까.

환인은 그녀가 내미는 약한 도수의 주황색 알콜 음료를 받아들었다.

“…….”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무구한 어린아이의 희망과 바람이 느껴졌지만, 환인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작은 광장 가운데에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와 그 주변에서 춤추고 술과 요리를 먹으며 웃고 떠드는 기플라족을 구경했다.

어쨌든 관심을 주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알아서 지쳐 떨어져 나가겠지.

그렇게 연회가 한창 이어지던 중 안느와 아영이 조금 빨개진 얼굴로 다가왔다.

안느는 손부채로 얼굴을 부치고 있고 아영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표정이다.

접시 하나의 고기를 전부 해치운 환연이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물었다.

「왜 그래? 얼굴이 붉은데.」

=어? 어, 좀 당황스러운 걸 봐서.=

「당황스러운 거?」

=……내 입으로는 설명을 못 하겠어. 정령으로 광장 근처 둘러봐.=

안느의 이야기에 환연은 마을 외곽과 마을 전체 감시 범위를 조금 줄여 광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환인이 보았다면 아동 포르노라고 생각할법한 광경이 정령의 시야를 통해 환연에게 가감 없이 전달된다.

「와 얘네들 엄청 개방적이네. 집안도 아니고 담장 안쪽에서 막 하는 거 다 보여주고…….」

정령을 좀 더 가까이해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체위로 사랑을 나누는 기플라족을 관음하는 환연.

그런데 안느가 말한 것은 그게 아닌지 엿보는데 집중하는 환연의 옆구리를 검지로 쿡 찔렀다.

=그거 아니야. 성인인 기플라족이 사랑을 나누는 그런 게 당황스러울 리 없잖아. 아르주앙 안 보여?=

「아르주앙? 그 충인족?」

별 관심을 주지 않고 있던 환인도 그녀를 돌아본다.

=응…… 아, 내 입으로는 진짜 말 못 하겠네. 아영이 네가 말해.=

=안느 언니도 참 호들갑은. 충인족은 육식하는 충인족도 있지만, 즙만 먹는 충인족도 있잖아요.=

“…….”

연산 능력이 좋은 편인 환인은 그 말에서 하나의 상황을 간단히 도출해내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환연은 직접 그걸 보았는지 기함하며 꺅, 비명을 질렀다.

「으엑, 이게 뭐야.」

=기플라족하고 아르주앙은 공생한다고 했는데 공생한단 말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이야기잖아요. 즙만 먹는 아르주앙이 기플라족과 식량을 공유받는 것도 아닐 테고, 또 식량은 기플라족한테도 매우 중요할 테죠. 그럼 받는 건 한정적이잖아요?=

=그래도 소, 소변을 받아먹는 건 좀…….=

「으, 비위상해.」

환연은 마시던 감귤 주스, 주황색 음료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가 슬그머니 밀어낸다.

그녀가 본 것은 팬티를 벗은 여자 기플라족의 아랫도리에 붙어 무언가를 마시는 수컷 아르주앙과 남자 기플라족의 성기를 물고 뭔가를 받아 마시는 암컷 아르주앙이었다.

페도필리아가 생각할법한 그런 종류의 음행은 1%도 섞여 있지 않은 광경이지만 안느에게는 무척이나 기괴한 광경이었을 터.

=오, 오라버니이.=

그때 백려강이 퍽 당황한 얼굴로 후다닥 달려와 환인의 등에 매달렸다.

무슨 일일까 싶던 환인은 느릿느릿 그녀를 따라오던 수컷 아르주앙을 발견했다. 그 아르주앙은 잠시 백려강을 바라보다 시무룩한 몸짓으로 되돌아간다.

긴장한 것처럼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백려강은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환인과 언니 친구에게 조금 붉어진 얼굴로 손을 작게 흔들었다.

=다른 게 아니구요. 화장실을 찾는데 갑자기 저 아르주앙 분이 다가와서 얼굴을 그…… 아래로 들이미시길래…….=

「흐엑. 기플라족 것만 마시는 게 아니었어?」

=네? 뭘…… 설마.=

아영을 포함한 여자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안 좋아진다.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린 안느가 이건 생리적으로 무리라는 표정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도령, 방랑자의 안식처 꺼내자. 처음에는 기플라족하고 어울려서 자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오라버니. 저, 저도…….=

백려강은 화장실이 급한지 안짱다리를 한 채 꼬물거리는 몸짓이 애처롭다.

‘작은 마을이나 촌락은 이질적인 풍습이 강하군.’

도시는 여러 문화가 섞여서인지 거부감이 적어 통용적인 문화권처럼 느껴졌는데 마을이나 도시의 규모가 작을수록 이질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힌로를 불러 집을 설치할만한 장소의 안내를 부탁하는 한편 환연에게는 이실리테와 유르파를 불러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슬슬 연회 참여 인원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남은 사람들도 춤추느라 지치고 졸린 지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옆 사람의 어깨에 기대 잠드는 상황.

=환인 님. 이쪽이에요.=

쿠알에게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힌로가 도도도 달려와 환인을 마을 가장자리로 안내했다.

「성제님.」

알몸의 백려강을 끌어안고 죽은 듯이 잠들어있던 환인은 귓가를 울리는 영혼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평소와 달리 룩소미의 보호 방벽은 설치하지 않고 이모렐과 청옥 영혼들로만 불침번을 세웠는데, 그 이모렐이 방에까지 들어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형종의 대규모 습격 징조입니다. 마을 밖 통로를 순찰하던 대원들의 보고입니다.」

체내 시계의 느낌으로 이제 새벽이 다가오는 시각임을 알아차린 환인이 몸을 일으키자 알몸으로 그의 팔베개를 하고 있던 백려강도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라버니……? 앗, 이모렐 씨.=

천인체를 써서 불침번 역할을 도맡아 하는 그녀가 침실에 들어왔단 사실. 그게 가리키는 바를 깨달은 백려강이 얼른 일어나 파자마를 입고 거실로 뛰쳐나간다.

[언니들! 이형종 습격인가 봐요!]

방문 밖에서 여자친구들을 깨우는 백려강의 목소리와 부산스러워지는 소릴 들으며 환인도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징조가 있었지.”

「5분 전입니다. 단번에 덮칠 생각인지 28곳의 통로가 넓어지는 지점에 군대처럼 모여들고 있습니다.」

“나가서 기플라족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라.”

「예.」

이모렐이 창문을 통해 나가고, 옷을 다 입은 환인은 탁자 위의 침대 바구니를 덜걱덜걱 흔들어 「흐얏…!?」 환연을 깨웠다.

「머, 뭐야. 몬데…?」

“적습이다. 정신 차리고 준비해라.”

「적, 적? 감시 범위 안에 아무것도…… 아~. 운도 좋게 범위 밖에 모여있나 보네.」

아무리 봐도 환연의 정령 감시는 제약 있는 프로그래밍에 가까운 느낌이군.

아스펜드까지 허리에 찬 환인이 거실로 나가자 등대의 빛을 챙겨 입던 안느가 그에게 물었다.

=도령. 적의 수는 어느 정도야?=

“환연의 감시 범위 밖이라 정확한 것은 모른다. 이모렐의 보고에 따르면 통로마다 수십 마리가 모여있다니 많게는 수백 마리 정도 되겠지.”

부우우우우웅—

밖에서 울려 퍼지는 묵직한 뿔피리 소리에 잠깐 고개를 돌렸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두 무리로 나누었다.

“이실리테, 아영, 노른은 동쪽 출구를 맡아라. 안느와 백려강, 환연은 서쪽을 맡고 유르파는 이모렐을 데리고 안식처에서 대기하십시오.”

=응.=

=예.=

=자기, 나도 가서 돕는 게 좋지 않을까?=

“그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닙니다. 출입구 통로는 둘 뿐이니까요.”

그리고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기에 환인도 이번에는 참가할 생각은 없었다.

=아, 응.=

이어 환인의 중급 정령 강령을 받은 여자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마을에서 두 개뿐인 통로로 향했다.

기플라족과 아르주앙도 활과 석궁, 창과 검 같은 무기를 쥐고 두 통로로 나뉘어 몰려가고 있다.

“…….”

방랑자의 안식처 지붕에 올라가 그 광경을 가라앉은 눈빛으로 보던 환인은 아르주앙과 몇몇 기플라족에게 정령을 강령시킨 뒤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여러모로 미궁과 흡사한데…….’

쿠알과 힌로의 이야기에 따르면 미궁과 처음 연결된 통로는 지하 300m 지점이라 했다.

말이 지하 300m지 이 정도면 현대의 탄광 깊이와 비교해도 절대 꿀리는 편이 아니다.

약 40~50년 전 탄광의 깊이가 석탄공사 관할의 경우 평균 300m에 민영 탄광은 150m 남짓인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만큼 깊은 곳에서 이형종이 지표면에 가깝게 기어 올라와 마을 주변 농장에 산란장을 만든 이유, 그리고 분명 한 마리도 빠져나가는 일 없이 전부 처리했음에도 이런 습격이 벌어진 상황.

미궁이 이 마을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유라면 역시 대현자가 만들었다는 이 마을의 시스템이겠지.

=자기. 신경 쓰이는 게 있는 표정이네?=

빗자루를 타고 지붕으로 날아온 유르파의 질문에 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알아낸 것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으음. 진짜 생각할 게 많은 주제구나…….=

“대현자도 미궁의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미궁의 실상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대현자도 숨기는 게 적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미궁의 의도 따윈 알 바 아니다. 이번 습격이 끝나면 곧장 미궁을 찾아 내려가 쓸어버릴 생각이니까.

신경 쓰이는 것은 대현자.

=그만한 지식을 가지고도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고 이블팩션 접경지 오지에서 은거하는 사람……. 수상함이 꿀처럼 뚝뚝 흘러내리는걸.=

“대성녀가 방향을 알려준 것을 보면 최악의 막장 성향은 아니겠지만, 역시 가기 전에 단단히 준비해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 자기 덕분에 공간 도약이 계속 버전업 되고 있거든. 외부의 공간 간섭에 저항하면서 안전하게 도약하는 방식도 거의 완성 단계니까, 나도 좀 더 집중해서 이탈 수단을 만들어놓을게.=

“괜찮습니까. 지금도 하는 일이 많을 텐데.”

=아영이 전용 자궁문신도 이제 시술한 뒤에 조금씩 조율만 하면 끝나는 단계야. 마도구 연구도 거의 끝났고 소형화랑 대형화도 거의 마무리했고.=

소형화와 대형화라는 이야기에 환인이 드물게 잠깐 침묵하다 물었다.

“……그거 혹시.”

=후흐흐. 맞아. 거인 주술사 아가씨. 생각해보니까 어느 한쪽을 작게 만들거나 크게 만들지 않아도 되겠더라고. 거인 아가씨를 5m 정도로 줄이고 자기를 5m로 키우면 서로 몸에 가해지는 부담도 줄어들고 소비되는 위상력과 재료도 줄일 수 있…….=

와아아아아—!!

전투가 개시되었는지 양쪽 통로에서 기플라족의 함성과 함께 전투의 소음이 마을을 채우기 시작했다.

술법인지 빛 구슬을 띄워 광량을 확보한 채 벌어지는 전투.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이형종의 등급은 1급부터 3급이 각각 60:25:5 비율이다.

이실리테 쪽은 통로 좌우로 아르주앙이 벽을 쳤고 통로 안으로 노른이 폭풍 바람을 날려 갈아버리거나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가 날아 들어가 이형종을 토막친다.

30명에 이르는 기플라족도 열심히 화살과 볼트를 쏴서 공격을 퍼붓고 있다.

반대쪽의 안느가 있는 통로도 상황은 비슷했다.

안느가 입구를 틀어막고 있으면 환연이 적당히 불을 지르거나 무수한 바람의 칼날을 날리고 백려강이 벼락 화살을 날려 이형종을 지져버린다.

상황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플라족은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고 있고 아르주앙도 자신이 맡은 역할이 뭔지 알고 그에 맞춰 딱딱 움직이는 중.

독을 쓰는 곤충 이형종이 등장하지만, 안느도 이제 수준 높은 질병과 독 해제 성술을 쓸 수 있고 아영은 애초에 성술의 전문가인 7급. 모종의 사고 따윈 발생할 이유도 없다.

“흠. 이걸로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치열하긴 하지만 뭔가 필사적인 느낌은 아니다. 환인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중 마을 한복판 땅속에서 일월급 암살자 영혼, 소위가 날아오르더니 환인에게 쏜살같이 다가왔다.

「성제님. 땅속에서 이형종이 굴을 파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마을과 통로가 되어 이형종이 쏟아져나올 겁니다.」

“숫자는 어느 정도지.”

「어림잡아 200체, 등급도 2급부터 4급까지 다양하며 적의 종류도 온갖 곤충을 모아놓은 형태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소위가 나온 곳으로 향하며 광명창을 뽑아 들고 그리모암의 강력 효과를 발동했다.

=자기! 나도 도울게!=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몸 좀 풀 생각이니 멀리서 지켜보십시오.”

그가 괜찮다고 했지만 유르파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홀로 군대를 상대하러 가는 자기 남자를 어떤 여자가 맘 놓고 편히 구경할 수 있겠는가.

뭔가 일이 생기면 그동안 만들어둔 마도기와 마도구를 죄다 쏟아부을 생각을 하던 유르파는 순간 땅이 싱크홀처럼 쑤욱 꺼지는 광경에 지팡이를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쓰스스스스-

사사삭, 사사사삭-

칫칫칫칫칫칫

씨이이익, 쒸이이익-

약 20m 지름의 구덩이 속에서 최소 2급에 최대 4급의 온갖 곤충형 이형종이 쏟아져나온다.

그야말로 고독을 만들기 위한 항아리 속에서 온갖 해충이 쏟아져나오는 모양새.

크기도 사람을 가볍게 능가하는 것들이라 곤충 특유의 끔찍함이 뒤섞여 배가 되는 가운데 환인의 광명창이 태양처럼 빛을 내뿜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창극의 주변에서 하나둘 너울거리는 빛의 줄기가 흐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여덟 줄기가 되어 태양의 플레어처럼 그의 팔과 창을 휘감고 너울거린다.

창이 아니라 빛으로 이루어진 무언가처럼 보이는 광명창이 그의 손에서 한차례 휘둘러지니 허공에 빛의 난잡한 선이 그어지며 마악 구덩이를 빠져나오려던 이형종이 모조리 토막 나 흩뿌려졌다.

피도, 체액도 한 방울 튀지 않는 기괴하고도 불가사의한 광경.

멀리 떨어진 유르파의 몸이 살짝 떨릴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기백과 압도적인 공격에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던 모든 이형종이 어그로가 끌린 것처럼 그를 덮친다.

얼핏 봐서는 이형종의 해일이 사람을 덮치는 듯한 광경.

하지만 위기는 없었다.

황금빛 아우라에 태양 빛을 팔에 휘감은 그가 한 번 뛰어들 때마다 빛의 선이 어지럽게 어둠 속을 수놓고, 그럴 때면 모든 적이 풀이파리처럼 어지럽게 휘날린다.

그뿐만 아니라 한때 나인볼그라는 이름을 가졌던 광명창이 제 스스로 빛의 칼날을 너울처럼 뻗어 이형종을 썰어버리기까지.

유르파는 광명창의 빛으로 그림자가 지는 그의 뒷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연회의 커다란 모닥불이 그의 모습에 덧씌워지고 있었다.

샛노랗고 새하얀 불길의 춤, 장작이 터지며 튀어 올라 흩날리는 불티. 타오르는 무언가의 냄새와 쏟아지는 열기.

=…….=

거대한 불길을 연상케 하던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을 때, 구덩이 주변에는 죽어 토막 난 이형종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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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어제는 하루종일 ai만 붙잡고 있었습니당

화려한 채색의 일러스트도 좋지만 펜으로 슥슥 그린듯한 초상화 같은 일러스트도 좋네용...

안느의 표지감도 하나 뽑았고 이실리테의 초상화도 한 장 획득했습니당

물론 19금도 몇 장... 므흐흐

ai 일러스트가 웹소에 좋은 점은 그저그런 언오가닉 데이터 쪼가리에 약간의 스토리를 넣어 좀 더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점이 아닐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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