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72화 (672/813)

672 땅속 마을 베르헨

환인이 느끼기에 기플라족은 초등학생의 외모답게 속도 여렸다.

이것 덕분에 기플라족이 멸망했다는 공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정도라고 할까.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살아가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호승심과 투쟁심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가뜩이나 생명체에게 적대적인 니오네브레스의 환경인데 거세된 숫말처럼 호전성이 사라진 종족은 그저 몰락해 사라질 뿐.

기플라족의 이장 대리인 쿠알은 협상이나 거래는 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가진 패를 전부 까놓고 줄 수 있는 보상 또한 처음부터 최대한으로 보여주었다.

힌로는 말해서 무얼 할까.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진해서 노예가 되려 했다.

기플라족이 다른 종족과 부대끼지 않고 이런 평야의 땅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이들 선조의 선견지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먼저 마을부터 돌아보겠습니다.”

=그러면 안내를…….=

“쿠알 씨. 바쁘지 않다면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힌로가 따라나서려는 기색에 재빨리 쿠알을 지목한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함께 그녀의 집을 나와 기플라족의 마을, 베르헨을 둘러보았다.

‘평화롭군.’

도무지 이형종과 전쟁 중인 마을로는 안 보인다.

동화 속 작은 마을이라 불러도 될 만큼 흙과 잔디와 풀과 나무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곳곳에서 기플라족이 농사……라기보단 텃밭을 가꾼다.

아낙이라고 해야 할지, 초등학생 같은 여자아이들은 빨랫감을 가져와 빨래 중이고 남자아이들은 한데 모여 무언가를 깎고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다.

“…….”

환인은 잠깐 멈춰서서 양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다들 아이로밖에 안 보이니 인지 부조화가 극심하다. 생각과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살펴보자 좀 전과 다르게 풍경이 다가온다.

여자 기플라족은 전투를 치르며 피 묻은 빨랫감을 냇가에서 빨고 있다. 남자 기플라족은 화살을 만들거나 활을 깎고 석궁을 제작 중이며 일부는 그렇게 만든 활과 석궁으로 사격술을 훈련하고 있다.

마을에서 얼마 안 되는 밭에는 남녀 기플라족이 협동해서 비교적 빨리 자라는 작물을 수확하고 다시 심고 있었다.

무, 파, 당근, 시금치 같이 대략 한달 내외로 자라는 것들이다.

거름으로 보이는 것도 땅에 섞고 잔디밭을 갈아엎으며 경작지 면적을 늘려가는 곳도 있다.

누가 봐도 굶어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

“…….”

환인이 이쪽을 발견하곤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소년 소녀들……. 기플라족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고 있을 무렵 여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땅속이라고는 믿지 못할 만큼 녹음이 푸르네요.=

=천장에서 쏟아지는 이 빛 말이야. 지상의 햇빛이랑 똑같은 거 같지 않니?=

「정령들이 기운차게 돌아다니는 거 보면 그런가 봐.」

=유리 언니. 혹시 여기가 미궁이 아닐까요? 팔라툼의 잊혀진 옛 도시 미궁 1계층처럼요.=

=그럴 수도 있겠네…….=

이실리테가 내놓은 뜻밖의 관점에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개방형 지하 미궁이라고 하면 제법 말이 된다고 여겨졌던 거다.

환인도 기플라족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닥이나 벽을 돌아보았다.

“미궁은 아니다. 벽이나 바닥에 미궁 특유의 회로가 보이지 않아.”

그렇다고 위상력이나 정령력 같은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영혼의 눈으로도 유추해내지 못한 현상에 유르파는 호기심이 동한다는 얼굴로 마을 이장 대리인 쿠알을 불렀다.

=이장 씨한테 물어볼까? 쿠알 씨, 저 천장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빛나고 있는 걸까요?=

천장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위쪽을 가리키며 묻자 쿠알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우리도 잘 몰라요. 여기에 터를 잡은 선조님이 대현자님이랑 뭔가를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지도 의문이라서요.=

대현자? 여자들의 눈빛이 변하며 염소수염이 작게 난 쿠알을 둘러쌌다.

=대현자라고요? 그게 언제적 이야기죠?=

=어, 대충 400년 전쯤……?=

=베르헨을 만드는데 대현자님이 도와주었다는 말씀이시죠…?=

=예, 예.=

자기보다 50cm는 더 큰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쿠알이 주춤거리며 하는 대답에 여자들이 시선을 나눈다.

=이 마을을 만드는데 도와준 대현자와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대현자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400년 전 사람인데 400년 이상 사는 종족은…….=

「잠깐, 대현자가 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있잖아.」

환연의 이야기에 어……. 하고 서로를 보는 여자친구들.

그녀들 사이로 들어간 환인이 쿠알에게 직접 물었다.

“그 대현자라는 분의 생김새나 외형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두껍고 튼튼한 후드 망토를 쓰고 거친 로브를 입은 사람이라고만 들었어요. 전대 이장님한테요.=

「그 전대 이장님은 전전대 이장님한테 들었고?」

=예.=

그런 거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

버릇이나 행동을 안다면 조금의 힌트가 될 수 있겠지만 무려 400년 전의 이야기다. 문서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구두로 전해지는데 신뢰성은 언급할 가치도 없겠지.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

“위상력이나 정령력, 하다못해 마력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저런 빛 발생 장치를 만들었고 그게 400년이나 멀쩡히 작동하고 있다. 저걸 정말 대현자가 만들었다면, 일반적인 사람일 리는 없겠지.”

=…갑자기 긴장감이 치솟는걸.=

=그러게요……. 정체불명의 기술을 쓰는 사람이라니, 보통은 위험한 사람일 텐데……. =

유르파와 백려강의 대화에 환인의 곁에서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이실리테가 그녀들에게 질문했다.

=저는 유리 언니에게 듣기 전까지 대현자라는 인물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지만요. 유리 언니나 려강은 대현자에 대해 들은 적 없나요? 언니와 려강이 들은 게 이곳을 만든 대현자와 같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무어라도 정보를 모으면…….=

=그러네. 난 대현자가 여자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삼라만상에 통달했다고 들었어. 그렇게 얻은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고 다녔다는데 그게 40년 전에 파르히스트에서 책으로 본 거거든.=

파르히스트에서 한창 비술사로 공부하던 시절에 본 거라고 이야기라고 하자 환연이 물었다.

「그 책은 언제적 책이었는데?」

=……그때 기준으로 13년 전쯤?=

「만약 인간이고 살아있다면 할머니일 수도 있겠네. 백려강 넌?」

=저, 저는 그냥 그런 분이 있다는 정도만 들어서… 지식이 짧아서 죄송해요.=

=저는 아예 대현자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는걸요.=

이실리테가 자신은 아예 몰랐다며 그녀를 배려하는 사이 환인은 전혀 다른 가설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현자가 애초에 사람이 아닐 가능성, 그리고 삼라만상을 깨우쳤다는 것도 그 시대 사람들의 착각이고 대현자는 처음부터 방대한 지식을 보유했을 가능성 말이다.

‘대현자가 은거했다는 천암 산맥 근처에 이런 마을이 만들어져 있는 것부터가 의심스럽다.’

애초에 천암 산맥에 은거한 것이 아니라 본거지가 천암 산맥이고, 모종의 이유로 대륙을 활보하며 정보를 모으고 활동한 거라면?

사람들을 지식으로 도운 게 아니라 재료 수집 같은 활동이 왜곡된 거라면?

‘이건 너무 억측인가.’

베르헨 마을이 400년간 무탈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선인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좋은 일이라 마을을 대강 둘러본 환인은 쿠알에게 가까운 농장으로 가보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농장이요? 그러면 아르주앙들을 불러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주세요.=

“괜찮습니다. 깊이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주변만 둘러보고 올 뿐이니까요.”

환인의 이야기에 이실리테가 다중 검기 세 자루를 꺼내 휙휙 날려 보이자 쿠알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걸 바라보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가까운 첫 번째 농장은 감귤 나무 여러 그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10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여기도 빛이 내리쬐고 있네…….=

감귤의 새콤한 냄새가 가득한 공동은 열 명의 아르주앙 병정과 일곱 명의 기플라족이 지키고 있었는데, 규모만 적다뿐이지 베르헨 마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베르헨 마을의 규모를 대폭 줄여서 만든 농장이라는 느낌.

여긴 괜찮았지만 문제는 두 번째 농장부터였다.

=으악, 이거 다 뭐야!=

첫 번째 감귤 농장과 마찬가지로 천장에서 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정작 농장은 온통 하얀 실로 뒤덮여 곳곳에 고치가 형성된, 괴물의 산란지가 되어있었던 것.

더욱이 천장에도 거미줄이 뒤덮여있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빛을 거미줄이 산란시키니 농장 전체가 어둑어둑해 병들고 오염된 땅을 보는 기분이다.

쉬이익-!

취시시식-!

쿠알이 기겁하는 와중에 100평 남짓한 공간을 채우고 있던 실루와 비슷한 크기의 흉측한 거미 이형종들이 달려들었다.

펄쩍 뛰어 덮쳐드는 검은색과 붉은색 거미.

지네처럼 질주하듯 달려드는 녹색과 노란색의 거미.

주둥이에서 독액을 뿜는 붉은색과 회색의 거미.

방적돌기에서 거미줄을 쏘아내는 회색과 노란색의 거미.

=어딜!=

유르파의 방호 술법이 펼쳐지는 동시에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와 백려강의 화살이 날아가니 수십 마리의 거미 이형종이 체액을 흩뿌리며 토막 나거나 대가리에 화살이 박혀 바르작거린다.

=……!=

거미 이형종이 한순간에 쓸려나가는 장면에 쿠알의 표정이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눈을 반짝이는 어린아이처럼 변해간다.

강하다는 이야기를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강할 줄 몰랐다는 표정.

그 순진한 모습에 작게 웃은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실리테. 고치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보아야겠다. 하나 찢어봐라.”

=네.=

기사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둘러지자 촥— 가벼운 소리와 함께 고치가 겉만 베여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쏟아지는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반투명한 거미 새끼 수백 마리.

=꺄악!=

질겁한 유르파가 지팡이를 꺼내며 환인에게 애원했다.

=자기, 이거 전부 태워버리자!=

“밀폐된 곳에서 불을 일으키면 산소 고갈과 탄소 가스 증가로 목숨이 위험해집니다.”

=그 부분은 괜찮아! 그럴 때 쓰는 비술도 있으니까!=

폐쇄된 공간에서 불을 키면 소리도, 냄새도 없는 독이 사람을 죽인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한 대비 또한 있다고.

그리 말한 유르파는 일행에게 녹색의 보호막을 걸고는 가슴골에서 부적 몇 장을 꺼내 휙 뿌렸다.

그러자 부적을 중심으로 대기가 떨리며 부적으로 흡수되는듯하더니 샛노란 불길이 확— 퍼져 나와 농장을 하얗게 뒤덮은 거미줄과 고치를 깡그리 불살라버리기 시작했다.

절묘하고 섬세한 위력 조절로 땅과 벽은 내버려 두고 거미줄과 고치, 죽은 거미 사체만 태워버리는 샛노란 불길.

「왜지? 거미줄이랑 고치가 싹 타버리는 거 보니까 속이 시원해.」

「기분 좋아!」

혐오스러운 하얀색으로 뒤덮인 땅이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녹색으로 돌아가는 장면에 여자들은 왠지 모를 상쾌함과 후련함을 느끼며 탄성을 질렀다.

환인 또한 유르파의 절묘한 컨트롤에 속으로 감탄하던 중 어느 한 곳에 시선을 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벽과 천장 쪽으로 모종의 기운이 흘러 들어간다. 저 모습은 마치…….

‘미궁이 에너지를 흡수하는 모양새인데……. 그래, 그런 거였나.’

=끝!=

짝, 유르파가 한차례 손뼉을 쳤을 때 두 번째 농장을 차지하고 있던 거미 새끼들과 고치, 거미줄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커다란 거미는 시커먼 재가 되어있었고 밭에 심어져 있던 작물은 말라 비틀어지거나 썩어있었지만, 저것들을 모아서 흙과 섞어 발효되게 한다면 질 좋은 거름으로 재탄생하겠지.

=대, 대, 대, 대단해요!!=

쿠알이 모두를 여신처럼 우러러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도 그럴 것이 농장을 되찾기 위해 몇 번이나 공략을 시도했지만 피해만 입고 물러나기 일쑤였다.

농장을 차지한 이형종을 처리하긴커녕 싸우다 보면 그 소리에 모여든 이형종의 공세에 버티질 못한 것이다.

몇 차례 공습으로 적의 수를 줄여놓아도 며칠 뒤면 원상복구 되는 데다, 공격을 받은 데 대한 앙갚음인지 며칠간 적의 공습이 심해져 어찌할 도리 없이 메말라 죽어가던 상황.

그랬는데 고작 세 명이 산책하듯 농장을 원상복구 시키다니……!

두 번째 농장에 이어 세 번째와 네 번째 농장도 상태는 대동소이했다.

종은 달랐지만, 농장을 차지한 이형종이 산란장으로 만들어 새끼를 치고 있거나 새끼를 키우고 있었던 것.

다섯 번째 농장은 더욱 문제였다.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한 녹색의 키틴질. 구역질을 유발하는 반들반들한 곡선과 각선의 몸뚱이. 환 공포증이 있다면 마주한 순간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빼곡히 뒤덮은 검은 반점.

눈알은 악마의 눈처럼 허여멀겠으며 몸 곳곳에 솟은 뾰족한 가시는 찔리면 몸이 꿰뚫릴 정도로 흉악하다.

날아오르면 따다다다닥, 불쾌한 소음이 울려 퍼지고 악마도 저것보단 순하게 생겼을 법한 아가리를 오물거리며 살점을 씹고 피를 빤다.

그런 여치 과 3급 이형종만 40여 마리에 가까운 300평 넓이의 산란장.

베르헨에서 가장 큰 농장이었던 산란장에는 명백한 포유류의 사체가 공급되고 있었던 것.

“몇 주만 늦었다면 베르헨은 더 못 버텼겠군.”

=그러게. 설마 밖에서 괴물이나 동물을 사냥해 양분으로 삼고 있었다니.=

=오라버니. 이 이형종들, 역시 개방형 미궁의 이형종이겠죠?=

“그래.”

이 산란장의 이형종이 전부 베르헨에 몰려들었다면 기플라족은 1시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이실리테에게 모조리 토막 난 이형종의 사체 무더기 한복판에서 쿠알은 안도와 공포가 카오스처럼 뒤엉키는 기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강력하고 강대한 여행자님들이 작금의 사태를 해결해주실 것이다.

이실리테 님 홀로 이 방의 모든 이형종을 쓰러트리셨는데 유르파님 은 오면서 말씀하셨다. 그녀만큼이나 강한 분이 마을에서 동족들을 치료해주고 계신 안느 님이며 저 검은 머리의 여행자님은 그런 두 명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시다고.

그러니 이형종은 모두 사라질 게 틀림없다. 여기에서 오는 안도감이 첫 번째.

그리고 이 사태가 해결되더라도 차후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데서 오는 극심한 불안감이 두 번째다.

같은 일이 재현될 경우 그때도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것인가.

착하고 순수한 기플라족이지만, 쿠알이지만 그래도 상식은 있다.

이번 일은 기적처럼 찾아온 일이라고,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이라고 부른다고.

“이형종이 여기까지 나와 번식을 시도했다는 것은 미궁이 영역을 넓히려는 의도로 해석해도 무방하겠지.”

=개방형 미궁의 확장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거구나. 이게 학계에 알려지면 소란이 크겠네.=

=아무래도 개방형 미궁과 인접한 마을이나 도시가 경각심이 커지겠죠…….=

이야기를 나누며 위상석을 찾아 챙기는 여자들. 환인은 그런 여자들을 지켜보다가 환연에게 농장의 땅을 전부 헤집으라고 지시했다.

「땅은 왜?」

“메뚜기는 땅속에 알을 낳는다. 불로 표면만 태워봤자 무의미한 일이지.”

「불로 태우기 전에 꼼꼼히 확인하라는 거구나.」

그의 말대로 땅의 중급 정령을 부른 환연은 땅속에 가득한 사람 주먹만 한 메뚜기 알을 볼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태어날 듯이 꿈틀거리는 주먹만 한 메뚜기 알.

그것을 근접 접사 느낌으로 본 환연이 꺅 비명을 지른다.

「으으으으~!」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끔찍한 것을 보고 만 환연이 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환인의 어깨를 토닥토닥 때렸다.

그러면서도 땅의 정령에게 지시해 착실하게 농장의 땅을 뒤집는다.

여자들은 환연의 난데없는 앙탈에 어리둥절 해하다가 그걸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

자기들 주먹만 한 반투명 알 속에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애벌레도 아니고 곤충도 아닌 것들. 저런 걸 코앞에 들이밀면 당연히 경기를 일으키지…….

이글거리며 위상력에 의해 타오르는 농장과 거기서 나오는 모종의 에너지가 벽을 통해 흘러 들어가는 장면.

환인은 그걸 잠시 바라보다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나머지 다섯 곳도 정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환인은 아직도 공황에 빠져있는 쿠알의 어깨를 짚으며 평온의 파동을 펼쳐주었다.

열 군데의 농장을 모두 정리하고 베르힌 마을로 돌아온 환인은 마을을 나설 때보다 상태가 조금 더 좋아진 쿠알에게 주의를 주었다.

“농장을 전부 정리했다지만 땅굴에 가득한 이형종은 하나도 정리되어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강한 이형종이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르니 혹시라도 농장을 개간하겠다고 밖으로 나가는 분이 없도록 마을 사람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당부해주십시오.”

=예.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은인님,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은인님들을 위해 빈곤하지만 작은 연회를 열고 싶어요. 부디 참석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모처럼 희망에 찬 쿠알의 부탁을 환인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승낙하며 이실리테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눈치 빠르게 보존 가방에서 많은 고기를 꺼내 나누어주는 이실리테.

=여기까지 오면서 사냥한 동물의 고기에요. 연회에 써주세요.=

=이렇게나 많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짐수레를 가져와 수백 명은 배불리 먹을 만큼의 고기를 받은 쿠알은 기쁨이 넘쳐 흐르는 얼굴로 꾸벅꾸벅 허리를 숙인 뒤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잠시 후 기플라족이 모인 자리에서 귀엽고 자그마한 함성이 울려 퍼진다.

평범하게 들어도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목소리.

작게 웃으며 힌로의 집으로 돌아온 유르파는 에구구, 신음을 흘리며 늘씬한 다리를 쭉 뻗고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갸웃한다.

=안느 아가씨랑 아영이는 아직 안 돌아왔네. 치료할 사람이 많은가? 많으면 광역 치유로 금방 치료할 수 있을 텐데.=

=둘이 붙어있으니까 의외로 치료는 일찍 끝내고 다른 일을 돕고 있을 수도 있겠죠. 주인님이랑 우리가 나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테니까요.=

유르파가 스스로 허벅지를 주무르는 모습에 백려강이 =언니, 제가 안마해드릴게요.= 다가가 그녀의 허벅지를 주물러주기 시작한다.

=그러려나? 아얏, 아야야. 려강 아가씨 살살…!=

=그나저나 토굴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니까 미궁을 돌파하더라도 뒷정리에 시간이 오래 걸리겠어요. 통로에 이형종이 얼마나 퍼져있는지도 모르고 땅굴이니까 복잡하기도 할 테고…….=

=그거 말인데요. 환연이 정령으로 지도를 만들면 안 될까요?=

「아~.」

은근히 귀찮음이 묻어나는 반응에 이야기를 꺼냈던 백려강이 살짝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밤이 찾아오는 걸까. 베르헨이 점차 어두워져 간다.

마을 곳곳에 불이 켜지고 마을 중앙 공터에는 더욱 큰불이 켜진다. 자그마한 아이들이 모여 캠프파이어를 하는 것처럼 장작을 쌓고 이실리테가 나누어준 고기를 굽는다.

어디선가 향신료나 반찬으로 쓰이는 야채도 가져와 굽고 볶고 데치고 삶으며 고기 말고도 다른 요리를 만들어나가는 기플라족들.

집의 경계를 가르는 담장에 걸터앉아 그 장면을 바라보던 환인이 그녀들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영혼 열다섯에게 토굴의 지도를 만들라고 지시를 내려놨다. 미궁을 없앤 뒤 지도가 완성되길 기다리며 며칠 머무른 다음 소탕에 들어가면 될 거다.”

「어? 오, 확실히 그런 쪽은 정령보다 영혼이 더 일 잘하겠네.」

유르파를 안마해주는 백려강의 머리 위에서 그녀의 뿔을 잡고 심술을 부리던 환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거야…?=

「상급 정령은 자존심이 세서 잡일에 부르면 막 화내고 중급 정령은 어린애들이라서 그런 복잡한 일 못 해. 그래서 지도를 만들려면 중급 정령을 직접 움직이면서 정신을 집중한 채로 펜을 잡고 그림을 그려야 해.」

=아…….=

그래서 심술부리고 있는 거였네.

환연이 자신한테 심술부리는 이유를 눈치챈 백려강이 작게 웃음 짓다가 자신의 꼬리를 덥석 끌어안고 뒹구는 노른의 행동에 꺅, 작게 비명을 지른다.

그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실루도 다다다 달려가 그녀의 배에 박치기를 먹이니 백려강은 한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들을 품에 꼭 끌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앗, 안느 언니랑 벨이 저기 와요.=

=그러면 우리도 음식을 좀 만들어볼까요?=

=음식이요? 연회에 참석한다고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셨는데….=

=네. 연회에서 내놓을 음식이에요.=

=아! 네, 저도 도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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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당

진짜 하루가 36시간이었으면 좋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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