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 히아리드 대평야
* * * *
온갖 고가의 석재石材로 깎은 가구가 가득한 종유굴.
따스하고 축축한 습기로 가득한 동굴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일곱의 남녀 사비족을 비추고 있었다.
말없이 마주 보고 앉은 그들의 앞 테이블에는 수정구에서 흘러나온 빛이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걸 묵묵히 지켜보던 검푸른색 비늘의 사비족이 서양 용처럼 생긴 긴 주둥이를 열었다.
=그러니까, 나사라트의 암살단 지부 위치가 알려진 것이 성제의 작품이라는 결론이지.=
=물적 증거는 없지만, 심정적으로는 9할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보리색 동글동글한 도마뱀 머리의 사비족이 포용감이 가득한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적색 비늘의 사비족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은 듯 뱀의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위협적인 쇳소리를 흘렸다.
=쉭-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책임? 무슨 책임? 팔주 당신이 나사라트의 지부 하나를 괴멸시키고 그쪽과 단단히 사이가 틀어진 책임 말하는 겁니까?=
=네년…….=
=그만.=
검푸른 비늘 사비족의 묵직한 호통에 아이보리색 비늘과 적색 비늘의 사비족이 입을 꾹 닫는다.
좌중을 단번에 침묵시킨 검푸른 비늘 사비족이 나지막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었다.
=오늘 새벽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일주일 전, 나사라트의 특급 암살자 여섯이 니라인에서 소식이 끊겼다는 이야기다.=
=구주. 그 말은…….=
구주九柱라고 불린 검푸른 비늘 사비족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적색 비늘 사비족에게 답해주었다.
=성제가 머무른 붉은 바위 호텔에 핏자국이 있었으며 영주성에서 나온 기사들이 뭉개지거나 토막난 시체 여섯 구를 치웠다고 하였다. 특급 암살자의 피와 시체가 틀림없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각양각색의 사비족 다섯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급 여섯이 소리 없이 성제에게 살해당했다는 겁니까.=
=나사라트의 특급 암살자 여섯이면 소도시의 영주성도 털어버릴 수 있는 전력일 텐데…….=
=은신 감지를 해낸 것은 카락스의 차기 송곳니가 끼어있으니 그렇다 해도, 아무 소란도 없이 여섯을 쓱싹해버린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요.=
=성제의 영혼 기사들이 그렇게 강하다고요? 불과 2년 전 파르히스트 무투대회에 나와 피로했던 무력은 특급 암살자를 상대할 정도가 아니었잖아요?=
=그만한 급격한 성장은 전례가 없지 않아. 중요한 것은 성제야.=
=맞습니다. 영혼 기사들은 해치우고자 하면 문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성제는 이블팩션 군대 1만을 한순간에 쓸어버리는 대규모 집적 마술을 펼쳤어요. 그건 9급에 준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인맥 또한 역대 성자 중 독보적인데 여기에 정보 조작과 유포 능력, 정치력도 무시무시합니다.=
=우리 첩보부가 속아 넘어가 나사라트의 지부를 공격했을 정도이니까…….=
=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야. 아니면 암살해서 치워버리거나.=
=미쳤어? 상대는 유일 직업자라는 성제야! 그를 죽이면 영식이 얼마나 퍼질지 짐작도 안 되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죽어줄 수는 없지 않나!=
=상급 영혼사의 영식이 소도시의 권역 수준이야! 성제가 죽으면 대륙의 반절이 영식에 침범당할 텐데 우리가 성제를 죽였다고 알려져 봐! 그 즉시 대륙 전역의 공적으로 지목돼!=
=그러면 성제가 우릴 말려 죽이려는 걸 멀뚱멀뚱 지켜만 보자는 건가!=
회색 비늘과 노란색 비늘의 사비족이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자 다른 사비족도 회색 사비족이나 노란색 사비족의 편을 들며 언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언쟁에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던 아이보리색 비늘의 사비족이 상냥하고 포근한 목소리로 중단시켰다.
=이러다간 우리끼리 분열해서 자멸하겠군요. 구주님의 앞이니 자중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
=음…….=
=의견이 통일되지 않을 때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구주님의 말씀을 경청합시다.=
아이보리색 사비족의 비틀린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에 다섯 사비족, 팔주들은 속으로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미친년. 뭐가 구주님의 말씀을 경청이라는 거야? 구주 대신 독니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년이.
현재 구주는 허수아비나 다를 바 없다.
볼 거라곤 암살자로서 전례 없이 뛰어난 암살 능력과 전투능력에 용린족을 닮은 저 외모뿐, 단체를 이끌어나갈 재목은 절대 아니다.
평범했다면 정치 싸움에 패배해 기껏 칠주나 되었을까.
그랬던 놈이 구주가 된 이유는 저 미친년이 구주의 뒤에서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주시자의 눈이라는 희귀 직업. 앉아서 수천 리 밖을 내다볼 수 있기에 대도시의 제사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기술에 혼자서 열 명분의 서류 업무 능력을 갖춘 주제에 원하는 것은 구주를 돕는 것뿐이라니.
돕는 이유도 어처구니없다. 잘생겨서라니, 잘생겨서라니!
=성제와 싸우는 것은 안된다.=
=예. 구주님 말씀대로 성제와 싸우는 것은 최악 중의 최악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성제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친…… 구주의 독니가 개인에게 엎드려 조아려야 한다고!=
=이것도 제 심증일 뿐이지만, 카락스의 암살자는 전원 전직해서 성제의 사병이 되었을 겁니다. 영도에 틀어박혀 그가 원하는 정보를 물어다 주는 가마우지가 된 지 오래겠죠.=
=……!=
=나사라트의 암살단 지부가 각지에서 공격받고 귀족, 호족들의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도 카락스가 영도의 기관과 협력해 특급 암살자를 심문하여 빼낸 정보로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면 아귀가 맞아떨어집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사라트는 라드세아 헤뷜트 히스론드 메리아놀 4개국에서 동시에 공격받았다! 성제가 영도는 그렇다쳐도 다른 4국을 전부 움직였다고? 차라리 신이 강림한 화신체라고 하지 그러나!=
적색 비늘의 팔주가 지른 고함에 아이보리색 비늘의 사비족이 퇴폐적인 웃음을 지었다.
=거인숲 미궁에서 4개국 사절을 같은 자리에서 맞이해 홀대하고 수십 명의 태고적 거인을 거두어 영도에 심어놓은 것은 말이 됩니까?=
=…….=
=기분 나쁘겠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성제는 배부른 용입니다. 용의 코털을 뽑는 짓을 하면 뭘 하든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노란색 비늘의 사비족이 콧잔등 비늘을 잔뜩 찡그리며 묻는다.
=용의 코털을 뽑지 않더라도 가까이 갔다간 칠공분혈 할 텐데? 이쪽은 그쪽의 부하를 암살하려고 계획을 꾸몄잖아. 네 말대로 정치력도 절정급이면 이미 암살을 꾸민 것도 파악했을 거라고 봐야 하지 않나?=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죠. 멍청한 나사라트가 단독으로 돌진해서 들이받아 죽어준 덕분입니다. 대신 죽어준 동종업계 종사자분들을 위하여 박수.=
짝 짝 짝 짝…….
팔주들은 혼자서 손뼉 치는 아이보리색 비늘의 사비족을 미친년 보듯이 보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10번이나 손뼉 친 다음 말했다.
=숙이고 들어간다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봅니다. 그러면 성제를 공격했을 때를 가정해볼까요.=
성제 주변에는 알려지기로 5급의 희귀 직업자 검희, 7급의 희귀 직업자 정령 기사를 필두로 7급 비술사에 최소 5급 풍술사급의 녹색 쿠에가 있다.
여기에 7급 암살성직자가 최근 추가되었고 이블팩션 vs 니라인 전에서 삼쌍익의 궁수 존재도 알려졌다.
최소 중급 이상의 각종 속성 정령이 날뛴 흔적을 보면 최소 중급 정령사가 있는 게 확실시되는 상황.
나사라트의 여섯 특급 암살자도 실패했고 규모에서는 떨어지지만, 암살 실력만은 업계 최고인 카락스의 송곳니도 암살에 실패했다.
특급 암살자 여섯도 습격 도중 들켜서 제압, 조용히 살해당한 마당에 팔주 전원이 몰려간다면 오히려 더 들통나기 쉽겠지.
들키지 않으려면 소수 정예로 가야 하는데 저쪽의 구성과 전력을 보면 미친 짓이다.
여기서 9급으로 짐작되는 성제는 전력에서 제외했다.
=구주님이 온갖 강화 비약, 영약을 섭취하고 가셔도 암살 성공확률은 1푼 미만입니다. 자, 암살을 시도해서 실패했습니다. 상대는 성제, 영혼사의 유일 직업입니다. 어라? 영혼하고 대화할 수 있군요. 영혼이 된 구주님께 강제력을 발휘해 정보를 캐냅니다. 구주의 독니 조직 전반이 유출되었습니다.=
씨익…….
겉보기에는 푸근하지만, 퇴폐미를 풍기는 표정으로 미소짓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꺼림칙함이 밀려온다.
팔주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든 말든 아이보리색 비늘의 사비족은 계속해서 말했다.
=콰광! 누출된 구주의 독니 본거지에 니라인 앞마당에서 터졌던 청옥 혼령주가 폭발했습니다. 육주 미만은 전원 사망. 나머지도 붕괴한 동굴에 매몰되어 사망했습니다. 두 번째로 큰 지부, 세 번째로 큰 지부에도 차례대로 혼령주가 떨어집니다. 콰광, 콰광, 콰광.=
콰광, 소리를 입으로 낼 때마다 고막을 자극하는 쇳소리에 움찔거린 팔주들은 짜증이 극에 달해 살심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칠주, 팔주는 어떻게 살아남아 탈출했지만 대륙에서 이름 날리는 성제를 암살 시도했다는 사실은 모든 국가의 심기를 자극했습니다. 대륙 전체에 특급 현상수배가 내려졌습니다. 각국 정보단체와 첩보단체가 대대적으로 추적합니다. 군대도 수색에 힘을 씁니다. 모험가 길드와 탐험가의 성소와 술법사회도 참여하는군요. 영도와 친밀한 관계인 5대 교단도 나섭니다. 성제에게 잘 보이고픈 귀족 호족 부족도 앞다퉈 움직이고 손을 얹습니다. 전 대륙이 구주의 독니를 추적하는군요. 예. 구주의 독니는 멸망했습니다.=
=씨발……. 그래서 어쩌자고? 선물 바리바리 싸 들고 가서 바치고 살려달라빌란 거냐?=
=성제는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현재 중요한 용무가 있어 단독 행동 중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또 천리안을 썼냐?=
=여행 중에도 성제는 영도의 기반을 불리는데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대지를 떠돌며 성불행을 하는 것보다 영도에서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는 것이 영향력을 더 키우기 쉬울 텐데. 구태여 벨티칼 대산맥을 끼고 메리아놀로 향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생각 좀하고 말합시다. 라는 듯한 대답에 적색 비늘의 팔주는 혈압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손이 덜덜 떨렸다.
=우리는 성제의 그런 부분을 붙잡고 늘어져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자비를 바라는 것처럼, 안 들어주면 우리가 당신을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죽도록 성가시게 만들 수는 있을 거라는 것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게끔 잘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네년뿐이라고! 그런데 너는 여태껏 구골동을 나간 적이 없……!=
=그래서 이번에는 구주님과 저, 둘만 갑니다. 구주의 독니에 닥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구주님뿐이니까요.=
=…….=
=…….=
=…….=
아이보리색 사비는 꿀이 떨어질 듯한 눈빛으로 팔주들을 둘러보았다.
=눈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팔주들은 구주님과 제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물신님께 기도해야 할 겁니다. 구주님이나 저 둘 중에 한 명이라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구주의 독니는 2주 뒤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할테니까.=
으득.
히죽- 웃는 그 모습에 팔주들은 아이보리색의 사비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전투능력이라곤 없는 주제에 자신들을 아이 다루듯 우롱하다니!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를 죽이는 것은 간단하지만, 죽였다간 지금까지 이뤄놓은 모든 기반이 붕괴하는 것은 물론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저 미친년은 충분히 그런 상황을 만들어놓았을 년이니까.
* * * *
크허어엉—! 크갸—!!
“여기야 여기~.=
가슴이 뻥 뚫리고 머릿속도 상쾌해질 정도의 지평선뿐인 대초원.
멈춰선 마차를 배경으로 수영복 같은 것을 입은 여자가 라이온이터, 사자 면상에 털 한 올 없는 사람 몸뚱이를 가진 키 4m의 사족보행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
라이온이터는 신경질적으로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을 후려치려 하지만.
쉬이잉— 쉬리리리링—
캬아아악!!
그럴 때마다 여자의 팔에 걸린 나풀거리는 자주색 천이 예리한 소리를 내며 괴물의 팔을 저미고 포를 뜬다.
두 팔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새하얀 뼈가 드러났고 피를 쉴 새 없이 흘리고 있었다. 저대로 두면 조만간 실혈사할 정도.
가장 심각한 부위가 두 팔 부위라는 거지 얼굴도 광대뼈가 드러나고 있고 옆구리와 등도 온통 베인 자국에 피투성이다.
아영의 싸움법에 마차에서 구경하던 안느가 감탄한다.
=저런 전투법도 있구나. 역시 박투쪽은 아영이가 우리보다 한 수 위네.=
=위력도 위력이지만…… 동작이 하나하나가 세련되어서 무척 아름다운 춤처럼 보여요…….=
그때 아영의 움직임이 더더욱 화려해진다.
라이온이터의 공격을 무희가 춤추듯이 피하며 두 팔을 우아하게 움직이니 그녀의 팔뚝에 걸린 자줏빛 나비 무늬의 기다란 소매, 수의袖衣가 연검軟劍처럼 라이온이터를 난도질하기 시작한 것.
유심히 그 전투법을 눈에 담고 있던 이실리테가 감상을 내놨다.
=의복의 기능을 한껏 끌어내는 아영이다운 전투법이야.=
저런 5급 수준의 괴물을 일격에 분쇄해버리는 이실리테나 안느가 비정상이지, 평범한 직업자는 등급이 높아질수록 동급 이형종은 홀로 잡지 못하는 게 정설이다.
비록 아영이 7급이라지만 그녀는 성술사. 그리고 라이온이터는 체구가 있어 중대형으로 분류되는 괴물.
아무리 그녀가 차기 송곳니였다지만 홀로 5급 괴물을 압도하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다.
끄와아앙!
아영이 원무를 추는 것처럼 라이온이터의 공격을 피해 빙글빙글 우아하게 돈 지 고작 30여 초. 라이온이터는 말 그대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헐떡이기 시작했다.
흘린 피로 인해 체력이 급격히 감소하여 전투력이 급감한 모습.
=도망치겠네.=
=도망가겠어.=
이실리테와 안느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그녀들의 예상대로 라이온이터가 움찔, 하더니 몸을 돌려 도망친다.
탓, 탓- 탓—
아영도 그것을 예상하였던 듯 당황하지 않고 나비처럼 세 번 발돋움하더니 훌쩍 날아올라 라이온이터의 목덜미에 착지한다.
그리고 콰직! 울려 퍼지는 상쾌하고 시원한 소리.
아영이 라이온이터의 몸에서 다시 뛰어오르자마자 4m 키의 거대한 괴물이 대지를 밀어내며 고꾸라져서는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경추가 박살 나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오빠! 언니들! 저 어땠어요?!=
라이온이터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며 달려온 아영이 두 팔을 활짝 벌려 전투법의 평가를 묻자 환인을 비롯한 여자들이 짝짝 손뼉을 쳐주었다.
“그 옷과 매우 잘 어울리더군. 의복을 무기처럼 사용한다는 발상도 좋았다.”
=무척 예뻤어. 유리 언니가 보셨다면 좋아하셨을 거 같네.=
물론 칭찬만 해주지는 않는다. 안느가 먼저 소감을 말한다.
=확실히 우아하고 뛰어난 전투법이지만 상대가 제한적인 전투 방식이겠어. 딱딱한 애들한테 그런 공격이 통할까?=
=소매 안쪽에 무거운 추를 넣거나 소매에 추를 달아서 둔기처럼 쓰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이 자홍접에 부속물을 추가하는 건 자홍접의 완벽한 밸런스를 망치는 거 같아서 꺼려지더라고요. 그래서 바위나 나무껍질처럼 단단한 놈을 상대로는 권각을 쓰려고요.=
쿵, 후웅—
정권 찌르기처럼 한차례 발을 내디디며 주먹을 내지르자 권풍이 한차례 일어나며 잔디가 흔들린다.
=아영. 그 자세 너무 보기 흉해. 넌 다리가 가늘어서 더 흉하게 보여.=
=으익.=
백려강의 지적에 아영이 재빨리 다리를 모으고 다소곳이 섰다.
자홍접紫紅蝶은 다 좋은데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보기 흉한 몰골이 되어버린다는 게 단점이다.
착용자에게 상시 단아한 몸가짐을 강요한다고 할까.
치마보다는 바지를 좀 더 선호하던 아영에게 단정한 몸가짐은 익숙치 않은 일. 그래서 전 귀족가 영애 출신인 백려강에게 몸가짐을 열심히 배우는 중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환인이 훌쩍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 다가가 조언을 건네주었다.
“타격은 평범한 천으로도 가능하다. 네가 소매에 위상력을 흘려 넣어 절삭력과 강도를 높인 것처럼, 위상력을 응용한다면 타격 또한 구현할 수 있지.”
환인은 아스펜드에서 그녀의 소매 수의와 비슷한 길이의 수건을 꺼낸 뒤 아영에게 손바닥을 내밀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채찍의 타격을 응용한 방식으로 수건을 휘두르니 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영의 손바닥이 뒤로 크게 튕겨난다.
=오, 아…….=
“위상력을 무겁게 가미하면 더 큰 위력도 낼 수 있을 거다. 잘 연구해서 전투술에 구현해봐라.”
=옙!=
환인의 조언에 그 즉시 수의를 손목에 걸고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아영. 마도기-자홍접의 수복 기능이 최고위 수준이라 가능한 연습이다.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하던 이실리테가 마부석에서 내려가며 말했다.
=아영, 훈련은 조금 있다 하고 괴물 시체 정리하게 좀 도와줘.=
=예압.=
여자들이 라이온이터의 시체를 갈무리하려 할 때였다. 달칵, 마차 문이 열리며 환연과 유르파가 나오는데 환연의 표정이 탐탁치 않다.
「환인. 저쪽에서 사비족 둘이 다가오고 있는데 둘 다 심상치 않아.」
=심상치 않다니?=
안느의 질문에 환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는 검푸른 비늘인 사비족인데 8급에 가까운 7급 전사고 다른 쪽은 상아색 비늘 사비족인데 처음 보는 아우라 형태야.」
=연이 설명을 들어보면 주시자의 눈이라는 직업일 가능성이 커 보여. 그게 조금 불길해서.=
“주시자의 눈은 어떤 직업입니까.”
=앉은 자리에서 일천 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천리안 능력을 보유한 직업이야. 전투능력은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어.=
1000리,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392km나 된다. 이 길이는 반지름이니 지름으로 보자면 800km에 가깝다.
말 그대로 앉은 자리에서 대한민국 전역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
“어느 쪽에서 오고 있지.”
「저기.」
더욱이 그녀가 가리킨 곳은 자신들이 이동해온 곳이었다. 그 말은 니라인을 나오고 5일째 되는 오늘까지 추적자가 줄곧 쫓아오고 있었다는 이야기.
구주의 독니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은 환인뿐만이 아니었다.
“유르파는 마차 안으로. 백려강과 아영은 마차 뒤에 숨어 지원을 준비하고 이실리테, 안느는 적당히 알아서 대비해라. 노른, 보석쥐와 실루를 마차 안으로 넣어놔라.”
코트 안주머니에 환연을 받아들인 환인의 지시가 떨어졌고 아영은 즉시 모두에게 독과 질병의 강력한 저항 성술을 펼쳐주었다.
그사이 환인은 잠깐 생각했다.
상대가 정말 주시자의 눈이라는 희귀 직업자라면 첩보 활동에 특화된 인물이 틀림없을 것이다.
자신이 이때까지 흘린 흔적과 고의로 누출한 공격 범위를 모를 리 없을 텐데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환인. 상급 정령을 불러서 주변을 싹 훑어봤는데 은신하거나 숨어있는 놈들은 적어도 2km 안에 아무도 없어. 저 둘 뿐이야.」
“…….”
환인의 눈빛이 깊어질 무렵, 상대의 정체는 저쪽이 자연스럽게 밝혔다.
두 사비족은 소지품은 물론 몸에 걸치고 있던 도복 같은 옷과 토가 같은 의복을 전부 벗어 땅에 내려놓더니 두 손을 들어 적대하지 않겠다는 표시를 드러냈던 것.
“구주의 독니군.”
=……먼저 칠까?=
표정이 굳어진 안느가 루모를 몸에 빙의시키며 제안했지만, 환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렇게 대놓고 찾아왔다는 뜻은 공격받았을 때의 대비 또한 해놨다는 뜻이겠지.”
그러다 보니 궁금해진다. 저들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얼마만 한 준비를 해서 찾아왔는지.
아영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뒤에서 물었다.
=그냥 죽이고 영혼으로 뽑아서 심문하면 되지 않아요?=
“죽이면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저들의 지능이 일정 이상이라는 가정하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이미 자신들의 패배를 시인하는 행동이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주러 올 리는 없을 터. 자신이라면 적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상대가 매우 싫어할 만한 짓을 장만해놓고 드러낼 것이다.
복수나 보복 같은, 단순히 정보로는 해제할 수 없는 치밀한 계획 단계로 말이다.
환인이 하는 이야기는 1km나 떨어져 있던 아이보리색 비늘의 사비에게도 전부 전달되었다.
=으헤~.=
=왜 그러지.=
=좆됐습니다. 이쪽 의도가 간파당한 건 둘째치고 성제는 역시 영혼을 강제해서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아이보리색 비늘의 사비족, 쿠클린은 4대 종족의 글과 말을 전부 익힌 데다 독순술의 수준 또한 언어 전문가 수준으로 배웠다.
이 때문에 환인이 루크랑어로 여자친구들에게 하는 말을 쿠클린 또한 읽었던 것.
=……성제가 나와 널 죽이고 영혼으로 심문하면 구주의 위치가 전부 들통난다는 건가.=
=네. 성제의 공격이 문답무용으로 날아올 가능성과 그럴 때 대한 대비도 해놨습니다. 하지만 성제에게 정말 신수가 있고 팔라툼에서 영도까지 반나절 만에 오가는 기동력을 보유했다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자신도 위치를 모르는 지부에 암살자들을 대기시켜놓았지만 그건 그야말로 한 줌 밖에 안된다.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움직여도 고작 1년 정도 밖에 못 괴롭히겠지.
=지금 도망치는 건?=
올 때 생식기 안쪽에 유물급 소형 토템을 넣어놨다. 배 위로 주먹질을 가하면 곧장 파괴되고 그 즉시 구주의 독니 본거지, 구골동九骨洞으로 전이된다.
=이쪽이 구주의 독니라는 것도 눈치챘습니다. 튀자마자 콧수염을 잡아당겨 진 용처럼 분노해서 즉시 우리를 치려 할 겁니다.=
=우리가 잠적할 시간만, 사흘만 벌 수 있으면 된다.=
=으음~ 안됩니다. 저건 혼으로 형성된 괴물 새끼입니다. 구주님은 제 출신을 알고 계시지요.=
=…….=
=다행히 성제는 우리와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성제가 영혼을 압제할 수 있는 이상 우리에게 승산은 없습니다. 계획대로 가야 합니다.=
=네가 그리 판단했다면 맞겠지. 믿겠다.=
=네. 평소처럼 저만 믿으십시오.=
구주와 쿠클린은 저 멀리 작게 보이는 성제를 향해 알몸으로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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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라트는 소리없이 망해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