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63화 (663/813)

663 협곡 도시 니라인

노른을 타고 날아오르자 니라인이 삽시간에 작아지며 반대급부로 대협곡의 형태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주었을 만큼 웅장하고 신비로운 협곡에서 시선을 아래로 내린 환인은 영주 대리와 영주 보좌가 어디론가 정신없이 뛰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자신의 뜻을 이제야 알아차린 듯 다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

딱히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압도적인 공격력이 가해지면 보통 생물은 반대쪽으로 달아나지, 이쪽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달려들더라도 노른과 백려강을 데려왔고, 괴물이 그 둘의 화망을 뚫고 도시로 달려간다 해도 성벽과 병사들이 있지 않은가.

시선을 좀 더 옮기니 거대하고 긴 외성벽에 듬성듬성 들어찬 병사와 용병들이 보인다.

일부는 공성 병기에 달라붙어 조율 중이고 그 외에는 치성이나 곡장에서 여장의 뒤에 숨어 긴장된 기색으로 활과 창을 꼬나쥐고 있다.

어림잡아 3천 명 정도 되는 숫자다. 직업자와 일반인은 절반 정도의 비율이며 병사와 용병의 비율도 그 정도.

어느정도 괴물이 들이닥쳐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

환인의 시선이 긴장과 흥분으로 조금 경직되어있는 병사들, 용병들을 다시 훑었다.

‘그런데 1만을 상대로 3천명인가.’

수성의 이점을 생각해본다면 적측 숫자를 생각했을 때 1:3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비율이지만, 직업자와 이능력이라는 힘이 존재하는 세상이라 저 숫자가 충분한 것인지는 모른다.

‘충분할 테니 저렇게 있는 거겠지.’

환인이 천칭을 꺼내 들자 그의 지시에 천인체로 육신을 갈아타고 따라온 백려강이 여섯 장의 날개를 펄럭이며 질문을 해왔다.

=오라버니, 저는 뭘 하면 되나요?=

“그 몸은 익숙해졌나.”

=네!=

“그러면 저기 저곳, 괴물들 사이에 잘난 놈들이 모여있는 듯한 곳을 주시하다가 술법이든 주술이든 뭔가 쓰려고 하면 화살을 힘껏 날려라. 적이 우왕좌왕하다가 도시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하면 그런 놈들에게 쏴도 된다.”

천칭으로 이블팩션 군단의 본대를 가리키자 백려강이 결연한 표정으로 벼락활을 쥔다.

코트 안쪽에서 환연이 고개를 내민다.

「나는?」

“너는 알아서 잘할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알았어.」

“슬슬 시작하지. 노른, 저쪽으로 가자.”

「응!」

쿠에와 그리폰을 섞은듯한 날렵하면서도 멋진 조류의 두상이 꾸와아아아악—!! 거친 포효를 터트리며 시커먼 점처럼 보이는 이블팩션 군단으로 돌진한다.

시커멓던 점이 삽시간에 커지며 개체의 형태를 대략이나마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적측 군단도 환인과 노른의 존재를 인지, 중앙의 본대에서 사대 속성의 미사일과 탄환이 그와 그녀를 노리고 비처럼 쏟아진다.

「후후후후후~.」

「아하하하~.」

노른이 그런 화망을 피해 급격한 선회 운동을 할 때, 폭풍 같은 바람 소리를 뚫고 가녀리고 아리따운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환인의 귀를 찔렀다.

혼고에서 야생 동물과 일행을 습격하던 괴물의 영혼 구슬을 꺼내던 환인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투명한 유령 같은 여러 색의 여인들이 즐겁게 웃으며 날아다니는게 시야에 포착되었다.

그녀들은 이내 불, 물, 바람, 빛의 폭발을 콰과광— 쿠궁, 꾸구구우웅—!!! 줄기차게 일으키기 시작한다.

‘상급 정령인가.’

「우후후훗!」

「아하하하하~!」

호브와 콜브를 쓸어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지 웃음소리가 참으로 해맑다.

「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노른이 빽! 외치더니 그녀의 몸에서 막대한 위상력이 안개처럼 퍼져나다가 족히 200m 높이의 거대한 녹색 재앙이 되어 적을 덮친다.

고오오오오——……!

까르르륵…….

퍼벙! 쿠과과광—! 드드드드……!

아하하하하~……

쿡쿡……

찌이이잉— 꽈아아아앙—!!

불과 물과 바람이 폭발하며 속성을 뿌리고 대지가 갈라지거나 치솟아 올라 터지면서 바위 파편을 사방으로 뿌린다.

불에 타죽고 물과 바람에 찢겨나가고 바위 파편에 박살 나고 용권풍에 휘말려 자유낙하 하는 괴물들.

작달막한 괴물 수백이 갈기갈기 찢어지거나 추락해 대가리가 깨지는 몰골에 환인은 문득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와 첫 번째 도시, 웨이포드에 도착해 직업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7급 직업자는 중전차라고 판단을 했었다. 재래식 창과 방패로 무장한 알보병 사이를 질주하는 중전차 말이다.

노른과 환연이 퍼붓는 공격을 보면 딱히 틀린 표현 같지는 않다.

‘그리고 8급 직업자는 전투기라고 했었지. 좀 더 따지면 폭격기쯤 되겠군.’

환인은 일단 군단이 어떻게 나올지 간을 보기 위해 승천하듯 올라오는 괴물의 영혼을 그러모아 개량 5중첩 영혼 폭발 구슬로 가공, 천칭을 휘둘러 지상을 향해 아낌없이 뿌렸다.

꾸구궁, 꾸구구구궁—

쿵쿵, 꾸우웅—

폭음은 상급 정령들이 뿌리는 공격에 못 미치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 가슴을 서늘케 하는 진동이 빛의 폭발과 함께 주변을 휩쓴다.

속성의 화려한 폭발과 달리 허연 빛만 뿌리다 흔적도 없이 사그라질 뿐이지만, 그 빛의 폭발에 휩쓸린 괴물은 ‘괴물이었던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장면이라 오히려 섬뜩하다.

혼이라는 것을 잃고 형태가 무너져버리다 충격에 터져나간 듯하다고 할까.

괴물들도 상급 정령의 공격이나 녹색 용권풍보다 허연빛의 폭발을 더 피하는 모습이다.

「흐응. 영혼 폭발도 좀 달라졌네. 전에는 단순한 물리력의 폭발에 영혼에도 약간 충격을 주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영혼이랑 육신에 물리 폭발이 아니라 영적인 피해를 주는 거 같아.」

“단순한 공격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전이 더 낫군.”

「이건 폭발 범위가 좁아서?」

“그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공격 범위가 넓은 것이 좋으니까.”

게다가 저런 변이형 공격이라면 변이에 내성이 강할 경우 효과가 격감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넌 영기와 심핵력의 소모는 거의 없잖아. 지금 한 30발 뿌렸나? 기운이 어느 정도로 줄었어?」

“……5%정도인가.”

「그 정도면 그냥 막 뿌려도 되겠네.」

“그렇지.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고.”

파편인이 박혀 강제로 순환해야 하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한동안 순환 중첩 영혼 폭발 구슬을 뿌리며 족히 수백 마리를 학살한 환인은 폭격을 멈추고 아비규환이 벌어진 지상을 감흥 없이 내려다보았다.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강적과 전투는 늘 상정해두어야지. 계획 없이 대중없이 쏟아붓기만 하는 것은 원숭이도 가능한 일이다.”

꽈르릉, 꽈과광— 꽈르르릉—

폭발과 폭음 사이로 벼락활의 우렛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온다. 환인은 그 소리를 들으며 이블팩션 군단을 살폈다.

다소 맥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판타지 영화에서 나올법한 털 없는 민둥 괴물과 개를 닮은 괴물은 훈련된 병사라면 직업자가 아니라도 1:1로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할 만큼 약하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공중이라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원거리 공격으로 폭격을 가하고 있으니 고작해야 돌팔매질이나 좀 할까 싶은 놈들은 쪽을 쓸 수 없겠지.

환인이 신경 쓰는 것은 1만의 병력 중 2천 정도를 차지하는 보다 고위의 지능종이었다.

공격을 시작한 지 5분이 넘었는데도 침공의 머리로 예상되는 중앙의 부대에서 딱히 이렇다 할 대응이 안 나온다.

얼핏 봐서는 4급 정도의 아우라를 휘감거나 우르거처럼 거대한 몸집의 괴물들이었기에 나름 비장의 원거리 공격 수단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도망갈지 도시로 돌격할지를 두고 다투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런 공습은 예상치 못한 것처럼 날아오던 속성 투사체도 어느새 사라진 상황이다.

‘김빠지는군.’

제대로 된 부대라면 견제를 위해서라도 사격을 멈추지 않는 법인데.

처음 겪는 대규모 전쟁이다. 짜릿한 무언가를 내심 기대했는데 이래서야 김빠지고 미지근해진 맥주나 다름없다.

환인은 살짝 욕구불만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간 보기는 여기까지 할까.”

이 이상은 의미 없다.

전장에 나온 원래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

처음은 청옥으로.

환인은 이번에 새로 손에 넣은 나사라트의 암살단 영혼 구슬 네 개를 꺼내며 환연에게 말했다.

“청옥 혼령주를 펼칠 거다. 정령들에게 경고해라.”

「했어.」

해맑게 개미를 밟아 죽이는 아이처럼 호브와 콜브를 학살하던 상급 정령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꺄~ 아잉, 영문 모를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춘다.

아니 영문 모를 소리는 아닌가.

‘조만간 상급 정령 구슬도 만들 수 있겠군.’

톡톡, 안주머니 쪽을 토닥여주자 안에서 「왜?」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 없이 몇 번 더 다독여준다.

그리고 청옥 네 개를 한 손에 잡은 뒤 30%의 영기, 15%의 심핵력을 주입하자 청옥이 불안정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청옥을 중심으로 냉기가 슬금슬금 퍼진다.

‘아니…… 열기가 청옥으로 흘러 들어가는 건가.’

영도의 기록실에 회옥灰玉으로 펼친 혼령주는 영혼의 정화를 일으킨다고 했었으나 자신이 파편인으로 우회해서 펼친 회옥 혼령주는 물리력을 동반했었다.

그리고 영성들이 청옥으로 펼친 혼령주는 대지에 커다란 피해를 남겼다고 수기가 남아있었으니, 자신의 청옥 혼령주에 추가적인 효과가 가미되는 건 필연.

환인은 청옥의 불안정한 진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해 안정화하며 입을 열었다.

“노른, 백려강. 내가 신호하면 즉시 최고 속도로 이탈해라.”

정령과 노른, 백려강의 공세가 멈춰서일까. 이블팩션 본대 쪽에서 위상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력도 아닌, 정체불명의 기운이 뭉클거리며 모이고 있다.

명백한 대對 고위 직업자용 이능 대포 느낌.

살기 때문에 피부가 간질거리는 걸 느끼며 청옥을 다스리던 환인은 어느 순간 손아귀의 청옥 네 개가 하나로 합쳐진 것을 확인했다.

손을 펴자 서리 구슬처럼 푸른 구슬이 하얀색 같기도 하고 노란색 같기도 한 기운을 휘감는 게 보인다.

때마침 본대 쪽에서 날라오는 살기가 피부를 간지럽히다 못해 찌르고, 정체불명의 음험하고 찐득한 기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팽창하는 게 영혼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온다.

“지금이다.”

쿠웅, 음속의 벽을 뚫은 것처럼 백려강이 도시를 향해 총알처럼 튀어나가고 노른도 그 뒤를 마악 따르려는 순간.

환인은 기묘한 아우라를 휘감은 청옥을 던졌다.

이블팩션 본대에서는 축퇴포마냥 시커먼 에너지의 구체가 쏘아졌다.

그리고 대폭발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구구구구구구구……….

온몸을 진동시키는 대기의 떨림.

코에는 잿빛을 냄새로 만든듯한 향기가 스쳐 지나가고, 소리마저도 집어삼키는 빛의 폭발이 점차 사그라진다.

태양 빛마저도 한순간 빛바랠 정도의 섬광이 수십 초간 세상을 물들였다가 사라졌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수백 미터 지름의 일렁이는 빛기둥과 자욱한 폭연爆煙,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1만 대군이었다.

아니, 사라졌다는 것은 과장이고 폭발에 튕겨 나간 듯 수십 ~ 수백 미터를 날아가 사방에 흩뿌려져 잘 안 보일 뿐이었다.

=하으…….=

「우왕…….」

날아가는 것도 잊고 멈춰선 백려강과 노른이 오싹하고 설렘이 섞인 한숨을 토해낸다.

반대로 환연은 한동안 우물거리다 기막히다는 감정을 짤막하게 토해냈다.

「……저게 뭐야? 핵이라도 떨어트린 거야?=

“그럴 리가 있나 싶지만…….”

지금 저 장소에는 짙은 영기로 가득 차 있어 영혼의 눈을 켜고 있으면 시야가 가려져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다.

영혼의 눈을 꺼야 주변을 노을색으로 물들이는 빛기둥이 보이는 정도.

“내가 봐도 핵폭발과 흡사하군.”

마치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역 같지 않은가.

너무 과했다. 이래서야 이블팩션 고위 종족의 혼은 남아있지도 않겠지. 일부러 나선 이유는 청옥과 흑옥의 테스트 겸 이블팩션 상위 종족의 영혼 수집이었는데.

환연이 꼬물거리며 안주머니로 들어가서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도시랑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서 다행이야. 가까웠다면 도시에도 피해가 갔을 테니까.」

“음.”

이블팩션 군단이 멈춰선 곳은 도시에서 족히 7km는 떨어진 장소였기에 청옥 혼령주의 폭발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만약 3km 내외였다면 후폭풍에 도시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이러면 시선 엄청 끌어당길 텐데 귀찮은 일이 더 생기는 게 아닐까 모르겠네.」

“반대겠지. 팔라툼에서 왕실이 초대해 대접할 정도의 신분이 되었다. 그에 마땅한 힘이 없으면 개나 소나 귀찮게 하고 이용하려 들 텐데 이 정도의 데몬스트레이션은 해줘야 귀찮음과 번거로움이 줄어들 거다.”

그 점을 노려서 병사들과 용병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청옥 혼령주를 쓴 것이기도 하고.

「흐응. 닌실이 영통을 걸어서 ‘성제에에! 제발 좀 고정해주시오오!’하고 앵앵거리겠다.」

“그럴 가능성도 제법 크지만, 닌실도 필요한 일이라는걸 알아줄 거다. 노른, 백려강. 그만 돌아가지.”

환인의 신호에 고개를 끄덕인 노른이 힘차게 날개를 떨쳤다.

그런 노른의 마음속에 한 가지 목표가 자리 잡은 것을 환인이 알았다면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겠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

뿌우우우우웅—……!

도시에서 낮고 무거운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성문이 열리며 쿠에를 탄 기사단과 플라비우스족 기사들이 날아올라 폭심지로 향한다.

‘뒷정리인가.’

지상의 기사단 선두에 전투 갑주를 걸친 얌=헤밀니아가 질주하는 것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환인은 별말 없이 도시로 복귀했다.

7km나 떨어진 곳에서 청옥 혼령주가 터졌지만, 그 여파는 도시에도 일부 피해를 남겼다.

지진파로 흙벽에 금이 가거나 유리창 같은 것이 깨어지고 판매 중이던 상품이 무너지거나 장식해둔 인테리어가 떨어져 파손되는 등의 소소한 피해가 났던 것.

기사단과 함께 출정해 잔당을 처리하고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돌아온 영주 대리, 얌=헤밀니아는 환인과 바로 만날 것을 청했다.

만약 사람을 보내 시켰다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했겠지만, 직접 성내 귀빈실까지 찾아온 그녀였기에 환인은 두말없이 이실리테만 대동해 그녀를 따라 응접실로 이동했다.

약간의 어둠이 채색을 흑갈색으로 만든 응접실에 자리하자 하녀가 티 카트를 밀고 와 홍차와 커피, 가벼운 디저트를 세팅하고 나간다.

영주는 뭔가 할 말이 있지만 꺼내기 힘든 모양새로 하녀가 나갈 때까지 우물거리고 있었기에 환인은 말없이 커피를 들어 향을 음미했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커피라더니 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그때 영주가 입을 열었다.

=성제……. 좀 전에 펼쳤던 그것도 혼령주인가?=

“일반적인 혼령주와는 다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성제는 유일 직업자라고 하였으니 성제만의 영혼술이겠어.=

그녀의 망막에 아까의 그 참혹했던 광경이 다시 그려진다.

폭심지의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평범하게 터져 죽은 놈이 있는가 하면 상처 하나 없이 오직 혼만 빠져나간 것처럼 죽어 널브러진 시체도 있었다.

심각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합성 괴물처럼 온몸이 부풀어 오르거나 끔찍하고 거대한 종양이 자라난 것처럼 변해버린 놈들.

그건 변이괴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블팩션의 상위종이였는데 육체가 무너진 것처럼…….

차마 말을 못 하겠는지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얌=헤밀니아는 드륵-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노을 지는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시에 닥친 위협에 손을 내밀어주어 고맙게 생각해. 도움은 필요 없었지만, 성제 덕분에 아낄 수 있었던 소모품 비용이 적지 않으니까.=

“그렇습니까.”

엉덩이까지 내려오던 땋은 머리가 어째서인지 싹둑 잘려 단발머리가 되어있다.

얌=헤밀니아는 자신의 어깨를 응시하는 환인의 시선에 =아, 이거?=하며 머리를 한차례 쓸어넘겼다.

=죽은 줄 알았던 놈이 광전사로 변해 동귀어진해온 탓에 잃어버렸지. 여러모로 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 하루였어. 아무튼…… 도시에 성제의 혼령주로 일부 피해가 났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가문이 책임질 테니 염려하지 마.=

“……괜찮습니까. 주로 귀족 가문에서 피해가 나 제법 비용이 나갈 텐데요.”

=귀족 놈들 돈 지랄을 우리가 책임져줄 필요는 없지. 제 놈들이 제대로 간수를 못해 부서진 걸 감히 어디서…….=

얌=헤밀니아는 피식 웃으며 영주의 권위를 앞세워 대놓고 탄압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환인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척박한 땅에서만 자라는 특유의 커피 향을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책임진다는 것은 일반 시민들 이야기였군요.”

=그래. 특히 상인들. 못쓰게 된 상품을 적당한 가격을 매겨 매입 중이다. 완전히 파손된 상품의 경우에는 1/3 가격으로 사들이고 있지.=

합리적인 가격이다.

이곳이 현대도 아니고 상품 보험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보통의 영주라면 ‘어쩌라고’하며 신경도 쓰지 않을 마당에 파손되어 쓰레기, 상품 값어치가 0이 되어버린 것을 30%의 보상을 해준다는 것이니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칭송받을만한 영주가 아닐까.

=그건 그렇고, 도시를 도와준 대가를 어떻게 보상해주어야 할까.=

“……?”

창을 등지고 돌아선 얌=헤밀니아가 이게 본론인 듯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성제가 해준 조력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했다간 영주성은 파산하거나 몇 달간 허리를 바짝 졸라매고 빵과 물만으로 연명해야 할 판이야.=

“그렇습니까.”

얌=헤밀니아 같은 여자가 하는 말이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 정도로, 하급 거리의 빈민처럼 생활해야 한다는 거겠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 얌=헤밀니아가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를 꺼낸다.

=성제 정도 되는 남자니까 숨기지 않을게. 우리 도시는 잘 사는 편이 아니야. 주도에서는 매년 변경 지원 금액과 요소를 줄이려 안달이고, 쳐들어오는 이블팩션은 날로 영악해져 가고 있지. 치안도 매번 쳐들어오는 이블팩션 놈들에게 분노를 쏟아낼 수 있어서 유지되는 거지, 아니라면 언제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

뭘 말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까는 걸까. 환인은 커피를 내려놓고 창가에서 비쳐드는 햇빛 때문에 군청색이 아니라 갈색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의 영주 대리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얌=헤밀니아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한 손을 가슴에 올렸다.

=이 몸이라면 어느 정도 보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봐. 오늘 밤, 이 몸을 너에게 줄 테니 그것으로 대가를 받은 셈 쳐주면 안 될까?=

“영주 대리.”

=론슨이 알려주더군. 당신은 제법 호색한이라고. 가는 곳마다 여자를 만들었다지? 물론 오늘 하룻밤만 주겠다곤 하지 않겠어. 시간이 날 때의 이야기지만, 한동안 당신의 노리개가 되어주지.=

그 정도로 사정이 힘든 건가. 환인이 그렇게 생각했을 만큼 얌=헤밀니아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건 죽은 남편을 배신하는 행동이 아닙니까.”

=음? 그런 게 아니야. 나와 쉬린만 남겨두고 먼저 가버린 그 자식인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지. 오히려 영도의 성제에게 줄 대가를 이 몸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싼 거라고 생각해.=

자리에 일어선 환인은 창가에 엉덩이를 대고 서 있는 얌=헤밀니아에게 다가가 조금 뜨뜻한 그녀의 귀를 만졌다.

사람의 귀는 아니다. 어떤 종족인지 모르겠지만…….

“전 제법 난폭합니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도 즐깁니다. 영주 부인으로서 참기 힘든 치욕이 될지도 모릅니다만.”

=그런 것도 생각 안 하고 제안했을까. 난 이래 봬도 6급 창전사야. 뱃가죽이 갈라져 내장을 쏟아내며 싸우고서도 살아남았을 만큼 튼튼해.=

“피를 보는 가학 성향은 아니니 안심해도 됩니다. 다만…… 쾌감을 이기지 못해 심장이 멈출 수도 있다는 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거짓말 같지는 않네. 알았어. 오늘 밤 내 침실로 찾아와. 그때 보지.=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 얌=헤밀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환인과 이실리테의 시선을 뒤로한 채 먼저 응접실을 나갔다.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블팩션 잔당을 정리하고 먼저 도시로 돌아온 얌=헤밀니아는 론슨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듣고는 기함했었다.

성제에게 몇 가지 도움을 받은 팔라툼 왕실이 내놓은 보상이 준 유물 한 벌과 홍전 세 개에 막대한 양의 식량 원조라고?

성제가 보여줬던 그 무시무시한 힘을 떠올린 얌=헤밀니아는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하늘의 진수 야미오코까지 사냥한 데다 그만한 힘을 가진 성제다. 힘을 빌렸다면 당연히 그 정도 되는 보상은 주어야겠지.

그렇다면 1만 이블팩션 군단을 비록 원치 않았다지만 해치우는데 도와줬다면 자신들은 무얼 주어야 할까.

니라인 가문에 닥친 중대한 사건에 얌=헤밀니아는 쉬린=런티오까지 불러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1시간에 걸친 의논 끝에 나온 결과가 성 상납이었다.

이걸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니라인 가문의 사재를 박박 긁어모아서 바칠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다행이 아닌가.

‘거절했다면 가문의 가보까지 정리해야 했는데. 성제가 제안을 받아들여서 다행이야. 그러면 일단…… 몸부터 씻을까.’

남편이 죽고 10년간 쓸 일이 없었던 곳이다.

성제의 경고도 있고 욕실에서 미리 좀 풀어놓는 게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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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ai는 진짜 신이야... 스카이넷님 충성충성!

독자님들이 주신 후원금은 그래픽카드가 되어 열심히 일러짤을 뽑아내고 있읍니다.

그런데 좀 다루기 힘들어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게 단점이네요. 포샵을 배우면 좀 더 의도한 장면을 구상할 수 있을거 같은데..

얌: 그래서 내 머리카락이 석둑 잘려나간 거야?!

...쓸만한 일러 하나 뽑아내려면 한장 평균 20~30초 걸리는데 100장은 뽑아내야하니까 진짜 시간이 순삭되더라고요

아무튼 미궁기담이 완결나면 포샵 좀 공부하고 비축도 쌓은 다음이 될거 같습니다.(몇 달 잠수하겠다는 이야기)

다음편은 19씬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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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옥 혼령주

시밤쾅!

얌=헤밀니아=니라인

유부녀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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