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 협곡 도시 니라인
이블팩션 군대의 침공 몇 시간 전.
협곡 도시 니라인의 주위는 황량하다. 미국 서부 영화에서 덩굴초가 굴러다니는 황야, 거기서 땅의 색을 적색으로 바꾸고 주변에 성마른 바위산이 삐죽삐죽 서 있는 풍경을 상상하면 얼추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 협곡 도시 니라인 주변은 자급자족할 수 없는 지형환경이다.
수자원이 빈곤하고 궁핍하기 그지없어 땅이 무척 척박하다. 농사는 당연히 힘들며 축산업으로 외부에서 수입하는 식량 사정에 조금 도움을 주는 정도.
곡물과 식량은 외부 수입에 의존하며 생필품도 많은 수를 수입한다.
그럼에도 인구수 10만에 근접하는 도시는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전부 이블팩션의 침공 때문이자 덕분이다.
10만의 인구가 하루에 소비하는 물자는 얼마 정도일까. 여기에 전쟁으로 분류할법한 전투가 1년에도 몇 차례 벌어지니 무기와 방어구의 소모 또한 막대하다.
필연적으로 물자가 쉼 없이 순환하게 되는데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런 순환의 원동력은 이블팩션이다.
이유는 이 세계의 모든 생물은 술법적 처리를 설치고 나면 대부분 자원이 되기 때문이었다.
「와. 이거 이블팩션 종족 내장이야? 이런 것도 돈이 되나 보네.」
“장기라고.”
「응. 상단 창고 같은데 유리 원통에 뭔가 액체로 절여놓은 내장을 분류해서 낱개로 잔뜩 쌓아놨어. 머리도 절여져 있고 생식기도 있는데?」
“그 정도면 주력 판매 상품이라 봐도 되겠군.”
「목에 쇠사슬 목걸이를 차고 있는 거 보면 저건 포로로 잡아서 노예로 만든 이블팩션인가 보네.」
죽인 이블팩션의 장기조직이나 술법, 비술에 활용되는 부분을 채취해서 판매하거나 생포한 이블팩션을 노예로 굴리며 이익을 얻어낸다는 게 이세계스럽다고 할까.
이블팩션 진영의 시체는 정석적으로 갑옷의 재료, 무기의 재료로 사용되고 건축 소재의 합성 첨가물로도 사용되는가 하면 독성이 있는 피와 살점도 해독 정화 처리를 하고 갈아버린 뒤 니라인의 유일한 생산업인 축산업의 사료로도 쓰인다.
고등급 괴물이나 상위 지성체의 사체에는 그만큼 돈이 되는 부위도 많아 외부 상행으로 팔아치우고 식량과 생필품으로 바꿔 도시로 가져온다.
그런 식량과 생필품으로 도시를 먹여 살리고 시민을 키우고 입히는 데 쓰이며 그렇게 성장한 시민은 병사가 되어 무장한 뒤 이블팩션과 전쟁에 동원되어 소비된다.
하나의 순환이 오랜 시간을 거치며 정립된 것이다.
아무튼.
그런 니라인의 대동맥은 중급 거리다. 외부에서 들어온 물자와 상품은 전부 중급 거리에 한 번 모인 뒤 상급 거리와 하급 거리로 흩어진다.
도시를 세 분류로 나누자면 중급 거리가 도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빈민과 할렘 지역인 하급 거리는 절반의 2/3, 상급 거리와 영주성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는 식.
그러한 중급 거리에서는 당연히 막대한 이권이 움직인다.
그 이권 중 7할은 영주성이 틀어쥐고 있으며 나머지 3할은 시중의 40개가 넘는 용병단과 20개가 넘는 상단이 나눠 먹으며 복잡한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무얼 말할까.
영주 대리의 차남, 우페이=헤밀토너=니라인은 영주성 관할의 4개 상단 중 하나를 세 명의 보좌관을 두고 유능하게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못하다. 우페이의 보좌관 중 하나가 상권 및 권력 다툼의 오물 구덩이에 깊숙이 발을 들여 횡령과 상납 비리를 일삼고 있었다.
환인 일행이 가도에서 마주쳤던 전멸한 상단의 흔적은 그런 더러운 협잡질의 진흙탕 싸움으로 말미암은 결과물이었던 것.
넓고 우아한 다이닝 룸, 그리고 20명은 앉을 수 있는 1자 형태의 만찬 테이블.
길쭉한 직사각형의 한 변이 15m인 테이블 한쪽에는 미망인이자 니라인의 안주인인 이쌍익의 플라비우스족 귀부인 쉬린=런티오=니라인과 그녀의 자녀 셋, 그리고 후처이자 영주 대리인 얌=헤밀니아=니라인과 그녀의 자식 다섯이 자리하고 있다.
테이블 중앙에 나란히 앉은 쉬린=런티오, 얌=헤밀니아. 그 둘의 맞은편에 앉은 환인.
환인이 앉은 열은 그 한 명뿐이지만 맞은 편에는 영주 가문 식솔 10명이 나란히 앉아있어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오찬은 이실리테의 솜씨에 버금가는 요리사가 정성을 기울인 코스요리로 이루어졌다.
육해공 모든 식재료를 다룬 화려한 음식이 한 입, 혹은 두 입 사이즈로 나뉘어 서빙하는 하녀들에 의해 쉴 새 없이 날라진다.
영주 일가는 히스론드 귀족 예법으로 중무장한 식사 매너를 선보이면서 맞은편에 담담한 표정으로 홀로 식사 중인 남자를 힐끔거렸다.
히스론드의 평범한 식사 예법은 3개의 크고 작은 포크, 세 개의 나이프, 두 개의 스푼에 디저트용 스푼, 포크, 나이프를 쓰며 버터나이프 하나를 쓰는 방식.
하지만 환인은 두 개의 포크와 두 개의 나이프, 두 개의 스푼과 디저트용, 포크만을 썼다.
그런데도 적은 숫자의 식기를 써서 지저분하거나 볼품없어 보이긴커녕 매우 깔끔하고 정돈된 동작이다.
오랜 시간 예법을 몸에 익혀온 영주 가문 식솔들도 ‘성제는 혹시 귀족 출신인가…?’ 하는 생각과 ‘적은 식기를 쓰니 오히려 차분하게 보여.’ 같은 생각을 할 정도.
실상은 용도를 몰라 그저 편한 방식으로 쓴 것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식사는 마음에 드시나요, 성제님?=
다정다감하며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의 귀부인, 쉬린=런티오가 버터 색 눈썹으로 호선을 그리며 물었다.
“훌륭한 솜씨입니다. 제 영혼 기사 이실리테도 수제 요리의 달인이라 자부하며 그에 미치는 요리사를 몇 명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오늘 그 숫자를 한 명 더해야겠군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네요. 더불어 그분의 솜씨도 견식 하고 싶어지고요.=
“그녀의 주특기는 코스 방식이 아닌 뷔페 형식의 요리인지라 귀부인께는 어떠실지.”
=뷔페…… 들어만 보았던 방식이네요. 꼭 한번 경험해보고 싶어요.=
20대 중반의 외모인 쉬린=런티오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늘어트리는 미소를 짓는다.
가식이나 위선은 일절 보이지 않으며 온실 속에서 때 묻지 않고 귀하게 자란 여식이라는 느낌이다.
저래서 얌=헤밀니아도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거겠지. 식사 때부터 옆에 앉아 그녀에게 이것저것을 챙겨주는 걸 보면 후처와 본처 사이가 아니라 언니-여동생 같다고 할까.
환인의 눈이 맞은편의 남녀노소를 짧게 훑는다.
자녀들의 성격도 다들 모나지 않고 무난한지 가족 간의 분위기도 괜찮다. 음식을 서빙하는 하녀들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영주 식솔 일가에 대한 반응을 봐도 그 점은 확실하다.
힘의 균형이 편중되어있고 강한 힘을 가진 자녀가 다른 자녀를 차별한다면 은연중에 하녀들의 태도에 그러한 피드백이 나오기 마련.
하지만 하녀들은 다들 열심히 식솔들의 식사를 수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가장 어린, 쉬린=런티오의 딸인 12살 남짓한 단쌍익의 소녀가 뺨에 홍조를 올린 얼굴로 약간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저…… 성제님?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될까요…?=
“예. 편히 물어보십시오.”
=감사합니다아…. 그, 이번 팔라툼의 승령천제에서 영성경이 나타났다고 소문을 접했어요. 정말…이었나요…?=
=바보야. 그거 전부 사람들이 농간을 부린 거라고 몇 번을 말해야 믿겠냐?=
그 옆에 앉은 16살 정도 되어 보이는 미소년이 그런 미소녀에게 핀잔을 준다. 그러자 미소녀가 억울한 듯이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작게 항변했다.
=그치만… 어용 상단 분들은 다 영성경이 출몰했다고 하셨단 말이야.=
=정말 나타났으면 주도에 영성경이 출현한 거잖아. 엄청난 화제감인데 지금처럼 수군거리면서 소문이 퍼지겠냐고. 거기다 얌 어머님께 상인들이 먼저 달려가서 알려드렸겠지. 안 그래? 이상한 거로 성제님 식사 방해하지 마.=
=씨잉…….=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습에 환인이 옅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팔라툼에 영성경이 나타난 것은 사실입니다.”
=어? 지, 진짜요?=
=……?!=
조용히 이야기만 듣던 다른 자녀들은 물론 쉬린=런티오도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마도 드문드문 이야기가 퍼지는 것은 영성경의 출현 당시 미궁 역류로 이형종이 하늘을 뒤덮은 비상사태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저 영성경의 출현에 놀라 화제로 삼기에는 벌어졌던 사고가 좋지 않았으니까요.”
시민이 이형종을 피해 몸을 숨긴 상태기도 했기에 실제 목격자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본다고 하자 일부는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오빠에게 구박받은 미소녀는 그것 보라며 오빠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른다.
=아 그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흐흥.=
그것으로 어색하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려 환인에게 조심조심 질문하는 자녀들이 늘었다.
다소 환기된 분위기에 쉬린=런티오는 미소짓고 얌=헤밀니아는 무표정으로 냅킨을 들어 입매를 닦지만, 그녀 역시 기분이 나쁘지 않아보인다.
아홉 명의 플라비우스족 사이에 그녀 혼자 루크랑족이다보니 조금 돌출되는 광경이지만, 그 장면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루크랑족 여성의 출산 특징 때문이겠지.
그렇게 한차례 대화가 오간 뒤 디저트류의 서빙이 시작되려는 준비 시간.
줄곧 어두운 표정으로 한 마디도 없던 우페이, 얌=헤밀니아의 차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인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성제님의 앞에서 얼굴을 들 면목이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혼재……의 발생을 방치한 것에 대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주장일 뿐인 이야기를 진심이라고 믿어주시는군요.”
도란도란 오가던 이야기가 뚝 끊기고 환인과 우페이의 대화만 만찬 테이블 위를 오간다.
=간밤의 조사를 통해 르룽겐이 중급 거리의 푸흉 상단과 용병단 둘과 결탁하여 오숨 상단의 대형 상행을 습격 사주, 전멸시킨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푸흉 상단과 오숨 상단은 이전부터 앙숙 관계로…….=
오숨 상단의 대형 상행이 좌절되자 막대한 빚더미에 오르게 된 오숨 상단의 상단주 오숨은 며칠 전 자신의 상단 집무실에서 자살하였고, 상단은 공중분해 되어 손해를 끼친 다른 상단과 용병단에 분배되는 것으로 끝났다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오숨 상단주가 혼재로 변하여 르룽겐에게 붙어있다 하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의 가족들도 노예가 되어 팔려나갔으니까요. 더욱이 그 말씀을 하신 분께서는 기나긴 니오네브레스 역사에서도 오직 한 분뿐이신 성제님이시지요.=
그렇게 말한 우페이는 잔뜩 자조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성제님의 앞에서 혼재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을 보여드리게 되어 참혹한 심정입니다.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르룽겐과 푸흉 상단의 상단주는 처벌을 받았겠지요.”
=예. 즉시 포박 구금하여 전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가담 정황이 드러난 용병단 또한 전투 노예 신분으로 격하시켜 다음번 이블팩션 전쟁 때 고기 방패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노예가 되어 팔려나간 오숨 상단 가족은 현재 찾고는 있지만…….=
“그러면 되었습니다. 사후처방이 되었으나 영주 대리께서 발 빠르게 움직이신 것은 본보기가 되었을 테니까요.”
…라고 환인은 말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일벌백계? 본보기?
그런 게 가능했다면 환연과 함께 도시를 살펴보고 아르겐테아, 특급 송곳니들이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알아낸 것처럼 도시 전체가 혼돈의 카오스처럼 부패 속에 질서를 갖추지 않았겠지.
후우, 희미하게 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우페이의 귀로 다소 차가워진 환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날아들었다.
“하지만. 니라인은 좀 더 자주 영혼사를 초빙하여 성불행을 진행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승령천제의 대규모 승천 또한 매년 치르는 게 좋지 않을까 싶군요.”
=무슨 뜻인지 노골적으로 말해주면 좋겠어. 빙빙 돌려 말하는 것보다 그쪽이 말하는 쪽도 속 편할 거고 듣는 쪽도 확실히 할 수 있으니까.=
영주 대리가 깊어진 눈빛을 보내고 그런 영주 대리를 향해 살짝 진땀을 흘리는 웃음으로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본처.
그 순간 영혼의 눈이 열리며 황금빛 안광이 뿌려지고, 잠들어있던 영혼사의 찬란한 황금빛 베일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자 얌=헤밀니아는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니라인은 1년에도 몇 차례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죽음과 밀접한 도시에 억울한 영혼이 쌓이는 것은 필연. 그렇게 쌓인 영혼이 퇴적층처럼 켜켜이 누적되면 혼의 변질이 찾아옵니다.”
=…….=
“더군다나 도시에는 사람들의 영혼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동원되어 살해당한 이블팩션 괴물들도 억울함에 구천을 떠돌며 이블팩션의 상위 지능종의 혼도 도시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에 환인이 쐐기를 박듯이 늑대 전사단의 흑옥 두 개를 꺼내 실체화시켰다.
=으헉!=
=꺄…읍.=
=……!!=
“혼의 타락은 이러한 흑령을 보다 쉽게 만들어냅니다. 아니더라도 이번처럼 혼재가 등장하겠지요. 이번에는 운 좋게 혼재가 강제 정화되었지만, 제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니라인은 사령의 도시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승령천제가 끝난 직후 다들 방심하던 시기였으니까요…….=
차기 가주로 보이는 20대 중반의 이쌍익 남자, 쉬린=런티오의 바로 옆에 앉은 미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는 얼굴로 들개 전사단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린다.
심연이 아가리를 벌린 듯한 시커먼 들개 전사단의 영혼은 다시금 흑옥으로 변해 그의 손에 돌아갔다.
그 장면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던 영주 대리가 눈을 감으며 수긍했다.
=확실히, 잘 마른 짚단으로 가득한 마사에 자그마한 불똥이 튀면 대화재로 번질 뿐이지……. 조언해주어서 고마워. 지금까지는 2~3년마다 승령천제를 지내왔지만, 앞으로는 매년 치르는 쪽으로 검토해보아야겠군.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무사할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모처럼 풀렸던 분위기가 다시금 무거워졌지만, 디저트는 예정대로 날라진다.
하지만 사람들이 디저트에 손을 올릴 일은 없었다.
콰당!!
다이닝룸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고 영주 대리 보좌관이 잔뜩 굳은 얼굴로 뛰어 들어와 외친 소리 때문이었다.
=이블팩션의 대규모 군대가 쳐 들어왔습니다!! 그 숫자는 약 1만! 주력 병종은 호브와 콜브이며 상위 지능종 약 300이 포함된 대부대입니다!!=
무질서라는 단어가 있다.
그 단어에도 ‘질서’라는 두 글자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자그마한 점 같은 괴물들이 두서없이 중구난방으로 뭉쳐져 있음에도 기묘한 ‘질서’가 느껴지는 대규모 집단.
묘사하자면 고양이 발자국처럼 네 개의 집단이 하나의 집단의 앞을 막은 형태다.
그 정체는 추정 1만의 이블팩션 군대로, 살아있는 벌레처럼 꾸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협곡 도시 니라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요새 같은 영주성 외벽 망루.
까마득히 먼 지평선까지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응시하던 영주 대리는 조금 뚱한 표정으로 옆에서 망원 글래스를 통해서 같은 장소를 주시 중인 환인을 바라봤다.
=그냥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겠어. 한밤중에 펼쳐진 화려찬란한 혼령주 때문이 아니라 말이야.=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나사라트의 암살단이 아니었다면 혼령주를 그렇게 급박하게 펼칠 일도 없었을 텐데요.”
=아니. 진짜 운이 안 좋았다고 본다. 저만한 숫자가 고작 하룻밤 만에 모여서 들이닥칠 수 없으니까.=
“그렇다 해도 하늘의 구름을 찢어놓는 빛기둥이 아주 영향이 없다고는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 봤자 하루 이틀 차이. 오히려 혼령주를 펼쳐준 덕분에 미리 대비라도 하게 된 거지. 아무튼…….=
다시 망원경을 들어 이블팩션 진영을 보던 영주 대리가 시발,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돈 되는 것들은 개뿔도 없군. 점점 학습하는지 갈수록 질보다 양으로 공격해오고 있어.=
“호브나 콜브는 사료로밖에 못 쓰는 겁니까.”
=돈이 될 것들은 등급이 높거나 덩치가 큰 것들이야. 덩치가 크면 나오는 것들도 많으니까. 호브 정도 되면 정화 작업에 수송과 해체로 들이는 비용이 사료 비용에 아슬아슬하게 이익을 내는 정도. 넓게 보면 이익률은 더 떨어져. 손해도, 이득도 아니게 되지.=
한숨을 푹 내쉰 영주 대리는 정성껏 손질한 것처럼 찰랑대는 군청색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러면, 성제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목적은 건너편일 거고 전시가 발동되어 일반 도선장은 이용 못 해. 원한다면 니라인 가문 전용 도선장의 이용 허가를 내어주겠어.=
“괜찮습니다. 일단은 남도록 하지요.”
=일단은?=
“예. 몇 가지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먼저 자유행동 허가를 내어주십시오.”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 전장에서 활보할 수 있는 허가를 부탁한 게 맞나?=
“맞습니다.”
얌=헤밀니아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성제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얼굴은 희고 매끄러워 보인다. 그렇다고 계집처럼 허여멀건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이목구비와 턱선이 적당히 굵어 날카로운 미남자 얼굴이라고 할까.
잠깐 그의 얼굴을 응시하던 얌=헤밀니아는 괜시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 영혼 기사들이 뛰어나다는 건 나도 이견이 없어. 어제 직접 경험해봤으니까. 하지만 전쟁은 전투와 달라. 전쟁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제가 얕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린 얌=헤밀니아에게 환인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해하신듯한데 적측과 격돌한 전선에서 활보할 허가를 요청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노른.”
환인이 손짓하자 난간에 상체를 걸치고 이블팩션 군대를 구경하던 노른이 즉시 검은색의 원피스를 벗고 신수 형태로 돌아간다.
“적과 전투를 벌이기 전, 제가 먼저 움직일 허가를 말한 겁니다.”
=……신수를 타고 날아다닐 수 있다 해서 안전하지 않아. 적에게는 강력한 원거리 공격 수단뿐만 아니라 저주를 마구 뿌리는 주술사도 섞여 있을테니까.=
말하면서도 얌=헤밀니아는 눈앞의 남자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무리 말을 해도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허가를 내려주지 않으면 단독으로라도 움직일 생각이 가득하다.
‘그럴 거면 왜 나한테 허가를 구하는 거지?’
어쩔 수 없이 허가를 내려주고 신임하는 보좌관인 론슨을 찾아 그 이유를 짐작하겠냐 물었더니 당황한 얼굴로 책상을 쾅 치며 일어서 소리쳤다.
=즉시 돌격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뭐?=
=어젯밤 주도의 친우에게 연락하여 성제님의 정보를 일부 받을 수 있었는데, 성제님에게는 광역 공격 기술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위력은 족히 7급 술법사의 광역기 수준! 아마도 성제님은……!=
론슨의 보고에 얌=헤밀니아도 굳이 성제가 허가를 요구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성제는 지금 저 군단을 상대로 위력 시범을 하려 한다.
허가 요구에 숨겨진 내막은 그로 인해 발생한 혼란으로 괴물들이 폭주하여 도시를 공격해올 수 있으니 대비하라는 뜻.
=영혼사 맞아?=
게다가 말을 진짜 성질나게 돌리네. 직선적으로 말하면 뭐 혀뿌리에 바늘이라도 솟나?!
론슨과 함께 뛰쳐나온 영주 대리는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녹색의 신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무려 삼쌍익의 플라비우스족이 벼락을 굳혀 만든듯한 활을 가지고 날아가는 것도.
얌=헤밀니아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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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ai는 신이야!
하나 뽑는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지만....
아무튼 두 번째 ai일러스트 주인공은 노른입니다.
아영은 나중에...
[작품 설정]
노른 인간 폼
=이 옷 몸에 너무 달라붙어. 싫어.=
=자기가 예쁘다고 했는데, 싫어? 그럼 하얗고 펑퍼짐한거 줄까?=
=....그냥 입고 다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