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59화 (659/813)

659 협곡 도시 니라인

이실리테와 백려강, 노른 셋이 외출하고 유르파는 안느와 아영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 뒤.

창틀에 앉은 환인은 환연을 데리고 도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정령으로 도시를 내려다보며 묘사해주는 환연의 이야기에 따라 도시의 전체적인 선을 따고 구역을 나누고 도로를 그린다.

이어 그녀가 짚어주는 장소를 하나하나 표시해나간다.

“이쯤인가.”

「응. 거기에도 용병사무소 같은 게 있어. 상단인지 조폭 소굴인지 모를 허름한 건물도 붙어 있고.」

“이걸로 47개. 꽤 많군. 도시 규모를 보면 10개에서 15개 정도면 충분해 보이는데 40개가 넘는다니.”

「괜찮겠어? 직접 돌아보려면 오늘 밤새도록 움직여야 할 텐데. 가더라도 영혼이 남아있을 거란 보장이 없잖아.」

혼재에 대한 기초 조사를 위해 표를 작성하던 환인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상단 전멸 건을 두고 영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조사하는 것이 아니다.”

「흠? 난 또 혼재를 혼옥으로 만들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그럼 왜 조사하는 거야?」

“저들 내키는 대로 이용당하는 것은 싫으니까.”

범죄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을 초대한 뒤 성불 정화를 시도하려는 거라면, 이용당하지 않고 되려 엎어버리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정보는 필요한 법.

그가 확인한 것은 니라인에서 간판을 걸어놓고 영업 중인 용병단으로, 이블팩션이 쳐들어오면 전쟁에 동원되는 집단이다.

범죄를 지어 끌려오거나 구매한 노예들은 전부 영주가 관리하고 그 외 돈을 목적으로 모여드는 부나방들은 저런 용병단에 소속되어 싸우고 대가를 받는 식.

말이 용병단이지 대놓고 말해서 불량 용역업체다.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인간들.

‘전체 인구가 10만 정도인 도시에 40개의 용병단이라니 비율이 너무 치우쳐져 있는 게 아닌가.’

1년에 몇 번씩 이블팩션과 침략 및 침공전을 벌이는 전장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할지도 모르지만, 전쟁은 PTSD와 직결된다. 전쟁이 주는 스트레스를 일반인들은 어떻게 견디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가장 흔한 ptsd의 증상은 공격성의 발현. 이런 공격적인 증상을 겪는 사람이 도시에 만연하면 고스란히 치안의 악화로 연결된다.

치안이 악화하면 가장 먼저 노약자가 범죄와 폭력에 노출된다.

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노약자들을 보호해야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지구도 중세 시대 과도기에 인류가 멸망했겠지.’

환인은 잡생각을 끊고 왼팔에서 열 개의 청옥을 꺼냈다.

“나와라.”

푸른 영혼 구슬 일렁이며 빠르게 사람의 형상을 갖춘다.

아르겐테아 정찰병 다섯과 이전 카락스의 암살자 소속 특급 송곳니 다섯이다.

이모렐은 볼일이 있다며 천인체에 빙의시켜 유르파가 데려간 상태.

남은 정찰병 다섯은 청옥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듯 각 잡힌 자세로 환인의 지시를 기다리지만, 환인의 손에 부정과 범죄 사실이 발각되어 처단당한 특급 송곳니 다섯은 음울한 표정으로 환인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

“…….”

환인은 특급 송곳니 다섯의 반항심에 싸늘한 시선을 보내다 혼고에서 들개 전사단의 흑옥 다섯을 더 꺼내 인간 형상으로 풀어놓는다.

「그르르르르…….」

「으그으르르….」

온전히 사람의 형상을 한 열 명과 달리 검은색 짐승처럼 허리를 반쯤 굽힌 채 그르렁거리는 들개 전사단 영혼들.

「……!」

「어…….」

「윽….」

가까이 있으면 저들처럼 검게 물들 거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청색 영혼들이 들개 전사단과 거리를 둔다.

잠시 그렇게 내버려 두었던 환인은 먼저 아르겐테아 정찰병 다섯을 불렀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원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물리력을 쓸 수 있게 될 테니 그걸 이용해 이곳에 표기된 장소로 가 조사를 진행해라. 주된 조사 방향은 영주 주변 공직 인사의 부정부패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예!」

알몸 상태의 다섯 영혼은 환인이 그린 지도를 확인하곤 척, 경례를 올린 뒤 제각기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 도시로 흩어진다.

아르겐테아 정찰병을 먼저 보낸 환인은 다음으로 들개 전사단을 꺼림칙해 하는 특급 송곳니 다섯을 불렀다.

“네놈들은 들개 전사단과 짝을 지어 도시를 돌아다니며 약 10일 전, 상행을 나갔다가 전멸한 상단을 조사해와라. 늦어도 해가 지고 2시간 내에는 복귀하도록.”

「……예.」

「네….」

“들개 전사단은 특급 송곳니를 따라다니다가 저들이 역심을 품거나 허튼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소멸시켜라.”

들개 전사단을 불러 심핵력을 0.1%정도 불어넣어주자 크기가 곧장 1.5배로 부풀며 말 그대로 심연에서 기어나온 그림자의 악마처럼 변한다.

「그으으으-!」

「그오오오오오!」

「힉!」

「흐억….」

그런 들개 전사단의 포효에 특급 송곳니들은 영혼임에도 눈에 띌 정도로 사색이 되어 몸을 떨었다.

서, 설마 성제는 악마의 영혼도 다뤘었나?!

그럭저럭 평온한 혼고에 갇혀 주위 변화를 그저 구경만 하면서도 혼고의 바닥에 무언가 꺼림칙한게 있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설마 저런 게 있었다니……!

벌벌 떨며 영혼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놈들에게 환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

“무사히 성불하여 내세에도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면 수작질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북부의 서리 마왕도 저보다는 따스하게 말하지 않을까. 특급 송곳니 다섯은 그렇게 생각하며 목이 빠지라고 위아래로 끄덕이곤 황급히 호텔을 빠져나갔다. 잡아먹을 듯이 뒤따르는 들개 전사단을 달고서.

영혼을 볼 수는 없었지만, 환인의 혼잣말에 대충 뭘 했는지 짐작한 환연이지만, 한 가지 이해 안 가는 현상이 느껴져 그에게 물었다.

「환인, 방금 뭐 한 거야? 뭔가 음적인 기운이 살짝 퍼지는 거 같았는데.」

“들개 전사단에게 심핵력을 미약하게 밀어 넣어 강화했다.”

「흑옥이라서 그런 기운이 퍼졌나 보네. 아무튼, 할 건 다 했어? 나 유르파한테 가서 놀아도 돼?」

“아직이다. 이제 영주 성을 살펴야지.”

「영주 성? 음…….」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생각하던 환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돼. 정령 금지 구역이 곳곳에 느껴져. 보냈다간 간섭력 때문에 환령계로 돌아가 버릴 거야.」

“성 전체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좀 떨어진 곳에서 보는 것도 힘든가.”

천공성을 잠깐 떠올린 환인이 재차 물었지만, 환연은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이블팩션에서도 정령을 다뤄서 기습하거나 공격하는지 방비가 꽤 견고해. 강제로 보내면 가긴 하겠지만…… 이야기가 들릴 거리라면 중급 정령으로는 1분도 버티기 힘들 거야.」

“그만한 방비라면 정령의 접근을 감지할 수단도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상급 정령을 보냈다간 대번에 경계 태세가 발령되겠지. 환인은 정령을 통한 조사는 포기하고 정찰대와 송곳니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지도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 그를 가까이서 올려다보던 환연은 도도한 상급 정령들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걔들이라면 버티겠지만 계약한 것도 아닌데 기분 나쁘고 힘을 깎아 먹는 곳에 가달란다고 선뜻 가겠어?

이러니 육합등약의 아쉬움이 커진다.

‘환인의 육합등약으로 나도 힘이 좀 강해지면 상급 정령들한테도 기를 세울 수 있을 텐데. 내 힘은 선천적인 정령 친화력이라서 육합등약이랑 안 맞나?’

환인과 교미해서 큰 변화를 겪은 것은 안느하고 유르파랑 영도의 샤스라 셋 정도다. 그 외에는 좀 더 예뻐지고 몸이 좋아져서 기초 신체 능력이 향상되거나 조금 회춘하는 수준?

그리고 셋의 변화는 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탈태에 가까운 변화였다.

자신도 그러한 종의 탈피를 기원하며 환인과 교미하는 걸 바랬었는데…… 아무튼, 육체가 큰 폭으로 변화하고 후천적인 능력이 강화되기도 했지만, 선천적인 능력은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전례를 보면 육합등약이 이뤄져도 자신의 정령 지배력이 강화될 일은 없다는 뜻.

‘으응……. 다들 강해지는데 나만 제자리걸음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속으로 고민을 거듭하며 지도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환인을 구경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별안간 통통 튀듯 가볍고 발랄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 고민이 많나 보네?

‘많을 수밖에. 파티에서 내 역할과 위치가 독특하다지만 대체가 불가능하냐면 그건 아니니까.’

— 내가 했던 제안은 어떻게 생각해?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던 거 같은데.

‘백청룡한테 당해서 깎인 힘은 다 회복했나 봐? 말할 기운도 있고.’

— 킥킥킥. 그러엄.

— 그 망할 흰 지렁이 년이 저 남자 밑에 깔려서 앙앙거리다 골로 가버리는 꼴을 봤더니~

— 속이 뻥! 뚫리면서 힘이 막막 회복하지 뭐야?

— 지금은 9할까지 회복했어.

‘잘됐네. 그럼 나랑 계약하지 말고 환인이랑 해. 나랑 교미하면서 정령력이 계속 쌓이고 있잖아. 상급 정령들도 환인 앞에 모습을 드러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정도니까 얼마 안 가서 릴, 네 최저 기준점에 도달할 거야.’

그러면 네가 더욱 키워서 입맛에 맞게 정령력을 조정해줄 수 있지 않냐는 뜻에 릴, 초월급 물의 정령 릴라이스가 환연만 볼 수 있도록 그녀와 같은 사이즈의 인어 모습으로 현계한다.

〈아~ 그건 아냐. 확실히 땅벌레 같던 이전과 달리 아주 못생겼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니게 됐어. 하지만!〉

‘……?’

〈너무 잡탕이잖아! 위상력에 영기에 심핵력에 성력 일부도 섞였고 주술력이랑 신력에 선력까지 스며들었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한데 모아서 섞어버리면 그게 밥이야? 꿀꿀이 죽이지!〉

짜증 내면서 물결 같은 푸른 머리카락을 너울거리는 릴라이스의 표현에 푸흡. 웃음을 터트릴 뻔한 환연은 여전히 지도에 집중하고 있는 환인을 힐끔 보곤 속으로 말했다.

‘처음에는 안 그랬지 않았어?’

〈그래! 그런데 저놈의 유물이 다 망쳐놨어! 그전에는 영기랑 심핵력뿐이라서 정령력만 추가하면 입맛에 딱 맞는 미남이었는데 지금은…… 시발.〉

그녀의 심정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두 글자에 환연이 실소를 흘렸다.

그리모암의 유물로 환인이 위상력을 접하면서 육신이 위상력에 적응하는 동시에 위상력과 연관되어있던 모든 기운이 죄다 육신으로 흘러 들어가 버려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

따로따로 두면 무척 아름다운 색이고 둘 정도가 섞이면 다른 색이 될지언정 매력적이지만…….

‘여러 가지 색이 한데 섞여 검은색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관심이 사라졌다는 건 이해했어. 그런데 어째서 나야? 네 입장에서 나는 정체 모를 이상한 생물일 뿐이잖아.’

〈너, 저 남자랑 구멍을 맞춘 뒤로 굉장히 특이한 체질이 되어가고 있어.〉

장난기를 싹 걷어낸 릴라이스의 진지한 표정에 환연이 눈을 살짝 빛냈다.

육합등약이 내 몸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나? 초월급 정령은 그걸 감지한 거고?

‘어떤 체질?’

〈음……. 정보를 알려주는 대신 나랑 계약하자고 말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저 남자의 성미를 이어받은 넌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겠지?〉

‘잘 아네.’

〈그냥 내 패를 전부 깔게. 너랑 계약하려는 이유는 네가 정령과 합체할 수 있는 체질이 되어가고 있어서야.〉

‘합체…?’

〈그래. 반은 육체, 반은 정령체를 가진 너만이 가능한 정령과의 합체.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조만간 가능해지리라고 봐.〉

그의 피로 태어나며 그의 지성까지 일부 물려받은 환연의 머릿속에 그런 정령 합체가 가져올 막대한 장점이 파바박 솟아난다.

가볍고 경박한 사람이라면 그것만 보고 덥석 미끼를 물었겠지만, 환인 덕분에 남을 의심하는 법부터 배운 환연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합체하면 너한테 신체 제어권을 빼앗기고 환연이라는 내 자의식이 너의 의지에 눌려 소멸하거나 뭐 그런 거 아냐?’

〈흥. 누가 저 인간의 피를 이은 년 아니랄까 의심부터 하고 보네. 그런 거였으면 내가 계약이라고 언급했겠어? 뭉뚱그려서 네 몸을 차지하려고 온갖 수작을 부렸겠지. 맹약을 우습게 보지 마.〉

‘그건 그래.’

〈그리고 네 몸을 차지했다는 걸 저 인간이 알면 날 잘도 내버려 두겠다. 아무리 나라도 2천 년을 산 기린하고 저 미친 백청룡을 동시에 상대하지 못해. 특히 기린은 풀이랑 대지하고 하늘의 초월급 정령이랑 엄청 친해서 내가 환령계로 도망가도 끝이 아니란 말이야.〉

……닌실이 그렇게 강해? 초월급 정령 셋이라니, 정절급한테 이기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비빌 수 있는 수준인데 능력이 그거 뿐만인 것도 아닐 테고.

“환연. 괜찮나.”

〈아잇, 저 못생긴 괴물 같으니. 내 기척을 그새 느낀 거야? 이렇게 꼭꼭 숨기고 있는데?〉

그렇다기보단 내 태도가 평소랑 달라서 뭔가 느낀 거겠지. 환연은 질색하는 얼굴로 자신의 뒤에 숨는 릴라이스를 두고 입을 열었다.

「괜찮아.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야.」

“……그래. 무슨 일이 있다면 꼭 말해라.”

「좀 있다가 전부 이야기해줄게. 걱정해줘서 고마워.」

“음.”

둘의 짤막한 대화에 릴라이스가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뭐야. 결정했어?〉

‘아직. 네가 계약을 하려는 이유가 짐작이 안 가서 꺼려지네.’

뭐 정령 합체……. 릴라이스 말대로라면 굉장히 신기한 능력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자신과 계약한다고 보기에는 말이 안 된다.

계약은 상호 존중이라는 바탕 위에 이어지는 서로 간의 속박. 그걸 초월급 정령이 먼저 다가와 제안한다는 게 의심스러운 거다.

〈그게 신경 쓰였어? 간단해. 환령계에서 네가 지내는 걸 보니까 왠지 마음에 조금 들기도 했고 정령 합체를 하면 나한테도 육신이 생기는 거니까. 살아있다는 그 감각, 다섯 신이 꾸려가는 세상의 총천연색을 몸으로 직접 느껴보고 싶었어.〉

‘이해 안 되는 이유는 아니네. 하지만 정령 합체…… 듣기만 해도 내 몸에 가해질 부하가 짐작되는 수준인걸? 합체 몇 번 하고 골골거리거나 수명이 깎이는 건 싫은데.’

〈초월급 정령인 내가 계약을 맺어주는데 그거까지 해결해주리? 네 주위에 능력 있는 애들 많잖아. 몸을 단련할 방법은 네가 찾아. 너와 계약을 맺어주는 최소 조건이 그거야.〉

정말 오랜만(족히 수백 년) 만에 계약을 맺은 계약자가 나 때문에 단명하거나 요절하는 건 보기 싫으니까. 그렇게 말한 릴라이스는 흥, 하고 웃으며 환령계로 모습을 감추었다.

— 나도 성격이 급해서 오래 기다리지 못해. 너무 늦으면 임시 계약도 파기하고 떠나버릴 테니까 빨리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거야.

‘잘도 떠나겠다. 정령 합체하고 싶다고 눈까지 번뜩였으면서.’

— ……너처럼 눈치 빠른 꼬맹이는 정말 싫어.

‘네네~ 빨리 찾아볼 테니까 릴은 거기서 기다리기나 해.’

— 20년까지만 기다릴 거니까!

성격 급하다더니 저게 정령의 시간 감각인 건가……. 환연은 속으로 어이없어하다가 환인을 불렀다.

「환인, 있잖아…….」

환연에게 이야기를 들은 환인은 우선 여자들이 모두 모이길 기다렸다가 환연과 릴라이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언급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초월급 물의 정령이 도령한테 관심이 식고 대신 육합등약이 적용되는 중인 너한테 관심이 옮겨갔다는 거네?=

「응. 꿩대신닭인 거 같긴 한데……. 릴하고 계약하면 나도 얻는 게 클 거 같아.」

=주인님. 어쩐지 좀…….=

이실리테가 살짝 곤혹스러워하는 얼굴로 환인을 돌아보며 주어 없이 중얼거렸지만, 환인은 찰떡같이 알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네빌라와 같은 관음 성향이 느껴진다. 초월자로 분류되는 존재들에게서 제법 흔히 드러나는 특징인가.”

오. 헤에. 작게 탄성을 지른 여자들은 침대 바구니 가장자리에 앉아 다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그 정령 합체는 위험하지 않니? 자주, 오래 합체하면 연이 네 자아가 흐려진다던가 그런 거.=

「나도 그게 의심스러워서 물어봤는데 정식 계약이잖아. 계약 관계에서는 서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줘선 안 된다는 맹약은 초월급 정령도 함부로 깰 수 없을 만큼 강한가 봐.」

=맹약은 거의 절대적임다. 사람은 그 맹약을 어기면 정령력이 아예 사라져버리는 제약이 돌아오죠. 그런데 정령은 존재가 사라지는 수준의 벌칙을 받게 돼요.=

나름 하급 정령을 다루는 아영의 언급에 여자들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에게 해가 없는 계약이라면 방해할 의사는 없다. 그런데도 한자리에 모은 이유는, 환연의 몸은 너무 약해. 정령 합체의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단련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 방법을 상의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일단 정령 합체의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내는 것부터 해야겠네.=

”예.“

=잠깐만! 도령, 연이는 아직 합체 못 한다며? 합체를 못 하는데 부담은 어떻게 측정할 거야?=

눈을 살짝 크게 뜬 안느의 질문에 그가 말한 뜻을 알아차린 환연이 혼잣말을 한다.

「아. 그렇구나. 릴이랑 합체를 못할 뿐이지 최하급이나 하급 정령하고는 이미 할 수 있는 거였어.」

“그래. 혹시 모르니 릴라이스에게 먼저 물어봐라. 다른 정령과 합체하는 게 괜찮은지.”

「……괜찮대. 자길 두고 딴 것들이랑 계약해서 합체하는 건 용서 못 하지만, 자신과 정령 합체할 수 있게 육체를 단련시키기 위한 이유라면 된다고 하네.」

“그렇다면 우선 부담 측정부터 시작할까. 안느와 아영은 회복 관련 성술을 준비해라. 유르파도 만일을 대비한 물약을 준비해주십시오.”

셋에게 지시를 내린 환인도 아스펜드에서 가지고 있던 정령석을 모두 꺼내 탁자에 내려놓기 시작했고, 아영은 때마침 좋은 게 있다며 주머니에서 넓은 종이와 펜을 꺼내 술법진 하나를 그려나간다.

=이 성법진 위에서는 대부분의 약화나 저해 효과에 면역이 되고 생명력이랑 체력이 계속 회복돼요. 신체 부하 실험에 도움이 될 거에요.=

=어! 그거 벌써 습득했어? 난 아직 반도 이해 못 했는데.=

=저 이래 봬도 7급 성술산데요. 이 정도도 못 하면 7급이라는 등급 내려놔야죠…….=

아영이 그리기 시작한 것은 환인이 테이아무스 섭정에게 받아온 보상 중 하나인 고등 성술서에 적힌 생명 원천의 성법진.

그걸 그리는 아영은 신바람이 나 있었다.

‘오빠한테 칭찬받을 기회!’

할 게 없어서 마차를 타고 2주간 이동하면서 틈날 때마다 고등 성술서를 읽었던 건데 설마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눈에 불을 켠 아영이 성법진을 그려나가는 동안 유르파는 환인과 함께 환연의 몸을 단련할 방법을 구상해나갔다.

=연이의 몸이 약한 건 신체 크기에서 오는 한계야. 우리가 소형화를 써서 축소되면 모든 비중이 비율대로 감소하는 게 아니라 일부는 압축되기에 해당 크기에 걸맞지 않은 강인함을 지니게 되는 거거든.=

“만약 거대화를 써서 몸 크기를 늘리고 그사이 몸을 불리고 키우면 어떻게 될까요.”

=응? 음.=

그의 의견에 유르파는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참신한 발상이네? 가능성은 있는데 그러려면 거대화의 유지 시간이 문제야. 근력 운동을 한 뒤에 축소되면 그로 인해 돌아올 부작용이나 후유증도 생각해봐야 하고.=

“하루 이틀 안에 결과물이 나오지 않겠군요.”

=응. 하지만 자기가 이모렐 씨랑 천인체를 빌려주고 안느 아가씨랑 아영이 도와준 덕분에 기존의 연구는 거의 끝났거든? 소형화로 쌓은 데이터가 있으니까 그걸 참고해서 거대화에 매달리면 결과를 빨리 낼 수 있을 거야.”

그사이 안느와 이실리테는 환연에게 맨손으로 하는 신체 단련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느 특정 부위만 단련하는 게 아니라 전신을 골고루 강화하는 체계적인 단련법이다.

물론 환인의 노트북에서 꺼낸 정보에 그녀들 자신의 경험을 더한 훈련법으로 기초적인 안전장치는 마련된 단련.

=앞으로 이 훈련에 더해서 매일매일 수영도 해야 해.=

「수영은 왜?」

가뜩이나 맨손으로 30분 가까이 4번을 해야 하는 분량인데 거기다 수영까지 해?

=수영이 온몸의 근육을 골고루 단련시켜주거든. 도령의 노트북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이야.=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

=환연. 식단도 조절할 거야. 앞으로는 간 안 한 단백질 위주로 채식을 곁들여서 훈련을 반복한다고 생각해. 술도 금지고 달콤한 음료수도 안돼. 늦잠 자면 바구니 두드려서 깨울 거니까.=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하지만 할 수밖에 없겠네.」

=환연? 저도 옆에서 함께 할게요. 같이 힘내봐요!=

「응…….」

모두가 자신을 위해 소매 걷고 나서주고 있다.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앓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앞으로 편한 생활은 끝이구나 싶어 한숨을 폭 내쉬었던 환연은 순간 눈을 날카롭게 뜨며 살기를 뿌렸다.

어느덧 해가 지고 짙은 어둠이 도시에 깔린 시각.

달도 초승달에 구름이 잔뜩 껴 달빛이 하나도 비추지 않는 도시를 웬 놈들이 여섯이나 지붕과 골목길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니라인의 병사나 기사는 아니다.

가뜩이나 기분 안 좋은데 이것들은 또 뭐야? 독병? 갈고리검에 밧줄에다가 바람총까지?

놈들은 대놓고 붉은 바위 호텔, 지금 자신들이 머무는 곳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다.

정령들이 보내주는 정보는 단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암살자.

아까 환인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환연은 앙증맞은 주먹을 꼭 쥐고 스산한 살기를 뿌리며 중급 땅의 정령을 불러냈다.

‘묻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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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아드네빌라: .......

릴라이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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