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58화 (658/813)

658 협곡 도시 니라인

이실리테가 체크인한 붉은 바위 호텔은 니라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상급 상업 지구에 있었다.

그런 상급 상업 지구에서도 중심부인 십자로에서 한 구역 떨어진 호텔.

이 정도만 들어도 니라인에서 0티어 최고급 호텔은 아니지만, 귀족도 거부감 없이 머무를 수 있는 숙박 시설임을 알 수 있다.

반듯하게 깎은 석조 외벽의 ㄷ자 모양 3층 건물. 내외부를 비교적 주고받게 꾸며 그런 수수함 속에서 기품을 추구하는 호텔에 입장한 환인은 식겁한 호텔 지배인과 종업원들의 마중을 받게 되었다.

=저희 붉은 바위 호텔 일동은 영도의 녹색 성자이신 서, 성제님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단정하고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호텔 로비에서 쉬고 있던 투숙객이나 체크인, 체크아웃하려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뭐지?’하고 바라보다 뜨악한 얼굴로 행동을 멈춘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환인은 대답 없이 가슴에 손을 올려 살짝 고개를 숙였고, 환인의 찬란한 황금빛 아우라에 가뜩이나 기절할 것 같았던 여 지배인은 그런 인사에 당장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넙죽넙죽 허리를 숙였다.

가만히 두면 언제까지나 그럴 것 같은 모습에 이실리테가 나섰다.

=지배인님. 객실로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 물론입니다. 성제님, 이쪽입니다. ……당신들은 뭐 하는 건가요? 기사님들의 짐을 받아드세요…!=

지배인의 소리죽인 절규에 좌우로 시립 해있던 호텔직원들이 황급히 다가갔지만, 환인의 여자들은 정중한 말로 사양했고 직접 짐을 객실까지 날랐다.

일행이 빌린 객실은 3층 건물의 3층에 있는 최고급 객실.

넓은 거실에 응접실, 다이닝룸에 대형 욕실 하나, 작은 샤워실 두 개, 화장실 4개에 방 5개인 펜트하우스 급이다.

=여기 간이탁자의 끈을 당기시면 즉시 담당자가 찾아뵐 것입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즉시 시정할테니 부담없이 끈을 당겨주시기 바랍니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지배인께서는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예, 예. 그럼 편히 쉬시길…….=

객실 문이 닫히자마자 환인은 줄곧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여자들도 챙겨온 짐가방을 내려놓기 시작하고, 안느는 자신과 언니 동생들의 개인 소지품 가방을 방으로 옮기다가 피식 웃었다.

=지배인이 불쌍해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

=자기가 조용히 무게를 잡으면 분위기 굉장하잖니. 성제님의 아우라가 압도적인 것도 있고 일반인인 지배인이라서 더욱 떤 것도 있었을 거야.=

유르파가 웃으며 말을 받아주니 아영도 킥킥 웃었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도 멍하니 우리만 쳐다보던데요?=

=아무튼, 좀 소심해 보였지만 능력은 있어 보이니까 어중이떠중이는 지배인 선에서 쳐낼 거 같으니 피곤하지는 않을 거 같네. 뭐 피곤한 일이 생기면 나나 이슬이가 내려가서 은근히 압박을 줘도 될 테고.=

이실리테의 시중을 받아 후드 망토와 천릉의 반코트를 벗은 환인은 그녀의 아름다운 호박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칭찬했다.

“괜찮은 호텔을 찾았군. 체크인까지 하느라 고생했다.”

=아니에요. 하녀원에서 이런 것도 배웠거든요. 실수를 약간 했지만, 아영이 도와주어서 탈 없이 할 수 있었어요.=

“그래. 아영, 이리 와라.”

=옙!=

강아지처럼 호다닥 달려와 머리를 내민 아영은 쓰다듬을 받으며 만약 꼬리가 있었다면 풍차처럼 붕붕 돌고 있었을 만큼 몸을 들썩였다.

그렇게 둘을 칭찬해준 환인은 먼저 짐부터 정리하려는 여자친구들을 거실에 불러모았다.

“예상대로라고 할지. 환연의 정령 정찰로 도시 전체를 간단히 살펴본 결과 치안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이유는 분기별로 쳐들어오는 이블팩션의 공세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

「이블팩션이랑 싸우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히스론드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편이라고 해. 범죄를 저지른 연놈들도 끌려와 고기 방패나 번식용 종자로 쓰이는데 그런 거친 놈들이랑 범죄자 놈들이 섞여 있는 거 같아.」

=뭐 접경 지역 도시는 대부분 그런 느낌이니까 유별난 건 아니네.=

안느의 무덤덤한 대꾸에 환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상급, 중급, 하급 거리로 나뉘는데 하급 거리는 환연이 방금 말한 자들이 지내는 곳이다. 이를테면 할렘가라고 할 수 있지. 딱히 개인적인 용무로 하급 거리에 내려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영.”

=옙?=

“갈 일이 있다면 처신에 주의를 기울여라. 도시의 영주에게 꼬투리를 잡혀 장기간 투숙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

입구의 골목길에서 도시의 하급 양아치를 두드려 팬 것을 지적한다는 걸 깨달은 아영이 살짝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급 거리는 전쟁으로 제법 돈을 번 자들이 니라인의 일반 시민들과 뒤섞여있다. 대부분의 물자가 중급 거리에 한 번 모여서 하급과 상급 거리로 퍼지는듯하니 볼일을 위해 중급 거리로 갈 일이 자주 생기겠지. 그때는 혼자 다니지 말고 둘이서 붙어 다니도록.”

=율이 언니랑 벨, 들었지?=

=안느 아가씨도 마찬가지거든? 자기가 신분을 드러내면 아가씨들도 영도의 얼굴마담 영혼 기사니까 누가 기분 나쁘게 한다고 후려치고 걷어차면 안 된다는 이야기잖니.=

=어? 잠깐, 내가 그런 이미지였어?=

=안느 언니는 저 다음으로 좀 폭력적인 이미지죠? 우리랑 정 반대가 려강이랑 유르파 언니고요.=

=아니아니! 나보다 이슬이가 더 폭력적인 이미지지! 내가 이때까지 힘으로 상대를 압박한 건 아영이 뿐인데?! 하지만 쟤는 수틀리면 대검으로 목을 그어버릴 거 같잖아!=

=이실 언니는 오라버니 일이 아니면 차분하고 이성적이신걸요? 그런데 안느 언니는 상대가 비신사적으로 나오면 웃으면서 상대 얼굴을 한 손으로 조이실 거 같아요.=

=그런…….=

백려강의 평가에 안느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자 여자들이 키득키득 후후 웃는다.

환인도 슬쩍 웃음 짓다가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강약을 말하자면 너희들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겠지.”

도시에서 외출할 때도 유르파는 호신용 부적과 마도구를 상시 지니고 다닌다.

다양한 종류의 부적 다발과 마도구의 위력은 팔라툼의 하급 기사단을 상대로도 시간을 끌다 탈출할 수 있을 수준.

작심하고 도망치려 하면 환인도 살짝 곤란함을 느낄 정도로 그녀가 몸에 걸친 마도구는 온갖 상태 이상 방지에 단거리 공간 도약에 생존을 위한 기능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렇게 준비한 이유는 혹시라도 말썽에 휘말려 자신의 몸에 불상사가 생기면 환인이 격노해서 관련자의 목을 모조리 (물리적으로) 쳐버리게 될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유르파 말대로 나는 영도의 간판이 되어버렸다. 그 말은 너희들에게도 그에 걸맞은 처신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거지. 그게 뭘 뜻하는지 너희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폭력을 쓰거나 무뢰배 같은 언사와 행동을 하면 도령은 물론 영도의 평판도 떨어트리겠지…….=

“그래. 그러니 너희의 그 아름다운 외모에 이끌린 부나방들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둘이서 짝을 맺고 다니라는 이야기다.”

상급 거리는 애초에 귀족 거리. 준 귀족이나 상단의 상단주처럼 신분과 지위가 확실하고 재력도 넉넉한 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 때문에 영주도 신경 쓸 정도로 치안이 확실하다.

그러나 중급 거리는 조금 부패한 병사들도 있어 홀로 다니지 말라는 이야기였지만, 여자들은 그런 것보다 그의 외모 칭찬에 부끄러워져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하긴.=

=확실히…….=

사람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생물.

이성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일은 제법 생기는 편이고, 그로 인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상태에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휘두르게 된다.

환인의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님을 잘 아는 여자들은 꼭 같이 다녀야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오른 열을 진정시킨 안느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니라인에서 일정은 어떻게 돼?=

“몇 시간 안으로 영주성에서 사람이 나와서 날 초대할 테지. 영주와 적당히 교류를 가진 뒤 협곡을 안전하게 넘을 방도를 찾은 다음 보급을 마치고 떠난다.”

=성불행은 어쩌고? 승령천제가 끝난 지 얼마 안 됐다지만 성제가 왔으니까 슬쩍 부탁할 수 있잖아.=

“약 2주 가까이 파편인을 소화하고 영기 순환도 연습한 결과 기본적인 혼령주도 펼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성불행을 원한다면 혼령주를 한 번 써줄 생각이다.”

자신이 없는 데서 혼이 승천하고 성불하면 영혼 조각을 몸에 받아들일 일도 없을 테니까.

=주인님, 끝났어요.=

“고맙다. 너도 백려강과 함께 씻어라. 영주 성에서 초대가 온다면 너와 백려강을 데려갈 생각이니까.”

=네, 주인님.=

이실리테의 목욕 시중을 받고 머리까지 다듬은 환인은 창가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상쾌함을 만끽했다.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져서 성가셨는데 이실리테가 다듬어준 덕분에 목덜미도 시원해졌고, 백려강이 만들어온 보라색 과일주스에 성수를 한 방울 떨어트려서 마시니 탄산음료처럼 혀를 톡톡 쏘아 상쾌함이 배가된다.

“…….”

환인의 시선이 들어온 성벽의 반대편, 협곡을 향한다.

마치 신이 땅을 갈라놓은 것처럼 어마어마한 규모의 협곡.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곳도 이 니랄토레드 대협곡에 미치지 못할 거라 환인은 생각했다.

깊이는 환연의 정령 탐지로도 다 감지가 안될만큼 깊고 넓이 또한 그녀의 탐지 범위를 아득히 넘어간다.

그런 대협곡의 절벽에 세워진 니라인 협곡은 배산임수처럼 대협곡을 등지고 좌우로 산을 낀 형세다.

협곡 반대쪽보다 이쪽의 지대가 더 높아 제법 멀리까지 보인다. 그리고 협곡 건너편에 형성된 마을과 협곡을 날아서 오가는 사람들.

비행기 승강장이라고 할까. 조인족이나 플라비우스족이 기다리던 사람이나 짐을 들고 날아 건너간다.

협곡을 어떻게 건너는 걸까 생각했는데 예상 이상으로 원시적이고 낙후된 방식이다.

그렇게 도심을 살피던 환인의 뒤로 자그마한 그림자가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뭐해?」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날아든 환연은 환인의 어깨에 앉아 슬그머니 그의 목에 붙으며 킁킁, 냄새를 맡는다. 그러더니 조금 만족한 기색으로 그에게 질문했다.

「협곡을 건너는 저런 방법이면 유르파가 축소화 비술을 쓴 뒤에 노른을 타고 넘어가는 게 더 편하지 않아?」

“그렇지.”

「그런데 왜 니라인에 들어온 건데? 나 주스 조금만 줘.」

컵을 들어 살짝 기울여주니 두 손으로 컵을 잡고 꼴깍거리며 주스를 마시는 환연.

거의 100mL, 그녀의 몸보다 더 많은 양을 마신 환연이 후~ 살았다는 듯이 작게 숨을 내뱉고 입술을 훔친다.

“어제 아영이 엘미느와 통신 보고를 할 때 자고 있었나.”

「응. 누구 때문에 허리랑 밑이 너무 아파서.」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왜 자꾸 도발하는 건지 모르겠군.”

「킥킥. 그런 도발에 넘어오는 게 더 신기하니까 그렇지. 안 그래? 아,빠♡」

“…….”

그녀와 몸을 섞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2주를 넘어 3주가 되어가고 있다.

성교의 정서적 안정 효과 덕분인지 때때로 보여주던 음울한 표정과 감정은 거의 다 사라졌는데 반대로 조금 장난기가 생겨 곤란하다.

장난을 받아주고 도발에 응해주지 않으면 될 일이지만…….

자신의 귀에 후~ 숨결을 불어넣는 환연에게 작게 한숨을 내쉰 환인은 원래 주제를 끄집어냈다.

“엘미느가 올린 보고에 따르면 구주의 독니와 나사라트의 암살자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듯하다.”

「네가 목표일 리는 없고, 아영이야?」

“그래. 원 카락스의 암살자 집단이 사라지고 그 이름을 한 사람이 계승한 데다 그 사람이 내 다섯 번째 영혼 기사가 되었으니까.”

「아영을 암살하면 성제의 영혼 기사를 암살했다는 업적에 업계 톱이라는 카락스의 암살자가 정서적으로도 소멸할 거라고 생각해서인가 보네. 멍청하긴.」

“명성을 드높이고 자신들이 업계 톱이 될 기회가 눈앞에 있다. 그 집단의 성향을 본다면 다소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해볼 만하다 여긴 거겠지.”

성제를 죽이려 드는 것도 아니다. 기회를 봐서 7급 성술사인 계집 하나만 죽이고 빠져나갈 뿐이니 위험 부담이 없다고 여겼을 거다.

「흐응. 이제 한 달 좀 넘지 않았나? 엘미느란 여자도 제법 능력이 있네. 그 시간에 이런 정보를 물어다 온걸 보면 말이야.」

1000금화를 운영자금으로 받은 엘미느는 조직의 개편과 동시에 지식과 지혜를 짜내고 짜깁기해 빠르게 조직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정보 수집의 방식과 수집하는 정보의 질과 양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수익을 내기 위한 부가가치 창출에도 힘썼다.

환인이 1000금화를 투척한 이유는 하얀 늑대들의 전면적인 개혁.

개혁이라는 것은 집단의 상징성과 방향성을 재확립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는 근간도 포함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환인이 다녀간 이후 한 달, 엘미느는 매일같이 코피를 쏟아가며 개혁을 추진, 조직원의 충성심을 검증하고 정리하며 지능과 지혜가 뛰어난 세 명을 뽑아 같이 죽도록 굴렀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 성과의 일부는 이전 동종 경쟁업체인 나사라트의 암살자와 구주의 독니의 동향이었다.

카락스의 암살자 조직원들은 애초부터 암살과 정보 취급을 함께 해왔었다.

그 능력을 바탕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개혁하며 점조직 방식으로 변경한 엘미느는 기존의 운영 경험과 이점을 살려 현장에서 현지 정보원을 채용, 본격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취합하여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량이 이전 카락스의 암살자 대비 3배.

거기에 나사라트의 암살자와 구주의 독니가 움직이는 중이란 증거가 있었던 것.

“유능하지 않더라도 유능해져야지.”

영도의 성제를 배경으로 두고 대성녀의 지원까지 받고 있다.

실적과 성과를 내지 못했다간 어떤 신세가 될지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죽어라 노력하고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환연.”

「응.」

“몸에 변화는 아직 없나.”

웅장한 대협곡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던 환인이 시선을 시내로 옮긴다.

그의 눈에 호화로운 장식의 백마 네 마리가 휘황찬란한 백색 마차를 이끌고 달려오는 게 들어왔다. 방향을 보면 이곳이 목적지로 보인다.

「없어. 아무래도 내 몸이랑 육합등약의 궁합은 잘 안 맞나 봐. 속살의 궁합은 좋은 거 같은데.」

“그런가.”

효과가 없다고 하는 말에도 아쉬움이나 안타까움, 절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환인은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그녀가 가끔 보여주던 허무의 광기는 정체성과 존재성 그리고 정서적 안정이 전부 필요한 것으로 보였는데, 육합등약이 늦게 발동하거나 통하지 않는다면 아직 위험요소가 남아있는 셈이다.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니 그녀의 정체성을 좀 더 확립시켜줄 무언가를 찾는 것도 신경 써야…….

「걱정하지 마. 이제 발작 같은 건 안 일으킬 테니까. 아무래도 난 능력과 육체의 확립보다 정체불명의 이런 몸뚱이를 받아주고 내가 있을 장소를 만들어줄 존재가 더 필요했던 거 같아.」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던 환인은 그녀의 대답에 자신의 눈앞으로 날아오른 환연을 쳐다보았다.

꾸밈없는 작은 미소가 떠오른 얼굴. 안심을 주기 위한 거짓이라고는 절대 안 보이는 표정이다.

「고마워. 날 받아줘서. 그리고 내가 있을 장소를 만들어줘서.」

“……그래.”

무표정 너머로 그가 조금 쑥스러워하는 것을 느낀 환연은 배시시 웃으며 그의 입술에 쪽, 버드 키스를 해주었다.

환연이 탁자 위에 올려진 침대 바구니로 들어가고 잠시 후, 백색 마차가 호텔변에 정차한다.

이어서 내리는 세 명과 모여드는 다섯의 플라비우스족 기사들.

환인의 눈빛이 그중 한 명에게 향하며 무거워진다.

‘혼재…….’

잠시 후 문에서 쿵쿵, 무거운 노크 소리가 울려퍼졌다.

=내가 나갈게.=

등대의 빛 제복 상의를 벗어 다소 간편한 차림으로 있던 안느가 허리춤에 예식용 워해머를 차고 나간다.

달칵.

객실의 출입문을 연 안느는 눈앞에 선 단쌍익 남자의 모습에 끔뻑,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뭐야. 이 우스꽝스럽고 화려한 옷차림은?

=오. 당신이 명성 자자한 은빛 철벽, 수호 영혼 기사 안느 경이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붉은 대지의 태양이자 북부 히스론드의 변경백, 포르토니오 대협곡에서 이어지는 니랄토레드 대협곡의 주인이시자 협곡 도시 니라인의 지배자이신 얌 헤밀니아 니라인 백작 각하의 둘째 아들, 우페이 헤밀토너 니라인입니다.=

뭔가로 잔뜩 부풀린 어깨, 하얀 바탕에 세로로 금빛 무늬가 죽죽 그어진 더블릿과 호박 바지에 하얀 타이츠, 그리고 과장된 적색 어깨 망토와 하얀 깃털 모자까지.

안느는 그 으리으리한 패션으로 과장되게 올리는 귀족가 인사에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어렸을 적부터 익혀왔던 매너 덕분에 티를 내지 않고 답을 할 수 있었다.

=이쪽은 성제님의 두 번째 영혼 기사인 안느야. 그래서 백작 각하의 차남께서 무슨 용무로 찾아오신 건데?=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몇 년 혜성처럼 홀연히 나타나 녹색 성자의 이명으로 시작하여 영도의 빛나는 별이 되신 성제 예하의 존안을 뵈어 예를 올리고 영주님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그, 그래…….=

진실의 눈으로 영주 가문의 차남, 우페이를 살폈지만 전부 진실이며 진담이었다.

성제가 영도의 대성녀 다음가는 지위라지만 그건 영도 내의 일. 귀족과는 하등 관련이 없어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평민이나 마찬가지다.

생각 없고 지식의 끈이 짧은 인간이라면 성제를 아래로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우페이는 환인을 정말 존경하고 있다는 듯이 하나부터 열까지 온몸으로 진심을 드러낸다.

복장이나 패션 감각이 좀 부담스럽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안느는 그의 뒤에 서 있는 보좌관 둘과 기사 다섯을 훑어보고 우페이에게 말했다.

=다는 들어오지 못해. 두 명까지만. 그래도 괜찮아?=

=물론입니다. 젬스만 남고 나머지는 내려가서 기다리도록.=

척.

복명복창은 생략인 듯 일사불란하게 경례를 올리고 내려가는 플라비우스족들.

안느는 우페이와 젬스라는 단쌍익 여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 주었고 우페이의 뒤를 천천히 따르며 예식용 워해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예식용이라지만 7급 직업자의 손에 들리면 흉악한 무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혹시라도 둘이 이상한 짓을 하려하면 단숨에 골통을 박살 내버리기 위해서다.

젬스라는 여자가 그런 안느를 힐끔 보았지만 별말은 않는다.

=오, 오오오! 오오오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우페이의 탄성과 그가 환인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에 놀란 안느가 움찔했지만, 우페이는 창가에 선 환인에게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몸을 날리듯 한쪽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정……!=

“조용히.”

이어 그가 온갖 미사여구로 꾸며진 찬미를 쏟아내기 직전, 환인이 검지를 세워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낸다.

휘황찬란한 아우라에 감동하고 감격했던 우페이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이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과한 예식은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이 호텔에 숙박하게 된 것도 성제라는 지위로 인하여 어쩔 수 없었음을 알아주십시오.”

끄덕끄덕.

“수식어를 쓰지 않고 간결히 대화할 준비가 되셨다면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우페이 헤밀토너가, 니라인의 영주이신 얌 헤밀니아 니라인 백작 각하의 친서를 성제 예하께 전달하고자 합니다.=

“니라인 가문의 차남께서 직접 찾아와 친서를 전해주시는 것에 예를 표합니다.”

=별말씀을.=

방금 그 사람이랑 동일인물 맞아?

웃음을 참느라 입술이 가늘어질 정도로 입을 꾹 다문 안느에게 짧게 시선을 준 환인은 사람이 180도 변한듯한 우페이의 손에서 돌돌 말린 고급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내용은 그가 말한 것과 동일했다.

70% 정도 되는 미사여구를 제외하면 모월 모일, 가문에 당신을 초대하니 부디 찾아와달라는 요청.

요청을 수락한다면 사자에게 날짜를 알려달라는 글귀에 환인이 입을 열었다.

“영주님의 초대는 감사하나 안타깝게도 갈 길이 멀고 급하여 긴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을 포함해 사흘 뒤, 협곡을 넘어 천암 산맥으로 향할 예정이니만큼 그 사이 영주님께 접견을 부탁드리고 싶군요.”

=하시면 내일 정오는 어떠십니까? 영주님께서도 짧더라도 진심을 다한 대화를 즐기시니 성제 예하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환인은 우페이와 잠시 시선을 나누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백색과 금테의 마차 주변에 서 있는 사람 중 하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확히는 그의 배후에서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붉은색 영혼, 혼재다.

의아함이 표정에 드러나기 시작한 우페이에게 다시 고개를 돌린 환인은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시간에 뵙기를 부탁드리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옛.=

우페이는 기사처럼 절도 넘치는 동작으로 환인에게 허리 숙여 귀족가의 인사를 올린 뒤 보좌관과 함께 사라졌다.

처음 보았던 과장된 행동이 다 거짓말 같은 태도였다.

=뭔가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네.=

=되게 과장되게 행동하던데 오빠 말에 태도를 싹 고치는 걸 보면 능력이 없진 않나 보던데요?=

=성제님한테 보내는 사자잖니. 멍청하고 눈치 없는 사람을 보냈다간 자기의 역정을 살 텐데 그런 인물을 보낼 리가 있겠어?=

=멍청함 지수가 높은 귀족의 생태를 생각해보면 없다고 할 수는…….=

=하긴…….=

우페이와 혼재가 달라붙은 남자를 태우고 떠나가는 마차를 가만히 응시하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아가씨들. 이제 뭐 할 거니?=

=저는 려강과 함께 도시의 식료품을 살펴보러 나갈 생각이에요.=

=난 무기랑 장비 손질한 뒤에 밀린 옷 좀 세탁할까봐.=

=유르파 언니 뭐 하시게요? 이실리테 언니 짐꾼으로 따라갈까 했는데 언니 하실 일 있으시면 도와드리겠슴다.=

=그럼 아영이는 나 좀 도와줘. 비술 하나 만든 거 시험이 필요하거든.=

=옙.=

=나도 도와줄게. 장비 손질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고마워~.=

평범하게 할 일을 찾아 움직이려는 여자친구들.

일단 이야기는 하는 게 좋을까. 혼재라 해도 이제 큰 문제는 아니지만, 앞뒤 정황을 생각해보면…….

생각을 마친 환인은 자신을 돌아보는 여자친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방금 혼재를 봤다.”

=승령천제가 겨우 2주 전이었는데 벌써 혼재가요?=

탁자 위의 병 속에서 사람처럼 벌렁 뒤집어져 쿨쿨 자고 있는 보석쥐로 고개를 돌린 환인.

태평한 보석쥐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숨겼던 진상을 밝혔다.

“내 억측일 수 있지만 오는 길에 가도에서 발견했던 전멸한 상단의 흔적, 그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억측이라고 쓰고 확신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악!=

아영의 정수리에 쿵, 주먹을 쥐어박은 안느가 환인에게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단순한 괴물 습격이 아니었다는 말이네. 거기서 뭔가 습격의 흔적을 발견했었어?=

“그래. 우리와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고 과한 참견이 될 것 같아 말하지 않았던 거다.”

=으음……. 누구한테 혼재가 붙어있었는데? 혹시…….=

“차남은 아니었다. 뒤에 서 있던 보좌관 중 하나였지.”

=얌 백작이 나쁜 사람이었다는 건가요…….=

그와 안느의 대화에 백려강이 조금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설마 그럴 줄은 몰랐다는 실망감이 깃든 얼굴이다.

“그건 모를 일이지. 그리고 혼재가 정의로웠던 인물이고 혼재를 만든 쪽이 악당일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과 복수심, 분노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니까.”

=……아.=

=음.=

표정이 한층 신중해진 여자친구들의 모습에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알아 두라는 뜻에서 한 말이니 너무 부담가지지는 말도록. 그리고 내일 정오에 영주를 만날 때는 이실리테와 백려강만 데려간…….”

=나도 가면 안 돼? 나 이제 사람 모습도 할 수 있는데.=

실루를 인형처럼 품에 안고 있는 노른의 이야기에 잠깐 생각했던 환인은 한 명을 더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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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차기작 등장인물과 구상이 거의 마무리 되어서 미궁기담을 빨리 끝내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만, 이거 진행하는 속도 보니까 진짜 1000편 될거 같아요...;ㅅ;

아무튼 미궁기담은 완결까지 쭈욱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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