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7 협곡 도시 니라인
=괴물이라도 좀 나오지 않으려나~.=
덜컹대는 마부석,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과 끝없이 이어지는 대산맥 사이로 난 노면 가도 위에서 아영이 지루해하며 중얼거린다.
고삐를 잡고 전방을 주시하다가 그 혼잣말을 들은 이실리테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화로운 게 좋은 거야. 괴물과 싸우는 건 아무리 사소하다 해도 위험 부담이 있으니까.=
=싸우면서 얻는 경험도 있잖아요. 실전 경험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을 생각하면…….=
=주인님이 괴물과 수없이 싸워서 그렇게 강하시다고 생각해?=
=…….=
=강함과 실력은 평소의 수행에서 나온다는 게 내 생각이야. 네 말대로 실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도 있겠지만, 그건 대련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고 봐.=
설득력이…… 있어!
=3달 전의 나였으면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수긍이 되네요!=
3달 전이라. 이실리테는 거인숲 미궁 앞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합류한 게 이제 2달이 조금 넘었나?=
=옙.=
=……느낌은 적어도 반년은 같이 지낸 기분이네.=
아영이 합류할 때만 해도 주인님을 암살하려 한 년이다 보니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마치 오래 같이 지낸 파티 같은 느낌이다.
그런 그녀의 감상에 아영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에헤, 하고 웃었다.
=그야 언니들 앞에서 오빠한테 그렇게 무참하게 깔아뭉개졌으니까요. 내숭이고 체면이고 뭐 남아있는 게 있겠어요? 다~ 의미 없지.=
=자기감정에 솔직해졌다는 말이네.=
=옙. 오빠랑 언니들한테는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제가 솔직한 제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게 해주셔서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제가 언니 입장이었으면 기사검으로 머릴 쪼개버렸을 건데 안 그러셨잖아요. 합류한 뒤로도 계속 잘 대해주시고…… 진짜 감동했어요.=
=네가 성실해서 그래. 게으름이나 요령을 피웠다면 죽고 싶을 정도로 몰아붙였을 거니까.=
이실리테가 조금 쑥스러워하며 아영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환인이 마차 지붕 위로 휙 올라왔다.
“저쪽인가.”
「응. 거리는 427m 정도야.」
=……?=
=??=
“보이는군.”
적인가? 이실리테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삐를 잡아당겨 마차를 세운다.
이윽고 그의 왼손에 천칭이 들려지고 오른손에서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싶더니 천칭의 머리와 그의 오른손 사이에 플라스마 같은 실선이 몇 가닥 이어졌다.
그리고 일어난 폭발.
꽈광!!!
=……!=
=왓?!=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대마술사의 작렬 같은 허연 안개 폭발이 터졌다.
하얀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고 폭발의 후폭풍이 흙먼지와 함께 난폭하게 마차를 뒤흔들며 지나간다.
잠시 후, 시야가 깨끗해졌을 때 보인 풍경은 변한 게 없었다. 그저 좀 떨어진 땅에서 고열의 흔적인지 투명한 아지랑이가 조금 일렁이고 있을 뿐.
마차 안에서 여자들이 고개만 빼꼼 내밀고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 환연이 그의 목깃 쪽에서 머릴 내밀고 눈을 깜빡였다.
「어? 뭐야? 폭발이 일어났는데 시체가 멀쩡하네. 무슨 짓을 한 거야?」
“흠……. 노른, 나와서 태워다오.”
「응.」
훌렁, 푸른 원피스와 팬티를 벗고 알몸이 된 노른이 바람과 함께 선루프를 통해서 하늘로 날아올라 신수 형태로 변신한다
환인이 방벽 패널을 밟고 뛰어올라 노른의 등에 착지하는 걸 본 이실리테는 아영에게 고삐를 넘긴 뒤 기사검을 챙겨 먼저 날아가는 환인의 뒤를 쫓았다.
=……?=
그리고 폭발이 벌어진 장소에 도착한 이실리테는 의아함에 눈을 크게 떠 죽어 널브러진 이블팩션의 종족을 눈에 담았다.
파충류 인간. 동글동글한 느낌의 사비족과 다르게 주둥이가 뾰족뾰족한 데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악어 비슷한 두상의 사낙이라 불리는 이블팩션이다.
의아한 점은 분명 폭발과 함께 하얀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는데 시체가 멀쩡한 것이었다. 땅에도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거다.
누더기 가죽옷과 뿔로 만든 창, 독침 화살 등을 지닌 사낙 일곱 마리는 아무런 외상 없이 잠자듯 쓰러져 죽은 상태.
아니 죽은 건 맞나? 심장이 뛰고 가늘지만 호흡을 하고 있는데?
그의 옆에서 기사검을 쥐고 경계하던 이실리테가 기감을 퍼트려 주위를 살피면서 그에게 물었다.
=주인님. 이 자들 다 죽은 건가요……?=
=육신은 살아있어도 혼이 없다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겠지.=
눈을 조금 크게 떴던 이실리테는 문득 든 생각에 살짝 곤혹스러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저어… 영혼 폭발은 물리력도 동원하지 않았었나요?=
“영혼 폭발이라는 걸 용케 알아봤군.”
=주인님의 영혼술에 폭발을 일으키는 것은 영혼 폭발 하나뿐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영혼 폭발을 쓰실 때도 조금 이상했어요.=
환인도 시체를 다 살폈기에 그녀에게 사낙을 가리켰다. 그 손짓에 푹푹푹- 기사검으로 사낙의 심장을 찌르기 시작한다.
몸에 칼이 들어와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낙들. 정말 영혼 폭발에 휩쓸려 혼이 소멸한 건가?
“어떤 점이 이상했지.”
=주인님이 영혼술을 쓰실 때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아요. 폭발도 땅이 터지면서 흙먼지가 뒤섞이거나 살점이나 핏물이 흩어지는 거로 폭발을 인식하는 식이었거든요.=
그런데 방금 쓴 건 하급 투명화를 쓴 것처럼 손과 지팡이 쪽이 울렁이는 게 보였고 폭발 또한 하얀 불기둥이 치솟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자 환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마차 쪽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파편인을 몇 개 더 녹이는 데 성공한 것이나 영기의 순환 방식이 달라진 게 영향을 준 거로 보이는군.”
=영기의 순환 통로…… 말씀이세요? 위상력 회로 같은 거요?=
“그래.”
이전까지는 그저 영기가 축적된 상단전 부근에서 팔과 손까지, 최단거리로 영기를 이끌어 썼다. 중단전 부근의 심핵력도 마찬가지다.
시계 톱니바퀴 같은 것도 아니고 굳이 몸 안을 순환시킬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빠르게 능력을 쓰기 위해서 최대한 짧게 영기를 움직였다.
“그랬었는데 파편인이 박힌 뒤로 영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어떻게?=
마차로 돌아온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출발을 지시하고 지붕으로 올라와 안느가 들고 있는 유리병, 그 속의 보석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파편인을 피해 영기를 순환시키다 보니 일종의 흐름,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생겼지.”
=으응? 영기는 회로 없이 쓰는 거 아니었……나? 아닌가?=
안느가 고개를 갸웃하며 긴가민가하자 유르파는 보석쥐로 시선을 주며 뺨을 살짝 감싸쥔다. 조금의 당혹이 묻어나는 몸짓이다.
=영기에 대한 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자기가 이전에 했던 게 옳은지 틀렸는지 알 수 없긴 해.=
=흐음. 그러면 이제 발동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네?=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리모암의 강력을 일으켜 위상력을 손바닥으로 내보내기 시작한다.
영기나 심핵력의 순환 유도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 갑자기 그의 손에서 위상력의 푸른 기운이 흘러나오자 여자들이 이목을 집중했다.
푸른 향불 연기 같은 것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일렁이다 차츰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십수 개의 동그라미가 하나둘씩 붙으며 ∞와 8의 기호를 만들더니 이윽고 서로 붙으면서 벌집처럼 수많은 동그라미로 이뤄진 도형이 형성된다.
왼손과 오른손에 만들어진 그걸 합치자 족히 수십 개의 원이 붙어 하나의 일정한 흐름의 법칙을 만들었다.
얼핏보면 굉장히 정교한 모형처럼도 보이는 아름다운 광경.
“이런 식으로 파편인을 감싸는 것처럼 영기를 순환시키는…… 왜 그러지.”
위상력으로 시범을 보여주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경악한 얼굴, 혹은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에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뭔가가 이상한가.
=자, 자기. 그걸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는 거니?=
“그러고 있습니다만…….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라면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 도령이 문제겠지. 위상력 회로는 그보다 엄청 단순해. 아니 단순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네. 봐봐.=
허탈해하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낸 안느는 살인사건 현장에서 볼법한 사람 그림을 그려놓고 심장 위치에 하트 하나를 그려 넣는다.
그리고 하트에서 시작되는 선을 죽죽 그어 넣기 시작했다. 머리로, 팔로, 다리로.
선은 대체로 1~2번의 반 회전을 그리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식인데 그걸 본 이실리테와 유르파, 백려강, 아영이 ‘바로 그거지.’하면서 고개를 주억인다.
=봤지? 위상력 통로는 약간의 변주가 있긴 해도 이게 보통이야.=
“……이렇게 단순하다고.”
=단순한 게 아니라 이게 정상이고 도령이 이상한 거거든? 세상에 그게 뭐야. 원이 대체 몇 갠데? 대성녀님이나 백청룡님이 와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
=할 수야 있겠죠. 통로가 꼬이고 끊어져서 피를 토한 뒤에 폐인이 되거나 죽을 뿐이지.=
=오라버니는 굉장하시네요……. 음, 정도로 순환에 공을 들이면 영혼술에도 큰 변화가 생기니까…….=
백려강이 의미심장한 관심을 드러내자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아영이 화들짝 놀라 그녀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아니, 야 잠깐. 참새가 황새를 따라가려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날개 찢어져.=
=이, 이 몸은 용인체니까 조금 시도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모험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거든!=
그녀들의 대화에 유르파도 정신을 차리곤 날숨을 짧게 내쉬며 말했다.
=자기처럼 며칠 만에 저런 정신 나가……으흐흠! 무지막지한 순환을 하는 건 안 되지만, 반 회전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늘려나가면서 순환과 제어에 익숙해지는 쪽으로 시도해보는 건 괜찮다고 봐. 순환이 가미될수록 능력이 강화되는 건 자기를 토대로 봤을 때 확실할 테니까.=
=으음. 그럼 나도 해볼까?=
=그 정도면 저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안느도, 마차를 몰던 이실리테도 참여 의사를 내비치자 정령술의 천재라고 할 수 있는 환연이 이해 안 된다며 유르파에게 물었다.
「너희는 순환을 늘려볼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어? 인간은 호기심이 많으니까 누가 그런 연구 결과를 내놓을 법도 한데.」
=해본 사람이야 있겠지만, 위상력 회로의 변주는 큰 위험이 따르면서 효과는 바로바로 반영되지 않거든. 효과도 불확실한 데다 자칫 잘못하면 아영이 말처럼 폐인이 되기 십상인데 자기 능력과 생명을 담보로 모험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니.=
「흐음.」
그런가, 하고 환연이 작게 중얼거린 뒤로 각자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기며 주위가 잠시 조용해진다.
그걸 깨달은 안느가 에흠, 헛기침하면서 환연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도령이랑 같이 간 거기엔 뭐가 있었어?=
「사비랑 비슷하게 생긴 인간이었어. 머리가 되게 삐죽삐죽한 게 뱀은 아니고 그렇다고 악어도 아니고……. 몇 마리는 암소 뿔 같은 게 머리 이곳저곳에 나 있었는데 기분 나쁘게 생겼더라.」
=사낙이 일곱이었어. 녹색과 밀짚색이 섞여 있었고.=
환연의 묘사에 이실리테가 답을 거들자 안느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진다.
=초원 사낙이면 독침이랑 독화살을 쓰는 것들인데 놈들이 여기까지 내려오나? 이블팩션 접경지라는 실감이 확 오는걸.=
사낙. 한 마디로 신을 믿지 않게 되어 저주가 몸에 스며든 사비족의 대칭적인 생물이다.
이블팩션의 고위층을 차지하는 것들은 대체로 그런 식이다. 프라우드 족의 대칭인 시어 프라우드, 사비족의 대칭인 사낙, 플뢰족의 대칭인 섀도어, 플라비우스의 대칭인 헬플럼.
유르파가 약간 우려를 드러낸다.
=일곱씩이나 출현한 거면 근처에 사낙족이 부락을 꾸린 거 아니니?=
=설마. 놈들은 초원에서 거의 쿠에만큼이나 빠르고 멀리 이동할 수 있어. 하루 활동반경이 100km 정도라고 하니까…… 그래도 놈들의 변칙성을 보면 확답은 못 하겠네.=
=여긴 히스론드 국경 근처잖아요. 부락을 꾸렸다간 플라비우스족 기사단이 출동해서 쓸어버릴 텐데 바보가 아닌 이상 근처에 꾸리진 않겠죠. 악에 물들었다고 해도 사람의 한 갈래라고 할만큼 똑똑하니까요.=
=그럴까?=
=암살자 활동을 하면서 섀도어를 본 적 있는데 뭐, 피부만 좀 푸를 뿐이지 우리하고 똑같더라고요.=
=위로가 되는 듯하면서도 안되는 이야기네.=
근처에 부락은 없을 테지만, 지성체니까 동족의 죽음에 보복을 하러 올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자신의 영기 순환을 생각하던 환인은 슬슬 주제가 종료되는 듯해 손뼉을 두 번 쳐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협곡 도시까지 며칠 남지 않았으니 그렇게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영혼 폭발을 목격했다면 놈들의 동료가 모여들 수 있겠지요.”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좀 더 속도를 올리라고 지시한다.
“오늘은 해가 져도 2시간 정도 더 움직이도록 하지. 나도 아르겐테아 정찰병을 불러다 주변 선행 정찰을 시킬테니 환연도 정령을 상시 감시 태세로 유지하고.”
=네.=
「어.」
그걸로 대화는 끝났기에 안느와 백려강, 유르파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아영도 마부석으로 내려가 이실리테와 위상력 회로를 주제로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환인은 회색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하늘을 응시하다가 눈을 감고 영기를 다시 순환시켜나간다.
이블팩션이라. 8대 미궁 중 두 개가 이블팩션 영역에 있다고 하던데…….
영기의 순환과 그의 생각이 끊길 듯 말 듯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 후로 소소한 마물이나 괴물의 습격을 받으며 이틀간 더 달린 일행은 붉은빛이 도는 대지 위에 세워진 높고 두터운 갈색 성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히스론드 북부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협곡 도시 니라인이다.
곳곳에 난 구멍을 통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대포. 성벽 위에는 발리스타와 비슷하게 생긴 공성 요격 무기가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있고 성벽 너머에 성벽 높이 이상으로 올라간 첨탑 여러 개도 보인다.
라드세아 중부나 북부처럼 야생 짐승이나 마수들의 습격을 방비하기 위한 성벽과 방어 기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쟁을 위한 성벽이며 지금도 현역이라는 느낌이 피부에 와닿는 거친 감각이다.
=도령. 변장은 안 하게?=
“이번에는 변장하지 않는다. 어쩐지 변장했다간…… 귀찮고 성가신 일에 휘말릴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도령이 예감이라고 하는 건 신기하네.=
언제나 사실을 기반으로 분석한 결과만을 내놓던 그였는데 예감이라니, 파편인 때문에 뭔가 감각적인 부분이 짙어진 걸까?
안느가 신기 해했지만, 환인은 눈을 감고 그런 그녀의 시선을 받아 흘렸다.
엿새 전, 상단이 전멸한 장소에서 귀찮음을 이유로 여자친구들에게 상단이 같은 사람에게 공격받았단 사실을 숨기고 방치한 뒤 떠난 환인이다.
그런 상단의 전멸과 눈앞에 보이는 굳건한 요새 풍의 협곡 도시를 봤더니 더러운 협잡의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고 이제와서 말할 수 있을까.
니라인 협곡 도시는 말 그대로 니랄토레드 대협곡에서 가장 폭이 좁은 근방에 세워진 도시로, 그 폭만 1200여 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대협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플라비우스족의 도움을 받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접경지에서 이블팩션과 전쟁을 벌이는 도시의 주민들이 평화롭고 선할까, 아니면 거칠고 난폭할까.
마차와 세 마리 쿠에(노른 제외), 여기에 눈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미녀들만 다섯에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미소녀도 하나가 포함된 파티다. 거친 인간들이 무직자로 변장한 그녀들을 내버려 둘까 하면 그런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남녀 인구 비율이 기형적인 라드세아와 달리 히스론드는 남자 4, 여자 6 비율의 국가. 문제와 문제가 겹치면 당연히 트러블이 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귀찮음을 피하려고 정체를 숨겼다간 더욱 큰 귀찮음과 성가심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아지겠지.
성벽이 보일 무렵부터 변장을 전부 해제한 일행은 두께가 족히 10m는 될법한 데다 높이도 50m에 이르는 거대 성벽, 거기서 단 하나뿐인 출입구에 도착해 줄을 섰다.
성에 들어가기 위한 줄은 길지 않았다.
상단으로 보이는 자들은 안에서 미리 절차를 밟았는지 검문검색 없이 바로 나가고, 환인이 도착한 뒤에 좀 더 늦게 도착한 상단 행렬도 뭔가 절차가 있는지 경비병들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간다.
=정지. 신분을 밝, 밝혀…….=
그렇다 해도 일반 여행자들이나 소규모 무리는 거의 없었기에 차례는 금방 돌아왔고, 이실리테는 마부석에서 내린 뒤 말하다 말고 자신과 아영을 보며 눈동자가 흔들리는 단쌍익의 플라비우스족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마차에 탑승 중이신 분은 영도의 성제이신 환인 님이시며 영혼 기사인 안느, 유르파, 백려강 삼인이 동승 중입니다. 여기 신분증입니다.=
=서, 성, 성제 님. 네, 네…….=
=그러면 지나가도 될까요?=
이실리테의 담담한 질문에 그녀의 미모와 그녀의 신분, 그리고 마차 안에 있는 인물의 정체에 홀렸던 경비병은 헉! 하고 퍼뜩 정신을 차렷다.
=죄송합니다! 영주님께서는 귀빈이 방문하실 경우 성에 모시라는 분부를 내리신 터라……!=
이실리테는 환인이 예견했던 일이 벌어졌단 사실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고, 경비병 남자는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성의 표정 변화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걸 느끼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이실리테가 조용히 말을 이어간다.
=성제님께서는 팔라툼에 머무르시며 히스론드의 섭정이시며 대공이신 테이아무스 님의 초청도 사양하시고 시민들과 함께 지내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니라인의 영주님께서 성제님을 모신다면…….=
고작 중급 도시 영주가 성제를 강제로 모셨다는 이야기가 퍼질 거다. 그 소문이 팔라툼으로 흘러 들어갔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거 감당할 수 있겠니?
그러한 요지의 질문에 경비병의 안색이 이번에는 꺼멓게 변했다.
간단히 경비병을 물리친 이실리테는 다시 마부석에 올라 마차를 출발시켰다.
뒤통수에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지지만 악에 받치거나 원한이 깃든 시선이 아니라 곤란과 당혹이 섞인 시선이다.
=이실리테 언니. 뒤에 경비병 하나가 몰래 따라오고 있는데요?=
=내버려 둬. 주인님은 우리가 머무르는 장소라도 알아야 경비병들이 불벼락을 맞지 않을 거라고 하셨거든.=
뇌물이든 뭐든 요구한다면 그것도 못 하게 박살 내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성문의 경비병은 이쪽의 정체를 알자마자 지극히 정중하게 나왔다.
다른 방문자들한테도 지극히 사무적으로 공평하게 행동했으니 평판도 나쁘지 않을 터. 병사 하나를 붙였다고 박살 내는 건 너무하다.
도시로 들어와 고개를 든 이실리테는 주변을 적당히 둘러보았다.
근처에 바위산이 많아서일까, 회색의 석조 건축물이 많은 데다 밀집도가 상당하다.
분주한 거리를 이동하던 이실리테는 옆에 지나가는 제법 고급 옷차림의 여자를 불러 고급 여관이나 호텔의 위치를 물었지만.
=죄, 죄송해요. 잘 아는 게 없어서…….=
=저어, 호텔에는 가본 적이 없어요. 대답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세 번의 실패 끝에 아영이 나서서야 니라인에서 어느 정도 고급 축에 드는 호텔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주인님은 한 번에 성공하셨는데…….’
속으로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마차를 몰던 이실리테는 아영이 옆에서 콕- 팔뚝을 찌르는 느낌에 그녀를 돌아보며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도시가 좀 무법적인 면이 있나 본데요? 병사 말고도 꼬리가 더 붙었어요.=
=…….=
=오ㅃ……. 성제님이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정확한 예측이었던 걸까요.=
=넌 어떻게 생각해?=
=이쪽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쫓아오는 놈들이 여섯 정도, 그냥 부자처럼 보여서 뭔가 해 먹을 게 없을까 쫓아오는 놈들이 셋 정도? 귀찮은 일로 번질까 안 번질까 생각해보면 반반이라고 생각해요.=
이실리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인님은 도시에 들어선 뒤 될 수 있으면 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아닌 한 자신이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도시 내에서는 어느 정도 신비주의를 고수해 어중이떠중이들이 다가오는 걸 쳐내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입구에서 이 마차는 성제님 까란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테니 여섯이나 되는 양아치가 붙었겠죠. 나머지 셋도 얼마 안가 이상함을 느끼고 떨어져 나갈 테니까 여기서는 그냥 호텔로 계속 가죠?=
아영의 제안에 이실리테는 로브 망토를 여미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알아낸 호텔이 멀쩡한 곳인지 확인해줄 수 있어?=
=헤헤. 그건 제 특기죠. 잠깐 다녀올게요.=
경보 속도로 움직이는 마차에서 뛰어내린 아영은 곧장 흙먼지가 쌓인 골목길 사이로 사라졌고, 5분 정도 지났을 때 다른 골목길에서 튀어나와 마차로 돌아왔다.
=꽤 양심적인 상단이 운영하는 고급 지향 호텔이래요. 등급은 대충 팔라툼에서는 하급으로 분류되는 수준이고요. 검소한 성제님이 머무르시기에 나쁘지 않은 장소라고 생각해요. 호텔을 안내받은 것도 타의가 가해지지 않았고요.=
이실리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호텔에 도착하면 알아봐달라는 거였는데 바로 정보를 수집해오다니.
=……골목길 안에서 누구를 두들겨 패던데 뒷골목 양아치 같은 놈들이었겠지?=
=옙. 영혼 기사가 무고한 시민을 괴롭히면 안 되잖아요.=
=잘했어. 행동할 때는 네가 성제님의 영혼 기사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움직이도록 해.=
=옛.=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는 아영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이실리테는 조금 돌가루가 날리는 듯 투박하지만 깔끔한 거리를 다시금 둘러보며 긴장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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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대충 센스있는 후기를 적고 싶다는 이야기)
(하지만 센스가 없어서 슬프다는 이야기)
(매일 미궁기담을 봐주시는 독자님들에게 감사하다는 이야기)
[작품 설정]
협곡 도시로 가는 길
중간 기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