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55화 (655/813)

655 파편인

21세기 1층 단독 주택 수준의 설비를 자랑하는 방랑자의 안식처는 이름 그대로 아늑했다.

=으랴앗—!=

콰콰콰쾅—!!

쮸핏!?

=이실리테 언니! 그쪽으로 도망갔슴다!=

=응!=

호화, 사치의 인식이 평범한 사람과 한참을 벗어나 있어 그저 편하면 그만인 환인에게는 두말할 나위 없었으며.

위우웅— 쓰스스스슷……!

쮸찌이익?!

=안느!=

=나도 봤어! 이놈, 어딜 가냐!=

퉁- 콰광! 꾸우웅!!

찌야아악! 쨔흑!? 쨔쨔앙…!

=노른아! 그쪽으로 간다! 띄워 올려!=

상위 1%에서 하위 10%까지 광범위한 숙박 시설을 이용해본 여자들에게도 조금만 움직이면 필요한 게 다 있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이 유물은 그야말로 편의성을 집대성한 장소였던 것.

「너 이제 도망 못가~!」

고오오—……! 콰르르르르-!!

쮸쀼우우우……!?

물론 실용성을 극대화한 구조와 디자인이었기에 외부 내부 할 것 없이 심미적으로는 점수를 그다지 줄 수 없었지만,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벌판에서 이러한 안식처는 100점 만점을 주어도 부족한 최고의 아이템이다.

=됐다! 날려졌어! 벨!=

=넷!=

그리고 여자들은 길 가다 마주친 고슴도치 크기만 한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매일같이 대련하며 연마한 연계기를 유감없이 펼치고 있었다.

무지갯빛 보석처럼 반짝이는, 이름 그대로 무지갯빛 보석쥐가 못 도망가도록 권각을 섬전처럼 펼치는 아영.

그런 보석쥐의 도주를 특정 방향으로 몰아넣기 위해 다중 검기를 빛살처럼 땅에 내리꽂는 이실리테.

지정 지점에 도망쳐온 보석쥐가 땅에서 튕겨 나가도록 천벌의 망치로 땅을 두드려 국소적인 지진을 일으키는 안느.

튕겨 나간 보석쥐는 노른의 광풍에 휘말려 하늘에 내팽개쳐졌고.

=후읍!=

그런 보석쥐를 향해 옷차림이 완전히 바뀐 백려강의 화살이 쉼 없이 날아들었다.

쉬쉬쉭— 쉬싯-!

티딩- 팅- 팅팅팅—

쮸, 찍, 찌븃!

화살촉이 없는 연습용 화살이 무지갯빛 보석쥐를 절묘하게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보석쥐가 탱탱 볼처럼 이리저리 튕겨 날아다닌다.

신체 경도가 다이아몬드보다 더 높은 덕에 벌어지는 일.

볼만한 것은 1mm의 오차도 없이 날아가 보석쥐의 원하는 부위를 맞춰 원하는 방향으로 튕겨내는, 신들린듯한 백려강의 활 솜씨뿐만이 아니었다.

=후웃…! 하아압……!=

“…….”

리듬을 타듯이 움직이며 화살을 날릴 때마다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휘감은 타이트한 바디슈트가 시선을 마구 잡아끈다.

활을 쏠 때마다 들어 올려지는 팔꿈치는 안쪽의 매끈하면서도 통통한 겨드랑이를 매번 노출하고, 활시위를 튕기는 반동에 도드라진 한 쌍의 젖가슴이 단아하게 출렁인다.

통기성을 위해서인지 밑가슴 일부를 드러낸 언더붑 스타일은 덤.

어깨 즈음에 한 번 묶어 땋아 내린 푸른 머릿결은 말 꼬랑지처럼 살랑였고 바디슈트가 한껏 조여주는 엉덩이는 절제미를 품은 채 환인을 유혹하듯 흔들리는 중이다.

허벅지 안쪽과 서혜부도 바짝 조여서 국부가 미세하게 굴곡진 것도 가산점이 추가된다.

바디슈트는 민무늬가 아니라 구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무늬가 왼쪽 허벅지를 휘감으며 복부를 지나 오른쪽 옆구리까지 올라가 있는데, 이것이 그녀의 몸매를 부각하며 매력을 더욱 끌어내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변태 치녀처럼 야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디슈트 하나만 덜렁 입었다면 오히려 천박한 섹스 어필이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바디슈트 위에 까만 망사 형태의 스몰 웨이스트코트, 일반 조끼보다 반절은 작은 겉옷을 걸쳐 살짝 도드라지는 유두 부분을 재치 있게 가렸다.

그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변태 치녀에서 조금 신기한 복장의 궁수로 변했는데…….

‘역시. 남자의 특정 취향이 한껏 가미된 복장이군.’

손등의 절반과 손가락 두 마디를 드러내는 하프팜 형태의 회색 장갑과 바니걸처럼 커프스가 달린 소매 모양 밴드가 더해지니 조금 신기한 복장에 약간의 기품까지 가미되었다.

=오라버니!=

“그래.”

32발의 화살에 이리저리 튕겨 다닌 무지갯빛 보석쥐의 움직임이 멈췄다. 상처는 없지만 계속 튕겨 다녀 극심한 멀미에 기절한 듯한 모양새다.

보석쥐는 저래 봬도 7급 직업자인 여자친구들이 전력을 다해 쫓아야 할 만큼 무척 날래다.

거기다 다이아몬드를 능가하는 경도의 신체가 있어 돌진을 허용했다간 주먹만 한 총알이 몸을 관통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진다.

환인은 유르파가 준비해준 유리병을 들고 반쯤 기절한 보석쥐가 떨어질 지점을 파악, 먼저 가서 대기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환인이 있는 곳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라는 보석쥐.

다이아몬드를 능가하는 경도의 500g 무게를 평범하게 받아내면 낙하 충격에 유리병 따위는 가볍게 박살 난다.

그러나 환인은 추락하는 힘을 완벽하게 흘려내며 유리병에 그 어떤 흠집 없이 보석쥐를 받아냈고.

=자기!=

유르파가 재빨리 달려들어 유리병에 숨구멍이 난 마개를 끼우고 6급 고도 경화 비술로 유리병을 통째로 강화했다.

……쮸? 쮸찌지찍! 찌잇!

팅- 탱- 카각카각카각-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보석쥐가 똥그란 호박색 눈으로 불안한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겨우 몸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작은 유리병 안쪽을 자기 몸으로 부딪치고 짜리몽땅한 앞발로 박박박박 긁지만, 유리병에는 자그마한 흠집도 나지 않는다.

=……됐다! 무지갯빛 보석쥐를 잡았어!=

=진짜 잡았어!?=

=와오! 오빠언니들 최고!=

혹시나 또 도망칠까 긴장하고 있던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유르파의 손에 들린 유리병과 그 안에서 마구 몸을 뒤트는 보석쥐를 구경한다.

=와아, 진짜 쥬얼랫이예요……!=

=나도 박제된 것만 봤고 살아있는 실물은 이번에 처음 보는데 진짜 감동이네 이거.=

=으히히히. 아무 상처 없이 멀쩡한 레인보우 쥬얼랫이라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데요!=

「배불러? 이거 맛있어?」

=뭐? 야! 이건 진짜 먹으면 안 돼! 이게 돈이 얼만데!=

노른이 눈을 반짝이며 보석쥐를 향해 군침을 흘리자 아영이 기겁하며 노른을 뒤에서 안고 끌어당긴다.

그렇게 둘이 빠진 자리에 환인이 들어가며 백려강을 칭찬했다.

“잘했다. 그 먼 거리에서 이 작은 마수를 발견하다니, 아드네빌라가 제약을 풀어준 효과가 드디어 나오는 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요즘은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기뻐서 실력이 더욱 잘 나오는 것 같기도 해요.=

수줍어하며 배시시 웃는 백려강에게 환인도 작게 웃어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뿔을 피해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환인은 그녀의 가슴 아래, 배 부분을 지나는 얇은 안감 부분 너머로 귀여운 배꼽이 살짝 비치는 것에 시선을 주었다.

바디슈트만큼이나 하얀 피부라서 티가 잘 안나지만, 가까이서 보면 확실히 배꼽의 오목한 부분이 보인다.

손가락으로 찔러보고 싶을 만큼 보드라워 보이는 백려강의 배꼽을 보다가 유리병 속에서 아직도 발악 중인 보석쥐에게 눈길을 돌렸다.

“…….”

쮸! 쮸우… 찍…….

환인의 응시가 길어질수록 보석쥐의 발버둥이 점차 잦아든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더니 잠시 후에는 아예 돌아서서 등을 보이는 보석쥐.

저항과 발버둥은 완전히 멈춰서 몸을 웅크린 채 살짝살짝 떨기만 할 뿐이다.

=와, 쥬얼랫이 지금 도령보고 쫀 거 맞지?=

=생물학적으로 완전한 상위 포식자를 본 피식자 반응이네.=

=오빠가 맘먹고 쳐다보면 왠지 오줌이 마려울 정도니까요.=

=아영이 네가 말하니까 현실감이 굉장한걸.=

=당연하죠. 오빠의 진심 살기는 언니들도 못 받아봤을걸요?=

=아니 그건 자랑이 아니잖아…….=

조금 신기하긴 해서 쳐다봤지만 금방 싫증난다.

고개를 돌린 환인은 엉망진창으로 박살 난 십여 대의 짐수레 사이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널린 핏자국, 부서지고 찢어진 화물 등을 둘러보았다.

누가 봐도 짐승 계열의 괴물에게 공격받아 전멸한 상단의 모습. 이것 덕분에 백려강이 무지갯빛 보석쥐를 발견한 거지만…….

“…….”

뭔가와 충돌해서 박살 난듯한 짐수레로 다가간 환인은 짐수레 파편에 뒤덮인 철제 화물 상자의 귀퉁이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사람의 손에 의해 긁힌 자국이다.

얼핏 봐서는 짐수레가 파괴되거나 사람이 괴물에게 저항하던 중 생긴 자국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환인의 눈에는 이게 사람이 한 짓으로 보였다.

예를 들어 다른 짐을 살펴보려고 지렛대 같은 거로 열려 하다가 잘못 휘둘렀다거나.

그말은 곧 사람이 상단을 습격해 전멸시키고는 괴물이 한 짓인 것처럼 꾸며놓았을 확률이 크다는 것.

사람이 습격했다는 가설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저 보석쥐다.

=도령. 뭐 찾아?=

“아무것도 아니다.”

환인은 자신을 찾아온 안느에게 고개를 살짝 저어주고 그녀의 골반에 손을 올려 끌어당겼다.

그의 스킨십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안느는 이내 초승달처럼 눈꼬리를 휘며 그에게 몸을 기댄다.

뭐, 사람에게 상단이 습격당해서 전멸했다는 게 어쨌다는 건가.

한국에는 그곳에서 10년을 살면 거기가 곧 고향이라는 말이 있다.

환인이 니오네브레스에 넘어온 지 이제 3년 차. 1/3 정도 애착을 가질만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의 안에서 니오네브레스에 대한 평가는 날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여자친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녀들의 호감도 관리를 위해 이런 귀찮은 짓거리에 오지랖을 부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들과 돈독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더라도 조금은 슬퍼할지언정 자신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그랬기에 이제 이런 귀찮은 일에 참견할 생각은 그에게 없었다.

이 세계가 정을 줄 만큼 사람 살기 좋은 곳도 아닌데 뭣 하러?

안느와 함께 여자들에게 돌아가니 아영이 노른을 붙잡은 채 그를 향해 징징거린다.

=오빠~! 얘가 자꾸 쥬얼랫한테 군침 흘려요! 노른이한테 뭐라고 한마디 좀 해주세요!=

「화닌. 이거 조금만 먹어보면 안 돼?」

=먹었다간 얘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죽으면 가격이 확 내려간다고!=

보석쥐의 가장 큰 효능이라 하면 주변에 순수한 위상력을 퍼트린다는 점이다.

죽어 사체가 된 상태에서도 퍼트리긴 하지만 살아있으면 2~3배 정도 위상력의 농도가 더 진해진다.

위상력의 농도가 높은 곳에서 훈련하거나 지내면 몸이 더 좋아지고 힘도 쉽게 쌓인다는 것은 이 세계의 상식.

쥬얼랫은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더욱 넓게, 그리고 진하게 위상력을 뿌리기에 덩치가 클수록 그 가치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지금 잡은 쥬얼랫 정도면 말 그대로 성 한 채 지을 가격은 된다는 게 안느와 백려강, 아영의 이야기였다.

“노른. 보석쥐는 살려놓을 생각이니 먹고 싶어도 참아다오. 배가 고프면 이실리테에게 간식을 달라고 하고.”

「알았어!」

상단이 괴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죽었다고 판단한 이유 중에는 저 보석쥐의 식성도 있다.

보석쥐를 가둔 유리병을 잡고 숨구멍을 통해 위상력을 살짝 흘려 넣으니 고슴도치처럼 작고 동그란 주둥이를 쫑긋거리다 위상력을 주둥이로 흡입한다.

맛이 괜찮았는지 작은 혀를 내밀어 주둥이를 핥으며 입맛을 다시는 보석쥐.

이처럼 보석쥐는 대기 중의 온갖 기운과 에너지를 주식으로 삼기 때문에 섭식을 하지 않는다. 상위 신수들처럼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사람, 그것도 직업자가 힘을 쓰면 주변에 위상력의 흔적이 강하게 남는다. 직업자로서 등급이 높을수록 그러한 흔적이 진하게, 그리고 오래 남는다.

보석쥐에게 사람이 남긴 위상력은 꽤 별미였겠지.

“이만 마차로 돌아간다.”

=어? 도령. 여기 정리 안 해주고 가는 거야…?=

“습격 받은 게 오래되었는지 영혼은 남아 있지 않다. 눈에 띄는 신분 증명 같은 것도 안보이니 챙겨서 다음 마을에 전해줄 것도 없겠지.”

그의 대답에 안느는 조금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끼며 부서진 짐마차와 짐수레를 돌아보고, 아영도 아쉬운 표정으로 부서져 널브러진 수화물들을 돌아본다.

=다음에 여기 올 상단은 횡재하겠네. 이 짐들을 전부 챙길 테니까.=

약간 수전노 기질이 있는 아영이지만 사방에 흩어진 화물을 챙기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카락스의 암살자 시절이었다면 눈에 불을 키고 청소부마냥 아공간 주머니에 챙길 수 있는 만큼 바리바리 챙겼겠지만, 지금은 돈 많고 멋진 성제님의 귀여운 암살자니까.

마차로 돌아가 이실리테와 아영이 마부석에 앉고 환인은 안느, 노른과 함께 마차 안으로 들어간다.

=출발하겠습니다.=

덜컹, 덜컹덜컹-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붕에 올라가 있던 유르파가 옆에 앉아 명상을 시작하려는 백려강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며 물었다.

=벨 아가씨? 운의복은 어떠니?=

=아… 착용감이 굉장해요. 처음에는 조금 이질감이 있는데 지금은 알몸으로 있는 것처럼 굉장히 편해요. 때때로 깜짝깜짝 놀랄 만큼요.=

=알몸이라니 벨 아가씨는 야하네~.=

=어, 언니……!=

=후후. 운의복의 특수 기능이 열릴 기미는 아직 없고?=

=네. 이것저것 시험해보고는 있는데…….=

=당분간은 씻을 때 빼고 계속 입고 지내봐. 그럼 벨의 위상력이 각인되어 특수 기능이 열릴 테니까. 혹시라도 뭔가가 느껴지면 나 부르는 거 잊지말고.=

=네, 언니.=

=설마 각인도 되지 않은 유물일 줄은~ 어쩌면 용인체에 영향을 받아서 한 단계 높은 기능이 열릴지도 모르겠네.=

선루프가 열려있어 마차 위에서 여자친구들의 대화가 흘러내려 온다.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환인은 명상과 영기 순환을 하며 들숨과 날숨을 길게 이어갔다.

팔라툼을 나오고 마차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째. 다음 목적지인 니라인 협곡 도시까지 남은 거리는 반도 안 된다.

그동안 환인은 적당히 육욕에 휘둘리며 파편인을 피해 영기를 순환하는 데 적응해가고 있었다.

탈력감도 이제 익숙해져서 신체 컨디션도 나름 정상으로 돌아왔고 영혼술도 혼령주나 강화 중첩 영혼 화살, 영혼 폭발은 아직 어렵지만, 그 외에는 원래의 수준을 되찾은 상태.

‘의외로 신선한 조작 훈련이 되는군.’

이대로 훈련을 계속 해나가면 파편인을 풀었을 때 능력과 영혼술의 발현이 더욱 강해지고 능숙해지지 않을까. 구속구를 입고 지내다 풀었을 때 힘이 해방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느. 그림책 읽어줘.」

안느는 이부자리에 다소곳이 눕혀져 있는 천인체의 몸 상태를 살피다가 동화책을 가지고 온 노른을 돌아보았다.

=아느가 아니고 안.느. 다시 불러봐.=

「앙!느!」

=아니! 앙느가 아니고 안느!=

「아안느!」

=으음. 아직 혀가 유연하지 못한가? 제대로 부를 때보다 제대로 못 부를 때가 더 많네.=

「나 말 이상해?」

=응. 어리숙해. 그러니까 말할 때 그냥 막 내뱉지 말고 혀를 의식하면서 말해. 안 그러면 바보처럼 보이게 된다?=

「……나 바보 아닌데!」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말하는 연습 해야지. 이번에는 도령 이름 말해봐.=

「화아닌.」

=아냐! 환! 인! 혀를 늘이지 않고 딱딱 끊어야지!=

「우웅.」

잘 모르겠다는 얼굴에 안느도 조금 난감해하다가 어쩔 수 없다며 노른의 오른손을 잡는다.

=안 되겠다. 너 검지 내밀어봐.=

성수포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을 깨끗하게 닦은 뒤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언니 혀 움직임을 잘 느껴보고 따라 해봐. 환인.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환연. 백려강. 아영. 노른.=

「혀 간지러워!」

=장난치지말고!=

꺄륵거리며 두 다리를 바동거리다가 이내 자기도 왼쪽 검지를 입안에 물고 안느를 따라 말하는 연습을 한다.

그러한 연습의 성과는 뛰어나서, 불과 몇십 분 지나지 않아 제법 또렷하게 이름을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환인은 명상을 끝내고 순환 연습만 하며 그런 두 사람을 구경하다 물었다.

“통역 기관이 문장의 뜻은 잘 전달해주지만 고유 명사는 그러지 못하는 건가.”

=응. 통역 기관이 미성숙한 어린아이들 특징이야. 발음이 그래서 중요한 거고.=

「환 인. 내 발음 괜찮아?」

“그래. 받침 발음이 조금 어색하지만 그 정도는 말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에헤헤.」

=어머나~ 우리 노른둥이, 이제 이름 잘 말할 수 있게 됐어?=

「유르파!」

=그래그래.=

「캬하하하!」

보석쥐가 든 유리병을 들고 마차 지붕에서 내려온 유르파가 귀여워죽겠다는 듯이 쓰다듬어주자 노른은 구석에 앉아 졸고 있던 실루를 인형처럼 끌어안고 바닥을 뒹군다.

삣?! 삐삣!

난데없는 봉변에 실루가 파닥거리며 노른의 품에서 탈출하고 노른은 그런 실루의 뒤를 쫓고. 안느는 천인체의 몸을 살피며 유르파가 하는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주고 유르파는 안느의 대답을 공책에 적으며 무언가의 도안을 그린다.

마음이 편해지는 평화로운 광경을 감상하던 환인은 문득 시야 한구석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현상을 인식했다.

“……?”

잡혔다는 사실을 잊어먹은 것처럼 유리병 안에 사람처럼 주저앉아있는 보석쥐. 그런 보석쥐의 몸에서 무언가 안개 같은 것이 희미하게 퍼져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영혼의 눈을 열자 그 현상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온다.

보석쥐는 방금 먹었던 위상력을 몸 안에서 소화시키며 그로 인해 발생한 기운을 몸 밖으로 퍼트리고 있었다.

단순히 퍼트리는 게 아니라 내보내며 다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것을 순환하여 다시 내보내는 행위의 반복.

그러는 도중에 보석쥐의 통제에서 벗어난 기운이 마차 안을 채우는데, 여자친구들이 말한 보석쥐의 이로운 현상이라는 게 저걸 두고 한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그런 것보다 환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보석쥐의 체내 기운 순환 방식이었다.

자신이 먹여주었던 위상력을 몸 안에 가둬놓고 천천히, 자기 에너지로 동화시켜나가는 그 과정.

환인은 정수리에 짜릿한 번개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탁자 위에 올려진 유리병에 가까이 다가가 보석쥐의 순환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쮸찍?!

위상력을 거의 다 소화한 보석쥐가 눈을 떴다가 코앞의 환인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그러나 환인이 위상력을 마개의 구멍 속으로 흘려 넣어주자 언제 놀랐냐는 듯이 짜리몽땅한 뒷다리로 몸을 일으켜 유리병 벽을 짚은채 위상력을 배부르게 받아먹었다.

이어지는 보석쥐의 기운 순환.

환인은 그 순환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아 그 기운 순환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목표는 명치 부근에 박힌 유달리 빛이 작은 파편인 하나.

…….

…….

‘됐다.’

영기와 심핵력의 5시간에 걸친 순환 끝에 파편인 하나가 따뜻한 물에 빠진 각설탕처럼 사르륵 녹아내려 사라졌다.

환인의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떠오른다.

천암 산맥까지 마차로 달렸을 때 소요되는 예상 시간은 2달.

지루할 것으로 예상하던 여행길이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혼자서도 잘하는 주인공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백려강의 모티브는 피(삐-)와 (삐-)학의 믹스입니당

일러작가님이 의뢰 취소를 부탁하신 이유가 그... 19금씬에 쓸 언더붑 묘사에 거시기랑 조금 적나라한 표현부탁드렸거든요

일반인한테는 심연의 괴물이 부담스러우셨나봅니다.....ㅋㅋ

지금은 열심히 프롬프트 수집하면서 AI를 공부하는 중입니다!

근데 능지가 딸려서 이곳저곳 들락거리며 배우고는 있는데 연재도 같이 하려니 머리가 터질것 같네요....

@[email protected]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