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4 파편인
654 파편인
발가벗고 있는 노른에게 간단한 원피스를 입혀준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환인은 광상녀가 해준 이야기를 생각했다.
‘시련인가…….’
지난 닷새간 파편인이 머리와 가슴에 박혀 든 이유를 궁리하고 가늠하던 환인은 하나의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그저 재수가 없었다.’
위상류와 역쇄류를 얻고 그걸 심핵력으로 강화하는 훈련을 하며 기감이 매우 날카로워진 환인이다.
아영의 감각 과민증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직접 가해지는 모종의 손길은 감각 과민증을 뛰어넘을 만큼 매우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수준.
여자친구들과 데이트 도중에 오한과 한기를 느낀 것도 그러한 훈련의 결과물이었다.
그랬는데 파편인이 박혀 들던 당시에는 그 어떤 적의나 살의는 느낄 수 없었다. 재수가 없었다고 결론을 내게 된 이유에는 이런 바탕이 있었던 것이다.
파편인이 박힌 것도 그저 우연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게 환인의 생각이었다.
닷새 전 머리와 가슴에 파편인이 박히던 순간, 당시에는 감각도 그렇고 머리도 혼란스러웠기에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꾸준히 명상을 반복하며 그때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히 인지해낼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었다.
뭔가 온몸의 혈穴이란 혈은 모두 활짝 열린 느낌. 그리고 열린 혈에서 무언가가 흘러나가는 느낌.
흔히들 피가 흘러나가는 걸 생명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라고 묘사하는데 그런 느낌하고는 달랐다.
“…….”
그렇게 흘러나간 무언가는 하늘과 연결되었고, 그렇게 연결된 하늘에서도 무언가가 흘러 내려와 몸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을 두어 녹이고 있던 혼의 파편들이 경질화…… 이걸 물질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경질화한 이유는 그 무언가에 반응해서라고 환인은 반쯤 확신한 거다.
‘그랬는데 광상녀는 이걸 시련이라고 말했지.’
보통 시련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타인이 의지나 사람됨을 시험하기 위하여 내리는 인위적인 단련과 고비.
다른 하나는 겪기 어렵고 위험한 사건, 사고 등과 맞닥트렸을 때를 말한다.
광상녀가 말한 시련은 어느 쪽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나 확실한 것은 파편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였는데…….
‘파편인은 널리 알려진 에너지보다 한 차원 높은 종류인가.’
이 파편인은 위상력이나 성술, 정령술로는 감지할 수 없다.
아영은 7급 성술사다. 유르파도 대단히 뛰어난 마도기, 마도구를 만들어내는 7급 비술사이며 환연도 상급 정령과 계약 없이 교류할 정도로 훌륭한 정령사.
그런 그녀들은 환인이 위치까지 알려주었음에도 파편인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광상녀는 손도 대지 않고 알아보았고 대성녀는 침술과 선술의 일종을 동원해 혼의 한 갈래인듯하다고 감지해냈다.
술법, 비술, 주술보다 한 단계 위인 신술, 선술, 명술처럼 영기의 한 단계 위인 무언가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
뭔가…… 머릿속에 옅은 안개가 낀 기분이다. 해결의 실마리가 저 앞에 있는데 사이에 안개가 껴서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다고 할까.
광상녀에게 손을 벌린다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던 환인이 답답함에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의 손을 좀 더 작고 따스한 손이 잡아 왔다.
옆을 보자 노른이 손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다가 히히 하고 웃으며 손을 앞뒤로 흔든다.
그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노른의 손을 꼭 잡았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아예 힘이 봉인된 것도 아니고 약간의 탈력감과 함께 신체 능력이 조금 감소했을 뿐이다.
신체 능력이 떨어진 이유도 파편인이 영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탈력감 때문이겠지.
일부 영혼술을 쓸 수 없지만 흐름에 익숙해지면 그마저도 상관없어질 것이다.
사람은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는 생물이니까.
또 막강한 여자친구들도 있고.
변장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한 환인 일행은 팔라툼의 왜곡벽을 빠져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몇 달 만의 마차 이동이라서일까, 쿠르티와 쿠핀, 쿠라가 신난다는 듯이 마차를 끌고 질주한다.
그렇게 한동안 길을 따라 달려 오가는 사람 수가 확 줄어 주변에 온통 지평선 밖에 안 보이게 됐을 때, 환인과 여자들이 마차 지붕에 모였다.
아영은 마차를 몰고 나머지는 지도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안느가 하는 설명을 듣는다.
=우린 북쪽의 지우데 대삼림하고 남쪽의 천주 산맥 사이에 난 평야를 따라 이동할 거야. 가다 보면 천주 산맥이랑 유인 산맥 사이 포르토니오 대협곡이 나오는데 여길 건너서 히아리드 대평야를 지나면 목적지인 천암 산맥이야.=
=이렇게 지도로 보니까 짧고 단순한 여행길처럼 보이네요.=
백려강의 소감에 안느가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여기서 대협곡에 있는 니라인 중급 도시까지만 해도 보통 걸어서는 한 달을 잡아야 하는 대장정이라고?=
=그렇게나 먼가요…?!=
지도를 보았을 때 거리가 짧아 보여 얼마 안 걸릴 거라고 생각했던 백려강이 깜짝 놀란다.
영도를 나와 알소프에 들른 뒤 흐라스린드를 거쳐 팔라툼까지, 단순한 이동 거리만 따졌을 때 1달 정도 거리였다.
그런데 팔라툼에서 니라인까지는 아무리 봐줘도 그 거리의 1/3? 1/4? 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는데.
안느는 지도 위에 서 있는 환연을 손바닥에 앉혀서 데려온 뒤 지도에서 가장 큰 산악 지형, 만년설을 수백 킬로미터 범위로 표현해놓은 벨티칼 대산맥을 짚었다.
=왜 안 고치는지 모르겠는데 이쪽 벨티칼 대산맥을 중심으로 해서 세로로 이 정도? 되는 곳은 축적이 좀 이상해. 지도로 보는 것보다 작게는 2배, 크게는 3배 정도 넓게 잡아야 해.=
그럼 히아리드 대평야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보다 3배는 더 넓다는 이야기 아닌가.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에 백려강이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해져 있을 때, 유르파가 팔짱을 껴 젖가슴을 강조하며 말했다.
=벨티칼 대산맥이 워낙 커서인지 부조화 때문에 이렇게 그리지 않았으려나.=
=아무튼, 이제부터는 긴장해야겠네요. 천주 산맥 위로는 전부 이블팩션의 영역이라서 괴물이랑 마인들이 자주 습격해올 테니까요.=
=이슬이 말이 맞아. 듣기로 니라인하고 팔라툼 사이를 오가는 상단을 이블팩션이 자주 노린다고 해. 야영할 때 평소보다 불침번에 유의해서 서야 할 거야.=
“그 불침번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환인이 아스펜드에서 두 가지 유물을 꺼내 놓았다.
리민을 참교육해주고 펠드릭스 백작에게 받은 유물, 방랑자의 안식처와 룩소미의 보호 장벽이다.
“앞으로 불침번은 아르겐테아의 영혼들에게 맡길 생각이다. 백작에게 야영용 유물을 받은 상황에서 불침번으로 전투력의 감소를 부담할 필요는 없겠지.”
「아. 환인 그거 쓸 생각이야?」
환연의 아는 척에 여자들이 ‘무슨 이야기지?’하고 서로 쳐다본다.
때마침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져가는 시각. 야영 준비를 해야할 타이밍에 환인은 아영에게 마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마침 야영할 때도 됐으니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보여주지. 환연, 땅을 단단하게 다져주겠나.”
「수평 말하는 거지?」
“그래.”
멈춰선 마차에서 날아오른 환연은 땅의 중급 정령을 불러 평탄화 작업을 진행한다.
뭔가 땅에서 쿵, 쿵, 진동하는 소리가 수차례 울려 퍼지더니 특정 지점이 반듯하게 변했다.
돌멩이나 자갈을 골라내지도 않고 수풀도 자르지 않은 채로 그냥 그대로 찍어누른 모양새지만, 수평도 잘 잡혀있고 발로 땅을 차보아도 흙먼지만 살짝 일어날 정도로 단단하다.
=그러니까 입구를 마주 보는 식으로 해서 땅에 내려놓고…….=
유르파는 그런 땅 위에서 유물 도감에 기록된 방랑자의 안식처 항목을 다시금 읽으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사각형 단층집 모양 유물을 땅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응. 이제 위상력을 넣을게.=
=어어. 언니, 그냥 막 넣어도 돼? 갑자기 확 커지면 언니도 휘말리는 거 아냐?=
=괜찮아~.=
그 말과 함께 쪼그려 앉은 유르파가 유물에 위상력을 불어넣은 순간, 유물이 뒤쪽으로 빠르게 커지며 삽시간에 높이 5m에 30평 남짓한 단층 주택 크기로 변화했다.
=우와.=
=오~.=
얼핏 보면 한국의 옥상이 있는 빨간 벽돌 단층집을 닮은 방랑자의 안식처는 말 그대로 여행자들을 위한 안식처 그 자체였다.
몸을 씻을 수 있는 목욕탕과 화장실 두 개, 적당한 크기의 거실과 거기에 붙어있는 아일랜드 주방. 그리고 방 세 개.
마차를 집 옆에 붙이고 짐을 챙겨 안식처에 들어선 안느는 잠깐 내부를 둘러보았다가 유르파와 이실리테를 불러 물었다.
=있지. 왠지 저쪽 세상에 있는 도령 집이 생각나지 않아?=
=아가씨도 그 생각 했구나?=
=다르지만 뭔가 느낌이 비슷한 것 같아.=
=저도 오빠 세상 구경 한번 해보고 싶은데요…….=
=저도요…….=
잠시 거실을 둘러보던 환인은 한국의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일랜드형 주방을 응시하다가 싱크대 앞에 섰다.
“…….”
무척 익숙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형태의 수도꼭지의 핸들을 젖혔다.
쏴아아아—
수도꼭지에서 맑고 깨끗한 물이 콸콸 흘러나온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왼쪽으로 돌리자 데일 것처럼 뜨거운 물이 나온다.
중간에 맞추니 적당히 뜨거운 온도로 조절되었다.
=도령도령! 이거 그, 보-일러 패널이라는 거 아냐? 맞지?=
=주인님. 여기 에어컨도 있어요.=
그녀들이 가리키는 것을 본 환인은 패널로 다가가 실내 온도 조절 버튼을 꾹꾹 눌러보았다.
실내 온도 27도로 맞춰놓으니 웅- 극히 미약한 진동과 함께 거실 바닥이 조금씩 따뜻해져간다.
“……이 유물을 소망한 사람은 차원 방랑자였나 보군. 그것도 한국인.”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한국적인 흔적에 환인이 중얼거리자 유르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나 전반적인 사항을 세심하게 구현할 정도면 직접 살아본 게 아닌 이상 어려우니까.=
=와. 유리 언니, 여기 뜨거운 물도 나오네요? 이거 원리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집을 키울 때 썼던 위상력을 에너지원으로 쓰는 거야. 다들 여기 봐봐. 천장에 불이 들어와 있지? 파란색은 위상력이 가득 차 있다는 거고 녹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내려갈수록 위상력이 낮다는 뜻이니까 기억해둬. 위상력 충전은 여기서 할 수 있어.=
삐이~
그사이 따뜻해진 거실 바닥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기한 듯 거실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실루가 배를 깔고 납작 엎드린다.
안느와 유르파는 엎드려 바닥을 손으로 짚어보며 감탄했다.
=와……. 이게 진짜 유물이지.=
=그러게. 바닥이 너무 따뜻해. 여기서 이불 깔고 자도 되겠다.=
룩소미의 보호 방벽, 잿빛 방패 모양의 유물도 꺼낸 환인은 한쪽의 빈 벽에 걸어놓고 여자친구들과 집을 나가 바깥을 확인했다.
=저게 보호막이구나. 바깥이 훤히 다 보이네.=
=막혀있으면 오히려 불침번이 힘들었을 텐데 오히려 잘됐어.=
보호막의 범위는 집을 중심으로 반경 50m 정도의 반구 형태.
환연에게 시켜 땅을 파헤쳐본 환인은 보호막이 구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면 땅 속에서 들어오는 것도 감지해낼 수 있겠지.
시험 삼아 천칭을 꺼내 보호막을 후려치자 지진이 난 것처럼 잿빛 방패가 쿠르릉 소리를 내며 운다. 깊게 잠들어도 깨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소리.
힘 조절을 해 보호막을 건드리다 보니 풀벌레나 작은 동물이 건드리는 정도로는 울지 않고 명백히 공격하는 수준의 물리적인 접촉에서부터 소리가 나는 걸 알게 되었다.
=율이 언니, 보호막 내구가 어느 정도인지 나와 있어?=
=음~. 4급 근접 직업자가 전력으로 후려치면 깨지는 수준이라고 되어있네.=
=그냥 알람이라는데 의미를 둬야겠다.=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안느에게 마차 안에 있는 천사의 몸뚱이를 이리로 가져오라고 시켰다.
=아! 아르겐테아 정찰병을 천사의 몸에 빙의시켜서 쓸 생각인 거였구나!=
“그래. 여섯이니 다섯은 감시로 돌리고 하나는 빙의시켜 파수꾼으로 삼을 생각이다.”
=좋은 생각이야!=
안느는 마차로 달려가 키 2.5m의 천사를 등에 업어서 가지고 왔고, 환인은 아르겐테아 정찰대 영혼을 불러내어 부관에게 명령했다.
“그동안 너희들의 활약을 지켜본 결과 부관이었던 네가 사려깊고 시야도 넓어 쓸만하더군. 앞으로 일이 있을 때면 네가 천인체를 움직여라.”
「성제님의 명령을 받듭니다.」
그 명령에 다른 다섯의 영혼이 무척 아쉬워하고 부관을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환인은 근로 의욕의 고취를 위해 현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이 천인체는 완벽하지 않다. 미궁의 이형종 출신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육신이 붕괴하며 끔찍한 고통을 육체에 가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그 고통은 영혼인 채로 또다시 죽는 것만큼 괴로울 것이다.”
「…….」
「…….」
“그래도 원한다면 지원을 받겠다. 부관 대신 천인체에 빙의될 자는 앞으로 나서라.”
지원은 없었다.
“이름이 이모렐이라고.”
=그렇습니다, 성제님.=
천인체의 몸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몸이며 날개를 움직이는 아르겐테아 정찰대의 부관을 잠시 응시하던 환인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네가 할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처럼 야영 중일 때 불침번을 서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나와 내 여자들이 미궁에 들어갔을 때 유르파를 호위하는 것이다.”
=성제님의 명령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이모렐은 환인의 앞에 부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이모렐을 보며 환인은 감정이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추가적인 지시를 내린다.
“육신에 들어갔지만 넌 살아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 육신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유르파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지켜라.”
=예.=
차분하고 담담한 이모렐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아르겐테아 정찰병 영혼들에게 주변 경계를 지시한 뒤 안식처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확 풍겨오는 매콤한 전골 냄새.
봄이라지만 밤이면 아직 추워 뜨뜻한 국물 요리를 하는 중으로 보인다.
위장을 자극하는 냄새를 맡으며 거실로 들어선 환인은 입식이 아닌 좌식 생활 방식이라 안느, 유르파, 아영이 뜨뜻한 거실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볼 수 있었다.
=대현자가 활동을 중단한 게 20년 전이라는 이야기잖아. 플뢰족 같은 장명종이 아닌 이상 20년이란 시간은 되게 길어. 만약 죽었거나 하면 어떻게 해?=
=으응. 대현자의 종족이나 성별도 알려지지 않으니까 걱정이 많아지네……. 후계자나 제자를 육성했다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텐데.=
=천암 쪽에서 활동하는 조직원도 있었으니까요. 엘미느 언니가 지금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미소녀 모습이 된 노른은 실루의 옆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려 녹색 작은 날개를 살랑거리고 있고 이실리테와 백려강은 주방에서 저녁을 만드는 중.
아일랜드 위에서 이실리테와 백려강의 요리를 구경하던 환연이 그를 돌아본다.
「환인 왜 혼자 들어와? 걔는 밥 안 줘?」
“신체 적응 훈련 중이다. 이형종이라도 무언가를 먹어야 신체를 유지할 테니 밥은 먹여야지.”
대답하며 거실로 걸어간 환인은 거실의 좌식 테이블 위에 테이아무스 섭정에게 받은 보상 상자를 꺼내 놓았다.
「아. 저것도 있었지 참.」
=저게 뭔데?=
보물의 냄새를 맡은 아영이 슬그머니 환연의 곁에 붙으며 묻는다.
「팔라툼 섭정이 환인한테 준 보상이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 환인도 확인 안 하고 바로 아스펜드에 수납해버렸으니까.」
=오. 상자가 큰데 뭐가 들어있을까.=
「안에 금화가 가득 들어있다거나 그런 거 아냐?」
=에이… 그건 아니다. 방금 오빠가 꺼낼 때 소리가 그렇게 묵직하지 않았어. 저 안에 금화가 가득했으면 쿵 하고 큰 소리가 났을걸?=
하지만 환인이 꺼냈을 때는 탁,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났다. 안에 귀중한 물건이 들어있다는 뜻.
유르파와 안느도 호기심을 드러내며 다가오고 노른도 실루를 품에 안고 안느의 옆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그 모습에 안느가 피식 웃으며 노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에 먹을 건 없을걸?=
「에이…….」
김 샜다는 듯이 핏, 하고 고갤 돌린 노른은 환인의 곁에 붙어 치근덕거린다.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하며 노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요리 준비가 거의 끝난 이실리테와 백려강도 불러 고풍스러운 목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뭐가 많네. 옷 같은 거 한 벌이랑 장갑 신발하고 책 몇 권이랑……. 앗, 이거 고위 성술서잖아?!=
=안느 언니! 저도! 저도 좀 보여주세요!=
환인이 성술서를 들어 건네주자 안느와 아영은 다른 물건보다 성술서에 더 집중한다.
이어서 나오는 것은…….
=히스론드 왕실 고위 비술서랑 마력부여 도구 일체야. 정말 팔라툼 왕실에서 쓰는 부여 제작 도구를 줬구나?=
“그건 유르파가 챙기십시오.”
그리고 위상석 주머니. 안에는 6급 위상석 10개가 들어있었는데 이것만 해도 2220금화다.
위상석 주머니를 아스펜드에 수납한 환인은 3개의 반지 상자 크기의 목갑을 들었다.
목조 상자에 비견될 만큼 세밀한 날개 모양이 조각된 상자 안에는 홍색의 동전 한 닢이 들어있는데 그걸 본 유르파와 백려강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앗, 이거 홍전예요!=
=뭐? 홍전?!=
=홍전이라고?=
손바닥보다 작은 상자 세 개에는 각각 한 개씩 홍전紅錢이 들어있었다. 앞면에는 불사조처럼 불타오르는 새가, 뒷면에는 천주산으로 보이는 고봉이 새겨진 동전이다.
=우와……. 저 홍전은 처음 봐요. 그런데 안느 언니는 본 적 있나보네요?=
=응. 가문의 보물고에 여기저기서 만든 100개 정도가 쌓여있는 거 봤어.=
=힉. 100개…….=
홍전이 쓰이는 곳은 매우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한 귀족 가문이 다른 귀족 가문에게 중요한 부탁을 할 때, 혹은 사생결단을 낼 상황에서 사태를 무마하기 위할 때, 큰 조력이 필요할 때 같은 경우.
홍전 자체가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 그 가문의 위광을 증명하는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홍전을 만들지 않기에 그 숫자도 매우 적다. 홍전을 만질 수 있는 귀족이나 호족은 백작, 5급 호족 정도부터라고 할 정도니까.
이 때문에 자국의 홍전이 아니더라도 그 유용성으로 전략 자산 취급을 한다.
=그런 걸 3개나 주다니…….=
여자들은 새삼 환인의 존재감에 눈을 반짝였다.
섭정이 그에게 홍전을 3개씩이나 주었다는 것은 그를 자국의 백작, 혹은 명예 후작~공작 정도로 보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환인도 나름 만족한 얼굴로 홍전 세 개를 아스펜드에 수납하며 말했다.
“이거라면 혹시 모를 대현자와 거래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겠군.”
=아?=
=오, 그러네요.=
마지막으로 남은 옷가지에 시선을 주었다. 하얀 옷 한 벌과 장갑, 신발 한 켤레 씩.
=이건…… 뭐지? 전신 타이츠?=
안느가 옷가지를 들어 보이니 그녀 말대로 구름처럼 은은하게 기품을 드러내는 우아한 타이츠가 펼쳐진다. 그걸 유르파가 유심히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전신 타이츠라기보다 민소매 바디슈트 느낌이네……. 음?! 이거 유물이야!=
=어? 진짜? 이게 유물이라고?=
=어떤 유물이에요?=
유물이라는 말에 살짝 놀라는 안느와 이실리테의 질문이 날아들자 유르파는 어? 당황한 소릴 내고는 땀을 삐질 흘리며 분석용 외눈 안경을 끼고 다시 살핀다.
=아, 아닌가? ……아. 준 유물이구나. 6급 이상 미궁의 중핵한테서 얻은 건가 봐.=
=……6급?=
=6급 미궁?=
한순간 그녀들의 머릿속에 같은 것이 떠올랐다.
안느가 바디슈트를 살펴보며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는다.
=설마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에서 나온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바디슈트의 무늬가 조금 구름을 닮은 거 같아요. 여기 왼쪽 허벅지를 감으면서 복부랑 오른쪽 허리를 감싸는 무늬요.=
=……진짜인가 본데?=
=그러게…….=
여자들의 표정에 살짝 아쉽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정황상 그 거대 생선 괴물을 잡고 획득한 물품인가 본데 만약 자신들이 그걸 잡았다면 테이아무스 섭정이 다른 선물을 주었을 거란 뜻이 아닌가.
“그건 결과론일 뿐이다. 우리가 잡았다고 이것이 나왔을 거란 보장은 없지. 장비가 마도기화했을 수도 있고.”
환인의 담담한 이야기에 여자들은 수긍하며 금세 옷의 디자인을 두고 꺅꺅거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까 이거 엄청 야해……. 구름무늬 쪽은 옷감이 얇아서 속이 비쳐 보이잖아.=
=이건 입으면 오줌은 어떻게 싸는 거죠? 홀랑 벗어야 하나?=
=넌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아무튼 민소매인 것도 좀 야하네. 이거 입으면 겨드랑이랑 다 보일 거 같은데.=
=율이 언니. 이거 신발이랑 장갑도 준 유물이에요?=
=음~ 느껴지는 힘을 보면 그냥 마도기 같은데? 아무튼 유물 도감에 없는 거라서 기능을 알아보려면 시간이 좀 있어야 할 듯 해.=
그녀의 설명에 환인은 바디슈트와 장갑, 신발을 그녀에게 넘겨주며 감정을 부탁했다.
“전골도 다 끓었고 밥도 취사가 끝난 것 같으니 이제 저녁을 먹을까.”
=네. 금방 식사 준비 할게요.=
“아영은 나가서 이모렐에게 들어오라고 해라.”
=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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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지각해서 죄송합니당..
한글로 교정+맞춤법 검사하는데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키 세 개 동시에 눌렀다고 에러 메시지도 없이 프로그램이 종료되어버리네요....
개복치도 아니고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