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53화 (653/813)

653 파편인

광상녀가 사라진 뒤 여자들은 실재하는 사도의 진정한 모습을 보아 감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히스론드의 사도님은 진짜 오쌍익이었네요! 그럼 라드세아의 사도님은 진짜 구미의 호족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겠니? 사도님은 각 종족의 대표 격인 분에서 나오시잖아.=

=전 그게 놀랐어요. 세라크 님은 노화를 임의로 조절하실 수 있으신가 해서…… 혹시 다른 사도님들도 그러실까요?=

첫인상도 나쁘지 않았고 사도이면서 예의를 갖춘 것도 호감이었다.

환인에게 날이 선 태도를 보였다는 게 조금 그랬지만, 사도라는 신분과 지위의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할 정도로 예의를 보여준 셈이니 나쁘게 볼 수 없었던 것.

하지만…….

“후우우우…….”

여자들은 환인의 기다란 날숨을 듣고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심기가 대폭 나빠졌어? 어째서?

어느 부분에서 기분이 나빠졌는지 짐작하지 못한 안느와 백려강이 갈피를 잡지 못해 당혹스러운 시선을 나누는 가운데 이실리테는 그저 환인을 따를 뿐이라는 듯이 그가 앉은 소파 근처로 가서 선다.

그런 그녀들과 말을 아끼는 유르파의 사이에서 두리번거리던 아영은 잠깐 눈치를 살피다 총대를 메고 물었다.

=어… 저기, 오빠님? 혹시 사도님 때문에 기분 나빠지신 겁니까요?=

갑작스레 환인의 심기가 나빠진 이유는 하나뿐. 방금 찾아왔던 사도 때문이 아니겠나.

“…….”

대답은 없었지만, 팔걸이를 팔꿈치로 짚으며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파묻는 행동이 대신 답이 되어주었다.

안느는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하나의 종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가 물었다.

=도령. 어떤 점에서 기분이 안 좋아졌어? 사도님이 대성녀님께 함부로 말씀하신 거 때문이야?=

“사도에게 감정은 없다. 광상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일 테니. 단지…….”

한 손으로 하관을 쓸어내리며 말을 아꼈던 환인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대며 눈을 감았다.

“……아니, 잊어라. 컨디션이 저조해서 조금 부정적이 되었던 것 같군.”

아드네빌라의 발언에서 지상에 거주하는 신수와 사도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광상녀의 태도를 직접 보니 솔직히 마음에 거슬렸다.

영혼사가 펼치는 무상의 성불행에 도움을 받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 세계 공통이다.

그런 조력을 가감 없이 받으면서 영혼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대성녀가 미통보 방문을 했다고 날카로운 기색을 드러내다니.

대성녀의 부탁이 있었기에 참았던 거지, 아니었다면 광상녀와 대립각을 세웠을지도 모르겠다.

환인이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할 말을 고른 안느가 하우, 신음을 작게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저기 있잖아. 도령네 세계의 신님이랑은 다르게 여기선 진짜로, 신벌이 내릴 수 있으니까……? 그으…… 도령이 걱정되고 또…….=

신의 사도와 싸운다는 것은 한 국가의 왕족이나 귀족, 신수 등과 대치하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신수나 왕족과의 사투는 적자생존의 대원칙에 따라 강하면 살아남아 더욱 강해지고 약하면 죽어 신들의 정원에 들 뿐인 이야기다.

하지만 신의 노여움을 산다면 존재를 넘어 영혼 그 자체가 끝장이다.

패배한다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면 영예도 뭣도 없는 영원한 소멸만 기다리니까. 그리고 신을 이긴다니, 그런 게 필멸자에게 가능할 리가 있나.

안느의 애간장이 녹을듯한 설명에 환인은 표정을 한결 누그러트리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라. 정말 움직일 생각이라면 다방면으로 면밀히 조사한 다음 사도 세라크=리에리아가 아닌 인간 세라크와 부딪칠 테니.”

=오와. 오빠 멋져…….=

=얘는 정말.=

푼수처럼 해롱거리는 아영의 등을 찰싹 때린 유르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보기엔 사도님과 대성녀님은 모르는 사이가 아니셨던 거 같아. 대성녀님이 사도님을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나 사도님이 대성녀님을 지칭하신 단어의 어감을 봤을 때 약간 애증? 같은 게 느껴졌거든.=

=애증…이요?=

이실리테가 조금 이해 못 한 표정으로 되묻자 백려강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저도 유리 언니처럼 그런 걸 조금 느꼈어요.=

=응. 그리고 사도님의 주장도 신님의 영역을 지키는 수호자의 관점에서 틀리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해. 그도 그럴 게 자기한테는 그렇게 예의를 차려주셨잖니.=

=그러네. 사도면서 노크도 했고 도령한테 자신을 정중히 소개했으니까…….=

여자친구들의 우려와 걱정에 환인은 재차 자신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안 좋다.

신에 대한 맹세가 위중한 상황에서의 즉석 계약서로 활용되는 세계다.

그런 신을 등에 업은 사도가 얼마만큼 신을, 신의 위광을 대변하는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신의 사도와 함부로 마찰을 빚으려 했다니.

평소라면 면밀한 조사 끝에 광상녀의 선을 확인하고 움직여 보복하거나 엿을 먹였을 텐데 명백히 평상시와 상태가 다르다.

‘몸 상태가 나빠져 충동적이고 부정적이 된 건가.’

이대로는 앞으로의 여정에 장애가 된다. 고치는 것은 당장 불가능하니 이 상태에 적응해 감정과 사고회로를 최적화할 필요가 있다.

리더는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자신이 흔들리면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여자친구들이 위험에 빠질 뿐이니까.

“영산의 신수 기린이었던 대성녀님이 영산 알노르를 나오게 된 계기는 당대의 대성녀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대성녀와 친구가 된 대성녀…… 닌실은 그런 친구와 세상을 돌아다니며 영혼사의 길과 뜻을 배웠다고 하였지. 그 과정에 팔라툼의 사도와 인연을 맺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거다.”

=아…….=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사도는 현 히스론드 왕실과 그다지 연계하지 않고 주도 자체만을 수호하는 듯하니 그쪽은 무시해도 될 거다. 우리는 천공성과 맺고 끊을 것만 정리한 뒤 팔라툼을 떠난다.”

팔라툼에 머무른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어간다. 몇 가지 해결하지 않은 것, 예를 들어 밀려오는 구름바다 미궁의 구름 속 괴물이라던가 하는 게 있지만…….

‘이 이상 머무르다간 광상녀처럼 새로운 일이 계속해서 튀어나올 것 같으니.’

계속 머무르다간 발목이 잡혀 더더욱 지체될 듯하다.

환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짧은 편지 한 통을 써 이실리테 편으로 천왕궁에 보내었다.

알현을 신청한다는 성제의 이름을 담은 쪽지였다.

=미안하게 되었어요. 큰일이 한 번에 몰아쳐 본의 아니게 성제님께 소홀했습니다.=

“이해합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마음 쓰지 마시길. 미궁의 역류와 영성경의 출현에 정체 모를 하늘의 현상까지 다발적으로 벌어졌으니 사후처리 관련으로 몸이 둘이라도 부족하셨겠지요.”

=네, 네? 네에…….=

원래는 닐비나의 승령천제 참가는 예정에 없었다고 하였다. 이제 7~8살이기도 하고 대중에게 처음 모습을 비추는 것은 다음 승령천제인 4년 뒤를 기획했었다고.

하지만 역류로 인하여 백에 가까운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에 시민을 지켜야 할 왕족의 책임을 묻는 동시에 시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낸 계책이 닐비나의 대중 공개였다는 말이었다.

아드우리 공작은 앞에 놓인 차는 손을 대지도 못하고 약간 초췌한 얼굴로 근심과 한탄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면목 없군. 성제가 미궁 역류의 징조를 암시하였음에도 역류가 일어나게 두었다니, 관리 소홀의 무능한이라 손가락질하여도 할 말이 없소.=

“아닐 말입니다. 현재 히스론드의 총책임자는 섭정이시니 잘못은 섭정이 크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하늘의 괴현상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계셨지 않습니까.”

=성제님… 어쩐지 저에게만 쌀쌀맞지 않으신가요……?=

“제 화가 다 풀려있을거라 생각하고 계신 섭정의 뻔뻔함이 놀라울 뿐입니다만.”

=윽.=

“게다가 드린 말씀은 진심입니다. 비록 이중 미궁의 지도가 완벽하진 않지만 드린 것을 바탕으로 기사단의 실력자를 조직하여 일차적인 투입만이라도 하였다면 역류라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지요. 하지만 승령천제가 앞으로 다가왔다는 이유와 안일한 판단으로 사태를 키우지 않으셨습니까.”

승령천제를 치른 뒤 주도의 기사 술사 병력을 대거 동원하여 내부를 말 그대로 밀어버리는 중이라고 하지만 이미 사고는 터진 뒤다.

지구였다면 방임과 무능이라는 이유로 시위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 거다.

환인의 비판에 섭정이 시무룩하게 날개를 늘어트리자 공작이 크흠, 헛기침하며 슬쩍 주제 전환을 유도했다.

=아, 아무튼…… 성제님께서는 하늘에 벌어졌던 변고를 어떻게 보시오? 왕궁의 학자들은 하늘신님의 의지가 일부 가미되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소만.=

“신께서 말씀입니까.”

=성제의 조력 아래 닐비나 폐하께서 건강을 되찾으셨소. 이는 유례가 없는 일로 하늘신님께서 승령천제라는 시기에 플라비우스족을 굽어보겠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고 있소.=

“종족에게 내리는 시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군요.”

그의 이야기에 섭정도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인다.

왕족에 가까운 아드우리 공작이 저리 생각한다면 혐의가 자신에게 돌아올 일은 없겠지. 환인은 별말 없이 신의 뜻을 함부로 재단하기 어렵다며 대답을 회피했다.

=하긴. 영성경을 이토록 지근거리에서 뚜렷이 목격하였으니 성제도 머릿속에 생각이 많으시겠지.=

‘그보다 광상녀는 팔라툼의 왕족들조차 눈에 담지 않는 건가. 아예 교류조차 하지 않는 느낌인데.’

교류가 있었다면 자신의 이야기가 저들에게 반드시 흘러갔을 터인데 섭정은 물론이고 공작도 전혀 모르는 눈치다.

“…….”

그렇다면 괜히 나설 이유는 없지.

이후로 약간의 담화를 나눈 뒤 섭정은 딸랑딸랑, 핸드벨로 궁녀를 불러들여 고풍스러운 세공이 새겨진 목조 상자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성제님께 다소 억지를 부렸던 점에 대한 사과와 잊혀진 옛 도시 미궁에서 폭주를 막아주신 것, 그리고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준비한 선물입니다. 정보 제공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니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고맙게 받겠습니다.”

성인 남성의 상체 크기만 한 상자에 손을 올려 아스펜드에 수납한 환인은 이제야 팔라툼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무리 지은 기분이었다.

어제 영도로 보낼 대규모 식량, 닐비나의 허약증을 치료한 보답의 3차이자 마지막 분이 출발하였다. 개인적으로 주도에 도움을 준 보상까지 오늘 받아 챙겼으니 더는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비상을 진화시킨 그 이상한 소재에 대한 조사는 현재 확보한 천사의 육체로 하면 되고 구름바다 미궁의 거대 이형종은 기사들이 퇴치하였다고 들었으니까.

공작은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며 환인에게 악수를 청했다.

=성제께서 떠나신다니 아쉬움이 여름의 적란운처럼 밀려오는 기분이오.=

“만남이 있다면 이별이 있고 이별이 있어 재회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니 두 분과 훗날 재회할 기회가 찾아오겠지요.”

그리고 섭정과도 악수하고 나가려던 환인은 섭정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붙이는 이야기에 눈을 빛냈다.

=아, 성제님. 대현자에 관하여 알아본 결과 20년 전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히스론드 북동부의 천암산맥이라고 합니다. 대현자를 찾고자 하신다면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시는 게 어떨까요.=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20년 전의 일이라곤 하지만 대성녀가 해준 말과 일치한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천공성의 심장부에서 지내는 닐비나와 만나 작별 인사까지 나눈 환인은 노른을 타고 천공성을 빠져나왔다.

한 장이 3m에 달하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편 채 활강하는 노른의 등에 앉아있으니 불어닥치는 얼음 바람이 강펀치처럼 온몸을 욱신거리게 한다.

평소라면 거뜬했을 바람이 이러니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이 체감될 정도.

유르파가 혹시 모른다며 챙겨준 체온 유지 반지를 꺼내 착용하고 있으니 그의 귓가에 노른의 히히 웃는 소리가 흘러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응. 닐비하고 비나가 깜짝 놀라는 거 되게 웃겼어!」

놀란 건 딱히 닐비나뿐만이 아니었다. 진화한 비상을 본 섭정과 공작은 물론 천공성의 기사들도 정체 모를 생물과 마주한 모습이었으니.

그렇게 날아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노른이 응? 하고 무언가에 관심을 드러냈다.

환인은 그쪽에 뭐가 있나 싶어 살펴보았지만, 수상하거나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왜 그러지.”

「화닌… 환이인. 저쪽에서 그 여자가 불러.」

“그 여자라니…… 사도 말인가.”

환인은 스멀스멀 차오르는 거부감을 드러나지 않게 갈무리하며 왜 말을 거는지 이유를 물어보라고 노른에게 지시했다.

「응. 화안인이 자기 말을 못 들어서 날 부르는 거래. 잠깐 와서 이야기 좀 나누자고 하는데?」

……이것만 보자면 광상녀의 대응은 매우 상식적이다.

잠시 그쪽을 응시하던 노른에게 그쪽으로 가자고 지시를 내렸다.

=어서 오시게.=

노른이 도착한 곳은 아기자기하고 작은 집들이 모인 팔라툼의 외곽이었다.

천녀의 모습이 아닌 평범한 플라비우스족 노파의 모습. 자식과 손주들을 모두 내보내고 홀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평화로운 노인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투룸 정도 되는 작은 집에 조그마한 텃밭이 딸린 소형 주택. 건물 벽이 덩쿨과 꽃으로 꾸며진데다 텃밭에 이러저러한 약초와 채소가 자라는 아기자기한 집이다.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보기에는 전혀 아닌 광경이다.

그런 지원 없이 노파로 도시에서 지낸다면 어지간한 사회 적응력과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 광상녀가 상식적인 것은 이런 탓도 있는 건가.

환인은 7평 정도 되는 아늑한 텃밭을 잠시 구경하다가 텃밭에 물을 주는 광상녀에게 말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뭐어……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란다.=

대답한 광상녀는 텅 빈 물뿌리개를 한쪽 도구함에 내려놓고는 환인을 빈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노른에게 사람으로 변신하라고 한 뒤 싱싱한 당근을 두 개 뽑아와 깨끗하게 씻어 건네주었다.

=정성껏 키운 거니 맛있을 게야. 먹어보렴.=

두 손으로 당근을 받아서 아작, 깨문 노른은 그 단맛에 눈을 반짝이며 야금야금 당근을 열심히 씹어먹기 시작했다.

광상녀는 토끼처럼 당근을 갉아먹는 노른을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네 살 정도이니? 사도가 될 자질이 있어.=

비상을 만난 것도 이제 3년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자신이 비상을 만난 건 1살 때라는 이야기.

그 작은 모습이 1살이었다니, 조류치고는 정말 느린 성장이다. 대부분 조류는 1~2달 사이에 사냥이 가능한 성체가 되기 마련이니까.

「나도 언니 같은 사도가 될 수 있어?」

=그렇단다. 이 할미에게는 보이는구나. 네가 어찌 그렇게 훌륭하게 자랄 수 있었는지 말이야. 전부 그의 보호가 있어서겠지?=

「응! 친구가 나 많이 도와줬어!」

손녀를 바라보는 노인처럼 노른을 자애롭게 바라보던 광상녀는 어제와 전혀 다른 부드러운 눈으로 환인을 돌아보았다.

=방금 말했다시피 노르스리넨에게는 사도가 될 자질이 있단다. 이제 네 살에 신수가 될 정도의 성장을 보였으니 50년 정도 열심히 배우고 노력한다면 이 할미의 뒤를 잇는 사도가 될 수 있겠지.=

“…….”

=자네가 허락한다면 노른 저 아이에게 동의를 구해 히스론드의 다음 사도로 키우고 싶어.=

“제게 선택권을 주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하지. 저 아이의 보호자이자 가족은 자네이니까.=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각국의 주도를 수호하는 사도는 해당 종족에서 뽑는 법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지 않단다. 과거를 보면 사도가 된 신수도 제법 있어. 메리아놀의 사도도 플뢰, 프라우드가 아니고.=

“사도는 신수를 싫어하던 게 아니었군요.”

=흘흘흘. 사도가 싫어하는 신수는 한 부류뿐이라네. 혈통 덕에 신수로 태어나 받은 은혜를 세상과 신께 돌려줄 줄 모르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들이지. 자네는 자연에서 덕과 영을 쌓아 승천한 신수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나?=

“……천원입니까.”

=그렇다네. 자네도 보았다시피 천원의 우주수 길리아미는 이 세계를 지키는 기둥일세. 그 기둥이 무너지지 않도록, 외부의 원인으로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신수로 태어난 자들의 권리이자 의무인 게야.=

그런 고귀한 의무를 저버리고 지상에 안주하여 거들먹거리는 신수를 어찌 좋아하겠냐는 이야기.

환인은 눈앞의 광상녀가 자신의 몸에 묻은 천원의 흔적, 그리고 며칠 전 벌어졌단 하늘의 괴사에 자신이 천원과 관계있는 인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광상녀는 손을 뻗어 노른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신수가 되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지난한 일이지. 그러한데 우연과 필연에 노력이 겹쳐 성수로 삶을 끝마쳤을 아이가 신님께 닿을 수 있는 신수로 진화하였네. 이 어찌 귀엽지 않을까.=

“그러면 노른도 승천하여 우주수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닐세. 한낱 짐승으로 태어난 이가 노력하여 신수가 되었네. 그 노력의 대가를 어찌 갈취할 수 있겠나.=

“그럼 노른이 아이를 낳는다면…….”

=아니, 2대 정도로는 확실하지 않네. 신수의 혈계가 5대 정도 이어진다면 그때 신수로서의 권리, 의무가 내려져.=

“그렇군요.”

그러니 4살에 신수가 된 노른은 얼마든지 자기 뜻에 따라 천원으로 올라가는 길이든, 지상에 남아 광상녀의 뒤를 이은 사도가 되는 길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야기를 들었지만 별로 이해할 생각은 없는 듯 당근에만 집중하는 노른에게 환인이 물었다.

“노른,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웅? 난 화닌이랑 같이 갈 거야.」

=흘흘흘흘.=

생각할 것도 없다는 대답에 광상녀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거 아쉬운 일이구나. 하지만 10년 정도는 시간이 있으니 혹시라도 생각이 바뀐다면 이 할미를 찾아오렴. 그때 곤란한 일이 있더라도 이 할미가 해결해줄 테니까.=

「응. 저기저기. 화닌, 그거 안 먹을 거야?」

사도 권유보다 당근이 더 중요한 것처럼 당근을 향한 노른의 식탐에 환인은 작게 웃으며 꼭지만 뜯고 나머지는 노른에게 주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당근 꼭지를 먹어본 환인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노른이 식탐을 내비칠 만큼 아삭한 식감과 은은한 단맛이 일품인 당근이었던 것.

더는 할 이야기가 없어 보였기에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노른을 불렀다.

“그러면 우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노른.”

「어어. 나 당근 아직 다 안 먹었는 데.」

“집까지 걸어갈 테니 가면서 먹어라.”

「알았어.」

=성제.=

“예.”

잠깐 망설이던 광상녀는 괜스레 딴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기린과 이야기를 나눌 때 대신 좀 전해주시겠나? 다음에 또 그런 식으로 왔다 가버리면 그때는 직접 찾아가 그 면상을 보겠다고 말일세.=

“……그러겠습니다.”

대성녀와 광상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한 환인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고, 광상녀는 푸근한 미소로 그를 배웅했다.

=자네에게 내려진 시련을 잘 끝마칠 수 있길 하늘신께 기도드리겠네. 잘 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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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대현자특) 퀘스트 뺑뺑이시킴

주인공특) 그런거 혐오함

자강두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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