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 파편인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전 세계적인 규모의 승령천제 전날.
믿을 수 없는 현상과 사고와 전설적인 생물의 출현이 한날한시에 벌어져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질 역사가 만들어졌지만, 승령천제는 미뤄지는 일 없이 예정대로 치러졌다.
난장판이 된 대광장은 사태가 마무리된 뒤 시민들이 밤새 솔선수범하여 깨끗하게 청소하였고, 일부 이형종의 돌진으로 파괴된 제단은 급하게나마 천공의 배를 가져와 천공성의 여력을 모두 동원해 천제天祭의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꾸몄다.
팔라툼의 귀족가에서 자발적으로 진상한 공물이 제단 주위를 치장하니 임시로 만들었다는 티가 나지 않았을 정도.
=영성경이 출현한 승령천제다. 도시 어딘가에서는 성제님도 지켜보실 것이고 상급 영혼사도 세 분이나 주도하는 역대급 천제다. 가문의 누구도 빠지는 것은 절대 허락 못 한다.=
죽을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라도 참석한 자리에서 죽어라.
이와 비슷한 말이 삽시간에 귀족가 전체로 퍼져나갔을 만큼 이번 승령천제의 주목도는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날이 밝아 팔라툼의 네 곳 도시 시민들은 천주산 밑 중앙 시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천제가 시작되기 10분 전에는 팔라툼 전체 귀족들이 자리를 채웠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신 교단의 교황과 성녀, 땅신 교단, 짐승신 교단, 물신 교단에서 나온 추기경들도 각기 자리를 채웠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 죽으면 히스론드라는 국가 자체가 붕괴할 정도의 면면들이다 보니 동원된 경계호위 병력도 무지막지했다.
제2 천공기사단과 하위의 천기사와 공기사에 하급 기사 총 800명, 광홍주 왕궁술법단 및 하위 관계기관의 술법사단 500명, 위천 순찰대 및 기타 특수 병과 300에 일반병 2만.
6~7급에 이르는 각 직업 조합의 조합장들도 조직원 전원과 참석하였을 정도이다 보니 시민들을 포함하면 그 숫자가 물경 20만으로, 예년 평균을 2배나 초월하는 숫자이자 팔라툼의 시민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름 5백 미터의 대광장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으며 날 수 있는 자들은 주변 건물의 지붕이나 옥상에서 천제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작된 천제에 귀족들과 시민들은 전율을 느꼈다.
국가적 축제나 재난 때도 볼 수 있을까 말까 하여 한 번이라도 뵈면 대대손손 영광이라는 히스론드의 천왕이 제1 천공기사단 전원과 섭정, 삼대 공작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것.
=……하여 신께 바라옵건대,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여 혼의 평안을 이끌어주소서.=
하여 주도의 미궁 역류라는 희대의 사고가 터졌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러한 사고는 빠르게 잊혀갔다.
영성 하늘 고래의 출현.
일반 시민은 평생을 가도 한 번 보기 어렵다는 왕족과 최고위 귀족들의 승령천제 참가.
하늘신의 사도인 광상녀의 실존과 주도 수호의 의지 확인까지.
미궁 역류 한 번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
자박자박.
주인님이 마실 커피를 은쟁반에 담아 거실로 향하던 이실리테는 거실의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한 채 서성이는 두 명을 발견하곤 눈썹을 지그시 모았다.
=문 앞에서 뭐 해?=
=어? 어어. 도령 괜찮은가 싶어서…….=
=이슬이 아가씨. 자기 표정은 어땠니? 힘들어한다거나 괴로워한다거나 그러진 않아?=
=…그렇게 궁금하면 들어가서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으……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보려니까 조금 그래서……. 도령도 자꾸 물어보는 게 귀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맞아맞아. 그리고 자긴 쓰러지기 전까지 힘들다는 티를 아예 안내잖니. 이슬이 아가씬 늘 자기 곁에 붙어있으니까 우리보다 잘 알지 않을까 해서…….=
이실리테는 움츠러드는 그녀들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일이 벌어진 지 벌써 사흘째. 환인은 그동안 거실에서 줄곧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잠자리는 물론 아침저녁 훈련도 중단했다. 딱히 거실로 들어오지 말라던가 말 걸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웃음기라곤 전혀 없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 중요한 순간인가 싶어 말을 걸기도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것.
평소의 여장부 같은 모습은 어디 가고 주눅 든 고양이 같은 모습에 이실리테는 문에 노크한 뒤 두 사람을 거실로 밀어 넣었다.
=앗!=
=꺅.=
로브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지려는 유르파를 뒤에서 잡아준 안느가 당황한 표정으로 새침한 얼굴의 이실리테를 돌아봤다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이건 그러니까……. 별건 아닌데… 아니 별것 아닌 건 아니고…….=
창가에 선 그의 손에는 통신용 수정구가 들려있었는데 막 통신이 종료되었는지 불빛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혹시 통신을 방해한 건가?
=주인님. 커피 내려왔어요.=
“고맙다.”
커피를 건네받은 환인은 커피잔의 따스함을 손끝으로 느끼면서 소파로 걸어가 앉은 뒤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는 안느와 그녀의 뒤에 반쯤 숨은 유르파를 향해 말했다.
“통신을 방해한 것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그래서 무슨 일로 왔냐고 시선으로 묻는 환인.
여자들은 그냥 평상시 같은 그의 모습에 속으로 살짝 안도하며 그의 소파 근처에 앉았다.
=똑같은 내용이지 뭐……. 도령 몸은 괜찮나 해서…….=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고 있다. 현상 유지 중이지.”
혼의 조각 파편이 몸에 박힌 뒤로 환인의 신체 능력은 매우 저조해졌다. 그리모암의 유물 패시브 효과를 받지 않는다면 거동이 조금 힘들어질 정도.
영혼술을 펼치는데도 애로사항이 꽃펴서 평온의 파동이나 간단한 강령 정도는 가능하지만, 영기와 위상력, 영기와 심핵력을 섞는다던가 혼령주, 방혼벽, 영혼 치유나 타락 정화 등 복잡한 운용이 필요한 기술은 거의 봉인된 상태다.
유르파가 은쟁반 위에 놓여진 통신 수정구슬을 힐끔 보고 묻는다.
=자기, 영도에서 조사 결과가 나온 거니?=
“예. 비마르 영성이 역사관의 자료를 전수 조사하였지만, 저와 같은 현상을 겪은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다더군요.”
환인이 처한 상황은 대성녀 닌실=아나그조차도 모르는 현상이었다. 때문에 영성들을 소집해 사흘간 조사를 벌였던 것인데 별 성과가 없었다는 이야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쁜 내용에 그녀들의 안색이 흐려졌다.
남은 해결방안은 정말 몇 안 남았다.
=그러면 교단 본단을 돌아다니면서 도령의 몸 상태를 보여주고 치유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거랑 영약을 찾는 수뿐이겠네.=
믿었던 대성녀도 별로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상황이니 닥치는 대로 수단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지 않나.
환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교단 쪽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루어야지. 이쪽의 몸 상태가 널리 알려져봤자 파리 떼가 꼬이기만 할 테니까.”
=그건 그래.=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영약靈藥, 만병통치제라고 불리는 신비한 약이다.
영약은 종류가 제법 된다.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이 세계수의 눈물로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통로를 지나면 나오는 반면 세계의 거대수에서 채취할 수 있는 수액인데, 이것의 효능이 단연코 최고로 꼽힌다.
모든 질병과 독과 상태 이상의 해제에 복용한 사람의 수명도 소폭 늘려주는 신의 물방울이 바로 세계수의 눈물인 것.
그다음이 알익시르, 혹은 크리세온이라 부르는 가루약인데 이것은 후천적으로 얻은 모든 병마를 물리쳐준다는 기적의 영약이다.
바투아쿰이라는 고대 연금술사가 만든 핀디쉬의 만능약도, 벨티칼의 주술사들이 신수의 부산물로 제조한 아미스의 정수라 불리는 약액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병과 상처를 치료해준다.
따라서 합당한 돈이나 재화가 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게 영약이다.
일행의 현재 보유금은 위상석과 유르파의 판매용 물품을 다 처분할 경우 7천 금화쯤 된다. 가진 유물도 몇 가지 있으며 인맥 또한 넓으니 구하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겠지.
안느가 살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천공성에도 영약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닐비나 폐하는 몸이 무척 허약하셨으니까 만일을 대비해서 구비해뒀을 거 같은데.=
=테이아무스 섭정님께 받을 미궁 안정화 보상도 아직 남았고 구름바다 미궁의 이중 미궁을 밝혀낸 포상도 있으니까. 말만 잘하면 거저 얻을 수도 있을 거야.=
의외로 해결방안이 멀리 있지 않아서 세 여자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지만, 환인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기에 얼마 안 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변한다.
=주인님?=
=도령…… 혹시 영약이 안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내 상태가 병으로 분류되는 거라면 통하겠지만, 이것이 정말 병마일까.”
=…….=
=…….=
아무리 지독한 독이나 질병이라 해도 회복술을 받으면 약간이라도 차도가 생기는 법이다.
사흘 전 집에 돌아온 아영은 모든 위상력을 모아 환인에게 7급의 회복술을 펼쳤다.
사지가 떨어지고 뱃가죽이 찢어져 내장이 튀어나온 상태도 멀쩡하게 되돌리는 이적의 빛이 아영의 손에서 뿌려졌지만, 환인의 상태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환인은 혀가 쓰릴 정도의 쓴맛을 느끼며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이 빛의 알갱이는 지금까지 내가 성불행을 하며 거두어들인 영혼의 결정 파편 같은 것으로 판단된다. 병마로 분류되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환인의 이야기에 음, 고개를 끄덕였던 유르파가 탁, 자신의 무릎을 때리듯 쥐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려놓는 건 안 좋다고 봐. 일단 영약을 하나 확보한 뒤에 대현자를 찾자.=
=대현자?=
=대현자요? 그거 그냥 아이들 놀리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아니야. 각국 주도의 사도님처럼 알려진 게 거의 없다시피 할 뿐이지 확실히 실존하는 사람이야. 듣기로는 신님의 가호를 받아 특수 직업으로 각성해 삼라만상에 통달했다고 하던데, 대현자라면 자기의 몸 상태랑 치료법에 대해서도 알지 몰라.=
유르파가 내린 결론은 몇 시간 뒤 한줄기 금빛 바람과 함께 도달한 대성녀도 내놓았다.
《소녀 또한 유르파 영혼 기사의 뜻과 같소. 성제, 그대의 몸 상태는 이를테면 신열이 난 것과도 같지. 모든 상태 이상을 회복시켜주는 세계수의 눈물 정도가 아니라면 기타 영약으로는 그대의 몸에 벌어진 이상 현상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먼 곳까지 날아오신 겁니까.”
《성제의 일은 곧 영도의 일. 그대의 몸에 변고가 발생하였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조사가 진행되는 사흘은 참았지만, 마땅한 해결책은커녕 제대로 된 자료조차 없다는 조사 결과에 대성녀는 직접 환인을 진찰하기 위해 혼자 날아와 버렸다는 이야기.
환인의 벗은 상체 곳곳에 침을 꽂고 등에 손을 올려 그를 진찰하던 대성녀가 한숨을 폭 내쉰다.
《확실히 그대의 몸에 박힌 무언가에서 희미하지만 혼의 기운이 느껴지긴 하오. 혼의 파편이 머리와 가슴에 박혀 영혼술을 저해하는 현상이라니…… 앞으로 불러야할 이름이 필요할듯하니 임시로 파편인이라 하겠소.》
“…….”
《이 파편인 현상이 발생한 이유를 나름 짐작해본다면, 하늘에 벌어졌던 현상은 천원이 열린 흔적이 맞을 것이오. 거기에 자애신님의 권속인 영성경이 출현하여 파동을 뿌리니 두 가지의 초월한 기운이 성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게 아닐까.》
“기린의 선술로도 이 현상에 대해 명확한 답은 내릴 수 없는 거군요.”
대성녀가 조금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소녀의 선술은 용의 신술과 달리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섭리와 같은 힘이오. 그대의 몸에 벌어진 현상은 영기와 영혼의 계열, 소녀보다 상위의 직업을 지닌 성제도 제어와 가늠을 못 하는 일이잖소? 소녀가 대성녀라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오.》
용과 기린이 다루는 술법은 궤가 다른 건가.
아드네빌라에게 도움을 청할까도 생각해봤지만, 환인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었다.
자신 때문에 한번 죽음을 경험한 그녀다. 모르긴 몰라도 아직 심기가 상해있을 터. 감정이 조금 상해있을 때 도움을 청하기보단 그녀의 분이 풀린 이후에 살살 구슬려 도와달라 부탁하는 것이 좋겠지.
‘그때까지 이 파편인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의 몸에 꽂은 침을 회수해 정리한 뒤 침통에 넣던 대성녀는 환인이 벗었던 셔츠를 몸에 걸치는 것을 보며 말했다.
《대현자는 듣기로 히스론드의 천암산맥에 있다 하더군. 확실치는 않으니 정보 수집이 필요할 것이오. 이쪽은 하얀 늑대들과 합작하여 정보를 수집하여볼 터이니 결과가 나오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소.》
“대성녀께서 직접 신경 써주셔서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마음이 묻어나는 대답에 대성녀는 잠시 환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후, 웃음을 흘리며 소지품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 말한다면 소녀는 성제에게 몸과 마음을 전부 바쳐야 하지 않을까 싶소만. 성제가 영도를 위해 해준 일이 몇 가지인지 잊으셨소?》
“하하.”
《것보다 성제, 제발 부탁이니 앞으로는 좀 몸도 사리고 그러시오. 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이런…….》
하아, 짧게 한숨을 내쉰 대성녀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얌전히 지켜보던 여자들이 일어나는 모습에 앉아있으라 손짓했다.
그리고는 조금 곤란한 미소녀처럼 웃으며 기다란 기린의 꼬리로 그의 가슴팍을 살짝 간지럽혔다.
《아무튼, 소녀가 급하게 오느라 기운을 갈무리하지 못하여서 말이오. 잔뜩 뿔난 수호자가 이리로 날아오고 있소. 그녀가 성제에게 짜증을 부릴 듯 한데…… 미안하지만 뒷감당을 부탁드려도 되겠소?》
“그렇습니까.”
《음. 그대에게 험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노처녀의 히스테리라 생각하고 조금 받아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환인의 대답에 대성녀는 싱긋 웃으며 한줄기 금빛 바람으로 변해 사라졌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쿵- 정원에 강대한 힘이 추락하며 집이 작게 흔들렸다.
부스스-
천장에서 먼지와 돌가루가 흘러내리지만, 여자들은 바깥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에 긴장하느라 그 돌가루를 고스란히 맞으며 환인의 주변에 모여든다.
정원 쪽 문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제가 나가볼게요.=
이실리테가 허리춤에 기사검을 차고 뒷문으로 나가고 잠시 후, 노파와 함께 굳은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여자들도 사흘 전에 본 노파를 보자마자 얼굴을 살짝 굳혔다.
대성녀님이 말한 무서운 수호자가 사도였어?
그때 봤던 사도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온화한 할머니였다. 헌데 지금은 심기가 상했는지 뻣뻣하고 딱딱하게 굳은 압박감만 뿌리고 있었다.
절대 동일 인물로도 안 보이며 노파로도 보이지 않는 기세.
그 기세에 질린다는 표정을 한 안느가 환인에게 살짝 귀띔해주었다.
=도령. 주도 팔라툼의 사도이신 광상녀님이셔.=
광상녀라고.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노파를 잠시 응시하던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주도를 떠받치시는 숨겨진 기둥을 뵙습니다. 영도에서 성제의 호칭을 받은 영혼사, 환인이라 합니다.”
=세라크 리에리아, 광상녀라는 과분한 칭호를 그분께 받은 노인일세. 편히 세라크라 부르시게.=
“예, 세라크 님. 앉으시겠습니까.”
환인은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지만, 광상녀는 응하지 않고 거실을 한차례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마치 무언가의 흔적을 찾는 것처럼.
그러더니 절대 우호적이지 않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반쯤 힐난하듯 입을 열었다.
=용의 방문까지는 내 보아 넘겼네. 그 녀석은 그래도 힘을 갈무리하여 속으로 숨겨 그분께 예의를 표하였으니까. 그러나 방금 오간 기린은 참으로 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군.=
“…….”
=성제도 사람이니 알겠지. 집안에 허락받지 않은 자가 멋대로 들어와 휘젓고 다니면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예.”
《이곳은 하늘신님의 영역일세. 그분의 앞마당이라는 것이지. 그런 신성한 곳을 예의도 보이지 않고 제멋대로 오가는 기린을 본녀가 어찌 하여야 할까.》
노파의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노을빛을 일렁이는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진, 태양처럼 타오르는 머리카락의 여자가 눈꼬리를 치켜세우고 환인을 응시한다.
광상녀의 눈가에 태양의 불길 같은 빛무리가 일렁이니 백청룡 아드네빌라와 비교해도 절대 아래가 아닌 광포한 기운이 거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칭호에 걸맞는 존재군.’
아드네빌라의 기운이 사람을 짜부라트리는 자연의 거대한 힘이라면, 광상녀의 기운은 마치 태양에서 뿌려지는 에너지를 빛으로 가공한 듯한 직선적이고 직설적인 기운이었다.
광상光狀, 이름 그대로 빛光의 형상狀을 한 존재가 바로 하늘신의 사도인 노파…… 아니, 천녀天女였던 것.
환인은 신화적인 존재를 앞에 두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예의를 표시했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으셨겠지만, 저로 인해 마음이 급하여 저지른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봐달라는 이야기인가.》
“짚고 보면 대성녀님은 현재 팔라툼에 머무는 영혼사들의 책임감독자 같은 분입니다. 그러니 허락받지 않은 자라는 표현은 안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영혼사들이 줄기차게 들락거리며 도시에 쌓인 영혼을 성불시키고 정리하지 않느냐.
그런 영혼사들의 상급자가 직원 돌봄 차원에서 잠시 왔다 간 건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
신수인 대성녀를 정원 관리 업체 직원 정도로 표현하는 환인의 능구렁이 같은 화술에 광상녀가 살짝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논점을 자신과 전혀 다른 쪽으로 잡았지만, 잘잘못을 따져봐도 그의 말에서 틀린 점은 없다.
이 상황에 화를 낸다면 자신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나 다를바 없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하늘신의 정원을 관리하는 관리자일 뿐이니까.
《그대는 참으로 뺀질뺀질한 남자로군.》
“대성녀님께서 여태껏 이러셨던 적은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간 대륙의 평화와 영계의 안녕을 위하여 일해오신 그 노력을 보아서라도 한 번만 봐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환인이 재차 고개를 숙이니 약간 찌푸린 얼굴로 환인을 보던 광상녀는 살짝 히스테리를 부렸다.
자존심 탓에 저 말에 넙죽 알겠다고 답하고 돌아가긴 싫었던 것.
《오래 살고 싶거들랑 뺀질거리는 것도 적당히 하게. 아니면 몸에 박힌 그런 것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될 테니까.》
“유념하겠습니다.”
보기 싫다는 것처럼 고개를 홱 돌린 광상녀의 모습이 한여름 뙤약볕의 아지랑이처럼 흐늘거리다 그대로 사라졌다.
거실을 가득 채우던 압박감이 광상녀의 이동과 함께 사라지자 여자들이 후우, 이마의 땀을 훔치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손이 벌벌 떨리는 거 같슴다…….=
=아드네빌라 님이 화를 내실 때도 몸이 살짝 떨렸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더 떨리는 느낌이었어요…….=
=아드네빌라 님보다 광상녀님이 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으신 분이라는 뜻이겠지……?=
그런 사도를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 몇 마디로 구슬려 돌려보낸 환인을 여자들이 감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유르파는 조금 복잡한 눈으로 소파에 다시 앉는 환인을 보았다.
방금 광상녀님의 말씀을 보면 자기의 몸 상태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으셨던 거 같은데…….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려울까.’
자신이 알아차린 것이라면 도령도 당연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을 꺼내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인 걸 알아서가 아닐까?
유르파는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며 당분간 잠을 줄이고 마도기를 좀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약을 구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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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한테... 박는다고? (동공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