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51화 (651/813)

651 승령천제

꾸우우우우웅웅——…….

“……!”

영혼에 충격을 주는 고래의 두 번째 울음소리에 환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몸 안의 심핵력과 영기가 뒤엉키는 느낌이다. 거기다 심장과 그 근방, 머릿속에 무언가 빛의 알갱이가 낱낱이 박혀 정신과 육체의 올바른 운행을 방해하는 기분.

기혈氣穴이 역류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몸이 굳고 다리에 힘이 빠진 환인이 한쪽 무릎을 털썩 꿇으니 그의 곁에 바짝 붙어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백려강과 유르파가 화들짝 놀라 그를 부축한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자기!=

쐐애애애액—!

서주산의 플라비우스족 군대가 편제를 이뤄 전투기 굉음 같은 소릴 내며 대광장 상공을 지나친다. 그리고 막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려는 이형종 떼와 격돌, 불과 바람, 땅, 번개의 속성 투사체가 무수하게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콰과광— 쩌적, 쿵… 퍼버벙……!

막아라…! 이형종이 절대…… 두지 마라……!

꽤애액…! 끄에에에엑-……!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기사와 병사들이 내지르는 고성, 이형종의 비명에 포효로 대광장 상공이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불에 구워지거나 벼락에 튀겨지고 화살에 꿰뚫린 조류 이형종이 하늘에서 빗발치듯 떨어져 건물에 충돌하거나 미처 피하지 못한 시민들과 부딪친다.

고래 소리에 우뚝 멈춰섰던 수만 명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 도망치기 시작하니 간혹 군인들도 추락하는 가운데 대광장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침착하게 주위 상황을 파악한 이실리테와 안느가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지금 억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왠지 좋지 못하단 생각이 든다.

=율이 언니랑 아영이는 도령 상태 좀 살펴봐. 나랑 이슬이하고 려강은 주변을 경계할게.=

=려강, 벼락활을 들고 접근하는 이형종은 전부 쏴서 떨어트리세요. 노른은 저 새들이 몰려들면 어떤 공격을 퍼부어도 좋으니 전부 갈아버려. 할 수 있지?=

=네, 언니.=

「응! 근데 친구 괜찮아……?」

=괜찮아. 주인님은 유리 언니와 아영이 회복해줄 테니까.=

아영은 두꺼운 스웨트셔츠와 청바지를 훌렁 벗고 크롭티에 숏팬츠 차림으로 피부를 훤히 드러낸 채 환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유르파도 정밀 분석 비술을 걸어놓은 마도구 외눈 안경으로 그의 상세를 조사한다.

=자기 몸 상태는…… 위상력 문제는 아냐. 몸에 아예 위상력이 검출되지 않는걸. 그쪽은 어떠니?=

=육체에 이상이 생겨 발생한 것도 아님다. 신체 기능은 멀쩡하고 독이나 질병 같은 징후도 없어요. 이건 영기하고 그 심핵력? 그쪽 문제인 거 같은데.=

백려강은 뒤에서 들려오는 언니와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벼락활에 화살을 매긴 채 긴장했다.

바로 머리 위라 할 수 있는 데서는 수천의 이형종 군단과 수백의 플라비우스족 군대가 전쟁을 벌이는 중이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어 그녀의 심리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사, 살려…!

‘이게 전장이 압박감……!’

이형종이 점점 퍼져나가는지 도시 곳곳에 사람들의 비명이 울리고 쿠궁, 콰과광, 포격음까지 거칠게 터져 나온다. 군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이형종 무리 일부가 도심을 습격하기 시작한 거다.

대규모 이형종과 전쟁은 린덴 촌락에서 경험했지만, 그때는 안전한 곳에서 지켜만 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전장의 한복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중 검기 세 자루를 띄운 채 근처 하늘에서 전투 중인 장면에 집중하고 있던 이실리테가 백려강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주의를 주었다.

=려강. 위상력이 화살에 너무 깃들었어요. 려강의 실수는 우리가 보완해줄 테니 긴장을 조금 풀어요.=

=넷, 언니……. 앗, 적이 와요!=

군대를 피해 수십 마리의 조류 이형종이 환인 일행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그걸 발견한 백려강이 화살에 위상력을 먹여 쏘았다.

피이이잉— 푸르게 물든 화살이 2발씩 순식간에 12발이 날아가 목표로 한 조류 이형종의 머리를 퍼버벅, 터트려버리니 이형종도 피를 보고 흥분해 비행 속도를 끌어올린다.

그 결과 2차로 발사한 10발 중 3발이 빗나가 일곱 마리가 추락, 스무 마리 정도가 일행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지만…….

「죽엇!」

노른이 일으킨 녹색의 바람 칼날 폭풍이 넓게 펼쳐지며 거기에 휘말린 이형종은 전부 저며진 고기가 되어 흩뿌려졌다.

화살의 화망도, 매서운 칼날 폭풍도 피해 날아온 이형종은 몇 마리 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덩치도 크고 비행도 빠른 강한 이형종이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마지막에 버티고 있던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가 빛살처럼 허공을 난도질하니 그러한 이형종도 고기 큐브로 변해 피와 내장을 뿌리며 추락한 것.

「이실리테. 적은 동쪽에서만 오고 있어. 근데 군대랑 이형종 군단의 전장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서, 이러다 이형종한테 포위당할 거야.」

이실리테는 환연이 자신의 목덜미에 붙어 알려주는 정보에 눈썹을 좁혔다.

자신은 용병 시절 전장을 다수 구르긴 했지만 일반병이었다. 지휘는 하나도 모르는데…….

‘이런 상황이면 보통 후퇴가 답이지만…….’

이럴땐 확실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다.

=환연. 안느한테도 이야기해줄래? 나보다 안느가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것 같아.=

「알았어.」

같은 이야기를 들은 안느는 유르파와 백려강에게 환인의 상세를 물었다.

=자긴 지금 트랜스 상태에 빠진 거 같아. 아영이랑 나랑 같은 생각이야.=

=끄응. 그럼 몸에 손대는 건 곤란한데…….=

=적이 또 와요! 이번에는 더 많아요!=

아까보다 족히 3배는 많은 숫자. 거의 200에 가까워 시커먼 파도가 들이닥치는 것 같지만, 안느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얼핏 살폈지만 전부 밀려오는 구름바다 미궁에서 본 것들. 그 말은 곧 3급 이하라는 뜻이다. 그 정도면 100이든 200이든 문제없다.

예상대로 백려강의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가고 화살 하나에 1타 2파, 3피를 달성하며 숫자를 급격히 줄여나간다.

거기에 노른이 발사한 바람의 구슬이 이형종을 향해 날아가며 사방에 바람의 인刃을 뿌리니 200마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남은 이형종은 사방으로 산개했지만, 백려강의 화살이 시위를 떠날 때마다 한 마리가 추락하고 비상의 두 손에서 초록빛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대여섯 마리가 후드득 떨어진다.

그렇게 남은 수십 마리는 범위가 조금 더 늘어난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 경계선에 닿자마자 목이 떨어지고 몸이 토막 나버렸다.

세 명의 방어망을 뚫지 못하는 이형종의 공세에 안느가 후, 짧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도령이 깨어날 때까지 여기서 버티자. 환연, 이형종이 혹시라도 이슬이 화망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하면 상급 정령도 불러서 지원해줘.=

「응. 부담이 커지면 릴라이스도 부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오히려 너희가 조심해. 다들 갑옷 안 입었잖아.」

=천사도 아니고 저런 조류의 공격 따윈 맞아도 안 아파.=

대답한 안느는 언제라도 위상력을 폭발시켜 일행을 보호막으로 감쌀 준비를 하며 훗 웃었다.

분명 사방을 수천 마리의 이형종이 뒤덮은 상황이지만 이해가 안될 만큼 든든하다.

군대가 틀어막고 있는 이형종이 전부 몰려와도 우리만큼은 무사할 것 같은 기분. 아니, 노른에 환연까지 나서면 미궁의 역류도 자신들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든든한 건 든든하지만 지금 당장 신경 쓰이는 것은…….

힐끔, 징그럽게 벌어진 잿빛 하늘의 공간에 잠깐 시선을 주었던 안느는 복잡한 시선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환인을 보았다.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소리, 영혼을 정화시키는 듯한 영성경의 소리에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인 것이 너무 신경 쓰인다.

‘아냐. 영성경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전에 먼저 하늘을 올려다 봤어. 그럼 저 하늘의 기현상 때문……?’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 하나.

안느는 전선을 맺어 이형종을 점차 밀어내는 히스론드의 군대를 바라보며 이실리테와 백려강을 불렀다.

=있잖아. 저 하늘에 생겨난 저거 말이야. 왠지 눈을 닮지 않았어? 꼭 사람의 눈알을 뺀 것처럼…….=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갑자기 그건 왜?=

=린덴 촌락에서 도령이 봤다던 환상이 생각나지 않아? 갑자기 도령이 저러는 것도 그렇고 뭔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음.=

=아…….=

꾸우우우우우우웅————!!

그때 세 번째 신성한 고래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어디서 시작되는지 모르는 성스러운 울림은 앞선 두 번보다 더욱 커 온몸이 떨릴 정도였기에 오싹거리며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형종은 달랐다. 히스론드의 군대와 싸우던 이형종들은 단체로 혼란에 걸린 것처럼 어지럽게 날다 서로 부딪쳐 추락하거나 피아를 구분 못 하고 주변을 마구 공격하는 등 개판이 되어갔다.

=또 와요!!=

개판. 정말 표현 그대로의 상황이다.

좀 전까지는 군대가 어그로를 끌고 있어 전선이랄만한 것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조류 이형종들은 공황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

다행이 시민들은 거의 다 대피가 끝나 주위가 텅텅 빈 상태. 거기다 어그로가 일순간 무의미해진 상황을 간파한 백려강은 벼락활의 기능을 최대로 전개해 벼락의 화살을 뇌음雷音과 함께 방사하며 쉴 새 없이 시위를 튕기기 시작했다.

꽈르릉! 우르르릉— 꽈과과광—!!

벼락활의 시위가 1초에 다섯 번씩 튕길 때마다 번개 줄기가 다발로 뿌려지며 패닉에 빠진 이형종을 죄다 튀겨버린다.

노른도 눈치껏 백려강을 따라 두 손을 하늘로 뻗어 광풍을 일으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새들을 한데 끌어 모았다.

이렇게 모으면 백려강이 알아서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는데…….

쿠구구구구구……!

「어?」

그 순간 집채만 한 거대한 화염구가 하늘 저편에서 날아들어 광풍과 접촉한 순간 폭발, 용암처럼 샛노란 불길을 토해내며 속에 가둬진 수백 마리의 이형종을 단숨에 재로 만들어버렸다.

고오오오오오……

광풍이 작열하는 불길을 머금고 화염 폭풍이 되어버리자 자신의 제어가 잘 통하지 않게 되어 당황한 노른은 바람을 풀어버리려 했지만.

=아가. 그대로 풀어버리면 주변이 불바다가 된단다. 바람을 이 할미에게 넘겨주지 않으련?=

「언니는 누구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노파의 고운 목소리에 여자들이 흠칫 놀라 그쪽으로 무기를 겨눈다.

=흘흘. 이 할미를 언니라고 불러주는 게니.=

하얗게 셌지만 반듯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세월이 얼굴에 스며든 외모. 살짝 곱은 허리에 윤기가 빠져 조금 푸석푸석해 보이는 한 쌍의 날개는 그녀가 살아온 세월이 절대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거기에 약간 헤진 평민의 평상복을 입고 있어 얼핏 보면 조금 곱게 늙은 노인이었지만, 여자들은 누구도 노파를 경시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기감을 뚫고 나타난 노인이다. 평범할 리가 없지 않나.

=힉.=

여자들 중 아영만 눈앞의 노파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곤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달달 떨었다.

=자아.=

「와. 신기하다. 어떻게 한 거야?」

=그건 나중에 알려주기로 하고…… 잘 보려무나.=

노파는 자연스럽게 노른에게서 화염광풍의 제어권을 넘겨받은 뒤 그러한 화염광풍을 삽시간에 수십 개로 분열시켰다. 그리고 산소의 급격한 연소 소리와 함께 각각의 작은 화염광풍이 분열되기 전의 크기로 되돌아간다.

하늘에 뜬 저택 사이즈의 화염광풍 수십 개. 그것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살아있는 것처럼 불의 파도가 되어 팔라툼의 하늘을 뒤덮었다.

히스론드의 군대는 전혀 피해 주지 않고 오직 이형종만 불태워버리는 지고의 작열. 그럼에도 도시에는 약간의 열기마저 전해지지 않는다.

그 어마무시한 원소의 지배력에 안느도 뒤늦게 노파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눈가에 경련을 일으켰다.

=히, 히스론드의 광상녀…….=

각 주도에 존재한다는 신의 사도使徒. 그중 하늘신의 사도가 바로 눈앞에 있는 평범해 보이는 노파였던 것.

안느의 혼잣말에 빙그레 웃은 광상녀光狀女, 세라크=리에리아는 아직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굳어있는 환인을 노인 특유의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노른에게 물었다.

=얘야. 이 할미와 같이 가겠니? 같이 가면 좀 더 재미있는 걸 볼 수 있을 거란다.=

「싫어. 난 친구 곁에 있을 거야!」

=그거 아쉽구나. 그러면 나중에 보도록 할까. 흘흘.=

그 말과 함께 광상녀는 전등이 깜빡이는 것처럼 한순간의 빛과 함께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굳어있던 여자들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안느. 방금 그분이 히스론드의 사도님…이었어?=

=응. 모습은 비밀에 싸여있어 나도 모르지만, 그 무시무시한 원소 지배력을 보면…… 틀림없을 거야.=

솔직히 말해 여자들은 하늘을 뒤덮는 불의 파도를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제는 힘으로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하게 발현한 힘이 압도적인 광경을 연출하자 한순간 생각이 멈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아드네빌라나 환인의 힘보다 이해할 수 있는 광상녀의 힘이 그녀들에게 더 큰 충격을 준 것.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이형종은 그 공격에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군대도 지상에 추락한 이형종을 확인사살하기 위한 일부만 남았고 나머지는 역류가 발생한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으로 이동한 상태.

적막에 휩싸인 주위를 둘러본 안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즐거운 축제 광장이었는데 지금은 무슨 몰락한 도시의 폐허 광장처럼 짓밟히고 부서진 노점과 망가진 좌판의 조각에, 사람과 이형종의 시체가 핏자국과 함께 널려있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환인과 데이트가 중단된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수많은 피해가 난 지금 그런 심정을 드러낼 만큼 안느는 생각이 짧지 않다.

성벽의 방패를 등에 돌려맨 안느가 유르파와 아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령은 어때? 좀 괜찮아졌어?=

=여전히 손을 못 대는 상태야. 영기와 심핵력 쪽에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우린 그쪽은 전혀 모르니까…….=

=일단 저기 가게 안으로 잠시 피하는 건 어때? 그것도 안 될까? 하늘에 저게 나타난 직후부터 이상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일단 가리는 것도…….=

“난… 괜찮다.”

=도령!=

=자기!=

=주인님!=

“미안하다. 걱정을 끼쳤군.”

=자기, 정말 괜찮은거 맞아? 자기가 한순간 멈춘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 상태에서도 하는 말은 다 듣고 있었으니까, 일단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내 등에 타!」

환인이 그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자 노른이 냉큼 쿠에로 변신해 그의 앞에 배를 깔고 엎드린다.

그 바람에 입고 있던 원피스며 속옷이 다 찢어져 버렸지만, 유르파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를 도와 노른의 등에 오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야, 노른! 뛰면 안 돼! 흔들림이랑 충격이 올라오잖아!=

「아참.」

뛰어가려다가 안느에게 구박받은 노른은 적당한 속도로 걷기 시작했고, 여자들은 그런 환인과 노른을 엄호하는 모양새로 따르기 시작했다.

불과 1시간 전의 번잡함이 거짓말처럼 황량한 거리를 걸으면서 주위를 경계하던 안느는 노른의 곁에 바짝 붙어 조금 피로한 기색의 그에게 물었다.

=도령이 쓰러진 거, 저 하늘에 저 현상 때문인 게 맞지?=

“……아까 네가 이실리테에게 물었었지. 내가 천원에서 보았던 그 눈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 느낌을 말하자면 네 추측이 맞다.”

=맞아? 그럼 저게 신님의 눈 같은 거니?=

흠칫하는 유르파의 대답에 여자들도 당황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신의 눈이라기보다는…… 그때 신역을 함부로 침범한 자를 이제야 발견했다는 감각입니다.”

=그, 그거 위험한 거 아님까? 천원? 이라는 곳이 정말 신님들의 권역이면 그 사역마라던가 신역의 수호자들이 오빨 잡으러 온다거나…….=

“모르겠군. 적어도 지금은 적개심,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그저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면 갑자기 왜 쓰러지신 거예요……? 오라버니가 갑자기 그러셔서 심장이 멈추는 줄만 알았어요….=

“약하고 예민한 생물은 사람의 인기척만 느껴도 쓰러지거나 스트레스로 죽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거기에 비유하자면 그 작고 예민한 생물이 내가 되겠지.”

여자들은 이해가 안 되면서도 이해가 가는 비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을 아드네빌라 앞에 던져놓으면 그 사람은 백청룡의 존재 자체에 압도당해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는 아드네빌라가 보장한 8급의 유일 직업자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그저 기척만으로 쓰러질 정도라면 대체 어떤…….

구구구구구구——……

그때 하늘에 또 다른 변고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눈알이 없어진 사람의 눈 같던 부분을 중심으로 잿빛 구름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고, 동시에 매우 옅은 안개가 모이기 시작하며 지평선까지 보이던 시야가 급격하게 좁혀들어 팔라툼의 자랑인 히스론드의 왜곡벽이 겨우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 변화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유르파가 다급히 여자들에게 물었다.

=잠깐… 이거 로탄 산지 때 그거지?=

=어? 영성경이 지금 오는 거야?=

=세상에.=

로탄 산지에서 마주쳤던 영성경이 뿌리고 간 물 폭탄을 떠올린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여, 여기에 그런 게 쏟아졌다간 도시가 쑥대밭이 될 텐데!=

=아니 그건 큰비가 내리던 중에 벌어졌던 일이잖니! 물 폭탄이 떨어질 일은……!=

=사도가 있으시니까 그분이 물 폭탄은 어떻게 하지 않을까요?=

「앗! 환인, 정령이 도망가기 시작했어! 진짜 영성 하늘 고래가 나올 건가 봐!」

“…….”

환인은 여자들의 허둥거림과 환연의 경고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영성경의 출현 자체에 문제는 없다. 승령천제중이니 다수의 영혼을 노리고 나타날 수도 있겠지. 이곳에는 성제인 자신도 있고.

미궁의 역류도 현시점에 문제없다. 비록 자신이 원흉인듯하지만 군대가 모여들어 잘 틀어막고 있는 게 틀림없으니까.

10분 정도 대광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천사 이형종은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은게 그걸 증명한다.

언제고 천원에서 자신을 찾아올 거라 생각했기에 저 하늘의 현상도 갑작스럽긴 하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하지만 천원이 지금 이런 식으로 접근할 줄은 몰랐고 영성경이 이러한 상황에 출현하려 하는 것도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아드네빌라가 말한 급성장의 여파가 이건가.’

머리와 몸에는 아직 빛 알갱이 같은 것이 박혀 영기와 심핵력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아드네빌라는 말했었다. 한 사람의 삶이 담긴 영혼의 조각을 무차별로 받아들이다가 문제가 생기면 단단히 고초를 겪을 거라고.

힘의 흐름이 제한된 이 상황에서 능력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영성경이 출현하고 저 하늘에서 벌어지는 변고 뒤에 무엇이 찾아올지 모르지만, 자신이 힘을 쓰지 않고 넘어갈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

“…환연.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이 있나.”

「없어. 사람들은 지하실이나 집안에 꼭꼭 숨어서 떨고 있는데…… 저 산 위에는 어떨지 몰라.」

“그러면 이실리테와 안느는 지금 갑옷으로 갈아입어라. 나도 천릉으로 갈아입지.”

깔끔한 셔츠에 무난한 면바지만 입고 있던 환인이었기에 셔츠를 벗고 천릉으로 갈아입는 것은 금방이었다.

중요한 건 천릉이 아니라 그리모암의 유물.

다섯 종류의 유물을 모두 착용하자 그리모암의 강력이 발동하며 기묘한 탈력감은 사라졌고 힘도 어느 정도 몸에 차올랐다.

외형 변화 마도구의 기능도 종료한 환인은 귀에 착용한 그리모암의 모자 위치를 조정하며 흡사 마왕이 강림할듯한 말세 적인 풍경을 둘러보았다.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잿빛 구름. 시야를 가리는 옅고 희미한 안개.

몇 년을 살았지만 역시 정이 가지 않는 세계라고 생각하며 광명창 대신 천칭을 꺼내 석장처럼 쿵, 바닥을 찍으니 그 소리에 화답하듯 꾸우우우웅—…… 영성경의 울음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

=소리가 가까워!=

=근처인가…?=

유르파와 아영이 천을 들어 가려준 곳에서 천상의 장막과 등대의 빛으로 빠르게 갈아입은 두 명이 그 소리를 들으며 나와 무기 등을 꽉 움켜쥐고 주변을 경계한다.

그때였다.

푸화아아악—

희뿌연 안개를 몸에 휘감은 도시 크기의 거대한 고래가 안개의 벽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 유유히 팔라툼의 상공을 스쳐 지나갔다.

꾸우우우우웅—……

=흡.=

=으읏.=

마치 우주를 잘라 그대로 붙인 듯 별빛이 반짝이는 거대한 검은 고래.

영성경이 신성한 울음소리와 함께 도시를 스치고 지나가자 그 울음소리에 이끌린 것처럼 도시 곳곳에서 회백색의 희뿌연 영혼들이 영성경을 따라 날아오른다.

향로에서 피어나는 연기처럼, 수백, 수천의 혼이 도시 크기의 거대한 고래와 안개 속을 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비현실의 극치.

영성경의 비행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아영이 꿀꺽하고 침을 삼키며 소심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어…… 바, 방금 영성경이 이쪽을 본 거 같은데요…….=

꾸우우우우우웅……….

재차 울려 퍼지는 영성경의 울음소리에 이번에는 환인의 왼팔에 잠들어있던 혼고魂庫의 혼이 일제히 풀려났다.

이형종의 혼은 정화된 것처럼 흩어지고 정령의 구슬은 강제로 해제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계약한 흑옥과 청옥은 무사하군…….’

최악의 사태는 모면했다. 청옥을 모아야 할 이유가 더 커지기도 했다. 정식 계약을 맺은 혼은 영성경의 울음소리에도 끌려가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백려강도 영성경의 울음소리에 멀쩡하니 정령 구슬과 이형종의 영혼 구슬의 소멸 정도는 사소한 문제.

그렇게 세 번, 천주산을 중심으로 돌았던 영성경의 비행경로가 소용돌이치는 잿빛 하늘로 수정된다.

=어, 어? 언니들, 영성경이 돌아가는데요?=

오빨 만나러 온 거 아니었나? 아영이 작게 중얼거리는 사이 수백의 영혼을 대동한 신비로운 고래는 짧은 울음소리만을 남긴 채 소용돌이의 핵을 꿰뚫으며 그러한 구름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자 소용돌이치던 잿빛 구름이 원래의 평범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팔라툼을 뒤덮은 안개도 천천히 옅어져 간다.

모여있던 잿빛 구름도 해방된 것처럼 점점 흩어져 사라져가니 구름 너머의 오렌지빛으로 물든 하늘이 천천히 도시를 비춰 물들여가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럽던 거리는 어느새 사람 사는 곳처럼 따스한 온기가 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하나둘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드러낸다.

“…….”

환인은 구름이 물러나며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영성경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시선을 거둔 것처럼 오싹거리는 감각도 사라졌다.

위기가 물러나고 평화가 찾아온 듯한 분위기. 그러나 환인의 굳은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혼의 조각이 파편화되어 틀어박힌 듯한 환인의 몸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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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미궁 역류 원인 = 환인

영성경 방문 이유 = 환인

하늘의 변고 원인 = 환인

히스론드(이)가 슬피웁니다

[작품 설정]

물러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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