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50화 (650/813)

650 승령천제

환연이 아영에게 치유술을 받는 사이 여자들은 아우라 은폐 목걸이를 차고 수백 벌의 예쁜 나들이옷을 살펴보고 있었다.

=우와아. 율이 언니, 옷 언제 이렇게나 만들어둔 거야?=

과장 보태서 방의 절반을 채울 정도로 많은 옷에 여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파티드레스는 물론이고 원피스, 투피스에 바지와 치마에서 티와 셔츠, 블라우스, 코트, 재킷, 조끼 같은 옷이 종류별로 옷걸이에 가지런히 정리되어있고 그 외에 액세서리인 케이프나 숄, 머플러에 벨트나 모자 같은 것들도 한가득하다.

어느 것 하나 대충 만든 느낌이 없다. 한 벌 한 벌이 귀족들도 입을 만큼 소재부터 마감까지 명품 클래스다.

여자들이 기뻐하며 옷을 고르는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유르파는 자신도 입을 옷을 챙기며 대답했다.

=취미 삼아서 조금씩? 자기랑 데이트할 때 입고 싶어서 아가씨들 것까지 하나씩 만들고 있었는데…….=

말하던 유르파의 눈빛이 아련해지고 이실리테와 안느도 옷을 바라보는 시선이 애틋해졌다.

그에게 불만은 없다. 불만 같은 게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할지……. 예쁜 옷을 입고 그와 함께 데이트를 해보고 싶다고 할까.

파르히스트 대축제에서 축제 데이트를 해본 걸 빼면 하루가 바쁘다 하고 열심히 돌아다니기만 했으니까.

그랬기에 여자들은 환인의 제안에 기뻐하면서 각자 마음에 드는 옷을 챙겨입거나 조언을 구하는 등 즐겁게 옷을 골라 갈아입었다.

어지간하면 슬립과 비슷한 로브를 고집하던 유르파도 봄 느낌이 물씬 나는 분홍색 레이스 블라우스에 하얀 옆트임 스커트와 봄에 입을법한 얇은 케이프를 걸쳐 평소와 다른 귀여움을 강조한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혹시 모를 전투를 대비해 롱티나 라운드넥 셔츠에 무지 레깅스 비슷한 바지를 고르고 그 위에 코트나 코바늘 숄 등을 걸쳐 활동성을 보장하는 내에서 한껏 멋을 부렸다.

백려강도 용의 꼬리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회색 왕통바지에 흰색 니트 나시를 입어 위로는 몸매를, 아래로는 귀여움을 어필하는데…….

=아영아. 너무 껴입은 거 아니니? 이런 게 너랑 더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환연의 치료를 끝낸 아영이 청바지에 두꺼운 스웨트셔츠, 장갑에 모자까지 써서 피부를 꽁꽁 싸매는 모습에 유르파가 다른 예쁜 옷을 달고 다가갔다.

살짝 데일리룩 느낌의 보라색 오프숄더 셔츠에 하이웨이스트 스커트, 회색 니트 가디건과 검은색 롱부츠 코디. 아영의 슬림한 몸매와 라벤더색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자신작이다.

하지만 아영은 그 옷을 시무룩한 고양이 표정으로 바라보며 더욱 몸을 꽁꽁 싸맸다.

=사람 많은 곳에서 피부를 드러내면 멀미 나서요. 솔직히 복면도 하고 싶음…….=

=앗. 아아…….=

여자들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한숨에 아영은 쾌활하게 웃으며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다들 같이 놀러 나가는 건 처음이라서 좋아요! 솔직히 전 평생 혼자 살다가 언젠가 암살 실패하고 목이 뎅겅 잘려서 성문에 내걸리는 엔딩을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언니하고 오빠가 생겨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말 그대로 천국이죠.=

=그, 그랬구나.=

이런 불편한 주제는 돌려버리는 게 덜 불편하다.

어색하게 웃던 여자들은 적당한 주제 거리를 찾다가 평범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행거를 기웃거리는 노르스리넨에게 시선을 모았다.

저거다.

=어… 그럼 노를이만 남았나? 이리와, 옷 갈아입자!=

「뭐야? 어?」

=이건 어떠니? 무릎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귀엽지 않아?=

=이렇게 긴 머리카락에는 반바지보단 하늘거리는 치마가 더 잘 어울리지 않나요?=

=아, 언니들. 이거 어깨만 살짝 드러난 것도 좋네요.=

=날개 때문에 등 트임이 필요해서 그건 안돼.=

주제를 돌리기 위해서였지만, 노르스리넨의 몸에 옷을 대보던 여자들은 금방 옷 갈이 입히기에 푹 빠져버렸다.

워낙 신체 비율도 좋고 얼굴도, 몸도 귀여워서 어떤 옷을 입혀도 다 잘 어울렸던 것.

조금 큰 옷은 큰 옷대로 소매나 바짓단을 접어 귀엽고 약간 큰 치마도 하늘거리는 긴치마가 되어 정말 잘 어울린다.

괜히 기웃거리다 옷 갈아입히는 인형이 된 노르스리넨은 여자들의 터치에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끝나지 않는 옷 갈아입히기에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날개를 파닥파닥하며 짜증을 냈다.

「그만해~! 갑갑해! 싫어!」

=어어 잠깐! 야, 옷 찢어져!=

=노를아. 마지막으로 이거, 이거만 입어봐. 예쁘게 차려입으면 도령이 귀엽다고 막 쓰다듬으면서 칭찬해줄지도 몰라!

「……친구가?」

노르스리넨의 시선이 안느가 든 한 벌의 원피스로 향했다.

어깨에 주름 볼륨이 들어간 백색-녹색의 투톤 레이스 버튼 원피스. 치맛단에 주름이 들어가 학생 같은 느낌을 주는 귀여운 옷이다.

=응응. 와~ 예쁘다 예뻐~. 그치?=

=맞아요. 너무 귀여워요!=

=입으면 오빠도 반드시 귀여워해 줄 거야!=

「…….」

안느의 선동에 다른 여자들도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치자 노르스리넨은 뚱한 표정으로 긴가민가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이거나 저거나 뭔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거 한 가지는 그래도 안다.

친구의 여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

「물어볼래! 환인~!」

꾸물거리며 옷을 입은 노르스리넨은 콰당-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고, 안느와 유르파는 속으로 키득거리다가 깜짝 놀라 황급히 뒤따라 나갔다.

그럴 리 없지만, 혹시라도 환인이 애매하게 반응했다간 옷 갈아입히기 인형이 됐던 노르스리넨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쏟아질 테니까.

“무슨 일이지.”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쫓아가는 그 잠깐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실에서 노르스리넨은 환인의 허벅지 위에 얌전히 앉아 만족스런 얼굴로 쓰다듬을 받고 있었으니까.

=별거 아냐. 그보다 노를이 너무 귀엽지 않아? 옷이 전부 잘 어울려서 뭘 입힐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니까~.=

“그래. 너도 보이시한 느낌이 좋다고 생각한다. 유르파의 작품입니까.”

=응. 아가씨들이 입을 옷은 내가 다 만들고 있으니까!=

“어쩐지 디자인이 익숙하다 했습니다. 유르파도 프리티 컨셉이 잘 어울려서 보기 좋군요”

두 여자는 부드럽게 웃음 짓는 환인의 칭찬에 뭔가 가슴이 간질거려 헤실헤실 웃었다.

그냥 평범한 감상일 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몽글거리는 걸까.

그 후 환인은 화장으로 미모를 좀 더 키운 여자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와 흥겨운 음악 소리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에 스며들었다.

일반 시민들은 물론이고 병사나 간혹 눈에 띄는 기사들도 환인 일행을 알아보지 못했다.

여자들은 아우라 은폐 목걸이를 찼고 환인과 백려강은 겉모습을 바꾸어주는 마도구로 모습을 일부 바꾸었기 때문.

간혹 평범한 금발의 하프 플뢰 남자가 여섯 명의 초절 미녀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에 일부 남자들의 시샘이 날아들긴 했지만, 그뿐이었기에 일행은 부담 없이 대광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관광을 즐겼다.

=와, 제단이 정말 웅장하네요. 내일 저기서 승령천제를 지내는 거죠?=

=응. 이번 제는 테이아무스 섭정님이 닐비나 폐하와 함께 지내신다고 알려져서 더 공들여 꾸몄대.=

지름이 500m에 달하는 대광장의 한쪽에 설치된 제단의 사이즈는 좌우 폭이 20m에 높이도 10m에 가까워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저 크기만 한 게 아니라 3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팔라툼에 전해오는 신화적 이야기가 각양각색의 조각과 문양으로 새겨져 있다.

그런 제단 주변에는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자주색 융단이 넓게 깔려있고 제단의 뒤쪽은 병풍처럼 복잡한 무늬의 패널이 산을 형상화하듯 가득 채우고 있어 보기만 해도 웅장하다는 느낌.

그런 대광장 주변에는 각종 분야의 천막이나 노점이 차려져 있어 관광객들이나 유흥객을 불러들이고 있고 넓은 광장 곳곳에는 악사 조합에서 나온 듯한 조합원들이 각자 음악을 키고 춤을 추며 사람들과 어울린다.

어울리는 사람들도 평범한 복장이 아니다.

광장을 돌아다니는 인파 중 절반은 회백색 로브를 입고 있었고 일부는 영혼으로 분장한 것인지 온몸을 회백색으로 물들인 채 돌아다니고 있다.

할로윈처럼 승령천제라는 일종의 축제를 즐기기 위한 모습이라고 할까.

아이들도 얼굴에 회색 물감을 바른 채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니 주의하지 않고 걸어 다니면 다른 사람들과 부딪칠 만큼 광장에 인파가 가득하다.

환인도 여자친구들과 축제 거리를 돌아다니며 축제를 즐겼다.

으레 사람이 모이면 하는 생각은 다 비슷하다고 환인은 생각했다.

길거리 서커스 공연이나 차력 쇼, 화려한 술법 시연을 구경하고 소규모 극장, 노천극장에서 하는 히스론드 건국 신화와 팔라툼의 영웅들 같은 연극도 관람했다.

그러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음식점이 있으면 찾아가 먹거리를 즐겼고, 각종 뽑기 같은 놀이도 해보고 공방에서 연 노점에서 장신구 같은 것도 구경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비록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 껴서 우중충하지만 다들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즐겁게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는 중.

몇 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재미있게 놀던 일행은 한 노천 주점에서 자리를 잡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백려강은 환인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핥아 먹다가 몇 명의 플라비우스족이 느긋하게 날아서 건너편의 2층 카페테라스 가게에 날아드는 걸 발견하고 아영에게 물었다.

=아영. 저런 가게는 조인족이나 플라비우스족을 대상으로만 장사하는 거야? 1층은 벽으로 다 막혀있잖아.=

=응? 어, 맞아. 저기처럼 1층을 아예 벽으로 막아놓은 가게는 보통 종족 차별주의자들이 하는 가게야. 날 수 없는 열등종은 오지도 말라 이거지.=

=와아…….=

지구였다면 SNS로 두들겨 맞고 폐업 절차를 밟아도 이상하지 않은 가게지만, 주위 사람들도 그렇고 환인의 여자들도 신기할 거 없다는 얼굴로 이 가게의 음식은 무엇이 맛있을지 2차 토론을 심각하게 나누고 있었다.

환인에게 자신의 몫인 매콤한 꼬치구이를 먹여준 이실리테가 아영을 보며 물었다.

=1층은 다 막혀있는데 음식 재료나 술 같은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날아서 가져가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저런 곳 같은 경우는 뒷문을 통해서 받죠. 주인장이 심각한 차별주의자라면 아예 기중기 같은 걸로 끌어올리는 일도 있지만, 애초에 저런 가게는 얼마 안 돼요. 대부분은 이 가게처럼 1층 따로 2층 따로 영업하거든요.=

=저렇게 손님도 차별하는 이유가 뭘까. 난 이해가 잘 안 돼.=

=이슬이 아가씨도 참. 좋고 싫고에 이유가 있겠니? 보통은 자기감정을 우선시해서 눈밖에 벗어나는 걸 멸시하는 게 차별인데 말이야.=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마친 유르파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여자들은 으음, 하고 수긍했다.

흡정족으로 태어나 인생 대부분을 차별 속에서 살아왔던 유르파가 저리 말하니 설득력이 굉장했다.

그러든 말든 환인의 옆자리에서 두 손에 고기 꼬치를 들고 야무지게 먹던 노르스리넨이 막대기에 남은 고기 찌꺼기와 양념까지 쪽쪽 빨아먹은 뒤 환인의 손을 잡으며 조른다.

「나 매운 고기 꼬치 또 먹고 싶어~.」

“방금 주문했으니 기다리면 나올 거다.”

「응!」

맛있는게 또 나온다는 게 기쁜지 헤실헤실 웃는 노르스리넨의 표정에 안느가 쿡쿡 웃으며 물었다.

=노를이 너 매운 거랑 고기 진짜 좋아한다?=

「고기 좋아! 매운 것도 좋아! 둘이 합쳐진 거 진짜 좋아!」

=도령보다 더?=

「친구는 친구인데.」

안느는 바보야? 하는 표정에 발끈한 안느가 노르스리넨을 덮쳤다.

서로 뒤엉키며 꺄르륵 웃고 장난치는 중 아영이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제법 진지한 얼굴로 발언했다.

=소신발언합니다. 저는 노르스리넨의 애칭으로 노를이 안 어울린다고 봐요.=

=엥?=

=그게, 발음하기 어렵잖아요? 저도 플뢰지만 메리아놀어 특유의 로틱은 진짜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 난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안느가 시무룩해지자 당황한 것은 아영이었다.

=앗아아니 그게 아니고요! 비상이가 저렇게 예뻐진데다 좋은 이름도 받았으니까 이 기회에 더 귀엽고 예쁘고 잘 어울리는 애칭을 지어주는 게 어떨까 해서 말해본 거예요! 노를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욧!=

=아냐. 난 아영이 말에 동감해. 안느가 좋아해서 넘어갔지만, 내가 왜 이슬이가 된 건지 지금도 궁금하거든. 유리 언니의 율은 두 글자를 줄이면 뜻이 되잖아?=

그런 식이라면 백려강은 ‘밸’이 되어야 하고 아영은 ‘앙’이 되어야 하는데 막상 백려강은 려강이라고 부르고 아영은 아영 그대로 이름을 부르지 않나.

이실리테의 의문 제기에 안느를 제외한 여자들도 듣고 보니 그러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안느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면서 항의했다.

=귀엽잖아! 이실이 이실아 이러는 거보다 이슬이가 몇 배는 더 귀여워! 그렇다고 이실리테라고 부르면 또 딱딱하게 느껴지고!=

=저는요?! 아영은 안 딱딱한 거예요?!=

=네 이름은 줄이기에 너무 짧아. 려강이는…… 앞으로 벨이라고 부를까? 벨 귀여운데.=

=힝.=

=아하하하….=

“원래 애칭이나 별명은 자기가 귀엽다고 생각해서 붙이기 마련이지.”

환인의 지원사격에 안느의 얼굴이 밝아진다. 아니, 그의 지원을 등에 업게 되어 우쭐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는다.

“그래도 노를은 나도 발음하기 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음. 그런가? 노를이는 괜찮아보였…….=

「노를 시러. 비상이 더 나아.」

=…….=

축 어깨를 늘어트리는 안느의 모습에 여자들이 킥킥 웃으며 그녀의 어깨와 등을 다독여준다.

=그럼 도령이 애칭을 지어줘.=

어디 얼마나 잘 지어주나 한 번 보겠다는 내심이 훤히 보이는 얼굴. 환인은 주문한 차가운 맥주를 받으며 몇 가지 안을 입에 담았다.

“보통은 이름에서 몇 글자를 따오는 게 평범하지. 르리라거나 리네, 노른 같이 말이다. 이중 노른은 운명의 여신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해서 중의적으로도 좋지 않을까.”

=오. 셋 다 좋은데요? 특히 르리는 로틱이 중복해서 오히려 귀여워진 느낌이에요.=

=그러네. 셋 다 좋은데 난 노른이 제일 좋은 거 같아. 운명의 여신님……은 자기네 쪽 이야기지?=

“예.”

=윽, 졌다……. 나도 노른이 좋은 거 같아. 나랑 율이 언니는 노른, 아영이는 르리에 한 표. 이슬이랑 벨은 어떤 게 좋아?=

=나는…….=

=저도…….=

르리에라니, 발음을 까딱 잘못했다간 외신을 부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환인은 제단이 세워진 광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저쪽이 웅성거리며 인파가 모이는 느낌인데…… 마침 지나가는 여급을 부른 환인은 동화 1닢을 팁으로 주며 저기에서 뭘 하는지 물어본다.

=아~ 몇 시간 뒤면 전야제가 시작하잖아요. 천왕궁에서 나온 궁성악단이 연습을 겸해서 몇 시간 일찍 나와 곡을 연주하는 거예요.=

음악인가. 궁성의 음악대라면 제법 들을만 할 것 같은데…….

궁성악단의 연주에 관심이 생겼지만, 제단 앞에서 연주하는 듯하니 음악을 들으려면 저 인파들 속에서 들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환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노른 세 표에 르리 두 표, 리네 한 표. 다수결로 노르스리넨의 애칭은 노른으로 결정!=

유르파, 안느, 백려강은 노른, 이실리테와 아영은 르리, 잠에서 깬 환연은 리네를 선택했기에 노르스리넨의 애칭은 자연스럽게 노른으로 결정되었다.

자신의 애칭을 결정하는 자리임에도 노른은 고기 요리에만 지대한 관심을 내비치며 집중 공략 중이었고, 여자들도 웃고 떠들며 계속 나오는 음식과 술을 마시면서 즐거워한다.

축제 거리는 대충 둘러봐서 즐길 만큼 즐겼다. 이제부터는 술과 고기의 회식 시간.

여자들은 술과 안주, 요리를 계속해서 시키며 음주와 가무를 즐겼고 노천 주점의 고용 가수인지 어여쁜 목소리의 음유시인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며 흥을 돋워나간다.

그러다 제단 쪽에서 관현악단의 음악 같은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음유시인은 그런 음악에 편승해 더더욱 분위기를 흥겹게 달구었다.

환인도 조용히 이 순간을 즐겼다.

파티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영에게 옛 모험 이야기도 들려주고 자신의 이야기도 하면서 서로 돌아가듯 화장실을 핑계로, 주문을 핑계로 자리를 비우며 환인의 옆자리를 돌아가며 앉는 여자친구들.

그렇게 자리를 바꾸는 여자친구들의 옆구리나 밑가슴을 더듬고 만지며 때때로 지구에서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여자친구들과 추억의 한때를 가지던 도중.

오싹—

환인은 등 어림이 오싹거리는 감각에 조금씩 올라오던 술기운이 삽시간에 흩어져 사라지는 걸 느꼈다.

“……?”

아직 해가 지기에는 먼 시간이라 사위가 환하다. 그런데 갑자기 웬 오한이란 말인가.

난간 쪽으로 상체를 약간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집에서 나올 때보다 밀도가 조금 더 짙어진 구름 탓에 그 너머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눈에 안 들어온다.

“…….”

방금의 오한에서 위협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저 무언가 굉장한 것이, 대단한 것이 찾아올 때의 기대감처럼 살짝살짝 오싹거렸을 뿐.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에 잠겨있던 환인은 어느샌가 맞은편으로 건너간 노른의 이야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

「화닌. 기분 나쁜 게 산 쪽에서 막 우글거려.」

“기분 나쁜 거라니. 이형종인가.”

「응. 이형종!」

노른의 외침에 여자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진지해진다.

거기에 결정타를 먹인 건 환연의 이야기였다.

「환인. 밀려오는 구름바다 미궁 쪽의 기사단이 분주한데 다급한 느낌이 커…… 앗! 미궁 역류인가 봐! 괴물이 막 쏟아져나오고 있어!」

=……!=

=…?!=

환인과 여자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하나였다.

미궁에서 가지고 나온 중핵의 예비 육체.

예비 중핵을 빼앗긴 미궁이 폭주를 일으켜 가진 에너지를 모두 쏟아 이형종을 형성, 밖으로 내보내고 있는 걸 테지.

“돌아간다.”

환인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들도 망설임 없이 따라 일어섰을 때 윙윙 위이잉— 위이잉- 위이이이잉— 날카로우면서도 사람의 불안 심리를 자극하는 사이렌 소리가 도시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도우러 가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 같은 것은 꺼내지 않았다. 환인도 도우러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도 없이 자신들이 나설 일이 아니다. 팔라툼 왕실의 대처를 보는 게 먼저다.

왕실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때 나서서 도와주면 된다. 대처를 못해 큰 피해를 내기 시작하면 그때 움직여도 된다.

그때까지 자신들은 집에서 조용히 준비하며 기다릴 뿐.

웅성거리는 손님들로 조금씩 혼란스러워져 가는 노점에서 먹은 걸 계산하고 나온 환인이 여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광장을 가로지를 때였다.

쿠쿵—!

발밑으로 묵직한 진동이 한차례 스치고 지나가자마자 미궁이 있는 쪽에서 마치 검은 구름 같은 새카만 새 떼가 하늘로 급격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숫자만 보자면 족히 수천 마리.

동시에 사이렌 소리가 더욱 강해졌고 사방 곳곳에서 플라비우스족 기사와 병사들이 날아오른다.

서주산과 동주산 쪽에서도 군대가 날아오는 것이 보이니 마치 전쟁이 터진 것 같은 긴장감이 폭발적으로 대광장을 뒤덮었다.

모험가나 탐험가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곤 아공간 주머니나 허리춤에 메고 있던 무기를 꺼내 쥐었고 대광장의 시민들은 흔들리는 눈으로 입을 틀어막거나 하며 침착하게 대피한다.

조금이라도 충격이 가해지면 파열해 끊어질 듯한 얇디얇은 군중의 이성.

환인이 그걸 느끼며 소름 돋는 흥분을 억누르고 있을 때 또다시 오한이 그를 뒤덮었다.

이번에는 등줄기에서 잠깐 일어났다 사라진 오한이 아니라 온몸을 뒤덮는 수준이었다.

걷다 말고 우뚝 선 환인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 순간 영혼의 눈이 저절로 발동하며 황금빛 광채가 폭발하듯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기겁하고 경악한 것은 그의 여자들이었다.

=이슬아!=

=응! 아영은 거기 서! 유리 언니와 려강은 안으로 들어가요!=

갑작스레 벌어진 현상에 이실리테, 안느, 아영은 환인을 중심으로 삼각형 편대를 잡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기를 꺼내 쥔다.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놀라 그녀들에게서 멀어지는 가운데…….

=저, 저저저저게 뭐야?!=

=하늘이, 하늘이 갈라진다!!=

=으아악!!=

회색의 구름 한켠이 크게 벌어지며 그 너머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검회색 구름이 보이니 마치 짙은 구름 한복판에 수백 미터의 사람 눈과 같은 형상이 만들어졌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기절하기 딱 좋은 괴현상.

…꾸우우우우우우웅——

때마침 울려 퍼진 거룩하고도 신성한 고래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면 대광장에는 틀림없이 대혼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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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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