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48화 (648/813)

649 승령천제

아드우리 공작을 집 안으로 들인 환인은 평소 모이는 거실이 아니라 팔라툼 귀족들이 찾아오면 맞이하던 곳으로 데려갔다.

이유라면 거실에 짐이 널려있어 엉망이기도 했고, 백려강이 가부좌를 튼 채 위상력 순환을 하고 있어 자릴 옮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드우리 공작을 안내하는 그 잠깐 사이, 환인은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드우리 공작도 나름 안 들키게 신경 써서 집안의 기척을 가늠했지만 귀신처럼 예리한 환인의 감각을 피해갈 순 없었던 거다.

‘아드네빌라를 확인하기 위해 온 건가. 이유라면 하늘의 괴현상 때문일 확률이 높겠군. 그렇다면 팔라툼 왕실과도 관련이 없단 말인데.’

혼절자가 발생한 이유를 찾던 기사로 인해 아드네빌라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알류겔의 마룡이 있단 보고가 올라갔을 터인데 군대나 기사단을 끌고 온 게 아니라 공작이자 팔라툼의 방어 한 축을 담당하는 무장 장관이 직접, 그것도 단출한 일행으로 찾아왔다는 것은…….

=섭정께서 하신 부탁이 그렇게나 부담이셨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섭정께서 제사장을 맡아달란 부탁은 굉장히 난처하고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대성녀님께 성제라는 과분한 호칭을 받았으나 저는 고작 스무 해 남짓 살아온 애송이일 뿐이니까요.”

=허어. 연륜이란 그저 실수를 줄여주는 것일 뿐, 인물의 대성에 나이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오만…….=

……이들도 하늘의 구름 상태를 이변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원흉으로 아드네빌라를 지목했지만 확실치는 않으니 공작이 직접 납시어 상황을 알아보려 하는 거겠지. 만약 정말 용과 관련되어있다면 팔라툼에서 그나마 용과 독대할 수 있는 인물은 공작일 테니까.

닐비나는 아직 어리고 테이아무스는 섭정이자 닐비나의 모친, 천공성에서 움직이기 곤란하니 그가 적임인 거다.

환인은 응접실에서 아드우리 공작을 접대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제가 니오네브레스인이라면 공작의 말씀대로일 수 있겠지요.”

=……그러셨군. 차원 방랑자로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듯하오. 테이아무스 섭정의 뜻도 이해가 가지만, 성제의 마음도 십분 공감이 되는구려.=

“이해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섭정께서 악의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란 점을 부디 알아주셨으면 고맙겠소이다.=

“물론입니다. 개의치 마시길.”

환인의 이야기에 공작은 약간 난감한 미소를 띄며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이것 참……. 성제께는 줄곧 신세만 지고 민폐만 끼치니 염치가 없어서 원.=

그렇게 말한 아드우리 공작은 부드럽게 말을 이어가며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래서라고 할까, 무안하기도 하고 낯부끄럽기도 하여 개인적으로 성제께 드릴 자그마한 선물을 마련하였소. 부디 받아주시면 고맙겠소.=

“그 정도로 신경 쓰실 것까지 없으십니다만…….”

=아아. 정말 자그맣고 사소한 것이니 부담 없이 받아주시길 부탁드리오.=

공작이 꺼낸 것은 무려 환인의 주먹 절반만 한 크기의 7급 백색 위상석이었다.

단순 가격만으로도 1000금화를 훌쩍 넘기는 크기.

더군다나 백색은 성술 쪽 관련이라 체력 관련의 적색, 위상력 관련의 청색만큼이나 고가로 취급되는 물건이다.

그걸 본 환인은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대가 없는 선물이란 없는 법입니다. 과분한 선물이라 받기가 저어되는군요.”

아— 짧고 낮은 탄성을 흘린 공작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의 이중 미궁과 돌입 지역, 구름바다의 성분 및 위험요소 확인, 내부 지도 정보의 제공에 대한 내력 무장 장관의 정보이용료로 받아주시길 바라오. 천주산의 두 미궁은 본인의 관할이기도 하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식이지만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런 명분이 중요한 법이다.

환인은 정보료라는 말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백색 7급 위상석이 든 안경집 정도 크기의 보석 상자를 챙겼다.

1000금화는 순수 위상석 그 자체의 가격.

백색 위상석 특유의 속성을 생각한다면 7급 백색 위상석을 정화 마도구로 가공할 경우, 근처에서는 10분도 생존할 수 없는 독늪에서도 멀쩡히 지낼 수 있는 마도구가 된다.

유르파가 그러한 마도구로 가공한다면 몇 배는 더 비싸져 주도의 대저택 가격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백색 위상석을 본 순간 환인은 이걸 어떻게 활용할지 정했다.

‘백려강의 정신 침해 면역 목걸이를 만들어야겠군.’

이만한 선물을 받았으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환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아드우리 공작의 가려운 부분을 살짝 긁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하늘에 괴현상이 벌어지고 있던데 공작께서도 아시는지.”

=…성제도 알고 계시었소?=

“마침 물의 신수라 불리기도 하는 알류겔의 해왕이 절 찾아왔었습니다. 그녀에게 저 현상에 대하여 여쭈어봤지만, 자신과는 관련 없다는 말만 하시더군요.”

의도적으로 공작의 질문을 무시하고 할 말만 끝내자 공작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진다.

=으음. 혹시 그분께서는 지금……?=

“안타깝게도 약간의 유흥을 즐기시고는 거처로 돌아가셨습니다.”

=……….=

약간의 정보 제공에 공작의 머리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느라 머리에 김이 오를 지경인 게 눈에 훤히 보인다.

환인은 이실리테가 가져다준 차를 조용히 마시며 그의 생각 정리가 끝나길 기다려주었다.

생각 정리가 끝나면 다시 질문이 몇 가지 튀어나올 테지만, 값비싼 정보료를 받았으니 그 정도는 서비스로 해드리지.

찻잔을 절반 정도 비웠을 때 예상대로 아드우리 공작이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혹시 이 사태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시는지, 성제의 고견을 들려주실 수 있으시오?=

공작의 초조한 기색을 느끼며 자신이 떠올린 몇 가지 가설을 떠올렸지만, 그 무엇도 60%의 가능성을 넘지 못한다.

아무리 환인이라 해도 제반 지식과 전조가 없는 현상에 대해서는 추리를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아드우리 공작의 신분을 생각하면 자신이 한 말로 히스론드 왕실이 움직일 방향성이 정해질 수 있다. 그렇게 정해진 방향성이 완전히 틀렸다면? 헛다리를 짚은 게 된다면?

화약고에 불을 놓는 셈이다.

“영도의 기록실에서 다소 공부를 하였으나 그 깊이가 부족한 터라…… 미안합니다.”

환인이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도 노회한 정치꾼답게 알아차린 공작은 자기 이름과 가문명을 대면서 약속했다.

=약조하겠소. 성제께서 들려준 고견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피해는 이 아드우리 홀디스가 책임지지. 그러니 확률이 낮다 하여도 부디, 고견을 들려주시기 바라오.=

수준 차이라는 말이 있다.

초등생, 중학생이 가진 사과의 지식과 고학력자 전문 연구원이 가진 사과의 지식이 같을 수 없는 법.

현재 저 하늘의 현상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없다.

하늘의 변고를 알아차리고 그에 관해 용에게 질문까지 하는 성제의 대응을 생각해본다면 그의 사견을 최소 참조는 할 수 있을 터.

“……밀려오는 구름바다의 미궁은 알려지기로 6급입니다. 그만한 미궁이 폭주를 일으키려 한다면 기상에 여파를 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만큼 광대한 범위의 기상이변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지요.”

=으음…….=

“다른 쪽으로는…… 알류겔의 해왕은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이 점을 비틀어 생각해본다면 그녀가 하지 않았단 뜻은 곧 다른 자가 일으키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자는 환인도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생각했다.

아니, 중핵을 빼앗기고 생산 기지나 다름없는 지하 미궁을 유린당한 심핵이 폭주를 일으킬 가능성은 제법 크다고 본다. 하지만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뒤덮는 구름의 광란을 6급 미궁이 일으킬 수 있을까?

이 때문에 환인은 후자의 가능성을 더 높이 쳤다. 아드네빌라의 의미심장한 말투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아드우리 공작도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만난 천왕궁 수석 장로의 대화를 떠올리며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물었다.

=혹시 짐작 가는 일은……?=

조심스레 묻는 말에서 누굴 지칭하는지 느낀 환인은 불쾌한 내색도 없이 평이하게 대답했다.

“제 원한 관계를 뜻하시는 거라면 짐작 가는 것은 없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다면 메리아놀 쪽이지만, 거기가 이제 와 이만한 대규모 기상 변화를 동원해 팔라툼을 날려버릴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 대답에 신중한 표정으로 한참을 침묵한 아드우리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따라 일어나는 환인에게 살짝 묵례했다.

=고견에 감사드리겠소. 본 왕실도 누군가의 악의가 발현된 것이 아닐까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 확신할 수 없었는데, 성제의 조언으로 이제는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이는 기분이군.=

“이만한 대규모 기상 변화라면 그에 마땅한 인물 혹은 대규모 의식이 따라붙을 터이니, 그 점에 집중한다면 수사 범위의 축소는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팔라툼에는 뛰어난 술법단이 있으니까요.”

=말씀대로요. 고맙소.=

마음이 조급해져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예를 차린 공작은 집을 나와 보좌관과 함께 곧장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여섯 장의 날개가 발생시키는 일종의 중력교란장이 그의 몸을 빠르게 부상시켜 천공성으로 띄워 올린다.

아드우리 공작은 천공성으로 향하며 마차와 마부들을 복귀시키고 뒤따라붙는 보좌관에게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용이 아니라면 대관절 누가 이런 괴이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환인을 찾기 전, 아드우리 공작도 천왕궁 수석 장로를 먼저 찾아 역대 승령천제 때 이런 괴현상이 벌어졌던 적이 있는지 알아보았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승령천제만이 아니라 어느 때에도 벌어졌던 적이 없었다는 대답만 받았다.

유일하게 흡사한 것을 꼽자면 작년 알류겔 대홍수 때 정도일까. 이 때문에 용이 성제의 집을 방문했단 소식을 듣고 일부러 그가 직접 움직인 것이었다.

보좌관이 조심스레 의견을 꺼내 든다.

=혹시 성제님이 무의식중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요? 성제님도 유일 직업자입니다. 그 아우라의 위압감을 생각해본다면 용왕과도 맞먹는 무위를 지니셨을 테니까…….=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마룡은 아무하고나 교류를 나누지 않는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용왕과 친분을 맺은 분들은 역사서에 남을 정도의 대영웅들. 성제님이 모종의 집단과 원한 관계를 맺었다면 많은 부분이 설명이 된다고 봅니다.=

아드우리는 보좌관들의 이야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타일렀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따지자면 성제는 가능한 쪽이겠지. 하지만 그가 그러한 일을 숨겨 얻는 이득이 무엇이겠나. 그의 귀에 들어가면 히스론드가 위태로워질 말은 꺼내지 말도록.=

=옛!=

=넷.=

그러나 아드우리도 일말의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버리지 못했다. 사태가 그만큼 공교로웠기 때문이다.

미궁에서 그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일은 어떠한가. 용이 갑자기 그를 찾은 이유는?

그가 출현한 뒤부터 걸어온 행적에는 일반인이 평생을 가도 겪기 힘든 사건 사고가 수없이 들러 붙어있다.

그만한 사람이라면 어딘가에서 국가적 집단과 반목하게 되었다 봐도 무방하지 않나.

성으로 돌아간 공작은 테이아무스 섭정을 비롯해 각 부서 장관을 소환하여 해당 안건을 심각하게 토론하였으나, 마땅한 해결책과 답은 내지 못하였고 시간은 무심히도 흘러 승령천제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톡. 토독.

“…….”

정원에서 영혼의 눈으로 하늘 위 구름, 그 너머의 기상 상태를 확인하던 환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톡톡 잡아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꺄르르~!」

「꺄하하하하…!」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사방팔방 도망가는 하급 정령들.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니 도망갔던 정령들이 어느 순간 돌아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목덜미나 손목과 같이 피부가 드러난 부분을 콕콕 찌르며 장난을 친다.

「꺄아하하하~!」

「꺅꺅!」

자신이 고개를 턴 순간 또다시 도망치는 작은 정령들.

환인은 정령들이 건드리고 잡아당기느라 헝클어진 뒷머리를 정돈하며 안느에게 다가갔다.

정령들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고 해도 바람이 건드리는 정도의 세기밖에 안 된다. 불쾌하다기보다는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는 데서 오는 귀찮음이 더 크다.

비상에서 노르스리넨이 된 순백의 원피스 소녀를 다리 사이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주던 안느가 그런 그를 보며 웃었다.

=도령도 이제 정령력이 제법 쌓이나보네? 하급 뿐이긴 해도 정령들이 먼저 장난을 걸 정도니까.=

“그래. 하지만 평범하게 쌓은 정령력은 아니다.”

=응? 2년 동안 그렇게 정령들하고 교류했잖아. 그 정도면 충분히 생길 정도인데?=

“그래. 하지만 0에는 아무리 숫자를 곱해도 0밖에 되지 않지. 릴라이스 말대로 난 정령력이 전무하니 애초에 일반적인 교류로는 정령력을 쌓을 수 없는 체질인 거다.”

=그럼 어떻게…… 아! 설마?=

그녀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읽은 환인은 노르스리넨에게 시선을 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환연 덕분이지. 그녀와 살을 섞으면 영기 대신 정령력이 흘러들어온다. 첫날과 이튿날은 긴가민가했는데 이제는 확실해졌다.”

처음 환연과 몸을 섞은 다음 날인 어제 오전, 환연과 한 번 더 동침했고 오늘도 아침을 먹은 뒤 환연을 찾아가 살려달라고 질색하는 그녀를 강제로 덮쳤다.

그 결과 중급 정령을 끌어들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본능으로 살아가는 하급 정령 정도는 충분히 교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령력이 쌓인 것을 확인한 것이다.

와~ 감탄하던 안느가 조금 짓궂게 웃는다.

=도령은 성제가 아니라 성제로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아.=

홀리 인스펙터가 아니라 섹스킹인가. 환인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안느도 키득거리며 나름 진지하게 묻는다.

=도령의 능력은 진짜 신기하네. 여자랑 섹스하는 거로 영혼술이 성장하고 반인반령이랑 섹스했다고 몸에 정령력이 쌓이고……. 노를이하고 하면 원소의 힘이 쌓이는 거 아냐?=

「나? 내가 뭐?」

그림책을 보며 또박또박 읽고 있던 노르스리넨이 똘망똘망한 얼굴을 들어 환인과 안느를 번갈아 쳐다본다.

“네가 좀 더 큰 뒤가 기대된다는 이야기다.”

「이히히.」

복잡하고 어려운 건 모르겠고 그저 환인이 쓰다듬어주는 게 기분 좋은 듯 여우처럼 히히 웃으며 날개를 파닥거리는 노르스리넨.

환인은 그녀가 다시 그림책에 집중하는 걸 보다가 안느에게 말했다.

“원소의 힘까지는 아니겠지. 영혼의 눈으로 보아도 평범한 영기 외에는 느껴지지 않으니까. 정령력이 가능한 것은 환연이 태생의 특별함을 가져서 그런 거라고 본다.”

=그런가? 아무튼 도령이 그렇게 계속 정령력을 쌓으면 릴라이스가 도령하고 계약하자고 먼저 다가올 수도 있겠네.=

“정령력이 언제까지 쌓이는지가 중요하겠지. 나 개인적으로는 상급 정령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만 쌓여도 만족할 듯한데.”

그간 영혼술의 훈련, 여자친구들의 영기 흡수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그도 느끼고 있었다. 여자친구들과 교접으로 얻을 수 있는 영기의 상한에 거의 도달했다고 말이다.

거인숲 미궁에서 실루엣 메어를 사냥하기 시작할 당시 영혼 구슬 보유 개수는 151개였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약 70일가량이 흐른 지금은 4개가 더 늘어 155개가 되었다.

70일 동안 여자친구들을 안은 횟수만 모두 합쳐 300번이 넘고 잊혀진 옛 도시 미궁과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을 탐사하며 사냥한 이형종의 숫자도 수백 마리.

그럼에도 영혼 구슬 한도는 4개밖에 늘지 않았다.

성불행을 중단했지만, 아드네빌라의 경고를 보자면 영혼 조각의 보유는 이제 거의 한계인 상황이다.

이럼에도 영혼 구슬 보유량이 늘지 않는다면 한계에 도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겠나.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아드네빌라는 자신을 8급이라 하였고 보유 영혼 구슬 숫자는 대성녀인 닌실의 3배에 달한다. 유일 직업자의 한계에 도달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환인이 상급 정령과 친분을 쌓을 정도의 정령력을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보유량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는 중급 정령 구슬을 상급 정령 구슬로 바꾸기만 하면 더는 늘지 않는 구슬 개수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하급 정령은 신체 능력을 2배 정도 올려주고 중급 정령은 대략 3배에서 4배 사이. 상급 정령이 5~6배를 늘려준다 하면 7급 파티가 아니라 8급 파티라고 불러도 충분할 정도니 말이다.

「안느. 이거 어떻게 읽어?」

=아~ 그건…….=

환인은 언니 동생처럼 한데 붙어있는 안느와 노르스리넨을 바라보다 다시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짙은 회백색의 구름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이 보인다. 도시 사람들도 그게 보일 테지만, 승령천제 전야제인 오늘 도시는 거의 축제 분위기다.

도심지 외곽에 자리 잡은 이 집에까지 흥겨운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니까.

잠시 축제의 소음을 배경음 삼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환인은 고개를 내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여자들이 모여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이실리테는 100g에 10은화나 하는 고가의 향신료를 조심스럽게 손질 중이고 유르파는 마도기 설계도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백려강은 용인체로 가부좌를 튼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위상력을 온몸에 순환시키고 있고 아영은 하얀 늑대들이 보내온 사업 계획서 및 내부 개편 보고서를 붙잡고 골머리를 싸맨 채 씨름 중이다.

‘환연은…….’

아침 식후 1시간 동안 성적인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인지 거실 탁자로 옮겨놓은 침대 바구니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기분 좋은 낮잠이 아니라 지쳐버린 체력을 회복하기 위한 필사의 수면이다.

조금 찌푸려진 눈썹과 간혹 끙끙거리는 소리에 그녀의 어깨를 잡고 원기를 살짝 흘려 넣어주자 표정이 한결 편해진다.

환인이 그러고 있자 유르파가 작도를 잠시 멈추고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기. 환연이 놀랍지 않니?=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가 돋보기를 가져와 침대 바구니 안을 들여다본다.

=이렇게 보면 그냥 귀여운 요정 아가씨잖아. 근데 키가 비슷해지니까 완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거든. 자긴 안 그랬어?=

“그 말이었군요. 확실히 사이즈가 비슷해지니 동향 출신처럼 보였습니다.”

=아? 조금 이국적인 외모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러네.=

이미 몇 번 동향 사람을 본 적 있는 유르파다. 비자룩스에서 임세희, 흐라스린드에서 이름 모를 중국인 여자와 죽어 영혼만 남은 영주의 내연녀.

=후우~.=

유르파가 돋보기로 곤히 잠든 환연을 들여다보던 중 위상력 순환 일주천을 끝냈는지 백려강이 가부좌를 풀고 허벅지를 살살 누르기 시작한다.

다리에 쥐가 난 모양새다.

그걸 본 아영이 한숨을 내쉬며 서류뭉치를 내려놓고 백려강에게 다가갔다.

=야. 그렇게 주물러서 언제 근육을 풀려고 그래? 마사지는 힘을 줘서 이렇게! 이렇게! 꽉꽉 주물러줘야 풀리지!=

=하읏!? 꺄학! 아영아 잠깐…… 하아앙…!=

아영의 격렬한 손짓에 민감해진 허벅지를 주물러진 백려강은 낯뜨거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뭐야. 무슨 신음이야?=

「환인환인~. 동화책 읽어줘~.」

거기에 타이밍을 맞춰 안느와 노르스리넨도 집 안으로 들어왔고 백려강과 아영이 만들어내는 소음에 환연도 잠에서 깨어나 침대 바구니를 빠져나온다.

「나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왜 밖이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자는 건 위험하잖니. 고양이라던가 쥐가 침입할 수도 있고. 그래서 내가 바구니 들고 나왔어.=

「……으휴.」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모두 모인 모습에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모였고 급한 일도 없어 보이니 외출하는 건 어떻지. 승령천제의 전야제 축제 구경도 할 겸.”

=축제? 난 찬성!=

=나도!=

축제 구경이라는 말에 안느와 유르파가 가장 먼저 찬성을 표시하더니 이실리테와 백려강, 아영에 노르스리넨까지 붙잡아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갈아입을 옷이 어쩌고 외출복이 저쩌고 떠드는 걸 보면 이것도 일종의 데이트로 인식한 모양새.

거실에 환인과 단둘이 남게 된 환연은 그를 힐끔 쳐다보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지를 척 내밀었다.

「환인. 앞으로 하루에 30분만 해. 1시간씩 하니까 내가 못 버티겠어.」

“30분은 너무 적은데. 네 자궁에서 흡수하는 게 정령력으로 판명 난 이상 정령력을 다소 확보하고 싶으니 말이다.”

「나 지금도 관절이 삐걱거리는 기분이거든……? 며칠 더 이러면 몸살 나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인상을 마구마구 쓰고 있지만, 그녀에게서는 예전처럼 말세적인 시니컬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피로 때문에 조금 까칠해진 느낌뿐.

좋은 변화지만 대놓고 웃으면 더더욱 아르릉 거릴 뿐이라 환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넌 운동 부족이 심각하다. 매일같이 날아다니며 드는 거라곤 옷과 음식뿐이니 근력이 죄다 퇴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테지.”

「……지금 섹스로 근육을 키우자는 뜻이야?」

환연이 기막혀했지만, 환인은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 단련도 결국 반복 동작과 전기 자극의 결과물이다. 섹스로 살을 빼는 것도 가능한 마당에 근육 단련이라고 어려울 게 뭐가 있나.”

그의 단호한 표정에서 뜻을 꺾기란 불가능함을 깨달은 체념한 얼굴로 기운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섹스 트레이닝이라니 세상 진짜……. 내가 괴물을 깨워버린 건가……?」

물론 좋기야 하다. 그가 자신의 몸을 열정적으로 탐할때면 요정도 정령도 아닌 괴물 환연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여자처럼 느껴졌으니까. 덤으로 핑크색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황홀한 기분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지금도 허리랑 고관절이 욱신 지끈거리고 거기도 화끈거리는데 아예 트레이닝을 한다고? 날 죽일 셈?

환연은 힘없이 몸을 띄워 여자들이 사라진 방으로 향했다.

몸 상태가 이래서야 내일도 시달리면 진짜 몸살 확정이다. 살아남으려면 아영에게 치유술을 받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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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누군가에는 숨막히고 누군가에게는 꿀맛같은 설 명절이 끝났습니다!

내일부터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네요!

현재 글쟁이는 열심히 AI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고작 4개월? 남짓 지났을 뿐인데 발전이 새삼 어마어마하네요...

1화 1짤은 불가능해도 특정 장면 삽화는 충분히 가능해보이니 쪼오오금만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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