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 승령천제
* * * *
단조롭지만 실내의 규모와 한쪽 벽 전체를 고가의 유리창으로 만들어 역설적으로 웅장해 보이는 집무실.
눈처럼 하얀 날개 세 쌍의 여성, 테이아무스 섭정은 책상 위에 한가득 쌓인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앞에 선 남자에게 물었다.
=천주산 상공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니요?=
=음. 업무에 치여 잠시 고개를 돌릴 틈도 없으셨나 보군. 뒤를 보시겠소?=
확실히 며칠간 쏟아지는 일에 정신없이 지내긴 했지만…….
테이아무스 섭정은 소식을 가져온 아드우리 공작을 잠시 응시하다가 의자를 뒤로 돌렸다.
저 남자가 그 정도도 분간하지 못할 리 없다. 심상치 않다면 정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져…….
=……저건.=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해 눈을 휘둥그레 떴던 테이아무스 섭정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곤 다시 눈을 끔뻑였다.
그런다고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왜 자신을 못 믿냐는 듯이 짙은 회색 구름이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사납고 난폭하게 파도친다.
천주산 산등성이에 걸쳐진 평범한 흰구름. 그리고 거기서 십여 킬로미터 상공에 다시금 형성되고 있는 짙은 회색의 난층운.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실제 바다보다 더 빨리 뒤틀리듯 일렁이는 구름이 하늘 끝에서 끝까지 뒤덮은 광경은 하늘과 가까운 그녀 종족에게 더욱 큰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테이아무스는 서류도 내팽개친채 유리벽 가까이 붙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야미오코의 층운 아공간은 아니겠지요?=
=아니오. 마력은 커녕 위상력도 검출되지 않고 있소. 그래서 섭정께 직접 알리러 찾아온 것이고.=
어지간한 구름보다 훨씬 높이 솟은 천주산 꼭대기의 천공성이다.
비조차도 대단히 높게 형성된 난층운이 아니면 뿌려지지 않는 장소라 때때로 구름이 이중으로 형성되는 일이 있지만, 저건 맹세코 그녀도 한 평생 본 적 없는 현상, 아니 구름이었다.
=…혹시 하늘신님께서 노하신 것은…….=
=……노하실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답하고 싶으나 모르겠군. 지금으로서는 성제와 무언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오.=
=그러고 보니 성제님께서 기거하시는 거처 주변에 갑작스러운 혼절자가 다수 발생하였다고 했지요.=
아드우리는 나이치고는 젊어 보이는 중년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을 띄웠다.
=그게 그……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알류겔의 마룡 때문이라 하더군.=
=네?=
갑자기 1만 리는 떨어진 대호수의 용을 왜 언급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성제가 그 마룡과 마찰을 빚었고 마룡이 발산한 용투기에 시민들이 혼절했다는 뜻이오. 저 하늘의 변고도 하늘신님의 노여움보다 마룡의 분노가 초래한 현상이라는 게 더 설득력이 크지 않소?=
=네……?=
잠깐 데이터 입력이 지연되어 버벅대던 테이아무스 섭정은 아드우리 공작처럼 짙은 피로감을 아리따운 얼굴에 띄웠다.
왜 갑자기 용과 성제가 쌍으로 난리를 피우는 걸까. 혹시 승령천제의 제사장을 집요하게 부탁해서 무력시위를 하시는 걸까?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용이다.
미궁산 용은 용이 아니라 도마뱀으로 불러야 하지만, 지상에서 살아가는 생명체 중 이름에 용龍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생물은 최소 진수眞獸, 어지간하면 신수神獸다.
기사단과 군대를 동원해야 승리를 점칠 수 있는 존재와 갈등을 빚으면 필연적으로 여정이 피로해질 텐데…….
=말이 안 된다고 봐요. 그 성제님이 그런 초월적인 존재와 부딪치려 할까요? 그 성제님이시라면 그런 식으로 간을 보듯 기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짧고 굵게 전투를 벌이셨겠죠. 그리고 팔라툼은 지금쯤 성제님과 마룡의 전투로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구요.=
=그쪽도 틀린 말은 아니군.=
=우선은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부터 알아보아야 할듯하니 천제를 준비 중인 이들을 제외한 모든 술법단 인원을 동원해 조사하여봅시다. 아드우리 공작께서는 기사단을 움직여 팔라툼에 불온분자가 관광객들 틈에 섞여 들어온 것은 아닌지 알아봐 주세요.=
=알았소.=
승령천제를 불과 이틀 앞둔 시각. 테이아무스 섭정과 아드우리 공작은 이해 못 할 현상에 근심 가득한 얼굴로 저 하늘의 괴현상을 응시했다.
* * * *
“아드네빌라. 괜찮습니까.”
《……응? 아… 괜찮다. 그래.》
깔끔 단정하던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개량 한복 차림으로 거실의 소파에 늘어져 있는 아드네빌라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신을 반쯤 놓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훨씬 더 슬림해 몸매를 드러내는 한복이지만 자세가 비스듬해 한쪽의 갸름한 쇄골이 노출된 데다 뽀얀 윗가슴도 일부 보인다.
그럼에도 옷차림을 정돈하려들지 않는 아드네빌라. 심장마비가 일어날 정도의 과도한 쾌감에 인지 능력과 상황 판단 능력이 반 토막 난 듯한 모습이다.
‘어쩌면 부활 후유증일지도 모르겠군.’
환인은 멍하니 앉아있는 아드네빌라를 잠시 바라보다 이실리테에게 머리를 맑게 해주는 차를 한 잔 부탁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신의 허리에 매달려 질질 끌려다니는 비상…… 아니, 노르스리넨을 돌아보았다.
환인의 시선에 녹색 머리칼의 천사 같은 미소녀가 날개를 팔랑거리며 배시시 웃는다.
「왜애?」
“그렇게 매달려있으면 움직이기 힘들지 않나.”
「안 힘든데!」
“나는 힘드니 떨어져라.”
「싫은데~.」
자신의 옆구리에 얼굴을 묻고 꺄르륵 웃는 노르스리넨의 행동에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같은 사람 형태가 된 게 재밌어 죽겠는지 아침에 일어나 자신과 마주친 그때부터 계속 매달려있다.
아무리 환인이라도 성가셔서 뭐라고 하려던 찰나,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쿵- 가벼우면서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게 그의 허리에 부딪혀왔다.
“……뭐 하는 거지.”
한숨을 참으며 묻자 노르스리넨처럼 그의 허리에 매달려 얼굴을 비비던 아영이 배시시 웃었다.
=작은 아영이도 오빠의 관심이 필요해요!=
장난인가 싶었지만, 진심을 장난으로 포장한 것처럼 라벤더색 눈동자 속에 긴장감이 엿보인다.
자신을 밀어내면 어떡하나. 귀찮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걱정과 불안이 묻어나는 눈동자.
환인은 잠깐 턱을 매만졌다.
‘불안감인가. 거인숲 미궁을 나오고 이제 50일 정도 흘렀으니…….’
환인은 잠자리에서 여자친구들과 주로 교감을 나눈다. 평상시 무뚝뚝한 태도를 잠자리에서 보충하거나 벌충하는 식이다.
그런데 아영은 수목화 문제 탓에 벌써 한 달째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일상적인 회화는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삭막한 환인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아영과는 업무 관련 이야기만 나누는 중.
다른 여자들은 짧지 않은 인연이라 며칠 잠자리를 가지지 않아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아영은 파티에 들어오게 된 계기도 계기이니만큼 환인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든 것이다.
환인은 그녀의 라벤더색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스킨십도 수목화에 영향을 준다고 안느가 알려주더군. 널 위해서 거리를 두고 있는 거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유르파가 방안을 강구해낼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 말한 환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아영의 입을 벌리게 해 혀를 살짝 잡아당겼다.
분홍색의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미끌미끌한 혓바닥이 베에- 하고 따라 나온다.
환인은 그녀의 혀뿌리에 새겨진 복종의 노예문양을 살짝 검지로 문질렀고, 아영은 자궁이 큥— 하는 느낌에 혀를 쏙 집어넣고는 얼굴을 붉혔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하지만 너는 몸도, 마음도 내 것이다. 네가 죽어도 놓아줄 생각은 없으니 포기하고 얌전히 따라오도록.”
그리고는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힘껏 안아주었다.
숨이 막히다 못해 갈비뼈에 금이 갈 정도의 으스러질 듯한 포옹.
아영은 흐윽- 콜록, 기침과 함께 고통과 정신적 절정을 동시에 느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네헷……!=
강렬한 포옹에 걱정과 불안은 태양 아래 그림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황. 아영은 그의 품에서 풀려나 후들거리며 유르파의 방으로 사라졌다.
저 정도면 한동안은 괜찮겠지.
‘여자가 많으니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나는군.’
여자친구들은 한국에서 몇 번 사귀었던 여자와 비교하면 거의 없다시피 할 만큼 손이 가지 않는 여자들이다.
하지만 그런 여자라도 환연을 포함해 여섯이나 되니 기억해두고 신경 써야 할 점이 생겨나고 있다.
그럼에도 싫다거나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나도 변했다는 거겠지.’
고개를 내려 노르스리넨을 바라보자 자신의 시선에 조그마한 고개가 갸우뚱한다.
몸은 섹스해도 될만큼 컸지만 사고방식이 아직 쿠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방금 상황을 눈앞에서 보고도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이해했다면 밤마다 난리를 쳐댔겠지.’
환인이 후 웃으며 머리를 토닥거려주니 노르스리넨은 고양이처럼 웃다가 폴짝 뛰어 그의 등에 업혔다.
이게 허리에 매달린 것보다 편하다고 생각하며 등에 노르스리넨을 업고서 수첩을 꺼낸 환인은 향후 일정을 천천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먼저 일행 전원이 7급에 가까워졌다. 백려강도 용인체의 스펙 제한이 풀리고 나면 정신 침해에 강해질 테고 본격적으로 미궁 공략에 참여할 수 있겠지.
그동안은 이런저런 사건들이 쉼 없이 이어져 그다지 미궁을 탐사하지 않았다.
심핵을 이용한 미궁 장악도 시험해보고 싶으니…….
‘테이아무스 섭정에게 히스론드의 미궁 위치 자료를 얻어내야겠군.’
영도 기록실에서 봐두었던 몇 가지 미궁을 수첩에 기록하며 요 며칠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새로운 계획의 뼈대를 구상해나간다.
‘음.’
하얀 늑대들의 조직 개편이 끝난 뒤에는 아영을 중간 관리로 임명해놓는 게 좋겠지.
파티를 위해, 자신을 위해 할 일을 부여하면 불안이 어느 정도 해소될 거다. 전前 가족의 관리이니 심적 안정도 될 테고.
그 뒤 전 세계의 미궁 조사를 지시하고, 이엘카타가 엘위드리스 성에 입성하면 하얀 늑대들을 일부 보내서 연락망을 구축해놓으면 메리아놀 내부 정보를 그럭저럭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시라넬이 엘위드리스와 함께 움직인다면 쓸모와 용도가 늘어날 텐데 자신과 접점이 있는 자들이 한 도시에 모여들면 필연적으로 이목이 끌릴 것이다.
‘그건 약간 곤란하지만, 쓸모를 생각해보면…….’
메리아놀이 아직 암살 습격 건에 대한 보상안을 알려오지 않고 있으니 그것과 연동해서 엘위드리스 가문을 중심으로 해 땅신 교단의 르아웬 추기경을 통해 땅신 교단과 손을 잡는다면 그럭저럭 메리아놀 내부에 자신의 눈과 귀를 박아놓을 수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 메리아놀에서 할만한 사업을 노트북의 자료를 검색해서 엘위드리스의 수익을 늘리고 영도의 배경에 자신의 명성을 더하면 메리아놀 안에 자신에게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을 파벌 하나를 만들 수 있겠지.
‘그때를 생각하면 테이아무스 섭정에게 빚을 하나 지워두었다가 그때 공조를 요청하는 것이 좋겠군. 더불어 프라버와 헬루멘에…….’
…….
빠르게 계획의 기본 골자를 만들어나가던 환인은 잠시 생각했다가 줄을 죽죽 그었다.
「왜 쓰다가 지워?》
“귀찮을 것 같아서.”
사실은 내키지 않아서다.
자신의 명성과 팔라툼 왕실, 영도의 협조를 더 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다.
만약 메리아놀 내부에 존재하는 모종의 집단이 이런 자신의 행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엘위드리스에 테러라도 가한다면, 그 테러에 이엘카타나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죽으면 자신이 메리아놀 내부에서 날뛸 매우 합법적인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아이까지 밴 여자를 제물로 바치자고?
무엇보다 저쪽도 머저리가 아니다. 이쪽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당연히 온갖 방해 공작에 음해와 암살 시도를 더 해올지 모르지.
필연적으로 더욱 음습해질 테고, 바깥에서는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하게 될 거다. 과정에 들이는 노력에 비하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
“…….”
아니……. 이엘카타와 뱃속의 아이가 그렇게 소비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뭐 적당한 핑계도 있다.
시하=사이지나 백치령처럼 정치판 속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거기서 살아온 존재도 아니고 집에서 쫓겨난 뒤 우여곡절 끝에 영도에 정착했던 처녀다.
정치판에서 융통성 있게 잘할지도 의문이고 괜히 노력을 들였다가 계획이 어그러져 여자친구들이 지명수배되고 죽거나 다치는 상황이 닥치면 차분함을 유지할 자신도 없다.
답은 하나뿐.
“강해져야겠군.”
「친구는 지금도 강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야지. 혼자서도 국가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그건 어느 정도로 강한 거야?」
노르스리넨의 순진한 질문에 환인은 짤막하게 “지금의 세 배 정도일까.”라고 대답했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대답에 환인의 등에 업혀있던 미소녀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환인은 작게 웃으며 거실의 소파 하나를 차지한 채 실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는 천사의 육체로 향했다.
그 계획, 자신이 지구로 귀환하기까지 대략 2년으로 잡은 시간 동안 저 육체를 이용하려고 했지만, 그냥 평범하게 사용해야겠다.
‘적당히 아르겐테아 정찰병의 영혼을 빙의시켜 자리를 비웠을 때 유르파의 호위로 쓰는 게 낫겠지.’
=아드네빌라 님. 이것 좀 마셔보세요. 천주산 꼭대기에서만 자란다는 설청화 꽃으로 내린 차예요. 머리가 조금 맑아질 거예요.=
환인이 생각을 마무리 지었을 무렵 이실리테가 은쟁반에 찻잔을 들고 다가와 아직도 멍하니 있는 아드네빌라에게 내밀었다.
《……고맙다.》
=우리 다녀왔어~!=
=다녀왔습니다.=
삐삐~
백청룡이 차를 받아들자 현관문이 열리며 시장을 다녀온 안느와 백려강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에 방안에서 유르파와 아영도 밖으로 나오며 거실이 점차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다녀왔…… 세상에, 아공간 주머니는 어쩌고 두 손에 그렇게 들고 있는 거니?=
=언니랑 이슬이가 부탁한 게 부피가 좀 커서 주머니가 금방 다 차더라. 아영아, 와서 좀 받아.=
=옙! ……오, 고기다!=
=승령천제 전야제가 내일이라고 밖에 사람들 엄청 많더라~. 진짜 발 디딜 틈이 없더라니까.=
=팔라툼에서는 전야제도 하나 보네?=
=물어보니까 한다더라. 성 레이엔 광장에 각 교단 성직자들하고 기사, 병사들이 잔뜩 나와서 엄청 웅장하고 화려한 제단을 조립하고 있었고 영혼사님들도 거기 몇 분 계셨어.=
=그것 때문에 깜짝 놀랄 만큼 사람들이 몰렸어요. 병사님들도 사람들을 통제하느라 무척 바빠 보였고요.=
=아무튼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네. 율이 언니가 부탁한 거 이거야. 이건 아영이 네가 말한 거.=
=고마워~.=
=감삼다! 이제 독화살도 만들 수 있겠네.=
=안느. 내가 부탁한 건? 다 사 왔어?=
=야, 우리가 그거 찾느라고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몰라! 진짜 가는 데마다 사람들이 꽉꽉 차서 물건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리더라니까? 그것도 조금만 늦었으면 못 찾았을 거야!=
=다행이다. 이게 없으면 오늘 저녁 주메뉴 못 만들었을 텐데.=
수레 두 대 분량의 짐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떠드는 여자들.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에 자그마한 요정이 힘없이 날아오며 투정을 부린다.
「으~ 시끄러워……. 안느 목소리 너무 커…….」
=저저 잠꾸러기 요정 같으니. 그러게 누가 이 시간까지 자래? 해가 중천이야, 중천!=
「누가 자고 싶어서 잔줄 알아? 다 저 인간 때문이라고!」
=누가 보면 여기서 너만 그거 경험해본 줄 알겠다. 우리도 다 경험해봤거든.=
「어쩌라는 거야……. 아, 민트초콜렛이네? 이건 내꺼.」
「과자? 과자도 있어?! 나도 과자!!」
「꺅!」
와글와글 시끌시끌
조금 전까지 조용해서 생각에 잠기기 좋던 분위기가 다 거짓말 같다.
노르스리넨까지 짐꾸러미에 합세해서 소란을 키우는 가운데 환인은 실루를 안아 들고 등을 쓰다듬으며 그 장면을 구경했다.
하나같이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친구들이 웃고 떠들며 쇼핑한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보기 좋다.
‘역시 더러운 정치판에 발을 들이밀기보다는…….’
느긋하게 여자친구들과 여행하는 것이 좋지.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니오네브레스에 왔으니 힘이 곧 정의라는 대전제를 따르기 위해 힘을 키우겠다고 다시금 속으로 다짐하는 환인이다.
그때 막대형 초콜릿을 가지고 몰래 환인에게 접근한 안느가 배시시 웃는다.
=도령. 축제라고 초콜릿 판매대가 있길래 사봤는데 도령은 초콜릿 좋아해?=
그러면서 한쪽을 물고 입술을 살짝 내밀며 찡긋 윙크하는 안느.
먹고 싶으면 와서 먹으라는 여우 짓에 환인은 작게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받치고 막대 초콜릿의 남은 부분을 먹는 동시에 입술을 살짝 훔쳤다.
“좋군.”
고급 다크 초콜릿의 쓴맛에 안느의 보드랍고 따스한 입술 감촉이 퍽 만족스럽다.
살짝 장난칠 요량이었는데 설마 키스까지 해줄 줄이야. 속으로 꺅, 비명을 지른 안느는 조금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에흠, 헛기침하고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맞다. 도령, 오늘 하늘 봤어?=
“하늘 말인가.”
=응. 아까 구름이 걷힐 때 잠깐 봤거든. 구름 위에 또 구름이 끼어있더라. 뭔가 폭풍전야처럼 구름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던데 되게 신기했어.=
“…….”
고개를 돌려 아드네빌라를 돌아본다.
마침 아드네빌라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실리테가 내어준 차가 효과를 발휘한 듯 죽은 동태눈깔 같던 눈에 이지理知가 돌아와 있었다.
《왜 이몸을 보는 것이냐.》
“당신이 한 것은 아닙니까.”
《도대체 이몸을 어떻게 보고 있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지……. 여긴 하늘신의 영역이다. 들어오는 것도 조심해야 하거늘 힘을 쓴다? 경 칠 소릴랑 말아라.》
그러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아! 짧게 비명을 지르며 가녀린 체구를 휘청였다.
인상을 쓰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굳은 것이, 밑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상당해 보이는 자세다.
=저…… 치료술을 펼쳐드림까?=
《되었다. 인간의 성술 따위는 이몸에게 통하지 않아. 백려강은 이리 와라.》
=넷.=
《움직이지 마라.》
꼬리뼈 위쪽을 톡톡 두드리며 백려강을 호출한 아드네빌라는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검지로 그녀의 눈썹 중앙의 인당혈과 콧날 좌우의 비통혈, 이어 인중혈을 쿡쿡쿡 찔렀다.
=……!=
움찔하면서 눈꼬리를 파르르 떠는 백려강을 이어서 옆으로 돌려세운 다음 명치 부근의 전중혈과 반대쪽 등의 영대혈을 엄지 관절로 찍다시피 짓눌렀다.
백려강은 삽시간에 머리와 몸 양쪽에서 뜨겁고 차가운 열기가 훅— 올라오는 고통에 신음조차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입을 열었다간 내장을 죄다 토해낼 것 같은 느낌.
그런 그녀의 몸에서 짙은 푸른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니 여자들이 놀라서 다가오려다 아드네빌라의 손짓에 멈칫 멈추어선다.
《용인체에 가해놓은 제약을 70% 풀었으니 이후 성취는 백려강, 너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그에 합당한 자질이라면 70%를 넘어 100%까지도 도달할 것이나 그러지 못하다면 오히려 퇴보할 것이니.》
우두둑— 관절이 억지로 펴지는 소리와 함께 노파처럼 구부정하던 자세를 똑바로 편 아드네빌라는 심기가 나쁜 고양이처럼 용 꼬리를 좌우로 붕붕- 한차례 휘두르곤 환인에게 눈썹 끝을 치켜세웠다.
《이번에는 이몸이 잘못하였다 인정했으니 네가 한 짓은 넘어가도록 하마. 그러나 다음에 또 이런 요행을 바란다면 크게 혼날 줄 알 거라.》
“이번에는 잘못했다고 여자친구들에게 사과했으니 이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만약 다음에 또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땐 한 마리 암퇘지가 될 것을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하여튼 한 마디도 안 지지. 못된 인간 같으니.》
매우 아니꼽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아드네빌라의 꼬리는 강아지의 그것처럼 붕붕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꼬리를 멈춰 세운 아드네빌라는 조금 발개진 얼굴로 흥, 콧방귀를 끼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려강 아가씨, 몸은 어떠니?=
=아드네빌라 님이 또 이상한 제약을 걸어놓은 거 아냐?=
눈 깜짝할 사이에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여자들은 아드네빌라보다 아직도 주저앉아 허덕이고 있는 백려강부터 살폈다.
그만큼 그녀의 모습은 마녀에게 저주받은 처녀 같은 모습이었던 것.
=몸이, 몸이 뜨거워요. 반대로 머리는 차갑고…… 이상한 기분이에요…….=
“…….”
=제약을 푼 반동 같은 건가? 율이 언니, 어떻게 생각해?=
=나보다 자기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자기, 영혼의 눈으로 려강 아가씨 좀 봐줘.=
유르파의 말대로 영혼의 눈에 보이는 백려강의 용인체는 말 그대로 내적인 변화를 크게 겪는 중이었다.
이전에는 위상력이 작은 개울물처럼 그 몸을 흐르고 있었다면, 지금은 한해 농사를 책임질 정도의 강줄기가 되어 흐르는 데다 그 지류가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강맥의 굵기는 이실리테나 안느와 비교할 게 못 되지만, 세밀하고 촘촘한 지류는 그녀들과 버금가는 수준.
저만한 기운을 위상력이나 마력도 아닌 기술로 틀어막고 있었다니. 환인은 신술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 커지는 걸 느끼며 백려강에게 그 점을 알려주었다.
“그러니 위상력부터 다스리는 것이 좋을 거다. 세맥은 시간이 흐를수록 막히는 법이고 세맥이 막힌다는 것은 기량과 능력의 감소로 이어진다는 뜻이니까.”
=네, 네헷……!=
백려강이 땀을 뻘뻘 흘리며 위상력을 몸 안에 널리 퍼트리는 한편 순환시키기 시작하고, 환인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민트색 초콜릿으로 영양 보급 중인 환연을 불러 창가에 섰다.
방금 아드네빌라가 보여주었던 반응이 조금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하늘에 뭔가 느껴지거나 보이는 게 있나.”
「바람 정령이 엄청 바쁜 척하고 있어. 물의 정령도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움직이고 있고.」
“……폭풍우의 징조라는 거냐.”
「아니? 폭풍우가 올 때 정령은 신난다는 듯이 미쳐 날뛰어. 그거랑은 좀 달라. 냠냠.」
“…….”
폭풍우나 비구름이 아니라면 천왕궁에서 무언가를 하는 중인 건가.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안느를 불렀다.
“안느. 거리에 돌아다니던 기사나 병사들의 표정에 수상하거나 긴장된 기색 같은 것은 없었나.”
=응? 음……. 사람들이 너무 몰리니까 좀 짜증 난다는 기색은 있었지만, 딱히 수상쩍은 기색은 없었어.=
그렇다면 뭘까. 이중 구조의 구름이라는 게 괜히 신경 쓰이는데.
쾅쾅쾅-
[계십니까—]
“…….”
방문객의 소리에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실리테와 아영을 제지하고 백려강을 지키라 한 뒤 자신이 직접 현관으로 나갔다.
노크 소리에도 작위별 차이가 있으며 상황과 방문자의 차이가 있다.
이 시간에 현관문을 저리 강하게 두드린다는 것은 귀족 본인이 직접 찾아왔으며 그 지위는 최소 후작급이라는 이야기.
미궁 관련 건으로 찾아온 건가 생각하며 문을 연 환인은 뜻밖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오, 성제. 그간 강녕하시었소?=
히스론드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 권력자 중 1인, 아드우리 내력 무장 장관의 인사에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공작이 직접 찾아오다니, 미궁 관련 건으로 한 방문이 아니다. 이중 미궁의 발견과 중핵의 확보가 큰일이긴 하지만 3대 공작 중 한 명이 나설만한 일은 아니니까.
거기다 옷차림도 장관 제복 차림이다. 사적인 일로 방문한 게 아니라는 뜻.
그 말은…….
환인은 공교로운 타이밍에 찾아온 아드우리 공작을 향해 목례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드우리 공작께서 편의를 봐주신 덕에 유익한 미궁 탐사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 드리겠습니다.”
=다행이로군. 성제께서 구름바다 미궁을 방문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들었소. 축하드리지.=
예상대로군.
미궁과 관련된 건을 소소한 근황 인사로 넘겨버리는 모습에 환인은 문에서 살짝 비켜서며 보좌관을 뒤에 세운 아드우리 공작을 집 안으로 초대했다.
“고맙습니다. 밖에서 이러실 게 아니라 안으로 드시지요.”
=초대에 감사드리오. 로드란만 따라오고 나머진 밖에서 대기하도록.=
=옛.=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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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인공아 빨리빨리 가자. 다음 주인공 캐스팅 끝나간다...
???: 누구 맘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