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44화 (644/813)

645 그런 게 아니야!

환인은 드러나지 않게 자책했다.

처음부터 이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필멸자에서 벗어나 불멸자가 된 용이 설마 이렇게 유치하게 굴까 싶어 넘어갔던 것이 잘못이다.

여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보며 환인은 후우,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가 아드네빌라에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아드네빌라. 이번 일은 정말로 실망했습니다.”

《…….》

“용인체는 돌려드리겠습니다. 천사의 육체에 문제가 있어 오래 쓰지 못한다 해도 당신의 분신체는 사양하겠습니다.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우리 앞…….”

《자, 잠깐잠깐! 이봐, 내가 잘못했다니까! 성급하게 그러지 말고 일단 좀 진정하자고! 이실리테, 그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노를 부탁하지. 평소보다 진하게 샷 두 번 추가해서.》

=네? 네…….=

《백려강 너는 가서 며칠 전에 먹었던 그 쿠키 있지? 그걸 가져와라. 나머지는 알던 앉아, 앉아.》

=네에…….=

조금 얼떨떨해하는 이실리테와 백려강이 주방으로 사라지고 아드네빌라는 손수 돌아다니며 환인을 3인용 소파에 앉힌 뒤 그의 양옆에 안느와 유르파를 앉히고 바짝 붙여놓는다.

=저, 저는요?=

《넌 아무 데나 앉아.》

=힝.=

이실리테는 혹시 급한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놓은 청정수와 커피 가루로 진하게 내린 아메리카노를 환인의 앞에 내려놓고 백려강도 보존 주머니에 보관해놓았던 쿠키를 꺼내와 차 탁자에 세팅한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아드네빌라가 후, 자신을 길가의 뱀처럼 쳐다보는 환인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먼저 이것부터 말하지. 그간 너와 네 여자의 훈련은 이몸의 안배에 직접적인 영향만 미치지 않았을 뿐, 안배가 발동하면 그 모든 것이 상승을 이뤄 훈련한 것 이상의 뛰어난 결과를 내게 될 거라는 걸 말해두겠다.》

환인의 성격은 제멋대로 이리저리 튄다고 생각하기 쉽다.

돈도 싫고 명예도 싫고 선물도 싫다. 하지만 돈을 좋아하고 명예도 좋아하고 선물도 좋아한다. 남들과 부대끼는 걸 싫어하는 거 같으면서도 남들과 잘 어울리고 남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거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남들 앞에 잘 나서기도 한다.

만사를 귀찮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마어마하게 귀찮은 일에 스스로 들어가기도 하는 인간.

이것만 보면 상종하기 싫은 대표적인 부류다.

그렇지만 의외로 하나의 대명제로 보자면 제대로 일관되어있다.

지구 귀환. 그 목표를 방해하거나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에 대한 적의.

“…….”

무슨 말을 하는지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느낌으로 변한 환인의 태도에 속으로 안도한 아드네빌라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계속해서 말했다.

《무엇보다 너희가 노획한 저 천사의 육체, 저건 어마어마한 결함품이다. 절대 오래 가지 않아.》

“……강제로 성장을 촉진한 여파겠지요.”

《역시 짐작하고 있었나? 맞아. 심핵력, 영력, 마력. 이 세 가지 기운을 섞어 강제로 성장을 촉진시킨 것이 천사의 육체지.》

성장이 가속화된 육체는 필시 균형이 망가진 곳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불균형에서 발생한 균열은 얼마 안 가 육체를 집어삼킬 거다.

《네가 심핵력을 계속 주입해준다면 심핵과 중핵의 관계처럼 어느 정도 육체가 유지되겠지만, 그 기간은 길어봤자 5년이 한계다.》

“환경의 요소가 다르기 때문이겠군요. 미궁 내 심핵의 곁에서 존재할 것을 바탕으로 만든 게 중핵의 육신일 테니까.”

감정은 내려놓고 진지해진 환인의 모습에 아드네빌라가 살짝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넌 그런 판단력을 가지고도 이몸의 안배를 눈치 못 챈 건가?》

환인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지는 모습에 으흠! 헛기침을 크게 한 아드네빌라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말이 5년이지, 백려강이 저 육체에 오래 있을수록 고통에 힘겨워할 거다. 심핵력은 육신의 유지만 해줄 뿐, 붕괴하는 육체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불화합은 막지 못할 테니까. 5년에 가까워질수록 육신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도 1년 365일 쭉.》

=그런…….=

=음…….=

《너희도 느꼈을 텐데? 아름다운 육체지만 미묘하게 거슬림이 있지 않던가?》

백려강이 빙의해있는 천사 육체를 바라보던 여자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아드네빌라는 이때다 하고 환인을 곁눈질하며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내놓았다.

《무엇보다 너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용인체를 반납할 경우 백려강의 영혼 파장과 맞으면서도 반발 작용이 없는 몸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생전 습관이라는 것들 들어봤겠지? 수십 년 삶을 살아온 자의 육체에 깃든다는 건 그 몸에 남아있던 버릇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용인체나 천사의 몸 말고 다른 육체에 빙의하면 려강이가 원치 않는 버릇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있던 유르파의 대답에 아드네빌라는 그거라며 손가락질했다.

《사소한 버릇이라면 상관없겠지. 활을 쓸 때 눈을 깜빡인다던가 자세가 구부정하다던가 하는 건 교정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생물을 고문하고 해체하는데 희열을 느끼거나 사람을 죽이는 데만 기쁨을 느끼는 버릇, 그에 준하는 악습관이 배어있다면?》

=…….=

=…….=

《아무런 버릇이 들지 않은 깨끗한 육체는 얻기 어렵다. 그러면서 단점이 없는 육체는 더욱 얻기 어렵고 자질과 성능이 뛰어난 육체는 더더욱 얻기 어렵지.》

그러니까 용인체를 얻은 게 너희들과 백려강에게는 무엇보다 행운이라는 이야기.

여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폐해를 자각하곤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네빌라의 말도 안 되는 간섭에 화가 나 있던 안느도 그런 설득에 넘어가 버렸다.

그만큼 아드네빌라가 한 이야기에서 현실성이 크게 느껴졌던 것.

하지만 환인은 아니었다. 아드네빌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두 번이나 중간에 끊은 데서 그녀가 가장 당면하기 싫은 것이 용인체의 반환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거기에 교묘한 화술까지.

통계의 함정이라고 할까, 표본에서 나타난 소수의 사례를 과장하고 과대평가하며 의도적으로 편향된 정보를 제공해 사고를 원하는 방향으로 틀어놓는 화법이다.

영혼과 파장이 맞는 육체를 구하기 어려울 수야 있겠지.

악질적이고 최악의 버릇과 습관이 새겨진 육체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런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질 수도 있겠지.

그렇다해서 그런 일이 수시로 벌어질 것인가?

“…….”

환인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 부분을 붙잡고 늘어지고 공격하면 아드네빌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붉힐 것이다. 용으로서의 자존심에 변명과 항변은 체면이 상하는 일일 테니까.

그렇게 논파하고 상대적 우위에 서면 잠깐은 속이 시원하고 통쾌하겠지만, 그러한 행동의 대가는 초월자인 신수, 그녀와의 관계 파탄이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성의 표시는 이미 했다.

관련자들에게 솔직한 인정과 사과.

그게 무슨 사과냐고 하겠지만,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전국에 생방송 되는 카메라 앞에서 재벌가 회장이 폐수가 흐르는 굴다리 아래 노숙자한테 무릎 꿇고 고개 숙여 사과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한반도 전체에 몇 날 며칠 비를 내리게 해 망하게 할 수 있는 초월자의 사과란 그런 것이다.

“…….”

환인이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직선적인 아드네빌라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켕기는 게 있는 아드네빌라 또한 찔끔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속내가 훤히 보여서 그렇습니다.”

《…….》

그렇다고 할 말을 참는 것도 환인과 어울리지 않는다.

“선수 쳐서 저에게 사과하고 제 여자친구들에게도 사과하고 일부 희소한 사례를 들먹여 여자친구들을 설득하면 제가 ‘그랬군요. 그러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하고 넘어갈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아?=

=아.=

《…….》

“릴라이스 때도 생각했지만, 아드네빌라는 정말 손이 말보다 먼저 나가는 타입이군요. 일을 저지르기 전에 생각부터 했다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끄응…….》

“아드네빌라가 방금 한 이야기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천사의 육체가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보완할 방법이 정말 없는가 하면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용인체보다 덜하다곤 해도 육체를 얻는 방법도 없지 않을 것이고.”

환인의 차분한 이야기에 안느가 눈을 끔뻑이다 묻는다.

=정말? 그런 방법이 있어?=

“너희가 이걸 생각 못하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미궁 돌파에 따라붙는 일종의 소원력이면 저 천사의 육체에 가해진 패널티를 상쇄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오히려 더 좋은 육체를 얻을 수도 있고.”

《말해두건대 그 방식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먼 길을 돌아가는 거나 진배없다는 말이지.》

“그렇게 길을 돌아가게끔 만든 용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으.》

“상호 간에 믿음은 중요합니다. 그런 믿음을 저버리고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안배라는 말로 포장한 제약을 걸었지 않습니까. 시기를 보자면 흐라스린드 이후 투라드 마을 근처였을 것 같은데, 이후에 비슷한 일을 또 저지르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반박하기 어려운 환인의 논리에 아드네빌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용인체를 반납하고 이몸과 관계도 끊겠다고?》

이거 봐라. 사람이 아닌 사고방식이 여기서도 또 나타난다.

사람이라면 적당한 회유와 협상으로 타협점을 찾을 텐데 이때까지 부족함, 모자람 없이 살아온 홀로 오롯한 존재이다 보니 모 아니면 도식으로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환인이라고 쓸데없이 심력을 낭비하는 우회 길을 좋아할까.

아드네빌라는 사과했고 그런 행동을 한 이유도 설명했다. 환인이도 이 이상 무언가를 요구하기 어렵다는 걸 안다.

하지만 속았다는 데서 오는 앙금이 남아 선택을 갈등하게 만드는 중이다.

환인은 용인체를 아기처럼 품에 안고 있는 백려강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아드네빌라에게 말했다.

“용인체에 걸어놓은 제약과 그걸 푸는 방법을 이야기해주십시오.”

《……내가 걸어놓은 것은 두 가지다.》

조금 뚱해진 그녀의 설명에 여자들이 황당해하는 한숨을 흘린다.

1000일간의 성교와 목숨의 위험이라니.

전자는 거의 매일같이 하는 중이니 시간만 주어지면 해결되겠지만, 후자는 위험 요소를 멀리하고 리스크를 피하는 환인의 성격상 평생토록 풀리지 않을 제약이라는 걸 깨달아서였다.

환인도 눈을 감았다.

목숨의 위험은 인위적인 요소로 발생시킬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1000일의 성교? 매일매일 하더라도 2년하고도 270일이 걸린다는 이야기 아닌가.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앙금은 아드네빌라의 몸뚱이로 풀든 어쩌든, 육신의 사용 여부 판단은 당사자가 해야 할 일.

“백려강. 육체를 써야 하는 건 너이니 네가 선택해라.”

=네, 네?! 제가요…?=

“그래.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가 뒤에서 받쳐주마. 천사의 육체를 선택한다면 미궁을 몇 번이든 돌파해서 그 육체에 걸려있는 패널티를 완화하거나 상쇄되도록 노력할 거다. 용인체를 선택한다면 제약에 관해서는 아드네빌라가 손을 봐주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안배는…….》

“제약.”

《……제약은 의미가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제약을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다. 자격 없고 자질 없는 자가 그 힘을 접했다간 육신이 풍선처럼 터져버릴 수 있으니까. 자질을 만개시키는 것은 너의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입을 다물고 묵묵히 이야기를 들은 백려강은 심사숙고……를 할 것도 없이 결정을 내렸다.

=아드네빌라 님의 용인체를 선택하겠습니다.=

“괜찮겠나. 취미 나쁜 용의 희롱질에 다시 고생할 수도 있다.”

재차 고려를 권하는 환인의 말에 한순간 밝아졌던 아드네빌라의 표정이 뚱해진다.

그런 얼굴에 백려강은 사람 좋은 미소로 대답했다.

=아드네빌라 님 같은 분께서 이번 같은 장난을 또 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날개가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아드네빌라 님 같은 용께서 절 위해 만들어주신 육신이니까, 환인 오라버니와 아드네빌라 님의 기대와 즐거움을 충족시켜드리기 위해 다시 한번 열심히 훈련하겠습니다.=

《말 잘했다.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너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이몸의 계약자가 되는 것도 고려할 터이니 앞으로도 열심히 정진하도록 해라!》

=정말이신가요?!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음음. 최애 배우와 팬 미팅을 하는 스폰서처럼 매우 흡족해하는 아드네빌라.

환인은 그런 아드네빌라를 어두운 눈빛으로 응시하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러면… 아드네빌라, 잠시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음? 어어,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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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글쟁이 상태는 괜찮습니다!(안괜찮음)

그리고 연재는 21일~23일 3일 중 2일을 휴재할지도 모르겠습니당...

일요일 설 당일은 확실히 휴재인데 앞뒤 21일이나 23일은 확답을 못드리겠어요...

이틀전이 할머니 제사였는데 제사 준비하고 절하다가 금간 갈비뼈 부러지는줄;

일단 휴재라고 해놓고 연재할 수 있으면 연재하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담편은 19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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