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3 그런 게 아니야!
퇴로가 꽉 막힌 전장의 기시감을 느끼며 누구에게 결정을 떠넘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자신이 피해 보지 않고 여기서 발을 뺄 수 있을까.
눈앞의 충격적인 상황에 예리카는 머리에서 김이 올라올 정도로 뇌를 혹사했다.
그런 훈련소장의 내심을 짚어낸 환인은 그녀에게 있어 한줄기 구원의 빛이 될 종이 한 뭉치를 꺼내 넘겨주었다.
“이건 우리 나름대로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 대해서 알아낸 정보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지요.”
예리카는 무의식중에 환인이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고, 그 첫 문단을 읽은 순간 속독으로 전문을 확인했다.
혼돈의 카오스처럼 복잡하던 그녀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뭐? 이때까지 섬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안에 또 다른 미궁이 있고, 미궁이 거기서 천사를 양산하는 데다 강화 천사까지 만들어내고 있다고?
게다가, 신경마취구름 속에 미궁의 제어에서 벗어난 고등급 거대 괴물의 존재?
대여섯 장의 지도와 중요 요소를 기재해놓은 종이를 든 예리카의 손이 잘게 떨렸다.
“지도가 다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라면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에 주둔군을 설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 이, 이…… 이건 제가 독단을 내릴 사항이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적어도 무장 장관님, 아니 섭정 각하께 재가를 받아야 할 사안이니 잠시만 시간 주시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우리는 식사를 마친 뒤 집에 돌아가 있을 것이니 연락할 사항이 있다면 그쪽으로 주시길.”
=예, 예.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예리카가 반쯤 혼이 나간 모습으로 환인이 건네준 자료를 들고 식당을 나가자마자 여자들이 작게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도령이 말한 대로 됐네.=
=정말 이 천인체를 받으려 들었을까? 자기한테 나쁜 소리 하면 불이익이 쏟아진다는 걸 그 귀족님도 알고 있는 거 같았잖니.=
환인은 일찍이 훈련소장이라는 자가 예비 중핵의 몸뚱이, 천인체天人體를 받아내려 할 것이라 말했었다.
예비 중핵의 몸뚱이는 연구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개척 단계의 미궁에서 나온 특이하고 특별한 물질이나 소재는 연구를 위해 도시에서 반쯤 강탈하다시피 뺏어간다.
그 점과 여기가 히스론드의 주도임을 생각해보면 자신이 성제라고 해도 저만한 전리품이라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지 식으로 다가올 거라 예측했던 것.
“가만히 뒀다면 나와 척을 지게 되더라도 내부 가이드에 따라 저 몸의 소유권에 대해 무어라 말을 꺼냈을 것이다. 어쨌거나 훈련소장은 팔라툼의 귀족이고 나는 얼마 후에 팔라툼을 떠날 방랑 영혼사일 뿐이니.”
=그건 그렇지.=
환인이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을 돌아다니며 확인한 정보를 그 타이밍에 넘긴 것은 의도한 행동이었다.
그녀가 대답을 회피하고 결정권을 위로 미룰 기회를 일부러 제공한 거다.
일개 훈련소장이라 주어진 방침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그녀보다, 테이아무스 섭정이나 내력 무장 장관인 아드우리 공작이 결정권을 건네받는다면 자신의 기여도 때문이라도 입을 열지 못할 테니까.
자신의 의도대로 결정권을 위쪽으로 떠넘기기 위한 핑계이자 방편으로 자신이 넘긴 정보를 가지고 뛰어나간 예리카를 생각하며 환인은 마지막 남은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이실리테와 비견될 정도로 굽기도, 소스의 맛도, 향기도 완벽한 스테이크다.
「배불러~.」
그렇게 식사를 끝마친 환인은 녹색의 귀여운 원피스를 입고 통통해진 배를 쓸어내리는 비상을 돌아보았다.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어서 매우 만족한 모습.
귀여움이 흘러넘치는 그 모습에 손수건을 꺼내 비상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던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식사를 거의 다 마친 여자친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비상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들 어떻게 보지.”
=비상이라는 이름이 여자아이한테 평범하게 어울리지 않긴 해.=
=쿠에일 때는 잘 어울렸는데 사람 모습으로는 조금…….=
=이실리테 언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자애한테 비상이라는 이름은 조금이 아니라 엄청 안 어울리죠!=
=…….=
=아야얏!=
이실리테에게 옆구리를 꼬집혀 비명을 지르는 아영의 모습에 비상도 재밌어 보인다며 달라붙어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꼬집기 시작한다.
꺅 비명을 지르면서 성투술로 몸을 강화하고는 비상과 투닥거리는 아영.
환인은 신체를 강화한 아영하고도 대등하게 장난치는 비상을 부드러운 얼굴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노르스리넨.”
=응?=
=네?=
“르투나데가 저 녀석에게 지어준 이름이지.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르투나데가 누구더라?
바보야. 비상이 엄마 이름이잖아.
린덴 촌락에서 비상이한테 붙어있던 바람 정령이 해준 이야기잖니.
앗, 이제 기억난다. 도령한테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라서 잊고 있었어.
웅성거렸던 여자들은 이어서 노르스리넨을 몇 번 입에 담아보더니 긍정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노르스리넨…… 정령어가 가미된 북부식 작명법이네요. 지금 비상이랑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뭔가 예스러우면서도 혓바닥에 착 감기는 느낌이야.=
=응응. 너무 예스러워서 오히려 쿠에 모습일 때랑은 안 어울렸는데 지금은 딱 맞춘 것 같은 이름이네.=
여자친구들의 공감에 환인은 아영의 등에 업혀서 장난치며 깔깔 웃는 비상을 불렀다.
태어나서 계속 사람으로 살아온 것처럼 행동이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비상. 앞으로 네 이름은 노르스리넨이다.”
「왜? 난 비상이라는 이름이 좋은데!」
당사자의 부정에 환인은 비상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녹색 바람 정령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어지간히 싫어해서 평소에는 모습을 감추고 있더니, 지금은 모습을 드러낸 채 글썽거리는 눈망울로 애원하듯 손을 모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이름으로 바꿔주면 지금까지 네가 했던 미운 짓 다 잊어줄게!」
얼마나 간절하면 저럴까. 문제는 잊든 기억하든 환인은 딱히 상관없다는 것.
바람 정령의 외침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환인은 비상을 손짓해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장난치느라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듬어주며 물었다.
“비상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좋으냐.”
「응. 친구가 나한테 준 이름이잖아. 난 비상이 좋아.」
“아쉽군. 지금 네 예쁜 모습에는 노르스리넨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우우웅…….」
환인의 이야기에 잠깐 눈을 크게 떴던 비상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 입술도 앵두처럼 모은다.
잠시 그러던 비상은 이윽고 어쩔 수 없지! 하고 밝아진 얼굴로 무릎 위에 올라가 앉으면서 물었다.
「친구는 그 이름이 좋아?」
“그래. 그녀들도 그 이름이 너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했지.”
비상이 그녀들을 돌아보자 다들 엄마 같은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그럼 노르스리넨으로 할게!」
누가 봐도 환인을 위해 개명을 받아들인 모습이라 여자들은 훈훈하고 푸근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어서 벌어진 일에는 엄마의 표정을 짓지 못하고 눈을 날카롭게 떴다.
비상에서 노르스리넨이 된 미소녀가 고양이처럼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뺨에 쪽, 뽀뽀해준 것.
「히히.」
말 그대로 작은 암컷의 모습에 진짜 암컷들의 마음속에서 질투와 위기감이 살짝 피어났다.
팔라툼의 시민들이 알아보지 못하게끔 변장해서 대여한 집으로 돌아가며 환인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복잡한 길거리를 구경했다.
디자인과 무늬 차이는 있지만, 남녀노소 상관없이 다들 회백색 기조의 옷을 입고 얼굴에 웃음이 만발한 모습으로 돌아다닌다.
길에는 파르히스트의 대축제처럼 노점과 좌판이 깔리고 있고 도로를 오가는 교통량은 평소의 2배 정도.
고즈넉한 주택가에도 살짝 들뜬 사람들의 분위기가 느껴질 만큼 도시 전체에 축제 분위기가 만연하다.
펑, 퍼벙- 펑-
머리 위의 자그마한 폭죽음에 고개를 들자 빨갛고 노랗고 초록의 연기가 펑펑 작은 폭음과 함께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희미한 함성.
=와, 폭죽까지 터트리네. 진짜 본격적인걸?=
=프라버에서도 승령천제 개최가 결정되면 이렇게 떠들썩해졌었는데…… 그립네요.=
=섭정님은 애간장이 닳아 없어졌겠다.=
=왜요? 오빠가 제사장 제안을 거절해서요?=
=안 그렇겠니? 처음 나타난 영혼사의 유일 직업자인 성제잖니. 자기가 제사장직을 수락했으면 니오네브레스 초유의 기념비적인 승령천제가 됐을 텐데 여러 가지로 아까울걸.=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어떻게?=
=닐비나 폐하께서 무척 건강해지셨잖아요. 두 분의 건강을 공표해 모두의 의식 속에 폐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분들을 내세울 수도 있다고 봐요.=
=그것도 말 되네.=
축제 분위기가 그녀들의 마음에도 영향을 끼쳤는지 평소보다 살짝 들뜬 모습이다.
오히려 비상이 의젓하게 환인의 손을 잡고 걷고 있을 정도.
환인도 딱히 들뜨는 감상 없이 느긋하게 걸어 10일 만에 집에 도착했고.
《이제 오는군.》
거실에서 마치 집주인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인물과 마주쳤다.
길고 아름다운 백옥색 사슴뿔과 깨끗한 1급 청정수로 만든듯한 푸른 머리카락, 이전과 달리 여성의 색기까지 풍기는 절세의 용족 미녀.
약간 화난 것 같이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아드네빌라였다.
“오랜만입니다, 아드네빌라.”
환인의 담담한 인사에 아드네빌라의 눈꼬리가 한층 더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심기가 사나워지자 자연스럽게 알류겔의 마룡이라 불릴 정도의 존재감이 뭉클거리며 환인을 압박한다.
갈무리하고 있다지만 아무 능력 없는 일반인이 기운에 닿았다간 몇 달은 요양해야 할 만큼 심기에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용의 기운.
쿠르티와 쿠핀, 쿠라를 마구간에 들여놓고 짐을 챙겨서 들어오던 여자들이 긴장감에 어깨를 모았을 때, 아드네빌라가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육체를 바꿔탄 백려강을 노려보았다.
갑작스러운 적의에 백려강이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눈을 끔뻑인다.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아드네빌라의 석류 같은 입술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이제 어느 정도 그 모습에 익숙해졌고 만족스러울 만큼 맛보느라 헐어버린 몸을 버리고 새 몸을 쓰겠다는 건가?》
“헌 몸이라니,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습니다.”
《믿기 어려워.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이몸의 육체를 본떠 만든 용인체를 그리 간단히 내칠 수가 있지? 그 용인체는 너와 이몸 사이에 맺은 약속의 징표 같은 게 아니던가!》
내가 천릉까지 주고 조언도 해주고 편의를 얼마나 봐줬는데!
환인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아드네빌라의 앞자리에 앉으며 여전히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그게 아니었다면 용인체는 진즉 파기하거나 폐기했겠지요.”
폐기라는 말에 아드네빌라의 표정이 표독해졌다.
진심으로 백려강이 빙의한 용인체에 감정을 이입하고 있던 아드네빌라의 처지에서는 내쳐지고 버림받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더 이상 기운이 갈무리되지 않고 유형화되어 일렁이는 모습에 여자들이 버티기 힘들어한다.
자신도 조금 두통이 지끈거리긴 하지만 예전만큼은 심하지 않았기에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여자친구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와 아드네빌라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가는 여자들.
환인은 그녀들에게 인형처럼 축 늘어진 용인체를 공주님 안기로 데려와서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누가 보면 사랑하는 연인의 몸에 기대 잠든듯한 모습.
아드네빌라와 흡사한 그 육체를 환인은 감상하듯 차분히 어루만져나간다.
보드라운 볼살과 가느다란 목을 따라 내려온 손이 봉긋 솟은 젖무덤을 매만지고, 이어서 잘록한 허리와 복근의 골짜기를 어루만지다 배꼽의 귀여운 홈을 살짝 간지럽혔다.
아드네빌라는 그 행위에 자신이 애무 당하는 기분이 들어 미간을 팍 찡그렸다.
‘망할 놈.’
환인과 계약을 맺어 관조의 술로 그의 여행을 지켜보던 아드네빌라.
백려강이 환인의 주도에 따라 육체를 갈아타는 장면에서 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찾아올 때만 해도 확 뒤집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저 능글맞은 면상을 보니 이상하게 화가 잘 안 난다.
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심력을 쥐어짜야할 지경.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기운을 다시 갈무리한 아드네빌라가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팔짱을 끼고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째서 그 몸을 버리고 백려강에게 새 몸을 준 거지?》
“약해서 그렇습니다.”
《야, 약하다고?》
“저는 제외하더라도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아영 모두 7급이며 7급에 준하는 힘을 지녔습니다. 알고 있겠지만, 이번 미궁 탐사에서 노르스리넨도 7급에 가까운 힘을 얻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 용인체는 미궁을 탐사하기에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꽃 피는 게 사실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야!!》
환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던 아드네빌라가 벌떡 일어나 와락 고함을 질렀다.
콰앙!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용의 꼬리에 얻어맞은 소파가 산산이 조각난다. 이어 용이 분노하는 것처럼 아드네빌라가 으르렁거리며 눈에 불꽃을 피웠다.
《이제 보니 네놈도 헛똑똑이였군! 이몸이 해놓은 안배를 못 알아차리고 그저 겉만 핥고서는 약하니 마니……!》
안배? 이게 무슨 말이지.
숨겨진 힘이 있음을 암시하는 이야기에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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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속보) 성제가 머무르는 거처 주변에서 원인 불명의 혼절자 속출 중.
지각 안하려고 힘냈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