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41화 (641/813)

642 이중 미궁의 중핵

이중 미궁을 나왔을 때는 새벽이 다가와 동쪽 하늘부터 붉게 물들어가는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온 여자들은 소형화를 풀고 원래 크기로 돌아가려 했지만 환인이 말렸다. 이대로 출입구까지 걸어가면 미궁을 나설 때까지 며칠은 더 보내야 하니까.

구름 위의 폭풍 같은 난기류가 장애 요소이지만, 환연에게 바람 정령을 붙여 비상의 비행을 돕고 비상의 성장을 생각하면 폭이 좁은 구름바다 정도는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비상, 난기류는 괜찮나.”

「문제없어!」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구름바다를 날아 건너고 있는 비상의 활달한 여자아이 목소리에는 조금도 무리한다거나 강한 척하는 기색이 없다.

‘바람에 대한 지배력이 생긴 건가.’

지배력이란 속성을 다루는 것을 넘어서 속성 그 자체와 동화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생겨나는 힘이다.

녹술사, 바람술사로 친다면 8급~9급의 경지라고 책에서 보았는데…… 비상은 성수 계열이라 좀 더 일찍 경지에 발을 들이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환인은 생각했다.

=주인님. 뒤에서 이형종이 쫓아와요.=

중간에 몇 차례 날짐승 이형종의 습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비상은 그쪽을 힐끔 보곤 속도를 올렸는데 그 속도가 상당해 날짐승들은 쫓아오다가 지쳐서 되돌아가 버렸다.

마치 봉황을 따라잡으려는 참새처럼 말이다.

그렇게 별다른 전투 없이 3시간 정도를 날아 미궁의 입구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완전히 밝아있었다.

=비상이 비행 속도가 진짜 대단해. 걸어서 7일 넘게 걸린 거리를 겨우 몇 시간 만에 돌파했잖아.=

「나 대단해!」

=그래그래.=

소형화를 해제하고 원래 크기로 되돌아간 안느는 부리를 치켜들고 우쭐거리는 비상의 모습에 웃으며 길고 아름다운 목을 쓰다듬어준다.

=근데 오빠. 배 안 고프세요? 밤새도록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그러고 보니 나도 조금 배고프네…….=

수첩에서 몇 가지 체크 사항을 확인하던 환인은 그녀들의 허기 호소에 수첩을 접으며 말했다.

“이실리테. 간단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게 있나.”

=네. 주먹밥과 김밥이 있어요. 하지만 이제 곧 밖이니까…… 집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국물 요리를 먹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바로 집에 갈 수 있다면 그렇겠지만 일이 그리 편하게 흘러가진 않을 것 같군.”

=……?=

=…?=

=도령. 뭔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보는 거야?=

“큰 문제는 아니다.”

환인은 성수포를 꺼내 손을 닦은 뒤 이실리테가 꺼낸 도시락에서 한입 크기의 주먹밥을 집어 입에 넣었다.

소금과 참기름만으로 간을 한 하얀 쌀밥에 김을 자그맣게 말은 꼬마 주먹밥이지만, 갓 만든 것처럼 따끈따끈한 데다 식욕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짠맛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여자들도 성수포로 손을 닦은 뒤 이실리테가 또 꺼낸 고기 주먹밥과 야채, 김치, 땡초 김밥을 먹고 비상은 신선한 과일을 통째로 와삭와삭 씹어먹으며 허기를 약간 달랬다.

=으음~! 이실리테 언니 손맛은 진짜 최고예요.=

=고마워. 안느 넌 이거 먹어. 소금간 주먹밥이랑 야채 김밥이야.=

=어어. 너도 주기만 하지 말고 좀 먹어.=

안느는 이실리테의 입에도 고기 주먹밥을 넣어준 뒤 손가락에 묻은 밥풀을 떼먹으며 물었다.

=주둔지의 기사단 책임자가 도령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보는 거야? 귀족이니까 응대하면 시간이 좀 걸리는 거.=

“그래. 그 외에도 미궁에서 알아낸 걸 전달해야 하니 길면 1시간 정도 걸릴 테지.”

이실리테가 내미는 주먹밥을 마지막으로 받아서 먹은 환인은 머릿속으로 대강의 시뮬레이터를 돌리며 바깥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 * * *

새벽 일찍 일어나 강도 높은 아침 훈련을 끝마친 기사단 주둔훈련소장, 예리카=곤운 백작은 하녀의 수발을 받아 제복을 착용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열흘 전 기사단 산하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에 들어간 성제 일행. 그리고 그 성제 일행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기사단원 다섯.

성제가 히스론드에 얼마만 한 은혜를 내렸는지, 그로 인해 왕실이 그를 얼마나 싸고도는지 귀족 고위 계층은 다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그를 향해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가 좌천당하고 보직 해임당한 귀족이 하나둘씩 나오는 상황.

제2 천공기사단의 단장은 보직 해임되어 보직 이동을 기다리는 처지다. 그런 제2 천공기사단 관할인 잊혀진 옛 도시 미궁, 그 주둔지의 관리자인 부단장도 미궁의 폭주를 방임했다는 의혹을 사 현재 군사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다.

‘아데나 부단장은 억울하겠지.’

주둔군의 관리를 받는 미궁은 가끔이지만 폭주를 일으키는데 하필이면 폭주 당일 그 자리에 성제가 있었다는 게 원인이 되어 예민한 분들의 눈 밖에 나버렸다.

자신도 솔직히 안전하지 않다.

히스론드 전체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귀빈 중의 귀빈이 미궁에 들어간 것도 신경 쓰일 텐데 그런 귀빈에게 자기가 관리하는 기사들이 구조 당했다.

심의감사기관에서는 지금쯤 자신을 조질까 말까 고민을 거듭하고 있겠지. 귀빈에게 그런 못난 꼴, 몹쓸 꼴을 보이다니! 국가 모독이다! 하면서.

‘훈련 강도 3배 증가로는 부족한듯한데…….=

그간 최소한의 기강만 유지하고 지킬 것만 잘 지키면 건드리지 않았는데, 예리카 훈련소장은 이틀 전 복귀한 기사들의 모습에 속된 말로 빡이 쳐서 전군 특별훈련 기간을 선언하고 그때부터 혹한기 중무장행군 버금가는 강도의 훈련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화나서는 아니다.

얼마나 방심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으면 이형종에게 배후를 공격당해 그 귀중한 성술기사까지 잃는단 말인가.

고강도 훈련은 해이해진 기사들의 정신상태를 바짝 조이기 위함이기도 하며 심의감사기관에서 감사원이 나오면 내가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일환이기도 하다.

=하아…….=

승령천제가 5일 앞으로 다가왔다. 도시 전체는 유례가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이다.

이유라면 역시 성제가 팔라툼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겠지.

이 때문에 심의감사기관도 천제가 끝난 이후에 움직일 가능성이 큰데 그때까지 어떻게든 면피할 거리를…….

콰당-!

=예리카 훈련소장님, 크… 큰일입니다!=

번민과 고뇌를 이어가던 예리카 훈련소장은 관등성명은커녕 예의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부보좌관을 향해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이 개새끼야! 예절은 국에 말아쳐먹었냐!! ……그런데 왜 쥐 잡아먹은 것처럼 면상이 희게 질렸어?=

=성제 예하께서 미궁의 중핵을 탈취하여 복귀하셨습니다!! 그 일로 소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셔서 현재 구내식당에 모셨습니다!=

=……시잇팔, 돌아버리겠네. 새꺄! 귀빈 응접실로 모셔야지 그딴 곳에 모시면 어떡해?! 정신이 있어 없어!! 당장 그분께 안내해!=

=예! 그, 그런데 응접실로 모시려 하셨지만 성제님께서 세 끼나 거르셨다며 부득불 구내식당으로……! 근 14시간 동안 드신 것이 없으시다고 하셔서 그렇습니다!=

=뭐? 왜?=

예리카 훈련소장은 부보좌관과 함께 소장실을 뛰쳐나가며 그 이유를 물었다가 이게 아니지하고 다시 물었다.

=야, 설마 식당에서 식사하고 계신 건 아니지?=

=식사를 부탁하시기에 외람되지만, 소장님의 전속 요리사에게 부탁해 조리하도록 선조치하였습니다!=

자신이 주둔지로 데려온 요리사는 가문의 총주방장 직속 제자다.

왕실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실력을 지녔지만, 자신이 고아였던 그를 데려와 먹여주고 키워주었기에 그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문에 남아있는 녀석.

머릿속에 치밀어오르던 혈기를 내린 예리카 훈련소장은 부보좌관이 나름 지위에서 해야 할 대처를 바르게 했다는 걸 인지하고 푸욱, 한숨을 내쉬며 그의 등을 퍽 쳤다.

=잘했다. 역시 부보좌관 너밖에 없어. 방금 소리친 건 진심이 아닌 거 알지?=

=무, 물론입니다.=

=그런데 중핵을 데리고 나오셨다니 그건 무슨 소리냐?=

부보좌관은 소장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달려가며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앞뒤 맥락이 맞게끔 짧고 간단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핵심 이야기를 들은 예리카 훈련소장은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꼬여가기 시작했다.

‘삼중 헤일로에 삼쌍익? 게다가 키가 2.5m라니, 그걸 성제님은 어떻게 제압하신 거지?’

이럴 때면 궐련 하나를 물고 지독하게 쓴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구내식당에 가까워질수록 식당 밖에 모인 기사들이 웅성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안에 초절이 붙을 귀빈이 있어 자리를 피해준 모양새.

그들의 경례를 대충 받아주며 문 앞에 선 예리카 훈련소장은 문을 열기에 앞서 옷차림부터 확인한 뒤 조심스레 구내식당으로 들어섰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단정한 50명 규모의 구내식당에 7명의 혼성그룹이 조용히 식사 중인 게 그녀의 시야에 담겼다.

아침 식사시간이지만 다행히 기사들도 눈치가 없진 않은지 모두 자릴 비운 상태.

예리카의 눈이 신임하는 요리사의 서빙을 받으며 우아하게 식사 중인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에게 향했다.

‘1, 2, 3, 4…… 7명? 입장은 6명이라 하지 않았었나?’

1명은 어디서 나온 거지, 의아해하다가 정말 깨물어보고 싶을 만큼 귀엽고 깜찍한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에게 잠깐 시선이 멈췄다.

정말 예쁜 소녀군.

이어 머리 위에 헤일로가 뜬 삼쌍익의 끔찍할 만큼 예쁜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예리카는 한눈에 저 천사가 중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호박색과 은색, 백색, 라벤더색 머리카락의 여성들도 하나같이 고귀하다 할 만큼 아름답지만 그건 자연에서 우러나는 미모다.

그런데 저 천사는 보자마자 어딘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미모였다.

피부를 찌르는듯한 거대한 위상력, 가냘픈 체형이지만 2.5m라는 키 탓에 느껴지는 위압감과 플라비우스들에 비해 족히 1.5배는 더 큰 날개에서 오는 존재감까지.

7급 염기사炎騎士로써 주중 한 번씩 미궁에 들어가 몸을 풀고 실전 감각을 갈고 닦는 예리카는 피부에 전해져오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

=으흠. …성제 예하, 식사 중에 실례하겠습니다. 본 기사단주둔지의 소장직을 맡은 예리카 곤운입니다.=

“곤운 백작님이시군요. 어쩌다 보니 구내식당에서 먼저 신세 지고 있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 식사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요리사분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솜씨가 무척이나 뛰어나군요.”

부드럽지만 중후하고 매너가 가득한 대답에 예리카는 속으로 살짝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곤운 백작님께서 괜찮으시다면 같이 드시지요. 식사 중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드릴 말씀도 있고 말입니다.”

「친구야. 나 저거 먹을래.」

=비상, 주인님 중요한 이야기 하시잖아. 나한테 말해. 이거?=

「응 그거.」

예리카는 비상이라 불린 녹색 머리의 미소녀에게 시선을 계속 주었다.

멀리서 옆모습만 봐도 예뻤는데 바로 앞자리에서 보니 시선이 자꾸만 그쪽으로 향한다.

약간의 과장도 없이 일평생 본 적이 없는 수준의 미소녀.

할 수만 있다면 저 최고급 깃털보다 더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예뻐해 주면서 먹을 걸 챙겨주고 싶은 기분이다.

“우리를 안내해주신 보좌관분이 오해하신 것 같은데 그 점부터 정정해야겠습니다.”

=예, 예?=

“저 육체는 일단 중핵이 맞습니다만, 내용물이라 해야 할지…….”

환인의 이어지는 이야기에 예리카는 절반쯤 이해하고 나머지 절반은 이해하지 못했다.

미궁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던 예비 중핵의 육체라고?

미궁이 천사의 몸뚱이를 먼저 만들고 그 뒤에 영혼을 집어넣어 완성하는 게 이형종인데, 미궁이 중핵을 완성하기 직전에 강탈한 게 저 육체고 저 안에는 성제님을 따르는 순수하고 선량한 영혼이 들어가 있어?

「안녕하세요.」

=……!!?=

간신히 녹색 머리 미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삼중 헤일로에 삼쌍익의 천사를 보고 있던 예리카는 화들짝 놀라 미디엄 스테이크를 자르던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성제가 말하는 도중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천사의 위로 여자 영혼이 몸을 반쯤 드러내 그녀에게 인사를 한 것.

「환인 오라버니를 섬기는 다섯 번째 영혼 기사, 백려강입니다. 예리카 곤운 백작님께 인사드려요.」

=…어, 어어? 그, 백려강 영혼 기사님은 분명 한 쌍의 사슴뿔을 가진 용인족이었다고 들었, 들었습니다만…….=

“그 몸도 알류겔의 해왕에게 양도받은 정교한 생체 인형입니다.”

=……!!=

“제가 드릴 말은 이것입니다. 허가증에는 미궁에서 노획한 물자는 제 소유라는 것이 명시되어있습니다. 예비 중핵의 육체는 우리 일행이 노획한 것이니 제 소유라는 점을 훈련소장님께 확인받고자 합니다.”

=그으…….=

예리카는 이 일로 벌어질 연쇄적인 여파에 머릿속이 꽉 차는 기분을 느꼈다. 머리가 꽉 찬 것처럼 목도 꽉 차버려 말이 안 나온다.

저 천사의 육체가 얼마만 한 가치를 지녔는지 훈련소장인 그녀가 모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성제에게서 저 육신을 빼앗을 수 있을 리도 없다.

자칫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자신도 레아우카=사바인 백작…… 아니, 자작 꼴이 될 수도 있는데 정식 명령서까지 가지고 전리품을 확보한 그에게 물건을 빼앗아?

반대로 그에게 허가를 내려 천사의 육신을 가지고 가라고 했다간 왕실의 높은 분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 들 거다.

그런 중요한 걸 왜 함부로 결정하냐고.

당장 대답을 드려야하는 데 대답을 드릴 수 없는 상황.

예리카의 입안이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난 논처럼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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