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38화 (638/813)

639 이중 미궁의 중핵

그으으~

비상은 환인의 뒤에서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친구가 암컷이 잔뜩 생긴 뒤로 점점 자신에게 소홀해지는 게 비상은 불만이었다.

다른 암컷들이 없을 때는 친구가 직접 밥도 챙겨주고 멋진 갑옷이랑 예쁜 목걸이도 주고 그랬는데, 암컷들이 잔뜩 생긴 뒤에는 암컷들을 챙겨준다고 자신과 잘 놀아주지도 않는다.

그나마 며칠 전에는 친구와 함께 잔뜩 날아다니고 커다란 놈과 싸워 이기기까지 해서 통쾌했지만…….

“백려강. 이게 너의 새 몸으로 적합할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지.”

……규웃.

내가 먼저 찾았는데.

“중핵으로 사용하기 위해 6급 미궁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육체다. 기본적인 스펙은 각성하지 못한 용인체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테지.”

=자기 말대로 육체에 위상력도 충만하니까 려강 아가씨의 바람술 기억이랑 술법 전개에 날개까지 더해지면 궁사로서 더욱 탄탄한 위치를 확립할 수 있을 거야.=

=……네! 그런데 오라버니, 언니. 제가 이 천사의 육체로 갈아타면 아드네빌라님이 주신 용인체는 어떻게 되나요?=

“너의 스페어 바디로 계속 보관해야지. 보관 방식에 대해서는 아드네빌라가 곧 찾아올듯하니 그때 물어보면 될 거다.”

=자기, 저기 캡슐에 남아있는 액체를 표본으로 채취해도 될까?=

“……그러지요. 저도 심핵력을 다룰 수 있으니 어쩌면 보관에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라버니. 지금 육체를 갈아탈까요?=

“그래. 네가 이 육체에 들어가면 미궁의 의지가 손을 뻗칠지도 모르지만, 거인숲 미궁에서 주술사를 보며 나름 익힌 영혼술이 있다. 신경 써서 지켜주마.”

=넷!=

마음이 상해서 삐진 비상은 평소 자신의 깃털과 발톱, 다리를 정돈해주던 백려강의 기뻐하는 모습도 보기 싫었지만, 큣- 콧바람을 푹 내뿜는 것으로 미움과 상한 감정을 흘려보냈다.

이들은 동지, 가족이니까. 가족이 강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그래도 자기보다 암컷들을 더 챙기는 친구는 얄밉다.

고개를 팩 돌린 비상은 온통 깨져서 녹색 반투명한 액체가 개울처럼 흐르는 배양실을 차박차박 발소리를 내면서 돌아다녔다.

크고 작은 날개 달린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그중에서는 비상의 관심을 잡아끄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환인에게 빼앗긴 떡이 워낙 커 보였기에 그런 건 더 관심이 가지 않는다.

삐~ 삐이. 삣.

그렇게 차박차박 돌아다니던 비상은 자신의 등 위에서 삐삐 우는 작은 꼬맹이한테 고개를 돌렸다.

뭐? 호기심 나는 냄새가 난다고?

꾸? 뀨으.

삐이~ 삐뿌.

……힐끔. 비상은 들어왔던 통로를 지키느라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는 덩치 큰 애(안느)와 큰 떡에 모여있는 암컷들, 그리고 친구를 살폈다.

다들 이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고 친구도 큰 떡에만 정신이 쏠려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실루가 가리킨 작은 석함으로 다가간 비상은 그제야 거기서 큰 떡만큼이나 유혹적인 끌림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왜 못 느꼈지? 아, 바닥에 널린 저것들 때문이구나.

자기 날개의 깃털 수보다 많은 것들이 바닥에 잔뜩 깔려 크고 작은 유혹의 기척을 내고 있다. 알아차리지 못한 게 당연하다.

뀻!

꼬맹이한테 잘했다고 칭찬한 비상은 단단한 부리로 자기 몸의 반도 안 되는 상자의 귀퉁이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빠각, 빠득. 조금 소리가 크게 나자 이것도 친구한테 빼앗길까 바람으로 공기의 막을 둘러 소리를 가린 뒤 뿌득, 우드득— 조금 더 과감하게 상자를 부숴나간다.

그리고 부서진 귀퉁이에서 와그르르— 쏟아진 치명적인 유혹들.

아니,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돌멩이 비슷한 게 대부분이고 치명적으로 유혹적인 건 몇 개 안 된다.

비상은 하얀 돌멩이들 사이에서 유독 빛나는 녹색 돌멩이 몇 개를 유심히 살폈다.

보자마자 본능이 알려주었다. 이건 하나 밖에 못 먹는 거라고. 그러니 가장 좋은 걸 먹어야 한다고.

삐~ 삐이~.

뭘 먹을지 신중하게 고민하던 비상은 등에서 자기도 먹고 싶다고 보채는 실루에게 먹고 남은 거 줄 테니까 얌전히 있으라고 한 뒤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어? 오, 오빠! 비상이가 또 부리에 뭔가 물었어요!=

들켰다. 비상은 환인의 영혼의 불길이 일렁이는 눈과 마주치자마자 날름하고 부리에 문 것을 삼켰다.

=악! 먹었어!=

재빨리 두 번째로 좋은 것을 부리에 물자 들판의 꽃이랑 같은 머리를 한 암컷이 날듯이 뛰어왔지만, 비상은 칵! 위협적인 소리를 내면서 날갯죽지를 휘둘러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야아! 비상이 너 그거! 오빠가 먹으면 안 된다고 한 거잖아!=

뀨꿋! 꾸엣!

이건 그거 아니거든!

=앗?! 자, 잠깐……!=

저리 가!

비상은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뻗는 암컷을 날갯죽지로 밀치고는 아기 새처럼 부리를 벌리고 삐삐 우는 실루의 주둥이에 두 번째로 치명적인 유혹을 넣어주었다.

‘흠.’

백려강의 푸른 영혼이 스며든 천사를 환인은 묵묵히 응시했다.

그가 새로운 영혼술을 만들어내게 된 계기는 자신에게 패배감을 맛보여준 거인숲 미궁의 중핵 때문이었다.

주술사를 덮쳐 그녀의 육체를 빼앗으려 했던 중핵.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패배감은 사건이 모두 마무리된 이후에도 환인의 마음을 종종 심란하게 만들었다.

미궁을 다시는 들어가지 않는다면 상관없겠지만, 앞으로도 미궁은 계속 들어가야 한다.

주술사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없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만약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용인체에 빙의한 백려강이 미궁의 수작질에 당할 확률이 가장 높겠지.

환인은 반성과 고찰을 통해 시간 나는 틈틈이 그때 상황을 되새기며 그 일을 예방할 수 있는 수단을 연구했고, 하나의 줄기를 만든 뒤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새로운 기술 하나를 만들어냈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완벽해지도록 약간의 보조적인 도움을 주는 동시에 외부에서 정신, 영적인 개입을 막는 기술이다.

개념이 중요한 기술이었기에 이름은 따로 짓지 않았지만, 대충 방혼벽이라 이름을 붙였다.

성과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안느와 아영의 성술을 참고하여 방혼벽에서 파생되는 두 가지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영혼 치유와 타락 정화.

영혼 치유는 이름 그대로 영혼 화살 등으로 상처 입은 영혼을 영기와 심핵력으로 치료하는 것이며 타락 정화는 시더나 들개 전사단처럼 타락한 혼을 정화하는 것이다.

셋 다 시험해볼 기회는 없었다. 그 때문에 효과를 의심할 법도 했지만, 환인은 새로운 영혼술이 정상 작동함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프라버에서 백중익의 정신을 치료한 경험에 빗대어 만든 게 영혼 치유이며 평온의 파동과 혼령주의 대규모 정화에 착안하여 그 효과를 일부 가져온 것이 타락 정화였으니까.

그리고 실험은 다른 이야기다.

애초에 타락한 영혼 같은 건 쉽게 만날 수 없는 부류다. 흑옥의 타락을 정화해버리면 제 손으로 공격력을 깎아 먹는 짓밖에 안 된다.

영혼 치유는 상처를 먼저 입어야 하는데 여자친구들을 상대로 그걸 연습한다니, 말이 안 된다.

그 외에 이런저런 이유로 실험해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방혼벽을 써볼 수 있었는데.

“……잘 되고 있군요.”

백려강의 혼이 삼쌍익 천사의 육체에 들어간 뒤 방혼벽을 천사의 육신에 펼치자 후광 같은 빛줄기가 천사의 육신을 뒤덮으며 백려강의 혼이 천사의 육체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점령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방혼벽의 성공은 환인에게 당연한 일. 그가 신경 쓰는 것은 방혼벽의 효과와 효율이다.

의도한 방혼벽의 유지시간은 30분 정도에 소비 영기와 심핵력은 3%와 1% 정도다. 백려강 하나 정도면 1년 365일 무리 없이 유지할 수 있을 효율을 노렸다.

그리고 소비 영기와 심핵력은 의도한 대로 3%/1%가 되었다.

천사의 육신을 뒤덮은 방혼벽의 희미한 빛무리가 3분째 안정적으로 동일한 농도를 유지하고 있는걸 보면 유지 또한 30분은 충분히 되겠지.

‘방혼벽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니 영혼 치유와 타락 정화도 의도한 목표는 가볍게 달성하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백려강이 깃든 육체의 심장이 점차 강하게 뛰기 시작하고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에도 혈색이 서서히 돈다.

사고는 그때 발생했다.

=어? 오, 오빠! 비상이가 또 부리에 뭔가 물었어요!=

“……?”

아영의 다급한 부름에 환인은 비상을 돌아보았고, 미간에 살짝 힘을 주었다.

부리에 물고 있는 저건 뭐지. 위상석 같지는 않은데.

자신과 눈이 마주친 비상이 찔끔하더니 반사적으로 꿀꺽하고 보석 같은 녹색 돌멩이를 삼켜버린다.

=악! 먹었어!=

야아아~! 하고 비상에게 달려가는 아영이었지만, 환인으로서도 거의 보지 못한 진심이 담긴 분노의 날갯죽지에 퍽퍽 얻어맞고는 아파하며 물러났다.

=야아! 비상이 너 그거! 오빠가 먹으면 안 된다고 한 거잖아!=

뀨꿋! 꾸엣!

이건 그거 아니거든!

=아앗?! 자, 잠깐……!=

“…….”

이어서 등에 올리고 있던 실루의 주둥이에 녹색 보석을 넣어주는 행동을 본 환인은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비상에게 뛰어들었다.

뀻?!

삐?

깜짝 놀란 비상이 반사적으로 날갯죽지를 휘둘렀지만, 환인은 물처럼 비상의 공격을 피하며 올라타 실루의 부리 속에 손을 넣어 마악 식도로 넘어가려는 녹색 보석을 빼냈다.

삐! 삐에엥~ 삐힝…….

입안에 든 사탕을 빼앗긴 아기처럼 날개를 파닥거리다 울먹이듯 힝힝거리는 실루.

환인은 그런 실루를 달래면서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눈을 도록도록 굴리는 비상을 지그시 응시했다.

…뀨, 뀨으!

자신의 시선에 위축되어있다가 소심하게 반항심을 드러내는 비상이지만, 계속된 무언의 시선에 결국 머리 깃털을 납작하게 만들며 환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눈빛에 드러나는 반항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뭐니? 무슨 일이래?=

=…비상이 주인님 몰래 뭔가 위상석을 먹었나 봐요.=

=으응? 비상이가? 자기가 한 번 하지 말라는 일은 잘 지키는 아이잖아.=

삐진 티를 내는 비상을 가만히 응시하던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비상에게 물었다.

“비상.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으냐.”

뀨으…….

“틀렸다. 네가 이걸 먹었다는 건 너에게 필요한 물건이라는 뜻이겠지. 백려강을 살피느라 너에게 신경 쓰지 못했고 토라진 널 눈치채지 못한 내 잘못이니 몰래 이걸 먹은 걸 가지고 혼내지는 않아.”

크흥?

“그런데 왜냐고.”

환인은 조금 화난 것처럼 눈썹을 찌푸리며 비상의 눈앞에 녹색 보석을 들이밀었다.

방금 실루한테 먹이려 한 보석이다.

“이건 너에게 필요한 것이겠지만 실루에게도 필요한 것인지는 모른다. 위상력이 반영된 물질은 보통 해당 속성의 색을 띠기 마련이지. 네가 이 돌에 끌림을 느꼈고 이 돌이 녹색을 띠고 있다는 건 바람과 관련된 물질일 가능성이 커.”

지금 손에 쥐고만 있어도 강렬한 모종의 기운, 심핵력 같으면서도 위상력 같기도 한 에너지가 손바닥을 쿡쿡 찌르고 있다.

“하지만 실루는 불 속성이다. 거기다 아직 어린 아기라 사리 분별이 모자라지. 그런데 우두머리라는 녀석이 그것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실루에게 먹이나. 이걸 먹은 실루가 죽거나 크게 다치면 어쩌려고.”

꾸… 뀨…….

쾅.

끽!

변명하려는 비상의 뒤통수를 강하게 쥐어박은 환인은 비상의 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지만, 낮은 목소리로 야단쳤다.

“비상. 난 널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저 천사의 육체가 너보다는 백려강에게 시급하다고 생각해서, 너에게 필요한 요소는 여기가 아니더라도 이 미궁의 중핵을 찾으면 해결될 거라고 보았기에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한 거다. 그런데 너는……?”

끄우…… 뀨…… 뀨히이이잉…….

비상의 울먹이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 야단치던 환인은 갑자기 비상의 몸에서 짙은 녹색 빛이 뿜어져 나오는 장면에 말끝을 흐렸다.

이건 무슨 현상이지.

뀨에에엥-!

잠깐 보고 있으려니 비상의 울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초록빛이 눈이 아릴 만큼 뿜어졌다.

‘이건?’

환인은 실루를 품에 안고 뛰어내려 비상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주머니와 가방을 멍하니 서 있는 아영에게 전부 집어 던졌다. 그러면서 비상의 변화에 눈을 떼지 않는다.

=어?! 뭐야, 비상이가 왜 빛나?!=

=잠깐잠깐잠깐! 자기, 저거 직업자들 승급이나 재각성 현상 같은데?!=

=엥? 유르파 언니, 성수도 재각성 해요?=

큐에에엥~! 뿌에에엥……!

비상의 울음이 이어질수록 주변의 위상력이 전부 비상에게 빨려 들어가듯이 흘러가는 게 그의 영혼의 눈을 통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위상력의 흡입이 얼마나 강렬한지 거대 배양실에 있는 경혈에서 위상력이 강제로 끌려 나올 정도.

=윽? 오, 오빠. 제 위상력이 비상이한테 흡수당하는 거 같은데요…?!=

아영을 돌아본 환인은 그녀 말대로 그녀의 몸에서 생기가 흘러나오듯 위상력이 천천히 비상에게 흘러가는 게 보였다.

자신의 몸에서는 왜 위상력이 흘러나오지 않는 걸까. 위상류 때문에? 아니면 유물이 만들어 모은 위상력이라서?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넌 뒤로 물러나 있어라. 유르파, 바람 속성의 위상력을 전부 꺼내주십시오.”

=응? 응, 여기!=

그녀에게 4급 이하 녹색 위상석을 전부 건네받으면서 아스펜드를 뒤져 5급과 6급의 녹색 위상석도 꺼내든 환인.

족히 600금화가 넘는 양의 녹색 위상석을 망설임 없이 비상 쪽으로 던지자 놀랍게도 녹색 빛에 닿은 위상석이 퍼석, 퍼벅- 터져나가며 가루로, 가루보다 더욱 미세한 입자로 변해 비상의 몸 안으로 흡수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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