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
여자친구들에게 돌아간 환인은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해주었다.
“비록 상처를 크게 입었다지만 이형종이 구름을 밀어내고 낙사로 자살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맞아. 구름 속에 통로가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어. 지금 겉으로 보이는 건 죄다 섬이지만, 실상은 거대한 산맥이잖아? 산맥 속에 또 다른 통로가 있다고 생각해도 안 이상해.」
환연도 옆에서 맞장구치니 미궁 경험이 그다지 없는 이실리테, 유르파, 백려강은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지 않은 안느와 아영이 신기해한다.
=어, 그 말은 이중 미궁이란 건가? 나도 이중 미궁은 처음이야.=
“십중팔구는 그렇겠지.”
환인의 머릿속에 영도에서 입수한 미궁의 정보 일부가 스쳐 지나간다.
이중 미궁. 개방형, 폐쇄형, 격리형 어느 쪽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미궁 형태다.
변이형 미궁에 포함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동안 학자들이 갑론을박을 벌였다고 하던데 결국 일반 미궁으로 정했다고 하던가.
특징이라면 평범한 미궁보다 몇 배는 더 넓은 탐사 면적을 자랑하며 숨겨진 장소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곳과 전혀 다른 기능을 하곤 한다는 것.
=그러고 보면 이중 미궁에 딱 걸맞은 지형이긴 하죠? 바다처럼 많은 구름 탓에 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봉우리랑 능선이니까요.=
=응. 아무튼. 산 속에 다른 미궁이 있다면…… 도령, 가볼 생각이지?=
“상처 입은 이형종이 들어갔다면 전투와는 관계없는 장소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경험을 쌓을 겸 가보는 게 좋겠지.”
환인과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실리테가 살짝 손을 들며 환인에게 묻는다.
=그곳으로 가실 것 없이 환연에게 부탁해서 땅을 파면 안 되나요?=
“미궁의 기존 형태를 크게 무너트리면 미궁이 발악하는 것처럼 내부 구조 변이를 크게 일으키거나 이형종을 범람시킨다고 하니 그런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실리테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준 환인은 크게 상처 입은 천사가 모습을 감춘 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처 입은 천사를 본 순간 떠올렸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천사를 놓쳤다는 말은 저 섬의 기사들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이다.
가장 온건한 쪽이라면 전투 중 방심으로 천사를 놓친 것이다. 이형종을 놓쳤다는 건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크나큰 실책이니 복귀 후 크게 혼나는 정도로 마무리되겠지. 심하면 몇 달 감봉 정도일 테고.
영 좋지 않은 쪽이라면 천사들에게 기사들이 패했다는 것이다. 양패구상일 가능성이 크니 기사들도 죽거나 크게 다친 상태일 거다.
‘알 바는 아니지.’
패배한 기사들의 상황이 어떠하든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섬과 섬 사이 거리가 멀어질수록 구름 위의 기류는 난폭해지고 격렬해진다. 그리고 현재 자신이 있는 섬과 저쪽 섬 사이의 거리는 족히 1km가 넘어가는 마당.
비상을 타고 넘어가는 것도 위험할뿐더러 상처 입은 자들을 다스리려면 아영을 데리고 가야 하니 위험성은 몇 배나 증가한다.
무엇보다 방금 그 전투 천사와 싸운 기사들이 중상을 입어 죽어가고 있다는 확증도 없는데 저 위험한 난기류 속을 돌파할 이유가 있나?
환인이 평소처럼 자신과 상관없는 인간의 생사 따위, 신경 쓰지 않으려 하던 순간이었다.
그의 눈앞으로 만삭이던 이엘카타의 웃는 모습이 갑작스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
태동하는 생명을 품은 그녀의 배. 뜨겁고 단단한 생명의 무게. 그리고 그런 뱃속의 생명을 사랑스러워하던 그녀의 행동.
그런 그녀의 모습 위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띄워지고 그런 어머니를 소중히 안으며 웃음 짓는 아버지의 모습이 더해진다.
‘기사들도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사랑받는 아이…인가.’
환인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기묘한 감정이 떠오른 것을 느꼈다. 아니, 이엘카타에게서 받은 정신적 충격의 연장선과 비슷하다.
다시금 저쪽의 섬으로 시선이 갔지만, 환인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대신 여자친구들에게 자신이 추측하고 추리한 내용을 말해주었다.
=……!=
=아…!=
전투에서 패배해 크게 다치거나 죽은 기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안느와 백려강의 표정이 뒤늦게 흐려진다.
“내일 길이 열리면 그들부터 찾아보도록 하지.”
=저 운협 상공의 폭풍만 아니면 당장 넘어가서 도와줄 수 있을 텐데…….=
그녀들도 구름이 깔린 면적이 넓어질수록 상공의 난기류가 심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을 도우러 가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구해줄 수 있다면 구해주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나와 너희들의 안전이 침범당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할 결정이라고 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없지.”
=그렇지…….=
환인은 일행의 유일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안느가 조금 시무룩해 하는 모습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들은 국가의 중요한 무력이다. 맥없이 죽지 않도록 히스론드도 나름대로 준비해 들여보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응. 비상 회복약 정도는 챙기고 다닐 테니까. 한나절 정도는 그들도 버틸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미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 벌어졌을 뿐인 거고.=
미궁 안에서 자신이 겪는 모든 일은 자기 책임이다.
안느는 유명한 격언을 떠올리며 일렁이는 구름의 연기 사이로 보이는 섬에 시선을 주었다.
다음날 정오, 구름이 물러가며 열린 길을 통해 다음 섬으로 넘어간 환인은 기사들의 흔적부터 먼저 추적했다.
「저깄어. 바위 뒤에 땅을 파고 숨어있네.」
땅과 바람의 정령으로 주변을 탐색하던 환연이 가리킨 곳은 평범한 숲의 공터.
그냥 봐서는 아무것도 이상할 게 없는 산정상이다. 땅에 떨어져 누렇게 변해가는 낙엽과 부엽토, 그리고 다소 커다란 바위가 풍경을 구성하는 장소일 뿐이니까.
=생존자들이 땅속에 숨어있어 시야가 차단된 덕분에 미궁이 전장을 복구했나 보네.=
그렇게 중얼거린 안느가 목소리에 위상력을 담아 살짝 소리쳤다.
=이쪽은 영도의 녹색 성자이신 환인 성제님의 호위 영혼 기사들이야. 거기 바위 아래 숨어있는 팔라툼의 기사단 생존자들, 들려?=
그녀가 말을 꺼내고 잠시 후, 땅이 들썩거리다 말라버린 핏자국투성이의 여기사 한 명이 좀비처럼 땅을 헤집으며 빠져 나왔다.
=쿨럭! 콜록……! 으으…. 서, 성제님……?=
숨어있는 사람은 총 다섯 명. 그중 세 명은 거동이 가능한 수준의 경상이었지만, 나머지 두 명은 의식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중상자였다.
날개가 찢어지고 사지가 부러지거나 끊어지고 머리가 깨지고.
환인의 여자들이 기사들을 구덩이 속에서 꺼내와 땅에 눕혀놓고 치료를 시작한다.
=근접 직업자들은 상대적으로 경상이네. 이쪽은 내 치유술로 치료하면 되겠지만 날개나 팔다리를 잃은 사람은 아영이 네가 회복을 써야겠어. 환연아, 상처에 자극이 안 가도록 이 사람들 좀 씻어줄래?=
=옙.=
「응.」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서, 성제님께 하늘신님의 축복과 가호가 깃드시길…….=
유일하게 정신을 붙잡고 있던 여기사가 간신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에 환인은 그녀를 눕혀주며 말했다.
“인사는 나중에 하시고 치료부터 받으십시오.”
=예, 예…….=
땅신의 징표를 든 아영은 왼쪽 다리를 허벅지부터 잃고 등의 날개도 전부 다 뜯겨나간 남기사의 상태를 살피며 징표에 위상력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다행히 회복이 아직 통하는 상태네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치유술을 써야 했을 거예요.”
상처를 입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회복回復은 무조건 통하는 게 아니다.
성술의 숙련도와 직업의 등급에 따라 성술로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정해지는데, 눈앞의 기사는 그 시간을 몇 분 남기지 않은 상태였던 것.
아영의 회복 성술이 중상자 두 명에게 쏟아지고 안느의 치유술도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슬슬 고름이 맺히기 시작하는 기사들의 상처에 스며든다.
신체 결손을 당한 기사의 사지가 먼저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금 간 두개골이 보일 정도로 머리가 크게 깨진 데다 뱃가죽의 복막이 찢어질락 말락 하는 상태였던 여기사의 상처도 빠르게 수복되고 있다.
아영이 안느의 치유술에 부러진 팔다리가 모두 붙고 혈색도 약간 돌아온 5급 여기사에게 물었다.
=회복약을 제대로 뿌릴 상황이 아니었나 봐요? 재생된 상처에 흙 같은 게 섞여 들어가서 엉망이야. 일일이 하나씩 째서 끄집어내야 할 정돈데?=
=깨져서 땅에 흘러내린 회복약을…… 그러모아서 그렇, 그렇습니다. 그녀의 체력이, 가장 낮기도… 해서…….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죽었을 겁니다…….
=그랬어요?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하니까 잘한 선택이네요.=
환인은 혼절해있는 술법 계통 여기사의 복부를 메스 같은 단검으로 일일이 째는 아영을 바라보다 기사들을 다시 살폈다.
5급 전사 1명에 4급 전사, 투사, 엽사, 술사 각 한 명씩.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치명상은 엽사와 술사였는데 여자친구들의 치료가 시작된 뒤로 안색에 조금은 혈기가 돌기 시작했고, 상처가 비교적 가볍던 전사와 투사 직업자는 벌써 눈을 뜨고 있다.
환인은 잠깐 멍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이윽고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는 기사들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습니까. 여러분들의 수준을 보면 이곳에서의 전투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의 질문에 5급 전사, 후배들을 인솔하는 책임자인 여기사가 흐려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투 천사 한 무리와 싸우던 도중 강화 개체가 배후에서 습격했습니다. 그 공격에 논시아가 당하고, 난전 속에서 비상용 신호탄까지 소실되어……. 긴급용 비약을 마셔서 어떻게 퇴치는 했지만 보시다시피 저희도 치명상을 입어 죽음만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처음 당한 분이 회복 역이었나 보군요.”
=…예. 그녀가 당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악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 잘못입니다. 논시를 어떻게든 지켜야 했는데…… 큭.=
=아니……. 적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 잘못…….=
=어어. 말하지 마요. 치료 중이라고요.=
기절해있던 엽사의 이야기에 아영이 그를 나무라는 사이 다른 기사들의 얼굴에 동료를 잃은 비통함과 침통함이 떠오른다.
환인은 그들이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준 뒤 다시 질문했다.
“습격해온 네임드 개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십니까.”
돌아온 대답은 환인의 생각대로였다. 큰 상처를 입고 구름바다 속으로 사라진 그 천사와 흡사한 외형 정보가 그들에게서 나왔던 것.
그러고 보면 천사들은 그냥 허공에서 만들어지는 식이 아니었다.
늘 시야에 안 보이는 곳에서 이쪽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었는데 만약 산속에서 천사들이 형성되어 찾아오는 거라면 그 천사가 산속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설명된다.
‘그렇다면…….’
산속 미궁은 거인숲 미궁의 거인들처럼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춘 이형종들이 안에 소굴을 꾸리고 있다고 봐야 할까.
그때 인상을 마구 찌푸리고 있던 4급 전사가 분노의 기색을 드러내며 5급 전사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조장. 제가 계속 미궁에 정밀 조사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불과 5년 전입니다! 강화 개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미궁이 변화하려는 징조라고요!=
=…….=
=이번 사건도……!=
=라빈. 성제님의 앞이다. 자중해라.=
=조장…….=
=돌아나가면 다시 위에 건의해보겠다. 그러니…… 조용히 하도록.=
=……예.=
조금 무거워진 침묵이 공터를 채우고 있을 때였다.
꾸르륵-
어느 기사의 뱃속에서 굶주린 소리가 울려 퍼지니 몇 명이 뒤따라 꼬르륵, 꾸우우— 같은 뱃소리를 낸다.
그즈음 엽사와 술사도 회복의 적용을 받아 급격한 치유의 후유증으로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빼면 멀쩡해졌기에 환인은 건조 식량 주머니에서 음식을 꺼내 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얼굴을 붉히며 사양했다.
=아닙니다. 저희를 구해주셨는데 어찌 염치없이 식량까지…….=
=짐을 모두 소실하셨지 않습니까. 다른 기사들과 합류하기 위해서라도 기운을 차려야 하니 사양 말고 드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기사들은 면목 없어하며 이실리테가 꺼내준 식량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지만, 음식이 입에 들어가기 시작하니 허기를 참을 수 없었는지 짠 육포와 조금 딱딱한 빵, 치즈에 도수가 낮은 술을 들이키며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웠다.
10인분의 식사가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비례해서 혈색이 더욱 좋아진 기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인과 그의 여자들에게 날개를 바짝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올렸다.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시고 먹을 것까지 나누어주신 성제님의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무장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는 도중 적과 마주친다면 몸을 지킬 수단이 있어야 할 텐데, 저희가 노획한 전투 천사들의 장비라도 쓰시겠습니까.”
=다행히 저희도 노획한 장비를 챙긴 것이 있습니다. 썰물 시간대라 이형종의 출현도 잦아들 테니 지금 바로 동료들과 합류하면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조장이라 불렸던 여기사는 따로 허리춤에 매어둔 주머니를 환인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미약하나마 들어와 이형종을 사냥하며 회수한 위상석과 소지금입니다. 성제님의 성불행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에 기부하고자 합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필요한 곳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귀족이나 다름없는 기사들의 기부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주머니를 받았더니 제법 묵직하다.
환인은 제법 수지맞은 장사라고 생각하며 백려강의 정신적 피로 해소를 겸해 평온의 파동(feat.원기방출)을 펼쳤고, 기사들은 훨씬 편해진 모습으로 옆의 섬을 향해 날아올랐다.
=안느 언니 엄청 뿌듯한 표정이네.=
=응? 그야 죽을뻔한 사람들을 구해줬잖아. 넌 기분 좋지 않아?=
=전 예의를 갖춘 사람들이어서 좋은데요. 오빠 손에 주머니를 올려놓을 때 난 소리에 따르면 적어도 4급 위상석이 4개에 금화도 몇 개 들어있는데 그것만 해도 30금화정도잖아요.=
아영의 분석에 주머니를 열어본 환인은 정말 황색, 연두색, 보라색, 군청색의 4급 위상석과 번쩍이는 금화 3개가 들어있는 걸 알게 되었다.
평균 시세 7.5금화의 위상석이니 금화까지 합쳐 33금화.
그걸 옆에서 본 아영이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해본다.
=음. 신전에서 베푸는 고위 회복술이 상처의 경중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회에 5금화 정도의 기부금을 내거든요. 다섯을 치료해주고 성제님의 평온의 파동에 식량까지 계산하면…… 출장 회복 비용까지 더하면 이윤은 거의 없는 셈이네요.=
=아영이 너는 진짜……. 성술을 그렇게 계산적으로 하면 땅신님이 노하실지도 모른다 너?=
=안느 언니는 성수를 내다 팔고 희석 성수를 양칫물로 쓰고 성수를 적신 수건으로 땀도 닦으시잖아요. 그거에 비하면 기부금 명목으로 치료비를 받는 건 무척 건전하지 않을까요?=
=그, 그건. 몸을 청결히 하는 것도 신자의 의무니까.=
=몸을 청결히 하는 건 오빠한테 잘 보이려고…… 아야!=
얼굴이 빨개진 안느는 아영의 머리를 꽁 쥐어박아 입을 다물게 하고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바로 갈 거지?=
“그래. 바로 움직인다.”
원래는 기사들을 근처 동료 기사들에게 안내해주는 것까지 생각했었다. 자신이 목격한 숨겨진 길을 탐색하는데 기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랬는데 기사들은 알아서 가버렸고 환연의 바람 정령 정찰에 따르면 근방 2km 내에 사람은 없다고 하니 조사하기에 최적의 타이밍.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비상을 이끌고 목표로 한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가면서 자신이 예측한 내부 상황을 일단 이야기해주어서 주의를 환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만약 산 안쪽에 정말 이형종 생산 설비가 갖춰져있다면 격전이 벌어질 수 있다.
마음을 다잡고 대비한 상태에서 맞닥트리는 것과 불시에 마주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큰 법이니까.
목표지점에 도착한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환연은 바람의 정령을 불러다 구름을 한 번 밀어내봐라. 백려강은 이형종은 물론이고 기사들이 다가오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응.」
=네, 오라버니.=
구름이 일반적이지 않다 보니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경우까지 염두에 뒀지만,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구름은 아닌지 중급 바람 정령들이 꺅꺅 웃으며 구름을 밀어내는 것을 구경했다.
「야~! 따로따로 놀지 말고 한 번에 밀어내란 말이야~!=
물보다 비중이 낮은 구름이어서인지 이리저리 흔들리며 좀처럼 잘 밀려나지 않는다.
바람 정령들의 조직력이 낮아 어떤 정령은 빨리 밀어내고 어떤 정령은 늦게 밀어내니 그 틈새로 허연 구름이 드라이아이스처럼 흘러들어오는 거다.
그 구름에 닿는 것이 싫은 어떤 정령은 환연의 말을 무시하고 이탈해버리기도 하고 구름 자체에 약간의 점성이나 형상 기억 기능이 있는지 좀처럼 산자락에서 떨어지지 않기도 한다.
총체적인 난국에 환연이 짜증을 내면서 환인에게 소리쳤다.
「아잇 진짜. 환인! 애 하나 데려올 테니까 걔한테 영기 넣어줘서 그냥 혼자 확 밀어내버리게 하자!」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가 강한 바람으로 밀어낸다면 이 근방의 구름을 전부 다 밀어버릴 정도가 아닌 한 오히려 구름을 폭풍처럼 흐트러트려 버리겠지.”
환인은 수첩을 꺼내 그물방식으로 바람 정령을 배치, 체계적으로 구름을 밀어내는 방법을 환연에게 가르쳤다.
바람의 정령이 내뿜어야 할 바람의 강도에서부터 내뿜어야할 간격, 정령들이 서야할 위치에서 전진하는 속도까지.
대충 정령 다섯을 불러다가 되는대로 밀어내던 환연은 그 체계적인 방식에 「왜 이런 방식을 못 떠올렸지?」 손뼉을 짝 치며 주변의 중급 바람 정령을 죄다 불러들였다.
그 숫자만 물경 60.
수십의 정령들이 꽥꽥거리는 소리에 안느와 아영이 새파래진 안색으로 귀를 막으며 물러서지만, 환인은 환연이 정령들에게 강한 강제력을 발휘하며 주변의 구름을 성공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대한 수직형 통로.
성공이다.
정령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은 환연의 이미지가 가장 큰 역할을 한다. 환연의 지식이 충분해지고 이미지도 뚜렷해지니 정령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다녀오지. 얼마나 깊이 내려가야 할지 모르니 너희는 여기서 대기해라. 비상. 가자.”
뀨읏!
환인은 비상을 타고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산자락의 절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깊이가 깊어지자 환인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환연은 그가 알려준 것을 응용, 원통형에서 구체형으로 정령들의 대열을 변화시켜 구름에 파묻히지 않게끔 꾸준히 바람을 밀어낸다.
환연이 만들어낸 바람막은 지름이 약 30m. 바람막의 한쪽이 절벽에 붙은 덕분에 회백색 바위 지층이 튀어나온 듯한 절벽을 따라 내려가며 절벽을 낱낱이 살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와. 지금 100m 정도 내려오지 않았어? 깊이가 꽤 깊네.」
하지만 통로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혹시 이 절벽에 통로가 없는 걸까. 아니면 좀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하나.
산 반대쪽은 물론 위아래도 짙은 안개 같은 구름이 껴있어 시야가 완벽히 차단되어있다. 그러다보니 기묘한 압박감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짙은 회색의 구름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나 공격해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공포라는 감각이 마비된 환인에게는 단지 시야를 가리는 귀찮은 자연현상일 뿐.
“환연. 땅 정령으로 살펴보는 건 어렵나.”
「……응. 위쪽 표면하고 다르게 산 안쪽은 거인숲 미궁처럼 정령의 간섭을 억제하나 봐. 정령들이 들어가기 싫어해.」
탐색이 길어지겠다 싶을 때 정령들이 만들어낸 바람의 벽을 뚫고 날생선 몇 마리가 뛰어들었다.
환인은 말없이 방벽 단검을 펼쳐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날생선을 찔러 죽이는 한편 회수해 아스펜드에 수납하며 울퉁불퉁한 회색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을 수색해 나간다.
이쪽에 먹잇감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간 듯 시간이 지날수록 날생선이 뛰어드는 빈도가 늘어난다.
깊이도 더 깊어져 200m에 도달할 무렵, 약 4m 둘레의 동굴 입구가 환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곳이 다친 천사가 들어간 곳임을 직감한 환인은 비상에게 지시해 곧바로 그 구멍에 들어섰다.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안쪽에서부터 불어와 그의 몸을 휘감으며 동굴 입구를 통해 빠져나간다.
그새 환인의 안주머니에 들어갔던 환연이 머리만 살짝 내밀고 말했다.
「환인. 안쪽에서 바람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어.」
“이 바람이 구름의 침입을 막는 기관인가 보군.”
그렇다면 천사들도 이 구름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인가. 환인은 비상의 등에서 내려 광명창을 꺼내 들고 환연에게 바람 정령을 전부 불러들이라고 지시했다.
나갈 때도 바람 정령이 필요하다. 이런 산속에는 바람 정령이 잘 들어오지 않으니 밖에서 챙겨온 정령을 보관해놓아야한다.
환인이 60의 바람 정령을 전부 영혼 구슬로 만드는 광경에 환연이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상급 바람 정령이 환인 너더러 징그럽고 혐오스럽대.」
“…….”
이렇게 미움받아서야 상급 정령을 정령 구슬로 만들어서 활용하는 계획은 물 건너갔군.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데려오기 전에 일단 초입이라도 정찰할 생각으로 조심스레 나아갔다.
「이게 뭐야?」
그리고 20m도 채 걷지 않아 나타난 천장 높이 4m의 40평 넓이만 한 공간에 눈썹을 작게 찌푸렸다.
벽에는 3m 크기의 캡슐 형태 구조물이 나란히 박혀있었는데 그 숫자가 족히 40개이며, 캡슐은 전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전면부가 투명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캡슐을 보살피는 역할인지 공동을 돌아다니던 일곱의 남녀 평천사가 환인의 출현에 무표정으로 달려든다.
광탄에 캡슐이 손상되는 것을 꺼리는 듯, 두 손에 빛을 맺은 채 육탄 돌격을 행하는 천사들.
오히려 환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광명창을 휘둘렀다.
천사들의 성비는 남자 둘에 여자 다섯이었는데, 다섯의 여자 천사가 전부 임산부처럼 배가 불러있었던 것.
퍽.
환인이 휘두른 광명창에 몸이 세로로 갈라진 여자 천사가 내장을 쏟으며 철퍽 엎어지는데 넘어지는 충격에 음부에서 달걀 같은 액체가 촤악 소리와 함께 분수처럼 내뿜어져 나왔다.
꿀렁거리며 음부에서 쏟아져나오는 액체들. 이윽고 핏물까지 섞여 질질 흘러내린다.
배 안에서 깨진 알의 껍질이 자궁을 찌르고 찢어서 핏물이 흐르는 모양새.
환인은 그 모습에서 이엘카타의 흔적을 겹쳐보았지만, 동요하지 않고 나머지 평천사도 모두 처단한 뒤 피 냄새로 가득한 공동을 다시 둘러보았다.
캡슐 내부에는 정체불명의 녹색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기포가 안에서부터 흘러나와 캡슐 윗부분과 연결된 곳을 통해 흘러나가고 있다.
그런 캡슐 안에는 타조 알보다 조금 더 큰 알이 둥둥 떠 있거나, 아니면 연령대가 천차만별인 알몸의 남자, 여자 천사가 들어있었다.
환인의 시선이 죽어서 널브러진 여자 평천사들에게 향했다.
하나같이 배가 이상한 모양으로 찌그러진 채 가랑이 사이에서 투명한 액체와 노란 액체가 분리되어있는 것을 질질 흘리는 모습.
이어서 영혼의 눈이 천장과 벽, 바닥을 차례대로 훑는다.
캡슐과 이어진 미궁의 경락. 캡슐 속에서 자라고 있는 천사들. 그런 캡슐을 관리하는 남자와 여자 천사들.
환인은 이 ‘배양실’의 매커니즘과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의 순환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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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갈비뼈에 금 간 첫날은 원래 잘 안아픈가봅니당..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서 지금은 복대를 착용하고 있어용ㅠㅠ
하.. 주인공한테 큰거 줄랬는데 정작 큰게 온건 글쟁이였고ㅋㅋㅋㅋ
우유랑 멸치하고 견과류 열심히 먹어야겠네요!
날도 추운데 독자님들도 몸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