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31화 (631/813)

632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

환인이 영도에 다녀오고 사흘.

그가 이런저런 일로 천왕궁과 천공성을 오가고 있을 때 여자들은 천주산의 또 다른 미궁인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 입장 준비를 해나갔다.

=이슬아. 식재료 준비는 어떻게 됐어?=

=식재 준비는 끝났어. 저번에 구매해놓은 휴대 식량도 전수 검사했는데 멀쩡해.=

=상비약은 율이 언니가 다 점검해놨고…… 파티가 강하니까 미궁을 들어가도 몇몇 소모품을 제외하면 별로 쓰는 게 없으니까 준비가 편하네.=

=그래도 꼼꼼히 준비해야지. 이거 준비 끝나면 마차도 한 번 점검해야 해. 안느, 식이 성수랑 성수포는?=

=어, 저번에 쓰고 40장 남은 거랑 이번에 새로 보충한 거 260장 더해서 총 300장 준비했어. 성수도 100mL짜리로 300병 다시 채워놨고. 아영이 덕분에 성수 만드는 것도 편해져서 좋더라.=

전체적인 준비물은 비슷하다. 한 달 치 식량과 생활용품 전반에 만약을 대비한 상비약과 전투 소모품 및 장비 손질 도구 등.

=이실리테 언니, 오빠 나갈 준비 하심다.=

=벌써? 그럼 안느, 마차 점검 부탁할게.=

=잘 다녀와~.=

이실리테와 안느가 번갈아 가며 환인을 수행하고 나머지가 입장 준비를 하는 동안 백려강은 아영의 도움을 받아서 몇 가지 준비물을 더하고 빼며 바삐 움직였다.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을 탐사하며 느꼈던 미진한 점을 보충하고 과한 부분은 빼는 작업이다.

먼저 화살과 화살통.

잊혀진 옛 도시 미궁에서 따라다니며 화살을 쏴본 결과 벼락활은 유사시에 위상력으로 화살을 만들어 쏠 수 있지만, 그건 번개 속성이기도 하고 위상력 소모도 심해 많이 쏠 수가 없었다.

준비했던 화살도 막상 써보니 벼락활 유리텔과 길이가 맞지 않았고 화살대도 약했으며 전용 화살통도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던 것.

그런 이유로 둘은 따로 시간을 내서 엽사 조합 내 마도양품 판매점을 찾았다.

일반 화살통만 필요했다면 제작 공방이 모여있는 거리로 갔을 것이고 주문형 마도구와 마도기가 필요했다면 마탑을 찾았겠지만,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마도구이면서 여러 가지 제품을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장소다.

그리고 조합의 판매점은 이를테면 공산품을 모아놓은 곳.

=오? 이건 7세대 흑조잖아? 앗, 이건 희귀하기로 이름난 라-아우레아의 하늘발톱 3세대……!=

마침 플라비우스족은 활을 다른 근접 병기만큼이나 주력으로 사용하는 종족이고 엽사 조합 또한 주도의 중상급 모험가나 탐험가 조합원들을 위한 전문점이다 보니 상등품이 여럿 전시되어있었다.

고급스러운 살롱처럼 꾸며진 판매점에서 아영은 전문 판매원을 데리고 마도기를 열심히 구경했다.

이름난 공방의 마도궁魔導弓에서부터 궁사의 보조 무기인 중단검이나 표창, 투척검, 일반적인 소모품인 미궁 탐사용 함정 해제 도구에 비상용 연막 구슬과 소모용 마름쇠까지.

마름쇠마저 궁사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만한 공방의 제품이다.

손가락 끝에 칼날이 발톱처럼 붙어있는 장갑을 구경하며 눈을 빛내던 아영은 한 걸음 뒤에서 후후 웃는 백려강의 모습에 방문 목적을 뒤늦게 상기하곤 멋쩍게 웃었다.

=이제 화살통 보러 가자.=

=이쪽입니다.=

판매원이 안내한 곳에는 일반적인 동그란 화살통 모양부터 라드세아 풍, 히스론드 풍, 메리아놀 풍의 예술품에 가까운 화살통도 있었고 평범한 벨트 파우치나 주머니 형태의 화살통도 있었다.

깔끔하게 손질된 상태로 진열대에 걸려있는 것 중 아영이 집은 것은 1,000발을 담을 수 있는 길쭉한 나뭇잎 모양의 아공간 화살통과, 세모 모양의 통을 다섯 개 모아 오각형으로 만든 화살통이었다.

=아영. 이건 왜 다섯으로 나누어 놓은 거야?=

위에서 보면 다섯 잎 클로버처럼 붙어있는 화살통을 든 백려강이 묻자 활골무를 껴보던 아영이 대답했다.

=궁사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뭘 거 같아?=

=어떤 약점 속성도 공략할 수 있는 자유로운 속성의 전환?=

=맞아. 그런데 생각해봐. 얼음의 타락 정령이랑 싸우게 됐어. 화염 화살이 필요한 상황에 화살통에서 화살을 딱 뽑았더니 얼음 화살이야. 버리고 새로 뽑았는데 이번에는 물 화살이야.=

=아……. 아공간 화살통은 통 안에 화살이 감춰져 있으니까 원하는 걸 뽑기 어렵겠네.=

=한 공방에서 제작한 화살을 오랫동안 쓰면 손끝의 감각만으로 이 화살이 무슨 화살인지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속성 화살 공방은 엄청 많고 화살의 종류는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아. 그러다 보니 아예 화살통을 나눠서 쓰자고 했고, 그렇게 나오게 된 게 그거야.=

화살은 조그만 홈과 화살 깃의 모양에 따라 영향이 많이 가는 소모품이다.

공방은 무늬로 화살을 쓸 궁사에게 편의를 주려 했지만, 그러자니 화살의 성능이 미묘해졌다.

고민하던 공방들은 화살의 품질과 성능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속성 화살을 쓸 정도의 궁사라면 아공간 화살통 정도는 쉽게 장만할 재력을 갖췄으리라 생각해서 하나의 제품을 만들었으니.

=그게 이 다중 보관 화살통이란 거지.=

=확실히 아공간 화살통이 좋아 보이네. 습기에 망가질 일도 없고 전투 중에 분실하거나 맞아서 부러질 걱정도 없고.=

=그렇지. 여기요. 기본 4대 속성하고 어둠 속성 화살 각각 200발씩 가져다줘요. 일반 화살은 누아르 공방 화살 2세대로 1,000발 가져오시고요.=

=예, 고객님!=

=우리 누군지 알죠? 덤터기 씌울 생각이라면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무… 물론입니다! 누가 감히 성제님의 영혼 기사분들께 그런 협잡 짓을 하겠습니까!=

아영과 백려강은 몰랐지만, 두 사람은 팔라툼의 엽사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희귀한 용인족 여성에 7급 성술사이면서 엽사 기술을 습득한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인들.

성제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사건들이 워낙 굵직굵직하다 보니 덩달아 그녀들의 유명세 또한 높아졌기 때문.

=다섯 속성의 화살은 1발당 10동화씩 해서 1금화, 누아르 공방제 2세대 화살 1,000발은 발당 1동화로 10은화, 로렌실 아공간 화살통 3금화, 프리메다 5중 화살통 5금화 합쳐 9금화 10은화입니다……만, 특별히 할인해 9금화에 모시겠습니다!=

=와~ 고마워요~. 그보다 너 진짜 활골무 필요 없어?=

=여기 있는 활골무는 전부 내구도와 방어쪽에 치중되어있어서. 나중에 유리 언니한테 신체 능력 증가 비술을 부탁드리려구.=

=하긴. 특주품이면 유르파 언니한테 부탁하는게 좋겠지?=

그럼에도 그녀들이 화살통을 사러 온 것은, 팔라툼의 화살통 시장이 워낙 레드 오션이라 그녀가 만들어도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지금부터 만들어야 하니 재료를 준비하고 하면 일주일 넘게 걸릴 거라고.

그렇게 장비를 갖추고 화살통에 익숙해지게끔 매고 화살의 스위칭과 연사, 속사, 연발 사격을 연습하고 온갖 자세에서 목표물에 명중시킬 수 있도록 아크로바틱도 연습하던 중, 그녀를 위한 마도구가 하나 더 완성되었다.

=려강이 아가씨~ 자, 이거.=

=아, 드디어 완성하신 거예요?=

유르파가 만들어준 것은 먼저 이야기가 나왔던 정신 침해 내성 목걸이.

=4급 위상석을 쓴 시험제작품이니까 너무 맹신하지는 말고, 이번에 들어가면 써보고 감상을 말해주렴. 계속 개선해 나갈 생각이니까.=

=유리 언니, 감사해요.=

목걸이는 아영의 7급 정화 성법을 4급 위상석에 새겨넣은 성법기로, 그 효과는 4계층의 정신 침해를 상당한 부분 막을 수 있게끔 제작되었다.

=5급 위상석으로 만들면 5계층에서도 통할 거고 6급 위상석으로 만들면 6계층에서도 통할 거라고는 생각되는데…….=

곧장 6급 위상석으로 만들기에는 애로사항이 많다.

7급 성술인 정화를 위상석에 새기는 것도 회로도에 따라 효율이 정말 오락가락하는 데다 위상석도 형태가 모두 제각각이니 회로의 변주도 감안해야 한다.

그렇게 새겨넣으면 끝나는 게 아니다. 효율을 위해 회로의 굵기와 길이, 곡선과 배치도 생각해야 하니 뇌를 쥐어짜는 수준의 계산이 필요한 것.

=아무튼 완벽하게 막지는 못하니까 자기한테 종종 평온의 파동을 받아야 해. 안 받으면 네 정신력으로는 한 달? 그 정도 밖에 못 버틸 거야. 5계층, 6계층 더 깊이 내려가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들 거고.=

=네. 유의할게요.=

백려강은 유르파의 품에 안겨 그녀의 뺨에 친애의 뽀뽀를 해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유르파는 귀여운 여동생의 애교 같은 느낌에 푸근한 미소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즈음 천공성의 테이아무스 섭정 집무실.

마치 고도 10km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풍경이 창밖에 펼쳐진 우아하고 화려한 내실에서 환인은 테이아무스 섭정의 간절한 애원을 받고 있었다.

=혹시 보수가 부족하시면 두 배로 늘려드리겠습니다. 닐비나 천왕 폐하께서도 예하께서 제사의 주관을 해주시길 바라고 계세요.=

“보수 문제가 아닙니다.”

니오네브레스의 고위 관직, 공직자들은 왜 이렇게 전면 유리창을 선호하는 걸까.

뒷짐을 지고 창밖의 까마득한 지상을 구경하던 환인은 섭정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딱히 정체를 숨길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름을 대책 없이 널리 알릴 생각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

현재 팔라툼의 영혼사 비중은 날로 늘어만 가고 있다. 비상을 타고 하늘을 날다 보면 곳곳에서 성불행을 진행 중인 정식 영혼사가 눈에 띄는 수준.

대륙 규모의 이벤트인 승령천제가 몇 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테이아무스 섭정은 며칠 전부터 환인을 붙잡고 제사를 주관해달라며 부탁해오고 있었다.

환인은 그걸 거부하고 있었고.

이유는 간단하다.

팔라툼의 승령천제 제사를 자신이 주관한다고 해서 이 이상 명성의 증가는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자신의 이름은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

팔라툼에서 제사를 지내봤자 자신이 얻는 것은 성가심 뿐.

“이런 마당에 제가 팔라툼에서 승령천제를 주관한다면 다른 삼국, 라드세아와 벨티칼, 메리아놀은 그 즉시 시기와 질투를 드러낼 것입니다. 성제 등위 후 처음 맞는 승령천제를 팔라툼에서 치렀다고 말입니다.”

=그렇다 하여도 그 누가 성제님을 손가락질하고 모욕하겠습니까?=

“정말 없다고 단정하실 수 있으십니까.”

반대로 팔라툼은 적지 않은 무형적 이익을 얻겠지.

테이아무스는 다소곳이 다리를 모아 앉은 모습으로 환인을 향해 약속한다.

=만약 삼국의 누군가가 성제님과 영도를 향해 불온한 발언과 적대심을 드러낸다면, 히스론드는 절대 좌시하지 않음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대가로 팔라툼은 저와 영도의 긴밀한 관계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겠군요.”

=……10점의 유물과 1만 금화의 보상으로도 안 되겠습니까? 저는 두 분 폐하께 좋은 추억을 드리고 싶을 뿐인데…….=

물질적 보상과 상대방의 마음에 호소하는 부탁을 번갈아 사용하는 테이아무스.

환인은 속으로 진절머리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말했다.

“정히 그러시겠다면, 테이아무스 섭정께서 직위를 내려놓고 저의 노예가 되면 저도 생각을 바꿔보겠습니다.”

약간의 짜증과 분노를 담은 환인의 발언은 상대방에게 모욕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지만, 테이아무스는 기분 나쁘다는 기색조차 낼 수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거절한 안건을 두고 계속해서 의사를 타진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니까.

오히려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기에 섭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두 달의 시간만 주신다면 후임자를 뽑고 인수인계하여…….=

“타임아웃입니다.”

=……너무하세요.=

테이아무스는 여자로서 놀림당한 기분에 살짝 뺨을 부풀렸다.

8급 성술사이자 한 아이의 어미이면서도 처녀 같은 아름다움과 일말의 순수함을 갖춘 여인의 작은 투정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녔지만, 환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너무한 것은 섭정이신 거 같군요. 벌써 사흘째입니다. 보상이 준비되었다며 부르더니 실수가 있었다고 돌려보내고, 이번에는 진짜 준비가 다 되었다며 오라기에 왔더니 엉뚱한 소리만 하고. 방문할 때마다 싫다는 것을 계속 권유하시니 이제 화를 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이만저만이 아닌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으니 그건 상쇄되었어요.=

“…….=

환인이 눈을 가늘게 뜨자 테이아무스 섭정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그 시선을 피해버린다.

아무래도 섭정은 섭정인 듯 하다.

자신의 성향과 넘으면 위험한 선의 위치를 어느 정도 읽었기에 나오는 외줄 타기 솜씨가 수준급이다.

이래서야 오늘도 보상을 받기 어렵겠다고 느낀 환인은 후우, 들으란 식으로 한숨을 내쉬며 금 타래처럼 찬란한 금발을 아름답게 늘어트린 테이아무스 섭정에게 다가갔다.

푹신한 회장 의자 같은 것에 앉아있던 테이아무스 섭정은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는 환인을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본다.

환인도 자신을 올려다보는 약간 베이비 페이스 느낌의 섭정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한 아이의 어미이지만, 놀랍게도 테이아무스 섭정은 처녀 수태하여 비나=루에나를 낳았다고 했다. 플라비우스족 여성에게는 매우 드물긴 하지만 간혹 벌어지는 일이라고.

아무튼 테이아무스 섭정은 심기체 처녀론에 따르면 일단 심기는 처녀임이 틀림없다.

닐비나를 키우고 국정을 운영하느라 바쁜 그녀에게 연인도, 남편도 없음은 이미 닐비나의 폭로로 알고 있는 상황.

“테이아무스 프리엔리.”

=뭐, 뭔가요…….=

남자의 중저음이 귓가에 닿으니 테이아무스는 날개가 돋아난 부분이 간지러워졌다. 갑자기 무게를 잡으시다니, 뭘 말씀하시려고…….

확—

이어 느닷없이 환인의 옆구리에 끼워진 테이아무스는 잠깐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을 타버렸다.

그 대가는 볼기짝으로 돌아왔다.

철썩! 철써억—!

=꺅?! 아읏! 아, 아파요……!=

환인은 사흘간 버린 시간의 분풀이를 그녀의 엉덩이에 쏟아부었다.

한 번 산란을 경험해서일까. 훌륭한 골반에 그만큼 훌륭한 둔부는 정말 때릴 맛이 날 정도로 완벽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런 엉덩이, 최고급 비단에 감싸여져 있는 엉덩이에서 철썩— 소리가 날 때마다 물결치듯 살결에서 파문이 일며 당혹해하면서 고통에 신음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처얼썩—…… 철써억—

=꺄…! 하으읏…!=

정말 때릴 맛이 나는 엉덩이다. 백치령의 단단한 여기사 엉덩이와는 다른 손맛이라고 할까.

갑작스런 행위에 놀라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지만, 반사적으로 다리를 바동거리며 두 손을 뒤로 돌려 엉덩이를 가리는 테이아무스.

환인은 그 손마저 모아서 잡고 마저 엉덩이를 때려 나간다.

철써—억! 처얼써억—!

=끕…! 하응…!=

그렇게 손바닥이 살짝 얼얼할 정도로 12대의 볼기짝을 때린 환인은 그녀를 푹신한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저앉아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린 채 당혹, 자그마한 분노, 어이없음, 심란, 창피, 억울, 다양한 감정을 얼굴로 드러내는 테이아무스를 보니 환인도 어느 정도 속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팔라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귀한 신분의 볼기짝을 때렸다는 배덕감도 한몫한다.

정신적, 육체적 충격에 잠시 말도 못 꺼내고 있던 테이아무스가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이, 이게 무슨 행동이에요!=

“사람을 우롱한 무례한 아가씨에게 내리는 벌입니다. 오늘 일을 교훈 삼아 다음에 찾아올 손님에게는 예의를 갖춰 대하시길.”

입을 살짝 벌린 테이아무스에게서 돌아선 환인은 충격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안느에게 손짓했다. 돌아가자고.

=도, 도령…! 정신 나간 거야…?! 섭, 섭정님의 엉덩이를…!=

=맞을 짓을 했다면 맞아야지.=

그렇다고 반쯤 왕이나 다름없는 섭정의 엉덩이를 때리나? 왕족 모독으로 잡아넣겠다고 날뛰면 어쩌려고?

도령이면 그렇게 생각 없이 저지르지 않았을 테지만…….

안느는 아직도 멍하니 주저앉아있는 섭정을 힐끔 곁눈질했다가 환인의 곁에 따라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상은 어쩌고?=

“보상을 빌미로 승령천제 때까지 날 붙잡아둘 생각인 거 같은데 당해 줄 수야 없지. 승령천제가 끝난 뒤에 다시 찾아와서 받아내든가 하고 오늘은 돌아간다.”

안느는 조금 머리가 어질어질해져서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가 막힌다고 해야 할지, 도령은 진짜 겁이 없는 건가?

섭정 집무실을 나온 안느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샐쭉한 표정으로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그래서 섭정님의 엉덩이를 때려본 소감이 어때?=

“뒤로 박힐 때의 네 볼기짝보다는 못하더군.”

=……!=

깜짝 놀란 안느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플뢰의 가청음 영역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는 빨개진 얼굴로 그의 팔을 잡고 흔들며 투정을 부렸다.

=도령 짓궂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걱정 마. 아무도 안 듣고 있으니까.」

그의 코트 앞섶에서 고개를 내민 환연에게 안느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는다.

=천공성도 결계가 펼쳐져 있어서 정령들이 함부로 못 돌아다니는 곳이라며? 그런데 알 수 있어?=

「그거야 벽 너머의 일이고. 아무튼 테이아무스가 뛰쳐나와서 왕족을 모독한 죄인을 잡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안 지르는 걸 보면 큰 문제는 없겠네.」

=……섬뜩한 소리 할래?=

「섬뜩하긴. 너 나랑 같은 거 본 거 맞아?」

환연의 한심해하는 표정에 안느가 한쪽 눈썹을 살짝 띄웠다.

=응?=

「환인이 ‘너, 내 성노예가 돼라.’했는데도 테이아무스는 잠깐 고민하다가 받아들이려 했잖아. 내막에는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말이야. 근데 고작 엉덩이 몇 번 맞은 거로 기사들을 불러들일 거 같아? 그냥 ‘저 변태 같으니.’하고 속으로 투덜거리거나 그 변태성을 붙잡고 어떻게 더 회유할 수 없을까 생각하겠지.」

=그건……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러니 돌아가면 바로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에 들어간다.”

테이아무스 섭정은 창피함 때문이라도 당장 움직이지는 않을 거다.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붉어져 있었으니 적어도 그게 가라앉을 만큼의 시간은 걸리겠지.

그 뒤에는 자신을 비롯해 여자친구들까지 전부 천공성으로 불러들인 다음 감금 비슷하게 해 버리려 하지 않을까.

그러기 전에 미궁에 들어간다.

집으로 돌아온 환인은 유르파와 실루에 쿠르티, 쿠핀, 쿠라까지 해서 단체로 천왕궁 근처 기사단 본부를 향해 움직였다.

마차는 기능을 모두 종료한 뒤 아스펜드에 수납했고 짐도 모두 챙겼다.

문제가 생긴다면 당장 팔라툼을 뜰 수 있는 상태.

=세상에.=

이번에도 집에서 기다릴 거라 생각했던 유르파는 어째서 자신도 같이 미궁에 들어가는지 안느에게 그 이유를 들었다가 입을 살짝 벌릴 정도로 놀람을 드러냈다.

설마 팔라툼의 서열 2위(1위는 닐비나)의 엉덩이를 팡팡 때리다니, 그것도 섭정의 집무실에서!

=와, 오빠 완전 상남자시네요!=

쿠핀의 등에서 자신의 앞에 백려강을 앉힌 아영이 쿠핀의 고삐를 쥔 채 키득거린다.

=킥킥. 미궁에서 나왔더니 기사들이 포진해서 잡으려 들면 웃기겠는데요?=

=그게 뭐가 웃기니?=

이실리테와 쿠르티의 등에 타고 있던 유르파가 황당해하자 아영은 그렇지 않냐며 묻는다.

=유리 언니는 무슨무슨 죄로 잡으려 들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에게 오빠가 내막을 알려주면 기사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한데.=

=아영, 남들이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니까 거기까지 해.=

=넵.=

사람들을 피해 뒷골목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슬슬 길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인기척도 늘기 시작한다.

그 길은 한국의 국회의사당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천왕궁으로 가는 길이었기에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골목이라 해도 인기척은 그리 줄지 않는 편.

뒷골목 슬럼 거리라면 모르겠지만 평범한 주택가이기에 더욱 그렇다.

환인은 환연의 가이드에 따라 사람이 적은 길로만 움직이며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감각의 천왕궁 근처 기사단 정문에 도착했고…….

=신원 확인했습니다. 성제 예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간단한 신분 확인 절차와 기밀 미궁 입장 허가증을 제출한 뒤 기사단 부지에 들어섰다.

그 뒤의 절차는 매우 간소했다.

한 기사의 안내에 따라 쿠르티와 쿠핀, 쿠라를 기사단의 쿠에 축사에 맡긴 다음 얼핏 봤으면 그냥 보관고 입구라고 생각했을 관문, 두 명의 하급 기사가 지키고 선 관문을 통과했더니 그 속에서 별천지가 펼쳐졌던 것.

머리 위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발아래 펼쳐진 포말처럼 짙은 구름바다.

그런 구름바다 사이사이에는 드넓은 땅과 산봉우리가 섬처럼 솟아나 있다.

환인은 한쪽 시야를 가리는 섬……과 반대쪽에 아득히 펼쳐진 구름바다를 보다가 입장을 안내해준 기사의 목소리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 미궁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자신의 책임입니다. 불상사 또한 그러하며 팔라툼은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니 드린 책자를 보시고 위험을 잘 피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예. 안내 고맙습니다.”

=옙. 원하시는 바를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에서 성취하시길.=

한 쌍의 날개를 자그마하게 흔들며 홀로 우뚝 솟은 자그마한 소나무, 그 옆에 난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는 여기사를 바라보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첫 목적지는 4계층으로 분류되는 7번째 섬을……”

그때였다.

그들의 귀에 자그마하게 흘러들어오는 여자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얼핏 들으면 고래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에 환인의 여자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게 천사의 노래인가……?=

=아름다운 소리네요…….=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인기척이나 괴물의 낌새도 없는데.=

그 소리는 불과 1분도 이어지지 않고 사라졌지만, 여자들의 마음속에는 자그마한 여운이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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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점점 화면이 깨지는 빈도가 심해져서 드디어 새 컴을 주문했읍니당.

처음에는 32인치에서 손바닥만한 부분만 깨지더니 점점 깨지는 범위가 넓어지다가 어제는 화면 전체가 까매지더니 다시 켜지더라고요;

혹시 폭발하면서 ssd도 삼켜버리면 미궁기담 자료하고 설정집 설정화 다 날아가버리니까 빨리 주문했어용

저번에 후기로 여쭈었을 때 조언해주신 독자님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당!!

이제 컴 터졌다고 며칠 휴재 할 일은 없을듯 +_+

[작품 설정]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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