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 하늘 도시 팔라툼
환인에게 키스를 받은 주술사는 회백색 풍성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줍어하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떠나갔다.
“…….”
얼떨결에 주술사의 일까지 잘 마무리했지만…… 뭘까, 이 아쉬움은.
「주술사 보지 탐험 못 해서 아쉬운 거 아냐? 난 유르파 안에 들어가 보니까 의외로 아늑하고 따뜻하고 오일탕을 헤엄치는 기분이라서 좋았는데.」
“………….”
「불쾌한 냄새 같은 것도 안 났어. 내 감성 대부분은 너한테서 온 거니까 너도 막상 해보면 좋아하…….」
“그만.”
환인은 안주머니 쪽을 꾹 눌러 「꾸엒」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환연에게 응징을 가한 뒤 비상을 타고 다시 날아올랐다.
이제 진짜 팔라툼으로 복귀할 시간이다.
그냥 돌아가는 시간을 허비한 것은 아니고 마지막으로 마무리해야 할 일로 가야=시라넬에게 영상 통신을 넣었다.
[……성제님?]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여기가 오후라서일까, 시차 때문에 저쪽은 한밤중인지 수정구 너머로 보이는 배경이 온통 어둡다.
그 속에서 가야=시라넬은 속이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잠옷 차림으로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저는 성제님과 대성녀님의 배려로 귀국하고 나서도 분란에 휩싸이는 일 없이 업무에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안느의 동기라서 나름 신경 써준 것인데 네가 잘못되었다면 안느에게 미안했을 테니까.”
[감사드립니다. 안느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지.”
통신 도청을 유의해 모호한 단어만 사용하고 있으니 가야=시라넬도 눈치껏 무난한 안부 인사 정도로만 대답해온다.
환인은 그녀의 눈치가 정상 작동하고 있음을 파악하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영도를 다녀오는 길이다. 대성녀님께서는 네가 혹여나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렸을까 저어된다며 걱정을 드러내셨지. 나 역시 마찬가지이나… 근래에 부쩍 다른 일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져 더는 신경 써주지 못하게 되었다.”
[…….]
“그러나 안느를 통해 가끔 연락을 줄 터이니 너무 상심해 하지는 말고, 잘 지내라고 하기 위해 연락하였다.”
가야=시라넬의 노란 눈동자에 의문이 스며들었다가 이윽고 심각해지더니 고개를 차분히 숙인다.
[지금까지 신경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의 마음이 흘러넘칩니다. 모쪼록 저와 이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성제님께서 하실 일에 집중하여주십시오.]
“이쪽의 조력이 필요하다면 부담 갖지 말고 연락해라. 직접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땅신 교단의 르아윈 아기오시스 니플람 추기경께 부탁드려보도록.”
[예. 수하들을 대표하여 성제님의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성제님의 앞길에 땅신님의 가호가 깃들길 기도하겠습니다.]
이윽고 수정구 안에서 가야의 모습이 사라지고 주변 하늘 풍경이 투영된 투명한 구슬로 돌아간다.
잘 알아들은 기색이고 이후에 엘미느에게서 다시 연락이 갈 테니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통신 수정구를 집어넣은 환인은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남은 일은…….’
엘위드리스 시를 방문해 사망한 플뢰족 기사들의 혼을 알아보는 것뿐이다.
직업자인 기사들. 당연히 대다수가 푸른 영혼이겠지. 수백 가까이 죽었다 했으니 그중 절반만 계약을 맺어 청옥으로 만들면 자신의 전투력이 대폭 상승할 거다.
그러나 그 일이 마냥 간단하지 않음이 드러난 마당이다.
먼저 돌아가서 미궁 안정화의 보상으로 테이아무스 섭정에게 고위 귀족용 공간이동 술법진을 이용할 수 있을지 물어보아야 한다.
메리아놀에서 활동 중인 영혼사들이 내전으로 피바람이 한차례 분 엘위드리스 시를 정화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공간이동 술법진의 연결이 메리아놀의 주도에서 인근 도시로 뻗어나가는 식이라면 그것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이 메리아놀의 주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을 경우 생길 수 있는 트러블 말이다.
그리고…….
‘안느가 문제로군.’
메리아놀에 간다 치면 호위로 여자친구들 일부를 대동해야 한다.
영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날아왔지만,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을 혼자 간다는 것은 체스에서 킹이 적진으로 돌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
문제는 안느를 데려가느냐다.
여자친구들을 모두 데려가는 쪽이 안전하기도 할 테고 좋겠지만, 만약을 위해서 팔라툼에 몇 명은 남겨두고 싶은 게 사실이다. 남긴 여자친구를 핑계 삼아 돌아올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남길 핑계도 적당하다. 짐이 너무 많고 가족이나 다름없는 쿠르티, 쿠핀, 쿠라까지 포탈에 태워 가자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데려갈 여자친구 셋, 남길 여자친구 둘.
이중 데려가는 쪽의 두 명은 당연히 여자친구이자 영혼 기사인 이실리테와 안느가 될테지.
자신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그녀들은 현재 주도의 기사단 단장을 맡아도 무방한 강자가 되었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녀들을 데려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하지만 안느의 현재 신분은 매우 모호한 상태다.
그녀 자신은 왕족의 신분을 버렸다지만, 투사에서 성투사로 이중 직업을 각성하였고 거기서 정령 기사로 재각성했다.
매우 희귀한 3차 전직이며 현재 태풍의 눈이 된 성제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영혼 기사.
핏줄은 왕족의 순혈이고 그녀의 삶에 걸림돌이 되던 외모도 왕가의 금지옥엽 공주님처럼 변했다.
비록 키가 플뢰족 여성 평균보다 30cm가량 더 크지만, 그 정도야 별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니 메리아놀의 귀족들이 보기에 안느는 매우 쓸만한 장기말로 보일 것이다.
안느와 태어날 적 약혼을 맺었다는 약혼자가 튀어나와 그녀와의 관계를 주장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본다.
그렇다고 그녀를 두고 가면…….
‘……아니, 그전에 내 체질로 공간이동 술법을 이용할 수 있는 건가.’
위상류는 자신을 대상으로 한 모든 위상 관련 공격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에 작용하는 기술, 예를 들어 진공 상태로 만들어버린다던가 물로 가둬버린다던가 땅속에 묻어버리는 식의 간접 공격에는 무방비하다.
그 연장선상으로 포탈식도 마찬가지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게 아니라면 크나큰 공간이동 사고가 발생하겠지. 사고의 결말은 높은 확률로 자신의 사망으로 이어질 테고.
“……청옥 확보의 불확실성에 비해 중대한 애로사항이 꽃피는군.”
몇이나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르는 청옥 수집의 기회. 반대급부로 안느의 존재로 인한 메리아놀에서의 트러블과 공간이동 술법진 사고 발생 가능성.
고민은 팔라툼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영도로 향할 때보다는 조금 느긋하게 날아 5시간 만에 팔라툼으로 돌아온 환인은 대여한 주택에 도착했을 때, 미묘한 살기가 주택 주변을 감도는 것을 감지했다.
이실리테의 살기 비중이 높고 그다음으로 안느, 아영의 살기가 뒤따르고 있다.
꾸으……?
비상도 그걸 느꼈는지 환인을 돌아보며 어떻게 해? 하고 묻는다.
“환연, 주변에 매복이나 은신 중인 자가 있나.”
「없어. 그런데 집안에 유르트랑 그 여자가 있거든? 그거 때문에 여자애들이 무척 화난 걸로 보여.」
유르트랑 부단장 때문에 화가 났다니, 자신이 하루 자릴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정원에 내려선 환인은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가서 쉬어라.”
뀻. 뀨으?
좀 있다 집 안에 들어가도 돼? 하고 묻는 비상에게 그러라고 대답한 환인은 문 앞에서 반코트를 벗어 몇 차례 털었다.
날아오며 비상의 곡예비행에 조금 어울려줬다가 먼지 폭풍을 뚫고 나와버렸는데 그 때문에 먼지가 풀풀 피어난다.
「악 먼지!」
“바람으로 옷하고 머리 좀 털어다오.”
「그냥 물로 씻는 게 좋지 않아?」
“뜨거운 물에 몸을 풀고 싶은 기분이니 물은 사양하지.”
어깨에 앉은 환연의 도움으로 머리와 얼굴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으니 문이 열리며 살짝 반가움이 드러나는 얼굴의 이실리테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가셨던 일은 잘되셨어요?=
“그래. 다 잘 해결되었다.”
=오, 도령 왔네? 보고 싶었어~.=
환인에게서 코트를 받아 가는 이실리테. 그녀의 뒤에 나타난 안느는 반가워하는 얼굴로 환인을 뒤에서 끌어안는다.
그걸 본 환연이 비죽이 웃으며 핀잔을 날렸다.
「고작 하룻밤 떨어져 있었는데 유난이야.」
=고작 하루라고 하지 마. 하룻밤이 우리한테는 얼마나 길었는데. 그치?=
헤헤 웃는 안느의 뒤로 유르파와 백려강도 모습을 드러내 웃는다.
=맞아요. 옆방에 오라버니가 계신 것과 계시지 않는 차이가 생각보다 더 크게 느껴졌거든요.=
=응응. 남편님이 출장 나가서 혼자 밤을 보내는 새댁 같은 기분?=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자친구들의 환영에 환인은 약간 묘한 기분을 맛보았다.
이게 일하고 집에 돌아온 가장의 심정인가. 이런 아내들이라면 추가 근무나 잔업, 야근도 기분 좋게 할 수 있겠군.
환인은 등에 안느를 달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아영이 안 보이는데. 유르트랑 부단장을 감시하고 있는 건가.”
=응? 환연이 가르쳐줬나 보네. 맞아, 그 여자가 엉뚱한 짓 못 하게 감시하고 있어.=
헤헤 웃으며 그의 등에 붙어있던 안느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떨어지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방문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였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실리테도, 유르파와 백려강도 동감인지 표정이 좋지 않다.
그 이유는 거실에 들어서서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유르트랑을 보자마자 이해했다.
무릎을 살짝 뒤덮는 회색 플레어스커트와 하얀색 스타킹, 윗옷은 가슴 윗부분이 일一 자로 파인데다 양어깨는 물론 등까지 시원하게 전부 드러낸 하얀색 백오픈 스트랩 티.
평범하게 보자면 문제없는 복장이지만, 트집을 잡자면 엄청나게 잡히는 복장이다.
더욱이 거유에 해당하는 유르트랑이다 보니 그런 점이 더더욱 두드러진다.
아마도 여자친구들은 유르트랑이 또다시 몸으로 용서를 구할 셈이라고 판단을 내린 거겠지.
“오빠 오셨어요?”
“그래. 그리고…… 아데나 부단장.”
=성제 예하를 뵙습니다…….=
환인은 유르트랑=아데나가 자신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을 바라보다 모여있는 여자친구들을 자리에 앉히고 이실리테에게는 차를 내오라 부탁했다.
“아데나 부단장도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 상태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천천히 일어나 다시 자리에 앉는 유르트랑.
표정이 흐린 것을 보면 여자친구들에게 상당 시간 갈굼당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녀들이 물리적으로나 언어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을 거다. 유르파나 백려강의 성정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여럿의 사나운 시선을 아무 말 없이 몇십 분, 몇 시간이고 받는 게 얼마나 큰 고욕인지.
그런 걸 언급해 저쪽에 빌미를 줄 생각이 없던 환인은 모르는 척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제가 자리를 잠시 비운 틈에 연락도 없이 방문하실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시종을 먼저 보내셨다면 이쪽이 약속 시간을 잡았을 텐데 말입니다.”
말도 없이 찾아와 횡액을 당한 건 네 잘못이다는 완곡한 외교적 수사.
=아, 아닙니다. 생각이 짧아 연락도 없이 방문하여 영혼 기사님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유르트랑의 반응에 환인은 약간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건 이실리테를 제외한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여자, 정치 감각이 없는 건가? 그날 몸을 바치러 온 것도 그렇고…….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조금은 아쉽습니다. 그 일이 있고서 며칠 지나지 않아 그러한 복장으로 찾아오신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행동이라는 걸 아셨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환인의 언급에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본 유르트랑은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죄송하지만, 이 옷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부단장 씨.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그… 제 옷은 대부분 이런 것이라서.=
어이없어하는 안느의 질문에 이어 백려강도 황당해하며 묻는다.
=아데나 부단장님. 자작 귀족이시지 않으신가요? 의장복 담당 시중은 두지 않으셨나요?=
=죄송합니다. 가문이 몰락하여 몇 대를 평민과 다름없이 살다가 제 대에 자작 가문으로 복귀하여서…… 귀족의 예법에 무지합니다. 그런 이유로 무도회나 파티에 초대받은 적도 없었기에……. 오, 오늘 찾아뵌 것은 성제님의 존체에 함부로 손을 대고 앞을 가로막은 것에 사죄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환인은 헐벗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그녀의 등 뒤에 붙어있는 삼쌍익에 시선을 주었다.
삼쌍익이면서 자작 작위에 불과한 것을 조금 의아하게 여겼는데 그런 내막이 있었나.
안느도 그러한 사정을 눈치채곤 미간을 찡그리면서 민망함에 타박 주듯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정중한 사과에는 거기에 걸맞은 격식과 복장이라는 게 있어. 까만 정장이라던가 단정한 옷차림 같은 거. 몰락 귀족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아……?=
=저, 정말 죄송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검만 쥐고 선머슴처럼 사내들과 연무장을 뒹굴다 보니 미처 생각을……! 정말 죄송합니다!=
연이어 날아든 지적에 유르트랑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을 확 붉히면서 모두에게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그 바람에 멜론만 한 가슴이 격하게 출렁이니 아영이 조금 기분 나쁘다는 듯이 그 가슴에 시선을 주며 타박한다.
=에이그. 오빠 정액이 흘러나오는 걸 막는답시고 팬티에 손수건 받치고 날뛰다 흘렸을 때부터 뭔가가 뭔가더니.=
=……!=
한숨 섞인 그 타박에 유르트랑은 어깨까지 복숭앗빛으로 물들인 채 날개를 떨었다.
창피해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면 적당할까.
하아…….
에휴.
…….
여자들은 저런 여자 같지 않은 여자를 향해 날을 세웠던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다가 안느가 대표로 사과했다.
=미안해.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부단장 씨가 또 우리 도령한테 몸 대주고 용서받으려고 왔구나 싶었지.=
=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믿어. 우리도 잘 알아보지 않고 죽일 듯이 노려봐서 미안했어.=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유르트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거의 7대를 평민처럼 살아오다가 자신이 각성하고 기사단에 입단하며 가문이 자작위로 복권했다.
부모님도 당연히 귀족 사회나 그에 관한 예절은 모르시고 동생들도 귀족이 아니라 평민들처럼 평범하게 취업하거나 기술을 배워 자기 기술을 벌어 먹고사는 중.
그나마 똘똘한 여동생이 금전 관리에 재능이 있어 가문의 운영을 힘써주고 있었기에 자신은 검만 휘둘렀는데, 그 폐해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돌아가면 예법 선생부터 찾겠어……!’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다짐한 유르트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인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그날의 잘못을 다시 사죄했다.
그 동작이 너무 힘차서일까.
목에 매듭을 묶어 옷의 앞을 지지하던 끈이 브래지어 끈과 함께 훌렁 풀리며 흘러내렸고, 고스란히 드러나 버린 생가슴에 안느는 참지 못하고 쿠션을 집어던져 유르트랑의 얼굴을 맞췄다.
=야! 너 진짜!=
=죄, 죄송합니다!=
펑- 쿠션이 터지며 목화솜과 깃털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유르트랑이 빨개진 얼굴로 당황하며 옷차림을 추스르는 가운데 환인은 눈을 감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환인을 유혹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해도 저런 푼수 짓을 연달아 벌이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그런 뜻에서 합심해 유르트랑을 쫓아내다시피 내보낸 여자친구들을 불러 모은 환인은 영도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대성녀와 나눈 이야기. 이엘카타의 결단. 아야빗 영성과 주고받은 대화.
“이게 제가 생각했던 마도구 기본 골자입니다.”
그리고 아야빗 영성에게 요청했던 마도구 초안과 같은 것을 유르파에게 넘겨준다.
항목을 본 유르파는 매우 흥미가 동한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런 쪽은 전혀 생각 못 한 방식이야. 재미있어 보이니까 나도 한 번 만들어볼게. 내가 만든 거랑 아야빗 영성님이 만드신 거 하고 자기가 비교해주면 좋겠어.=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야기는 그 뒤로도 이어졌다.
하얀 늑대들의 구조 조정을 시행한 것과 가야=시라넬과 협조 관계를 끝맺은 것. 돌아오려던 찰나에 주술사와 마주쳤던 것. 주술사가 해준 거인족 마을의 이야기.
=거인들이 잘살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도령이 아드지의 초 유명인이 된데다 그런 도령이 보낸 거인들이라서 쉽게 받아들여진 걸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한 여자친구들에게 환인은 다음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는 미궁 안정화에 기여한 공을 장거리 공간이동 술법진 사용의 요청을 부탁하려 했다.”
엘위드리스 내전에서 죽은 기사 중 푸른 영혼들을 대상으로 계약을 시도하려 했다는 이야기에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먼저 의견을 낸 것은 환인이 건네준 쪽지를 들여다보던 유르파였다.
=자기 체질을 생각하면 그건 무척 위험하다고 생각해. 위상류는 모든 위상력을 흘려보내는 체질이잖아? 운이 좋으면 공간문을 그냥 쑥 통과하는 걸로 끝날 수 있지만, 위상류가 채 흘려보내지 못해 공간이동 술법에 어중간한 느낌으로 걸쳐지면 말 그대로 공간이동 사고로 이어지는걸.=
=나도 지금 당장 메리아놀로 가는 건 안 좋다고 봐.=
도시마다 공간이동 술법진이 설치되어있다고 해도 모든 길은 주도로 들어가고 주도에서 나와야 하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공간이동으로 넘어갈 수 있는 도시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엘위드리스 령으로 가려면 반드시 주도를 지나야 하는데 도령이 지금 분위기에서 패시지로 들어갔다간 중앙협의회는 물론이고 각 왕가도 도령을 붙잡으려 들 거야. 엄청 귀찮아질걸?=
=엘위드리스의 내전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중에는 오라버니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자들도 있을 텐데, 이엘 언니가 예견했던 미래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질 수도 있다고 봐요.=
환인이 했던 문제점을 그대로 짚으며 반대 의사를 내비치는 유르파, 안느, 백려강.
“너희의 반대를 들어보니 역시 공간이동 술법진을 이용하는 것은 그만두어야겠다는 판단이 드는군.”
=도령. 그 청옥의 부족 현상이 그렇게 심각해?=
“야미오코와 싸울 때 청옥의 부족을 체감했었지. 현재 소지 중인 유색 구슬은 흑옥 8개와 청옥 11개다. 야미오코 정도 되는 괴물과 싸우려면 이것보다 3배는 더 많아야 원활한 전투가 가능할 느낌이었다.”
오는 길에 특급 송곳니 다섯을 협박하고 으름장을 놓아 강제 계약을 맺은 덕에 청옥이 11개로 늘어난 거다. 아니었다면 여전히 6개인 채였겠지.
환인의 고민을 안느가 공감한다며 고개를 주억인다.
=확실히 좀 적은 느낌이긴 하네. 사용 후 대기 시간도 문제고……. 도령이 엘위드리스 내전에 눈 돌린 심정을 이해할 거 같아.=
=그래도 난 자기가 차원문 형식 공간이동 술법진을 사용하는 건 반대야. 너무 위험해.=
“예. 그쪽은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절 중심으로 4개 국가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니 청옥을 구할 기회는 언제고 다시 오겠지요. 그게 아니더라도 나사라트의 암살단이나 구주의 독니와 얽힐 수도 있고 말입니다.”
여자들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그건 특히 아영이 심했다.
특급 송곳니와 관련된 대목에서 살기까지 흘렸을 정도.
여자친구들의 분위기가 흉흉해지는 것에 환인은 적당히 화제를 전환했다.
“유르파. 축소화 비술 개량은 어느 정도로 진행되었습니까.”
=응? 열심히 개량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보다 내가 신경을 쓰는 부분은 그보다 좀 더…… 여자의 씨 문제지만?=
그녀의 의미심장한 표정과 대답에 여자들의 호기심이 향한다.
=여자의 씨라뇨? 씨는 남자한테만 있는 거 아니예요?=
아영의 순진한 질문에 유르파가 자신의 지식을 설파할 기회를 잡은 과학차처럼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도령의 노트북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임신은 남자의 정액이랑 여자의 난자가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거래. 평범한 여자의 난자는 0.1mm라고 하거든? 몸이 25m인 여자 거인의 난자 크기는 얼마나 될지 궁금하지 않니?=
“…….”
=…….=
=…….=
=또 궁금한 게, 여자 거인의 난자가 인간 남자의 정액으로 과연 임신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야. 가능하다면 인간형 사이즈로 성교를 한 뒤에 착상이 되었다 쳐. 그 후에 거인 크기로 되돌아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율이 언니. 지금 표정이 완전 변태 연금술사 같아.=
=맞슴다. 괴짜 연구가들이나 할법한 생각이에요 그거.=
=아하하……. 유리 언니, 조금 위험한 상상 같아요.=
여자들의 거부반응에 유르파는 눈을 끔뻑이다가 ‘이걸 이해 못 하네’하며 살짝 볼멘 표정을 지었다.
환인도 작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말한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그런 변태적인 발상에서도 종종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발상은 니오네브레스의 상식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칫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할 수도 있으니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안 좋겠군요.”
=……안느 아가씨, 그 정도니?=
=좀 고리타분한 과격파라면 흑마술사로 몰아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아. 먼지보다 작은 거랑 남자 정액이 합쳐져서 아기가 된다니……. 말하다 보니까 엄청나게 위험하게 느껴지네!=
현재 정론은 남자의 정액이 여자의 그곳에 들어가면 세상의 기운이 모이고 하늘에서 맑고 깨끗한 영혼이 내려와 깃들어 아이가 된다는 식이다.
좀 비전문가들이나 남성 우월주의자들은 남자의 정액이 여자의 태내에서 자라나 사람이 된다고 믿는 편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지구의 의학 지식은 악마의 놀음으로 여겨지기에 딱 좋겠지.
안느는 몸을 날려 유르파를 품에 꽉 끌어안고 억지로 약속을 받아내기 시작한다.
=그거 진짜 위험한 이야기거든!? 자칫 동료들도 휘말릴 수 있는 이야긴데 그런 걸 또 함부로 이야기할 거야?!=
=꺅! 아, 알았어어! 말 안 할게! 자기 노트북에 있는 정보는 이제 함부로 입에 안 담을 테니까 아아……!=
키가 30cm 가까이 차이 나다 보니 안느의 품 안에 쏙 들어간 유르파가 괴로워하며 항복을 호소한다.
“아무튼, 유르파.”
=응?=
“이번 미궁 안정화 보상은 유르파에게 도움이 될만한 걸로 요청할까 합니다.”
=나한테?=
뭐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짐작되지 않는지 안느에게 폭 안긴 채 가슴이 주물러지던 유르파가 고개를 갸웃한다.
“천공성과 천왕궁의 왕궁 비술사들이 쓰는 마도 제작 도구 일체와 제작비법서 정도면 어떻습니까.”
=……!=
유르파의 눈이 이때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기대감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아잇 씨... 백려강 신규 장비로 일러 뽑으려했는데 엎어졌어요..ㅠㅠ
검은색 전신 타이즈에 코르셋 같은 보호구가 그렇게 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