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 영도 에쉬누르
* * * *
퍽, 팍! 퍼버벅, 탁! 콱!
대여 주택의 뒤뜰 정원. 평범한 자이언트 워 해머와 자이언트 실드를 든 안느, 그리고 팔꿈치까지 덮는 워 건틀릿을 낀 아영이 1초에 대여섯 번씩 공방을 주고받는다.
신체의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 않도록 안느는 성체술을 봉인했고 아영은 성투술로 신체 능력을 6급 근접 직업자만큼 끌어올린 상태.
거기다 숏팬츠에 크롭티를 입어 피부를 크게 드러낸 뒤 초감각까지 발동해서 안느를 상대하고 있지만, 그녀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퍼벅, 쾅!
=끅! 큿……!=
여지없이 자이언트 실드에 얻어맞은 아영이 코피를 흩뿌리며 밀쳐졌다가 이어진 안느의 어깨 태클에 얻어맞아 20여 미터를 날려진다.
명치에 얻어맞은 강렬한 일격에 아영은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는 통증과 숨이 턱 막혀 혼절할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진짜 여자 우르거 아냐? 어떻게 이만한 타격이 들어올 수 있지?
아영은 포기하지 않고 두 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쳐들어올 안느의 공격에 대비했으나…….
=……졌습니다.=
언제 쫓아왔는지 코앞에 들이밀어진 자이언트 워 해머의 면을 보곤 어깨에서 힘을 빼며 말했다.
=수고했어.=
=으~! 분해! 지금까지 40번 넘게 대련했는데 한 번도 못 이기다니……!=
속이 쓰려서 내장이 끊어질 것처럼 배가 아프다.
환인과 실전 대련을 시작해 그의 기술을 눈으로 줏어 먹기 시작한 지 보름도 안 되는 아영이 환인의 최고급 방어술을 70%가량 체득한 안느를 이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초감각도 공격을 3차원 입체로 인지해 막거나 피하는 식인데 아영의 반사 신경과 대처 속도는 아무리 높게 쳐주어도 환인의 70%에 불과한 수준.
환인의 공격에 익숙해진 안느한테는 신경 쓰면 예측해서 10번 중 3~5번은 팰 수 있는 확률이고 아영에게는 질 수밖에 없는 확률이다.
뭐 여기까지는 넘어갈 수 있다.
대련에는 승패가 있기 마련이고 안느는 그녀가 이때까지 본 전사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강자니까.
=아영이 너, 초감각 다루는 거 좀 개량해야겠어. 점점 상대하기 쉬워지네.=
=…….=
그럼에도 창자가 끊어질 듯한 속쓰림을 느끼는 이유는, 안느가 정말 신체 능력과 기술로만 자신을 계속해서 패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성투술보다 배율이 뛰어난 성체술도 안 쓰고 정령술도 안 쓴다. 당연히 성술도 쓰지 않는다.
체스로 치면 킹과 폰으로 싸우는 격이고 장기로 치면 마차포 다 떼고 싸우는 꼴.
그런데도 이기지 못하다니…….
카락스의 암살자 내부에서 대인전 1위를 놓친 적이 없을만큼 대인전만큼은 자신 있던 아영에게는 꽤 괴로운 상황이다.
아영은 그런 속쓰림과 분노를 향상심으로 전환해 곧장 안느를 이길 방도를 궁리하며 체술 훈련에 들어간다.
안느는 그런 아영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잠시 쉴 생각으로 나무 그늘에 들어가며 그곳에서 화살을 만들던 백려강한테 말했다.
=쟤도 진짜 승리를 향한 집념이 대단하다니까.=
=플뢰면서 11자 복근이 나올 만큼 자신을 담금질하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합류한 지 얼마 안 돼서 패배가 누적되고 있지만, 아영이라면 금방 언니들을 쫓아갈 거예요.=
=저만한 승부욕도 있고 거기에 걸맞는 노력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되겠지. 그나저나…….=
백려강이 가져다 놓은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컵에 따라 마신 안느는 그 새콤한 맛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햇볕 아래에서 3시간째 내려 베기 동작만 하는 중인 이실리테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려 베기 한 동작에 10분씩 걸리는 극한의 집중 훈련.
매끈한 기사검, 주술사가 저주검으로 만들어준 것 말고 새로 산 기사검이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천천히 공간을 가른다.
1초에 0.1mm씩 움직이는 그 동작은 예술과도 같아서 검이 초승달을 그리는 착각이 느껴질 지경이다.
=…….=
그러나 안느의 눈에는 이실리테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 초조함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일까.
도령이나 언니 동생들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나오는 답은 자기 자신이라는 건데…….
=얘들아~ 간식 먹으렴!=
마침 유르파가 오후 간식으로 비스킷에 과일과 채소를 올린 카나페를 만들어왔기에 안느는 잘됐다 싶어 검술 훈련을 중단하고 다가온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이슬아. 혹시 고민 있어?=
=……응? 없어 그런 거.=
=거짓말. 네 검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고. 너랑 검을 나눈 시간이 얼만데 그것도 눈치 못 챌까 봐?=
아영이 건네주는 적신 수건으로 얼굴과 목, 가슴골, 밑가슴의 땀을 닦던 이실리테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친구와 언니 동생들의 시선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내 성장 한계가 5급이 아닐까 해서 그런 거 뿐이야.=
=아…….=
=음.=
=아아….=
여자들 사이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니오네브레스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성장의 한계가 정해진다고 배운다.
수학을 예로 들자면 누구는 사칙연산까지 못 배우고 누구는 물리학에 양자역학까지 배울 수 있는 식이다.
이런 사고가 정착되는 데에는 직업자의 등급이라는 현상이 큰 역할을 했다.
누구는 6급까지 훈련과 경험을 쌓으며 성장하지만, 누구는 죽었다 깨어나도 3급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가 널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직업자에게 그 성장 한계에 도달했다는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더 이상 괄목할 성장은 없으며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거북이나 개미가 나아가듯이 느릿하게 성장한다. 적당히 해서는 운이 좋아야 현상 유지고 대다수는 퇴보하기 마련.
=안느는 얼마 전에 7급이 됐잖아. 유리 언니도 7급이 됐고. 그런데 나는…….=
산란늪 미궁, 린덴 폐촌락, 거인숲 미궁.
세 곳 미궁에서 잡은 괴물의 숫자만 천여 마리가 훌쩍 넘는다.
사이사이 싸운 괴물과 환인, 안느와 한 대련의 경험을 치면 평범한 직업자의 10년? 20년? 그 정도 되는 농밀한 경험치를 얻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그 증거로 안느는 7급에 올라섰고 간접적으로 전투 경험을 한 유르파도 조용히 7급이 되지 않았나.
그런데 자신은 폭군룡 미궁에서 검희로 재각성 하며 5급이 된 뒤로 더는 등급이 오르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 꾸준한 훈련과 전투를 통해 아우라가 짙어졌지만, 그마저도 멈춘 지 반년이 넘었다.
6급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
=어음…….=
=으응….=
안느와 유르파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직업자의 한계는 8급이라 한다. 그리고 인류의 한계는 9급이라는 게 통설이다.
7급 정도가 되면 직업자의 끝자락에 도달했다고 보기에, 그때부터는 등급의 돌파에 연연하기보단 자신을 가다듬어 무예에 정진하게 된다.
그런 7급인 자신들이 하는 말이 혹시 이실리테에게 기만으로 여겨질까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거다.
유르파가 만든 카나페를 맛보던 이실리테는 한발 늦게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작게 웃음 지었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심까? 이실리테 언니 평소 행동을 보면 오빠한테 도움 되지 못하게 된다며 크게 괴로워할 거 같은데…….=
아영의 질문을 받은 이실리테는 입가에 묻은 카나페 부스러기와 가슴골 위에 뿌려진 비스킷 조각을 털어내며 환인처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자유 행동할 시간이 있을 때 나 나름대로 조금씩 알아봤는데, 검희는 특히나 등급을 뚫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그리고 다중 검기도 7급이면서 세 자루 밖에 못 쓴 사람이 있는가 하면, 4급인데도 네 자루를 쓴 사람이 있었어.=
=언니는 5급에서 세 자루 검기를 쓸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검기 숫자는 직업 등급과 무관하다는 거네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백려강에게 이실리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기는 내 노력과 숙련도에 따라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 검기도 성장 한계에 부딪혔을 수도 있지만, 우리 곁에는 그런 등급이나 직업 능력은 강함과 관계없는걸 있는 대로 보여주시는 분이 계시니까요.=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한 남자를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실리테는 그 모습에 웃음 짓다가 말을 끝맺는다.
=그래도 가끔 초조해지지만, 그것도 정신 수양이라고 생각하고 검술에 집중하고 있는 거야. 안느 네가 본건 그때였고.=
그랬구나. 안느는 자기 생각보다 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고, 안느는 카나페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뭐, 도령한테는 육합등약이 있으니까 그것도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이슬이 넌 우리 중에서 도령이랑 제일 오래 지냈잖아.=
=그런 나보다 주인님한테 꼬리 쳐서 먼저 안긴게 너거든?=
그녀의 원죄가 이실리테의 입에서 언급되자 안느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 발로 함정을 밟은 꼴이다.
[계십니까—.]
=손님 왔나 본데요? 제가…….=
=내, 내가 나가볼게!=
아영 대신 후다닥 뛰어가는 게 누가 봐도 티 나게 도망가는 모습이라 다들 자그맣게 웃고, 유르파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하아~ 한숨을 내쉬면서 팔을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켠다.
=으음~. 자기 보고 싶다아. 미궁 일 외에 이렇게 떨어져 지낸 적은 처음이라 뭔가가 뭔가네.=
=저도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요……. 내일이면 오실까요?=
=간단한 일로 간 것도 아니고 대성녀님 알현에 그 아가씨 일에 다른 영성님들도 붙을 거 같고 하얀 늑대들도 만날 테고…….=
말하다 보니 왠지 하루 이틀로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듣기로는 웨이포드에서 로아팅스 정글을 끼고 라드세아를 거의 전부 가로지르는 여행이었다면서요.=
그러는 동안 하루도 떨어져 지내지 않았느냐는 아영의 질문에 유르파가 추억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일과 때문에 낮에는 좀 떨어져 있어도 밤에는 늘 같이 시간을 보냈는데……. 이런 경우가 좀 드물긴 하지?=
=미궁 탐사가 주목적인 파티는 파티를 분리해서 정보 수집과 탐사 준비를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요. 오빠 파티는 평범한 파티가 아니니까 뭐 이상할 건 없을지도?=
=오라버니가 안 계시니까 조금 안정이 안 되는 기분이 들어요.=
확실히 그런 게 없지 않다. 특히 그리 느끼는 것은 이실리테였다.
하녀 교육을 받고 돌아온 뒤부터는 미궁이면 미궁, 밖이면 밖, 그와 다른 지붕 아래에서 잠든 적이 없었으니까.
삐이.
이실리테는 바짓자락을 물고 당기는 실루를 내려다보았다가 품에 안아 들어 비스킷 위에 올려진 채소와 과일을 집어서 먹이며 생각했다.
‘어쩌면 안느가 내 초조함을 읽은 것도 그거 때문일지도 몰라.’
명색이 주인님의 하녀인데 이렇게 떨어져 편히 수행하며 지낸다니, 이 정도면 배임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때 집 쪽에서 안느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야!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찾아와?! 얘 진짜 어처구니없네!]
=……이게 무슨 소리니?=
=안느 언니가 저렇게 화낼 사람이라면…… 제2 천공기사단 단장분이 아닐까요?=
환인을 위험 분자로 지목했던 제2 기사단의 부단장. 나름 합리적인 추측이다. 하지만 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리 머시기 그년한테도 화를 거의 안 낸 언니잖아.=
=리민 양? 아, 그녀가 다시 찾아왔다거나…….=
=……가끔 려강이 너 보면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어.=
=……??=
=유르트랑 아데나 부단장일 게 뻔하잖아. 또 오빠한테 보지를 벌리러 와서 안느 언니가 저렇게 화내는 거 아니겠어? 아무튼 언니들, 같이 가요.=
여자들은 아영의 이야기에 눈을 끔뻑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
“효율을 올리기 위해서는 능률을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능률은 말단 조직원들의 의욕이 큰 역할을 합니다. 그 의욕은 어디서 발생하는지 아십니까.”
=금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화. 맞습니다.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크게 감동한 여단원들에게 해산을 명령한 환인은 조금 얼굴이 상기된 엘미느와 소리 없이 지역을 빠져나오며 약간의 교육을 진행했다.
그녀가 정보여단을 제대로 이끌면 이끌수록 자신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엘미느는 환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아마도 자신은 한 발 더,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직업적인 강함이 아니라 엘미느=이드란카라는 인간의 존재성, 정체성으로서의 성장 말이다.
그런 생각에 엘미느는 공손히 환인에게 말했다.
=부족한 첩에게 부디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자기 승인 욕구, 인정 욕구입니다.”
=……?=
“예를 들어 엘미느, 당신이 열심히 한 업무에 관하여 내용의 충실성의 유무와 관계없이 혹평과 비판만 받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무척 기분이 안 좋을 것입니다…… 아!=
환인은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눈이 커지는 엘미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의 말단은 윗사람, 상위 계급자에게 인정받아 자신의 필요성, 존재성 등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하여 높은 자리로 승진해 특별하게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이런 특징은 진취적이고 자기 개발적이며 젊은 사람일수록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
“그런 사람에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격려는 무엇보다 큰 의욕으로 직결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조직은 말단이 충실할수록 성장 가능성의 폭과 깊이가 넓어지는 법이지요.”
나무를 예로 들어보면 이해가 간단하다.
뿌리가 부실한 나무가 자라보았자 얼마나 자랄 수 있을까. 물론 뿌리가 너무 과다해도 나무가 멋지게 자랄 가능성은 작지만, 그래도 영양분과 물을 빨아들일 뿌리가 적어 고사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 그럼 성제님이 여단원 전원의 인상착의와 내역을 외우신 것은…….=
그녀의 머릿속에 좀 전에 목격한 장면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급 조직원은 성제님이 설마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는지 매우 놀라면서도 감격한 모습을 보여주었었지. 그게 전부 의도한 일이라는 건가?
“부하는 쓰다가 고장 나면 버리고 갈아 끼우는 부품이 아닙니다. 사람을 다루려면 사람을 알아야 하는 법이지요.”
그의 대답에 엘미느의 보랏빛 눈동자가 충격으로 극심하게 흔들렸다.
‘이, 이분은 대체…….’
엘미느는 가벼운 소름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놀람과 흥분으로 인한 소름이다.
이분은 어디서 이런 지식을 얻으셨을까. 다른 세상에서? 하지만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다른 차원 방랑자들은 이분 같지 않았는데.
남자든 여자든 이쪽 주민들처럼 그저 내일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 그러면서 깊이가 얕은 단면적인 지식으로 아는체하며 우쭐거리고 남을 깔보고 얕잡아보다 분노한 상대에게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성제님은 달라.’
성제님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는 조직상을 완벽하게 끌어내실 수 있는 분이다. 표현 그대로 자신의 완벽한 상위호환!
그런 엘미느에게 환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렇다고 자격도 없는 전부를 끌고 갈 생각은 없습니다.”
=……!=
“엘미느. 이곳의 173명과 메리아놀에서 정보 수집 활동 중인 37명 중 특급 송곳니 다섯과 같은 사상인 자들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엘미느는 그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아차리고 결의에 찬 모습으로 대답했다.
=성제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얀 늑대들은 전면적으로 개혁될 것입니다.=
“믿겠습니다. 이건 그동안의 자금으로 쓰십시오.”
‘늑대와 함께 춤을’에 도착한 환인이 그녀가 집무용 책상으로 쓰는 테이블에 올린 것은 아스펜드 안에 보관하고 있던 금화 1,000닢이 든 상자.
보유한 금화 총 4510닢 중 1/4나 되는 양으로, 하얀 늑대들이 아껴 쓴다고 가정했을 때 5년 정도는 버틸 수 있는 거금이다.
드넓은 아량으로 쾌척하듯 내놓은 것이 아니다.
카락스의 암살자는 암살을 가려가며 받는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 말하는 의적이다.
이 때문에 암살을 통한 수익은 거의 없는 편이며 말단 조직원들의 노동 및 암살에 자질이 없는 조직원을 미궁에 파견하여 벌어들이는 수익이 전부.
그런데 이 수익이라는 게 1년에 200금화가 채 안 된다.
미궁에 파견하는 조직원은 대부분 1~3급인데다 조직원의 숫자 또한 200명을 갓 넘을 정도로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급 높은 조직원을 미궁에 파견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200명 중 4급 이상 직업자는 20명에 불과하다.
이 20명에는 은퇴한 전대 암살자인 이빨이 넷도 포함한 수치이니 환인에게 처단당한 특급 송곳니 다섯 명의 사망은 말 그대로 카락스의 암살자 총 전력의 3할이 증발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셈.
여기에 아영까지 빠져있으니 하얀 늑대들로 업종을 전환하지 않았다면 카락스의 암살자는 머지않아 문을 닫았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아영에게 들었기에, 그리고 급격한 집단의 변화에는 자금이 들기 마련이기도 했기에 내놓은 것이다.
또 엘미느의 상재를 보기 위해서 내놓은 시험이기도 하다.
만약 자신의 말대로 금고에만 넣어둔다면 실망하겠지. 상업에 손댔다가 대차게 말아먹는다면 자신의 지시도 지키지 못한 멍청한 년이 된다.
가장 좋은 것은 뛰어난 상재로 1000금화를 몇 배로 불리는 것.
물론 불리는 과정에 합법과 불법을 얼마나 오갈지도 체크할 것이다.
이러한 환인의 내심은 알지 못한 채 엘미느는 목마른 사람이 물주머니를 받아든 것처럼 감사가 절절하게 묻어나는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힘내서 성제님의 조력 없이도 운용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녀의 감정이 머리 위에 악마의 뿔처럼 자리 잡은 검고 작은 날개에 반영되는지 살랑이고 등허리 쪽에 붙어있는 한 쌍의 검고 짙은 날개도 미약하게 움직인다.
그 덕에 앞섬이 벌어지며 그녀의 작지 않은 앙가슴에 유두 일부까지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지만, 환인은 약간의 관심도 내비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메리아놀의 가야 시라넬과는 협력을 중단하고 연락을 끊으십시오.”
=시라넬 경이 보내오는 술사 집단 정보는 2급과 1급 사이에 걸쳐있을 정도로 양질이었습니다만…… 혹시 역추적이 시작되었기에 중단하는 것인가요?=
환인은 1초 정도 엘미느의 얼굴을 바라보다 속으로 가산점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시작되기 전에 끊는 겁니다. 그리고 향후 정보원들의 정보 수집은 메리아놀의 차원 방랑자에 관한 것만으로 한정하겠습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용무는 그것으로 끝이었기에 환인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보고가 있다면 아영을 통해 연락하십시오. 이후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예, 성제님!=
주점으로 들어올 때와 같은 변장 차림으로 주점을 나선 환인은 주점 앞에 세워놨던 비상이 자신을 보자마자 쿠우, 뀨으~ 울면서 저쪽 좀 보란 듯이 고갯짓하는 걸 보았다.
그래서 그쪽을 돌아본 환인은 눈을 감고 이마를 감싸 쥐었다.
키 25m에 가까운 회백색 생머리의 여자 거인이 은은한 불길 같은 아우라를 몸에 두른 채 그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1~3층 건물 사이를 걷고 있었다.
3층 건물이라 해도 높이가 10m를 간신히 넘는 수준.
여자 거인…… 주술사는 허리춤에도 안 오는 건물 사이에서 시민들과 인사라도 나누는지 이따금 고개를 숙이고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든다.
환연이 안주머니에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와서 봐라.”
「주술사네……. 쟤가 왜 여기 있지? 대성녀가 부른 건가?」
“그럴 리 있나. 우연의 일치겠지.”
그렇게 말한 환인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비상의 등에 올라타 근처 골목,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림자에서 나온 환인은 이름 없는 하프 플뢰에서 성제로 돌아가 있었다.
“비상, 주술사에게 가자.”
뀻.
자신을 보면 틀림없이 짝짓기하자며 다가올 주술사다.
애초에 약속이 영도에 다시 방문하는 날, 주술사와 짝짓기를 하겠다는 약속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못 본 척 피해버리면 훗날 재회했을 때 거짓말을 해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주술사를 피해야 하는가. 애초에 짝짓기의 전제 조건은 유르파가 비술을 개발해 그녀가 사람처럼 작아진 다음이다.
즉, 지금은 그냥 인사한 뒤 헤어지면 되는 일.
환인은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비상을 움직여 주술사의 커다란 어깨로 날아갔다.
“주술사, 오랜만입니다.”
그의 인사에 순박하지만 아름다운 외모의 주술사가 만면에 웃음꽃을 머금는다.
=환인 님!=
어떠한 계산도, 사심도 없이 순수하게 만남을 기뻐하는 모습에 환인은 조금 속내가 복잡해졌다.
저런 얼굴로 교접하자며 달려든다니. 그녀의 키가 우르거 정도, 3m 정도만 되었어도 잠깐 고민하다가 허락했을 텐데…….
25m의 키에 걸맞은 두 손이 바닥처럼 모이고 비상은 그런 그녀의 손바닥에 착지한다.
손의 위치가 좀 더 높아져 그녀와 같은 눈높이가 되었을 때, 주술사가 입을 열었다.
=바람이 환인 님의 냄새를 실어 와서 찾아온 것인데 정말로 만날 수 있었을 줄은 몰랐어요.=
“바람이라니…… 혹시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은 겁니까.”
=아니요.=
“……?”
환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자신의 방문을 알았다는 걸까. 거인이 가진 일단의 능력인가, 아니면 미궁을 나오면서 그녀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걸까.
대로에 우뚝 선 거인. 그녀의 다리 사이로 마차와 짐수레가 오가느라 정체가 발생하고 있었기에 환인은 자리를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여기서는 대화하기 곤란하니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마침 적당한 곳이 있다. 여단원들을 소집하는 데 사용한 장소다.
25m의 키에서 오는 보폭은 한걸음에 10m 정도다. 덕분에 금방 도착한 곳에서 환인은 조금 기막힌 광경을 목격했다.
10m의 흙집을 주술사가 톡- 건드리더니 그 위에 의자처럼 걸터앉은 것.
25m의 거인 정도 되면 몸무게가 수십 톤은 나가기 마련이다. 바다에 사는 대왕고래만 해도 성체의 경우 150t에 달하는데 말해서 무얼 할까.
그럼에도 내부 지지대 없이 세워진 흙집은 무너질 기색이 없다.
“흙집이 무너지지 않는군요……. 어떻게 하신 겁니까.”
=환인 님의 도움으로 얻게 된 힘을 다소 다룰 수 있게 되었지요. 방금 한 것은 일시적으로 구조물에 강화를 걸은 거예요. 제 무게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지요.=
그리 말하며 주술사가 살짝 일어났다가 힘을 줘 흙집에 앉았지만, 쿵- 작게 울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고 흙집은 무너질 기색이 없었다.
헤어질 때만 해도 무구에만 걸 수 있었는데, 그새 능력이 성장한 건가.
그렇게 한차례 시범을 보여주었던 주술사는 작게 웃으며 물었다.
=유르파는 어디 있나요? 오늘 환인 님과 짝짓기를 할 수 있는 거죠?=
주술사의 해맑은 질문에 환인은 마음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아쉽게도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 저 혼자 찾아왔습니다. 비술은 유르파가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가요…….=
티 없이 밝은 표정에 아쉬움이 깃든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미소를 지은 주술사는 마치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자랑하듯 그간 있었던 일을 조잘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대성녀가 안내해준 영봉의 산기슭에 마을을 짓기 시작한 것.
미궁의 중핵을 흡수해 얻게 된 힘으로 흙만으로 튼튼한 집을 만들 수 있게 된 것.
영사육성기관의 샤페=메이로 영성이 매주 두 번씩 그들을 찾아 사회 기초 질서와 지식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
아야빗 영성도 매주 그들을 찾아 거인들이 가지고 나온 식물과 동물을 연구해 키우기 쉽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거인들이 모두 이주한 곳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것…….
환인은 비스듬히 누운 주술사의 푹신하고 출렁이는 가슴 위에서 그 이야기를 전부 들어준 뒤 자신도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선물이 커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도착하면 당신과 거인 친구들의 몸을 지켜줄 수 있는 물건이 될 겁니다.”
=어떤 선물인지 기대되네요.=
“저도 당신과 친구들이 지은 마을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만……. 방문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군요.”
그의 이야기에 작별을 직감한 주술사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가시는 건가요?=
“말 그대로 영도에 용무가 있어 잠깐 방문한 터라.”
=거짓말쟁이. 환인 님의 몸에는 네 명의 여자 냄새가 가득 묻어있어요. 그냥 냄새도 아니고 짝짓기를 한 냄새에요. 그게 용무인가요?=
“…….”
흘겨보며 하는 이야기에 환인이 할 말을 잃자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일으키며 응근히 말했다.
=전 지금이라도 괜찮아요. 제 안으로 들어와 주시지 않겠어요?=
“저번에 말했던 대로 전 그런 취미는 없으니 사양하겠습니다.”
=치…….=
처음 만났을 때는 부족을 이끄는 족장의 조언자에 걸맞은 무게감이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20대 초반의 외모에 걸맞은 소녀적인 감성이 느껴진다.
이것도 중핵을 흡수했기에 변한 점일까. 아니면 환경의 변화가 끌어낸 모습일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주술사는 저번처럼 막무가내로 조르며 버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조르지 않을테니 제 입술에 키스해주세요.=
“키스입니까…….”
=샤페 메이로 영성이 그러던걸요. 연인 사이에 키스는 당연한 것이라고요. 아야빗 영성도 그랬어요.=
……임신을 위한 짝짓기까지 예약되어있는데 키스쯤이야.
환인은 작게 쓴웃음을 짓고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그녀의 도움으로 입술에 키스해주었다.
거인의 입에 키스라는 생경한 경험이지만, 그녀의 입에서 불쾌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고 입술도 나름 말랑말랑해서…….
‘나쁘지 않군.’
그렇게 생각한 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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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동굴탐험? 그게 모에요?
순진한 글쟁이는 그런거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