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영도 에쉬누르
한쪽 무릎을 꿇은 엘미느의 복장은 환인이 보기에도 세련되었다.
가슴과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는 하이웨이스트 스커트의 바텐더 복장을 니오네브레스 식으로 어레인지한 느낌이라고 할까.
흑과 백의 옷, 벚꽃 같은 분홍색의 땋은 머리, 그리고 타천사처럼 새카만 머리 위 작은 날개와 등허리의 긴 날개.
처음 만났을 때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녀의 복장과 주점을 꾸려나가는 능력, 엘위드리스에서 정보를 수집한 실력 등을 확인했더니 그녀의 인간사에 관한 관심이 생겨났다.
“약 3주 만이군요. 그사이 이만큼 기반을 마련한 수완이 감탄스럽습니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과분한 칭찬 같은 것이 아니다.
가게를 만들고 영업을 시작하는 것은 간단하다. 땅을 매입하고 건물을 올린 뒤 가게 오픈 준비한 뒤 개점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사이에 필요한 준비 같은 것이 얼마나 되겠나.
집을 이사하는 것만으로도 정상적인 생활 사이클로 돌아가는데 1달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내부 인테리어 고안부터 상품 확보 및 준비, 종업원 교육, 주변 홍보가 필요한 가게는 어떨까. 전혀 새 가게 느낌이 나지 않는 숙련되고 숙달되어 안심감을 주는 분위기를 내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고작 3주도 안 되는 시간, 팔라툼에서 아드지로 돌아가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2주도 안 되는 시간에 해낸 셈인데.
어떻게든 하라고 한다면 가능하기야 할 것이다. 평균을 아득히 상회하는 자금과 인맥, 그리고 경험이 있다면 말이다.
일은 그것만 있지 않았다. 대륙 반대편에 있는 섬나라의 정황 수집, 그리고 위장용 주점의 원활한 운용, 조직의 개편과 주둔지 이전에 위장용 영업, 양조장의 매입 및 운용까지.
이 모든 것을 제대로 해냈다는 뜻이니 제법 유능하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손발을 맞춰왔던 인력이 있으니 가능한 거였겠지만, 무능하다면 밑바탕이 있더라도 하지 못한다.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아무튼, 환인이 연락 없이 갑자기 하얀 늑대들 본거지를 찾은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이들이 얼마나 유능한가,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얼마나 회유할 수 있을까를 알아보기 위해서.
개인의 민간 사찰이라 해도 무방하다.
파라락—
환인은 엘미느가 내놓은 대량의 서류 자료를 속독으로 검토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모두 완벽하지는 않군.’
선택과 집중을 해서 자신이 요구한 정보 자료 수집을 최우선으로, 두 번째로 위장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으며 본거지 이전과 조직원의 개편은 아직 진행 중이다.
암살자업에서 정보업으로 전환에 일부 불만과 반감을 품은 조직원의 회유와 설득 작업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
일단, 어느정도 기준을 만족시킬 정도는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엘미느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모든 서류를 30분 동안 살펴본 환인은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엘미느에게 시선을 주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해오지 않고 자금의 출납에서 물자의 유동과 인력의 편제까지…… 서류와 문서로 모두 남겨 꼼꼼하게 정리해놓은 것은 칭찬할만하군요.”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훌륭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곳곳에 미비한 점과 교정해야 할 것, 이후 대처의 확립을 어찌할 것인지 의문이 드는 곳도 있으니까요. 가령…….”
서류를 나름대로 위장한다고 했지만, 눈썰미가 좋고 하얀 늑대들을 의심하며 다가온 자들이 본다면 대번에 발각될 항목이 여러 군데다.
=으음…….=
환인의 지적에 해당 항목을 살피는 엘미느의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졌다.
그녀도 나름 그러한 부분을 신경 썼지만, 그녀가 축적해온 지식으로는 그 정도가 한계였는데 그걸 전부 지목하시다니.
그의 지적을 받은 엘미느는 기분 나빠하긴커녕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못 미더워하던 대목을 날카롭게 짚은 것은 물론 차후 문제가 되겠다 싶은 점을 모두 골라냈다.
그 말은 적어도 자신보다 능력이 위라는 뜻.
자신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잠을 줄이고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멍청한 상관은 어쩌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환인은 엘미느에게 있어 존경하고 모실만한 인물이었다.
팔랑~
속으로 생각을 이어가던 엘미느는 환인이 날린 종이 한 장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놀라워했다.
이 종이는 뭐지? 어떻게 이렇게 부드럽고 매끄러울 수가…….
1차로 종이의 질에 놀랐던 엘미느는 이어 종이에 쓰인 내용에 2차로 경악했다.
“30분 주겠습니다. 그동안 전부 외우십시오. 이후 그 내용을 발설하거나 다른 매체에 옮겨 복사하는 것은 절대 금지하겠습니다.”
=……!=
자신에게 내리는 시험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린 엘미느는 잡생각을 끊고 종이의 내용을 머릿속에 때려 박기 시작했다.
29cm * 21cm의 종이라고 해도 빈틈이 거의 안보일만큼 빼곡하다. 다 외우려면 30분…… 촉박하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암호문으로 그 내용을 암기하면 어떤 형식의 문서에도 아나그램 식으로 기밀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작성한 서류는 물론 앞으로 작성할 서류도 전부 그 암호문을 채용해 작성하십시오.”
=네, 네…….=
엘미느의 이마를 타고 맑은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30분 안에 전부 외우기도 버거운데 환인이 계속 말을 거는 통에 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환인은 일부러 그러고 있었다.
정보 단체의 수장에게는 뛰어난 암기력은 물론이고 두뇌 회전 및 사고 분리 능력도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자신보다 뛰어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환인은 계속 대답이 필요한 질문을 툭툭 던지다가 종이 다섯 장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자신이 전 카락스의 암살자, 현 하얀 늑대들을 손에 넣으면서 줄곧 신경 쓰고 있던 점에 대해 적혀있었다.
“여기, 업종 전환에 특히 불만을 가진 인사는 이전에도 종종 문제와 트러블을 일으킨 인물이더군요.”
=네. …네? 앗, 그렇습니다. 현재 체제 전환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그를 중심으로 집결하는 중입니다. 다만…….=
“시선을 종이에서 뗐군요. 다 외웠습니까. 외웠다면 이리 넘기십시오.”
=죄송, 죄송합니다. 아직 다 외우지 못했습니다……!=
엘미느는 환인의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에 오금이 저리고 소변이 마려워졌다.
고작 이 정도의 사고 분리도 못 해서 버벅대느냐는 힐난의 시선.
그 시선에 항변도 불가능하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 인간일까 싶을 만큼 문무文武 양쪽에 술術과 기技, 예藝까지 하늘에 닿아있는 인간.
저 남자보다 나은 점이라곤 없는데 어찌 항변할 수 있을까.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암호문만 봐도 이 세상 모든 암살 집단과 정보 조직이 탐낼 만큼 빼어난 물건일진대 어디서 이런 게 있다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것도 저 남자…… 아니, 주인이 만들었을 터.
“보아하니 불만을 가진 것도 자신이 카락스의 암살자 내에서 위치와 지위가 있는데, 자신이 빠진 상태에서 결정된 것에 불만을 가진 듯 하군요. 조직의 화합에 저해되지만 제거하자니 나름 실력과 성과가 있어 그러지도 못하는 계륵 같은 인물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목록에 있는 다섯 명, 지금 호출할 수 있습니까.”
=예. 인근 안가에…… 대기 중에 있습니다. 당장 호출할까요?=
“…….”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 이 근처에 있는 단원은 총 몇 명이며, 그만한 인원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가.
=현재 메리아놀에서 정보 수집 활동 중인 37명을 제외, 총 178명이 아드지에 들어와 자리 잡았으며…… 죄송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피해 그만한 숫자가 모일만한 장소는…… 아직 마련치 못하였습니다.=
“…….”
다시금 못마땅해하는 시선에 엘미느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리 말한 환인은 주점 ‘늑대와 함께 춤을.’ 나와 아드지에 설치되어있는 지역순회기관청을 향했다.
“환연. 정령을 남겨놔서 엘미느가 허튼짓을 하지 않는지 감시해다오.”
「허튼짓이라면?」
“내가 준 암호문을 복사한다던가 하는 짓.”
「알았어.」
과연 엘미느는 자신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만약 엘미느가 암호문을 사적으로 운용하려하는 정황이 포착된다면, 환인은 하얀 늑대들은 적당히 쓰다 버리는 패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성제님!?=
그리고 도착한 관청에서 환인은 들소 머리의 청장에게 격렬한 환영의 인사를 받았다.
이미 환인의 도착 소식과 아우라의 색, 형태, 모양까지 아드지 전체에 퍼진 상태.
오해나 착오라고 할 것도 없이 환인의 방문에 헐레벌떡 뛰쳐나온 들소 머리의 청장은 그 ‘전설적인’ 성제를 보게 되었음에 감격하며 넙죽넙죽 허릴 숙였다.
환인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몇 시간이고 그랬을 모양새.
흔한 동사무소 같은 풍경의 본청 곳곳에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시선을 느끼며 환인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도시 내에 약 300명이 모일만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잠깐만 쓸 예정인데…… 시민분들의 왕래가 적은 곳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마땅한 장소가 있는지 지역순회기관청장님께 협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마침 거인 친구들이 올 때면 쓰기 위해 마련한 장소가 있습니다! 혹시나 밟힐 위험성이 있기에 시민들의 접근도 불허한 곳이니 성제님께서 쓰시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라 생각합니다!=
영도에서 내려온 지침은 사후 보고가 되어도 좋으니 성제가 요청하는 것은 일단 들어주고 보라는 것이었다.
‘그’ 성제님께서 직접 요청하신 것이니 문제 될 일은 없다.
청장의 전폭적인 협조 아래 도착한 공터는 공설 운동장을 지어도 될 만큼 넓었으며 아드지의 다소 외곽에 있었던 터라 인적도 드문 장소였다.
환인이 생각해둔 조건을 대부분 수용하는 지역.
품 안의 환연에게 높이 3m에 달하는 거대한 흙벽을 1차로 둘러 바깥에서 보지 못하게 막은 다음, 높이만 10층에 달하는 거대한 흙집을 지을 수 있겠냐고 묻는다.
「……응. 상급 땅 정령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대. 그런데 힘을 많이 써야 한다니까 정령석 자그마한 거 정도는 주는 게 좋겠어.」
“너에게 준 거니 알아서 해라. 다 쓰고 나면 채워줄 테니 말하고.”
「응.」
쿠구궁, 드드드드드—……
작은 진동과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환인이 생각한 것과 똑같은 3m 높이의 흙벽, 그리고 10m 높이의 흙집이 천천히 세워져 간다.
환인은 아무것도 없는 흙 땅에서 저절로 생겨나듯이 만들어지는 구조물을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주변 땅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다. 설마 상급 정령은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물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건가.’
그건 창조의 영역일 텐데.
이때까지 창조는 신의 권능이라 생각하고 있던 환인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장면이었다.
=허어어!=
청장은 삽시간에 거대한 흙 구조물이 만들어지는 것에 크게 탄성을 지르다가 환인의 코트 안쪽을 힐끔 곁눈질하며 가슴 두근거려 했다.
저 안에 네 번째 영혼 기사이신 요정님이 계신 거겠지? 역시 위대한 성제님은 동료도 대단하시구나!
굉장히 귀엽고 예쁜 요정 기사님이라고 하던데 한번 보고 싶다는 눈빛이 청장의 눈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환인은 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부담스러워하다가…….
“……이걸로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감사합니다!! 평생의 가보로 삼겠습니다!!!=
그의 관심을 무마할 겸 서류 확인용 사인을 수첩의 종이 한 장에 크게 그려 청장에게 건네주었는데, 환인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기뻐하며 허리를 90도로 숙여댔다.
‘아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군.’
자신이 아드지에 붙인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영혼사의 팬클럽 도시가 아니었나.
키가 2.5m에 달하는 거구의 들소머리 남자가 조그마한 자신의 사인지를 소중하게 쥐는 모습에 환인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하얀 늑대들의 위장용 업소로 돌아간 환인은 곧바로 엘미느에게 암호문의 테스트를 치렀다.
환연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나간 뒤에도 꼼짝하지 않고 종이만 들여다보며 필사적으로 외웠다는 듯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평범한 안부 편지에 암호문으로 모두 기재하십시오.”
=네.=
환인은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1. 카락스의 암살자는 아영의 칭호로 전환되며 조직원은 전원 하얀 늑대들에 편입한다.
2. 암살행은 중단, 첩보에 전념하여 향후 각국 정보국과 겨룰 수 있을 기량을 함양한다.
3. 대성녀 닌실=아나그의 발언은 성제의 발언과 동일시하여 중요한 의뢰, 임무 외에는 최우선으로 하여 이행한다.
4. 집단의 존속을 위태롭게 하는 자, 배신하는 자는 철저히 분석하여 배제한다.
엘미느는 식은땀으로 목욕하다시피 하며 환인이 나열한 항목 네 가지를 평범한 문안 편지에 섞어 작성했다.
걸린 시간은 45분. 암호문의 정확도는 91%.
“점수는 100점 만점에 79점입니다.”
편지에서 오탈자와 암호문 적용 오류를 체크해서 돌려주자 엘미느의 얼굴이 수치심에 새빨개졌다.
받은 30분에서 20분을 더해 50분 동안 죽어라 외웠는데 다섯 곳이나 틀리다니…….
만약 여기서 환인의 비난이 또 날아들었다면 엘미느는 자신감을 잃어버렸겠지만, 환인은 거기까지 읽어내고 자그마한 당근 하나를 내밀었다.
“못 봐줄 정도는 아니군요. 정진해서 이 정도는 20분 안에 쓸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예, 주인님…….=
“저에게 호칭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 앞으로도 성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 예, 성제님.=
돌려받은 암호문을 잘게 찢어 불에 태워버린 환인은 시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드지의 서쪽 외곽에 눈에 확 띄는 흙집이 생겼을 겁니다. 현재 도시에 머무는 조직원 전원에게 12시 정각까지 그곳에 모이라고 전하십시오. 사람들의 눈에 띄거나 이목을 끄는 자는 그에 합당한 페널티가 가해질 것이라고도 전하면 됩니다.”
외곽에 흙집? 무엇을 하시려고…….
짧지만 강렬한 신고식에 조금 주눅이 들고 만 엘미느는 주먹을 꼭 쥐었다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성제님이라면 골렘처럼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부하를 바라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외람되지만, 조직원을 한자리에 모으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신고식이라고 보기에는 갑작스럽고 위험을 자초하시는 듯 보여…….=
“신고식 맞습니다. 실력 없는 자를 걸러내기 위한 목적도 겸하는 겁니다.”
=…….=
“원래는 좀 더 일찍 치렀어야 했지만, 제 일만으로도 바빠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에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군요.”
스멀스멀, 보이지 않는 시커먼 안개 같은 불안이 심장을 잠식해간다.
“조직…… 이제는 정보독립여단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단에 어울리지 않고 맞지 않는 인물은 방출하려 합니다.”
=……!=
“가족 같은 조직. 가족 같은 동료…… 취지는 좋지만, 임무에 실패하였다고 해서 처분하는 집단에게는 쓰기 과분한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환인은 알고 있었다.
암살에 실패한 이레아, 그리고 자신에게 잡혔던 아영이 처음에는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살해당하는 게 아니라 자살할 각오다.
=암살을 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가족이라는 단어로 묶이는 것부터가 모순이고 부조화이지요…….=
체념한 엘미느의 모습에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애는 타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마법 같은 단어니까요. 진실로 서로를 생각한다면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조직원들을 하나로 이어주고 지켜주겠지만…….”
책상 위에 놓인 다섯 장의 종이 뭉치를 든 환인은 보라는 듯이 흔들며 말했다.
“적어도 이자들은 아닙니다.”
=…….=
“정오까지 앞으로 2시간 남았군요.”
명백한 축객령에 엘미느는 꾸벅, 허리를 숙인 뒤 환인의 지시에 따르기 위하여 빠른 걸음으로 지배인실을 나섰다.
정확히 2시간 뒤, 경기장처럼 거대한 하나의 공간.
환연이 천장에 불러놓은 중급 빛 정령이 내뿜는 빛이 굳어있는 173명의 안색을 비춘다.
………….
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있음에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저 앞의 단상에 있는 환인의 강렬한 존재감과 정체에 위압 당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끄으으으으—!」
「흐어어어……!」
「안돼…… 이렇게 끝날 수는……!」
아르겐테아 정찰병에게 빙의 당한 뒤 표면 사고를 읽히고, 이어 살해당한 다음 영혼술로 그 사실이 전부 밝혀진 자들이 영혼 상태로 귀곡성을 흘리며 영체를 비튼다.
허공에 꼬챙이처럼 고정되어있는 푸른 영혼 상태의 다섯 명.
전부 특급 송곳니로 조직을 유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여겨 그동안 선배, 형님, 누님, 언니, 오빠로 대접해주었던 인간들이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저 새끼들이 다른 암살 조직에 정보를 팔아넘기고 있었단다.
경쟁자이자 살인귀나 다름없는 나사라트의 암살단, 구주의 독니에게 조직원의 정보를 흘려 다른 가족들이 죽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팔아넘긴 이들은 말단도 아니었다. 전원, 성장하면 카락스의 암살자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리라 생각했던 형제자매들.
저 인간들보다 명백히 자질이 뛰어난 가족들이었다.
굳어있던 173명의 시선에 분노가 깃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개 같은 새끼…….=
한 여자 조직원의 욕설을 시작으로 원색적인 비난과 육두문자가 영혼 상태인 다섯에게 쏟아지기 시작한다.
출입구를 제외하면 밀폐된 곳에 170명의 욕설이 퍼부어지니 그 소리에 묻혀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지만, 환연이 바람의 정령으로 공기의 막을 펼치고 있기에 그 소란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환인은 욕을 처먹는 쓰레기들을 보았다.
영혼술로 입을 틀어막아 놓았기에 입도 벙긋 못하고 노여움에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놈들.
5급 엽사 하나, 5급 전사 하나, 4급 술법사 둘, 4급 투사 하나로 전원 푸른색 영혼인데…… 인성과 영혼의 색은 관계가 없다는 걸까.
……! …!!
…! ……!
……!!
“…….”
몇 분동안 조직원들이 배신자들에게 감정을 토해놓는 것을 지켜보던 환인은 조용히 평온의 파동을 펼쳤다.
회백색의 포근한 빛의 파동이 내부를 한차례 뒤덮고 사라지자 분노에 잠겨있던 조직원들의 표정이 흐려지고 우울해진다.
분노에 감정을 내맡겼지만, 그 분노가 가라앉으니 후회와 회한이 대신 그 자리에 자릴 잡은 것.
자신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가.
저런 놈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도록 그렇게 힘들여 일했었나.
환인은 평온의 파동에 반쯤 성불하려는 다섯 영혼을 영혼술로 옭아맨 채로 고개 숙인 조직원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170명 중 110명가량이 2급에서 5급 사이의 직업자다.
저들을 개인 사병으로 거둔다면 삽시간에 지역 군벌로 성장할 수 있을 테지만, 환인은 그런 쪽으로 약간의 흥미조차 내비치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카락스의 암살자는 해체되어 한 명의 칭호로 바뀌었으며 여러분들은 하얀 늑대들의 여단원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공간에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환인의 중저음에 조직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환인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 중에는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
=…….=
=…….=
“그런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갈 기회입니다.”
기회를 주었지만 혹하는 표정을 보이는 이들은 없었다.
이제 와서 일반인으로 돌아간들 평온하게 살 수는 없다는걸 잘 아는 표정들.
환인은 잠시 기다려주었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정하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심사숙고한 다음 일주일 뒤, 그 뜻을 엘미느에게 제출하면 됩니다. 그로 인해 발생할 불이익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세 호흡 정도 기다린 환인은 마지막으로 발언했다.
“이렇게 기회를 주었음에도 여단을 탈퇴하지 않고 남아 저자들과 비슷한 짓을 저지르거나 벌인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적당히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단원들은 환인의 협박에 심장이 잡히는 듯한 약한 공포를 느꼈다.
죽여 영혼으로 만들어버렸는데 이게 적당히 넘어가는 거라고?
대다수의 조직원…… 아니, 여단원들은 일순간 두려움을 품었지만 그런 두려움은 빠르게 내려놓았다.
그 말대로라면 자신들은 안전하다는 이야기이니까.
그때 캥거루 귀를 한 여자 단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예라토.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손을 들긴 했지만 설마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예라토가 움찔하고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제 이름을…….=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의 얼굴, 이름, 나이와 가족관계 전부 알고 있습니다.”
단원들은 잠깐 어리둥절해다가 점점 크게 감격했다.
몇 년, 몇십 년동안 일했어도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이빨이나 특급 송곳니들이 있을 지경이다.
그런데 알게된지 고작 2~3주 정도 된, 이빨들보다 더 위에 있는 분이 자신을 알고 있다니……!
그건 예라토도 마찬가지였기에 각오를 다졌던 처음 모습과 달리 조금 몽글몽글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일반 송곳니였던 예라토 니무스입니다. 성제님께 여쭙고 싶, 싶은 것은…… 성제님 같은 분께 저희가 필요하신가 의문이 들어서예요!=
“바보 같은 질문이군요. 필요하니 여러분들을 불러 배신자를 처형하는 걸 보여준 겁니다. 필요 없었다면 카락스의 암살자를 해체한 뒤 여러분들도 해산시켰겠지요. 나사라트의 암살단이나 구주의 독니 같은 집단이었다면 모두 죽였을 것이고 말입니다.”
환인의 대답에 여우원숭이 머리를 한 단원이 번쩍 손을 들었다.
“킬리프.”
=예, 옛……! 서, 성제님 같은 분께서 저희처럼 손을 피로 물들인 자들이 어째서 필요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성제님께서 말씀만 하신다면 아드지의 전투 경험자들이 모두 모여들지 않겠습니까?=
“그 말도 맞습니다. 제가 요청하면 영도와 대성녀님께서는 병력을 선뜻 내어주시겠지요.”
=…….=
=…….=
“하지만 그런 병력으로는 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다섯 번째 영혼 기사가 된 카락스의 암살자, 아영이 여러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저 또한 여러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려 합니다.”
…웅성.
“이것이 대답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웅성웅성…….
환인은 술렁임이 크게 번져가는 단원들을 바라보다 배신자 다섯 연놈의 영혼을 구슬로 만들어 혼옥 보관고에 수납했다.
나중에 시간내서 회유하고 협박해 계약을 맺을 것이다. 아르겐테아의 정찰병보다 못한 조건으로.
그후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엘미느를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뒷일은 맡기겠습니다. 뭘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 성제님. 실망하시지 않도록 필사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팔라툼에서 만났던 것을 제외한다면 환인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것은 고작 몇 시간.
그 정도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엘미느는 성제님이라면 목숨을 바쳐 섬겨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각 영봉 알노르의 기슭.
부족원들과 함께 밭을 일궈 미궁에서 가져나온 작물을 심고 토굴을 만들던 주술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영도 쪽을 돌아보았다.
바람에 흘러오는 낯익으면서도 가슴 두근거리는 느낌.
=……그의 냄새가 나요.=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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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돔황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