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 영도 에쉬누르
암석산의 초거대 공동을 반으로 뚝 자른 듯한 공간에 세워진 작은 규모의 도시. 그게 영도 에쉬누르다.
지리적 요인과 영도라는 특수성으로 조용하고 고즈넉하지만, 죽어가는 도시 느낌이 전혀 안 드는 곳.
이 특유의 고요함이 취향에 맞은 환인은 필령궁으로 느긋하게 걸어가며 분위기를 만끽하다가 서서히 늘어나는 사람들의 인기척에 멈칫했다.
길가를 오가는 꽤 많은 수의 사람들.
빛내림 현상 같은 아우라의 영혼사도 있고 그 외 술법사, 엽사 같은 아우라의 직업자들도 있다.
이 길은 필령궁으로 향하는 길이라 대성녀에게 용무가 있는 사람 외에는 그다지 이용하지 않는 길일 텐데…… 로브 색을 보면 필령궁과 연관이 없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나 때문인가.’
슬쩍슬쩍 이쪽으로 선망의 눈길을 주는 걸 생각하면 맞는 것 같다.
유일 직업자의 아우라가 궁금했나 보지. 그렇게 생각한 환인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니오네브레스에서 기행을 일삼은 덕분에 저런 시선에 익숙해진 덕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좀 더 걸어 필령궁, 중국식과 일본식 절과 신사를 합친 듯한 궐闕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일곱 영성 중 한 명인 아야빗=우마크레가 길 한복판에 서성이는 것을 발견했다.
술식연구기관의 기관장이기도한 그녀는 베이지색 토끼 귀를 쫑긋거리다가 환인이 나타난 것을 보고 아름다운 꽃을 발견한 소녀처럼 환한 표정을 지었다.
=성제님!=
안느만큼이나 큰 키에 풍만한 몸매를 지닌 아야빗이 베이지색 단발을 휘날리며 달려와 안기는 것에 환인은 속으로 약간 놀라워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기질이 있어 연구와 자극 외에는 거의 무관심하던 그녀가 이토록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고백을…….
=굉~장해! 정말 아우라가 생겼잖아!? 어떻게 된 거죠?! 무슨 이유로!? 불치병으로 알려진 위상류의 치료 단서를 발견한 건가요!? 승급?! 아니면 깨달음으로 인한 초월의 여파!?=
……할 리가 없지.
볼륨 넘치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던 환인은 고개를 들어 호흡을 확보하며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아야빗 영성.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앗. 아하하.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조금 흥분하고 말았네요.=
“그러셨군요. 아우라가 생겨난 이유는 별것 아닙니다.”
보드라운 체취와 약간 뜨거운 체온의 품에서 벗어난 환인은 그리모암의 유물 덕분이라 알려주었고, 아야빗은 흥분을 다스리려는 것처럼 한쪽 토끼 귀를 쓸어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즉 유물급의 위상력 보급 기능이 있다면 아우라를 드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군요? 역시 제 추리가 맞았네요.=
“어떤 추리입니까.”
환인의 질문에 아야빗은 환인과 팔짱을 끼고 필령궁으로 향하며 대답했다.
=위상류는 두 가지 증상으로 일어나죠. 한쪽은 위상력에 너무 민감해지는 것, 다른 쪽은 위상력에 거부반응을 가지게 되는 것.=
어느 쪽이든 위상류를 타고난 아이는 요절하기 마련이다.
위상력에 너무 민감한 쪽은 위상력을 각성도 하지 않은 몸으로 과다하게 받아들여 과잉포화 상태에서 신체가 붕괴해 죽고, 위상력에 거부반응이 강한 쪽은 거부반응으로 신체가 붕괴해 죽는 것.
=거부반응이 약한 쪽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해요. 자그마한 상처에도 큰 병을 얻기 쉽고 상처를 입어도 잘 낫지 않죠. 그 이유로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위상력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라는 가설을 세웠는데…….=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환인이 유르파와 짧은 연구 끝에 내놓은 결론과 같았다.
비록 직업자로 각성하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위상력이 사람의 회복력과 질병 내성 등을 올려준다는 것.
그러니까 위상력이 가득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호흡에서 위상력을 섭취하고 그 혜택을 받는 거다.
니오네브레스 사람들이 말하는 연약하고 병약하다는 건 지구 관점에서는 그저 평범한 수준이라는 뜻.
“제가 이 세계로 넘어와 알게 된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말도 안 되게 질긴 생명력과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 점은 유르파도 확인하고 수긍한 것이지요.”
=그 원인에는 위상류가 있는 거고요. 그런데 니오네브레스인이 지구인에 비해 불결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예. 지구에서는 청결을 보편적으로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루에 한 번 몸을 씻고 비누로 자주 손만 씻어도 질병 대부분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환인의 이야기에 아야빗은 또 연구할 거리가 생겨난 것처럼 관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성제님은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알고 있지만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대성녀님께 여쭈어본 뒤 허락한다면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쪽 세계 과학이랑 연관이 있나요? 흠흠, 그럼 성불행을 나서는 영혼사들에게 비누의 제조법과 청결만 강조해도 병을 얻어 골골거리는 일은 없겠어요…….=
“그정도만 해도 풍토병 예방에는 도움이 될 겁니다.”
아야빗은 이윽고 환인에게 조금 더 바짝 붙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건 그렇고~. 성제님? 영혼 기사들도 두고 왔다고 들었는데…… 오늘 밤 잠자리 시중 필요하지 않아요? 여기 몸 건강하고 시간 남는 여자가 있는데 말이에요.=
연구 가운 차림이라 옷감이 얇은지 팔뚝에 닿은 그녀의 젖가슴 감촉과 38도, 39도정도가 아닐까 싶은 높은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덕분에 작년 이맘때쯤 그녀를 안으며 느꼈던 눅진한 속살맛을 떠올린 환인은 그녀의 찰진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려다 주변 시선을 의식해 참았다.
대신 요염한 표정의 그녀에게 매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도 아야빗 영성의 구멍이 그리웠습니다. 그 뜨거운 속살이며 녹아 들러붙는 듯한 조임하며……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나더군요.”
=…….=
이런 음탕한 말이 돌아올 줄 몰랐던 걸까. 자신의 속삭임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아야빗을 잠시 구경한 환인은 조금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대성녀님이 뭔가 하실 말씀이 많으신듯해 확답을 못 하겠습니다. 접견이 일찍 끝나더라도 이엘카타를 만나러 갈 예정이라.”
=아~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자신도 모르는 다른 여자들과 살을 섞어야 해서 자기 차례가 없다는 건 지이이이이인……짜! 싫지만, 그런 이유라면 인정이지.
대성녀님이 성제님을 불러들인 이유, 샤스라 성녀 후보가 방금 필령궁에 먼저 들어간 것을 보면 명백하다. 이엘카타 예지가는 성제님의 아기님을 품은 귀하신 몸이고.
자신의 차례가 그 세 명의 뒤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아야빗은 환인의 귀에 진심을 듬뿍 담아 속삭였다.
=앞뒤 구멍 전부 깨끗하게 씻고 성제님 방에서 기다릴 테니까…… 아침까지는 와주셔야 해요♡=
토끼 꼬리를 살랑이며 멀어져가는 아야빗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영혼 기사 아가씨들이 환인에게 꾸벅 허릴 숙이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그에 안주머니에 숨어있던 환연이 어이없어하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발정 난 토끼만큼 야한 동물은 없다더니. 저 인간도 장난 아니네.」
“그건 또 어디서 들었지.”
「유르파랑 안느가 네 노트북으로 공부할 때 나도 옆에서 좀 봤어.」
……그러고 보니 시간 날 때 여흥 삼아 보기 위해 넣어둔 상업, 예술 영화가 제법 있었지.
환인은 그걸 봤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제는 대놓고 구경하는 영혼사와 영혼 기사들 사이를 지나 필령궁에 들어섰다.
입구에서 무녀 같은 복장의 여성에게 안내받아 대성녀실에 도착한 환인은 황금색을 주로 쓴 고풍스러운 동양풍 집무실에서 대성녀의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어서오시오. 그대가 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소.》
“통신으로만 보다 직접 뵈니 좋군요.”
《소녀를 보아 기쁘다는 이야기겠지? 후후. 자아 이리로.》
“예. 샤스라 성녀 후보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직접 다가와 손을 잡고 안내하는 대성녀를 따라가며 환인은 한쪽 방석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은색 머릿결의 미처녀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길고 두툼한 은색 용의 꼬리를 살짝 살랑이며 고개를 숙인 샤스라가 부끄럼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성제님의 은혜로 편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성제님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다행히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대답하면서 환인은 같은 은발이지만, 안느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샤스라를 유심히 살폈다.
이모저모 살펴보니 확실히 백려강의 용인체나 아드네빌라와 다른 점이 눈에 보인다.
아드네빌라의 뿔은 사슴뿔을 약간 간략화시킨 듯한, 나뭇가지와 비슷한 뿔이다.
꼬리도 팔보다는 굵지만 허벅지보다는 얇은 편이며 길이도 거의 2m에 가까운 수준. 생각 없이 늘어트리면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다.
하지만 샤스라의 뿔은 다소 짧고 뭉툭한……. 조금 바위 느낌도 드는 뿔이다. 꼬리도 엉덩이 부분은 허벅지만큼 굵지만 끝으로 갈수록 얇아지며 길이도 약 1.5m 정도.
피부에서도 차이 난다.
사람의 피부와 다를 게 없는 아드네빌라와 달리 그녀의 피부 곳곳에는 은색의 투명한 비늘이 여러 장 모여있으며 보석처럼 빛을 반사한다. 눈동자 또한 파충류처럼 세로로 살짝 갈라진 은색 눈동자.
따로따로 보자면 서커스에서나 볼법한 요소인데 이 모든 게 한데 어우러지니 신비로운 종족이란 느낌이 강하다.
샤스라와 마주 보는 자리의 금실 은실로 수놓은 방석에 환인을 앉힌 대성녀는 근처의 방석에 앉으며 환인에게 관심을 표했다.
《그 아우라의 발현도 성장의 밑거름이오? 현월의 방에서 보았던 아우라보다 더욱 찬란하고 화려하니 눈 둘 곳을 모를 지경이오만.》
“이건 유물의 효과일 뿐입니다.”
《아아……. 그리모암의 유물을 모두 모았군. 유물이 위상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위상력 집적 장치 역할을 해주나 보오?》
“정확합니다. 이 덕분에 한결 정체를 숨기고 다니기 편해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대 정도면 이제 정체를 숨기고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겠소? 그대에게 싸움을 걸 자는 이제 더 없을 것이고, 그대의 존재감이라면 평범한 이들은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할 테니 귀찮은 일도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 샤스라 성녀는 어찌 생각하시오?》
=대성녀님 말씀대로입니다. 성제님의 위명은 현재 니오네브레스 전체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정체를 숨긴다고 하여도 알아볼 이들은 다 알아볼 것이니…… 다소 마음 편히 성불행을 하셔도 되겠지요.=
그녀들의 이야기에 환인도 물었다.
“팔라툼에서 테이아무스 섭정이 보여준 반응을 보면 그런 느낌이긴 합니다만……. 제 소문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퍼져나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외교통상기관장이신 샤스라 성녀께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성제님과 계약을 맺으신 가야 시라넬, 기억하고 계시는가요.=
“예.”
=그녀가 거인숲을 나와 본국으로 향한 뒤, 성제님의 부탁대로 서신인 척 그녀의 기반을 뒷받침해줄 만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하얀 늑대들과 연계하여 엘위드리스 시에서 일어난 일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는데…….=
메리아놀의 예지 가문인 엘위드리스는 족히 천 년간 이어져 온 메리아놀의 명백한 최고위 귀족 가문이다.
한 걸음이 부족해 메리아놀의 5대 왕실 가문에 속하진 못하였지만, 라드세아 식으로 말하자면 성족 아래인 8급 호족이며 히스론드 식으로 말하면 삼쌍익의 공작 가문.
그런 가문이 예지로 자기 가문의 멸문을 보고 환인을 암살하려다 되려 박살 나버려 백작 가문만도 못하게 되었다.
엘위드리스의 기사단 300명 중 태반이 내전에 휘말려 채 20명도 남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하급 기사 수준.
관리들도 대부분이 원로파, 공녀파, 가주파로 나뉘어 있어 내전에 대거 쓸려나가 당장 내정부터가 문제로 부상하고 있으며 재산의 손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해 공작저 대파, 엘위드리스의 상징인 천년수千年樹마저도 불타 그루터기만 남았다.
현재 가주이자 8급 희귀 직업인 신비궁사 프슈드=오울=엘위드리스가 남아있기에 간신히 백작 언저리에 버티고 있을 뿐이지, 중앙 협의회가 성제 암살건의 죄를 물으면 작위 강등은커녕 귀족 지위마저도 위태로운 수준이라고.
=이 모든 것이 성제님을 공격했다 벌어진 일입니다. 엘위드리스의 가문은 니오네브레스에서도 알아주는 최고위 명문가인데 그런 곳이 쑥대밭으로 변하였으니 어찌 귀족, 호족, 부족장들이 성제님을 얕보고 경시하겠습니까.=
《음. 그뿐만이 아니오. 저 거인숲 미궁의 거인들을 회유하였고 알류겔의 마룡 아드네빌라와도 친분이 널리 알려졌으며 초월급 물의 정령 릴라이스와 계약까지 맺었지. 며칠 전에 도착한 팔라툼의 사절과 접견을 진행하였는데…….》
팔라툼은 앞으로 성제가 크나큰 국가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자신을 적극 지지할 거라는 뜻을 내비쳤다고.
“그게 지금 귀족과 호족들 사이에 다 퍼지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그러합니다.=
“…….”
환인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 소문이 그냥 퍼진 것은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곧 있을 승령천제를 위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영혼사들이 대성녀와 샤스라 성녀의 지시 아래 소문을 퍼트리고 있기 때문일터.
거인숲 미궁 입구에서 각국 사절에게 보여준 능력이 그러한 소문에 살을 덧붙인 것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두 분 말씀대로입니다. 그간 차원 방랑자라는 신분 탓에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는데,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이니 더는 마음을 졸일 이유가 없겠군요.”
그의 대답에 안심이 되었을까. 대성녀는 신비로운 느낌의 소녀 얼굴로 방긋 미소 지었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오. 실제 그대가 느낀 위협과 그에 대한 대응은 극히 올바른 것이었으니까. 그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자 하는 뜻은 아니며 그대의 마음이 강인함을 알고 하는 말이지만…….》
자신의 일로 차원 방랑자의 현황에 대하여 의문이 들어 알아본 결과, 지난 2년 사이에 10명이 넘는 차원 방랑자가 나타났음을 확인하였고 그들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대성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전원입니까.”
《사람들이 발견하기 전에 크나큰 상처를 입어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은 이들도 있지만, 차원 방랑자임을 대놓고 드러내다 악한들이 꼬여 살해당한 경우도 적지 않소. 특히 여자는 더 끔찍한 일을 당하였지.》
말하면서 환인의 안색을 살폈던 대성녀는 환인이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모습에 속으로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정말로 피아의 구분이 명확하구나. 일찍이 이쪽의 모든 것을 내보이며 그의 양팔 안으로 들어간 것이 정답이었어…….’
대성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간파한 환인이었지만, 그런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는 일개 개인이며 제 한 몸과 저에게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에만 급급한 소인배입니다.”
=그런…… 소인배시라니요. 성제님이 소인배라면 이 세상 사람 대부분은 모리배와 무뢰배이겠지요.=
외교통상을 담당하며 사람의 내심을 짚는 데에도 뛰어난 샤스라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의 자기 관리.
환인은 자신을 위로하는 샤스라에게 작게 웃어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만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은 어찌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그러한 문제를 뿌리 뽑아야겠지요.”
《그, 그렇소?》
=…….=
대성녀와 샤스라는 분명 평범하게 웃으며 하는 말속에서 진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못해도 수십, 수백 명은 죽어 나갈듯한 짙은 혈향. 무언가,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한 내막이 있는 걸까?
그가 돌아가면 그 사실을 집중적으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대성녀는 주제를 전환했다.
이런 불편한 이야기보다는 그가 오면 꼭 말하고자 했던 주제이며 샤스라를 불러들인 이유기도 한 것.
《아무튼… 성제에게는 말만으로 다 표현 못 할 정도의 큰 은혜를 입고 있어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어떻게 감사를 표시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런 말씀을 하시면 섭섭합니다. 저도 영도의 일원인데 은혜라니요.”
《그게 어느 정도라야 불러서 잘하였다고 칭찬해주는데 성제의 활약은 잘했다는 칭찬으로 끝난 일이 아니잖소? 특히 거인들과 농법서는 정말이지…….》
그간 식량 문제로 속앓이를 한 것이 꽤 되는지, 대성녀가 조금 감정이 북받친 모습으로 말을 잠시 잇지 못한다.
대신 말을 이은 것은 대성녀 후보로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샤스라였다.
=이곳은 차마 농작이 수월한 곳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영봉 알노르가 있어 북쪽의 이블팩션 종자들이 대거 내려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매해 적지 않은 숫자의 마물이 침범해오고 있지요.=
그 탓에 죽은 마물이 흘린 피로 땅이 오염되어 한해 농사를 포기해야하거나, 마물의 습격으로 농지가 파괴되기 일쑤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샤스라.
=영도와 아드지의 가장 큰 골칫거리를 꼽자면 바로 식량 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해결될 실마리, 가능성이 높은 도움을 바로 성제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샤스라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감정을 추스른 대성녀는 차분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알고 있으시오? 보름도 전에 거인들이 도착한 이후 남하해오는 마물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소. 더욱이 주술사가 만들어내는 마도기는 영도의 영혼 기사들 전력에 크나큰 도움이 되고 있지. 그뿐이랴, 내무기관과 역사기관, 술연기관이 합작하여 연구 중인 농법개론 적용은 매우 뛰어난 결실을 벌써부터 보이고 있어 6개월 후가 기대될 정도라지.》
그녀가 기다란 기린의 꼬리를 한차례 채찍처럼 흔드니 포근한 황금빛 기운이 방을 뒤덮는다.
《비마르 영성의 예측에 따르면 1만 명이 족히 먹을 식량이 생산될 거라더군. 성제, 짐작이 가시오? 어렵게 도착한 아드지에서 식량 사정이 나빠 배를 곯다 목숨을 잃는 순례자와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 어떤지 말이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겠지요.”
《그런 심정을 이제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되는 소녀의 마음이 어떤지는 아시겠소?》
천천히 말하며 그녀의 조막만 한 손이 의복을 한 꺼풀씩 벗기 시작하니, 그녀가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는 고작 세 호흡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이제 14살, 15살 남짓한 소녀와 처녀의 경계선에 선 나신.
어려 보인다지만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풋풋한 여체의 나신에 환인이 잠깐 눈을 끔뻑인다.
《성제 그대는 호색한이며 물욕이 없는 쾌남이기도 하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소녀가 그대를 만족시켜줄 것은 이런 것 뿐인 듯 하니…… 부디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시기를 바라오.》
=성제님. 미력한 몸이지만,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돌린 환인은 샤스라 또한 하얀 사제복 같은 여성용 로브를 천천히 벗어 내리고 있었다.
가슴과 둔부의 굴곡을 아름답게 드러내던 로브가 풀썩하고 떨어져내리자 1년 사이 더욱 아름다워진 샤스라의 빛나는 알몸이 드러난다.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처럼 완벽한 형태의 젖가슴과 모래시계가 생각날 정도로 날씬한 허리, 손을 얹으면 안정감이 느껴질만큼 매혹적인 골반까지.
신수 기린의 여체와 용인족의 여체가 내뿜는 휘광에 환인은 조그맣게 목울대를 울렁였다.
딱히 이러려고 온 것은 아니었고 이엘카타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지만…….
‘시간은 많으니.’
니오네브레스에서 고귀하기로 손꼽히는 여자를 깔아뭉개고 허덕이는 걸 또 구경할 기회가 어디 흔한가.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탐스러운 두 여자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런데 방금 샤스라의 아랫배에 마력이 살짝 뭉쳐져있던 것 같더니, 피임 술법 같은거라도 쓴 걸까.
환인은 시잘데 없는 생각을 끊고 양팔에 폭 들어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금색 소녀와 은색 처녀. 그녀들의 무방비한 젖가슴을 욕심껏 움켜쥐며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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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연말이 되니까 이래저래 일에 치이네용 흑흑
당분간 땜빵 겸 욕망 발산으로 몇 화가 이어질...흐흐흐.. 이어질 예정입니다.
독자님들도 연말 술독 조심하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