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 하늘 도시 팔라툼
* * * *
두두두두두—
네 마리의 갈색 쿠에를 타고 어두운 숲길을 질주하는 중년의 플뢰 네 명.
봉두난발에 헝클어진 머리, 찢어지고 그을리고 살짝 불탄 로브를 걸친 모습은 패주 중인 귀족 그 자체다.
=달려라, 달려!=
=이랴! 끼럇!=
꾸, 쿠에~!
쿠우웃~!
극심한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일그러진 얼굴로 연신 쿠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면서 플뢰 남자들, 엘위드리스 가문의 원로들은 어금니를 부드득 갈았다.
프슈드=오울=엘위드리스……! 가주의 몸으로 가율家律을 어기고 직접 활시위를 당기다니!
신사적으로 가율대로 내전을 벌였다면 그들도 외세를 불러들이지 않았겠지만, 가주가 먼저 가율을 깨트렸으니 자신들도 이제 수단과 방법을 전부 동원할 것이다.
엘위드리스 시의 원로지만 그들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른 도시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 혈족들.
메리아놀의 도시 가문 귀족들은 다들 한 다리 건너 한 다리씩 지연과 학연, 혈연으로 맺어져 있다.
명분은 이쪽에 있다. 적법한 권리 또한 자신들도 가지고 있다. 가주의 위법 사실을 알리고 조력을 요청한다면 다른 귀족 가문은 반드시 힘을 빌려줄 터.
머릿속으로 지원을 요청할 가문의 명단과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대가를 열심히 셈하면서 쿠에의 옆구리가 찢어져 피가 날 정도로 박차를 가하던 원로들은…….
시이잉—…….
머리 위로 한 줄기 죽음의 빛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화살 한 대가 일으킨 백색 돔dome 형 폭발에 휩쓸려 뼛조각,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버렸다.
쿠구구구…….
=명중입니다. 20km 넘게 떨어진 곳에서 적중시키다니, 20년이 지났어도 신비궁사의 활 솜씨는 명불허전이군요.=
=…….=
=후후…….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 일단의 사태를 불러일으킨 자들이니까요.=
=나의 잘못도 있었소.=
=저런, 그런 말씀은 곤란합니다. 현시대의 메리아놀 귀족 전체를 비난하시다니, 겨우 물러간 재난을 다시 불러들여서야 어불성설이 아니겠습니까.=
서자나 흠이 있는 자식을 객지에 보내 자연스럽게 죽게 하는 것은 메리아놀 귀족계에 광범위하게 퍼진 풍습이다.
다소 과격한 자들은 적당히 시간이 흐른 뒤 암살자를 보내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한 가문의 가주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는 사실은 근엄한 선비들에게 물어뜯을 빌미를 주게 된다.
프슈드는 사그라드는 빛의 기둥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따라 손에 쥔 신비궁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 프슈드를 뒤에서 바라보던 협의회 대리인은 순간이동 능력의 희귀 아우라가 일렁일 정도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영도로 영혼술의 함양을 위하여 떠나셨던 엘위드리스 가문의 사녀께서, 이 시대 유일한 특수 희귀 직업자이자 대영웅으로 급부상 중인 남자와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여 그의 씨를 잉태하였다고 합니다.=
4녀라면 이엘카타인데, 그 말을 왜 지금 하는 걸까. 프슈드가 의문을 품은 순간.
쿠쿵…….
도시 쪽에 일어난 또 하나의 폭발음에 고작 몇 달 사이 수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프슈드의 얼굴이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어둠이 내린 숲의 지평선에 희미한 화광이 치솟아 오른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산기슭에서 보일 정도라면 어지간히 커다란 폭발이라는 뜻.
=가문을 멸망으로 몰아갈 가능성을 가진 여식은 후환의 밑거름만 될 뿐이지요. 엘위드리스의 찬란한 미래는 가문의 사녀께서만 이끌 수 있으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툭, 프슈드의 손에서 신비궁이 흘러내려 낙하했다. 그것을 재빨리 낚아챈 대리인은 웃으며 다시 그의 손에 활을 쥐여주었다.
=다소 유약하신데다 핵심 인물들이 대거 사망하여 가주의 자리를 힘겨워하실 수 있겠으나,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협의회는 결단을 내린 프슈드 님과 엘위드리스 가문에 무한한 지원을 약속드리셨으니까요.=
그러니 가문이 사라지지 않고 이 정도에서 끝난 것이 행운임을 명심하십시오.
프슈드는 뒤에서 대리인의 인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회한이 잠긴 시선은 화광이 일렁이는 지평선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 * * *
[……엘위드리스 시의 상징인 거수목은 전소하여 뿌리만 남았으며, 일반 시민의 피해는 경미하나 격전지가 된 귀족 거리는 대파, 휩쓸린 귀족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환인은 수정구를 통해 정보 조직으로 탈바꿈한 하얀 늑대들의 보고를 들으며 조용히 커피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어젯밤, 이름리아 공녀의 대저택에서 정체불명의 폭발이 벌어져 내전 막바지까지 생존해있던 이름리아 공녀와 핀레셀덴 공자 및 공녀파 귀족 대다수가 사망하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
[도시 밖으로 도주하였던 원로원 생존자 네 명 또한 마수의 습격으로 유명을 달리해 생존한 원로는 0명, 가주 차기 계승자 또한 이엘카타 님을 제외한 전원 사망이 확정되었습니다.]
“마수의 습격입니까.”
환인의 나지막한 질문에 수정구 속에서 보고를 올리던 엘미느는 머리 위의 검은색 작은 날개가 살랑일 만큼만 고개를 끄덕였다.
[대외적으로는 마수의 습격입니다. 정보원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밤하늘에 한 줄기 빛의 선이 그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신비궁사가 직접 원로들을 참살한 것일 가능성이 9할 이상이며, 이름리아 공녀 저택의 정체불명 폭발 또한 대외적인 발표이나 현재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관한 조사는 중단하십시오.”
[……어째서인지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조사자에 대한 협의회의 반격이 들어갈 테니 아직 여물지 않은 하얀 늑대들의 전력으로 그들을 상대하긴 어려울 겁니다.”
엘미느는 수정구 너머로 보이는 환인의 옆모습을 보며 미간을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찡그렸다.
성제님은 그 폭발이 협의회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보시는 건가? 그 시점에 대한 근거는? 혹시 자신들 외에 다른 정보 제공원이 있으신 걸까?
“내전 결과 생존자는 이엘카타와 가주인 프슈드를 비롯해 내전과는 무관한 하급 귀족들과 일부 예지, 예언 능력자들 뿐.”
엘위드리스 내전의 경과는 예지 능력을 가진 이들의 전투라 보기 어려웠다.
수 싸움이란 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인이 보기엔 가만히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서로 수를 읽다가 한순간에 결판나는 것이 수 싸움인 거다.
하지만 내전은 전멸전, 전면전에 가까웠다. 사망자의 숫자는 막대했고 핵심 인사만 내전 끝에 살아남았다.
“내전이 발발한 이유와 현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볼 집단이 누구인가 유추해본다면 그 배후에 누가 있을지는 명료합니다.”
[협의회…….]
“지나친 억측일 수 있겠지만, 협의회라고 한다면 모든 사태의 일련이 요연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말씀대로입니다. 정보원은 즉시 현장에서 철수시키겠습니다.]
“협의회 쪽의 의도를 조심스레 알아보십시오. 깊게 들어가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
통신이 종료되고 수정구가 투명해졌을 때, 환인은 차음 결계 마도구를 조작해 해제한 뒤 커튼을 젖혔다.
눈부시게 밝은 빛이 어두컴컴하던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조금 냉기가 감돌던 방 안이 따스해져 간다.
챙— 채쟁, 칵! 드득—
뒤뜰에서는 이실리테가 아영과 대련 중이고 백려강과 안느는 나무 그늘에 앉아 명상하고 있다.
아무 근심걱정 없는 평화로운 시간 속의 여자친구들.
“…….”
환인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조금, 흡연의 욕구가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하얀 늑대들의 보고를 종합해보면 협의회는 사과의 뜻에서 이엘카타에게 가문을 넘겨주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과 이엘카타와 깊은 관계라는 걸 넘겨짚었기 때문으로 짐작되는데…….
‘귀찮군.’
그냥 귀찮다. 이엘카타에게 가문을 넘겨주려는 행위 속에 이쪽과 연줄을 만들어 가깝게 지내고자 하는 흑심이 고스란히 보였기 때문.
게다가 좀, 손해 보기 싫어하는 속내가 훤히 보여 마음에 안 든다.
협의회가 정말로 이걸 보상안으로 내놓는다면, 이걸로 자신이 얻을 거라곤 메리아놀에 미약한 귀족적인 기반 하나뿐이다.
하지만 협의회가 얻는 것은 그 이상.
이번 내전에서 엘위드리스 가문의 혈계술을 협의회는 틀림없이 일부 빼돌렸을 것이다. 그리고 협의회는 이엘카타의 성정과 귀족들 태반이 몰살당한 엘위드리스 가문 내의 상황을 두고 대리청정할 생각도 하고 있겠지.
예지로 유명한 엘위드리스 가문에 대한 장악력 증가, 엘위드리스 가문이 지니고 있던 혈계술의 확보, 암살 건에 대한 책임 전가 및 영도, 성제와 맺을 인맥.
가볍게 꼽아봐도 협의회는 이러한 보상을 챙길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영도에서 영혼사로 수양 중인 이엘카타가 협의회의 제안, 엘위드리스의 가주 직을 받아들일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듯한 태도다.
“…….”
환인은 수정구를 챙겨서 유르파의 방을 찾아갔다.
똑똑.
“유르파, 저입니다.”
다다닷- 달칵.
=응, 자기. 들어와.=
“…….”
들어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환인은 들어가지 못하고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유르파를 응시했다.
허리를 자랑스럽게 펴고 있는 유르파의 옷차림이 그의 사고를 일순간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슬링 샷 비키니라고 해야 할 만큼 유두와 국부만 간신히 가린 차림…… 아니, 움직이다가 위치가 조금 어긋났는지 국부를 가리는 천 조각이 주름 잡히며 음핵과 대음순 절반을 드러낸 모습.
“……유르파, 그 차림은?”
=이번에 만들고 있는 방어 마도기야. 자 얼른 들어와.=
환인은 자신의 팔을 끌어안으려다 옷에 걸려 왼쪽 유두가 훤히 드러나는 모습에 그녀의 젖꼭지 가리개와 음부 가리개를 다시 자리 잡아주며 물었다.
“방어 마도기라고 보기에는 너무…… 무방비해 보입니다만.”
=앗, 어머나~.=
보기 좋으냐 싫으냐를 따진다면 단연코 보기 좋다.
8등신 완벽한 비율의 몸매는 우월함 그 자체고, 흡정족에서 정현족으로 탈태하며 살짝 늘어졌던 그녀의 H컵 가슴은 그 특유의 부드러움을 간직한 채 탄력을 되찾았다.
이실리테와 같은 글래머 타입이었지만 아무리 운동해도 빠지지 않는 약간의 군살 덕분에 그녀를 끌어안으면 온몸을 감싸주는 듯한 극상의 포근함은 오직 그녀만의 무기였으니.
그런 매력을 감추지 않고 전부 드러내는 슬링 샷 비키니는 말 그대로 동정을 죽일 수 있는 옷이었던 거다.
하지만 방어의 측면에서 보자면 옷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방어력은 커녕 바람조차 막지 못할 디자인이었으니까.
유르파는 재빨리 옷감의 위치를 고쳐 유두와 음부를 가리며 대답했다.
=이슬이 아가씨의 갑옷 있잖니. 천상의 장막, 그 기능 중 일부를 뽑아서 적용해본 거야.=
“위상력 감응에 역장 생성 말입니까.”
이실리테의 갑옷은 복부와 허벅지, 어깨를 시원하게 드러내는 디자인이다.
여신처럼 아름다운 이실리테가 착용하니 그야말로 눈이 즐겁지만, 그 방어력은 적의 관점에서 절대 즐겁지 않은 수준이다. 검희로 재각성 하며 대폭 늘어난 그녀의 위상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장막의 역장 기능은, 맨살에 칼을 맞더라도 약간의 생채기조차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맞아. 역장 기능은 이러한 마도기에 대부분 들어가는 기능이지만, 위상력 감응 기능이랑 결합한 역장은 강도며 내구성이 대폭 늘어나거든.=
“아영의 장비로 그 슬링 샷 비키니를 줄 생각인 거군요.”
어제 보여주었던 귀여운 흉계 어린 표정의 이유는 이거였나.
=아, 이걸 슬링 샷이라고 하는구나? 맞아, 조금 더 안정적으로 가릴 수 있게끔 디자인을 손봐서 만들어주려고 해.=
유두와 음부의 천을 이어주는 끈을 스스로 잡아당기며 하는 설명에 하얀 음모와 분홍색 유두가 훤히 드러난다.
=……아하하.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건 조금 부끄럽네~.=
쑥스러워하며 몸을 살짝 비튼 유르파의 무방비한 모습은 당장 그녀를 엎어놓고 무자비하게 속살을 탐해버리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환인의 자제심은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난다.
환인은 그녀를 뒤에서 살짝 끌어안고 손가락 사이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그녀의 젖가슴을 잠깐 주무르다가 속삭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뒤집어서 개처럼 따먹어버리고 싶지만…… 확인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아쉽지만 참아야겠습니다.”
=으응……. 나도 굉장히 아쉬운걸.=
엉덩이 골짜기로 발기한 게 느껴지는 그의 고간을 살짝살짝 문지르며 아쉬워한 유르파는 네글리제 실크 가운을 가져와 입으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거니?=
“영도와 통신을 해야겠습니다. 하얀 늑대들에게 보고가 올라왔는데 사안이 사안이라.”
보고 내용을 들려주자 유르파가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협의회를 비난한다.
=뭐니 그게. 대놓고 자길 이용하겠다는 소리잖아. 혹시 이엘카타 아가씨, 자기의 씨를 잉태한 거 아니야?=
“…….”
일리가 있다.
그런 거라면 협의회가 이엘카타를 엘위드리스의 가주로 삼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세계에도 혈연은 학연, 지연, 혈연 중 최고의 연으로 치니까.
그녀가 준비해준 통신 수정구로 대성녀와 연결해 확인해보았더니 정말이었다.
[어찌 아셨소? 뱃속의 아이가 안정되면 그대에게 언질 주려 했거늘.]
“협의회가 이엘카타를 엘위드리스 가문의 가주로 삼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유를 되짚어가다 보니 그런 결론이 나오더군요.”
[……망할 종자들이로다. 그런 이유로 한 가문의 아이를 모조리 도륙 냈단 말인가!]
황금빛의 소녀는 노기를 참지 못해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환인을 힐끔 보곤 물었다.
[성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아이를 엘위드리스로 보내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시오?]
“제 뜻보다 그녀의 의지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영도에 또 다른…….”
[아아.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이엘 그 아이의 임신 소식을 듣고 그대와 정사를 치른 여아들을 모두 검사하였으나, 임신은 그 아이 하나뿐이었지.]
“대성녀님도 그렇습니까.”
[…….]
닌실은 뺨을 살짝 붉히며 환인을 째려보곤 크흠, 귀여운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엘은 그대의 아기씨를 품은 현 상황에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소. 조금씩 부풀어가는 배를 어루만지며 태교에 온 힘을 쏟고 있지. 만약 그 소식을 들려준다면…….]
“그녀의 평온은 깨지겠지요. 그래서 대성녀님이 제 뜻을 물으셨군요.”
[맞소. 솔직히 말해 그 아이가 누굴 이끌 재목은 아니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의 그늘에 있는 것이 그 아이에게 가장 행복하며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소.]
환인은 대성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간단히 결론을 냈다.
“대성녀님. 협의회가 접촉해온다면 이엘카타가 출산하고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영도에서 지내는 것을 받아들일 때만 가주 직을 계승한다고 전해주십시오.”
[5년이면 상황을 정리할 자신이 있는 거요?]
“예. 그게 아니더라도 5년이면 이엘카타도 안정을 찾을 테고 아이도 다섯 살이면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졌을 시기이니까요.”
이엘카타 같은 여자는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기가 있을 때 어머니의 힘이라는 것으로 강해지는 부류다.
아이와 함께 엘위드리스 가문으로 들어가고, 영혼사라는 이유로 근접 호위를 붙이면 가문 내에서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하는 게 가능하겠지.
[그런 거라면 우리 영도도 나름 개입할 여지가 있겠군.]
대성녀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그 개입이라는 건 이엘카타와 아이를 지키기 위한 쪽일 것이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응? 잠시 후에 보겠다니 그게 무슨 이야기요?]
“이 이야기는 그녀의 삶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인 만큼 직접 그녀에게 말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비상을 타고 날아간다면 오늘 안으로 도착할 수 있겠지요.”
아, 그 영물이라면 가능하고도 남겠지.
대성녀는 잠시 환인의 얼굴을 바라보다 살포시 미소 지었다. 역시 그를 성제로 삼은 것은 아주 오래전, 친구와 함께 영봉에서 나온 일만큼이나 잘한 것 같다.
[알겠소. 마침 소녀도 할 이야기가 아주 많으니…… 잠시 후에 뵙지.]
여자친구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환인은 비상을 타고 즉시 하늘을 날아올랐다.
측량법이라고 하기도 어설픈 거리 측정이지만, 자신의 계산대로라면 팔라툼에서 영도까지 직선거리로 약 2,000km.
“환연, 상급 바람 정령을 불러 비상의 비행을 도울 수 있겠나.”
「가능해. 지금부터 할까?」
“그래. 비상, 최대한 빨리 날아가자.”
꾸으~!
팔라툼이 손바닥으로 가려질 만큼 높이 올라온 비상은 상급 바람 정령의 가호를 받아 평균 시속 300km에 달할 정도로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환인의 원기 방출과 바람 정령의 보조 덕분에 가능한 초고속 비행.
“…….”
조인족은 물론이고 플라비우스족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고속으로 구름 위를 날아가고 있자니 그간의 여정이 환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지금이라면 비상과 단둘이 이동할 경우 한 달 안으로 메리아놀 수도 패시지에 도착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없다.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6급 이상의 미궁 심층을 돌파해야 하는데 그건 혼자서 하기에 힘든 일이니까.
“……지금이라면 혼자서도 가능하기야 하겠군.”
「응? 뭐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와서 여자친구들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이실리테의 요리가 없다면 식사는 무척이나 퍽퍽할 것이다.
안느의 친화력과 분위기 메이커 기질이 없다면 여행은 무척 조용하고 쓸쓸해지겠지.
유르파의 알게 모르게 모두를 신경 써주고 돌봐주는 마음 씀씀이가 없었다면 여자친구들이 서로를 보며 얼굴을 붉혀도 몇 번은 붉힐 거다.
백려강과 아영이 매일 아침 찾아와 부드럽게 깨워주지 않는다면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하지도 못할 것이고.
언제나 자신의 안주머니 포켓에서 머물러주는 환연이 없었다면 주변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지지 않았을까.
꾸~! 쿠엣!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한 구름을 내려다보며 여자친구들의 소중함을 되새기던 환인은 비상의 경고 섞인 외침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적? 적이 있는 거 같다니……. 구름 밑인가!
“환연!”
「구름 밑이야! 뭔가 엄청나게 커!」
환연의 외침과 함께 비상이 옆으로 확 기울며 방향을 꺾었고, 동시에 구름바다에서 허옇고 기다란 무언가가 구름을 몸에 감은 채 화살처럼 쏜살같이 치솟아 올랐다.
“……!?”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그 크기에 환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강을 고스란히 흰 뱀으로 만들면 저만할까.
족히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와 수십 대의 차량이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넓이의 하얀 뱀이 한 장 한 장이 섬만 한 12장의 비늘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포효를 지른다.
—————!!!
꾸으……!
「으극!」
굉음은 없이 고막이 찢어지는 고통만 밀어닥쳤다.
단순한 포효가 아니라 구름을 잘게 진동시켜 형태를 흐트러트릴 정도로 강력한 음파 공격.
“환연! 공기의 막을 펼쳐라!”
환연이 펼친 공기의 완충 지대에 막혀 그 소리가 대폭 감소한 순간 환연이 어이없어하며 빽, 고함을 질렀다.
「뭐야 저거?!」
“못해도 7급이다! 비상, 회피는 너에게 맡기마! 환연 너는 정령을 있는 대로 불러 저걸 공격해라! 저 괴물의 속성은 물과 바람, 빛이다!”
영혼의 눈으로 보이는 마력과 영혼의 색을 읽어 괴물의 속성을 짚어낸 환인은 즉시 광창을 꺼내는 동시에 비상과 환연, 자신의 몸에 5급 버그베어의 영혼을 강령시키고 비상의 등에 납작 붙었다.
쿠쿵——!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는 괴물 하늘뱀의 공격을 피해 비상도 가일층 가속하자 공기의 벽이 찢어지기 시작한다.
그러한 속도로 곡예비행을 펼치기 시작하니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에 더해 위와 아래가 급격하게 변화하며 약간의 어지럼증이 환인을 덮쳤다.
감각과 지각이 남들보다 몇 배나 높은데다 급격한 중력 운동으로 세반고리관에 이상이 발생해서 벌어진 현상.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에 적응한 환인은 웅웅웅 떨리는 빛의 창을 움켜쥐고 이쪽을 죽이겠다며 심장을 꿰뚫는듯한 살기와 함께 쫓아오는 거대한 흰 뱀 괴물을 응시했다.
‘언제고 비상이 구름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지. 그 이유가 이거였나.’
그런데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는 건 저걸 상대로 자신과 비상 둘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
환인은 무의식중에 씩 웃으며 왼손에 영혼 폭발 구슬을 형성시켰다.
명실상부한 환인의 필살기이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 틀림없을, 위상력을 먹어 치운 심핵력과 영기가 적절히 믹스된 영혼 구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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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오랜만에 가족과 호텔 뷔페를 갔는데 어째 아침부터 몸이 으슬으슬하고 목이 꽉 잠겨있더니... 결국 목감기가 찾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글쟁이가 약먹고 달팽이처럼 이불 속에 웅크려 있을 때 커플들은 모텔 이불 속에서 서로 손 꽉 잡고 있었겠지요.. 따흐흑
분노의 7088자 야설을 쓰고 싶었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겠읍니다
늦었지만 독자님들 메리 크리스마스!
[작품 설정]
battl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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