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 위상석 생산 공장
미궁의 심장이 웅웅거리며 분노와 같은 파동을 뿌릴 때마다 군영으로 쓰는 공간보다 몇 배나 거대한 심핵방이 붉은빛으로 물든다.
=크……! 부단장님, 심핵에 종류를 알기 힘든 에너지가 너무 많이 쌓이고 있습니다!=
=기존 속성이 변이를 일으키고 있어요!!=
=제어, 제어가 어렵습니다……!=
=약한 소리 하지 마라! 천공 기사의 자긍심을 떠올려라! 너희들 어깨에 50만 팔라툼 시민의 목숨이 올라가 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환인은 비명을 지르는듯한 기사단원들의 외침과 유르트랑의 고함을 들으며 방 내부를 살폈다.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안간힘을 다해 심핵력의 에너지를 흐트러트리려는 술법 기사들. 그런 기사들을 긴장으로 딱딱해진 채 지켜보는 근접 기사들.
그리고 정말 혈관이라도 된 양 심핵의 박동에 맞춰 두쿵거리는 빼곡한 경락들.
시뻘건 빛이 줄줄이 심핵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저곳을 통해 에너지가 주입되고 있는 건 확실한데,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고 있는 걸까. 게다가 자신의 문양은 왜 이렇게 달아오르는 거고?
“다들. 날 지켜라.”
=어? 아, 응.=
=네. 아영, 려강.=
=옙.=
=네엣.=
여자친구들을 자신의 근처로 불러들인 환인은 즉시 눈을 감고 내면의 영기와 심핵력의 관조에 들어갔다.
느껴진다. 저 심핵의 박동에 맞춰 자신의 문양 속 심핵력도 마이크로파에 분자가 회전하는 것처럼 떨리며 열을 발산하는 중이다.
기본 바탕은 같은 에너지라고 공명하고 있는 건가.
‘그런 게 아니다. 이건…….’
……! ……!!
………!!
……!! ……!
기사들과 유르트랑의 고성과 고함이 귓가에서 빠르게 멀어져가며 주변 지각 또한 길게 늘어진다.
잠시 후, 오감이 모두 차단되며 온통 새카만 4차원 공간 속에 들어온 듯한 심상 풍경이 환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동시에 암흑 심연처럼 시커먼 밑바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가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 에너지가 시시각각 다가오며 내뿜는 빛에, 기운의 압박에 환인은 영혼이 물들며 떨리는 것을 느꼈다.
화악——
찰나의 순간 바뀌는 풍경.
‘여기는.’
은방울꽃으로 뒤덮인 백색 초원. 하늘에는 우주가 펼쳐져 있고 지평선 끝에는 푸른 행성이 절반 걸쳐진 장소.
뒤를 돌아본 환인은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과 흡사한 초신수超神樹가 황금색으로 물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전에는 백색이었을 텐데. ……!’
그 나무에서 비롯된 황금빛의 물결이 노도처럼 밀려와 은방울꽃을 금방울꽃으로 만들어버리며 꽃잎을 어지럽게 휘날린다.
난폭한 바람과 어지러운 꽃잎의 폭풍에 눈 앞을 가렸던 환인은 손을 내리며 천천히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
별빛이 은하수처럼 깔린 우주 태반을 뒤덮은 거대한 눈동자.
전에는 블랙홀 같은 그 눈동자 또한 변화가 일어나있었다. 눈동자의 중심에 공간이 금 간 듯한 현상이 새겨져 있고 그 틈에서 옅은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전처럼 뇌를 쪼개는 듯한 통증은 없었다. 대신 가슴 부근과 두 눈이 뜨겁게 타오른다.
=……기운이 하나의 에너지로 변모해가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하나로 뭉쳐갑니다!!
=막아! 에너지를 뽑아내 흐트러트리란 말이야!!=
=안 됩니다!! 제어가, 제어할 수가 없어요!!!=
기사들과 유르트랑의 외침에 환인은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음을 알아차렸다.
여자친구들은 사각형 꼭짓점 방위를 지키고 있어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을 눈치채지 못한 듯 하다.
「환인, 탈출해야 하는 거 아냐?」
……환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자신의 심상 속에서만 벌어진 일이었다는 건가.
몸 안을 다시 관조한 순간, 환인은 변화가 하나 일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영기와 심핵력의 기운이 변했다.
그리모암의 강력이 끌어모은 위상력을 영기와 심핵력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그 존재가 변해가는 중이다. 마치…….
‘저 심핵처럼.’
「환인?」
자신을 부르는 환연의 목소리를 무시한 환인은 저벅저벅, 심핵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성제님?! 가까이 가시면 안됩, 자 잠깐! 영혼 기사님?!=
=뤼니. 기다려 봐.=
=아니 잠시만요! 진짜 그러면 안 됩니다! 부단장님! 유르트랑 부단장님!!=
안느의 억센 힘에 붙들린 뤼니는 그 손에서 탈출하려 몸부림쳤지만, 꼼짝도 않음을 느끼고 버럭, 부단장을 불렀다.
그 소리에 뒤돌아본 유르트랑은 온몸에 고동치는 황금빛 아우라를 뿌리며 접근하는 환인을 발견하곤 대경했다.
저게 뭐지? 아우라의 빛이 더 강해졌어? 아니 그것보다!
=물러나십시오! 잠, 기사들! 성제님이 심핵에 다가가는 걸 막아라!=
본능적인 위기감에 유르트랑은 기사들을 소집했고, 근접 기사들은 얼떨떨해하다가 다급히 환인에게 달려든다.
하지만 환인이 슥슥 손을 흔들고 기사들의 몸을 툭툭 짚을 때마다 기사들은 자신의 힘에 더해진 비틂을 이겨내지 못해 동료들에게 날아가 부딪치고 넘어지며 오히려 길을 만들어내는 중.
=야! 감히 누구한테 덤비는 거야!=
=당장 멈추세요!=
그 직후에는 이실리테와 안느가 바람처럼, 빛처럼 날아와 기사들을 모조리 쳐내고 박살 내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특히 무의식에 검을 뽑았던 자는 공성추에 처맞은 것처럼 날아가 벽에 꽂혔다.
쾅, 콰직! 쿠쿵!!
끄악! 컥?! 아아악!
단 두 명에게 스무 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박살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입을 떡 벌렸던 유르트랑은 성제를 막을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에 화들짝 놀라 제 몸으로 환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성제님! 심핵을 건드리면 영도와 팔라툼 간의 분쟁으로 비화합니다! 건드리시면 안됩……!
『비키십시오.』
부르르!
영혼을 지배하는 목소리란 이런 게 아닐까.
환인의 황금빛 눈동자를 목도하며 그 목소리를 들은 유르트랑은 몸에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걸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버티며 반쯤 환인의 등에 매달린 채 호소했다
=서, 성제님…! 이 미궁은, 팔라툼의 1차 생산 근본입니다. 미궁이 소멸…하면, 수십만 명이 고통받게 됩니다……! 제발……!=
그러던가 말던가 환인은 유르트랑을 몸에 매단 채 심핵으로 다가갔다.
그 잠깐 사이 술법 기사들 대부분은 정신력과 위상력의 고갈로 주저앉거나 쓰러져 혼절해버린 상황이다.
환인은 방해물이 사라져 더욱 강해진 파동을 뿌리는 심핵을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다 손바닥을 내밀었다.
영기를 다루며, 문양의 심핵력을 조작하며 터득한 제어력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펼쳐진다.
영기와 심핵력이 거미줄 실타래처럼 방사되어 하늘거리며 심핵과 이어지고, 환인은 심핵이 그동안 힘들여 모아둔 심핵력, 생명의 기원을 갈취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이 방출한 평온의 파동을 허락도 없이 날름날름 집어삼키며 모아둔 에너지.
‘그러니, 내가 이자를 쳐서 돌려받아도 문제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우, 우웅웅……!
미궁은 구슬프게 울며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에너지를 지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영혼의 눈으로 세상의 마력 흐름을 관조하며 무의식중에 흐름의 진수를 학습한 환인이다.
여기에 수백 수천의 영혼을 성불시키며 그들이 남긴 혼의 조각을 모아 영혼 구슬을 다룬 경험.
천 명에 가까운 여자들을 안으며 획득한 막대한 영기를 조율한 경험.
마지막으로 미궁을 부수며 얻어낸 심핵력을 제어한 경험까지.
환인은 자신의 능력을 비교할 대상이 없었기에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제어력은 이제와서는 지배력이라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던 것.
거기에 열 명이 넘는 술법 기사가 전력을 다해 심핵력에서 에너지를 뽑아내 퍼트리는 것을 몸소 시범 보여주었다.
그런 지배력에 대항하기에 심핵의 에너지 활용 능력은 미약했으며, 더욱이 심핵이 모아둔 에너지는 그가 방출한 기운의 일부를 흡수하며 동화시킨 상태.
환인의 손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실선을 통해 심핵이 모아둔 에너지가 그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간다.
미궁은 흡혈 거머리 같은 인간들의 이목을 피해 애써 모아두었던 에너지를 모조리 갈취당하며 흐느껴 울었다.
우우우우웅…!
얼마 후.
폭주할 것처럼 뿜어내던 파동은 멈추었다. 회백색의 기이한 빛을 마구 뿜어내던 수정도 평범한 수정처럼 투명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폭주가…… 멈춘 건가?=
=…….=
털썩.
환인의 등에 반쯤 매달려있던 유르트랑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흘러내리듯 주저앉았고,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처맞고 날아갔던 다른 기사들도 넘어지고 뒤엉키고 반쯤 서다 만 각각의 모습으로 멍하니 심핵에 시선만 주었다.
에너지가 거의 바닥난 것처럼 심핵의 코어가 희미하다. 하지만 폭주에 이어 대폭발이 벌어져 천주산을 날려버렸을 수도 있었단 점을 생각하면 저정도쯤이야 약과.
주변에서 위상력을 조금만 써주면 금방 에너지가 차오를 테니.
중요한 것은…….
=…….=
=…….=
기사들의 시선이 성제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어쩐지 더욱 진해진 듯한 황금빛의 아우라. 희미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어깨와 등 뒤 부근에서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든다.
다리에 힘이 빠진 소녀처럼 주저앉아있던 유르트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 성제님. 방금 그것은…… 그것을 어떻게…….=
“술법 기사분들이 하는 것을 따라 했을 뿐입니다.”
=…….=
=…….=
그 이야기를 들은 기사들은 자괴감과 열등감에 휩싸였다.
심핵에게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방출하는 집흡방출식은 비전 중의 비전이다. 이 때문에 습득 난이도는 정신 나간 수준이며 숙달 기간도 일반 술법을 아득히 초월한다.
집흡방출식이란 4급, 5급 이상 술법사가 된 자질, 재능이 뛰어난 자들도 보통 습득에 1년이 걸리며 숙달되는 데는 몇 년이나 걸리는 위상력 제어술의 정수인 것이다.
그런 걸 그냥, 잠깐 본 것으로 훔쳐 배웠다고?
하나둘 정신을 차리던 술법 기사들의 얼굴에 황망함이 번져가지만, 환인은 이질감이 느껴질 만큼 담담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심핵이 폭주를 멈출 기미가 안 보였기에 부득이 나섰는데, 여러분께 폐가 되진 않았을지 우려가 듭니다.”
=……!=
환인의 이야기에 열패감으로 버무려졌던 기사들은 얼굴이 이번에는 토마토처럼 시뻘게졌다.
‘고작 이 정도도 못 해서 심핵이 폭주하기 일보 직전까지 두었나.’
그들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던 것.
거기다 자신들은 첫 번째로 성제님에게 내동댕이쳐졌고 두 번째로는 영혼 기사 두 명에게 박살이 나버렸다.
입이 둘이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 정신을 차린 유르트랑은 한숨을 쉬면서 일어나 기사들을 갈궜다.
=뭣들하고 있나! 뭘 했다고 쳐자빠져 있는 거지?! 당장 일어섯!! 뤼니 상급 기사!!=
=옛!!=
안느의 주먹질에 한쪽 눈이 밤탱이가 된 뤼니가 벌떡 일어서며 대답한다.
=즉각 15명을 차출하여 심핵의 경과를 주시하라! 동시에 누구도 심핵방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며 허가 없이 접근하는 자는 즉각 배제하도록! 사지 멀쩡한 자들은 탈진한 이들을 챙겨라! 군영으로 복귀한다!=
=옛!=
=넵!!=
여기저기 갑옷이 우그러지고 쌍코피가 터지거나 이빨이 부러진 기사들이 서둘러 탈진한 기사들을 챙기는 사이, 유르트랑은 자괴감에 똥 씹은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푸우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뿌리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며 환인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성제님의 의도를 곡해해 또다시 무례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부단장님은 학습 능력이 없다는 말 종종 듣지 않아?=
=다음번에는 뒤에서 칼로 찌를지도 모르겠으니 잘 지켜봐야겠네요.=
=처음에는 말로만 그러더니 두 번째는 직접 덮쳐들고 말이야.=
두 영혼 기사의 살벌한 비아냥에 유르트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벌어졌던 일은 문건으로 작성되어 곧장 상부에 보고서가 올라갈 것입니다. 성제님께서 해주신 일과 저희가 저지른 결례 또한 포함될 것이니, 성제님께는 마땅한 보상이 책정될 것이며 저희에게는 합당한 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성제님의 신체에 함부로 손을 댄 점, 대려 한 점을 마음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리하여야 마음이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용무는 끝났으니 저희는 이만 미궁을 나가겠습니다. 혹시 연락이 필요하다면 저와 제 일행이 머무르는 곳에 대해서는 아실 것이니 그리로 찾아와주면 됩니다.”
=예. 미궁을 위험에서 구해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성제님.=
작게 고개를 끄덕여준 환인은 굳고 지친 표정의 유르트랑을 뒤로하고 여자친구들과 비상을 챙겨 심핵방을 나왔다.
그리고 4계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이동하며 미궁의 벽과 천장 등지에 난 경락을 유심히 살폈다.
힘이 그야말로 바닥까지 쪽 빨려 먹혔는지 붉은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경혈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자 그제야 조금 열린 수도꼭지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처럼 위상력이 흐르는 게 감지되었다.
‘죽지는 않았군.’
5계층과 4계층에서 사냥하고 있을 파티가 있을 것이고, 그들이 뿌리는 위상력이 포집되어 심핵으로 향하는 중인 게 아닐까.
=심연의 안개가 없네……. 려강아, 정신 침해는 어때?=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정신 침해 현상도 중단된 것 같아요.=
「근방에 이형종도 없어. 정령도 멀리까지 나가지 못했는데 지금은 미궁 전체를 돌아다니는 중이야.」
환연이 꼬물거리며 옷깃 쪽에서 머리만 내밀며 말한다.
=미궁이 힘을 잃은 건가? 설마 이대로 죽어서 무너지진 않겠지……?=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심핵에 관한 연구가 추적기는 물론 집흡방출식을 만들어냈을 정도로 진행된 국가니까.”
이형종이 전부 죽고 나면 위상력이 흘러나올 여지가 없어 수급할 에너지도 줄겠지만, 미궁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심핵의 에너지 잔량을 확인하는 수단도 있다 했다. 미궁이 말라죽으려 한다면 위상력을 조금씩 급여하는 식으로 미궁을 되살리겠지.
=그건 그렇겠네. 환연, 주변에 사람 있어?=
「아니. 추적자도 없어.」
환연을 통해 주위를 확인한 안느는 아무도 없다는 대답이 나오고서야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나 사실 도령이 심핵 부수려는 줄 알았어.=
=저도였슴다. 심핵이 폭주하는 거 같았으니까 부수고 다들 탈출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심핵에서 에너지만 깔끔하게 흩어버리다니. 아영은 환인이 천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집흡방출식을 그 자리에서 보고 습득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6층 계단을 통해 4계층 옛 고성 동쪽 구역으로 내려온 환인은 환연에게 부탁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돌아가서 할 테니 환연, 이형종을 만나지 않고 돌아가는 길을 안내해다오.”
「응. 저쪽이야.」
여자친구들과 왔던 길을 되짚으며 돌아나가는 길, 환인은 미궁의 심핵이 빈사에 빠진 여파를 빠르게 체감했다.
=이형종이 없네.=
=부서진 미궁 기물도 회복 안 되나 본데요.=
아영이 가리킨 곳은 전투의 흔적으로 벽이 무너진 곳이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 해체되어 널브러져 있는 버그베어의 사체.
4계층인 고성 구역은 물론 2계층 폐허 외곽 구역에서도 이형종은 만나지 못했다. 곳곳에 죽은 오흄, 그눌 시체는 발견했지만 말이다.
미궁의 수복과 시체 흡수까지 사라졌다는 것은 전반적인 미궁 기능이 정지되었다는 증거다.
덕분에 서너 시간 만에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을 빠져나온 환인은 완전히 깜깜해진 밤하늘과 그럼에도 불이 환히 밝혀진 미궁 앞 광장을 볼 수 있었다.
=진짜라니까! 이형종이 씨가 말랐다고! 그런데 출입세는 돌려주지 않고 말이야!=
=병사님, 미궁 안이 이상해요.=
=불타고 부러진 나무도 회복 하지 않더라니까?=
=죽인 시체도 안 없어지던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수백 년 동안 벌어진 적이 없는 괴현상에 당황하고 놀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축구장을 몇 개나 합친 넓이의 광장에 가득하다.
어디선가 날아온 술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니 알코올의 유혹을 느낀 환인은 광장을 가로지르는 도중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술이 얼마나 있지.”
=응? 음미할 목적의 명주는 10병 정도 있고 그냥 술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술은 두 짝 정도 있어. 도령네 세계에서 가져온 것도 좀 남았어.=
모두가 마시기에는 좀 모자라다. 환인은 주머니에서 열은화를 잡히는 대로 꺼내 아영에게 주었다.
“이걸로 술을 되는대로 사 와라.”
=옙.=
여자들은 서로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환인이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하다니, 무슨 일일까?
집에 도착한 환인은 목을 답답하게 조이는 셔츠 목단추를 풀면서 소파에 앉아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려강. 안주 만드는 것 좀 도와주세요.=
=네, 언니.=
=우린 술 세팅하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환인이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한 게 기뻤던 안느는 뛰어서 술을 사 온 아영이와 유르파 둘과 함께 술병을 되는대로 꺼내놓기 시작한다.
=유르파 언니. 이 흑맥주는 차게 식혀놓으면 더 맛있거든요. 식혀주심 안됩니까?=
=이 구슬을 통 안에 넣으면 목구멍이 얼 정도로 차갑게 식혀질 거야.=
=오오!=
「아! 이거 내가 마실래. 안느, 이거 나 줘.」
=아니 야. 너 술 많이 마시지도 않잖아. 맨날 술잔에 빠져서는 참방거리며 술을 버리는 주제에 비싼 거만 찾네.=
「술 목욕이거든? 몸을 술로 적시면서 홀짝이는 게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
=안느 언니. 혹하지 마십쇼. 언니 덩치로 술 목욕을 하려면 명주가 수십 병 있어도 부족해요.=
=칫.=
「엉덩이 구멍으로 술 마시면 어때? 그게 그렇게 뿅 간다더라.」
=누가 그래?=
「몰라. 언제인가 들렀던 도시에서 여자 엉덩이에 술병 꽂고 노는 거 봤어. 여자가 좋아서 죽던데.=
관음증 요정다운 대답이다. 그런 환연도 환연이지만 안느가 솔깃해하는 게 보여 환인은 살짝 어이없음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좋아서 죽는 게 아니라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정말 죽은 거겠지.”
=급성 알코올 중독? 단어를 보면 되게 안 좋은 느낌인데.=
“직장에는 점막과 모세혈관이 많아 흡수가 위장을 통하는 것보다 더 빠르다. 넌 근접 직업자고 술에 내성이 높으니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40도 정도만 되는 술을 1병 부어도 사람은 대부분 치사율에 이르게 되지.”
환인의 설명에 유르파가 과학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입으로 마시는 거랑 엉덩이 구멍으로 마시는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거니?=
“사람의 내장 중에 간을 경유하는지에 대한 유무겠지요.”
노트북 인체 자료를 통해 간의 기능과 역할을 알고 있던 유르파가 아, 하고 손바닥을 친다.
=입으로 마시면 위장이랑 간이 술의 독성을 한 번 걸러주는데 모세혈관이랑 점막으로 흡수하면 그게 안 되는 거구나?=
“평범하게 마시면 술기운이 천천히 올라오기에 취기의 수준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장을 통해 흡수하면 그것이 조절되지 않아 고농도의 취기를 몸에 채워놓는다더군요.”
그 때문에 뇌의 연수 기능이 마비되고 술의 위험을 알려주지 못하게 되기에 그대로 사망에 이르는 식.
환인은 평범한 유리잔으로 흑맥주를 채워 안느에게 보여주었다.
“직장으로 이 정도의 맥주만 흡수해도 저 술통의 술을 전부 마신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
그정도면 한 번쯤 경험해봐도 될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역력한 표정에 환인은 큭큭 웃고 말았다.
누가 술 좋아하는 플뢰 아니랄까봐. 환인은 땅콩을 날려 환연의 머리를 딱콩 맞췄다. 악, 하고 비명을 지르곤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환인을 째려보는 환연.
「왜애!」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안느가 관심을 가졌다. 이걸 어쩔 거냐.”
「뭐가 문젠데? 쟨 어차피 수목화해서 똥오줌도 안 싸고 엉덩이 구멍도 깨끗하잖아. 7급 투사라서 튼튼하기도 하고. 한 잔쯤이야. 뒤로 마시게 해줘. 잘못되면 아영이한테 회복 걸어달라 하면 되니까.」
말하다 제풀에 킥킥 웃는 환연 근처에서 아영과 유르파도 호기심이 생긴다는 표정을 짓는다.
심핵방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여자친구들과 술이나 좀 마시려 했더니, 일이 왜 이렇게 된 걸까.
“취하지도 않았는데 술에 취한 주정뱅이들처럼 호기심이 가득하군.”
환인의 한소리에 여자들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그 모습에 환인도 작게 웃다가 안느에게 나무로 만든 맥주잔을 내밀었다.
“일단 한잔하지.”
아직 취하지 않았다면, 취해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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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없?는 깔끔한 해결!
담편은 19금이지만 교미씬은 없습니당!
...없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