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17화 (617/813)

617 위상석 생산 공장

다양한 직군이 모여있다고 해도 6계층 군영의 기본 바탕은 군軍이다. 그리고 군대에는 군법과 규율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정형화된 규칙 속에서 다소 유연성을 가지고 일과를 해나가는 것.

6계층에 주둔 중인 천공기사단 또한 마찬가지다.

주둔 중인 제2 천공기사단의 최우선 군율은 이틀에 한 번, 정오 정각에 6계층을 대대적으로 순회하며 이형종을 정리해놓는 것이다.

계층이 깊어질수록 이형종은 강해진다. 강해지는 만큼 숫자도 적어지며 강한 이형종을 만들어내는데 미궁이 소모하는 힘 또한 막대해진다.

주기적으로 6계층의 이형종만 정리해도 미궁은 성장할 힘을 축적하지 못하기에 세워진 군율.

‘거인숲 미궁이 그 지경이 되었던 것도 그러면…….’

시계가 정오를 가리키는 시각.

여성 전투 판금 갑주 차림으로 몸소 찾아온 유르트랑과 군영 광장으로 향하며 그녀의 설명을 듣던 환인은 거인숲 미궁에서 심핵이 힘을 쓰지 못한 세부적인 이유를 덕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유르트랑의 설명이 이어진다.

=만약 순회하며 해치운 이형종의 숫자가 기준치 미만일 경우 심핵의 방으로 들어가 심핵의 기를 흐트러트립니다. 이형종의 숫자가 기준치 이상일 경우 또한 심핵의 방으로 들어가 심핵이 모아둔 기의 잔량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과는 끝이 되는 것이죠.=

“미궁이 성장하려 하거나 중핵을 만들어내려는 에너지를 흐트러트리기 위해서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군영 광장에 도착한 환인은 6급부터 4급의 다양한 직종 40명이 질서 정연하게 선 것을 볼 수 있었다.

중무장한 근접 직업자 20명, 원거리 직업자 12명, 4대 교단의 사제 및 신관 8명. 대단위 미궁 공략 부대 표준 구성이다.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환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유르트랑은 대열로 다가가 인원 점검을 시작한다.

희귀 금속을 실처럼 가늘게 뽑아 짠 무릎길이의 반투명 스커트를 살랑이며 대열을 돌아다니는 유르트랑.

뒷모습을 거의 다 가리는 하얀 날개 세 쌍을 제외하면 여러모로 천상의 장막을 걸친 이실리테와 흡사한 모습이다.

이실리테의 마이너 색기 버전이라고 할까.

이실리테의 천상의 장막은 어깨와 복부, 허벅지를 드러내는 비전 희귀 금속 및 운석 가루로 제조한 전신 갑주다.

스커트를 걸치고 있다지만 약간 듬성듬성한 은색 사슬 세공이라 서혜부와 고간을 가리는 갑주 하의의 구조가 고스란히 보이는 디자인이다.

안에 덧대입는 옷은 없으며 걸치는 것은 속옷 뿐.

그에 비하면 유르트랑은 일단 안에 부여 술법으로 방어력을 끌어올린 희소 직물 회색 셔츠와 치마를 입었고 그 위로 슬림한 브레스트 플레이트, 플레이트 건틀릿, 플레이트 그리브와 플레이트 부츠를 장착한 정석적인 여기사의 모습이다.

물론 치마 또한 일반 치마가 아니라 금속을 실처럼 짜 만든 치마.

=도령. 순회 도중에 전투 참여할 거야?=

별생각 없이 유르트랑을 구경하고 있던 환인은 안느의 질문에 여자친구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6계층 순회는 저들의 임무이고 권리다. 저들이 큰 위기에 처하지 않는 이상 뒤에서 지켜만 보는 게 예의겠지.”

=그건 그래.=

자신의 목적은 6계층 미궁 구조와 심핵의 확인.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조용히 뒤따르기만 할 생각이다.

인원 점검을 마친 유르트랑이 다가와 묻는다.

=성제님,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예.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제님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그럼 출발하시지요.=

군영의 방은 동쪽과 서쪽에 각각 출입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순회 차출 인원은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동문과 서문으로 출발한다.

서문에서 출발한 인원은 미궁의 서쪽을, 동문으로 빠져나간 인원은 미궁의 동쪽을 전체적으로 훑은 뒤 6계층 왕족 거주구의 가장 큰 방, 중앙에 있는 심핵의 방 앞에 모이는 식이다.

순회의 강도는 서부 방면보다 동부 방면이 더 높다.

동부 방면 측이 서부 쪽보다 순회해야 할 범위가 넓기에 전력의 분배는 동부 쪽에 좀 더 집중한다.

당연 6계층 주둔군의 책임자이자 가장 강한 유닛인 유르트랑 부단장은 동부에 편성되어있고 환인도 자의로 동부 방면 편제에 합류한 상태.

후열에서 유르트랑 부단장과 부대를 뒤따라 불길하게 시커멓고 꼬불꼬불한 복도를 이동하던 환인은 그녀의 손에 들린 직사각형 형태 금속판에 눈길을 주었다.

청동거울처럼 한쪽 면을 매끈하게 다듬은 A4용지만 한 금속판인데 자꾸만 환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금속판에는 각각 크기가 다른 화살표 7개가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게 마치 이형종의 위치를 알려주는 듯했기 때문.

“부단장님. 혹시 그 마도구, 이형종을 추적할 수 있는 겁니까.”

=예. 미궁의 심핵과 동기화한 이형종 추적기입니다. 근처에서 가장 강한 에너지를 일곱 개까지 추적해줍니다.=

“탐이 날 정도로 편리한 마도기군요.”

=후후. 편리하지만 그만큼 사용 조건이 까다로워 미궁 관리용 외에는 쓰이기 어려운 기기입니다.=

“어느 정도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1차로 해당 미궁의 최하층에서 난 소재만을 사용해 제작하고, 2차로 심핵의 방에서 심핵이 내뿜는 기운을 약 한 달 이상 쬐어야 합니다. 3차로 심핵과 에너지를 동기화해야 하며 결정적으로…… 해당 미궁에서밖에 쓰지 못하지요.=

“과연……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요.”

=예. 개인이나 일반적인 파티는 만들기도 어렵고 만든다 해도 활용하기 힘듭니다. 오직 미궁 주둔군만이 원활히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지요.=

말하던 도중 이형종 추적 마도기의 가장 큰 화살표 반응이 바뀌었다. 화살표가 붉은 점 세 개로 변한 것. 방향을 보면 좌측 벽 너머다.

지도와 추적기를 확인한 유르트랑은 즉시 기사 한 명을 호출했다.

=코르트. 전방 탐색이다.=

수색대 역할의 기사는 곧장 소리 없이 선행하여 선두의 코너를 돌아 사라졌고 잠시 후 나타나 이형종의 종류의 숫자를 알려온다.

=탈색 귀쟁이 세 마리입니다. 이쪽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좋다. 부대원, 화살과 정신 공격 방어 준비.=

부단장의 신호에 술법사로 각성한 기사들은 주문을 외우고 선두 전열 탱커들은 방패를 들어 올린다.

=돌격.=

유르트랑의 신호에 12명의 기사, 술사들이 코너를 일사불란하게 돌아가자마자 전투의 소음이 터져 나왔다.

화살을 방패로 막아내는 소리. 술법이 펼쳐지고 막히는 소리. 타닥타닥 분주하고 어지러운 발소리.

소음은 금방 멎었다.

함께 대기 중이던 유르트랑과 함께 코너를 두 번 돌아가자 암살자처럼 차려입은 회색 피부와 회색 머리카락의 플뢰족 여자 셋이 썰려 죽은 게 환인의 눈에 들어왔다.

유르트랑은 기사들에 의해 가슴이 갈라져 심장이 뽑히는 반전 개체 이형종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별거 없지요? 순회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대다수가 이런 식입니다. 가끔 이형종이 스물 이상 몰린 괴물방이 나올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2~3년에 한 차례일까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후 벌어진 전투는 복도의 경우 많아야 넷. 보통은 둘에서 셋 정도였고 방에서는 숫자가 좀 많아졌지만 그마저도 아홉을 넘지 않았다.

나오는 이형종도 신체 내구도가 극히 낮다 보니 성술사들과 술법사들의 보호, 방호를 받은 근접직 기사들이 돌진하면 크게 힘도 쓰지 못한 채 쓰러지기 일쑤.

그나마 남자 양물 형태의 콕 더 로퍼가 수많은 촉수로 펼치는 공격이 위협적이었지만.

=발사!=

쐑—! 뻐버벙!!

로퍼가 나타나면 술법사들과 엽사들이 화력을 퍼부어 그냥 터트려버린다.

=로퍼는 정신 공격과 함께 강력한 최음향을 뿌립니다. 그건 독이나 질병으로 분류가 되지 않기에 당하면 정사 외에는 치료 방법이 없기 때문이지요.=

“공략이 확정되지 않은 당시에는 곤란한 적이었겠군요.”

=연인이 있는 기사들만 동원했다 들었습니다. 싸우는 동안에는 참을 수 있으니 로퍼를 죽인 다음…… 으흠.=

말하던 유르트랑은 환인의 얼굴을 보았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어제 일이 또 생각나 멀쩡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

=부단장님. 5급 위상석 1개와 심장, 자궁 3개씩 습득하였습니다.=

=보존 주머니에 챙기고 출발한다.=

이런 식으로 순조롭게 미궁을 탐색해나가며 2/3정도를 순회하였을 때 기사들이 획득한 5~6급 위상석은 5개, 각종 부산물은 100ℓ 주머니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6계층의 절반을 순회하며 획득한 게 이 정도다. 2일마다 순회한다면 위상석을 최소 7개 정도, 부산물은 200kg가량을 챙긴다는 이야기니…….

‘위상석 공장이나 다름없군. 이런 게 팔라툼에만 여섯 개인가.’

환인은 귀족이나 호족들의 재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리고 니오네브레스에서의 금화가 어째서 은화, 동화, 철화에 비해 가치가 낮은지 이해했다.

이 세계의 공용 화폐인 철화는 한국의 원화 약 100원, 동화는 1만원, 은화는 100만원 정도였다. 이런 식이라면 금화는 1닢당 1억 정도여야 하나 실제로는 1,0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느낌이었던 것.

환인은 6급 미궁, 니오네브레스에서 위험도가 상급으로 분류되는 미궁의 실체를 알아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식이라면 폭군룡의 미궁은 제법 위험한 상태인 게 아닌가.”

=무슨 말씀이세요?=

자신의 혼잣말에 이실리테가 관심을 보여 환인은 설명해주었다.

“폭군룡의 미궁은 입구 부근에만 용병이나 노동자들이 돌아다니며 자원을 채취하고 있었지. 주둔군이 없다면 심층에 이형종이 꾸준히 쌓이고 있을 텐데, 미궁 역류가 쉽게 벌어지지 않겠나.”

=폭군룡의 미궁입니까.=

앞서 기사들을 진두지휘하고 돌아온 유르트랑은 기사들에게 출발을 지시한 뒤 폭군룡의 미궁 주변 현황을 듣고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아룡종이 등장하는 미궁이면 조금 성가시기야 하겠지만, 영웅의 가문이 지키는 헬루멘의 전력이라면 미궁이 역류하더라도 신경 안 쓸 겁니다. 흘러나오면 군을 동원해 정리하면 그만이니까요. 오히려 역류가 일어나길 바라지 않을까요.=

=부단장님. 그거 문제 큰 거 아냐? 미궁 입구에 작은 마을이 만들어져있었는데 역류하면 그들이 다 죽는 거잖아. 주변 마을이나 촌락도 위험하고.=

안느의 지적에도 유르트랑은 ‘그게 왜?’ 하는 태도였다.

=어?=

=그런 마을은 마을이나 촌락의 부역에서 도망친 탈주민과 범죄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놈들이야 다 죽어주면 오히려 깔끔해져서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놈들은 쥐새끼 같아서 역류의 전조가 발생하면 재빨리 흩어져 제 목숨을 챙길 놈들이죠.=

또 그 미궁 주변에는 마을이나 촌락이 없을 거라는 게 유르트랑의 추측이었다. 아마 가장 가까운 게 도시일 거라고.

안느가 멍한 얼굴로 대꾸한다.

=어…… 맞아. 헬루멘에서 쿠에를 타고 하루 이틀 걸리는 거리였으니까.=

=그럼 맞을 겁니다. 헬루멘은 그 미궁이 역류하자마자 기사단과 군을 동원해 실전 훈련 삼아 토벌을 진행하겠군요.=

=만약 그중 한 마리라도 빠져나가 멀리 있는 촌락이나 마을을 덮치면 사상자가 크게 일어날 텐데요……?=

백려강이 우려를 드러냈지만, 유르트랑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까진 어쩔 수 없죠. 그게 마을의 운명일 뿐.=

=…….=

=…….=

=하지만 작은 마을이나 촌락을 6급, 7급 이형종이 덮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강한 이형종일수록 미궁에 강하게 얽매여있기 때문에 미궁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장소까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3급 이형종이라면 일주일 거리까지도 갈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음. 그 정도면 마을도 감당할 수준이겠네.=

납득가기도 하고 지식과 경험에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였는지 안느가 수긍한다. 거기에 이실리테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을 보탠다.

=확실히 그 말대로야. 레힐 마을 근교에서 미궁이 역류했었는데 그때 몰려왔던 것은 1~2급 정도인 그레니어 였거든.=

=아…… 이실리테 언니도 역류에 휘말렸었던 적이 있었나요?=

=네. 지금에서는 추억이네요. 그레니어를 상대로 주인님 앞에서 힘자랑을 해보려 했었는데, 제가 세 마리를 잡을 때 주인님은 30마리를 잡으셔서…….=

=엇, 오빨 처음 만나셨을 때 이야깁니까? 이실리테 언니, 그 이야기 조금만 더 해주세요!=

그런 식으로 잡담을 가끔 주고받으며 미궁 최심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일행은 느긋하게 나아갔다.

몇 시간 후.

환인은 대열의 후방에서 편히 기사들의 전투, 6계층의 구조와 위상력 같은 마력의 흐름 등 계층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아나갔다.

놀러 온 관광객, 혹은 구경꾼처럼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이기에 반감을 살 수도 있는 태도였지만…….

파아아앗—

=감사합니다, 성제님!=

=순회가 이렇게나 수월하고 마음 편했던 적이 얼마 만이지?=

=얼마만? 이런 적이 있긴 했냐?=

순회에 참여한 기사들, 고용 용병들, 신관들은 누구도 반감 같은 것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틈만 나면 환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어떻게든 말 한마디를 나눠보기 위해 눈치까지 살핀다.

전부 환인이 주기적으로 펼쳐주는 평온의 파동 덕분이었다.

“여러분들이 앞장서서 싸워나가시는데 이런 거라도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사들이 인사를 해올 때마다 이런 식으로 답을 해주었지만, 입에 발린 말이다.

환인은 백려강이 정신 침식에 영향을 받기 시작할 때마다 평온의 파동을 펼쳤을 뿐이니까.

오해지만 정정해줄 이유가 없는 오해였기에 환인은 겸손한 생색만 내며 백려강의 상태를 종종 살폈다.

그덕에 알게된 한 가지.

‘정신 침해에도 내성이 생기는 건가.’

처음에는 약 30분에서 40분 사이로 평온의 파동을 썼지만, 4시간가량이 지난 현재 백려강의 정신 침식 현상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마지막으로 평온의 파동을 펼친 지 1시간이 넘었지만, 백려강의 영혼은 티 없이 푸른 크리스탈처럼 오점 하나 없이 맑다.

용인체의 기능인지, 아니면 평온의 파동으로 내성이 생기고 있는 건지 불명확하지만 상관없는 일.

어쨌든. 일정 시간마다 주기적으로 평온의 파동을 발사하며 미궁 내부와 이형종의 전투 전략 등을 유심히 지켜보고 미궁의 벽을 따라 이어져 있는 적색의 경락을 살피던 환인은 미궁의 유지와 성장 구조를 대강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영혼의 눈을 얻은 덕분인데, 기사들이 위상력을 일으키거나 사용하면 소비되고 남은 찌꺼기 같은 위상력이 경혈을 통해 흡수되어 경락을 따라 이동하는 걸 목격한 거다.

고지혈증처럼 툭 불거져있거나 여러 경락이 모였다가 퍼져나가는 경혈 같은 것은 구조상 발생한 특징, 혹은 술법 함정이 발생하는 장소가 아니라 위상력 포집 장치였던 것.

이걸 알게 된 경위도 우연이었다.

4계층 이하에서는 조명이나 밝기 및 주변의 풍경색 때문에 인지를 못 했었는데, 상하좌우 온통 새카만 6계층에서는 배경이 흑색 단색인 덕분에 기운의 유동이 확실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상력의 흡수와 저장 효율은 심핵과 가까울수록 높아지고, 멀어질수록 유명무실한 것으로 유추했다.

1계층에는 경락과 경혈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6계층에서는 사람 몸속 혈관처럼 빼곡한 걸 보면 모를 수가 없는 일.

‘심핵 깊은 곳을 공략하는 인원이 많을수록 미궁이 빠르게 성장한다는 거겠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미궁은 거의 성장하지 못하고 도시, 마을 근교의 미궁이 내버려 두면 빠르게 성장하는 것도 이러한 요소 때문이라면 말이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게 100% 모든 미궁에 적용되는 요소는 아닐 것이다.

미궁은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는 상황. 심층까지 내려오는 미궁 탐사대는 거의 없고 일꾼, 노동자 같은 인물들이 미궁 초입만 깔짝거린다면 미궁도 포집 장치를 1계층 부근에 집중해서 만들어내기도 할 것이다.

환인이 한참 미궁에 대해 고찰하고 있던 그때였다.

철퍽.

=아이고.=

=앗, 저거…… 설마 그거예요…?=

=으아…… 부단장씨 어떡함까.=

웅성웅성, 수군수군.

“……?”

환인은 갑자기 주변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생각을 멈추었다.

무슨 소란이지. 유르트랑 부단장에게 문제라도 생긴 건가.

다소 좁은 방에 이형종이 아홉이나 모여있어서 기사단 전력 중 가장 강한 부단장이 나서기로 한 게 아니었나.

고개를 든 그는 저 앞, 주변에 널린 이형종 시체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유르트랑 부단장과 그런 부단장에게서 슬그머니 거리를 두는 다른 기사를 발견했다.

‘다친 건 아닌 것 같은데.’

촉수자지라는 멸칭이 붙은 콕 더 리퍼를 상대하던 도중 최음향에 당하기라도 한 건가.

환인은 뒤늦게 석상처럼 서 있는 유르트랑의 다리 사이에 뭔가 하얀 게 뭉쳐져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얀 손수건 같은 게 유백색 액체에 푹 젖은 채 철퍽- 하고 떨어져 있는 듯한 모양새.

=정액에 절은 손수건이 어째서 부단장님 다리 사이에서 떨어진 거야?=

=어젯밤에 남자 불러다가 엄청 영차영차 한 거겠지……. 그게 흘러나오니까 손수건으로 응급처치했다가…….=

=……이형종하고 격렬하게 싸우다 흘러내렸다는 거구만…….=

=어쩐지 부단장님이 오늘따라 검술이 엄청 날카롭더라니. 스트레스를 교접으로 풀어서였냐.=

=헉. 부단장님 허벅지에 흘러내리는 저거…….=

=으~. 부단장님을 단장님 다음으로 존경했었는데, 저렇게나 치녀였다니 충격이야.=

치녀 부단장.

변태정액녀.

정액탱크.

“…….”

주위에서 들려오는 몇몇 단어에 환인은 그제야 여자친구들이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펑!

=…….=

목까지 빨개진 얼굴로 위상력이 담긴 검격을 날려 정액 손수건을 말 그대로 지워버린 유르트랑이 흡사 찔러 죽일듯한 눈으로 기사들을 둘러본다.

그 무시무시한 시선에 찔끔하면서 눈을 피하는 기사들.

하지만 스커트 아래 드러난 하얀 허벅지를 따라 끈적한 액체가 몽글거리며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사회적 체면은 이미 끝장난 게 아닐까.

유르트랑은 꿋꿋하게 허리를 펴고 대열의 최후미로 걸어갔고 잠시 후 돌아왔을 땐 차림이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코트 안에서 환연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진작 저러지.」

“……?”

「새 손수건을 뭉쳐서 아예 보지 안에 쑤셔 넣었어. 속옷도 새 걸로 갈아입었고.」

“…….”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처녀였던 그녀에게 이 상황은 얼마나 치욕적일까.

솔직히 환인은 그런 치욕 같은 감정은 잘 이해 안되지만, 그녀의 명예나 체면에 치명상이 가해졌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수월히 짐작했다.

“음…….”

=아,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옆에 있던 환인도 겨우 들었을 만큼 자그마한 그녀의 목소리에 환인은 그녀의 체면과 뜻을 존중해 입을 다물었다.

말을 걸었다간 그렇지 않아도 빨간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버릴거 같기도 하고.

=출발!=

어색하고 미묘한 침묵 속에서 유르트랑의 지시에 기사단은 다시 순회를 개시했다.

뭔가 술렁이는 분위기가 대열을 가득 채웠지만, 기사들 간의 연계는 무너지지 않았으며 전투의 프로처럼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마주치는 이형종을 도륙해나간다.

유르트랑의 지시도 여전히 적재적소에 이뤄지는 중.

분위기야 어쨌든, 미궁 동쪽의 ㄱ자 구간까지 약간의 사고도 없이 순회한 기사단은 추적기에 잡히는 이형종이 없음을 확인하고 심핵의 방 앞으로 이동, 서쪽 방면으로 나갔던 기사단과 합류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부단장님.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아무 일…… 없었다…!!=

=……?=

분위기를 보면 아무 일이 없었던 게 아닌 것 같은데.

뭐, 딱히 큰 문제는 아닌듯해 서부 방면 기사단을 맡았던 뤼니 상급 기사는 개의치 않고 미궁 서부 순회로 획득한 물품과 정리한 이형종, 순회 도중에 발생한 특이 사항의 유무 등을 보고했다.

=……를 획득하였고 그 과정에서 촉수자지 16마리, 탈색 귀쟁이 29마리, 똥구름 7마리를 정리했습니다. 예년 평균에 수렴하는 숫자였습니다. 특이 사항 보고는 없음, 사상자 없음, 낙오 인원 없음입니다.=

=수고했다. 이쪽의 정리는 평균보다 17마리가 적더군. 심핵방에 중핵이 생성되어있을 수 있으니 대 중핵 진형 B로 진입한다.=

환인은 유르트랑과 뤼니의 대화를 들으며 흡사 대마왕의 방 입구처럼 을씨년스럽고 흉흉한 통로를 묵묵히 응시했다.

입구도, 바닥도, 천장도 검은 벽이 안보일 만큼 시뻘건 핏줄 같은 경락에 뒤덮여있다.

마치 미궁의 모든 경락이 심핵방으로 들어가고 있는듯한 모습.

=성제님은 뒤에서 계시다가 천천히 진입하십시오. 뤼니, 성제님의 곁에 붙어있도록.=

=예.=

그렇게 혹시나 만약의 상황, 성제가 심핵을 부술 수 있는 경우를 대비해놓은 유르트랑은 기사단과 즉시 심핵방에 진입하였다.

39명이 일사불란하게 심핵방으로 들어가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뒤에서 묵묵히 그 장면을 지켜보던 환인은 기사단이 모두 진입하고 2분이 지나도록 전투의 소음이 들리지 않아 뤼니에게 물었다.

“전투의 소음이 없는 것을 보면 중핵은 없나 보군요.”

=예. 하지만 중핵이 국지적 침묵 능력을 발동하였을 수 있으니까 잠시만 더 대기하시겠습니다.=

안느가 끼어든다.

=침묵하니까 말인데 군영에도 비슷한 게 걸려있었지?=

=예. 70년 전 중핵을 해치우고 마도기로 변이한 방패의 효과입니다. 발동시켜놓으면 해당 방에서의 소음은 방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해주는 마도기죠.=

펠드릭스 백작이 선물로 준 룩소미의 보호 장벽과 비슷한 기능인 건가.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조금 더 대기하였고, 뤼니는 그로부터 5분이나 더 지나서야 환인에게 심핵방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쯤이면 됐을 듯합니다. 들어가시죠.=

일행과 함께 저벅저벅, 조용한 발소리를 내며 심핵방 안으로 들어간 환인은 가장 먼저 기분 나쁠 정도로 혈관과 똑같이 생긴 경락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락은 천장의 한 지점에 모두 모였다가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경락이 모여드는 그 장소에 위치한 것은 심장처럼 존재하는 거대한 수정과 수정 속 황금색의 코어.

코어를 주변으로 전개된 상황에 뤼니가 얼이 빠진 것처럼 입을 벌렸다.

=…이, 이게 뭔?=

=조심해서 전력을 다해 에너지를 풀어내라!! 집중해라!! 실수는 용납 못 한다!! 정신력이 바닥난 인원은 즉시 뒤로 빠져 조치를 받도록!!=

거대한 수정은 회색빛 파동을 두쿵, 두쿵, 정말 심장이 박동하는 것처럼 뿜어내고 있었고 술법 각성 직업의 기사들과 신관, 사제들은 그런 파동을 쐬면서 심핵에 손을 뻗어 모종의 기운을 주입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그들의 손에서 뻗어 나온 녹색,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각양각색의 기운이 심핵과 연결된 상태.

‘아니, 기운을 뽑아내는 건가.’

뭔가 문제가 단단히 생긴 모양새다. 설마 심핵이 성장하려는 걸까.

……그럴 리 없다. 만약 저런 징조가 있었다면 이틀 전에 말이 나와도 나왔을 테고, 자신의 참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을 거다.

그 말은 즉 저 상황은 갑자기 벌어진 일이란 뜻.

‘나 때문인가.’

환인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뜨거워지기 시작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한 수준이었지만, 심핵이 눈에 보이는 지금 이 순간에는 마치 뜨거운 물수건을 가슴에 대고 누르는 듯한 감각.

이때까지 돌파해오고 부순 미궁의 심핵력이 모여있는 장소, 점차 나무 형태로 변해가는 심핵력 배터리 용도의 문양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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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치녀 정액 탱크 여기사... 으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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