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 왕족 거주구
“6계층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조그마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단장님의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환인의 이야기가 뜻밖이었던 유르트랑은 잠깐 곤혹스러웠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되물었다.
=도움 말씀이십니까?=
무슨 도움일지 알 수 없는데 함부로 허락할 수는 없다. 곤란해하는 유르트랑에게 뤼니가 뒤에서 작게 속닥였다.
=평온의 파동일 겁니다. 그걸 받으면 2달치 찌뿌둥한 정신 피로가 전부 해소됩니다.=
“예. 평온의 파동입니다.”
=아! 예, 괜찮으시다면 부디.=
유르트랑이 옆으로 비켜서주고, 환인은 단에 설치된 여섯 개의 계단을 올라가며 짧은 시간, 제단과 작은 집채만 한 크리스탈을 영혼의 눈으로 분석했다.
성술사의 위상력이 유유히 흐르는 크리스탈 내부. 그 위상력과 주먹만 한 하얀색 8급 위상석이 공명하며 정화의 성법을 파동으로 꾸준히 발산하고 있다.
그러한 공명은 크리스탈을 받치고 있는 삼발이 모양의 제단에서 유도하는 식이며 에너지원은 성술사들의 위상력이다.
“…….”
제단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한 환인은 단상에 올라 600명에 이르는 사람들 대다수가 보내는 호의, 일부가 보내는 의아함, 극소수가 보내는 적개심을 차분히 분류했다.
적개심을 내비치는 수가 많았다면 뒤집어버렸을 텐데 그러기에는 애매한 숫자다.
뒤집어버리면 사람이 쪼잔하고 치사하다는 평가를 받을 숫자라고 할까.
강경책 대신 유화책을 쓰기로 한 환인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영도에서 성자라는 직책을 받아 순례 성불행 중인 환인입니다. 미궁의 최전방에서 도시를 위하여 헌신하는 분들을 뵈니 여러분의 노력으로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아지는 것 같군요.=
간단한 서론에서 이어지는 환인의 공치사는 듣는 사람의 집중과 호감을 끌어내는 중저음의 목소리 덕에 더욱 큰 효과를 보았다.
호의를 보내던 사람들은 더욱 강한 호의를 보내기 시작했고 일부 의아함을 품던 이들도 호의를 보내는 쪽으로 돌아선다.
적개심을 보내던 기사들 또한 한풀 꺾인 적개심을 보내는 중.
약 2분에 걸친 짧은 칭찬을 끝낸 환인은 그리모암의 강력을 일으켰다. 황금빛 베일 같은 자신의 아우라에 사람들의 시선이 커지고 딴짓 하던 이들도 이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그 시선이 전부 모인 순간, 평온의 파동을 다소 진하게 펼쳤다.
화아아아—…….
회백색의 짙은 파동이 자욱이 퍼져 나와 삽시간에 거대한 방을 채워나간다.
=이렇게나 짙은 평온의 파동이라니.=
=우워, 괜히 성제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만.=
=아……. 마음이 편안해져…….=
유르트랑도 이토록 짙은 파동은 처음 보았기에(어젯밤에는 정신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다) 잠깐 멍하니 있다가 환인이 단을 내려가는 것을 발견하곤 황급히 소리쳤다.
=이곳까지 오셔서 평온의 파동과 격려를 아낌없이 보내주신 성제님께 다들 박수!=
와아아—!!
다소 억누른 함성과 함께 크게 쏟아지는 박수 소리.
유르트랑도 단을 내려가는 환인에게 열심히 박수를 치며 재빨리 모인 인원들의 면면을 살피곤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인원들이 죄다 일주일 휴가를 보내고 온 것처럼 활력이 넘친다.
평온의 파동에 이만한 정신 안정 효과가 있었다니, 안색이 밝아진 자들의 표정을 보면 앞으로 석 달은 족히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해산!=
아침 조례를 끝낸 유르트랑은 얼른 환인에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군영을 이리도 신경 써주시다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 일정에 끼어들려 하는 불청객입니다. 이 정도는 해드려야 다른 분들도 좋게 봐주시겠지요.”
=아, 아닙니다. 불청객이라니요.=
곤란한 마음에 부정했지만, 부드럽게 웃음 짓는 그의 표정에 유르트랑은 가슴이 콩닥이는걸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어젯밤 자신이 했던 짓이 떠올라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크흠. 혹시 괜찮으시다면 아침 식사를 같이하시겠습니까? 미궁 안이라지만 물자는 늘 넉넉하기에 질이 괜찮은 식사가 나옵니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저 같은 인물이 근처에 있으면 편히 식사를 못 하실 테니까요.”
=아뇨. 그런…….=
“우리는 막사에서 따로 해결하겠습니다.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에 유르트랑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며 그를 보내주었다.
평온의 파동을 펼쳤기 때문일까, 반감을 드러내던 기사들의 기세가 혼란스러워지며 반감이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눈앞에서 성제를 보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면서 설득해놓는게 더 좋겠지.
막사로 돌아가는 환인의 뒷모습에 유르트랑은 아쉬움을 진하게 느꼈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쉬움이라니, 내가 왜? 성제님과 식사를 못 해서?
‘미쳤어! 나한테는 단장님뿐인데……!’
혹시나 마음이 얼굴에 드러날까, 얼굴을 굳힌 유르트랑은 성큼성큼 식당 막사로 향하며 애써 자신의 감정을 외면했다.
유부남인 단장님을 향한 연모 대신 그 자리에 다른 남자가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귀빈 막사에 배정된 종자를 통해 6계층에 출몰하는 이형종의 종류와 정보를 얻어낸 환인은 그걸 숙지하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들은 안느에게 정신 방벽 기술을 배우는 중.
=……잘하잖아. 그걸 계속 유지하면 그게 정신 방벽이야.=
=전투 집중하고 비슷하네.=
=위상력으로 머릴 보호하면서 기합으로 정신 공격을 이겨내는 식이니까. 그보다 정신 방벽도 모르고 있었다니, 깜짝 놀랐어.=
=나는 주인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3급짜리 전사였으니까. 언제 이런 미궁을 경험해볼 거라고 생각했겠어?=
=저도요, 언니.=
=이실리테 언니하고 려강이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여차하면 제가 정신 방호하고 정신 정화를 걸어드릴 테니까요!=
=부탁할게.=
=헷. 그런데 오빤 괜찮으심까?=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머릴 올린 비상을 쓰다듬어주며 이형종 자료를 읽던 환인은 책을 덮고 대답했다.
“위상류를 집중하면 어지간한 위상력 관련 공격은 다 흘려내는 게 가능하다. 영혼의 눈도 있으니 여차하면 위상류를 강화해서 흘려넘겨도 되고.”
=음, 그래도…… 제가 7급 정신 충격을 써볼 테니까 한 번 시험해보시는 게?=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 도중 자신의 위상류 한계를 알아보기 위해 유르파와 실험을 번갈아 하며 7급까진 괜찮을 거라 확답을 받았지만, 그것도 거의 1년 전의 일이다.
다시 확인해두는 게 좋겠지.
환인이 가볍게 정신을 집중해 위상류를 일으킨 뒤 성술사 징표를 쥐고 대기하던 아영에게 신호를 보냈다.
=갑니다!=
여섯 소절로 이루어진 성문을 빠르게 영창한 아영의 징표가 강한 빛을 내뿜는다.
그걸 합, 작은 기합과 함께 휘두르니 일렁이는 투명한 기파가 두르릉— 기묘한 소릴 내며 환인을 향해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파팡!
영혼의 눈에 녹색으로 보이는 기파를 고스란히 받아낸 환인은 무언가 푸딩보다 질량이 희미한게 몸 주변에 닿아 뭉개지는 걸 느꼈다.
=……어,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그래. 뭔가가 닿아서 뭉개지는 것만 느껴졌다.”
툭툭, 어깨와 팔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털어내자 아영이 기막혀하다가 안느의 부름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나한테 써봐.=
=옙.=
파팡!
=흐윽! ……으, 와 이거 뭐야 엄청 짜릿하네. 정신이 확 드는걸?=
=보통은 당한 순간 땅을 뒹굴면서 비명을 지르게 되는 건데요……. 이실리테 언니도 한번 받아보실래요?=
=응.=
아영의 정신 충격 성술에 정신 방벽을 세워서 받아낸 이실리테는 살짝 눈썹만 찡그리는 수준에 그쳤다.
그걸 목격한 아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언니들은 기초 정신 내성도 오지네요.=
=나나 이슬이는 희귀 직업이라서 그런거도 있을걸?=
=아영. 나한테도 써줘.=
=어? 야 너는 안돼.=
희귀 직업자 대단해. 속으로 중얼거리던 아영은 백려강의 요청에 표정을 귀엽게 찡그렸다.
직업자도 아니면서 술법을 받아내겠다니, 얘는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처럼 안전할 때 경험해서 감각을 넓혀야지. 7급을 쏴달라는 것도 아냐. 4급 정도면 괜찮지 않아?=
=그건 그런데……. 에이 몰라. 간다!=
환인에게 눈빛으로 허락받은 아영은 조금, 약간 힘을 줄여서 4급 정도로 정신 충격을 발사했다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정통으로 적중당했는데 푸른 머리카락만 살랑 떴다가 내려앉고 백려강도 멀쩡한 얼굴로 눈만 끔뻑인다.
=야. 너 왜 영향 안 받아?=
=그, 글쎄……?=
이상하다 싶었던 아영은 5급, 6급, 7급 차례대로 위력을 높여 쏘았지만 전부 머리카락만 나부끼게 하는 정도로 끝났다.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하던 아영이 이번에는 성술로 물리력을 발휘하는 플라잉 피스트를 외웠다.
=이것도 한 번 받아봐. 이건 물리력이 더해진 거니까 혀 안 씹게 조심하고!=
쐑- 펑!
=커윽!=
희뿌연 주먹 형상이 날아가 백려강의 복부를 후려치자 가죽을 터트리는 소리와 짧은 비명이 동시에 나며 그녀의 가녀린 신형이 뒤로 튕겨 날아간다.
재빨리 몸을 날려 그녀를 받아낸 환인은 백려강의 입가에 한줄기 핏물이 흐르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지만 내장이 조금 상한 듯한 흔적.
“아영.”
=악 죄송해요! 너무 셌다! 려강아 미안해!=
=켈룩, 콜록…! 괘, 괜찮아아읏.=
동료를 다치게 하는 모습에 아영을 나무라려던 환인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치유술을 펼치는 걸 보고 이번만큼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의 뒤에서 이실리테와 안느가 도끼눈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녀들에게 크게 혼날 테니까.
=근데 진짜 이상하네. 이런 타격은 받으면서 정신 충격은 왜 영향을 안 받지?=
혼날 땐 혼나더라도 그녀의 의문은 해소해주어야 속 편히 혼날 것 같았기에 환인은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해주었다.
“6계층의 정신 침해에도 견디는 걸 보면 용인체가 부정한 것에 내성이 매우 높은 거겠지. 독이나 질병 같은 것에도 그럴 테고.”
=아. 그러네요. 일반인이면 6계층에 올라온 순간 반쯤 미치거나 돌아버렸을 테니까요. 그러면……?=
=아영아. 잠깐 언니들하고 면담 좀 할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까지의 네 행동에는 할 말이 많았어. 순회까지 아직 1시간은 남았으니까 이야기 좀 해.=
=……예? 안느 언니? 저기, 이실리테 언니?=
그녀들에게 각각 팔이 잡혀 방으로 끌려가는 아영.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다가 뒤따라가는 백려강.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의자에 앉아 6계층에 출몰하는 이형종 자료를 눈에 담는다.
쉐도우 미스트레서. 콕 더 로퍼. 마컨 클라우드. 셋 다 정신 공격을 일삼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괴물이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신체 능력은 동 6급 이형종보다 현격히 약해서 4급 이형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마컨 클라우드는 안개 형태여서 일반 물리 공격이 안 통하지만, 속성이나 위상력을 통한 공격은 무척 취약하다고 하고.
게다가 현 계층에 출현하는 이형종도 이 셋 뿐이라고 한다.
‘문제는 없겠군.’
정신 충격 술법이 정신 공격 중에서는 하위에 자리매김한다고 하지만, 정신 방호 술법도 없이 큰 타격을 받지 않은 그녀들이다.
아영의 정신 방호 술법을 받는다면 별문제 없겠지. 특정 정신 공격에 대한 방비라면 7~8급까지도 막아낼 테니 다른 곳에서도 유용할 테고.
[꺄아악! 으앙! 잘못했어요……!]
방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아영의 곡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던 환인은 안주머니에서 환연이 꼬물거리는 걸 느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신호.
옷깃을 열자 안주머니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환연이 소식을 알려준다.
「환인. 아까 환인이 연설하고 평온의 파동을 펼친 덕분에 반감 가진 인간들이 거의 다 사라졌어.」
“그런가.”
「그 뤼니라는 애도 그렇고 유르트랑 그 여자도 기사들이 너한테 실례를 저지르지 않게 하려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으니까…… 하아암. 귀찮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 같아.」
“아무리 정화의 성법이 있다고 해도 여기서 한 달씩 지내면 정신이 이상해지기 마련이지.”
「유르트랑 그 여자처럼?」
“그래. 평온의 파동에 맞아 정신을 차렸을 테니 생각할 머리가 있다면 성가신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귀찮은데 다 뒤집어버리면 안 돼? 거지 같이 굴어서 사고인 척 여기 심핵을 부숴버리면 네 힘도 늘고 꼴 보기 싫은 것들도 쓸어버리고 일석이조잖아.」
“이 미궁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가족과 그들과 거래하며 사는 사람들을 합한다면 족히 수십만이다. 미궁을 부수면 그들의 원한을 고스란히 사겠지.”
그건 멍청한 짓이다.
신비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한 사람에게 몰리는 수십만의 증오와 저주는 어떤 트러블을 초래할지 모른다.
엘위드리스의 내전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자신의 역할이 있었지만, 그건 우선적으로 욕먹을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 수십 명이 포진해있다.
엘위드리스 시에서 일어난 원한과 증오가 자신에게 오는 것은 별로 없을 거라는 이야기.
하지만 자신이 심핵을 부숴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을 소멸시켜버리면 욕과 저주와 분노와 증오는 가감 없이 자신에게 쏠린다.
제2 기사단을 방패로 내세워도 뒤에 존재할 팔라툼 왕실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 기사들을 콕 꼬집어 쓸어버리는 게 후유증이 덜할 정도지.
“그런 것보다, 너는 괜찮나.”
「나? 나도 어찌 보면 미궁 태생이잖아. 그래서인지 정신 침해는 안 통하는 거 같아. 너한테 딱 붙어있어서 그런가 아까 아영이 쏜 정신 충격에도 아무 영향 없었고.」
“비상하고 실루도 멀쩡한 걸 보면 너희같은 소수 인종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꾸?
삐이~
「그렇겠지 뭐. 아, 유르트랑 온다.」
부단장의 접근을 알린 환연은 착- 재주도 좋게 스스로 옷깃을 닫아버리며 침묵에 들어갔고 동시에 천막 밖에서 알림 소리가 들어왔다.
[성제 예하. 부단장님의 방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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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이번주 주말쯤에 멀리서 하는 가족 모임으로 휴재해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힝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