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왕족 거주구
심연으로 올라가는 듯한 시커먼 석조 계단. 거기에 더해 시야를 가리는 흑색 안개가 통로를 뿌옇게 채우고 있다.
광원 확보용 빛막대 마도구를 최대 범위로 켜도 어둠을 밀어내지 못하고 5m 앞까지밖에 못 밝히는 수준.
=흣…….=
그러한 암흑 운무 속을 나아가던 백려강은 심장을 움켜잡히는 느낌에 작게 신음을 흘렸다.
백려강의 뒤에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이실리테가 그걸 눈치채고 물었다.
=려강. 괜찮나요?=
=…조금,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아요.=
4계층까지 하루. 여기까지 힘들어하지 않고 잘 버틴 백려강이었지만, 눈에 띄게 신음을 흘리거나 한숨을 쉬는 빈도가 늘었다.
깊어지는 계층에 따라 강해지는 정신 침해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 모습.
기사로서의 무의식으로 가장 약해 보이는 백려강을 지키겠다는 것처럼 주변에 포진해있던 천공기사단 기사 중 은색 단발 여기사가 근심을 내비친다.
=무직자가 멀쩡한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백려강. 이리로.”
계단 중간에서 멈춰서서 백려강을 불러들인 환인은 아드네빌라와 똑 닮았지만 약간 어린 신비로운 미녀의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기분이 어떻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약간 술렁일 때처럼 동요하는 기분이에요.=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영혼의 눈으로 그녀의 영혼 상태를 찬찬히 살폈다.
백려강이 빙의중인 육체는 저 알류겔의 주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용인체다.
삿된 것에도 내성이 강한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6계층이 코앞인데도 영혼의 색이 흐려지지 않고 맑은 빛을 뿌릴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도 심장 한편에 불안처럼 보이는 색이 조금씩 번지는 것을 보면, 맨몸으로 내려가는 것은 6계층이 한계로 보인다.
바다처럼 푸른 머리카락을 귀 너머로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상태는 아직 괜찮아 보이는군. 신체 덕분인가.”
=그런 것 같아요.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서는 4계층도 닿지 못했었으니까요.=
당시 일을 떠올렸는지 조금 수줍어하며 살포시 미소 짓는 백려강.
백려강의 상태가 걱정되어 뒤에서 기웃거리던 아영이 손을 들며 물었다.
=오빠. 려강한테 정화의 성법을 걸까요?=
“아니.”
정화의 성법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평온의 파동처럼 정신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술법이겠지.
아영의 제안을 거부한 환인은 직접 평온의 파동을 펼쳤다.
폭이 7m 남짓한 계단 통로에 회백색의 빛이 뿌려지며 일행을 뒤덮고 나아가 통로의 어둠까지 밀어낸다.
평온의 파동에 휩싸인 백려강의 혼이 크리스탈처럼 맑아지는 중에 안느가 팔꿈치로 아영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너 정화 성법 몇 단계야?=
=3단곔다.=
=와, 그렇게나? 숙달이 어렵기로 유명한 상급 성술인데 대단하네.=
=이래저래 쓸 곳이 많아서 열심히 숙련을 쌓았거든요. 혹시 안느 언니는……?=
=응. 난 못써. 회복도 이제 겨우 쓰기 시작했고.=
=혼합 직업으로 회복까지 쓸 수 있게 된 게 더 대단한데요? 거기서 정령 기사로 재각성까지 했으니까 무술에 성술에 정령술까지…….=
안느와 아영의 대화를 듣던 환인은 자신이 평온의 파동을 걸어주지 못할 상황도 대비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맥락을 보면 아영의 정화 성법 효과가 제법 뛰어난 듯하니 유르파와 합작시켜 정화의 성법이 담긴 마도구를 만들라고 하면 되겠지.
환인이 속으로 해야 할 일을 추가하는 중, 그의 귀에 기사들의 속삭임도 들려온다.
=심연의 안개가 밀려나고 있어…….=
=평온의 파동에 파사의 빛과 같은 효과가 있었나?=
=멍청아. 반대겠지.=
=…파사의 빛이 평온의 파동 효과를 모방했다고? 흠, 확실히 그쪽이 더 신빙성이 있어.=
평온의 파동 한 번에 위축된 것도 풀린 모양으로 속닥거리는 기사들. 그 이야기를 들은 안느가 질문을 던졌다.
=거기 기사님들. 파사의 빛은 뭔데?=
=아, 6층 군영에서 하루 한 번씩 광채를 뿌리는 군용 마도기입니다.=
=교황님의 정화가 깃든 8급 백색 위상석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올라가시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군용 마도기…….
환인은 8급 위상석이 어디에서 출토되었을지, 8급 이형종은 얼마나 강할지 궁금해하며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6계층,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의 왕족 거주구는 그 이름과 전혀 걸맞지 않은 분위기였다.
새카만 화강암 같은 돌로 이루어진 사각형 방. 그 어떤 장식이나 무늬도 없는 살벌한 풍경에 더해 암흑의 안개가 독가스처럼 떠돌며 시야를 가린다.
심연 안으로 들어왔다 해도 수긍할 풍경이다.
=거기 멈춰라. 등반자는 신분을 밝히도록.=
계단이 끝나는 장소, 6계층 입구를 완전히 가로막는 식으로 설치된 철제 가시 바리케이드의 뒤쪽에서 제2 천공기사단 견장의 기사가 바리케이드 사이로 얼굴만 내비치며 묻는다.
은발의 여기사는 슬쩍 환인의 앞으로 나서며 바리케이드 너머의 기사에게 말했다.
=로치니 경, 아드우리 공작 각하의 증명기를 소지하신 영도의 성제님과 그 일행입니다. 성제님, 그 브로치를 보여주십시오.=
환인이 묵묵히 아드우리 공작에게 받은 브로치를 내밀자 작은 구멍을 통해 받아든 기사는 다시 돌려주며 바리케이드를 접어 길을 열어준다.
환인 일행이 열린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가자 바리케이드에 가려져 있던 4급의 기사 다섯을 포함해 여섯이 기사식 경례를 올렸다.
=실례했습니다. 상부의 지시가 내려와 있으니 통과하시면 됩니다.=
=성제님. 군영으로 안내해드려도 되겠습니까? 6계층에 성제님이 올라오시면 일단 군영으로 안내하라는 지침이 내려와서 말입니다.=
“책임자에게 인사를 드려야겠지요. 부탁합니다.”
환인은 6계층의 계단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작게 목례한 뒤 은색 단발 여기사를 따라 구불구불한 검은색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던 안느가 주위를 둘러보곤 으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와, 여긴 또 삭막한 풍경이네…….=
=다른 미궁의 6계층도 여기와 비슷해?=
=심층으로 내려갈수록 정상적이지 않고 일그러진 풍경이 나와. 6계층 정도 되면 슬슬 세상에 이런 장소가 있을 법한 풍경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녀가 여행 도중 보았던 6계층의 미궁 몇 곳에 대한 경험담이 이어진다.
독이 고여있거나 흐르는 지저地底의 독늪, 저주받아 뒤틀린 숲, 사람 내장 속처럼 살점으로 이루어진 괴육로怪肉路.
=보통 6계층 정도 되면 한 가지를 주제로 구조가 형성되는 식이야. 지저의 독늪은 독, 저주받아 뒤틀린 숲은 저주, 괴육로는 부식. 그걸로 미루어보면 여긴…… 진입한 사람들의 정신을 찍어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같아.=
=안느 기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6계층의 이형종은 대부분 정신 공격을 가하죠.=
“…….”
환인의 눈에는 그녀들의 눈에 비치는 것보다 더 끔찍한 풍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시커먼데다 은연중에 번들거리는 돌벽과 바닥. 그리고 그런 벽을 뒤덮은 붉은 경락과 경혈들.
사방을 듬성듬성 뒤덮은 붉은 경락은 흡사 사람의 혈관처럼 보여 혐오감을 부추긴다.
그런 경락을 따라 붉은 기운이 흐르면서 맥박치듯 일렁이니, 멀쩡한 사람이라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정신병에 걸리기 쉬운 광경 그 자체.
하지만 환인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확인하며 여기사를 따라 움직였다.
그에게 있어 이런 정신병 걸릴것 같은 풍경은 그저 배경의 하나일 뿐.
10분여 정도를 이동하던 환인은 이형종과는 한 번도 조우하지 않았고, 적막 속에서 도착한 곳은 여기사가 잠시 보여주었던 육망성이 그려진 6번 방 위치였다.
=이곳입니다.=
여기사가 굳게 닫힌 칠흑 같은 철문을 텅텅 두드리자 사람 머리 높이 쪽에 자그마한 틈이 열리더니 사람의 눈이 드러난다.
이어 푸른색 빛이 한차례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고 다시 탁, 닫힌다. 그리고 매끄럽게 기름칠한 것처럼 소리 없이 열리는 칠흑 문.
두께가 50cm에 달하는 철문 뒤에서 나타난 제2 천공기사단 기사가 바이저 타입의 깃털 투구를 쓴 채 물었다.
=뤼니, 뒤에 분들은?=
=지금 팔라툼에서 가장 유명한 분.=
=……성제님이시라고?=
=부단장님께 안내해드려야 하니까 비켜줄래?=
=어어.=
얼떨떨한 목소리를 내는 기사를 지나 문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생활 소음이 환인을 덮쳤다.
웅성웅성 시끌시끌.
군중의 소리만 듣자면 족히 수백 명은 되지 않을까 싶은 소음이다.
=밖에서는 하나도 안 들리더니 소리 차단 결계까지 펼쳐놨나 보네.=
그냥 봐도 정식 축구장 넓이만큼 드넓은 공간이 눈앞에 드러난다. 그리고 곳곳에 쳐있는 소, 중, 대형 천막과 그런 천막을 오가는 플라비우스족, 플뢰족, 루크랑족들.
여기사는 군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말대로였다.
천막은 막사였고 오가는 사람들은 기사거나 기사의 종자들이다.
복도는 폭 7m에 높이가 10m 정도. 그런 복도를 기준으로 삼아 가로세로 3*5칸의 방이면 그다지 넓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이상의 넓이다.
=이쪽입니다.=
환인은 자신을 보자마자 멈칫하고 굳는, 다소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하얀 천으로 가려진 천장이나 벽을 둘러보았다.
여기에는 검은 안개도 없고 군데군데 드러난 벽에도, 깔린 것 없는 바닥에도 미궁의 경락이 지나지 않고 있다.
‘저것 때문인가.’
방 한가운데에는 근미래 SF 분위기의 거대한 제단이 설치되어있었다. 거대한 수정 속에 주먹만 한 위상석이 둥둥 떠 있고 거기서 은은한 빛이 퍼져나오는 중이다.
저기서 기사들이 말한 파사의 빛이 뿌려지는 거겠지.
환인의 시선이 몰려나와 구경하는 듯한 인파들을 훑는다.
기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팔라툼의 마탑, 교단에서 나온 듯한 술법사들에 파견나온 듯한 엽사 조합의 인물들도 많다.
군영이라는 표현 그대로 군대의 숙영지 같은 느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군영에서 가장 큰 막사 앞까지 안내한 여기사가 관등성명을 대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30초 뒤 다시 나와 환인 일행을 안으로 이끌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다소 피로한 기색의 금발 삼쌍익이 서류로 가득한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다 고개를 든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풍성한 금발의 여우상인 여자.
7급 전사의 아우라를 몸에 감고 있는 만큼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지만, 숨기지 못하는 피로 탓에 기백도, 미모도 퇴색된 느낌이다.
=영도의 성자님을 뵙…… 응? 아우라?=
“사정이 있어 그간 아우라를 드러내지 않고 다녔습니다.”
=그러셨군요. 영도의 성자님을 뵙습니다. 본관은 유르트랑 아데나, 제2 천공기사단에서 부단장 직을 맡고 있습니다.=
“영도의 순례자인 환인입니다.”
피로에 찌든 눈으로 환인을 잠시 바라보던 유르트랑 부단장은 마도구 깃털펜을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귀하신 분께서 오셨지만 보다시피 일이 쌓여 따로 시간을 내드리지 못하는 점을 양해해주십시오.=
“갑자기 찾아온 것은 제 쪽이니 신경 쓰지 마시길.”
환인의 예의에 유르트랑 부단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서랍에서 작은 종을 꺼내 울렸다.
으레 종하면 떠올릴 쇳소리 대신 옅은 기파氣波가 뿜어져 나와 막사 내부를 감싸고, 막사 밖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깨끗하게 차단된다.
그렇게 차음 결계를 펼친 부단장은 피로로 얼룩진 표정으로 환인에게 질문했다.
=위에서 내려온 공문은 받았습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성제님이시라면 성불행을 하시기도 바쁘지 않으십니까? 굳이 미궁 6계층까지 내려와 심핵과 중핵을 보고 싶으시다니. 무슨 목적이신지 여쭤도 될까요.=
별종이라는 의중이 묻어나는 질문에 환인은 옅은 미소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으음. 내력 무장 장관께서 허락하신 일에 현장 책임자 나부랭이가 목적을 여쭙는 것도 건방진 행동이긴 하죠.=
아까부터 유르트랑 부단장의 말에서 반감이 은연중에 느껴진다.
환인은 그녀의 반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아차리고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대답했다.
“제2 천공기사단은 피해자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는 풍습이라도 있나 봅니다.”
=…….=
피로와 성가심이 묻어나던 부단장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저벅저벅, 부단장이 앉아있는 탁자 앞까지 걸어간 환인은 탁자에 왼손을 짚으며 희미하게 반감이 묻어나는 그녀의 코발트블루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유르트랑 부단장은 레아우카 사바인 백작을 존경했나 보군요.”
=…….=
“그렇다면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듯한 발언은 하지 말라고 충심으로 조언했어야지요.”
=단장님은 기사단의 기사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한 것뿐이었습니다.=
“그 주의가 당사자를 꺼림칙한 괴물처럼 대하라는 것이었습니까.”
=…….=
다시 입을 다무는 부단장에게 환인은 비웃음도, 조롱도 드러나지 않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적했다.
“감당하지 못할 섣부른 발언이 불러일으킬 여파조차 짚어내지 못한 인물이라면, 오히려 이번 일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아닌 폭급한 성정의 다른 고위직 인사가 그러한 일을 경험했다면 크나큰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었을 테니까.
환인은 책상 위에 올려진 작은 손이 주먹을 쥔 채 작게 떨리는 것을 보다가 말했다.
“제가 아드우리 공작에게 한 말은 이게 전부였습니다. 제2 천공기사단 기사가 절 기피해야할 괴물 보듯이 보더라고 말입니다. 부단장은 제가 그때 어떻게 행동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대놓고 꺼림칙해 하던 기사들의 결례를 그저 웃으며 보아 넘겨야 했습니까. 아니면 사바인 백작을 찾아가 휘하 기사들에 대한 태도를 지적하여야 했습니까.”
둘 다 고위 직급을 가진 인사가 해선 안 될 행동이다.
환인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영도의 성제로서 정식 항의 서한을 천왕궁에 보내어 외교적 결례로 지적해야 하는 것.
하지만 환인은 슬쩍 지나가듯이 언급해 그들이 한발 물러나 수습할 기회를 주었었다. 원만하게 무마시킬 기회를 준 것이다.
그리고 기회를 이용한 것은 강성패도 파벌이었고.
“즉, 원망한다면 사바인 백작을 추락시킨 강성패도 파벌에게 해야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부단장이 하는 행동을 보면, 제가 만만해서 시비를 걸고 투정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군요. 지금 이 상황을 정식 절차대로 처리해 천왕궁에 항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가십니까.”
주먹을 쥐고 잘게 떨리던 그녀의 손이 그 말에 슬그머니 풀어지며 떨림도 멈춘다.
유르트랑 부단장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과로로 인해 둔해졌던 머리가 확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단장을 사모하는 마음과 과로로 둔해진 판단력이 불러일으킨 대참사.
성제가 만약 돌아나가 이 점을 언급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레아우카 단장도 재차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번에는 정직과 저택 구금 정도로 끝나지 않고 작위 박탈까지 벌어지겠지.
그뿐만 아니라 제2 기사단의 평판도 추락하다 못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말이다.
사태 파악이 끝난 유르트랑은 하얘진 안색으로 꾹, 다시 주먹을 쥐었다가 책상 앞에서 일어나 환인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 바람에 이실리테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한 쌍의 젖가슴이 출렁하고 흔들린다.
=죄송합니다. 미혹에 빠져 그만 성제님께 크나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
=제 어리석은 행동으로 심기가 상하셨을 성제님께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자란 머리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방법을 귀띔하여주신다면 진심을 다하여 성실히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유르트랑의 맹세에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안느가 속삭인다.
=진심이야.=
“…….”
용서를 받기 위한 방법이라 해도…… 그다지 끌리는 것은 없는데.
재물이나 마도구, 마도기를 요구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재물 따위야 미궁에서 진득하게 이형종을 사냥하다 보면 벌리는 것이고 어중간한 마도구 따위는 유르파의 수제만도 못하니까.
무엇보다 사과의 대가로 이런 재물을 요구하는 건 약점을 잡고 재산을 갈취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알려진다면 내막이야 어쨌든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헛소문을 생산해 유포할 수도 있다.
잠깐 생각해보던 환인은 정말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이 노브라가 틀림없을 유르트랑의 가슴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그녀에게 생각하는 것을 떠넘겼다.
“사죄 방식은 부단장이 직접 생각해보시는 게 좋겠군요.”
=……!=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제가 심핵과 중핵을 확인하려는 것은 성불행과 연관이 있어서입니다.”
=……성불행 말씀이십니까?=
“같은 기사라 하여도 하급 평기사와 기사단장이 하는 일은 다르겠지요. 제가 하려는 것도 그러한 범주로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식이 없다면 하지도 못할 이해하기 쉬운 비유에 유르트랑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심핵의 방을 순찰하는 것은 이틀에 한 번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마침 내일 미궁 순회와 함께 심핵의 방 순찰이 예정되어 있고,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정오까지 군영에서 쉬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부단장의 제안대로 하겠습니다.”
기사들과 함께한 덕분에 빠르게 군영까지 도착한 것도 있고,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었기에 환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르트랑 부단장은 다시 핸드벨을 울려 차음 결계를 푼 뒤 종자를 불러들였다.
=성제님 일행께 귀빈 막사를 안내해드리도록.=
=옛. 성제님, 이쪽입니다.=
숨 막힐듯한 위압감과 찌를듯한 살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던 영혼 기사들이 막사를 나가고 잠시 후.
손에 일이 잡히지 않던 유르트랑은 얼음처럼 차가워진 손으로 열을 내뿜는 이마를 감싸며 조용히 시립해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뤼니. 성제는 어떤 사람이야?=
=기사단 내에 도는 소문은 죄다 헛소리였습니다. 냉정하고 담담한 분이시지만 이유 없이 음해할 분은 아닌 거로 보였어요. 영혼 기사를 무척이나 아끼는 모습도 보여주셨었고요.=
=으음…….=
=그리고 엄청난 무술의 달인이며 영혼술의 대가로 보였습니다. 4계층의 옛 고성 우르거 두 마리를 겨우 한 호흡 만에 해치우는 무술, 그리고 20마리에 가까운 버그베어 무리를 손 한번 휘젓는 걸로 죄다 터트려 죽였으니까요.=
=그, 그 정도였어?=
=그 아우라의 형태며 농도를 보면 8급 정도가 아닐까요? 8급은 초인을 넘어 신인의 영역에 이른 분들이니까……. 제 판단으로는 성제님과 영혼 기사들 전부 있다면 7급 미궁 돌파도 가능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민치, 아드렉, 코히도 같은 걸 봤으니 못 믿겠다면 녀석들을 불러다 물어보십시오.=
=…….=
유르트랑은 더욱 좋지 않은 소식에 엄지손톱을 깨물며 불안한 몸짓으로 책상 앞을 서성였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뤼니, 은색 단발의 여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부단장님.=
=왜.=
=이번일, 무장 장관님들 귀에 들어가면 제2 천공기사단 편제가 바뀌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2계층 광장에 소문이 파다해요. 천왕 폐하의 천형을 치료해주신 분이 성제님이라고요…….=
=…….=
=그냥…… 그렇다고요.=
=나도 알아.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용서를 구할 수 있을지 짐작도 안 간단 말이야. 물욕도 없어 보였는데……!=
짐작이 안 간다는 건 거짓말이다. 유르트랑도 느꼈다. 자신이 사과할 때, 분명 성제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닿았었다.
이 빌어먹게 크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살덩어리에 말이다.
그게 뜻하는 것은…….
성제도 남자니까 이 거지같이 큰 가슴에 관심이 생긴 거겠지. 하지만 나는 단장님을…….
=역시 몸을 바치는 게 정답이 아닐까요? 타 종족 남자들은 대개 우리 플라비우스족 여자들 몸을 탐내니까요…….=
=……뤼니.=
=예?! 전 안 됩니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다고요!=
=나 대신 가라는 게 아니야. 나랑 같이…….=
=싫습니다! 명령을 내려도 거부할 거예요! 실수는 부단장님이 저질렀으니까 부단장님이 책임져야죠!=
=……씨. 야, 대가리 박아. 이게 지금 어디서 바락바락 고함을.=
뤼니 상급 기사는 두 쌍의 날개를 바짝 접고 잽싸게 원산폭격을 실시했다. 어정쩡하게 굴다가 끌려가서 불륜을 저지를 바에 대가리 1시간 박는 게 100배 낫다.
그리고 유르트랑 부단장은 심란한 마음에 답답해서 브래지어를 풀어놓은 생가슴을 출렁이며 다시 책상 앞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 쓰려고 아껴왔던 처녀가 아닌데…….
=……씨이. 야, 똑바로 대가리 안 박아?!=
퍽, 뤼니의 옆구리를 밀어 넘어트렸지만 칼 같은 동작으로 다시 머리를 박는 뤼니. 그 행동이 얼마나 각이 잡혀있는지 트집을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기나긴 군 생활에 배운 것 중에는 없는 트집을 만들어 내는 것도 있었다.
뤼니 입장에서는 모난 돌 옆에 있다가 얻어터지는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런 불합리는 언제라도 벌어지는 게 군 생활이 아닌가.
부단장의 화풀이는 이미 마음으로 결정을 내린 결과라는 걸 알기에 은근슬쩍 위상력을 몸으로 돌려 강화하며 부단장의 갈굼을 인내했다.
잠시 후면 끝날거라고 믿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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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와 3개월 뒤면 미궁기담도 연재 2년차네요...
원래 600편쯤에 끝내려 했는데 왜 이렇게 길어지는 거지 ㅠㅠ
글쟁이 살려
[작품 설정]
6계층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