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잊혀진 옛 도시 미궁
작별 인사를 위해 찾아왔던 리민이 떠난 그날 밤, 여자친구들과 밤일을 치른 뒤에도 환인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눈앞을 아른거리던 물방울 같던 그 환영은 뭐였을까.
환영 속의 리민은 대충 16~17살 정도로 보였다. 방금 보았을 때보다 분위기도 나긋했고 표정도 부드러웠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1년 정도 뒤의 시간대가 아닐까.
의문이 샘솟듯이 솟아난다.
닐비나는 왜 곁에 있었으며 품에 안고 있던 아기는 누구였을까. 아기를 향하던 리민의 미소에 어째서 어머니의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지.
거기에 천공성의 북극성실, 아기를 바라보던 닐비나의 귀여워하고 예뻐하는 표정과 아기의 검은색 머리카락.
그 장면의 주변 풍경과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하나의 결론을 내놓는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환인은 그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아기가 내 핏줄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아기의 외형을 보자면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말은 지금쯤 임신하고 산란한 뒤 알에서 아기가 태어나야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다는 이야기.
하지만 현실은 리민을 안으려다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조부와 함께 팔라툼을 떠났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란 이야기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면 닐비나가 아기에게 그토록 관심을 보일 리 없고, 성격 파탄의 개망나니였던 리민을 천공성의 북극성실에 불러들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본건 대체 뭘까.
‘……예지 능력?’
모종의 이유로 떠났던 리민이 되돌아온다는 건가? 그리고 자신은 돌아온 리민을 안게 되고?
아니다. 예지 같은 것은 아니다.
이엘카타에게서 들었던 예지의 메커니즘은 트랜스 상태에서 마치 사진에 들어간 것처럼 그 장면을 보는 거였다. 전견시가 되면 영상처럼 움직이고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하고.
자신이 본 것도 하나의 장면이긴 했지만, 그건 수면을 통해 건너편을 들여다 쪽에 가까웠다.
따지자면 미래시가 아니고 다른 시간선에서 벌어졌을…….
“…….”
환인은 직감적으로 방금 자신이 떠올린 가설에 대해 높은 신빙성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가슴의 나무 같은 문양으로 향했다. 다음으로 향한 것은 옆에 벗어둔 아스펜드, 그 속에 들어있는 그리모암의 유물이다.
그리모암의 유물을 모두 모아 아우라를 드러낸 그 여파를 신체가 적응해 능력이 깨어났고, 심핵력을 흡수하며 만들어진 문양에 깃든 강력한 염원이 모종의 화합을 일으켜 다른 시간선을 들여다본 것.
시야가 일종의 차원을 넘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로 추론해낸 것이 아닌 직감의 영역에서 내놓은 결론이지만, 왠지 이게 정답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술법사로 각성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속성 술법탄을 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나, 근접 직업자로 각성한 사람이 강력해진 육체의 힘 조절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보는 것이다.
“…….”
잠깐 고민하던 환인은 부드러운 젖가슴이 짓눌릴 정도로 자신의 옆구리에 붙어 잠들어있던 유르파를 보았다.
마지막 차례였기에 1시간 넘게 괴롭힘당해버려 기절하듯 잠든 아가씨.
이실리테나 안느는 터프한 체력으로 환인과 끝까지 함께 간다. 그보다는 못하지만, 백려강과 아영도 단련한 체력과 은근슬쩍 쓰는 성술로 환인과 보조를 맞추는 편.
하지만 유르파는 전형적인 술법사 체력이다. 지금 덮쳤다간 내일은 아침부터 힘들어하겠지.
내일 일어나면 물어볼 생각으로 그녀의 머리를 이쪽으로 기대게 한 환인은 습관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향기를 맡았다.
수제 샴푸를 또 바꿨는지 비누에서 나는 창포와 흡사한 냄새. 그리고 그 사이로 올라오는 유르파의 체취.
그 순간 환인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창포와 흡사한 냄새에 섞인 그녀의 체취에 양물이 분노하듯 벌떡 일어난 거다.
“……이건 유르파의 잘못입니다.”
그녀를 바로 눕히고 배에 올라탄 환인은 쫄깃보들한 입구에 대고 양물을 단숨에 자궁 앞까지 밀어넣었다.
유르파가 반사적으로 꽈악 조이며 바르르 떤다.
전혀 뻑뻑하지 않은, 기다렸다는 듯이 삽시간에 매끄럽고 축축하게 변해가는 그녀의 소중이.
=하읔…! 자, 자기. 아직… 안 잤어……?=
“절 흥분시키는 체취를 막 뿌려서 잠도 못 자게 하지 않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흐으으응……! 하악, 하악! 이 이상 하며언… 나, 나 죽어…….=
“괜찮습니다. 안 죽게 할 테니까요. 대신 내일 아침이 조금 피곤해질 테지만 말입니다.”
=흐윽, ……자긴 정말 짐승이야♡=
우는 것 같으면서도 웃는 얼굴의 유르파가 목을 감싸오며 입맞춤을 해온다.
환인은 그 키스를 허락이라고 여기며, 물론 허락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조히스트 속성을 자극하기 위해 강제로 덮쳤겠지만…… 아무튼.
그 상태로 퍽퍽퍽, 침대가 요동칠 만큼 강하게 박기 시작하니 유르파도 강제로 끌어올려지는 관능에 허덕이며 사슴 같은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늦은 밤, 침실에 귀를 간지럽히는 유르파의 교성이 다시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도령은, 그리모암의 강력 효과로 아우라가 발산되기 시작하면서 위상류에 막혀있던 능력이 개화하는 거라고 생각한단 거네?=
“정확히는 가슴의 심핵력과 영혼의 눈이 동조해서 일시적이지만 다른 차원의 시간선을 엿본 느낌이다.”
쌀밥에 김치와 롤캐비지로 아침을 먹던 안느는 환인의 대답에 음,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우라 무발현자에 관한 사료는 교단에도 없다 보니…… 이래서 선구자가 존경받는 건가 싶어. 수없이 많은 착오랑 체험으로 전례를 남기잖아.=
=땅신 교단 정보실이라면 방대한 지식으로 유명한 곳 아님까? 거기에도 없다고요?=
연어 채소 덮밥을 한 스푼 떠서 입에 막 가져가려던 아영이 눈을 크게 뜬다.
=응. 녹색 쿠에와 관련된 정보도 얼마 없어서 쟬 성장시키는 방식도 고민 많이 했었어.=
안느가 열심히 고기를 섭취하고 있는 비상을 가리키자 백려강과 아영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진한 화장으로 눈 밑의 다크서클을 감춘 유르파가 열심히 피로 해소에 좋은 채소를 포크로 찍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의 능력 발현에 관해서는 나도 모르지만, 평행 우주의 관측에 관한 소재는 몇 년에 한 번씩 논문이 나오는 분야야.=
“그런 분야도 있습니까.”
=응응. 그 분야에 꼭 등장하는 게 차원 유리거든. 자기의 심핵력도 차원과 관련된 힘이 스며든 거잖니? 거기다 자기의 복합적인 능력을 이유로 영혼의 눈이 매개가 되어 발현됐을 수 있다고 봐.=
“…….”
환인이 젓가락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자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로 채소 롤캐비지를 썰어 먹던 백려강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살짝 훔치며 말했다.
=그 말은 리민 씨가 오라버니와 동침했다면, 사쌍익의 플라비우스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네요. 놀라워요.=
=어?=
=……응?=
언니들의 시선에 백려강은 살짝 당황하며 이유를 설명했다.
=아, 아기가 북극성실에 있었다고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북극성실은 왕이 되실 사쌍익의 아기님들을 육아하는 곳이니까…….=
그녀의 이야기에 여자들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표정이 되었다.
=그럼 도령이 상왕이나 대군이 될 수 있었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요?=
“터무니없는 소리 할 생각 말고 밥부터 먹어라.”
자신을 돌아보며 마악 무어라 말하려던 여자친구들의 입을 다물게 한 환인은 어쩌면, 자신은 성제라는 직업의 모든 걸 알아낸 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직업은 능력이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하다.
검희는 다중 검기 발현에 신체 스펙이 월등해지며 공간 지각 능력이 늘어난다. 정령 기사는 정령과 계약해 정령을 다룰 수 있게 해주며 신체 스펙 상승, 정령력 증가가 이루어진다.
성술사는 성술로 분류되는 치유술을 펼칠 수 있고 부여 계통 비술사는 위상력을 물질에 다른 술법사들보다 수월히 새길 수 있다.
그렇다면 성제는?
영혼의 소통과 영혼 구슬을 사용한 공격, 평온의 파동, 혼령주 이런 것들은 영혼술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성관계를 통해 여성의 영기를 흡수할 수 있고, 계약하지 않은 채로 영혼 구슬을 형성하고 정령을 볼 수 있으며 그런 정령도 영혼 구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모은 영기를 일종의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는 것, 세상 모든 마력의 유동을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번에 본 평행 차원 관측은?
이 모든 걸 영혼술 계통이라고 뭉뚱그려도 이상하지 않으며 영혼술과 다른 갈래로 본다 해도 이치에 맞아떨어진다.
“…….”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기에 환인은 꼬리를 무는 상념을 끊었다.
평행 차원을 들여다보게 해준 능력이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 모르지만, 현시점에서 문제가 될 요소는 없으니 분석을 미뤄두어도 무방하겠지.
그 후 식사를 마친 일행은 미궁으로 향할 채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해 나갔다.
채비를 끝마친 안느와 백려강, 아영이 먼저 밖으로 나가 비상의 등에 짐을 올리고 유르파는 가디건 차림으로 실루를 안아 들고 그걸 구경한다.
비상의 등짐 끈과 깃털 투구 턱끈까지 점검한 안느는 아직 나오지 않은 환인과 이실리테를 기다리며 유르파에게 농담을 던졌다.
=율이 언니, 우리가 없어도 쓸쓸해 하지 말고 잘 지내야 해. 혹시 모르는 사람이 오면 문 절대 열어주지 말고.=
삐이.
=얘는. 내가 앤줄 아니?=
삐~ 삐삣.
=언니는 약하잖아. 혼자 두려니까 걱정돼서 그런 거지.=
삐쀼!
=아가씨들이랑 비교하니까 약한 거야! 나도 싸울 땐 무섭게 싸우거든?=
삐이잉이잉이…….
=킥킥. 막 소모성 마도기를 집어던지면서? 그나저나 실루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칭얼거리는 걸까.=
유르파의 가슴에 폭 안긴 실루를 쓰다듬어주니 삑삑거리며 다리까지 바동거리기 시작한다.
뒤이어 준비를 끝낸 아영과 백려강이 다가와 그런 실루를 신기하단 눈으로 보며 말했다.
=우리랑 같이 가고 싶은 거 아님까?=
=같이 가고 싶다고 해도…… 아직 어린 실루가 따라오기에는 위험할 텐데.=
백려강이 곤란해하는 얼굴로 실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실루는 그런 백려강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둥그런 부리로 물고 ‘날 데려가!’ 하듯이 늘어진다.
“준비는 끝났나.”
마침 환인이 이실리테와 함께 나오는 모습에 유르파가 말했다.
=자기, 실루가 자기네를 따라가고 싶은가 봐. 계속 칭얼거리네.=
삐유우.
데려가~ 하는 것처럼 길게 우는 실루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소매의 커프스를 채우고 허리에 광명창의 코어를 걸며 대답했다.
“괜찮겠지요.”
=어? 진짜?=
설마 허락이 나올 줄 몰랐는지 안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실루는 환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힘차게 바동거려 유르파의 품에서 탈출, 파다닥— 짧은 날개를 퍼덕여 환인의 품에 날아들었다.
“비상을 만난 곳도 6급 미궁 안이었고 4차 성장을 이룬 곳도 미궁 안이었지. 실루가 태어난 지도 3개월이 다 되어가니 슬슬 미궁에 데려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삣.
=저거 맞다고 맞장구 치는 거 맞지? 진짜 요물이네.=
그런 실루를 환인은 비상이 등에 짊어진 짐 사이에 내려놓고, 목을 길게 빼는 행동에 머리를 누르며 주의를 주었다.
“실루, 여기에서 얌전히 있어라. 말썽 피우거나 비상의 등에서 뛰어내리면 두 번 다시 널 데리고 미궁에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아하하. 오빠도 참, 그렇게 말한다고 실루가 알아들을 리가…….=
삑!
=알아들었어?!=
환인은 대답하는 것처럼 기운차게 운 실루의 등을 두드려주고 그리모암의 강력을 발동시켰다.
그와 함께 찬란하게 퍼져나가는 황금빛의 오로라.
강대한 힘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그동안 열심히 적응 훈련을 한 덕분에 고양감은 들지 않는다.
“그럼 출발하지. 유르파, 다녀오겠습니다. 물리력을 써야 할 상황이 온다면 뒷일은 제가 책임질 테니 마도기를 아낌없이 쓰십시오.”
=아하하. 들었었구나? 알았어, 자기들도 조심해서 다녀와~.=
환인은 웃으며 배웅하는 유르파를 뒤로하고 잊혀진 옛 도시 미궁으로 향했다.
미궁으로 향하는 길은 편안했다.
다들 척 봐도 수준 높은 마도기를 착용한 상태여서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아우라를 널리 퍼트리며 이동 중인 환인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환인의 아우라에서 정체 모를 위압감과 주눅을 느끼며 거리를 두었고, 자존심 강한 플라비우스 직업자마저도 그를 향해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흐음. 도령을 찾아온 고위 귀족들은 도령의 아우라를 봐도 주눅 들지 않았는데…….=
=고위 귀족의 짬이 있었단 거겠죠. 거기다 오빠 정체를 알아차려서 그런 거 같기도 한데요?=
사방에서 성제님이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지난 10일동안 귀족들과 면담해준 것이 생각 이상으로 널리 퍼진 느낌이다.
환인도 그런 속삭임을 들었지만,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태도로 오직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런 주변 반응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니.
미궁의 출입 관문을 아무 문제 없이 통과한 환인은 어제 이야기했던 대로 최단 거리를 가로질러 2계층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친 호브와 콜브, 추악한 난쟁이와 개 대가리의 이형종들은 이형종이라는 종이 무색하게 환인을 보자마자 꼬리를 사타구니에 말거나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앞다퉈 달아났다.
명백하게 환인의 아우라에 겁먹고 달아나는 모양새.
허겁지겁 도망가는 키 130cm 남짓한 회색 개대가리 이형종의 뒷모습에 안느가 작게 중얼거린다.
=성제 아우라에도 공포 유발 효과가 있나?=
=그런 아우라도 있어?=
=응. 광전사의 아우라는 자신보다 약한 적에게 약한 공포와 위압을 줘. 주눅 든 괴물은 본래의 힘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썰려버리지.=
우르르릉! 꾸르르릉-!
물론 도망치는 것들은 백려강이 쏜 유리텔의 번개 화살에 폭사爆死. 100m를 떨어져 있어도 하얀 선을 그리며 날아간 번개의 화살은 정확히 괴물의 상반만을 날려버린다.
도망치는 세 마리를 터트려버린 백려강이 조금 난감해하는 얼굴로 환인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평범한 활을 하나 더 장만해야 할 거 같아요.=
“그래. 우렛소리가 생각 이상으로 크군.”
벼락활 유리텔의 위력은 더할 나위 없다. 활시위를 튕길 때마다 한줄기 하얀 벼락이 빛의 선을 그리며 적을 터트려버리니까.
문제는 활시위를 놓을 때마다 터지는 천둥소리다.
천장 높이가 15m 정도 되는 층에서도 우렛소리로 귀가 먹먹할 정도다. 이 정도면 적을 사방에서 끌어들이겠지.
잊혀진 옛 도시 미궁 정도라면 소리에 이끌린 이형종이 몰려와도 다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다른 고난도의 미궁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은 못 한다. 전력을 낼 때와 탐색 할 때를 나눠 쓸 활이 필요하다.
안느는 벼락에 터져 죽은 호브의 시체 파편이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장면에 작게 감탄했다.
=그보다 려강이 활 솜씨가 백발백중이네. 활 연습 많이 했나봐?=
=네! 쉴 때면 아영이 가르쳐준 안력 단련 훈련을 계속했어요. 사법도 계속 연습했고요.=
=안력 단련? 그런 것도 있어?=
안느의 질문에 망토로 울긋불긋한 가죽 갑옷을 가린 아영이 안력 훈련의 중요성과 방법을 이야기해준다.
=궁사가 갖춰야 할 덕목은 힘과 안력. 그중에서도 안력임다.=
어떤 활을 쥐어도 조금의 떨림도 없이 시위를 당길 힘은 근력 훈련으로 쉽게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적을 정확히 구분하고 찰나의 빈틈도 놓치지 않는 눈썰미, 안력眼力은 오인 사격을 방지하고 아군의 등을 맞추는 일을 낮춰준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안력은 반드시 극한까지 연마해야함다.=
=시력을 훈련으로 단련할 수 있어?=
=시력이 아니고 안력이요!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방식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세는 거죠. 활엽수 말고 침엽수요.=
=……나뭇잎?=
=처음에는 나뭇가지 하나에 달린걸 세는 데서 시작함다. 그리고 차츰차츰 숫자를 늘려서 종래에는 나무 한 그루를 눈 깜짝할 사이에 파악하는 걸 목표로 하고요.=
잠깐, 눈 깜빡이는 데는 0.1초도 안 걸리는데 그 시간에 나무 한 그루를 전부 읽어야 한다고?
안느와 이실리테가 황당해하니 아영이 자부심이 느껴지는 얼굴을 내비쳤다.
=역대 카락스의 암살자 중 신궁이라 불린 전설적인 송곳니는 5초만 주면 숲의 나뭇잎을 전부 셈할 수 있었다고 함다. 거짓이나 과장은 역사에 기록하는 걸 절대 금지하니 사실이라고 믿고 있슴다.=
=으, 음. 하긴…… 몇 대 전 메리아놀의 검신으로 추앙받던 분은 벼락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치는 그 과정을 수백 장의 그림을 천천히 넘기는 것처럼 인지하셨다고 하니까, 그 연장선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진 않아.=
그렇다 해도 말처럼 쉬운 게 아닌 거로 보였지만, 백려강의 의욕은 그런 신궁이 되는 것을 목표로 결의한 수준이라 안느는 더 말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는 의욕에 찬물을 끼얹기 마련이니까.
휙- 틱, 탁—
그러는 중에도 아영이 집어던진 작은 조약돌에 하찮은 부비트랩이 발동한다.
끝에 돌멩이를 박아넣어 한껏 휘어놓은 나뭇가지라던가, 밟으면 발목을 잡아당겨 나무 위로 끌어당기는 함정이라던가.
재주도 좋게 지나가야 하는 길목의 함정을 30m 떨어진 곳에서 발동시키는 것은 그녀의 함정술 수준을 알려주는 대목.
덕분에 지하 5층, 2계층으로 멈추는 일 없이 내려온 환인은 백려강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소리는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화살을 쏴라. 저런 지대 높은 장소에 오흄 저격수가 있을 수 있으니 염두에 두도록 하고.”
꽈르르릉—!
=네, 오라버니.=
번개 화살을 쏘아 반쯤 부서진 망루를 날려버린 백려강이 생긋 웃는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돼지 대가리인 오흄과 하이에나 대가리인 그눌이 컹컹푸취익 소리를 내며 몰려왔다.
몰려온 이형종들은 환인이 손 쓸 필요도 없었다.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 세 자루가 허공을 수놓으며 닿는 이형종을 말 그대로 토막 쳐버리고 백려강의 유리텔도 우렛소리를 연이어 내뿜으며 돼지 통구이와 하이에나 튀김으로 만들어버린다.
=으허악!?=
중간에는 하마터면 살인이 벌어질 뻔하기도 했다.
이기어검술처럼 허공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다중 검기가 우렛소리에 이끌린 모험가를 하마터면 베어버릴 뻔한 것.
“괜찮습니까.”
바로 코앞까지 빛의 검이 들이 밀어져 주저앉았던 고슴도치과의 루크랑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는 넙죽넙죽 허리를 숙인다.
=하, 함부로 다가와서 죄송합니닷!!=
=이 멍청아, 그러니까 소리 무시하자고 했잖아……!=
=미친년아…! 희귀 괴물이 나타나서 다른 모험가가 곤경에 처했을 수 있으니까 돕자는데 너도 찬성했으면서…!=
서로 투닥거리며 도망가는 모험가들.
비슷한 장면은 이후에도 몇 번 더 펼쳐졌다. 차이점이라면 조금 더 주의하게 된 이실리테가 더욱 정교해진 어검술을 펼쳐 모험가를 공격할뻔한 일은 더 없어졌다는 것.
그렇게 2계층에 피의 융단을 만들며 고성 앞에 도착했을 때는 미궁에 입장하고 4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이었다.
환인은 자신을 알아보곤 뻣뻣해진 갈색 멧돼지 머리의 남자에게 살짝 목례하고 광장 앞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단숨에 모여들었다.
몇 시간 전부터 울려 퍼지던 우렛소리를 그들도 들은 듯, 긴장감이 가득한 표정.
하지만 그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채 10초가 걸리지 않았다.
=야, 저기 봐….=
=……헉.=
=저, 앞에 저 사람 요즘 그…….=
=미친놈아…! 지금 누구한테 손가락질이야…!=
광장에 머무르던 사람들의 뜨악한 시선이 전부 날아드는 와중, 저번처럼 광장 분수 근처에서 키가 높은 의자에 앉아 쉬던 플라비우스족 기사 네 명은 환인을 발견하곤 눈매가 찢어질 듯이 부릅떴다가 후다닥 달려와 환인의 앞에 부복했다.
=영도 에쉬누르의 성제 예하를 뵙습니다!!=
=영도 에쉬누르의 성제 예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미궁 안에서 이런 예의는 과합니다.”
=시, 실례했습니다!=
누가 봐도 환인에게 과하게 겁먹고 긴장한 모습이다.
자존심이 저 하늘의 구름만큼이나 높은 기사들의 반응에 광장 주변의 사람들은 슬그머니 노점을 접거나 해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고, 간이주점이나 매음굴 근처의 사람들은 그런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플라비우스족 기사들의 태도 때문에 덩달아 환인을 위험 요소로 여기게 된 반응이다.
=저 기사들이 왜 저렇게 도령한테 벌벌 떠는 거야?=
=제2 천공기사단 소속 기사라서 그럴검다. 오른쪽 견장에 날개 한 쌍이 교차되어있죠? 저게 제2 천공기사단의 상징이거든요.=
=아하.=
뒤에서 도령을 위험분자니 뭐니 헛소리한 백작의 부하였단 말이지. 그럼 두려워하는 게 당연하지.
어느새 텅빈 광장에서 환인은 바짝 얼어 열중쉬어 자세를 한 기사들에게 물었다.
“아드우리 공작님의 연락을 받으셨습니까.”
=옙! 미궁 6계층의 견문을 위해 방문하신다는 연락을 숙지하였습니다!=
“그러면 6계층으로 곧장 향하고자 하니, 길 안내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성제님을 6계층 기사단 병력 주둔지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기사들의 군기가 가득한 태도에 환인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가시죠.”
=옙!!=
환인이 굳이 기사들을 데려가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을 생각해보면 6계층으로 이동 도중 그 근방에서 훈련을 목적으로 전투 중인 기사들, 병사들과 마주칠 수 있다.
그들에게 굳이 입 아프게 떠들어 신분을 증명하기보단 이 기사들을 데려가는 게 편리하기 때문.
이를테면 생체 통행증이다.
물론 이들이 밖으로 나와 휴식 중인 기사들이든, 다른 모종의 이유로 대기 중이든 환인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자신에게 그 사유를 말하고 양해를 구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중요한 용무는 없다고 봐도 되지 않나.
톡톡-
선행하는 기사 넷의 뒤를 따라가며 가슴 안주머니 쪽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자 안쪽에서도 톡톡, 가슴을 건드리는 신호가 돌아온다.
이제 불시의 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환인은 약간 마음을 놓으며 여자친구들과 함께 고성 입구를 통과했다.
그런 환인의 눈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찬란한 황금빛의 아우라에 뒤덮여 그다지 표시는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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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시베리아 기압 큰형님들 올해는 일 안하시나봅니다.. 얼어 뒤ㅣㅈ겠네ㄷㄷ
됵자님들도 감기 조심하세요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