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10화 (610/813)

609 하늘 도시 팔라툼

백려강과 아영의 술법 함정 해체 습득을 기다리며 휴식 겸 자료 조사 및 밀린 일 처리를 하다 보니 10일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크레아=닐비, 비나=루에나의 간절한 바람에 천공성에 다녀오기도 했고 중간중간 방문객이 찾아온 덕분이었다.

방문객이란 펠드릭스 가문의 망나니 후계자에게 벌어진 일과, 천왕궁의 주인께서 무척이나 건강해지신 중대 소식이 퍼져나가며 그 속에 어느 고귀한 방문자가 있단 소문이 알려져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오는 인물들이었다.

주로 상급 백작 이상의 고위, 최고위 귀족이었으며…….

=그러면 훗날 영도에서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성제 예하.=

“저는 그저 방랑자일 따름입니다. 저를 기다리지 마시고 샤스라 영성을 도와 영도의 미래를 함께 꾸려가 주십시오.”

=분부대로 하겠사오나, 성제 예하께서 돌아오실 날 또한 손꼽아 기다리겠사옵니다.=

환인이 머물고 있단 소식에 찾아온 성불행, 순례행 중인 영혼사와 상급 영혼사들이었다.

어느 쪽도 허투루 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쪽을 찾아온 영혼사와 상급 영혼사는 이를테면 같은 그룹 내 산하 부서 직원들이다.

젊은 나이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굵직굵직하고 큼직한 사건을 연이어 해결하며 임원까지 순식간에 승진한데다 회장, 부사장단 전원과 인맥을 맺은 전설의 사원이 근처에 있다면 누구라도 와서 인사하지 않을까.

그런 영혼사들은 그저 만나서 차 한잔하고 돌려보내면 된다.

차 한잔하는데 거부감도 없다. 영혼력의 안정을 위해, 달리다 자빠지는 바람에 자폭해서 죽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영기와 혼의 파편 수집을 보류하고 있어 거의 유기하고 있는 팔라툼 성불행을 그들이 대신해주고 있으니까.

한가득 예의를 갖춘 이들과 10분 정도 담소하는 것은 이미지 관리와 인맥 개선에도 도움 되는 일이니, 사양할 건 없다.

문제는 귀족 측.

팔라툼의 최고위 귀족들은 체면과 명예도 벗어던지고 당사자가 직접 찾아왔다.

히스론드의 작위 체계는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 오등작을 쓰고 있다. 후작과 백작은 상중하 3단계를 더 도입해 11급으로 나누고 있지만, 기틀은 오등작과 동일하다.

그리고 환인을 찾는 이들은 상급 백작에서부터 상급 후작까지.

팔라툼에서 다 아는 거대 귀족이 직접 바쁜 걸음을 했는데 막무가내로 돌려보낼 수 없다. 그랬다간 팔라툼 자체를 우습게 여기거나 업신여긴다는 소문이 퍼질 수 있으니까.

이 때문에 환인은 아우라를 발현, 간단한 차 한 잔을 대접하고 평온의 파동을 펼쳐준 뒤 상담을 빙자해 막대한 기부금을 받아 챙겼다.

1인당 상급 백작급은 50금화. 후작급은 하급 후작일 경우 100금화, 중급은 150금화, 상급은 200금화 상당의 금액이다.

고위로 올라갈수록 귀족의 숫자는 적어지기에 환인이 만난 귀족은 상급 백작부터 상급 후작까지 총 여덟 명뿐. 그런데도 모인 기부금이 1050금화였다.

거실의 탁자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를 본 여자들이 기막혀하고 허무해 한다.

=진짜 미친 사람들이네. 차 한잔의 대가로 이만한 거금의 기부금을 투척하다니…….=

=안느 언니. 저는 정보 수집 활동할 때 5은화를 벌기 위해서 진짜 한 달 동안 뼈 빠지게 일했었거든요? 그랬는데 이걸 보니까 뭔가 허무해지고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져요…….=

쫘라라랑, 짤그랑.

아영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금화가 쇳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니 백려강이 살포시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인다.

=아영도 참……. 오라버니께서는 위로 대성녀님 한 분만 계시는 성제님이시잖아. 한 나라의 국사무쌍 정도 되는 분과 차 한잔 마시는데 200금화면 합리적인 금액이야.=

백려강의 설명에 아영은 빵이 없다면 케이크를 먹으란 소릴 들은 굶주린 서민의 표정을 지었다.

대상이 없는 레볼루션을 일으키고도 남을법한 아영의 표정에 백려강은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걸 옆에서 구경한 유르파가 쿡쿡 웃으며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려강 아가씨? 그렇게 말하면 아영이의 정의로운 암살자의 피가 끓잖니.=

=아?=

=아영아, 카락스의 송곳니에게 의뢰하기 위해서는 알선 비용부터 발생하지?=

=그렇죠. 아무 의뢰나 안 받으니까요. 일정 횟수 이상을 의뢰해서 신뢰도를 높여야 하고 예치금도 넣어놓아야 하고 신분도 확실해야 하죠. 그에 걸맞은 의뢰금도 있어야 하고요.=

=귀족들이 선뜻 내놓고 가는 건 그런 알선 비용인 셈이에요. 팔라툼 내에서 정치적인 입장을 확립하기 위한 비용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오…….=

이해한 얼굴로 감탄하는 아영과 달리 이실리테가 아직 이해를 못 한 듯해 유르파는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겨우 얼굴을 트기 위해 저런 수백 닢의 금화를 놓고 가는 건 사치와 낭비, 허세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니야.=

상급 백작부터 멀리서나마 닐비나 천왕을 뵐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그리고 닐비나는 환인을 은인이자 멋지고 대단한 형, 오빠로 여기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다른 귀족들은 전부 닐비나 천왕 폐하께 큰 은혜를 입힌 성제 예하를 만나 담소를 나누고 축복을 받고 기부금까지 드렸어. 그런데 자신만 그러지 못했네?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 거 같아?=

=……좀 과장 보태면 천왕 폐하를 향한 충정을 의심받을 수 있는 거겠죠.=

기부금은 폐하의 은인인 성제님께 드리는 감사 인사이자 폐하께 자신이 이렇게나 국가를, 폐하를 신경을 쓰고 충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척도가 된다.

=집 앞을 오가는 귀족 마차가 갑자기 많아진 이유가 그거네요. 중급 백작 이하 귀족들은 함부로 오빠한테 만나자고 하거나 찾아볼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식으로라도 만나서 인맥을 맺으려고요.=

=그 말대로야. 아랫것들이 누리는 문화는 천하다고 해서 가까이하지도 않는 고고한 자들이 고위 귀족이거든. 그런 고귀한 자신들이 적지 않은 기부금을 내고 직접 방문해 만난 성제를 감히 하급 귀족 따위가?=

유르파의 모방이라 믿기 어려운 거만하고 귀족적인 몸짓과 흉내에 다른 여자들은 순간 굳어서 눈만 동그랗게 뜬다.

=……이렇게 되는 순간 귀족으로서 완전히 끝장나버리는 거야. 고위 귀족의 눈 밖에 나면 더는 그 도시에서 지낼 수 없게 되거든. 아무튼 이런 정치적인 이유로 고위 귀족들이 금화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자기랑 차 한잔하는 거지. 이제 이해되니?=

=음. 아무튼 오빠는 그런 분들하고 어울리는 게 마땅한 분이라는 거네요.=

=…….=

=음…….=

아영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미묘해진다.

전 왕족 출신부터 밑바닥 도적이나 암살자 출신까지. 신분은 각자 다르지만 다들 자신의 실력에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고 자신감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의 능력이 상기될 때마다 말 못 할 조바심이나 안달 같은 게 느껴진다.

단적으로 지금 테이블에 쌓여있는 천여 개가 넘는 금화만 보아도 절실히 와 닿지 않는가.

자고로 돈이 그 사람의 신분과 가치를 가장 잘 증명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따르는 남자는 고작 몇 분 담소를 나누고 차를 마시기 위해 금화 수십에서 수백 닢을 내야 하는 사람. 돈이 있어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들은?

=자자~. 다들 심각한 표정은 그만하고~ 자기의 곁에 있기에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좀 더 노력하면 될 일이니까 부담 갖지 말자?=

유르파는 연륜에서 오는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여자아이들의 정신을 환기했다.

향상심을 위한 분위기는 가끔 있어 줘야 기름칠을 한 기계처럼 파티가 매끄럽게 돌아가고 유연하게 성장하는 법이다.

하지만 요즘 근래에 들어 이런 분위기가 너무 자주 잡힌다.

사람의 감정이란 오묘해서 이런 식으로 부담감이 생기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고 실수를 저지르거나 제 실력을 낼 수 없는 일이 생기기 마련.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 것도 한순간이라고 하지 않나. 부정적인 감정에 자주 휩싸이면 사람의 기질마저 변할 가능성이 있으니 이런 분위기는 바로바로 해소하는게 중요하다.

유르파가 일부러 주제를 바꿔 백려강과 아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영이랑 려강 아가씨는 술식 함정학 잘 마무리했니?=

=옙. 지금 당장 잊혀진 옛 도시 미궁으로 들어가도 괜찮슴다. 저, 그런데…….=

=응?=

=오빠 말임다. 저랑 려강이 필기해놓은 함정학 개요서를 읽으시더니 금방 자기 것으로 만드신 거 같던데요……. 이러면 저나 려강이 배운 건 의미가 없는 게…….=

=왕이라고 모든 걸 다 하는 건 아니잖아? 잘하는 애들을 뽑아서 일을 맡기고, 더욱 중요한 일을 하는 게 왕이지.=

=……아.=

유르파가 뭘 말하는지 바로 깨달은 아영의 눈에 미혹이 그제야 걷힌다. 그리고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다른 여자들도 아영의 반응에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왜, 왜 웃으심까?=

=아냐. 우리만 한심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구나 해서.=

=……??=

안느가 킥킥 웃으며 대답해주었지만, 아영은 뭘 말하는지 몰라서 고개를 기울였다.

파티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그녀 처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방금 자신이 겪은 열등감을 다들 최소 한 번 이상 거쳤다는 걸 말이다.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언니들에게서 느껴지던 약간 공허한 분위기가 사라졌으니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띤 아영은 답삭 유르파의 어깨에 매달려 아양을 부렸다.

=그보단 유르파 언니, 수목화 멈추는 방법 빨리 찾아주시면 안 됩니까요?=

=으응?=

=매일 밤 언니들하고 오빠하고 사랑 나누는 소리를 몇 시간씩 듣기만 하는 것도 고문이라고요~. 한 번도 안 먹어봤으면 몰라. 이미 그 맛을 다 알고 있는데, 힝.=

풉, 큭큭큭.

=특히 려강이가 너무해요!=

=나?=

=어떻게 너무한데?=

유르파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묻자 큰언니한테 일러바치는 여동생처럼 동그란 눈의 백려강을 손가락질했다.

=오빠한테 잔뜩 안긴 뒤에 보란 듯이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들어오는데 그 냄새 때문에 진짜 환장할 지경이에요. 개박하 냄새 맡은 고양이처럼 되어버린다고요!=

=아, 그래서 내가 방으로 돌아오면 아영이가 이불 밑에서 자위하느라 들썩였구나?=

=……자, 자자자위라니! 너, 너어 귀족 영애가 그런 말 써도 돼?!=

=뭐 어때. 나도 지금은 평범한 여자앤데.=

=……!=

교양있게 후후 웃는 그 모습이 무척 얄미워 아영은 목표를 백려강으로 바꾸고 그녀를 덮쳤다.

따스한 우유 냄새가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앙앙 깨물고 한 손으로 다 안 잡혀 흘러넘치는 가슴을 마구마구 주무른다.

=꺅?!=

=넌 오빠한테 매일 사랑받으니까 여유가 넘치는거지! 이 음란한 가슴으로, 응?! 오빨 어떻게 유혹한 거야!=

지난 2주간 함께 지내며 사이가 무척 가까워져 스스럼없이 장난치는 모습에 여자들이 웃음 짓고 있을 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며 눈이 아프지 않은 황금빛 오로라를 몸에 두른 환인이 들어섰다.

“…….”

=…….=

=…….=

양탄자 위에 서로 얽혀있던 백려강과 아영이 뻘쭘한 표정으로 일어서고, 환인은 피식 웃으며 의자로 걸어가 앉으면서 말했다.

“이실리테, 커피 한 잔 부탁하지.”

=저… 주인님. 요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고 계시는 거 같아요. 오늘만 다섯 잔에 10일 동안 76잔을 드셨는데…….=

품에서 수첩을 꺼내 들던 환인은 멈칫, 걱정하는 표정의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

그걸 세고 있었나. 확실히 방문자를 받으며 커피를 많이 마시긴 했지. 이전에는 하루에 두 잔 정도였으니까.

“그럼 다른 거로 부탁하지.”

=네, 홍차를 내오겠습니다.=

자신의 걱정이 통해 살짝 기쁜 얼굴로 다도실에 들어가는 이실리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리모암의 강력 효과를 종료한 환인은 수첩을 펴 오늘 만난 인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안느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묻는다.

=도령. 영혼사님들은 돌아가셨어?=

“그래. 이제 서주산으로 넘어가 성불행을 진행한 뒤 성도로 복귀할 거라더군.”

=영혼사님들이 많이 찾아오시네요. 역시 승령천제가 다가와서 그럴까요.=

도시가 크면 클수록 승령천제 당일날 한 번에 모든 혼을 성불시키기 어려워 사전에 미리미리 성불을 진행해두는 편이다.

그게 주도 정도가 되면 몇 달 전부터 영혼사들이 꾸준히 찾아와 성불행을 진행하는 편.

[그렇지 않아도 근래에 세계정세가 불안하였는데 거인들이 찾아와 주변에 보금자리를 꾸려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오.]

대성녀와 통신 중에 들었던 이야기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영혼사가 성불행을 위해 영도를 떠나면 전속 영혼 기사가 없는 영혼사에게는 지역순행기관 소속의 예비 영혼 기사들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올해는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승령천제.

전속 영혼 기사가 있는 영혼사들은 물론이고 아직 없는 영혼사들도 대거 영도를 떠나 대륙 전체로 퍼져나가는 중이다.

덩달아 영도와 아랫도시를 수호하던 영혼 기사들도 대거 자리를 비웠다.

4년마다 찾아오는 일이라지만, 올해는 유독 심각한 사고나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영도의 전투 병력이 다수 자리를 비워 발생한 무력의 공백이 유달리 크게 다가왔는데, 그런 공백을 이번에는 거인들이 채워준 것.

“승령천제는 두 달 뒤인가……. 아쉽지만, 이번에는 보지 못하겠군.”

이실리테가 내린 루비처럼 붉은 홍차를 들며 중얼거리자 백려강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아영이 의외라며 물었다.

=승령천제 전에 팔라툼을 떠나시려고요?=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앗, 아뇨. 승령천제는 전 세계적인 축제 같은 거라서요. 특히 주도쯤 되면 엄청 화려하고 볼게 많으니까 구경하고 떠나시려나 했거든요. 팔라툼 시민들도 승령천제를 준비한다고 조금씩 축제 분위기에 들고 있고요.=

=잊혀진 옛 도시 미궁도 아직 답파 안 했고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도 안 들어가 봤잖아. 둘 다 끝까지 가본다 치면 두 달 정도 걸리지 않을까 했지.=

확실히 안느의 판단이 일반적이다.

미궁을 탐사한다면 미궁 하나당 한 달을 예정하기 마련이고, 두 미궁 사이 준비 시간을 생각한다면 두 달쯤은 휙 지나가니까.

하지만…….

“승령천제 때까지 머무른다 해도 평범한 관광은 무리겠지.”

=앗.=

=아.=

이제 알아차렸나.

승령천제까지 머무르면 천왕궁은 틀림없이 자신과 여자친구들을 초대하려 들 거다. 그런 영혼사의 이벤트에 성제인 자신과 영혼 기사인 그녀들을 왕성이 내버려 둘 리 없으니.

환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렇게 초대된다면 방문하고 기부금을 낸 귀족들과 그러지 못한 귀족들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는 건 필연이다. 그리고 그건 곧 새로운 파벌을 암시하지.”

거기에 휘말린다면 성가신 일은 물론, 승령천제 때 특정 국가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히스론드와 관계성이 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이 점은 타국 방문 시에 이해관계로 인한 마찰까지 발생할 수 있는 안건이다.

=확실히 도령 추측대로야. 다른 나라 수뇌부와 친한 영혼사는 좀 거리껴지니까.=

=이전에 오라버니께서 천왕궁을 드나드신 것은 닐비나 폐하의 치료라는 명목이 있지만, 승령천제는 그런 명목이나 핑계도 통하지 않겠죠.=

왕족과 귀족 출신인 안느와 백려강이 가장 먼저 환인의 권력 암투에 관한 설명을 납득한다.

삣.

유르파는 발치에 실루가 닿는 걸 느끼곤 품에 안아 들며 물었다.

=그러면 자기는 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있니?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은 건너뛸 거야?=

“기왕이면 여러 미궁을 확인하고 싶으니까요.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은 6계층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은 일주일 정도 탐사하는 걸로 정하겠습니다. 계획대로라면 한 달로 충분합니다.”

=6계층? 마지막 계층은 미궁 관리 안정성 측면에서 안 들여보내잖아.=

“며칠 전 천공성에서 아드우리 공작과 마주쳤었는데 그에게서 권한을 허가받았습니다. 심핵과 중핵은 건드리지 않고 멀리서 구경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내려주더군요. 그리고…….”

수첩을 펼친 환인은 빼곡히 채워진 전반부를 파라락 넘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두께의 수첩도 어느덧 절반가량 채워졌다. 이제 서서히 채워지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데, 마지막을 채워 넣는 시점에 지구로 돌아갈 수 있겠지.

……아니면 이 세계에 묻히거나.

환인은 수첩 내용을 복습하듯 넘기다가 영혼의 눈을 켜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두 눈을 여자친구들에게 향했다.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을 가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미궁의 내부 생태를 확인하는 것. 미궁 마지막 계층의 심핵을 그저 보기만 하는 것뿐이니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은 그 구조가 특이해 6계층까지 가는 것도 멀지 않다.

여느 미궁처럼 24층을 내려가는 게 아니라 4층을 내려가 단층으로 이루어진 2계층에 진입, 곧장 4계층인 고성으로 입장한 뒤 5계층인 안쪽의 왕궁 구역을 패스하고 6계층인 고성 상층부, 왕족 거주구로 곧장 들어간다.

오래 걸린다 해도 일주일이면 넉넉하겠지. 술법 함정의 특성 파악은 가는 길에 겸사겸사 해결하고.

수첩을 구경하기 위해 주변으로 모여든 여자친구들에게 수첩에 담긴 내용을 바탕으로 최단 거리 루트를 설명한 환인은 탁— 수첩을 접으며 말했다.

“그 뒤에는 밀려오는 구름의 바다 미궁을 구경한 뒤 팔라툼을 뜬다. 질문 있나.”

=팔라툼을 뜬 뒤에는 어느 루트로 가실 겁니까? 히스론드 북쪽? 벨티칼 남쪽?=

자신의 수첩에 호기심을 가득 드러내는 아영에게 대답해주려던 환인은 문득 여자친구들의 각종 부드럽고 달콤하고 포근한 체취가 가득한 걸 느꼈다.

다섯 종류의 매혹적이면서도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향기. 조향을 해서 향수로 만들어 계속 맡고 싶은 향기다.

“……덥고 습한 곳은 피하고 싶으니 히스론드 북쪽의 이블팩션 접경지로 이동한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에 잠기는 아영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잊혀진 옛 도시 미궁에 다시 들어간다. 이 시간 이후로 방문객은 받지 않을 테니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모두 돌려보내고 내일 입장을 준비해 정신을 가다듬도록.”

=네, 주인님.=

=엉.=

=옙!=

……방문객을 받지 않겠다 했지만, 새빨간 노을이 세상을 불태우고 있을 때 찾아온 방문객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선생님을 뵙습니다.=

눈앞에서 귀족 집안 여식처럼 새카만 하프 드레스, 무릎 아래까지만 가리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고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6급 빛술사 소녀.

“……놀랍군.”

환인은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어딜 보아도 귀족 가문의 영애로밖에 안 보인다. 싹수없다는 표현도 모자란 남자일 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자태.

환인의 감탄에 어딘가 덧없는 분위기를 풍기던 리민이 살짝 미소짓는다.

“지난 고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6급에 오른 건가. 등급이 오르며 정신적인 외상도 치료되었고.”

=역시 선생님의 눈은 날카로우시네요.=

=어, 그…… 어음.=

안느가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에 리민은 사뿐사뿐 안느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팔라툼을 떠나기 전에 안느 님에게 감사와 사과를 드리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으응? 나, 나한테?=

당황이 역력한 안느의 표정에 리민이 덧없고 쓸쓸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버릇없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제게…… 사감 없이 대해주신 분은 안느 님뿐이셨으니까요. 안느 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행동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

여자들의 멍한 시선, 어이없어하는 시선에도 리민은 아무 내색 없이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

=선생님, 안느 님. 제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두 분 덕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난 버릇없던 제 행동을 여러분께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어…… 응. 사과 받아들일게.=

=…….=

=으음.=

환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실리테와 혼란에 빠진 아영을 힐끔 보곤 리민에게 물었다.

“재산을 정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기반을 모두 처분하고 시골 도시로 떠나는 건가.”

=네. 할아버지의 바람에따라 아버님의 고향으로 떠나는 길입니다.=

“그런가.”

=잠깐! 팔라툼을 떠난다고? 왜?=

=좋게 표현한다면 귀향이겠네요.=

환인은 안느의 어깨를 잡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그곳에서 건강히 지내도록. 네 삶에 평온이 가득하길 자애신님께 빌겠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앞날에 하늘신님의 가호가 가득하시길.=

리민은 새카만 귀족 영애 모자를 다시 쓰고 그에게 다소곳한 인사를 올린 뒤 왔을 때처럼 조용히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배웅한다고 따라 나온 여자친구들이 점차 작아져 가는 마차를 보며 놀랍다는 듯이 떠든다.

=우와 뭐야? 리민이라는 이름을 못 들었으면 딴사람으로 착각했을 정돈데?=

=저렇게 팔라툼을 떠난다니, 귀향이 아니라 귀양이네.=

=귀양이라니, 어째서인가요?=

=리민이 저렇게 바뀌었어도 꼬리표는 영원히 떼어지지 않을 거야. 개망나니 남자였던 여자. 이런 인식표가 붙은 여자에게 가뜩이나 자존심 강한 플라비우스족이 어떻게 대할까?=

유르파의 설명에 여자들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지른다.

=펠드릭스 백작도 그거 때문에 결심하지 않았을까? 손녀가 된 손자가 남은 삶을 평온하게 지낼 수 있게 말이야.=

=15살의 6급 빛술사면 시골 도시에서는 영주가 맨발로 뛰쳐나와 맞이할 만큼 엄청난 전력임다. 펠드릭스 백작의 재산을 생각하면 팔라툼에서 눈치 보고 손가락질받으며 살 바에 멀리 떨어진 도시로 가서 사는 게 백배 낫죠.=

=하긴…….=

“…….”

여자 친구들의 대화 사이로 영혼의 눈이 켜진 환인의 시야에 하나의 환영이 스치고 지나갔다.

16살 소녀 모습의 리민이 조막만 한 아기를 안은 채 크레아=닐비, 비나=루에나와 함께 있는 장면.

흡사 다른 세계의 시간선이 눈앞에 구성된 듯한 환상은 잠시 후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황금빛 눈동자는 점차 어두워져 가는 도로를 따라 나아가는 리민의 마차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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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허허. 이상성욕 선비님들이 왜이렇게 많으실꼬..

비상이 애껴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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