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09화 (609/813)

608 하늘 도시 팔라툼

=그럴, 그럴 리가. 그럴 리가…….=

혼란이 극에 달한 탁한 눈빛.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거칠어져 엉망이 된 호흡.

환인은 고령의 노인이 피해야 할 모든 위험 요소를 드러내는 디전=펠드릭스 백작에게 다가가 지팡이를 짚은 그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백작님. 진정하십시오.”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그 아이는 죽었거늘, 그 시신마저 확인했거늘……!=

“…….”

자신이 몸에 손을 댄 것도 인지하지 못한 모습에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평온의 파동을 국소적으로 펼쳤다.

크게 펼치면 리민에게도 영향이 갈 테니까.

작지만 짙게 퍼져나가는 회백색 빛의 파동. 평온의 파동에 잠시 휘감겼던 디전=펠드릭스 백작은 =허억!= 탄식에 가까운 탁한 숨을 크게 내쉬며 경련 같은 몸짓을 멈추었다.

혼탁해졌던 눈빛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몸의 떨림도 사라졌다.

백작은 겨우 진정한 모습으로 상황을 파악하곤 환인에게 작게 목례하며 인사했다.

=미안, 미안하오. 늙은이가 추태를…… 부렸군.=

“아닙니다.”

환인은 자신을 올려다보며 사과하는 백작에게서 모종의 사연을 읽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를 가까운 소파로 부축해준다.

하지만 백작은 그것을 거부하고 이 상황에도 멍한 시선으로 오도카니 앉아있는 리민을 가리키며 환인에게 물었다.

=성제, 저 아이는 누구요? 어디서 데려왔기에…… 죽은 내 딸과 저리도 닮은 거요?=

그리고 환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리민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이길래, 어찌…… 어찌 아루나와 그렇게 닮은 거지?=

=…….=

하지만 리민은 대답도, 반응도 하지 않고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간 있었던 일로 피폐해지다 못해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머리도, 마음도 굳게 문을 닫아버린 모습.

집으로 돌아와 안느에게 씻겨질 때부터 전조가 있었지만, 지난 밤사이 상태가 심각해져 지금은 그 어떤 외부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고딕 로리타 드레스를 입혀질 때에도, 쿠핀의 등에서 공주님 타기로 안느의 품에 안겨 여기까지 올 때도 그 어떤 반항도, 반응도 하지 않았을 정도.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환인은 백작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줘 그를 강제로 소파에 데려가 앉혔다.

무례의 극에 달한 행동이지만 백작은 환인에게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이 굉장히 단호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귀에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흘러 들어갔다.

“백작님. 저 소녀는 백작님의 손주입니다.”

=……바, 방금 뭐라고……?=

“이틀 전 아침, 리민이 절 찾아왔을 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패악질로 시작된 첫 만남부터 리민이 잊혀진 옛 도시 미궁에서 술법 함정을 함부로 건드려 여자가 된 경위까지.

=…….=

“성격의 교정은 불가능했지만, 자제심과 절제심의 중요성을 인지시켜 사회생활을 위한 기본적이고도 기초적인 마음가짐은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백작께서도 납득하실 정도의 결과로 의뢰는 마무리 되었겠지요. 그러나…….”

인과응보라고 하여야 할지. 당사자의 여성을 향한 차별과 모욕 발언이 자신의 영혼 기사들에게 향했고, 성격적 마찰을 빚은 끝에 리민이 멋대로 함정을 건드리게 되어 저런 모습이 되었다 설명을 하자 백작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럴 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모습에 짙은 시름이 드러난다.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에는 저기에 플뢰족, 그것도 땅신 교단의 고위 신분이 틀림없을 영혼 기사가 있다.

또한 리민의 현재 외모는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물려받았다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

백작은 리민을 침통하고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행동에 환인과 안느는 조용히 기다려주었고, 약 10분 뒤 백작은 이전과 달리 생기와 활력이 드러나는 얼굴로 몸을 일으켜 환인과 안느에게 허리를 작게 숙였다.

=이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 손주의 훈육에 힘을 기울여주어 감사드리오. 그리고 안느 경, 손주의 무례와 결례를 이 늙은이도 사과드리겠소.=

=리민한테 직접 사과받았으니까 이제 신경 안 써요. 백작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 쓰시지 않으셔도 돼요.=

=그, 그런가. 고마울 따름이군.=

“백작님에게만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녀의 숨겨진 신분은 백작님과 견주어도 결코 아래가 아닙니다. 그녀가 문제 삼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배포가 넓고 도량이 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십시오.”

=음. 명심하지.=

조금 당혹을 드러내지만 의심하는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리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핏줄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딸랑딸랑.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준비해놓았던 그것과 그것들을 이리로 전부 가져오게.=

=예, 주인님.=

벨 소리를 듣고 들어온 하인에게 지시를 내린 백작은 환인에게도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처음 보인 모습에 다소 놀랐을 거로 생각하오.=

“부인 되시는 분, 혹은 따님 되시는 분과 흡사하였나 봅니다.”

=역시 통찰력이 뛰어나시군. 맞소. 리민의 저 모습은 일찍 가버린 아내와, 그런 아내를 나보다 더 빨리 쫓아가 버린 못난 딸아이와 매우 닮았소. 한순간 살아 돌아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통찰력이라기보단 그가 말과 행동으로 모두 보여주었는데.

환인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백작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리민이…… 저리 여자를 혐오하게 된 것은 이 늙은이의 못난 언행 때문이었소.=

속죄하듯, 참회하듯 회한 어린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백작.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으레 그렇듯 딸과의 반목이었다.

부친이 허락하지 않은 남자와 결혼하려 한 딸.

그리고 부친을 거부하며 집을 뛰쳐나간 딸.

당시에는 리민의 미래 모습이라 할 만큼 제멋대로에 성격마저 엉망진창이던 백작은 당연히 노발대발하며 가문과 자신의 얼굴에 먹칠하는 딸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딸 또한 그의 성미를 이어받았으니, 여자는 부친과 가문을 버리고 남자를 선택하였으며 사이에서 아들 하나만 남긴 채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현명한 성제시라면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시겠지.=

“사랑을 모르고 자라난 리민은 부모, 그것도 제 어미를 탓하는 조부의 언행에 여자들을 혐오하게 되었고 성격 또한 삐뚤어진 것이겠군요.”

=정답이오. 삐뚤어진 나 자신과 손주에게 지적할 간 큰 인물은 곁에 없었소. 그런 상황에 딸과 아내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손주는 능력이 출중하여 자만심까지 생겨났고, 근처에 배우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까지 있었으니 안 좋은 것만 몸에 익힌 것이지…….=

다시 눈을 감았던 백작은 이내 눈을 뜨고 형형한 눈빛을 뿌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다를 것이오. 저 아이가 정상적으로 평범히 살 수 있도록 가문의 노력을 다해 저 아이를 보살필 생각이니까.=

“…….”

=저리된 아이를 두고 이 늙은이는 눈을 감을 수 없소. 최소 저 아이가 평범한 삶을 되찾을 때까지는……. 적어도 죽어 신님의 정원에서 재회할 아내와 딸에게 용서를 구할 자격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소?=

백작은 또다시 환인에게 허리를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누구도 손대려 하지 않은 손주를 훈육하여주어서 정말 고맙소. 이제 이후의 일은 이 늙은이가 알아서 하겠소.=

그 후 하인이 가지고 온 청색 뱀비늘의 가방을 추가 보상이자 선물이라며 안겨준 백작은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있는 리민을 회한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리민의 손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아이만큼은 지키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백작저를 나온 안느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대저택을 돌아보다가 환인에게 물었다.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이게 잘 해결된 걸까……?=

“결과만 보자면 잘된 거겠지.”

백작은 회개하고 뉘우칠 기회를 얻었고 리민은 다시 태어날 기회를 가진 셈이니.

=하지만 리민한테는 안 좋은 일이잖아.=

“본인이 불러들인 재앙이다. 누굴 탓할까.”

그리 대답한 환인도 조금 궁금하긴 했다.

지구에는 급성 스트레스 장애로 나타난 해리성 증상에 대한 체계적인 치료 과정이 있다. 그걸 쓴다면 리민의 정신 치료를 진행할 수 있겠지. 그 후 리민과 관계 개선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니오네브레스에 정신과는 없으며 리민의 저런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성술이나 사이비에 기대야 한다.

과연 백작은 리민에게 어떤 수단을 쓸까.

‘어쩌면 유르파와 아영이 말한 것을 실행에 옮길지도 모르지.’

이 세계는 마법적인 힘이 존재하는 세상. 대상의 정신을 완전히 부숴버려 갓 태어난 아기처럼 만드는 방법도 존재한다.

리민은 현재 극도로 정신 공격에 취약해진 상태이니 그런 비술이 쉽게 먹힐 테고…….

=…….=

안느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조금 우울해하는 것 같아 환인은 제 여자친구를 조용히 다독였다.

“오히려 저 상황이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리민의 기존 평판을 생각한다면 정신병을 치료하더라도 여자가 된 이상 평범한 사회생활은 불가능할 테니까.”

=아예 처음부터 여자아이로 키운다는 거네.=

“지금 단계에서는 확신할 수 없지. 다만 확실한 것은…….”

백작은 여자아이, 손녀가 된 리민에게서 아내와 딸을 투영해 애정을 느꼈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의욕이 별로 없던 상태에서 강렬한 생존 욕망을 드러낼 정도로.

여자로서 새 삶을 살게 되든, 조부의 헌신적인 간호에 정신을 차리고 관계가 개선되든…….

“리민에게는 어느 쪽도 나쁠 게 없다. 전자라면 새로운 인생이 될 테고, 후자라면 어차피 바닥인 평판, 새로이 쌓아나가는 것에 조부의 지원이 쏟아질 테니까.”

=마찬가지로 우리한테도 좋고 나쁠 일은 없겠네. 이제 신경 쓸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게 정답이다.

고작 이틀이다. 그 짧은 시간이 인연이 생겨도 얼마나 생길 것인가. 더군다나 리민은 좋은 모습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다.

=……왜 그렇게 끈적한 시선으로 봐?=

“새삼 네가 착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진짜 착하다면 리민을 망가트리려고 이슬이를 구슬리지도 않았을걸? 그 일만 아니었으면 리민이 저렇게 마음을 닫아버리지도 않았을 거고.=

“…….”

환인은 말 없이 작게 웃었다. 그게 착한 편이라는걸 아직 모르는군.

자신이 만약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리민은 지금쯤 생지옥에 빠졌을 것이다. 펠드릭스 백작 또한 연좌제로 엮여 나락으로 떨어졌을테고.

방법? 방법이야 널리고 널렸다. 닐비나 천왕을 말로 구슬리기란 식은죽 먹기이며 테이아무스 섭정이라면 닐비나의 부탁에 여지없이 따르겠지.

아드우리 공작? 정치적으로 몇 다리 엮으면 혼란에 빠트리기란 쉽다. 라드세아, 벨티칼에도 각각 약점을 하나씩 파악했으니 그걸 이용한다면 대혼란까지 벌일 수 있다.

환인이 보기에 진짜 악당은…….

=근데 도령. 방금 생각난 건데 도령의 평온의 파동이면 리민의 저 상태도 호전되지 않을까?=

“…….”

그녀의 질문에 상념을 끊은 환인은 대답없이 작게 미소지어주었다. 그 미소에 안느는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안 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째서일까.

=음, 평온의 파동으로 리민의 정신병을 치료했다면 변수가 많아져서 사태가 더 나빠졌을 수도 있겠네.=

“변수라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리민을 치료하지 않은 이유는 고난과 굴곡을 주기 위해서다. 고난의 시기가 길면 길수록 거기서 깨닫는 것이 있을 테니까.”

겸사겸사 귀찮게 들러붙는 일도 방지할 수 있고.

리민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훈육을 한 인물이 환인이다. 임프린팅 당한 오리 새끼나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결말, 충분히 존재한다.

=하긴…… 고생과 정신적 충격의 밀도가 높다곤 해도 겨우 이틀 시간이었으니까. 게다가 은거하는 기간이 길수록 악의나 악명은 희석되기 마련이고.=

“음.”

세상 만사 돌아가는 일에 뒤숭숭한 것도 많아. 다들 착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에 안느는 앵두같은 입술로 허탈함이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나의 의뢰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환인과 안느는 디전=펠드릭스 백작이 사례라며 주었던 청색 뱀비늘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들어있던 것은 세 가지 물품.

놀랍게도 전부 유물이었다.

번개를 형상화한 활대의 장궁, 벼락활 유리텔. 집에 걸어두면 보호막을 설치해주는 원형 방패 모양의 수호물, 룩소미의 보호장벽.

두 개 다 유르파가 보물처럼 아끼는 유물 도감에 실려있는 이름난 유물이었다.

=마지막은 이거네.=

마지막으로 이동식 주거 공간, 방랑자의 안식처.

유물 도감 책자와 유물을 비교하며 찾던 유르파가 어느 페이지의 한 면을 짚으며 말하자 술식 함정학을 배우고 돌아온 백려강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묻는다.

=집 모양 장난감이 아니라 정말 집인 거예요?=

=응. 위상력을 주입하거나 위상석을 끼워놓으면 집이 거대화해. 반대로 하면 축소되고.=

방랑자의 안식처는 소형화했을 때 무게는 털뭉치 정도에 어지간한 충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내구성을 가졌다.

거기다 위상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수리할 수 있는, 여행자에게 있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유물이다.

=휴대용 주거 공간이란 거네요. 이런 유물도 있다니, 신기해요.=

그녀의 소감에 유르파는 잿빛 원형 방패, 겉면에 천체 문양이 새겨진 수호물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치? 이 수호물하고 이 집하고 세트로 쓸 수 있어. 펠드릭스 백작이 몰랐을 리 없고, 자길 생각해서 일부러 준비한 거겠네.=

보상의 정체에 여자들은 적지 않게 놀랬다.

팔면 작은 마을 정도는 간단히 살 수 있는 게 유물이다. 그런 걸 세 개, 의뢰 선급까지 하면 네 개다.

유르파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던 안느도 놀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백작이 왜 이렇게 챙겨준 걸까?=

“의뢰 결과물을 무척 만족스러워했다는 뜻이겠지. 준비한 것을 전부 가져오라고 한 것 기억나나.”

=아…….=

그럼 결과에 따라 아예 안주거나, 하나씩 늘려줄 생각이었단 건가?

“아무튼, 잘됐군.”

환인은 벼락처럼 샛노란 색감의 벼락활 유리텔을 집어 들어 활시위를 한차례 튕겨보았다.

우르릉—

팅— 하는 소리 대신 조그맣게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

그걸 본 유르파가 설명을 덧붙인다.

=벼락활은 위상력을 밀어 넣으면 말 그대로 화살을 벼락처럼 쏘아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야. 물론 그냥 쏴도 유리텔이 자체적으로 위상력을 포집해서 번개 효과를 줘.=

“확실히 유물다운 기능이군요.”

형태는 벼락을 형상화한 것처럼 구불구불 엉망진창인데 무게 밸런스는 완벽하다.

활의 줌통, 손잡이 중간에 검지를 대고 들어보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완벽한 수평을 이루는 것.

“활은 쓰지 않을 때면 활시위를 풀어놔야 한다고 들었는데, 이건 상관없는 겁니까.”

=응. 소지자의 근력을 올려주고 활시위, 활대의 강도, 탄성 유지가 걸려있어서 활시위를 풀지 않아도 된대.=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벼락활을 한 번 만져볼 수 없을까 설렘과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는 백려강을 향해 내밀었다.

“백려강, 이건 네가 써라.”

=읏……. 오, 오라버니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동과 감격에 눈시울을 붉히며 꾸벅 허리를 숙이는 백려강. 그런 그녀를 다독이고 쓰다듬어주며 축하와 격려를 쏟아내는 여자친구들.

=려강아. 나중에 나도 한 번만 쏴보게 해줘야 해?=

=나도나도!=

안느와 아영의 부탁에 백려강은 수국처럼 청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인은 그런 여자친구들을 지켜보다 이번에는 룩소미의 보호 장벽이라는 이름의 라운드 실드를 집어 들었다.

무게가 묵직하다. 안느가 쓰는 자이언트 타워실드인 성벽의 방패에는 견주지 못하지만, 자이언트 카이트 실드인 광휘의 빛과 비교해도 가볍지 않은 수준.

크기는 몸통을 가리는 수준으로 라운드 실드의 기본 사이즈다.

이번에도 유르파가 기능을 설명해준다.

=룩소미의 보호 방벽은 그냥 방패로 써도 되는 물건이야. 내구 수복은 기본 기능이고 하루에 한 번, 3m 넓이로 대방호 술법을 그냥 펼칠 수 있거든. 대방호는 모든 속성 공격의 피해를 절반 정도로 줄여주는 술법이야.=

“그 외 효과는 없나 보군요.”

그만한 술법은 자신도 쓸 수 있다. 영혼 방패, 그리고 유르파가 만들어주었던 방벽 마도구도 있으니까.

=응. 그런데 땅에 붙은 구조물에 설치하면 보호 방벽이 발생해서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반구형 투명 장벽이 펼쳐져. 기능하는 시간은 무제한이고, 방벽이 공격받으면 우르릉 흔들리면서 알림까지 해준다네.=

“흠……. 안느, 이걸 쓸 생각은 있나.”

환인이 왼팔에 룩소미를 착용한 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물었지만, 안느는 별로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유르파의 젖무덤을 받친채 위아래로 출렁출렁 흔들며 고개를 젓는다.

=대방호가 조금 끌리긴 하는데 위상력으로 비슷한 보호막을 펼칠 수도 있고, 기본 기능은 광휘의 빛이랑 성벽의 방패가 더 좋아서 안 내켜. 이거 봐. 크기도 나한테는 라운드 실드가 아니라 스몰 실드 느낌이지?=

자신에게서 보호 방벽을 받아 가서 착용한 안느가 여자들을 돌아보며 묻는다.

=확실히 그러네.=

=음, 스몰 실드라기보다 언니한테는 버클러 느낌인데요?=

=야! 내가 그 정도로 크진 않거든!=

=갸악! 자, 잘못했슴다!=

망언을 내뱉은 아영이 헤드락으로 응징당하는 가운데 환인은 룩소미와 방랑자의 은신처를 차례대로 아스펜드에 수납했다.

유물 손지갑이라서일까, 어떤 유물은 아공간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무리 없이 둘 다 수납된다.

그 말은 저 청비늘 주머니도 특별한 주머니라는 건가. 환인은 벼락활을 보관하는 데 쓰라며 청비늘 주머니도 백려강에게 넘겨주었다.

아영의 목을 조르다가 풀어준 안느가 조금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방랑자의 은신처는 실제로 한번 보고 싶지만 여기서 써보는 건 무리겠지? 이런 도시에서 설치형 유물을 사용한다는 건 도둑놈들에게 여기 보물이 있다고 알려주는 꼴이니까.=

”그래. 시연은 나중에 길을 떠나면 하도록 하지.“

=방 두 개에 거실 하나, 주방 하나인 단층 건물이라고 하니까 앞으로 야영이 더욱 편해지겠네.=

의뢰 난이도에 비해 과한 보상을 받아 챙긴 느낌이지만, 환인은 명성과 지위로 인해 보상이 늘어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팔라툼을 떠나기 전까지도 리민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거나 하면 그때 조금 은혜를 베풀어주는 정도면 되겠지.

그 후 10일간 환인은 미궁에 다시 들어가지 않고 그간 밀려있던 일감이 쏟아지는 것을 해결했다.

첫 번째로 트라프로넨 영성과 거인들이 영도에 도착했단 연락을 받았다.

거인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영도의 일원으로 합류했고, 대성녀가 미리 준비해둔 지역으로 이동되어 그곳에서 살 장소를 꾸미기 시작했다.

자신을 암살하려 한 둘은 영도의 심문실에 갇혔고,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따라갔던 포플러 센트 순찰대는 영도의 심층부에 구금되었다고.

마지막으로 농법서를 전달받은 대성녀에게 절절한 감사를 잔뜩 받았다.

감사의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팔라툼으로 날아와서 감사의 답례를 하겠다는 걸 막느라 약간 곤혹을 느꼈을 정도였다.

‘신수 기린도 하늘을 날 수 있는 건가.’

……날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긴 하군.

전前 카락스의 암살자들도 영도에 도착했단 소식을 받았다.

대성녀가 직접 암살자들을 맞이해 살 곳을 정해주었다고. 바뀐 이름은 하얀 늑대들이라 칭하기로 했단다.

“하얀 늑대들입니까.”

[그렇소. 카락스의 암살자가 주로 변신하던 형태가 하얀 늑대였기에 이름 붙였다더군. 혹시 마음에 안 드시오? 그러면 엘미느 임시 두령을 불러서 다른 이름으로…….]

“아닙니다. 그 이름으로 결정했다는 것은 회의 끝에 나온 결론일 테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알았소. 하얀 늑대들이 제대로 된 정보 집단으로 자리잡도록 소녀가 돕도록 하지.]

“부탁드립니다.”

영도와 통신이 이루어지고 며칠 뒤, 이번에는 땅신 교단 측의 르아윈=아기오시스 추기경에게 연락이 닿았다.

공식이었기에 표면적으로 오간 대화는 메리아놀에 속한 가문의 암살 건에 대한 것.

르아웬은 심히 유감을 표시하며 자신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대한 도와줄 것을 약속하는 정도로 끝났다.

거기서 환인은 르아웬 추기경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포착했다.

=어?! 무슨 문제? 르아한테 나쁜 일이 생긴 거야?=

“그런 거로는 안 보이더군. 아마도 추기경들 사이에서 모종의 이야기가 나왔겠지. 너, 그리고 현 메리아놀 국왕 사이의 일이라던가.”

=…….=

“하얀 늑대들에게 관련 사항 조사를 지시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날 믿어라.”

=응. 난 도령만 믿을게.=

그 후 환인도 술법 함정에 관하여 정보를 모으고 공부를 한창 하고 있을 무렵 하얀 늑대들을 통해 엘위드리스 가문 내 상황의 보고가 올라왔다.

[어제, 수목 도시 엘위드리스의 출입이 전면 통제되었고 수장 및 공녀파와 원로파가 격돌해 사상자가 대규모로 발생하였다는 보고입니다.]

“사상자 명단은 없습니까. 반대로 생존자 명단도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현재 정확한 명단을 조사 중이며 생존이 확실시된 인물은 수장인 프슈드 오울 엘위드리스, 그리고 공녀인 이름리아 윌든 엘위드리스 두 명입니다. 명단을 확정하는 대로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부탁합니다.”

환인은 핑크색 머리를 꾸벅 숙이는 엘미느를 보다 통신을 종료하곤 눈빛을 가라앉혔다.

메리아놀의 정체불명 소환자 집단에 대한 정보 수집을 지시할까 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아영과 하얀 늑대들 사이 유대감이 조금 더 강해진 뒤에 부탁하도록 하지.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정생투와 내맘대로에서 저지른 실수를 또 저지를 수는 없읍니다...

...넹? 아서는 어쩌고요? 걔는 등장할 때부터 여자였잖아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