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08화 (608/813)

607 리벤지

그의 결정과 승낙이 떨어졌다.

남은 건 저 건방진 꼬맹이를 이도 저도 아닌 혼돈의 생물로 타락시키는 것뿐.

그를 만나기 전, 막장 로맨스물 소설을 수도 없이 탐독하던 시기에 접한 것 중에는 성별 반전 소설도 있었다.

흑마술사의 저주를 받아 여자가 된 남자, 반대로 미궁 탐사 도중 함정을 밟아 남자로 변한 여자에게 동성이 꼬이고 얽히는 러브로맨스코미디.

남자가 여자 관점에서 쓴 소설도 보았고 여자가 남자 관점에서 풀어낸 소설도 보았었지만, 전체적인 틀은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하나의 맥락은 똑같이 관통하고 있었으니.

변한 성별로 섹스를 체험할 경우, 마음이 꺾이거나(후회피폐) 성격이 예전과 180도 달라져 버리는 것(수컷&암컷 타락).

안느는 플뢰답지 않은 사악한 얼굴로 히히 웃으며 성수포를 잔뜩 꺼내 심연의 공포를 접하고는 겁먹은 리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리민은 경기를 일으켰다.

=오, 오지 마!=

=어허! 이제 도령한테 안겨서 암컷으로 타락해야 할 텐데 몸뚱이를 깨끗하게 해야지.=

=하…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하지 마아…!=

사색이 된 리민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으로 도망가려다 안느에게 붙잡혀 옷가지가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부욱— 찌이이익-!

=손 방해되니까 치워.=

=익, 이익……!=

안느의 거친 손길에 리민은 히끅, 딸꾹- 횡격막 경련을 시작하면서 남은 옷가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지만 의미 없는 몸짓이었다.

삽시간에 알몸이 된 리민은 그럼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다가 저도 모르게 아래를 보곤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평평해야 할 가슴에는 탐스럽게 부푼 멜론만 한 젖가슴 한 쌍이 출렁인다.

두 살덩이 사이로 보이는 사타구니에는 있어야 할 코끼리 대신 솜털이 조금씩 나기 시작한 밋밋한 골짜기뿐.

=……히약?!=

잠깐 사고가 멈췄던 리민은 차가운데다 뭔가 따끔거리는 하얀 천이 목에 닿는 걸 느끼고 펄쩍 뛰어올랐지만, 그건 상상 속에서였고 실상은 잠깐 꿈틀거리는 수준이었다.

=읏, 하지……마. 안돼…. 나, 난 남자란 말이야…….=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힘없이 애원하는 리민. 진심으로 겁을 집어먹은 표정에는 오직 두려움만 가득하다.

하지만 그런 가녀린 애원은 복수심에 불타는 안느에게 천상의 음률일 뿐이었다.

=응~ 넌 이제 여자야.=

성수를 적신 깨끗한 천이 리민의 소녀스럽고 매력적인 얼굴을 지날 때마다 땟국물이 깔끔하게 사라지며 광택이 난다고 표현할만한 미모가 살아난다.

그건 몸도 마찬가지였다.

가녀림과 왜소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간격에 걸쳐진 소녀의 육체 또한 백자白磁처럼 매끈한 피부를 드러내며 매력을 배수로 증가시키는 중.

=와, 얘는 젖꼭지가 없네? 아니 엄청 작아.=

살색이라고 할 만큼 연한데다 주름이나 돌기 하나 없이 깨끗한 유륜, 그리고 잘 봐야 보이는 희미한 유두의 흔적.

=자~ 다리 벌리자? 첫 경험을 할 곳인데 여기도 깨끗하게 닦아야지~.=

=흣, 읏……. 하으, 흐윽….=

끝내 눈물을 또록, 흘린 리민이 입을 연 순간 성수포를 쥔 안느의 손이 리민의 사타구니 속으로 쑥 들어간다.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오므렸던 리민은 정수리에 벼락이 내려꽂히는 감각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소녀의 새된 숨결을 거칠게 토해냈다.

=하악……!?=

없다.

언제나 아침에 자신을 반겨주던 늠름하고 우람한 그 감촉 대신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허전함이 사타구니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성수포가 평평한 사타구니를 문지를 때마다 정화 특유의 톡톡 튀는 자극이 변화한 그 형태를 명확하게 인지시킨다.

굳건한 기둥 대신 콩알 반쪽보다 작은 음핵.

두툼한 알 두 개 대신 살집이 조금 적은 대음순.

그리고 종이처럼 가느다란 소음순과 몸 안으로 깊게 난 구멍.

그게 뜻하는 사실은 하나.

15년 한평생 함께해온 남성성이 사라졌다.

자신은 그토록 혐오하던 ‘계집’이 된 것이다.

리민은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상실감에 정신이 표백됨을 느꼈다.

=여기도 닦자~.=

안느의 손짓에 조막만한 그곳이 벌려지고, 이어 성수포의 정화 자극이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여자의 통로는 물론 진정한 여성의 증거인 자궁까지 자극했고…….

=…….=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반짝이던 리민의 금색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

언제나 살짝 치켜 올라가 도도하던 눈꼬리가 평범하게 내려오고 독하다고 표현할만하던 표정이 애처롭다고 해야 할 만큼 흐려진다.

안느의 손짓에 몸뚱이가 힘없이 들썩거리던 리민의 입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새어 나온 것은 안느가 그, 아니…… 그녀의 성기와 항문쪽을 성수포로 열심히 닦고 있을 때였다.

=잘못… 했어요…….=

와, 진짜 여자가 됐네. 성별 반전의 술법 함정은 소설이랑 똑같았어. 이렇게 생각하며 환인이 리민을 기분 좋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정돈하던 안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리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응? 뭐라고 했어?=

=죄송해요……. 제가…… 제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안느 님, 죄송, 흑. 흐윽…… 죄송해요…….=

죽은 생선 같은 눈동자로 눈물을 철철 흘리며 중얼거리는 리민.

안느는 자기도 모르게 진실의 주시자를 발동했다가 그게 100% 진심이며 진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쉼 없이 움직이던 손을 멈춘 안느는 잠깐 눈을 끔뻑이다 환인과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

이게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바락바락 대들던 리민이 맞나? 혹시 중간에 바꿔치기 당한 거 아냐?

“…….”

=…….=

환인과 이실리테의 미묘한 표정이 뜻하는 바에 안느가 약간의 당혹을 드러내며 리민한테서 떨어진다.

부들거리면서 상체를 일으킨 리민은 가누기 힘겨워하는 몸짓으로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까지…… 건방진…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끄흡. 용서해…주세요…… 흐윽.=

명백한 여자의 알몸으로 두 쌍의 날개를 최대한 접어 용서를 비는 리민.

고장 난 소녀 인형처럼 사과를 반복하는 리민의 모습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서로를 쳐다본다.

=안느, 저거 지금 연극 하는 거 아니야?=

=어? 아니, 완전 백 퍼센트 진심인데…….=

=흑…. 끄윽. 죄송…… 흐으응… 죄송해요…… 흐극.=

이실리테와 안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잠깐 사이 리민이 겪은 공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체력과 원기는 정말 쇼크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바닥까지 내려갔었다.

5급 빛 술사의 정신력으로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방금 있었던 일로 깡그리 증발한 상태.

술법 함정을 건드려 여자가 되었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여자만도 못 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걸 완전히 깨닫고 그를 지탱하던 마지막 알량한 자존심이 가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다 리민은 완전한 여자의 몸이 되어버렸음을 자각한 현재, 자연스럽게 눈치챘다.

여기서 선생님에게 처녀 개통을 당해버리면 자신은 끝이라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이 되어버린다고 말이다.

“…….”

환인은 리민의 그러한 심경 변화를 고스란히 짚어냈다.

이미 늦은 깨달음이다. 그토록 혐오하던 여자가 되어버렸다. 이때까지 그에게 혐오 받은 여자들이 여자가 된 리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할까.

남자로 돌아간 뒤에도 멀쩡히 일상생활을 하긴 어려울 테지.

절하는 것처럼 엎드린 모습으로 흐느끼면서 사과하는 리민의 모습에 환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안느에게 물었다.

“이제 어쩔 거냐.”

=어? 어…… 음…….=

“저걸 보면 앞으로 여자에게도 험한 소리를 못 하겠지. 남성성이 끝장나버린 상황이니 말이다.”

=그, 그래? 그냥 교단에 가서 고위 신관께 해주 받으면 풀리는 거 아냐?=

“아니. 지금 저 모습은 저주나 술법으로 인해 신체 변화가 아니다. 물리적인 의미로 완전한 여자가 되었으니 해주는 무의미할 거다.”

=……진짜?=

안느는 대답 없이 자신의 눈을 가리키는 환인의 손짓에 허리에 손을 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시선이 리민의 뒤통수와 땅에 흐트러진 금발로 향한다.

고등위 술법 변화에 대한 감지는 자신의 성술로는 불가능하다. 7급의 대신관이나 대주교, 그러니까 아영이 정도가 되어야 알아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안느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애가 진심으로 사과하는데 안 받아 주는 것도 어른스럽지 못하니까 뭐… 이 정도쯤에서 용서할게. 이슬이 너는?=

=난 용서 못 해. 말로 용서를 빌고 죄를 없앨 수 있다면 율법이 왜 필요해?=

차가운 이실리테의 목소리에 안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의견에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한 번만이라도 알을 낳게 해. 주인님 말씀대로면 여자가 됐으니 알도 낳겠지.=

=응? 아하.=

알을 낳게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리고 리민은 그 말에 왜 또 파르르 떠는 거고.

환인이 플라비우스족의 일반 상식을 모르는 모습에 안느가 설명해준다.

=플라비우스족은 난생인 거 알지?=

“……영도 기록실에 그런 이야기는 적혀있지 않았는데.”

=너무 당연한 거라서 도령이 본 책에는 언급 안 되어있었나 보다. 플라비우스족은 알에서 태어나. 그리고 일정 나이 이상의 여자는 한 달에 한 번씩 무정란을 낳거든.=

유정란을 배면 타 종족 여자들처럼 배가 부풀어 오르면서 약 5개월 정도 알을 뱃속에 품고 다닌다. 알을 산란한 뒤에는 5개월간 부화 장치에 두어 부화를 이루고.

이 유정란을 배게 되는 계기는 다른 종족 여자들과 마찬가지, 평범한 섹스를 통해 정액을 받으면 정액을 며칠 몸 안에 보관하다가 임신에 쓴다고 안느가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무정란은 크기가 좀 작아. 타조알 정도?=

“월경 같은 건가. 그러니까 이실리테는 리민이 알을 한 번 낳는 것으로 용서한다는 거군.”

=네, 주인님.=

또 다른 의미로 리민의 남성성을 말살하겠다는 이야기다.

날개를 바짝 접은 채 알몸으로 엎드려있는 리민을 부른 환인은 직접 물었다.

넌 어떻게 할 거냐고.

=이실리테 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훌쩍이는 소리는 멈췄지만 목소리는 공허에 젖어있었다.

이실리테는 그럼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환인도 그럼 됐다며 결론을 내린다.

환인은 상체를 일으킨 채 죽은 눈으로 훌쩍이는 리민을 영혼의 눈으로 다시 전체적으로 살핀다.

역시 그 어떤 인위적인 위상력의 흔적은 없다.

남자로 되돌아가려면 비슷한 함정을 찾아 건드리는 수뿐이겠지.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리민에게 말했다.

“리민, 오늘 일을 기억해라. 원한을 산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작용이 돌아온다. 이번 일도 폭언과 인격모독으로 점철된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이실리테와 안느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리민이 액자를 건드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지금 같은 일을 경험하지도 않았겠지.

그 이야기에 리민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덩달아 하얀 날개와 그녀의 머리만 한 하얀 젖가슴 한 쌍도 울음을 참는 것처럼 흔들린다.

“안느, 리민을 부축해주겠나.”

=바로 나가게?=

“그래. 쉴 거면 이런 폐허보다 제대로 된 집에서 쉬는 게 나을 테니까.”

=알았어. 야, 일어나. 옷 입어.=

=윽…… 그, 그건.=

안느는 가방에서 여성스러운 여자 속옷에 치마를 꺼내 미약하게 저항하는 리민에게 억지로 입혔다.

=자꾸 반항하면 막대기로 그냥 쑤셔버린다.=

=힉…….=

협박을 곁들여서.

=음~. 이거 고약한 함정에 걸렸네요.=

“고약하다고.”

=옙. 지금 엽사 조합에서 배우는 중인 술식함정학에 따르면 함정의 효과는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어요.=

리민이 건드린 성별 반전 함정의 경우.

저주 계통으로 나름 간단히 성술을 받아 해주解呪할 수 있는 부류, 비술 계통으로 좀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어쨌든 해제할 수 있는 부류.

=그리고 항구적으로 신체를 변이시켜버리는 것으로 효과를 다 하고 사라지는 변이형이 있슴다.=

안느가 리민을 등에 업은 덕분에 불과 1시간 만에 돌아 나온 환인은 한밤중이던 여자친구들을 깨워 거실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하얀 원피스를 입힌 리민을 보여주며 조사를 부탁했더니 3분 정도 성력을 투사하며 조사한 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 애새끼가 걸린게 그 변이형임다. 변이형의 경우 비술로도, 성술로도, 주술로도 딱히 수단이 없죠. 몸이 그냥 변화한 거니까요. 팔라툼의 하늘신님 교단 본단을 찾아가 교황님한테 보여드려도 별수 없을걸요?=

=그럼 저게 남자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는 거야? 똑같은 함정을 찾아내서 일부러 건드려도?=

안느의 질문에 하늘거리는 잠옷 차림의 백려강이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용의 꼬리를 살랑이며 대답했다.

=강사님은 기본적으로 미궁에 동일한 함정은 없다고 못 박으셨어요. 비유로 검사의 베기가 온전히 똑같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해되시나요?=

“기온, 기후, 풍향, 대기 상태의 차이. 동작은 같을 수 있지만 100% 같은 상황에서 펼쳐진 동일한 일격은 있을 수 없지.”

=네. 비슷한 함정을 찾는 것도 문제인 게, 한 번 발동된 함정이 근시일 내에 다시 설치될 확률은 무척 낮다고 해요.=

=세 곳 구역으로 나눠진 4계층의 드넓은 공간. 그곳을 배회하는 직업자들. 언제 같은 함정이 설치될지 모르고 어디에 설치될지도 모르지. 설치되더라도 다른 직업자가 해체해버리면?=

이야기를 받은 안느의 가정에 백려강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술법 함정이 성별 반전인지 아닌지도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술법 함정의 해체는 모인 위상력의 형태를 풀어내는 거라서 함정이 어떠한 것인지 몰라도 해제할 수 있거든요.=

날개 끝이 바닥에 닿아 늘어져 있어도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는 리민을 이곳저곳 주무르던 아영이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오빠? 이건 제 직감하고 촉감인데요. 이놈…… 아니 이제 이년인가. 이년의 몸 상태가 좀 안 좋아요. 똑같은 성별 반전 함정을 어떻게 찾아도 원래대로 돌아갈 거 같지 않아요. 몸이 못 버틴다고 해야 하나?=

=반발성 육체 붕괴를 말하는 거니?=

=옙. 유르파 언니 말씀대로 지금 이년의 육신 상태가 엄청 헐거워요. 또 같은 함정을 발동시킨다? 이번에는 육신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서 말 그대로 ‘사람이었던 것’이 될 거예요.=

최악이던 자신의 몸 상태보다 지금 리민의 몸 상태가 더 안 좋다고 말하는 아영.

원래대로 돌아갈 실낱같은 희망마저 싹둑 잘라버리는 아영의 이야기에 환인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무래도 그 술법 함정…… 심핵력을 직접 운용한 함정으로 보이는데.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쉬도록 하지.”

환인은 안느를 불러 고개를 작게 숙인 채 바닥만 내려다보는 리민을 가리켰다.

“안느, 오늘 밤은 네가 리민을 데리고 자라.”

=엥? 왜?=

“혼자 내버려 뒀다간 내일 시체 한 구 치우게 될 듯해서 그런다.”

=아…….=

여자들은 그제야 리민의 상태를 눈치챘다.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은 눈동자로 가만히 듣고만 있는 모습.

확실히 혼자 재웠다간 내일 아침에 천장에 목을 매단 채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는 꼴을 보게 될 것 같다.

「환인. 물 다 데웠어.」

“고맙다.”

환연이 급하게 데워준 욕탕으로 내려간 환인은 안느에게 잡혀 발가벗겨진 채 거의 빨래 당하듯이 씻겨지는 리민을 구경했다.

비누 거품에 뒤덮인 한 쌍의 젖가슴은 이실리테와 비견될 만큼 완벽한 균형과 조형을 자랑한다.

허리는 바짝 조여들었고 골반은 눈에 띄게 곡선을 그려 성인 여성의 몸매 그 자체다.

그만큼 완벽한 몸매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면 그리 완벽하진 않다.

유두는 작은 돌기라고 해야 할 만큼 작은데다 피부색과 분간이 거의 가지 않는 유륜, 언뜻언뜻 보이는 음부에도 음핵의 흔적이 거의라고 할 만큼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억지로 키워 여자로 만든 느낌이군.”

=확실히 그러네요.=

똑같이 발가벗고 리민을 씻기고 있는 안느의 깨물고 싶어지는 분홍색 유두나 살짝 벌린 다리 틈새로 보이는 앙증맞은 음핵을 보면 확실히 비교되는 모습이다.

촤아아악—!

=됐어.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으면 몸이 좀 풀릴 거야.=

머리부터 뜨거운 물을 쏟아부어 비누 거품을 모두 씻겨낸 안느는 리민을 일으켜 세워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물에 젖은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맞았지만, 리민은 아무 반응도 없이 느릿하게 욕탕 안으로 들어와 코 아래까지 잠겨 든다.

뒤따라 들어온 안느는 물에 젖어 비단처럼 늘어진 금발이 둥실둥실 떠다니다 자기 몸에 엉겨 붙는 광경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 머리카락을 그러모아서 묶어 올려주었다.

반발을 생각하면서 엉덩이까지 때렸는데도 인형처럼 반응이 없다니, 진짜 좀 심각하긴 하네.

……내가 너무 심했나?

이러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안느는 리민을 조금 과하다고 할 만큼 챙겨주었고, 이실리테는 그런 안느를 보며 피식거렸다.

=키 차이가 40cm 이상 나면서 그러니까 엄마랑 딸 같은걸.=

=……야. 아무리 이슬이 너라고 해도 그런 끔찍한 말을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만큼 어이없다는 말이야. 저걸 부숴버릴 것처럼 음모를 꾸밀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과거에 연연하면 좋은 여자 못 된다 너?=

환인은 아웅다웅하는 그녀들의 백옥같은 살결을 구경하다 앞머리가 눈을 다 가리고 있는데도 물귀신처럼 가만히 앉아있는 리민을 돌아보았다.

성격을 고치라고 보냈던 손자가 손녀로 변해 돌아온 걸 보면 펠드릭스 백작은 뭐라고 할까.

“…….”

뭐라 하든 알 바는 아니지.

자신의 옆구리에 바짝 붙으면서 아웅다웅하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풍만한 여체를 마음껏 주무르며 환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고 리민의 등을 떠밀며 거실로 들어온 안느는 그다지 못 잔 얼굴로 백금발을 헝클어트리며 환인에게 말했다.

=도령 말이 맞았어. 이게 자다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길래 뭘 하는가 싶어서 쫓아갔더니 나무 아래에서 침대 시트로 목매달려고 하더라.=

=죽으려면—=

“조용히.”

목매달아 자살하려 했다는 이야기에 비죽이 웃은 아영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환인이 그녀의 입을 막는다.

아직 리민의 자살 충동은 강하지 않다. 지금은 그저 반사적으로 움직일 뿐.

그 증거가 수많은 자살 방법이 있음에도 나무 아래에서 목을 매단다는 다소 고전적인 수단을 고른 것이다.

그런데 옆에서 비웃으며 자살 수단을 들이밀면, 자살 충동은 즉시 강해져서 하늘로 날아올라 추락사한다든지 빛 술법으로 분신을 시도한다든지 혀를 깨물거나 심장을 찌르는 등 행위가 과격해질 수 있다.

적어도 그러한 상태가 되는 건 펠드릭스 백작에게 손주를 인계한 뒤어야 덜 귀찮아지는 법.

환인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합죽이처럼 입을 다무는 아영의 옅은 자줏빛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어트린 뒤 거실에 모두 모여있는 여자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 훈련은 건너뛴다. 아침 식사 후 유르파는 이실리테와 함께 부산물의 정리와 처분을 맡아주십시오. 미궁에서 나와 바로 돌아온지라 할 게 좀 많을 겁니다.”

=응, 그럴게.=

=네.=

“백려강과 아영은 일과대로 움직이고, 안느 넌 나와 같이 리민을 데리고 펠드릭스 백작저로 가지.”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백작에게 손주를 반납해야지. 오래 데리고 있어봤자 문제가 생길 가능성만 커질 테니까.

“그러니까, 이실리테. 리민이 산란하는 걸 보는 건 안 되겠다.”

=저는 괜찮아요. 저게 저렇게 망가진 걸 본 것만으로 만족했으니까요.=

그 후 간단한 식단으로 아침을 해결한 환인은 약속도 없이 무작정 펠드릭스 백작 저택을 찾았다.

고위 귀족이다. 약속이나 스케줄이 빼곡하게 차 있어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생각해뒀지만…….

=주인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환인은 기다렸다는 듯한 병사와 하녀의 인솔로 온통 새카만 인테리어의 저택 응접실에 안내되었다.

이른 아침의 방문이라 백작이 아직 몸단장하지 않았기에 그러기 위한 시간 확보용 접대다.

안느는 매우 푹신한 소파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되네.=

“며칠 전에 방문했을 때도 그랬지만, 펠드릭스 백작도 사교계에서 고립된 듯하군.”

꾸미는 데만 금화 수백 닢이 들었을 듯한 화려한 응접실을 잠깐 구경하던 안느는 다소 심플한 고딕 로리타 양복 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는 리민을 곁눈질했다.

=근데 설마 리민을 못 알아볼 줄은 몰랐어. 그걸 리민이 내버려 둘 줄도 몰랐고.=

어제까지의 리민이었다면 =대가리에 든 게 없는 멍청한 계집년이! 네 주인도 몰라보는 거냐!!=하고 포효를 질렀을 텐데 말이다.

=……역시 백작께서 화내시겠지?=

“화를 내시더라도 감수해야겠지.”

그 분노가 정도를 벗어난다면 환인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30분가량, 전에 방문했을 적 보았던 사비족 하녀가 타준 차를 거의 다 마셨을 때 디전=펠드릭스가 반듯한 모습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환인과 안느는 예법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살짝 목례를 올렸지만.

=아, 아루나……?=

디전=펠드릭스 백작은 두 명의 인사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크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인형처럼 앉아있는 리민을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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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열릴뻔 한 글쟁이의 심연의 뚜껑은 굳건히 닫혔습니다.

안심하고 즐겨주십시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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