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07화 (607/813)

606 리벤지

안느의 폭소가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일까. 리민은 유리잔에서 흘러넘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바락 소리쳤다.

=웃지 마!=

하지만 그 가냘픈 목소리에는 이전과 같은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일 적에는 꽥 소리 지르면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깽깽거리는 정도는 되었는데 이제는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안느는 웃음을 그치긴커녕 너무 웃어 배가 아프다는 얼굴로 이실리테에게 반쯤 기대 힉힉거린다.

=이이익……!=

남을 비방하고 비난하며 헐뜯는 사람은 자신을 향한 비방과 비난은 못 견디는 법이다.

자신을 웃음거리로 보고 폭소하는 안느에게 리민이 격노한 것은 당연한 일.

=이 못 배워먹은 암캐가!=

바들바들 떨던 리민은 참지 못하고 웃다 지쳐 헥헥거리는 안느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가슴에 주먹질하고 허벅지며 정강이에 발차기를 먹였다.

하지만 운동 따윈 전혀 하지 않은 5급 술법사가 주먹을 휘두르고 걷어찬다고 해서 7급 희귀 근접 직업자, 그것도 전열 직업자가 얼마나 아프겠는가.

더군다나 안느는 등대의 빛을 입어 방어력과 신체 능력이 한껏 올라간 상태이고 리민은 성별 반전에 걸려 급격한 근력 너프를 겪은 가녀린 미소녀 상태.

익익거리며 앙증맞은 주먹을 휘두르고 안느의 정강이를 걷어차지만, 오히려 때린 리민이 악! 비명을 지르며 꺾였던 손목을 부여잡는다.

=아앗, 이걸 어째? 별 볼 일 없는 계집애가 되어서 몸에 힘도 없어진 거야? 어휴, 이렇게 가느다란 팔다리로 포크나 들 수 있을까 모르겠네.=

=이익…! 으으읏…… 으아앙!=

자신의 팔을 잡고 흔드는 안느의 비아냥에 리민은 분을 삭이지 못해 바들거리다 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한 발 떨어져 그 장면을 구경하던 환인은 오열하다시피 하는 리민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제법 관심이 동한다는 표정으로 나라 잃은 사람처럼 주저앉아 앙앙 우는 리민을 살폈다.

‘신체가 급격하게 바뀐 여파가 정신에도 영향을 끼쳤나.’

그런 것도 있고 쌓인 피로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도 있겠지.

=이 미친년아! 너도 똑같은 꼴 안 당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하늘신님한테 매일매일 기도 올려서 너도 똑같은 함정에 걸리라고 교단에 기부도 엄청 할 거야! 남자가 되어서 선생님께 버림받으라고! 으아앙!=

아름다운 유리병에 맺혀 흘러내리는 이슬처럼 눈물을 흘리는 리민의 저주에 킥킥 웃던 안느가 시간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움직임을 멈춘다.

몇 초 후 안느에게서 퍼져나오는 진득하면서도 서늘한 기백.

그런 안느의 반응에 이실리테가 먼저 움찔하면서 안느를 곁눈질하고 환인도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안느를 바라본다.

당사자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천벌의 망치를 꾹 쥐고 투기를 일렁이며 리민의 면상에 워 해머를 들이밀었다.

=야. 너 방금 뭐랬어.=

좀 전, 비라크의 머리를 박살 내고 미처 정리하지 않았기에 태산을 형상화한 듯한 헤드의 곳곳에 점액질과 회백색의 걸쭉한 게 그대로 묻어있는 상태.

생명을 빼앗는 살벌한 무기의 형태에 리민은 겁먹은 눈망울로 울음마저 멈추고 달달 떨기 시작했다.

안느의 감정에 영향을 받은 아우라의 빛알갱이가 한층 더 격렬하게 명멸을 반복하니 그것마저도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마당.

=…우, 으…….=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죽을래?=

화를 안 내던 사람이 화내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리민은 안느가 이렇게 정색할 줄은 몰랐기에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입도 뻥긋 못하고 있었다.

아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해머의 헤드에 자기 뇌수를 칠해버릴 분위기라 겁먹어서 입을 열지 못했다는 것이 알맞은 표현이다.

“안느.”

=…….=

환인의 부름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리민을 노려보던 안느는 워 해머를 지팡이처럼 쿵, 짚으며 후— 긴 숨을 토해내었다.

그길로 탐사를 끝낸 환인은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 2계층의 고성 앞 공터로 되돌아 나왔다.

리민은 여자가 되어버린 자기 꼴을 남들이 볼세라 후드를 푹 눌러써 정체를 감추었고, 안느는 그런 리민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하며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파티의 무드 메이커 역할을 하던 안느가 저러니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가라앉는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비상마저도 불편함을 느끼곤 안느의 눈치를 살필 정도.

철푸덕—

=아극!=

와중에 리민이 제풀에 발이 꼬여 넘어지며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뒤에서 들려온 짧은 비명에 돌아서서 그 꼴을 보곤 후우,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걸릴 게 없는 곳에서 넘어지다니, 진짜 뭐 하자는 거지?

조용히 자신을 주목하는 네 쌍의 눈동자에 리민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어떻게 일어나려 애썼지만, 평행감각을 상실한 것처럼 반쯤 일어서다 고꾸라지고 일어서려다 자빠지더니 날개가 온통 흙투성이가 되도록 버둥거린다.

=……흑. 우으…… 흐규우으…….=

그러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히끅거리기 시작했다.

두 여자는 리민이 왜 저러는지 뒤늦게 이유를 알아차렸다.

저 약해빠진 몸뚱이가 드디어 파업을 일으킨 거다. 정신력은 아직 충분하지만, 몸뚱이가 한계에 다다라 머리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하게 된 것.

고성에 들어서기 전이었다면 안느가 들쳐메든 옆구리에 끼든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차가운 눈으로 절하는 것처럼 엎드려 히끅거리는 리민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다.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비상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지시하면 듣기야 하겠지만, 이실리테도 리민한테는 손가락 하나 대기 싫어하는 분위기였고 비상은 등에 리민을 올렸다간 발작을 일으킬 느낌.

“……시간도 늦었으니 이 근처에서 하룻밤 보내지.”

=네, 주인님.=

=이래서야 누가 형편없는 계집인지 모르겠네.=

안느의 냉랭한 조롱에 리민의 흐느낌이 한층 커진다.

=안느, 자리 정리하는 거 좀 도와줘.=

=엉. 저 건물이 멀쩡해 보이는데 저기로 하자.=

=주위 감시하려면 바깥에서 야영하는 게 낫지 않을까?=

=도령이 영혼으로 감시할 수 있댔으니까, 비상이도 있고 안에서 쉬자.=

안느의 제안에 이실리테는 환인을 돌아보았고, 그의 승낙에 두 여자는 작은 단칸방 건물을 정리하러 안으로 진입했다.

그녀들이 조금 부산스럽게 안쪽을 정리하고 있을 때 =비상아! 여기 와서 바람으로 먼지만 좀 날려줘!=, 꾸엣! 휘오오—, =꺄악, 먼지 폭탄……!= 환인은 리민에게 다가가 아스펜드에서 물병을 꺼내 내밀었다.

“마셔라. 수분을 섭취하고 나면 조금…… 후우.”

흐느끼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벌벌 떠는 리민의 안색이 그새 까맣게 물들어있었다. 내버려 뒀다간 졸도했다가 그대로 쇼크사할 것 같은 꼴이다.

환인은 응급처치로 리민의 심장에 약간의 원기를 흘려 넣어주었고, 까매졌던 안색이 빠르게 창백해지는 걸 보며 다시 물병을 내밀었다.

“마셔라. 수분이 보충되면 조금 나아질 거다.”

=가, 가사하브으에…….=

물병으로 팔을 뻗으려 했지만 기운이 정말 바닥났는지 반도 오지 못하고 툭 떨어지는 가느다란 팔.

어쩔 수 없이 리민의 목덜미를 잡고 입에 물병을 기울여주니 꼴깍거리면서 물을 들이켜지만, 새 모이만큼 밖에 마시지 못하고 나머지는 앞섬으로 다 쏟는다.

=헥, 헥…….=

‘이 정도면 물약을 먹이진 않아도 되겠군.’

원기 보충을 최대한으로 해주거나 스태미나 회복제, 원기 보충제 등을 먹이면 좀 더 편해질 테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

좀 더 가혹한 경험을 해봐야, 나락을 일부만이라도 맛보아야 절제심에 양분이 될 테니까.

=주인님, 안쪽 청소 다 했어요.=

창문 너머로 이실리테가 부르는 소리에 환인은 리민을 짐짝처럼 들쳐메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정도면 몸무게가 40kg도 안되는 것 같은데. 와중에 축축이 젖은 가슴이 어깨뼈 쪽에 닿는데 어지간히 큰지 푹신한 감촉만 난다.

비상의 도움을 받아 정리한 내부는 이런저런 잡동사니와 부서진 벽 파편이 근처에 쌓여있긴 해도 정갈했다.

주방 겸 거실인지 한쪽 벽에 화로와 오븐 같은 가구가 놓여있는 10평 남짓한 공간.

흔히 투룸이라고 하는 형태의 집이다.

“저 침대 매트리스를 여기로 가져와라.”

안느는 그가 시킨 대로 먼지는 없지만 낡고 헤져 보풀이 심하게 일어난 매트리스를 가져와 바닥에 깐다.

그곳에 리민을 팽개치듯 내려놓은 환인은 이실리테가 부엌의 화구에 불을 놓고 물을 끓이는 것을 보며 아르겐테아 정찰병 영혼 셋을 소환했다.

「부르셨습니까!」

「부르셨습니까, 성제님.」

알몸의 여자 정찰병 셋에게 영기를 주입해 가시성을 부여한 환인은 이전에 영혼 상태의 백려강에게 주문했던 것처럼 주변 감시를 명령한 뒤 누가 접근하면 알리라고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다.

그에 복명복창하며 정찰병 때의 경험을 활용해 엄폐물 뒤로 모습을 감추고 주변을 감시하기 시작하는 영혼들.

“…….”

=…….=

=…….=

보글보글—

커피 포트에서 물이 끓는 작은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다.

평소였다면 안느가 이실리테와 잡담을 나누고 은근슬쩍 환인에게 밀착하며 애정을 드러내는 시간.

하지만 안느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이형종의 피와 체액이 묻은 천벌의 망치를 닦다가…….

=도령.=

무언가 결정을 내린 모습으로 환인을 불렀다.

=도령. 나 진지하게 부탁 하나 있어.=

그녀의 진지한 목소리,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리민에게 향하는 것과 그 시선 속에 섞인 복수심에 환인은 안느가 무엇을 부탁할지 직감했다.

=리민을 따먹어줘.=

“…….”

약간의 장난도, 조금의 농담도 없는 진지한 표정에 환인은 이실리테를 돌아보았고, 이실리테도 안느와 같은 표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집을 청소할 때 모의한 건가.

뜨거운 물로 간이 커피를 내려 가져온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커피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주인님이 저걸 엉망진창으로 범해서 욕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어요. 자기도 계집애가 되어버린걸 자각할 정도로요.=

“…….”

환인은 솔직히 말해 여자친구들의 머리가 걱정스러워졌다.

아무리 인권 의식이 희박한 세계라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다. 남편에 가까운 연인에게 하는 부탁이 저 여자를 엉망진창으로 범해서 욕보여달라고?

물론 그녀들의 심정도 이해는 한다. 리민은 그녀들을 멍청한 계집이니 암퇘지니 암캐라고 부르며 인격모독을 심각하게 해왔다.

여자가 되어버린 리민을 강제로 범해서 남성우월주의를 망가트릴 목적이겠지.

그런데 이걸……. 복수? 복수라고 할 수 있나?

환인과 오랫동안 함께 여행하며 수백 번 살을 섞어온 그녀들도 이제 환인의 표정을 보면 생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그가 내키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설득을 위해 입을 열었다.

=도령. 도령이 리민한테 절제심을 주입하고 있는 건 알아. 하지만 쟤가 우리한테 한 거 봐. 여긴 라드세아도 아니고 히스론드란 말이야.=

라드세아에서는 여성의 인권이 남자에 비하면 바닥이다.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 풍조가 가득하며 여자들도 당연하단 듯이 살아간다.

하지만 히스론드는 어느 정도 남녀평등이 이루어진 국가이며 팔라툼은 히스론드의 주도.

=저 남성우월주의를 박살 내지 않으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이 허무하게 무산될 거라고 생각해.=

=저희의 사회적 신분이랑 위치는 주인님과 함께 다니며 확실히 배웠어요. 하지만 리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냈어요.=

=우리가 도령의 등에 업혀 호의호식하는 무능력한 계집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야. 사실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정령 기사고 이슬이는 검희야. 이런 우리한테도 막말하는데 다른 여자한테는 어떻게 대하겠어? 절제심도…….=

“너희들이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이해했다.”

도마뱀 여자(샤스라)도 안았고 모녀(유미안, 라비올라)도 덮밥으로 해먹었다.

이란성 쌍둥이 자매(후이니, 엔넬)도 동시에 안았으며 창관에서 산 여자만 수백 명이고 여자를 무책임하게 임신시킨 뒤(시하, 백치령) 훌쩍 떠난 쓰레기 짓도 태연히 저지른 게 자신이다.

성별 반전 저주에 걸린 남자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애초에 중성적인 외모여서일까, 여자가 된 지금은 100명 중 100명이 모두 엄지를 치켜들 정도의 미소녀. 거기다 심장과 자궁에 영기가 보이는 명실상부한 여자인데 뭐가 문제일까.

거기다 여기까지 오면서 영혼의 눈으로 리민의 상태를 살폈는데, 저건 저주 같은 게 아니다.

미궁이 심핵력으로 육체를 변이시켜버린, 치료법이 아니라 똑같은 성별 반전의 술법 함정을 찾아내야 하는 상태인 것.

환인의 기준에 에러인 항목은 없다. 그리고 이러면 리민을 강제로 제지하지 않은 제 얼굴에 침 뱉기지만…….

“…….”

그녀들을 계집이니 암퇘지니 비하하는 말에 조금 짜증이 났던 것도 사실.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도령.=

=주인님.=

그의 대답에 긴장하고 있던 이실리테와 안느가 환한 미소와 웃음을 지으며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반대로 시퍼렇게 질려가는 얼굴이 있었으니.

=서, 선생님?=

숨죽인 채 그녀들의 작당에 벌벌 떨던 리민이 뒤집힌 목소리로 환인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

=안느,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괜찮아. 도령은 흡정족도, 사비족도 안은 남자라구. 게다가 플뢰족인 나랑 아영이도 태연히 자기 여자로 삼은 남자 중의 남자가 도령이야. 절대 화 안내.=

=음…….=

=응? 하자. 도령의 육합등약이 저 망할 놈의 자궁에 퍼부어지면 틀림없이 육체가 여자로 고정되어버릴 거야. 저 망할 남성우월주의자 놈한테는 최악의 벌이지.=

=그러면 좋겠지만…….=

고민하던 이실리테는 복수심에 불타는 안느의 눈을 보곤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리민의 업보가 불러일으킨 인위적인 재앙이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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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이래서 역린을 건드리면 안된다는 거에오.

그리고 오늘은 조금 짧습니다. 낮에 약간 일이 생겨서 ㅠㅠ;;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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