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 미궁-옛 고성
2계층의 전체적인 형태는 단 하나의 석주石柱조차 없는 거대한 대공동이다.
그리고 4계층인 고성古城은 그런 2계층의 벽 속에 파묻혀 일부만 드러난 모양새였다.
벽 속에 박혀 빼꼼 드러난 성벽 일부, 첨탑 일부, 성의 창문과 망루 일부.
4계층인 옛 고성의 입구는 성벽에 난 활짝 열린 성문.
파티 내에 불온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잠깐의 탐사만 하고 돌아 나올 예정이기에 환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물론 사고가 나지 않게 유의한다) 열린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네 명과 한 마리의 발소리가 고요한 광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환인의 귀에 닿는다.
=저 파티의 이쌍익 말이야. 에브라드 아카데미의 그 인간 말종 아냐?=
=……진짜? 그 새끼가 왜 저기 끼어있어?=
=차림새 보면 뭔가 일이 있었나 본데.=
=몇 달 전부터 펠드릭스 백작이 오늘내일한다는 소문이 돌았잖아. 가문이 망해서 노예가 됐다거나.=
=큭큭큭. 그랬으면 진짜 좋겠네.=
큭큭 웃는 소리에는 명백한 악의가 섞여 있었다.
분명 들렸을 텐데 리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환인의 뒤를 졸졸 따른다. 뒷담에 기분 나빠한 것은 오히려 안느였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노려보니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어흠, 크음, 헛기침하며 입을 다물거나 시선을 피한다.
이실리테는 다른 사람들과 눈싸움하는 그녀를 보며 대체 얼마나 착한 거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안느 넌 그런 소리까지 들었으면서 그러고 싶어?=
=응? 아…… 그야 기분 나쁘지만 쟤는 적어도 우리 앞에서 대놓고 말했잖아. 난 뒤에서 몰래 악담하는 게 더 싫어.=
저 꼬맹이는 자신의 발언으로 발생하는 불이익은 자신이 감수하겠다는 귀여움이라도 있지, 뒤에서 숨어 호박씨 까는 놈들은 혐오스러울 뿐이다.
=그렇지만 저것에 한해서는 사실에 기반한 헐뜯기니까 자업자득이야.=
=알아. 그냥 내 호불호라고 생각해줘.=
웃으며 팔꿈치로 툭 치는 안느에게 이실리테는 하여튼,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
이질적인 덩치로 수많은 험담을 뒤에서 들었던 게 마음의 상처로 남은 거겠지.
거리가 더 멀어져 수군거리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두는 내가 서지. 후미는 안느, 중위는 이실리테가 서고 리민 너는 비상과 함께 내 뒤를 따라와라.”
지시대로 대열을 형성한 안느는 의외로 리민이 땍땍거리지 않는 것을 신기해했다.
저 여혐 덩어리라면 또 도령에게 묻어간다느니 계집은 능력이 없으니까 이렇게 뒤에 있는 게 맞다느니 그럴 줄 알았는데.
도령이 소란 피우지 말라고 해서 입을 다문 건가?
훅—
그렇게 높이 6m의 아치형 성문, 한쪽이 무너진 성문을 지나자 공기가 바뀌며 저층 미궁 특유의 조여드는 긴장감이 밀려왔다.
=…….=
안느는 쓸데없는 잡념을 전부 치우고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꺼내 들어 긴장을 다잡고, 이실리테도 부쩍 자주 쓰기 시작한 기사검을 쥔 채 사주 경계를 시작한다.
“리민. 발광체를 유지할 수 있나.”
=옙.=
“띄워라.”
다른 누군가가 랜턴 대용으로 빛을 띄우라 했으면 눈알을 희번덕거렸을 리민이지만, 환인의 말에는 고분고분 따르며 적당히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의 빛 구체를 띄워 올린다.
환인은 리민의 발광 구체가 만들어내는 빛에 폭 8m, 높이 12m의 회랑에 가까운 복도를 묵묵히 살폈다.
화려하고 찬란했을 복도는 시간에 풍화되고 침식되어 누렇게 빛바랜데다 오래 방치된 것처럼 곳곳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6급 미궁의 6계층 중 4계층이어서일까. 확실히 영혼의 눈에 보이는 정보량이 다소 뚜렷해지고 많아졌다.
살아있는 생물의 혈관처럼 벽을 타고 흐르는 푸른 기운. 심장처럼 두근, 두근, 맥박치는 위상력의 경혈.
환인은 그저 고성 안쪽으로 흐를 뿐인 위상력의 혈관으로 다가가 여러 줄기가 한데 모인 뒤 다시 뻗어나가는 경혈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따뜻하군.’
투라드 마을 근처의 미궁에 자리 잡았던 흑마술사도 이 경혈 같은 것을 오염시켜 미궁 전체를 지배한 걸까.
하지만 이 위상력의 경락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말은 외부에서 내부로 보내는 미궁 심핵의 식량, 에너지 같은 것이란 말인데…….
‘이걸 자신의 것으로 삼아 힘을 키우려 했다는 게 옳겠지.’
=선생님은 뭘 하시는 거지?=
리민은 갑자기 멈춰선 환인의 행동에 그 의미를 찾아보려 열심히 추리했다.
말라붙어 떨어지기 시작하는 유화 그림에 손대고 있었다면 미술품을 감정 중이신가 하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벽을 무척이나 조심스레 만지고 계시는 상태다.
자신의 지식을 전부 꺼내 보아도 저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마음속에 의문이 커지고 있을 그 무렵.
=안느. 주인님 혹시 지금…….=
=응. 애초에 미궁 탐사 목적이 그거니까.=
뒤에서 들려온 주어가 빠진 대화에 리민은 쌍심지를 켜고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일단 가능성이 크지 않다면 도령은 움직이지 않으니까. 저렇게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제법 높은 성공률을 증명하는 게 아니겠어?=
주어가 빠진 대화이기에 자신의 혼잣말을 듣고 놀리는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다. 저 계집들은 이쪽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있었다.
리민은 자존심이 상했다. 저런 모자라고 덜떨어진 계집들도 알아차린 걸 아카데미 수석을 놓쳐본 적 없는 내가 모른다고?
거기에 더해 자신이 돌아보자 입을 다물어버리는 게 더 괘씸하다.
‘아니, 이런 경우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선생님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의 조사라고 보는 게 타당해!’
자신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결론을 내자 이번에는 호기심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선생님 같은 분이 유심히 조사할 정도라니, 그건 어떤 연구 주제일까?
선생님은 자신이 인정할 정도로 다방면에 다재다능하시다. 저 힘만 센 계집들을 노예처럼 휘어잡고 있는 것만 보아도 능력의 출중함이 증명되지 않나!
그런 선생님의 연구 주제라니. 궁금하다. 정말로 궁금하다!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환인의 능력을 자신이 본 것 이상으로 부풀리는 리민이었지만, 이런 사고에 이상한 점은 깨닫지 못했다.
아니,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는 게 옳은 말일 것이다.
“가지.”
저 말 많은 멀대 귀쟁이 년이 선생님에게 질문을 던지길 기대하며 환인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리민이었지만…….
‘왜 안 떠드는 건데?!’
이제는 언제 말을 많이 했냐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속이 터진다.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고풍스러운 나무 문.
풍화되어 조금만 건드려도 부스러질 것 같은 문에 환인은 함정이 설치되어있지 않은 지 물리적인 측면에서도 확인한 다음 문을 건드렸고…….
와그작.
쿠와아아악—!!
문이 부서져 내리며 지름이 약 60m는 되는 드넓은 홀의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던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었다.
=우르거네.=
=그것도 두 마리야. 이슬이 네가 갈…… 어!=
말을 꺼내던 안느는 바람처럼 달려가는 환인의 행동에 멈칫했다가 이윽고 그의 활약을 눈에 담았다.
구워어억!!
콰우우우우!!
환인의 돌진에 맞춰 키 3.7m의 배불뚝이 거인 둘이 손에 쥐고 있던 통나무 몽둥이를 내려친다.
콰광!!
굉음과 함께 금가고 먼지 앉은 타일이 깨어져 나가며 흙먼지를 피워올려 시야를 가린다.
그륵?
쿠르르르.
안느는 자신들을 돌아보며 게걸스레 침을 흘리는 우르거를 한심스레 쳐다보았다.
지능이 어찌나 나쁜지, 몽둥이에 피도 살점도 묻지 않았는데 그저 상대가 안 보이니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을 마쳤을 때 우르거 두 마리가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춘다. 이어 목에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지더니 먼저 바윗덩어리 같은 머리가 터덩, 소릴 내며 떨어졌다.
뒤따라 군살이 뒤룩뒤룩 찐 거대한 몸뚱이도 쿠궁, 굉음을 내며 쓰러진다.
우르거가 쓰러진 곳에서 광창을 쥔 모습으로 나타나는 환인.
이실리테는 입을 쩍 벌린 채 입구를 막고 있는 리민의 등을 살짝 밀친 뒤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때 주인님의 손에 광창이 있었으면 지금처럼 손쉽게 잡았을 것 같아요.=
“미미한 차이다. 여유의 차일 정도일까.”
=처음 우르거를 만났을 때 이야기지?=
“그래.”
마지막으로 복도를 확인한 뒤 방으로 들어간 안느는 광명창의 상태를 점검하는 환인을 힐끔 본 뒤 이실리테가 위상석 감지 장치를 가져다 대는 잿빛 피부의 우르거 사체에 시선을 주었다.
저 덩치면 4급에서 5급 사이일 텐데 진짜 깔끔하게 일도양단했네.
그리모암의 강력도 발동하지 않았고 정령 강령을 쓴 기척도 없었으니 단순히 신체 능력과 광명창으로만 해낸 결과물.
같은 조건을 주면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은 두려워하다가 피떡이 되거나 우르거를 난도질해서 죽이지 않을까.
=이거 암컷이었네.=
우르거의 아랫도리를 대강 가린 가죽을 치웠던 이실리테는 1자로 금이 길게 가 있는 사타구닐 보곤 눈썹을 작게 찡그렸다.
그냥 살이 너무 쪄서 가슴살이 늘어진 거로 생각했는데 암컷이었다니.
위상석은 없었기에 고환을 매우 비싸게 판매했던 기억이 있어 우르거의 사체에서 고환을 잘라 내려 했는데, 이러면 꽝인가.
=수컷은 진짜 보기 어려워. 한 100마리를 보면 그중 한 마리가 수컷일 정도?=
맞아. 스사도 수컷은 엄청나게 희귀하다고 했었지?
표범 머리의 얄미운 상인을 떠올렸던 이실리테는 안느가 중도를 꺼내 우르거의 아랫배를 가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해?=
=응? 우르거 암컷 자궁을 채집하려고. 암컷 자궁은 음기 치료제 재료라서, 율이 언니한테 가져다주면 약으로 만들어서 팔겠지.=
=아. 이것도 재료구나.=
=귀쟁이 계집, 이것도 챙겨라.=
리민의 목소리에 그쪽을 돌아본 안느는 발치로 데굴데굴 굴러오는 우르거의 머리통을 잡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우르거의 머리에서 눈알을 적출하려다 리민에게 제지당했다.
=멍청한 계집 같으니. 머리를 통째로 챙기라는 말이다.=
=왜? 우르거 눈알 외에는 안 팔리잖아.=
=에브라드 아카데미에서는 우르거 머리를 해부 실습용으로 상시 10은화에 사들인다. 장시간 사냥할 거라면 가치 대비 효율이 낮아서 버리겠지만, 얼마 사냥하지 않는다면 이런 거라도 챙겨야지. 거기 심장도 뽑고 7번 척추도 뽑아라. 갈비뼈 7번 대와 허벅지 근육 힘줄도.=
돈이 되는 부위에 대한 지적이 쏟아지자 그의 말대로 부산물을 채취하던 안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야. 너 부산물 왜 이렇게 잘 알아?=
=쯧. 미궁에 들어오는 주제에 돈이 되는 것도 알아보지 않고 들어오는 네년들이 멍청한 거다.=
=그래도 너무 잘 아는데.=
=…….=
수준이 낮아서 말이 안 통한다고 여긴 리민은 대답 대신 이 방에서도 이곳저곳을 살피는 환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똑같이 보지만, 뭘 보시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천장의 그림, 2층 높이 창문에 걸려있는 낡은 커튼, 벽기둥 조각에 깨진 바닥 타일 조각.
저기에 공통점이라도 있나?
=도령, 부산물 채취 다 했어. 두 마리해서 이정도면 1.5금화는 나올 거 같아.=
“……해체를 한 건가.”
=응. 리민이 돈 되는 부위를 잘 알고 있더라.=
환인은 두 손이 피범벅인 여자친구들과 시체가 완전히 헤집어진 우르거의 모습에 고개를 작게 저었다.
돈이라면 이형종 부산물보다 부자들의 등을 처먹는 게 더 돈이 되는데 굳이 고생할 필요는…….
하지만 표정이 밝은 그녀들의 얼굴에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녀들이 보람을 느낀다면 제지할 이유는 없지.
“다음은 옆방으로 간다.”
환인은 12번으로 표기된 방을 시작해서 8번과 13번, 17번 방도 낱낱이 살폈다.
옛 고성 북쪽 구역은 미궁이 만들어낸 곳답게 구조는 성과 전혀 달랐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여있는 복도. 비대하게 큰 방과 높은 천장. 곳곳에 보이는 낡고 헤지고 부서지기 직전의 미술품들.
그런 것은 환인에게 중요하지 않았기에 술법 함정의 발견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술법 함정은 나타나지 않았고 방마다 두 마리에서 네 마리 정도의 우르거, 우르거의 사촌쯤 되는 극한의 재생력을 가진 트롬베, 전갈과 말미잘을 섞은 듯한 비라크와 마주치기만 했다.
가끔 보이는 함정은 전부 물리 발동인 일반 함정뿐.
“술법 함정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군.”
=선생님. 4계층 옛 고성 지역에 술법 함정은 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계층인 왕궁 구역과 6계층인 왕족 거주구에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뜻밖의 인물에게서 나온 정보에 환인은 자신의 조사가 부족했음을 느꼈다. 딱히 상관은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목적을 조금 변경하지. 술법 함정과 조우할 때까지 북쪽 구역을 계속 탐색한다.”
=옙.=
=네, 주인님.=
환인은 되도록 긴 복도를 피해 방과 방 사이를 움직이며 이형종의 사냥과 수색을 진행해나갔다.
삐얏!
때때로 비상도 압축된 바람 칼날 등을 이형종에게 난사하는 등 스트레스 해소에 가담했고, 환인은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전투를 전부 맡긴 뒤 고성의 파악에 중점을 두었다.
=멍청한 계집년들! 네년들이 피칠갑이 되어가면서 채취한 부산물보다 이런 미술품 가격이 더 나간다는 걸 모르는 거냐!?=
=아 시끄러워어.=
=모르면 솔직히 모른다고 시인하고 배우란 말이다! 그……!=
쨍그랑—
=……걸 왜 부수냐고 이 아둔한 계집들아!=
=금 간 거잖아!=
=고고학에 골동품은 금도 하나의 멋이라는 걸 왜 몰라?! 지금 네년이 부순 노트룩스풍 아라비아 항아리는 수복해서 잘만 팔면 5금화도 받을 수 있는 거란 말이다!!=
=이게 그렇게 비싸?=
=……! 하여튼 이 멍청한 계집은 진짜……!=
=아, 깬 건 미안한데 그 멍청한 계집 소리 그만해 좀.=
=멍청한 걸 멍청하다고 하지 그럼 골통 빈 암퇘지라고 불러줄까!=
“……리민.”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예술품을 훼손당하는 장면을 직관하곤 펄펄 뛰다가도 환인에게 지적당하면 입을 딱 다물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중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시간이 지나 이실리테와 안느의 실수에 다시금 게거품을 물며 그녀들의 성별을 두고 페미니스트가 들으면 눈알이 돌아갈 정도의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머리에 갈 영양분이 가슴과 엉덩이에 쏠린 거냐! 계집 주제에 대체 섬세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그렇게 부술 줄만 알면 예술적인 갑주와 의복은 전부 벗어 치우고 저 우르거 암컷처럼 아랫도리만 가린 채 나무 방망이나 휘둘러!=
‘잠을 못 잔데다 흥분으로 사리 분별력이 떨어진 건가.’
졸음이 차오르면 절제력도 떨어지기 마련. 게다가 지금 시간도 자정을 넘겼다. 이틀째 잠에서 깨어있는 마당이니…….
의아한 점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그런 혐오 발언에도 불쾌해할지언정 크게 분노하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저런 차별은 여자 입장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겠지.
=머릿속에 뭐가 들어찼길래 한번 말하는 걸로 못 알아듣는 거냐!? 아까는 잘난 척 여자도 능력 있다 주절거리더니 고작 몇 가지 주의사항도 못 외울 머리로 그딴 소릴 지껄였나! 머리가 달려있으면 그 못난 몸뚱이를 치장하는 데만 쓰지 말고 사고력을 높이는 데도 쓰란 말이다, 머리를!=
=에이 진짜. 잔소리 그만해 좀. 그렇게 비싼 거면 네가 직접 챙기면 되잖아.=
하지만 정도가 있다.
리민의 계속된 폭언에 사람 좋은 안느도 이제 불쾌함을 넘어 살짝 분노하고 있는 수준이고 이실리테는 리민이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할 만큼 살기를 피우고 있었다.
더는 선을 넘지 못하게 막아야 할 필요성이 느껴져 환인은 리민의 어깨를 잡았다.
“리민. 정도를 넘는 발언은 삼가라.”
=윽.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 계집들이 워낙 답답하여서.=
“지식과 지혜는 별개다. 둘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 개인 간의 차이는 뚜렷하게 존재하지. 그 점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아집에 사로잡혀 오히려 바보가 될 수 있는 걸 주의해야 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뒤로 확실히 폭언은 사라졌지만, 이미 불쾌함이 기준치를 넘어버린 그녀들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로 인한 사달은 다음 방에서 벌어졌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말미잘이지만 아랫부분에는 전갈의 머리와 집게가 붙어있고 위쪽은 촉수가 징그럽게 난 이형종, 비라크 네 마리와 싸우고 난 뒤.
이실리테와 안느는 뚱한 얼굴로 부산물을 채집하고 환인은 방에 혈관처럼 난 경맥을 살핀다.
그사이 리민은 오각형의 방 한쪽을 장식하고 있는 길이 1m에 폭 50cm의 액자를 발견했다.
‘요만 뒤르켕의 아우푸슬리스의 이삭, 4745년도 작품. 상태도 양호해. 미궁산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더라도 보존 술법을 걸어 경매에 내면 족히 금화 10닢은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비싼 거면 내가 직접 챙기라고 했지?
리민은 도끼눈으로 비라크의 말미잘 몸통을 해체 중인 안느를 노려보곤 그 액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환인이 그걸 눈치챈 것은 반대쪽 벽의 경혈을 확인하다 비상의 꾸우~(저 바보가 이상한 짓 해) 라는 우는 소리를 들어서였다.
거리만 50여 미터가 떨어진 반대쪽 벽.
환인의 기감에서 확실히 벗어난 거리였고 이실리테와 안느가 비라크를 해체하는 소리에 묻혀 리민이 내는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덕분에 환인은 리민이 액자를 뜯어냈을 때 그쪽을 돌아보게 되었고, 액자 뒤쪽 벽에 자리한 시퍼런 위상력의 홀도 보게 되었다.
액자를 미끼로 숨겨진 술법 함정이었다.
“리민, 멈춰라!”
=예?=
=어?=
틱— 공이가 빈 신관을 때리는 소리가 이러할까.
수박만한 시퍼런 위상력의 소용돌이에서 불길한 파열음이 작게 흘러나왔고, 직후 위상력의 홀은 크게 조여들며 자주색과 분홍색이 뒤섞인 불길한 안개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리민에게 뿜어냈다.
=어, 뭐야? 저거! 야, 리민!=
=안느!=
“둘 다 물러서라!”
번개같이 달려가 이실리테와 안느를 잡아챈 환인이 심핵력을 끌어올려 위상류에 밀어 넣는다.
그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가 수 미터 막으로 형성되며 이실리테와 안느를 뒤덮었다.
‘무슨 술법 함정이지? 소환? 전이? 아니면 기체형 살상 함정?’
리민을 두고 이 자리를 빠져나갈지, 아니면 영혼 폭발을 날려 리민을 포함해 통째로 날려버릴지 0.5초를 고민했을 때.
=으, 윽? 뭐…야, 이거……헌…!=
우둑, 뜩. 뚜두둑—
=악. 내, 내 몸……이……! 아악…!=
으적, 뚜둑. 우지직.
=도령, 저거 변이형 술법 함정이야. 이미 발동됐고…….=
“……변이형이라고.”
=응. 소리가 좀 끔찍한데 바닥에 피가 흘러나오지 않는 데다 뼈가 수축하고 꺾이는 소릴 보면…… 리민이 저주에 걸려 다른 몸으로 변하고 있단 뜻이야. 불행 중 다행이려나?=
약간의 당황과 약간의 꼬심이 느껴지는 안느의 설명에 환인도 긴장감을 조금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
“목숨을 잃는 경우는 아닌가 보군.”
=당하면 죽는 변이형 함정도 있어. 강제로 변이시켜 사람의 형태를 잃고 사라져버리는 부류. 하지만 지금 리민이 계속 비명 지르고 있지? 그 정도는 아니란 뜻이야.=
=그럼 어떤 종류의 변신인지 알 수 있어?=
그녀의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던 이실리테의 질문에 안느는 악동처럼 웃으면서 자주색과 분홍색으로 뒤덮인 리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글쎄? 일단 성대도 있고 구강구조도 사람의 비명을 지를 수 있게 남아있으니까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지. 확실한 건 원래 모습을 잃어버릴 거라는 거야. 오, 변이가 끝나가나 보네.=
그녀의 말대로 안개가 점차 옅어져 가며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에이, 날개도 남아있네. 없어졌다면 더 웃겼을 텐데.=
착한 그녀답지 않은 재미 본위의 이야기. 거기서 환인은 저 상태를 해제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긴장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사이 리민을 뒤덮은 안개는 모두 사라졌고, 영혼의 눈에도 위상력의 잔류가 모두 없어진 것으로 보였기에 환인은 주저앉은 리민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여자친구들과 함께 변해버린 리민의 모습을 확인한 환인은 좀처럼 느끼지 않는 경악에 입을 살짝 벌렸다.
=서, 선생니임.=
금을 녹여 붙인 듯한 치렁치렁한 금발. 전과 비교해 선이 더욱 가늘어진 얼굴과 이목구비. 목소리는 1옥타브나 가늘고 높아진데다…….
=제, 제 몸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리민의 손에는 큼지막한 살덩어리가 잡혀있었다.
그 아래로 후드 망토로도 가려지지 않는 가녀린 허리와 잘 발달한 골반, 조금 밀려 올라간 로브 아래로 드러난 하얗고 가느다란 발목까지.
“성별 반전의 저주인가.”
영혼의 눈으로 파악한 환인의 분석에 초절정의 미소녀가 된 리민이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고 안느는 배꼽을 잡은 채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기 시작했다.
=픕, 아하하핫!! 꺄하하하하!!=
환인으로서도 몇 번 듣지 못한 통쾌함이 느껴지는 폭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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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한 업보스택!
히로인들 못지 않은 미소녀가 된 리민의 운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