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 미궁-옛 고성 입구
환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자 리민은 생각에 잠겨들려다 퍼뜩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린 너는 폭주할 기간이 상대적으로 남들에 비해 길다. 그 말은 가문의 명예를 진창에 처박다 못해 문질러 하수구에 빠트리기에 충분하다는 이야기지. 펠드릭스 백작은 가문을 위해서, 널 위해서라도 네 성격과 버릇을 고치길 바란 거다.”
몸과 마음 둘 다 지치고 피로했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리민은 조금이지만 이성적인 사고력을 되찾은 상태.
애초에 머리는 좋았기에 환인의 아우라를 보고 약간 감화된 상태에서 그가 한 말을 곱씹은 리민은 이윽고 자신의 어디가 문제였고, 환인이 무얼 지적하는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예…… 나쁜 짓을 하려면 완전한 악당이 되던가, 그게 아니면 위선이라도 떨면서 명예와 평판을 지키라는 이야기네요.=
=야.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안느가 기막혀하며 딴지를 걸었지만, 리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환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나.”
=모, 못 들어봤어요.=
사회적 동물? 그건 무슨 개념이지?
“사람은 혼자서는 못 사는 존재다. 다른 종 구성원들과 수많은 상호작용을 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크지만, 너는 그중에서도 비대한 존재다. 떠받들어져야만 살 수 있는 부류라는 건 너를 뜻한 말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일까.”
몸에 걸친 옷. 매일 먹는 밥. 치장과 꾸미기에서부터 생활하는 모든 것까지.
“이전의 너는 생산적이지 못한 존재였다. 사회성을 도모하긴커녕 사회 구성을 모두 박살 내는 존재였다. 주변에 해악만 끼치는 존재가 너라는 인간이었지.”
주변의 떠받침이 필요한 존재가 주변을 부순다는 모순은 존재할 수 없다. 그자에게 남은 것은 파멸뿐.
환인은 자신의 이야기에 무언가 크게 깨달음을 얻고 사색에 잠겨 든 리민을 보며 가스라이팅에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라면 의뢰를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가문을 말아먹을 일은 더 없을 테니.
‘그는 손주가 자신처럼 물욕을 내려놓고 앞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길 바랐겠지만…….’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리민의 머릿속에는 귀족주의가 뿌리까지 박힌 상태다. 저런 상태는 고치는 게 아니라 절제 정도를 가르쳐 폭주하는 일이나 빈도를 줄이는 정도가 최선이다.
아예 교정한다고?
한국의 범국가적 그룹인 사성의 황태자를 겸손과 양보가 미덕이라 믿는 서민으로 만드는 일 따위, 인격자로 유명한 가톨릭의 어느 추기경님이나 이미 열반에 드신 고명한 스님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실리테와 안느가 뒷정리를 끝마쳤을 때 눈을 뜬 리민은 환인을 힐끔거리며 우물쭈물하다가…….
=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허리를 숙였다.
조금 뻣뻣한 감이 느껴지는 인사였지만, 첫 만남에서 환인에게 예의니, 자격이니 운운하며 꽥꽥 소리 지르던 것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다.
처음만 어려울 뿐이지, 물꼬를 텄으니 앞으로 행동은 자연스러워질 터.
안느는 이제 리민이 죽을 일은 없단 확신이 들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르침을 깨달았다니 다행이네.=
탁.
=멀대 귀쟁이. 왜 네가 우쭐하는 거지? 난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 거다.=
손이 쳐내진 안느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리민의 뺨을 좌우로 잡아당겼다.
=아가가-! 머하느 지거히아!?=
=뭐 하는 짓거리?! 넌 진짜 혼 좀 나봐야겠다!=
=갸아아-! 찌, 찌어어-!=
“…….”
남존여비 사상도 있나 본데…… 저거까지 손봐줄 필요는 없겠지.
환인은 이실리테가 가져다주는 식후 커피를 즐기며 안느에게 폭력응징을 당하는 리민을 무시했다.
=잠깐,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긴 처음인가?=
1시간 정도 4계층을 가로질러 옛 고성 입구에 다다른 환인은 바리케이드를 만들어두고 보초를 서고 있던 인저족 남자에게 제지를 받았다.
송곳니가 크게 난 그의 머리 옆으로 활짝 열린 왕성 입구 앞 광장 같은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어, 이거 품질이 꽤 좋은데. 이 정도면 같은 무게의 은화하고 교환해주지.=
=좀 더 쓰자 그래? 우리가 하루 이틀 거래한 것도 아닌데.=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보다 더 비싸게 받고 싶거든 나가서 팔고 다시 입장료 내고 들어오던가.=
=쳇.=
바짝 말라붙은 3단 분수대를 중심으로 훤히 트인 광장에는 어림잡아 50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여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물거래를 하는 사람들. 장비의 수리나 감정을 하는 사람들. 부산물을 매입하는 사람도 있고 한쪽에 모여 쉬는 인물들도 있다.
=그런데?=
=아아, 돈을 뜯어내거나 할 목적은 아니니까 경계하지 마. 척 봐도 고등급 모험가인데 허튼수작 부리다 머리통 날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저 규칙을 알려주려는 거뿐이야.=
안느의 경계심에 갈색 털의 멧돼지 머리 남자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무슨 규칙? 시끄럽게 떠들어서 이형종이 몰려오는 일 없도록 하라는 거?=
=그것도 있고, 광장에서 쉬는 동안에 이형종이 많이 몰려들면 퇴치하는 데 힘 좀 보태줘. 모두가 적당히 안심하고 쉬기 위한 휴식 장소니까.=
=흐응. 척 보니까 누구한테 고용된 거 같은데, 구역 소유권 주장은 안 해?=
=했다가 미궁 수비대한테 잡혀갈 일 있어? 큰일 날 소리 마. 저쪽에는 천공기사단의 기사님도 있다고.=
인저족의 고갯짓이 가리키는 곳에는 기분 나쁜 티가 역력한 플라비우스족 천공 기사 일곱이 발걸이형 높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전원 4급이나 되는 것을 보면 이곳을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나와 쉬는 모양새.
=알았어.=
=그래. 고성에 들어갈 건가 본데 행운을 빌어.=
바리케이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좀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부서진 건물을 보강하고 수리해서 쓰는 술집이라던가 여관도 있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창녀들도 보인다.
분홍색 불빛이 여러 개의 창문 틈새에서 나오는 걸 보면 매음굴이겠지.
“…….”
환인은 지나온 골목을 돌아봤다.
광장과 연결된 길목마다 바리케이드가 쳐져 3급 직업자들이 각각 세 명씩 보초를 서고 있는데 은근히 건물을 지키는 모양새다.
아마도 저 직업자들은 이곳에 휴식 장소를 만든 어떤 인물의 고용인일터. 저 건물들도, 매매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그 인물의 소유물 같은게 아닐까.
헐벗은 창녀가 어떤 모험가와 흥정하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이실리테가 안느를 보며 물었다.
=이런 곳에서 장사하면 돈이 될까?=
=입장료가 비싸고 이런 휴식 구역 같은 곳이 있는 미궁에는 종종 보여. 돈이 되느냐면…… 되니까 하는 거겠지?=
특이한 점은 천공 기사들을 제외한다면 플라비우스족이 얼마 없다는 것이었다.
보이는 인물들은 루크랑족 남녀가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사비족, 플뢰족, 프라우드족에 소수 인종이 적당히 섞인 모습.
“이실리테, 안느. 둘은 비상과 함께 여기서 기다려라.”
=도령은 어디 가게?=
“저기서 잠시 정보를 모아오지.”
술을 파는 간이주점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에 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뿐인 곳에 자신이나 이실리테가 갔다간 쓸데없는 관심만 끌어들일 테니 여기서 기다리는게 낫겠지.
환인이 간이주점으로 향하고 안느는 주위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입을 열었다.
=플라비우스족이 안 보이네. 조인족처럼 폐쇄된 곳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 듣긴 했는데 그 때문인가?=
=흥. 당연한 소릴 하는군. 정신이 멀쩡한 플라비우스족이라면 이런 답답한 곳, 절대 안 들어온다.=
밉살맞은 소리에 안느는 팔짱을 낀 리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는데? 밀려오는 구름바다의 미궁 같은 곳?=
=멍청하긴. 팔라툼의 미궁을 목적으로 하면서 팔라툼에 있는 미궁에 관해 공부도 안 했나? 거긴 일반 출입 금지 미궁이다. 간다면 서주산의 창해 미궁이나 동주산의 해천 미궁을 가지.=
=야. 그건 공부가 아니라 플라비우스족 취향 문제잖아. 여기 미궁하고 관계없는 거.=
=그게 아니겠지.=
=응?=
=네가 계집이라서 대부분을 남자인 선생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이 아닌가. 보아하니 멀대 귀쟁이 너나 저 하녀 기사도 머리 쓰고 생각하는 건 전부 선생님에게 맡기고 있던데. 조금만 생각했다면 여기에 플라비우스족이 없는 이유, 간단히 알아냈을 거다.=
대놓고 여자를 비하하는 리민의 발언에 안느는 어이가 없었지만, 환인에게 거의 모든 걸 맡긴 것도 사실이었기에 화는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령한테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게 여자라서는 아니야. 도령의 지식과 지능, 지혜를 우리가 못 따라가니까 역할 분담…….=
=또 변명. 공부와 학습은 발 닦는데 쓸 건가? 선생님이 안 계시면 공부도 없이 미궁에 들어갔다가 죽으려고?=
=…….=
안느가 입을 다물자 리민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비꼬았다.
=하여튼 너희 계집들은 그게 문제다. 뭐만 있으면 남자에게 의존하려 들지. 그러다 잘못을 지적당하면 핑계를 대고 변명하려들고 변명까지 막히면 질질 짜면서 감성팔이나 시도하며 남자들을 흔드려고 해.=
대놓고 역겨워하는 리민의 표현에 안느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걸 자신의 승리로 여긴 리민이 계속해서 비꼰다.
=계집들은 집에 처박아놓고 목줄을 채운 뒤 알이나 낳고 애나 키우게 해야 해. 능력도 부족한 것들이 밖으로 돌아다니면 사회를 망치고 나아가 나라도 망치니까.=
진실의 주시자는 리민의 발언을 모두 진실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리민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는 뜻.
진심이 담긴 이러한 여성 혐오 발언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안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실리테에게 도와달라 해볼까 했지만, 그녀는 리민을 개새끼 미만으로 취급하고 있어 리민의 발언을 개소리로 치부해 조금의 관심도 보여주지 않는 상태.
환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니 고작 이런 일에 말을 꺼내는 것도 창피한 일이라 안느는 얼굴만 붉혔다.
그러다 이 말만은 해야겠다 싶어 우쭐한 표정의 리민에게 항변했다.
=야. 그래도 안 그런 여자도 많아. 능력 있는 여자도 많다구. 테이아무스 섭정 대공도 여자고 영도의 대성녀인 닌실 아나그님도 여자고 라드세아의 국왕도 여자거든?=
=누가 능력이 없다고 했나? 같은 능력이면 남자가 우월한 것이 당연하다는 말인데 그것도 짚어내지 못하고…… 쯧쯧.=
이 정도도 모르다니, 하여튼 멍청한 계집이란.
무슨 말을 해도 혐오로 돌아오는 태도는 안느에게 조금씩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거기다 얄미운 얼굴로 이죽거리는게 얼마나 꼴보기 싫은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자 그걸 본 리민은 때려주고 싶은 표정으로 다시 깐죽였다.
=왜, 또 방금처럼 폭력을 휘두를 건가? 그러고 보면 넌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뭐만 말하면 폭력을 행사하여서 사람을 기절시키고 말이야. 하여튼 무식한 주제에 힘만 세서는.=
=으으으. 짜증나아~.=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 리민에게 뭐라고 콱 쏘아줘서 입을 다물게 하고 싶은데 말재간이 없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안느가 분해서 잉잉거리자 이실리테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얘는 어린애하고 뭘 하는 거야? 그 어린애가 애 같지 않은 쓰레기라고는 해도 그렇지.
이실리테는 안느도 도와줄 겸, 저런 쓰레기와 말을 섞고싶지 않아 살기가 가득 깃든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려는 리민에게 윽박질렀다.
=닥쳐.=
=…….=
=안느 너도 굳이 저런 거 하고 말 섞지 마.=
=그래도…….=
=주인님한테 그렇게 설교를 받아놓고도 저러는 병신이야. 말로 알아들을 머리라면 저런 개소리는 안 해.=
=벼, 병신? 개소리라고?!=
졸지에 개가 된 리민이 마악 화를 내고 이실리테가 살벌한 눈으로 검집을 휘두르려는 찰나.
“소란 피우지 마라.”
=죄송해요, 주인님.=
=네, 선생님.=
시기 적절하게 등장한 환인의 제지에 과열되려는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서로를 노려보고 째려보는 이실리테와 리민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안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들었다.
“주점의 모험가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술법 함정은 입구를 통과해 첫 번째 방을 나서면 나온다는군. 신뢰해서는 안 되겠지만, 주의해서 살피며 들어간 뒤 술법 함정만 확인하고 돌아서 나오려 한다. 질문이 있다면 지금 해라.”
=질문은 없어.=
=없습니다, 선생님.=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서로를 째려보는 안느와 리민의 행동에 환인은 작게 눈썹을 찡그렸다.
리민을 계속 데리고 다녀야했다면 박살내서라도 서열을 주지시켰을테지만, 이제 헤어질텐데 그럴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겠지.
환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의 얼굴로 지도를 접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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