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 미궁-옛 고성 입구
훌쩍. 흡, 쿨쩍. ……후으.
“…….”
‘분위기 굉장하네.’
1분 전부터 아무 말도 오가지 않고 있어 분위기가 무겁기 짝이 없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훌쩍이는 리민. 그리고 그런 리민에게 냉랭한 시선을 주고 있는 환인.
이실리테는 리민 따위 죽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는 태도고 비상도 훌쩍이는 리민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괴물의 소리에 더 관심을 쏟는다.
자신이 한 지적과 유도로 꼬맹이가 환인에게 용서를 구한 것은 나름 뿌듯하기도 했고 보람도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 입에 담지 않는 망할 꼬맹이였다. 그런데 솔직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것은 그 성격에 변화가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건 곧 갱생의 여지가 생겼다는 것이고 환인의 손에 피가 묻지 않아도 되며 꼬맹이도 헛되게 죽지 않아도 될 미래가 찾아온 것이다.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까.
하지만 리민에게 잘못했어요, 라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들은 그의 반응이 조금 예상 밖이다.
합리적인 도령이라면 리민이 용서를 구했을 때 갱생의 여지를 보고 나름 다스리고 구슬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의 일을 건드려서 그런가?’
리민이 부모의 의무를 언급했을 때 환인이 화났다는 건 그를 남편으로 여기는 안느도 눈치챘었다.
그래도 이성적이니까 이해하고…… 으음, 모르겠네.
마음 같아서는 이때 나서서 도령한테 ‘얘도 이제 반성하는 거 같으니까 조금 봐주는 게 어때?’라고 묻고 싶지만, 그건 뭔가 아닌 거 같다.
교육 과정에 관한 결정은 환인이 하는 거고, 훈육이나 성격의 교정에 대해 자신은 아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이 분위기는 곤혹스럽다.
어떻게 하면 이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안느는 주변에 적이 다가오지 않는지 경계하는 데만 신경 쓰고 있는 이실리테에게 다가가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이슬아. 밥 먹자고 하지 않을래?=
=……굳이 지금?=
이 분위기가 굉장하다는 건 이슬이도 알고 있었구나.
=어쨌든 저 꼬맹이를 갱생시키긴 해야 할 거 아냐. 도령은…… 그냥 마지막에 가서 쓱싹할 생각인 거 같지만 그래도 도령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싫고 쟤도 좀 바뀔 거 같은 분위기기도 하고?=
=그래서 밥 먹자고 한 뒤에 주인님한테 계획이 어떤지 물어보려고 그러는 거야?=
자신의 계획을 꿰뚫어 본 이실리테의 물음에 안느는 작게 끄덕였다. 숨길 일도 아니니까.
이실리테는 잠깐 생각하다 안느의 계획에 동조하기로 마음먹고 그녀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런 인간, 그냥 내버려 뒀으면 알아서 화살에 맞아 죽었을 텐데 안느도 착해빠져서는.’
이런 내심이 그녀의 마음속에 있었고 안느의 마음 여린 점을 지적도 할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은 것은 그녀의 상냥함에 자신도 마음의 위안을 얻었었기 때문이다.
안느만큼은 착하게 있어 줬으면 한달까.
무엇보다 주인님의 손에 무의미한 피가 묻는 것은 그녀도 내키지 않았기에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다가가려 한 순간, 비상이 접근해 이실리테의 등을 부리로 쿡 밀었다.
꾸으.
=…응? 왜?=
꾸, 뀻. 큐삣.
뭐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한쪽 어깨에 걸고 있는 배낭을 쿡쿡 건드리는 걸 보면…… 마침 잘됐다.
=주인님. 비상이 배고프다는 것 같아요. 시간도 저녁을 넘겼으니까…….=
“그래.”
그도 비상이 이실리테에게 먹을 걸 달라는 소리는 들었다.
잠깐 주위를 둘러본 환인은 아르겐테아 정찰병 영혼 셋을 불러들인 뒤 영혼 화살 구슬로 가공, 그들이 알려준 오흄 저격수의 위치에 날렸다.
각각 70m, 120m, 180m의 거리였지만 남은 셋이 오흄 저격수의 위치를 근처에서 가리키고 있었기에 해치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근처 저격수는 전부 정리했으니 저 안에서 먹고 가지.”
그나마 집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창고 같은 단층 벽돌집을 가리키자 안느와 이실리테가 안쪽을 살펴보고 정리해놓겠다며 먼저 들어간다.
환인은 그녀들이 반쯤 부서진 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훌쩍임을 멈춘 리민에게 말을 걸었다.
“리민 펠드릭스.”
=예…….=
“왜 용서를 구했는지 그 이유를 들어볼까.”
환인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리민의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에 식은땀이 흐른다.
어쩌지.
귀쟁이 여자도 자리를 비웠으니 거짓말로 대답한다는 방법도 있지만…… 리민은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다.”
움찔.
=저 귀쟁이 여자한테, 죽을 거라고 들었더니… 말이 나온 건데, 잘못했다고 말을 했더니…… 뭔가, 이 부분이 조금 부서진 거 같아서.=
자기 명치 쪽에 손을 올린 리민은 잠시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모르겠어요…….=
“거짓말로 속이려 들었다면 이번에야말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해주려 했는데. 진심이군.”
=……!=
심장이 거칠게 두방망이질 치며 식은 피를 마구 내보낸다.
손끝과 발끝이 차가워져 감각이 사라져가는 느낌에 리민은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성, 성제 정도가 되면 거짓말도 간파하는 건가?
그 뒤로 대화는 멈추었다.
리민에게 1초가 1분 같은 침묵이 흐른다.
=도령. 다 치웠어.=
“따라와라.”
침묵이 끝나고 성제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간 리민은 깔끔하게 정리된 바닥에 깨끗한 돗자리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갓 만든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 고기 스튜와 두부를 매콤하게 덖은 조림, 신선한 샐러드에 먹음직스러운 하얀 쌀밥.
그걸 본 순간 리민은 모든 것을 잊고 극심한 허기에 사로잡혔다. 위장이 쥐어짜이는 통증마저 느껴진다.
어제는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오늘 아침은 정신이 나가 있어서 뭘 먹는다는 생각을 못 했었고, 점심은 20kg의 배낭을 짊어지고 4층을 돌파하는 게 너무 힘들어 식사로 나온 샌드위치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있어서 배고프다는 감각 자체를 잊고 있었는데…….
꿀꺽.
윤기 나는 하얀 쌀밥 위에 고기가 듬뿍 들어간 붉은 스튜가 끼얹어지고 매콤하니 자극적인 향기가 확 피어오르자 위장이 꽉 조여들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을 보자 위장이, 온몸이 먹을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성제, 귀쟁이, 호박색 머리. 차례대로 음식이 돌아가는 모습에 꾸르르륵—, 결국 뱃속에서 곯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자신을 돌아보는 세 명과 한 마리의 시선에 리민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비참했다. 다들 자기를 싫어하니 먹을 것은 주지 않을 테고, 자신은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침만 꼴깍꼴깍 삼켜야 할 테니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무의미하게 죽을 뿐이니 그러지도 못한다.
무엇보다 배고파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서글퍼서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런 자신의 표정을 보여주는 게 싫었던 리민이 고개를 푹 숙였을 때였다.
=받아.=
=……?=
리민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음식에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이실리테의 표정까지 봤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왜, 왜……?=
=주인님은 먹을 걸로 차별하시지 않아.=
=…….=
1초 정도 자존심과 음식을 두고 극심하게 갈등을 빚었지만, 리민은 참지 못하고 그릇을 받아서 허겁지겁 퍼먹기 시작했다.
하얀 쌀밥 위에 시뻘건 스튜와 먹음직스러운 고기가 듬뿍 올라간 덮밥. 코스 요리만 식사라고 생각하는 리민이다.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음식인데…….
=큭, 흑. 우물우물… 끅, 우흑.=
어째서 이렇게 맛있는 걸까.
“…….”
눈물 콧물을 흘리며 밥을 꾸역꾸역 퍼먹는 모습에 플라비우스족 귀공자 같은 면모는 눈곱만큼도 없고 비렁뱅이 소년만 있을 뿐이다.
몇 번 땅을 굴러 하얀 날개는 흙먼지로 더럽혀진데다 발목은 대충 자른 천으로 묶었고 흘린 땀에 흙가루와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꾀죄죄한 모습.
환인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수저를 들었고 이실리테와 안느도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자기 전용 밥그릇에 산더미처럼 담긴 고기를 순식간에 먹어 치운 비상만 ‘저거 왜 저래?’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맛을 다실 뿐.
지금 리민의 상태는, 말하자면 환인이 처음부터 노린 상황이었다.
급격한 감정의 기복을 유도하고 가혹한 구타로 정신력의 마모를 끌어낸다.
잠을 재우지 않아 사고력을 낮추고 혹독한 육체노동을 부과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넣는다.
인간의 정신력은 탄력적이라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리민처럼 분노와 좌절과 격노와 비통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으면 당연히 정신이 못 버틴다.
거기다 몇 번씩 처맞고 기절한데다 제대로 식사도 못 했고 환인에게 끔찍한 구타까지 당했으며 하룻밤 내내 거꾸로 매달려 비몽사몽으로 쉬지조차 못했다.
끝이 아니다. 자기 몸무게의 2배나 되는 배낭을 짊어지고 정신력을 깎아 정신 침해를 거는 미궁을 가로지르다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다.
여기에 착한 경찰과 나쁜 경찰 전략으로 환인이 매몰차고 살벌하게 대하는 가운데 안느만 다독여주고 사람 취급해 주다 극한의 상황에 내밀어지는 따뜻한 손길까지.
귀족으로써 남부러울 것 없이 떵떵거리며 살던 15살 꼬맹이는 절대 감당 못 할 수준의 가혹행위였던 것.
정신력을 깎고 사고력을 둔화시켜 자백을 유도하고 피폐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근현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거, 한국에서 고문이 횡행하던 시절에 주로 사용된 기술이었다.
=…….=
=…….=
식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색한 분위기가 찾아들었다.
물론 리민만 느끼는 분위기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환인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말을 아끼는 중이고 리민은 소매로 대충 눈물과 콧물을 닦아 너절해 보이는 얼굴로 환인의 눈치만 본다.
환인이 그리모암의 강력을 발동한 것은 그때였다.
그를 중심으로 찬란한 황금빛 오로라가 여러 겹 겹쳐 반경 수 미터를 아름답게 흐르자 리민은 그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맹세코 그의 조막만 한 인생 경험과 지식 속에 저렇게 아름다운 아우라는 본 적이 없었다.
대화할 기회를 포착한 안느가 리민의 근처에서 슬쩍 물었다.
=도령의 아우라야. 아름답지?=
반발할 마음도 들지 않는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리민은 고개만 정신없이 끄덕였다.
플라비우스족은 선천적으로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눈부시게 하얀 날개를 미의 정점으로 꼽는 이유도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종족 기질 탓인 것.
심보가 배배 꼬인 리민도 예외는 아닌지라 환인의 아우라를 10분 정도 홀린 것처럼 구경하다가, 아우라가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조금 변한 것을 느낀 환인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리민.”
=예…….=
“네 할아버지, 펠드릭스 백작께서 날 선생으로 네게 붙인 이유를 알겠나.”
자신의 성격이 나빠서 그걸 고치기 위해서란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겠지. 좀 더 숨은 뜻을 묻는 거일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리민은 그에게 반발심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펠드릭스 백작은 네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길 바라서였다.”
=……?=
“직설적으로 말해 펠드릭스 백작도 훌륭하다거나 좋은 사람이라곤 100번 양보해도 말 못 한다. 인정받을 수 있는 부분이라면 별다른 노력도 없이 막대한 부를 일군 상업적 재능, 그리고 말년에나마 자기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성품 정도일까.”
조부를 모욕하는 말이지만, 리민도 그건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백작이 널 부탁한 것은, 네가 펠드릭스 백작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래서였다. 대답해봐라. 네 행동과 사고방식은 백작을 보고 배운 거겠지.”
=예……. 그, 그러면 내 제 성격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는 겁니까?=
“세상에는 너보다 멍청하고 너보다 더 성격이 나쁜데다 심성마저 꼬인 사람이 발에 챌 정도로 널려있다. 열다섯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인 너도 개괄적인 상대적 수치에 따른다면, 돈 많고 싹수없는 자아도취형 애새끼 정도라는 거지.”
=…….=
“문제라면 네가 너무 어리다는 것일까. 널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은 조부뿐. 그마저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데다 그 외 형제도 없고 친인척이라곤 재산에 눈독 들인 방계.”
비탈길에서 제어 장치가 부서진 마차는 폭주 마차처럼 질주하다 어딘가에 걸리거나 부딪쳐 박살날 뿐이다.
그나마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면 멈추거나 할 방법이 있지만, 속도가 상한까지 올라간 마차는 압도적인 힘이 없는 한 멈추지 못한다.
어중간한 이가 나서봤자 마차와 자신 둘 다 파멸할 뿐.
환인의 이야기에 리민의 표정이 진지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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