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 미궁-옛 고성 입구
옛날 사람들은 팔라툼을 천혜의 마경이라 불렀다.
하늘신이 잠시 쉬었다 간 자리라 하여 천주天柱라는 이름이 붙어 플라비우스족의 신앙 그 자체가 된 천주산. 그리고 좌우에서 그런 천주산을 보조하는 동주산과 서주산.
세 곳 산에 각각 세 개씩, 아홉 개나 되는 미궁이 존재했으며 주변 인근 지역에는 스무 개가 넘는 미궁이 난립하고 있었고 팔라툼에서 이어지는 천주산맥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미궁이 난립하고 있었기에 붙은 불명예스러운 칭호였다.
단순히 미궁이 많다는 것만으로 마경이라 부른 것은 아니었다.
미궁이 많다 보니 역류도 빈번히 일어났고 넘쳐흐르는 이형종 탓에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도 막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넘쳐흐르는 이형종 탓에 그에 걸맞은 막대한 부산물이 팔라툼을 늘 풍요롭게 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목숨 걸고 돈을 벌고 싶다면 팔라툼으로 가라는 이야기가 있었을까.
팔라툼의 시민들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으며 어느덧 죽음이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단 인식마저 생겨날 무렵.
=팔라툼과 주변의 많은 미궁을 정리하여야 합니다.=
햇수로만 칠백하고 여든셋이라는 까마득한 과거. 당시의 천왕은 얼마 남지 않은 수명으로 천기를 읽어 히스론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했다.
시주르 대평원 인근을 비롯해 북쪽과 남쪽의 미궁을 전부 정리하고 팔라툼의 미궁 또한 천주산에 둘, 동주산과 서주산에 각각 한 개만 남기라 어명을 내린 것.
현실에 익숙해진 자들에게서 반발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폐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미궁이란 팔라툼, 나아가 히스론드의 풍요를 상징하는 천혜의 선물이옵니다! 그런 은혜를 부순다는 것은 하늘신님의 노여움마저 살 수 있는 일이옵니다……!=
=경의 이야기에 과인도 공감합니다.=
=허면……!=
=그렇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기반은 백성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백성들이 매년 벌어지는 역류에 휩쓸려 헛되이 목숨을 잃고 있다.
=그뿐입니까. 소모되는 백성들의 목숨을 보충하기 위하여 뭍 여성들은 어렸을 적부터 폐경이 올 때까지 쉼 없이 알을 낳고 있습니다. 이런 과도한 난산은 수명을 갉아먹는 행위. 팔라툼 백성들의 평균 수명이 40년을 못 넘긴다는 사실을 경들은 알고 있습니까?=
=그, 그건…….=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죽어가는 백성들의 단말마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자식을 잃고, 지아비를 잃고 슬피 우는 여성들의 울음 소리가 정녕 들리지 않으십니까?=
=…….=
=곧 시대의 흐름이 변합니다…… 쿨럭, 쿨럭.=
=폐하.=
=……세월이 흐를수록 미궁의 심핵력은 쌓여만 갑니다. 그리고 심핵력이 포화되면 폭발하여 주변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미궁의 위험성을 깨달은 각국도 관리가 가능한 숫자만 남기고 미궁을 전부 정리할 것이나 그것은 거대한 사고가 벌어진 이후가 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히스론드만큼은 먼저…….=
그 왕의 천기누설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왕의 강권에 이기지 못한 신하들은 결국 주변 미궁의 토벌을 진행하기 시작하였고, 그 대업을 진두지휘하던 왕은 쇠약해진 몸을 가누지 못해 결국 병사.
왕의 사후에도 유언에 따라 대업은 멈추지 않아 얼마 후, 팔라툼은 인근에 단 네 개의 미궁만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2년 뒤, 벨티칼 인근의 미궁이 마궁으로 변하여 폭주를 일으키다 폭발하였고 주변 미궁과 연쇄하여 대폭발이 벌어져 수복에만 백여 년이 이르는 거대한 참상을 낳았다.
혼이 달아난 모습으로 뒷수습에 국력을 끌어모으는 벨티칼의 재해에 라드세아와 메리아놀은 놀라 주도와 도시 인근의 미궁을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히스론드에 천왕의 말씀은 틀리지 않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은 과거의 이야기.
“……해서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은 1급 미궁일 적부터 팔라툼 정부의 섬세한 관리 속에서 자라나 600년이 넘도록 6급 미궁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베르오간 대미궁 연쇄 폭주 사건은 나도 신학 시간에 배웠지만, 배경에 그런 일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주인님은 어떻게 그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아영이 가져온 미궁 책자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천공성을 방문했을 때 아드우리 공작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팔라툼의 비사라고 이야기해주더군.”
=아. 그 공작 나리가 밀려드는 구름의 바다 미궁 출입증도 주셨다고 했었지?=
“그래. 적이다.”
환인의 짧은 경고와 함께 무너져 폐허가 된 벽돌 건물 모퉁이에서 창백한 회색 가죽의 돼지 머리 인간 넷이 모습을 드러낸다.
늘어지고 투실투실한 뱃살에 비해 돌덩이 같은 근육질의 팔다리. 이블팩션의 주요 인구를 차지한다는 오흄의 반전개체 이형종이다.
촥— 꿱!
퍽, 퍼벙- 쿵콰직!
이쪽을 발견하자마자 푸욱, 콧김을 콧물과 함께 날려 보냈던 오흄 셋은 무언가 시도도 못 해보고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썰리고 찍혀 핏덩이가 되어버렸다.
=헥… 후억, 흐억…….=
자기 몸무게의 절반이나 되는 배낭을 메고 죽을 듯이 숨을 몰아쉬던 리민은 그런 세 명을 괴물 보듯이 쳐다보았다.
여자 둘은 희귀 고등 직업자니까 그렇다 해도 성제인 저 인간도 한 무리의 오흄 따윈 호브처럼 짓밟아버리는 실력자.
저만한 실력이면 이런 미궁 저층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텐데 어째서 계속 돌아다니는 거지?
게다가 방금 나눈 이야기는……
베르오간 대미궁 폭주 사건은 아카데미에서 자신도 배웠다. 하지만 성제가 말한 비사는 아카데미 도서실의 어떤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만한 일이라면 당연히 어록에 남아있어야 할 텐데 어디서 뻔한 거짓부렁을…….
‘……하지만 그 브로치는 실물이었잖아. 아드우리 공작님께 받았다는 건 사실 같은데 그럼 저 이야기도……?’
생각하며 한 걸음 내디뎠던 리민은 발목이 덜컥 꺾이는 걸 느끼며 균형을 잃고 배낭과 함께 콰당, 자빠졌다.
=꾸엑!=
몸을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에 답답한 숨을 토해내며 버둥거리는 리민을 향해 웃음을 참는 목소리가 날아든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넘어지다니, 걸음마를 대충 배웠나보네?=
=바,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
배낭에 깔린 채 버둥거리던 리민은 무겁고 짜증 나는 가방을 옆으로 홱 치워버린 뒤 왼쪽 바짓단을 걷었다.
벌겋게 부어오르는 발목. 시큰거리고 욱신거리더니 역시나 이 꼴이다.
=아프겠네. 치료해줄까?=
=필요 없다!=
리민은 작은 목소리로 성질을 부리곤 후드 로브 소매를 부욱 찢어 발목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다.
나도, 이래 봬도 5급 빛술사다. 미궁에 들어오려고 필요한 공부도 했고 긴급하거나 위기 상황의 응급 처치도 배웠단 말이다!
너저분하고 알량한 적선 따위 받을까 보냐!
리민의 각성 신체 기질은 신체 회복력 향상과 위상력 증가, 위상력 회복량 상승의 상위 기질이다. 이 정도 삔 상처는 걷다 보면 낫는다.
그 개인적인 욕심은 위상력 운용이나 활성화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통각 둔화를 얻는 거였지만 아무튼.
붕대로 감아 응급처치한 리민은 오흄이 떡이 된 곳으로 눈길을 주었다.
=…….=
푸욱, 오흄처럼 콧숨을 내쉰 리민은 절뚝거리며 피에 젖은 몽둥이를 가져와 다시 소매를 찢어 손잡이 부분을 칭칭 감은 뒤 배낭을 짊어지고 몽둥이를 지팡이처럼 짚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본 안느가 제법이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아주 쓰레기는 아니네.=
환인은 그런 리민을 잠깐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재 환인 일행이 걷고 있는 곳은 잊혀진 옛 도시 미궁 2계층.
총 6계층으로 나누어진 이 미궁의 형태는 컨셉은 대지진 후 이블팩션의 습격을 받은 도시.
1계층은 도시 외곽 폐허 같은 느낌이었다.
곳곳에 나무가 심겨 있고 군데군데 위치한 뒤집힌 밭과 부서진 목조, 석조 건물들.
천장은 20m 정도로 높았으며 추정 불가능한 이유로 미궁 전체가 환했기에 활동은 어렵지 않았다.
1계층에 서식하는 괴물은 삼림형 미궁에서 만났던 땅딸막한 인간형 괴물인 호브와 개를 두 발로 일으켜 세운 형태의 콜브.
4층 어림에는 호브와 콜브의 상위 개체인 빅 호브, 빅 콜브도 돌아다녔고 함정도 출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함정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토끼나 화조 같은 것들을 잡을 목적으로 파놓은 듯한 무릎 깊이의 가시 구덩이 함정이나 가시가 난 나뭇가지를 크게 당겨놓은 뒤 건드리면 회초리처럼 휘둘러지는 자연 지형을 이용한 부비트랩들.
30은화를 내고 4계층까지의 모든 정보를 기록해놓은 미궁 책자를 구입했던 환인은 4계층까지의 자료를 모두 머릿속에 담아놨기에 대강 주의사항을 확인하는 정도로 살피며 최대한 빨리 2계층으로 내려갔다.
걸음을 재촉한 이유는 별것 없었다.
1계층은 볼 것도 없었고 수입도 별로였으며 미궁이 만들어내는 폐허 속 잔해와 부산물을 뒤져 생계를 꾸려가는 미궁 일꾼의 시선이 성가실 정도로 모여들었기 때문.
=이슬이 너 때문이야.=
=왜 나 때문인데?=
=네 천상의 장막이 너무 예쁘고 야하니까 그런 거잖아.=
=그래서 망토 두르고 있잖아…….=
=사랑을 듬뿍 받은 야한 몸뚱이는 망토 두르는 걸로 부족…… 으힉! 미안, 잘못했어! 꼬집지 마!=
관심을 받은 이유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쌍익, 두 쌍 날개의 플라비우스족이라면 충분히 귀족 반열에 들거나 귀족가를 통해 신분 상승의 기회를 노릴 수 있을 텐데 짐꾼 일을 하는 희귀한 모습 때문이었던 것.
더욱이 옆에 회색 쿠에를 대동하고 있는데 짐가방을 들게 한 이유까지 생각하면…….
벽에 난 계단을 통해 내려온 5층, 2계층은 풍경이 조금 달라졌다.
똑같은 폐허 미궁이지만, 1계층이 4층으로 나누어진 도시 외곽의 가장자리 느낌이었다면 2계층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저 멀리 어둠 속에 고성 같은 벽 일부가 어른거리는 폐허의 도심이었다.
천장의 높이는 50m로 높아졌고 밝기는 보름달이 뜬 밤 정도가 되었다.
밤처럼 어두운 도심을 배회하는 이형종은 오흄과 그눌.
지구였다면 오크라고 불렀을 돼지머리 인간과 놀gnoll이라 부르는 하이에나 머리 인간들이었다.
주 무기는 녹슨 도끼, 녹슨 창, 박달나무 몽둥이, 얼기설기 만든 가죽옷 등.
외곽에서는 빅 호브와 빅 콜브도 돌아다녔는데 도심으로 들어가자 둘은 사라지고 오흄과 그눌만 출현하기 시작했다.
2계층의 함정도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과 비교하면 아직 별것 아닌 수준이었다.
건드리면 돌천장이나 돌벽이 무너지는 정도인 함정. 혹은 그눌이나 오흄이 벽 뒤에 숨어있다가 누가 지나가면 틈새로 창을 찌르는 인력 방식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꾸와악!
채챙-!
씨발! 콜스, 똑바로 안 잡아?! 이쪽으로 새잖아 병신새끼야!
니미 지금 세 마리나 맡고 있다 씨발년아!
푸하핰!
제드! 웃음이 나와?! 얼른 돼지 새끼들 죽이라고!
꿰에에엥엨!!
대략 80걸음 정도 떨어진 저쪽 사거리, 2~3급의 직업자 세 명이 오흄 대여섯 마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전사 하나, 청술사 하나, 단검 계통 엽사 하나.
적당히 흠집이 나 있지만 잘 손질한 것처럼 때가 탄 장비들과 사용감이 물씬 풍기는 짐 더미를 보면 입은 험하지만 제법 손발을 맞춘 사이.
=…….=
리민은 죽을 둥 살 둥 싸우는 자들을 바라보다 저쪽은 관심도 주지 않고 걸어가는 성제 일행을 얼른 뒤따랐다.
저자들은 여섯 마리를 상대로 저러는데 이 인간들은 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마주친 괴물들을 낙엽 치우는 것처럼 정리해버리는 걸까.
=미궁 구조가 신기하네. 그러니까 2계층은 여기 단층이고, 저 벽에 파묻힌 고성 같은 곳으로 가면 4계층인 고성이고, 저쪽 벽에 있다는 지하로 내려가면 3계층인 지하 감옥이란 거지?=
=응. 지하 감옥에서 계속 내려가다 보면 저 고성이 나온대.=
=내려가는데 올라온다니, 신기하지 않아?=
미궁 책자를 읽으며 걸어가는 안느에게 그간 받았던 핍박을 복수할 기회라고 여긴 리민은 그녀를 향해 이죽거렸다.
=멍청하긴. 튀메리디의 순환 차원 반전도 모르나.=
=…….=
그리고 이실리테의 싸늘한 시선에 움찔했다.
대검으로 찔러 죽일듯한 시선이라는 건 저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뭐라고 한마디만 더 했다간 말보다 칼이 먼저 날아올 거 같아서 침을 꼴깍 삼켰을 때, 안느가 이실리테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 웃었다.
=그거 위상학이지? 난 신학만 공부해서 그쪽은 잘 몰라.=
=……맞다. 미궁 위상학의 일부로 미궁 순환에 관한 분야다.=
=오. 미궁 위상학은 보통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상급 교육기관에서 배우는 거일 텐데 벌써 익혔어? 그래서 튀메리디의 순환 차원 반전은 뭔데?=
=포탈식 공간이동의 토대가 된 공간 왜곡 현상 이론이다. 계단에 작용되어있어 내려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아차원에 진입하게 되고, 아차원을 빠져나오면 지정된 지역으로 전이하게 되는 순환 기관이지. 그래서 3계층 지하 감옥을 내려가면 고성으로 올라오게 되는 거다.=
=학자들은 대단해. 그런 사소한 현상을 연구해서 굉장한 기술을 발견해내잖아.=
리민은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다른 미궁에도 종종 나타난다. 그렇기에 튀메리디 학자도 연구했던 거겠지. 참고로 전이 함정도 이 순환 차원 반전의 변주다. 둘 중 하나가 나타났다면 다른 곳에도 다른 하나가 있다고 봐도 무방해.=
팔랑팔랑-
=앗, 진짜 4계층에 전이 함정도 있잖아. 술술 대답하는 거 보면 확실히 익혔다는 건데 제법이네.=
=……흥.=
안느의 순수한 감탄에 이상한 기분이 든 리민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상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째서?’
절뚝거리고 있지만 좀 전보다는 확연히 나아진 걸음으로 뒤따라가면서 생각하던 리민은 귀쟁이년의 반응이 아카데미의 누구하고도 달랐기 때문이란 걸 알아차렸다.
방금처럼 지식을 뽐내면 일부는 또 아는 척한다며 짜증 내고 일부는 역시라고 추켜세우며 아부하고 일부는 무시만 했지, 저리 순수하게 반응해준 사람이 없었다.
아카데미뿐만 아니다. 자신의 생활 반경에 저 여자 같이 반응하는 사람은 한 명도 존재하질 않았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다가와도, 몇 마디 이야기만 나누면 대다수는 무시했고 다가오는 자들은 아부꾼이었으며 자신이 다가가면 짜증 내면서 멀어져갔다.
저 성제와 호박색 머리카락의 땅개년, 자주색 머리카락의 암살자년처럼 말이다.
=…….=
리민은 애써 이상한 기분을 털어내며 평소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잘못 없어. 주제도 모르고 추하게 시기하고 질투하는 놈들 잘못이지.
……그럼 성제도 주제를 모르는 인간인가?
……몰라. 아무튼 그놈들 잘못이야.
포격 맞아 부서진 듯한 성당. 충차에 들이받힌 것처럼 건물 전체가 뒤틀려버린 종탑. 괴물들에게 무너진 듯한 의사당.
환인은 영혼의 눈을 켜고 작은 광역시 수준의 2계층을 돌아다니며 미궁에 흐르는 에너지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2계층 정도에서 미궁 심핵력의 흐름을 읽는 것은 무리인가. 심층으로 가면…….’
심핵력 같은 것으로 추정되는 기운이 미궁의 벽을, 천장을, 바닥을 타고 흐르는 게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 기운은 말하자면 작게 흐르는 개울, 혹은 작은 호수의 수면 같은 느낌이다.
물결이 치고 물살이 흐르는 건 보이지만 이게 어디서 흘러오고 있으며 어디로 흘러가는지, 호숫물이나 개울물의 성분은 어찌 되는지, 어째서 수중 생태계가 형성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의 눈으로 그 기운의 흐름을 봐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적었던 것.
“…….”
리민이 말했던 순환 차원 반전 현상을 보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3계층인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면 예정했던 시간을 훌쩍 넘기게 된다.
4계층인 옛 고성으로 들어가 계단을 확인하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4계층부터는 술법 함정이 나타나니 위험 요소가…….
‘영혼의 눈으로 술법 함정의 위상력 유동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걸음을 멈춘 환인은 4계층인 고성을 들어가야 할 이유와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떠올리며 천칭을 기울였다.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이유라면 단연코 술법 함정의 위험성 때문이다.
술법 함정도 여러 종류다.
간단하고 덜 위험한 것은 속성 화살 함정, 환각 가스 함정, 감각 혼란 함정, 마비 함정처럼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고 끝난다.
그러나 닿는 순간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초전격 함정, 한 줌 핏물로 만들어버리는 초산성 함정, 강제로 무작위 장소에 전이시켜버리는 전이 함정이나 밟으면 주위에 괴물을 마구잡이로 생성해버리는 소환 함정, 생명력이나 위상력을 바닥까지 빨아들이는 드레인 계열의 함정 등.
고위험군에 속하는 함정은 정말 대처할 틈도 없이 한순간 목숨을 앗아간다.
이런 술법 함정의 특징이라면 구조와 발동이 위상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술법 함정에 가까이 다가가면 위상류를 자극받는 느낌이 들었었다.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 18층에서 직접 체험해본 것이니 틀릴 리 없다.
그 말은 위상력이나 마력, 정령력, 심핵력 같은 에너지의 흐름을 보게 해주는 영혼의 눈이 있다면 함정을 피해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
‘고성의 술법 함정은 대체로 공간에 작용하는 것들이니…….’
밟는 순간 전신을 꽈배기로 만들어버리는 극악한 함정 같은 것들은 5계층 이하에서나 발견된다고 책자에 나와 있었다.
물론 책자를 맹신하는 것은 금물. 4계층 초입에서 영혼의 눈으로 술법 함정을 찾을 수 있는지만 확인하고 나오는 정도면 괜찮겠지.
=도령. 바깥 시간으로 슬슬 오후 7시가 지나고 있어. 밥 먹고 그 뒤에 더 탐사할지 쉴지 정하는 게 어때?=
안느의 알림에 환인은 광량의 변화 없이 어두컴컴한 도시를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고성 쪽으로 가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지.”
=고성 잠깐 들여다보게? 술법 함정은 어쩌고?=
“그 술법 함정을 확인해볼 생각이다.”
대답해주며 자신의 눈을 한차례 가리키니 이실리테와 안느도 그 뜻을 알아듣고 수긍한다.
하지만 여기 수긍하지 못한 한 명이 있었으니.
=자, 잠깐! 함정 전문가도 없이 4계층에 간다고?! 난 반대다!=
헉헉, 배낭의 무게로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리민이 나무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반쯤 기댄 모양새로 소리쳤다.
“…….”
=바, 반대요.=
환인의 시선에 급격히 쪼그라드는 리민을 향해 안느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왜 반대인데?=
=그걸 말이라고 묻나?! 4계층에 위험한 술법 함정이 얼마나 많은데 네년도! 저기 저 계집도 성제의 하녀와 시종이지 함정 전문가는 아니지 않나!=
2계층까지는 함정 전문가가 없어도 크게 지장은 없다. 함정이라고 해봤자 작은 동물을 잡을 수나 있을까 싶은 허술한 물건이 대다수니까.
혹은 쏟아지는 돌무더기를 맞아 타박상을 입던가.
하지만 4계층은 이야기가 다르다. 까딱 실수했다간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함정들이 얼마나 즐비한데!
=가겠다면 너나 네 주인을 따라가라! 난 이대로 되돌아 나가겠어!=
강경한 리민의 태도에 안느는 일리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도령의 능력을 모르고 고성에 대해 공부했다면 저런 반응을 하는 게 정상이지. 말없이 묵묵히 쫓아오는 게 미친 거고.
리민은 조금 떨리는 심정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환인의 시선을 받아냈다.
적어도 지금 자신의 논리에는 틀린 게 없다. 지나가는 탐험가나 모험가를 붙잡고 물어도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터!
그렇게 생각하던 리민은 환인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습에 오금이 저려 반사적으로 안짱다리를 했지만.
=어, 어?=
환인이 자신의 가방을 한 손으로 들어 쿠에의 등에 가볍게 올리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 테면 가라. 살아서 나갈 수 있기를 빌어주지.”
=뭐? ……라고요?=
=도령, 저게 살아서 못 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음, 저건 날개도 있고 5급 빛술사잖아. 머리도 좋아서 온 방향도 대강 기억하고 있을 텐데 그냥 날아가면 되는 거 아냐?=
정말 몰라서 묻는 안느의 질문에 환인은 손에 들고 있던 광명창의 코어로 멀리 솟아있는 폐허 건물 몇 군데를 가리켰다.
“저곳, 저곳, 그리고 저곳과 저곳에 오흄 저격수가 있다. 저곳뿐만 아니라 4층으로 올라가는 길 곳곳에 저격수가 숨어있지.”
=세상에……. 나 전혀 눈치 못챘어.=
움직이면서 계속 아르겐테아 정찰병을 활용해 지형지물을 확인하던 환인이다.
성가심을 피해 저격수가 있는 곳은 돌아서 움직였고, 피해갈 수 없는 곳의 저격수는 들개 전사단의 악령을 두셋씩 보내 빙의시켜 자살하게 만들었기에 이실리테와 안느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이런 게 가능한 것도 2계층 뿐이겠지만 아무튼.
“저 벌거숭이는 근접 직업자도 아닌 술법사에 체력도 바닥이고 신체 능력도 단련하지 않은 15살이다. 저격수의 저격을 피할 공중 기동이 가능할 거 같진 않군.”
=…그렇겠지?=
“그리고 여긴 4계층의 중심가 부근이지. 곳곳에 이형종이 숨어있거나 돌아다니는 중이다. 5급 술법사라지만 실전 전투 경험도 없으니 이형종 무리와 마주쳤을 때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날아서는 못 간다. 걸어서는 더 못 간다. 숨어다니는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식량도 없다. 장비는 더더욱 없다.
상황을 깨달은 리민의 안색이 파리해졌을 무렵, 환인이 리민의 목에 건 아우라 은폐 목걸이를 회수했다.
그러자 환히 퍼져나오는 백색의 기파 같은 아우라.
“저격수의 저격에 맞지 말라고 계속 채워놨지만, 죽을 놈이면 필요 없겠지. 돌아나가면 펠드릭스 백작께 네 죽음은 전해주마. 잘 가라.”
=어, 어. 어?=
환인이 먼저 고성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실리테와 비상도 리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환인의 뒤를 따른다.
안느는 얼이 빠진 리민을 한심스레 바라보다 그의 뒤통수를 퍽, 후려쳤다.
=켁. 왜 때려!?=
=바보야. 얼른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
=뭐?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너보다 몇 배는 더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 도령이야. 네가 생각한 걸 도령이 생각 못했을 거 같아?=
=…….=
=아니면 자존심 부리다 아무도 없는 데서 아무도 모르게 죽을 거야? 그거 개죽음이 따로 없겠네.=
안느도 환인이 간 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리민은 화장실이 마려운 소녀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부르르, 눈물이 살짝 고인 눈으로 후다닥 안느의 뒤를 쫓았다.
=자, 잘못했, 잘못했어요…!=
입에 용서를 담는 순간 리민은 가슴속의 무언가가 조금 깎여나가는 걸 느꼈다.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
아니, 예전에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는 거 같다. 그게 언제였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였나?
리민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흘렸다. 왜인지 모르지만, 마음속이 조금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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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안느 착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