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 잊혀진 옛 도시 미궁
두들겨 맞고 회복을 받아 정신을 차리고 다시 두들겨맞기를 수 차례.
마지막에는 뼈가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얻어터진 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하룻밤동안 방치되었다.
=끄……. 어…윽……. 꺼어…….=
덕분에 밤새도록 리민의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고, 애초에 잘 생각이 없었던 환인은 그 옆에서 밤을 지새운 뒤 날이 밝자마자 줄을 끊어 리민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비몽사몽인 리민의 배를 퍽, 걷어차 깨운다.
=끄헉! 끄으…….=
“일어나라.”
=모, 몸에 힘, 힘이…….=
어지간히 튼튼한 사람도 하룻밤을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피가 머리에 쏠려 강렬한 현기증과 어지러움, 고통을 호소할 정도다.
심하면 실신하기도 하는데 15살에 불과한 리민은 제대로 운동도 하지 않아 허약한데다 온몸에 타박상을 입은 채로 하룻밤을 꼬박 매달려있었다.
당연히 상태가 극히 안 좋다.
“…….”
하지만 환인은 말없이 광명창을 꺼내 들었고, 어젯밤의 기억이 머릿속에 덧씌워진 리민은 바들바들 떨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만큼 어젯밤에 벌어졌던 매타작은 리민의 본능에 공포라는 감정을 강하게 심어놓았던 것.
환인은 아침을 준비하던 이실리테와 뒤숭숭한 분위기에 조금 일찍 일어나 거실을 기웃거리던 유르파에게 다가가 말했다.
“잠시 나갔다 오지. 유르파, 아우라 은폐 목걸이 하나만 주십시오.”
=응.=
아우라 은폐기를 받아 온몸이 멍투성이인 리민의 목에 채워 아우라를 숨긴 환인은 조금 낡은 후드 망토를 꺼내 리민에게 뒤집어씌웠다.
날개 탓에 등 부분을 일부 찢어야 했지만, 어차피 동화 몇십 닢에 불과한 물건.
그 상태에서 리민과 아영을 대동해 에브라드 아카데미를 찾아간 환인은 마침 등원 중이던 학생들을 무작위로 붙잡아 질문을 던졌다.
리민=펠드릭스를 알고 있습니까.
리민=펠드릭스의 평판은 어떻습니까.
그의 평소 행실은 어땠습니다.
그의 성미에 대해서 아는 대로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심상치 않은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쏟아져나왔다.
7급 성술사 아우라에다 안느에게서 빌린 법복 외투를 걸친 아영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질문하는 환인 또한 외모와 몸에 걸친 장비가 최고위 귀족처럼 부유해 보이기도 했고 플뢰족인 아영이 신관처럼 거룩한 목소리로 그 어떤 피해도 주지 않겠다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리민 선배요? 그 사람은 좀…… 독선적이죠.=
=자기 맘에 안 들면 용병을 데려와서 골병이 들 정도로 두들겨 패요. 그리고는 선심 쓰듯이 하급 회복제를 던져주죠. 길가다 벼락맞아 죽었으면 싶을 정도로 싫어요.=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게 자기 잘못이어도 절대 인정 안 하는 개군상?=
=상종도 하기 싫을만큼 짜증 나는 인간이에요. 이쌍익을 그 나이에 이뤄낸 건 대단하지만, 그것도 전부 금붙이 괴물이 갈취하다시피 모은 영약의 힘일 게 뻔하잖아요. 더러워서 진짜.=
중간에 낡은 후드 망토를 뒤집어쓴 리민을 의심스레 쳐다본 학생도 있었지만, 아우라가 없는 이쌍익이 의심스러워서 보았을 뿐 그가 리민이라고 생각한 학생은 없었다.
=다들 리민 펠드릭스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펠드릭스 백작 가문의 차기 당주니까 어쩔 수 없이 비위를 맞춰주죠.=
=펠드릭스 가문의 금력을 생각해보면 마찰을 빚는 건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욕하고 침 뱉으면서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어요.=
=그놈 때문에 아카데미를 관둔 애들만 열일곱 명이 넘어요. 다들 재능있는 친구들이었는데 학과 시간에 자기 뜻을 반박했다고, 자기 그림자를 밟았다고, 지나가는데 괜히 거슬려서라는 이유로 괴롭힘당하다 관뒀죠. 제 후배도 그중 한 명이었어요.=
=아카데미에서 리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좋아하는 ‘척’할 뿐이죠. 뭐.=
=맞아.=
=진짜 싫어.=
=그냥 안 보이는 데서 콱 죽어버렸으면.=
나중에는 잡지도 앉았는데 찾아와 너도나도 리민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옹호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으며 전부 리민을 매도하는 이야기뿐.
리민이 그 결과에 충격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환인은 우두커니 선 리민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제 뭘 잘못했냐고 물었었지. 이게 그 대답이다.”
=…….=
“사람은 이유 없이 상대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열다섯의 나이로 특별한 직업적 사유 없이 사방에 적을 만들었을 경우 십중팔구는 당사자의 문제지.”
=아, 안느 언니 법복 빌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좀 크지 않았어?=
=언니한테는 반코트가 저한테는 롱코트더라고요. 그래도 법복에는 헐렁한 느낌이 많아서 이상하진 않았어요.=
=아영. 식사 준비가 다 됐으니까 탁자 좀 정리해줘.=
=넵!=
=나도 도와줄게.=
=오, 려강아 사랑해~.=
리민은 조금 복작거리는 거실에서 홀로 고립된 기분을 느꼈다.
세상이 드넓어지며 타인과 자신의 거리감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끔찍한 감각.
참을 수 없었던 리민이 쌍심지를 켜고 환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요! 이제 와 그 병신들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라도 빌라고? 하! 그런 덜떨어지고 모자란 것들 앞에서 고개를 숙일 바에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고 말지!=
=아유, 저 성질머리.=
음식을 날라오던 안느가 드물게 혐오를 드러내며 얼굴을 찌푸렸지만, 리민은 그 소리에 ‘어쩌라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든 내 알 바 아니다.”
=……어?=
“팔라툼을 떠나기 전까지 널 데리고 다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떠날 뿐, 그 후 네가 어떤 삶을 살지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 그때까지 너에게 행동의 자유는 없다는 걸 명심해둬라.”
=…….=
목적을 알 수 없는 환인의 행동에 리민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 할아버지의 의뢰를 받은 게 아니었어? 아니, 분명 교정이라고 했는데……. 알 바 아니라면서 왜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거지?
=그럼 다녀오겠슴다!=
=저희 다녀올게요. 오라버니, 언니들도 조심히 다녀오세요.=
=잘 배우고 와~.=
백려강과 아영이 엽사 조합으로 출발한 뒤, 환인과 두 여자도 잊혀진 옛 도시 미궁으로 들어갈 채비를 한다.
식량, 취사도구, 야영 준비물에 전투 비품과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물건들.
길게 탐사할 것도 아니고 하루 동안 미궁을 내려간 뒤 다시 하루를 써서 돌아오는 이틀 탐색 코스라 준비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술법 함정은 지하 12층 아래, 4계층부터 출현한다는 자료에 일단 분위기만 보러 먼저 들어가는 것.
꾸우.
비상의 등에 군용 수송 마도구 배낭을 올리고 이실리테와 안느도 각자 소형 백팩을 짊어진다.
=이전이었으면 조금 걱정했을 텐데 지금은 하나도 걱정 안 되네.=
안느가 마지막으로 채비를 점검하며 말하자 그녀들의 준비를 곁에서 돕던 유르파도 후후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자기가 유물을 전부 모았으니까.=
그리모암의 유물 다섯 점을 모두 모은 덕에 일행의 최강자는 명실상부 환인이 되었다.
이전에도 무력 수준은 범접 못 할 정도였지만, 어떻게 한 대만 때리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진짜 완전체가 된 느낌.
이슬이와 자신이 합심해서 전력으로 들이박아도 여유롭게 1분 컷을 낼 정도니…….
비상의 깃털 색을 바꾸는 환인을 잠시 바라보던 안느는 마지막 잡동사니 가방을 들어 휙- 리민에게 던졌다.
=야. 이거 들어.=
그걸 엉겁결에 받았던 리민은 예상 밖의 무게에 =으악?!=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가방과 함께 뒤로 구른다.
한 손으로 가볍게 던지길래 가벼운 줄 알았는데 받고 보니 20kg이 넘었던 것.
=진짜 허약하네.=
안느가 한심하다는 투로 혀를 차자 리민이 빨개진 얼굴로 버럭 고함질렀다.
=비, 빌어먹을 귀쟁이 같으니! 네가 오우거 같은 거다!=
=응~ 비실이 샌님이 하는 소리는 안 들려~.=
“출발한다. 유르파, 집을 잘 부탁합니다.”
=맡겨주렴. 다치지 말고 다녀와~.=
유르파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온 환인은 미궁의 일꾼들이 주는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 미궁 입구 광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이는 몇몇 방황하는 영혼들.
푸른 영혼을 발견하면 바로 계약을 맺기 위해 벼르는 중이지만, 팔라툼에서 발견한 영혼은 전부 회색이었다.
‘일반인보다 직업자의 영혼이 푸른색으로 발현될 가능성이 큰 거겠지.’
영혼의 눈을 켜고 돌아보면 그 가설의 신빙성이 더 높아진다.
일반인들은 100명 중 99명이 회색의 영혼 기운이고 가끔가다 1명, 한 분야의 전문가 정도인 사람들만 푸른색이 보였던 것.
그에 비하면 직업 각성자들은 10명 중 다섯 명이 푸르게 보인다.
영성들이 어째서 푸른 영혼과 계약은 하늘이 점지해준 기회라 하는지 이해 가는 분포다.
직접적으로 죽음과 연관되어있다면 적개심 같은 부류 탓에 계약 불가, 그렇다고 늦게 현장에 도착하면 영혼은 성불해버린다.
푸른색 영혼들은 자존심도 강하기에 말로 간단히 회유되지도 않기 일쑤.
아르겐테아 정찰대 여섯과 계약을 맺은 것도 상황이 받쳐주었기 때문이지, 당시 분위기에서 하나의 요소라도 빠졌다면 계약을 맺기 어려웠을 거다.
‘그러고보면 트라프 영성과 거인들이 영도에 도착할 무렵이군.’
영성을 통해 전달을 부탁한 농법서가 닌실의 손에 들어가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비밀리에 전달한 것이니 놀라워하면서도 감격할 것 같다. 거기다 테이아무스 섭정이 준비중인 막대한 식량의 기부도 도착한다면…….
메리아놀과 엘위드리스 가문에도 잠깐 생각이 미쳤지만, 환인은 이른 아침인데도 북적거리는 수천 평 넓이의 미궁 앞 광장이 눈앞에 펼쳐져 생각을 접었다.
회색 블록이 가지런히 포장되어있는 원형 광장.
가운데 대형 분수 근처에는 관공서의 허락을 받은 개인 노점상이 구역을 나누어 가지런히 벌려져 있거나 장사 준비를 시작하는 중이고, 포장마차 같은 것도 곳곳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미궁에 출근하는 일꾼들을 잡아당긴다.
생활감이 가득한 광장 외곽에는 다종다양한 점포가 즐비하게 늘어서서 미궁의 일과를 함께 시작하는 중.
=헥, 헉, 흐엑. 흐업.=
=잘 따라와. 미궁 안에서도 지금처럼 느리면 버리고 갈 거니까.=
=크윽……!=
후드를 뒤집어쓴 이쌍익을 짐꾼으로 사용하는 고위 모험가 차림의 일행에게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진다.
=이쌍익인데 아우라가 없네……. 어쩌다 저런 신세가 됐지? 두 쌍이면 자존심도 엄청 강할 텐데.=
=돈에 팔린 거 아냐?=
=뒤지면 뒤졌지 몸은 안 파는 게 날개들인 거 아직도 모르냐?=
=미궁 안의 자료 조사를 위해 자원한 거 아닐까? 세 명 차림 봐봐. 고가의 마도구로 둘둘 감고 있잖아.=
=차림도 차림이지만 저거 회색 쿠에지? 회색 쿠에를 짐차로 쓰는 거 보면 어디 유명한 1급 파티인가 본데 왜 본 적 없을까.=
=저 희귀 아우라는 처음 보는데 무슨 직업인지 아는 사람?=
검희는 라드세아 쪽 영웅의 직업이고 정령 기사는 플뢰족 전용 희귀 직업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이곳 히스론드에서는 둘의 아우라를 몰라보는 쪽이 더 많다.
만약 비상의 깃털 색을 녹색 그대로 두었다면 성제 일행이라 눈치챘을 이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
물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다.
=어이쿠, 못 보던 분들이신데 잊힌 도시 미궁에 처음 가시는 겁니까? 안내인을 안 구하신 거 같은데…….=
=이봐, 이거 보여? 서로 얼굴 붉히다 그쪽 얼굴 뭉개지기 전에 그냥 갈 길 가지?=
=……엇, 어. 죄, 죄송했습니다!=
안느가 아드우리 공작에게 받은 미궁 자유 출입 증명권, 태양과 눈을 적당히 섞은 백금색 브로치를 내밀어 흔들자 얇실한 인상의 인랑족이 허둥지둥 물러난다.
그 덕분에 땅에 떨어진 각설탕에 모여드는 개미처럼 슬금슬금 모이던 야바위꾼들이 냉큼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하여튼. 어딜 가나 저런 인간들이 있다니까.=
=주인님 말씀대로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인 거겠지. 주인님? 미궁 입구는 저쪽인 거 같아요.=
“그래.”
마치 유원지의 테마파크 입구처럼 하얀 성곽 같은 미궁 출입구.
거기에는 입구가 둘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쪽은 일반적인 모험가 직업자들이 백여 미터 이상 줄 서서 신분 증명과 세금을 내고 들어가는 입구고 다른 쪽은 척 봐도 수준 이상인 소수의 모험가가 바로바로 들어가는 입구다.
그리고 가운데 커다란 입구에서 짐을 가득 짊어지고 피로하거나 지친 얼굴로 드문드문 빠져나오는 사람들.
환인 일행이 향한 곳은 그중 좌측, 줄이 없는 출입구였다.
=어서 오십시오. 잊혀진 옛 도시 미궁 출입관리소입니다. 처음 뵙는 분이신데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있으십니까?=
단정한 관리복 차림의 플뢰에게 안느가 백금색 브로치를 내민다.
=……아드우리 홀디스 크아로티잔 공작님의 추천 증표를 확인했습니다. 1인당 10은화의 입장비와 25%의 미궁 수익세는 면제이십니다. 바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응.=
=알겠습니다. 하늘신님과 땅신님의 가호가 여러분들의 앞날에 함께 하길.=
신분 확인조차 건너뛰게 만드는 증표의 위력에 환인 일행은 관리원의 축언을 들으며 시커먼 공간이 일렁이는 미궁 입구로 걸어 들어간다.
후욱, 허억. 허억. 후으…… 꼴깍.
주변이 어두워지고 동굴처럼 좁아질수록 리민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다 급기야 침을 삼키는 소리에 안느가 피식 웃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어도 미궁은 무서운가 보네?=
=큿……. 귀쟁이 네년이 내 소지품을 다 뺏어가 놓고 안 돌려주어서 그런 거 아닌가! 내 장비만 있다면 이깟 미궁 따위……!=
“시끄럽다.”
어젯밤보다도 낮은 환인의 목소리에 리민은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메아리처럼 동굴 벽에 반사되던 리민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사라져간다.
“미궁 안에서 소리 지르거나 소란을 일으키지 마라. 경고는 이번 한 번뿐이다.”
=어, 어기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건 만나는 이형종에게 물어보도록.”
=…….=
예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대답에 리민은 다시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망할 귀쟁이 년이 도발해도 결코 입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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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어휴 우리 독자님들도 참. 보추 암타 같은건 없습니다!
보추라고 해도 남자잖아요. 남자가 성적으로 다가오면 주인공은 눈하나 깜짝하지않고 광창으로 반갈죽해버릴거에요
ㄹㅇㅋㅋ만 치라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