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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601화 (601/813)

600 잊혀진 옛 도시 미궁

안느에게 신성 빛의 구체 술법을 펼쳤다가 얻어터지고 기절해 구석방에 처박혔던 리민.

몇십 분 뒤 팬티 차림으로 깨어났다가 자신의 차림에 격노한 그는 안느를 찾아가 따졌다.

=이 커다랗기만 한 천한 것아! 내 소지품을 내놔라!=

뻑!

모욕적인 말을 쏟아붓고 돌려받은 것은 뇌를 뒤흔드는 안느의 장저.

머리통이 휘저어져 기절한 리민은 한 시간 뒤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재차 격노, 과거의 행동에서 경험을 얻는 법도 모르는 것인 양 안느에게 달려가 다시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

날개도 없는 덩치 큰 귀쟁이가 손버릇까지 나쁘구나!

쾅!

날개도 없고 덩치도 큰데다 천한하기까지 한 귀쟁이가 손버릇마저 나쁘더니 예의라곤 쓰레기장의 쥐새끼만도 못하구나!

쿵!

이, 이 비루한 귀쟁이가 귀족을 이렇게 때리다니, 네년은 기본적인 사람의 예의도 배우지 못했느냐!

쩍!

……….

=응? 뭐야, 이번에는 말 안 해?=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다 해도 내리 다섯 번을 기절했다 깨어나 하루를 통으로 날려버리면 입조심을 할 수밖에 없다.

리민은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그렁거리는 얼굴로 안느를 노려보았다.

팔라툼의 대 귀족이자 열다섯의 나이에 이쌍익을 이룬 초유의 천재인 자신에게 이런 폭거와 폭행이라니!

게다가 저 주먹은 뭔가! 말을 하면 또 기절시키겠다는 의미가 함축된 행동이 아닌가! 그래놓고서는 더 말 안 하냐고?!

저열한 길거리의 폭력배나 다름없는 저런 것이 권리는 배제한 채 의무만 이행하는 고귀한 영혼 기사라니, 리민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응?=

그리고 술법 함정학 개론을 배우고 돌아온 아영은 천 바지만 입은 차림으로 안느의 앞에서 씩씩거리는 남자를 발견하곤 눈을 끔뻑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 플라비우스족 남자애는 뭔데 집에서 웃통을 까고 돌아다니는 거야?

아영은 그쪽으로 다가가 한심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언니, 저 사람은 누굽니까?=

=왔어? 어제 도령한테 이야기 들었지? 그 녀석이야.=

=아, 성질 개차반에 위아래도 모르고 자기 잘난 맛에 산다던 멍청한 귀족 집안 도련님?=

=……!=

대체 이년들은 뭐란 말인가! 자신의 신분이며 배경, 지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막 대하는 작태라니! 대 팔라툼의 귀족 법도가 이렇게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나?!

자신을 가리키는 멸시 어린 문장과 한심함이 묻어나는 눈짓에 리민은 재차 울컥해서 위상력을 손바닥에 모았지만.

=…….=

=…….=

그걸 술법으로 풀어낼 수 없었다.

위상력을 모으자마자 덩치만 더럽게 큰 천한 년과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년이 무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세상 무서운 게 없던 리민은 처음으로 약한 공포를 느꼈던 것.

아영은 직업자들 사이에서 맞아 죽어도 할 말 없는 짓을 벌이려던 리민을 무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다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언니, 저놈 제가 좀 교육해도 되겠슴까?=

=응?=

=저런 놈, 지금까지 숱하게 봐왔슴다.=

온전히 자기 능력으로 얻은 힘도 아니고 가문이 떠먹여 주어 갖게 된 힘을 제 능력과 자질인 양 세상을 오연하게 내려다보는 머저리들.

아영은 암살자 시절의 분위기를 풍기며 리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놈을 회개시키는 데는 고통만한 게 없죠. 하루만 주면 오빠하고 언니를 보자마자 오줌을 질질 싸면서 개처럼 기게 만들 수 있어요.=

오싹—

=뭐, 뭐…….=

리민은 자주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친년의 눈빛에 오금이 저리며 소름이 온몸을 달리는 걸 느꼈다.

가끔 팔라툼의 뒷골목에서 볼 수 있는 칼잡이들, 전장과 미궁에서 뒹굴며 수백 명의 목숨을 거두어들였다는 살인귀 같은 놈의 눈빛이 저랬었다.

돈만 주면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멱을 따주는 밑바닥 시궁창 인생들. 가진 게 없고 미래도 없어 후환 따윈 생각하지 않고 사고를 저지르는 무뢰배들…….

=이거 웃기는 녀석이네. 나한테는 몇 번이나 기절 당해도 겁 안 먹더니 아영이 너한테는 바로 겁먹는 거 봐.=

=저런 놈들 성미가 저래요. 개겨도 될 상대를 가리는 거죠. 딱 보니 안느 언니는 상냥하고 다정하니까 개겨도 안 죽겠다 싶어서 저러는 거예요.=

=정말?=

=저놈 표정을 보면 계산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거 같은데, 잠깐 지하로 끌고 가서 팔다리뼈를 한 20배 정도로 늘려주었다가 치료해주면 당장은 말을 잘 들을 거예요.=

불구나 후유증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빠 덕분에 절호조가 된 지금의 컨디션이면 8급 성술, 죽은 자의 소생도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벌벌 떨리는 시선과 대화에 리민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불안을 드러냈다.

=너, 너는 신관이나 사제가 아니더냐. 어, 어찌 사람이 그런 살인귀 같은 소리를……!=

애써 두려움을 밀어낸 리민의 떨리는 목소리에 아영이 히죽— 웃으며 리민의 근육이라곤 없는 말랑 가슴을 검지로 쿡쿡 찌른다.

그 손가락질에 칼에 찔리는 것처럼 움찔거리며 물러서는 리민.

=살인귀 맞아. 환인 오빠, 그러니까 성제님께 감화되어서 양지로 나온 카락스의 암살자가 바로 나거든.=

=뭣?! 그 대륙 삼대 암살자의……!=

리민은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암살자의 기본 소양은 추적과 은신, 암살이다. 그런 암살자년이 성제의 명령을 따른다면 자신은…….

두려움에 떨던 리민은 한순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 인정한다. 자신을 몇 번이고 기절시킨 귀쟁이년도, 눈앞의 암살자년도, 성제도. 전부 자신보다 뛰어난 인간들이다.

=하지만 내 성격이 뭐 어때서?! 내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교정시키려 하는 거냔 말이다!=

리민이 발악하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을 때, 거실로 들어가는 문이 딸칵 열리며 그 사이로 이실리테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느, 아영. 주인님이 들어오라고 하셔. 그 인간도 같이.=

복도에 서 있던 그녀들은 이실리테가 전하는 말에 서로를 잠시 보곤 거실로 향했다.

=아악! 귀, 귀! 왜 또 귀를 당기는 거냐! 아아아…!=

코뚜레에 꿰인 당나귀처럼 거실로 질질 끌려간 리민은 분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닥만 내려다보며 씩씩거렸다.

진짜 나잇값도 못 하는 애새끼네.

열다섯이나 먹었으면 사리분별 정도는 할 때 됐을텐데 근처에 쓴소리를 해주는 어른도 없었나?

아영은 한심해하다가 소파에 앉아 독서 중인 환인에게 가서 부탁했다.

=저 인간 저한테 하루만 맡겨주십쇼. 하루면 말 잘 듣는 노예처럼 만들어놓을 수 있어요.=

“…….”

흠칫.

자주색 머리 미친년의 이야기와 성제의 싸늘한 시선에 한 번씩 놀란 리민은 언제 분노했냐는 것처럼 겁먹고 움찔거렸다가, 겁먹은 자신에게 화를 내며 어깨를 펴고 당당히 쌍심지를 켠다.

=나, 나는 폭력에 구, 굴하지 않는다!=

안간힘을 다해 용기를 낸 게 훤히 보이는 모습이 애처롭지만, 거실에 모인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동정받을만한 인간이 아니다.

디전=펠드릭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행을 사주해 정신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혀 아카데미를 자퇴시킨 학생의 숫자만 다섯이 넘어간다.

돈과 지위로 아카데미의 교수를 겁박한 것은 셀 수도 없고 후배를 노예처럼 부린 증거는 넘쳐흐른다.

팔라툼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를 조부로 둔 리민의 패악질은 아카데미 바깥의 디전=펠드릭스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던 것.

그 마음이 여린 백려강마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상황이니 말 다 한 셈.

환인은 책을 덮고 비에 젖은 야생 고양이가 사람을 향해 하악거리는 듯한 리민을 보며 말했다.

“펠드릭스 백작께서 바란 것은 저 애송이의 갱생이지 세뇌가 아니다.”

=저놈의 성격은 유전적인 요인이 아닌 거 같으니까 그냥 머리를 망가트린 뒤에 참한 여자를 붙여서 후사를 빨리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쁘지 않은 의견이다만…….”

=우, 웃기지 마라……요! 날, 날 가축으로 보는 거요!?=

“지금 넌 가축 미만이다.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개돼지나 다름없지.”

=…….=

에브라드 아카데미 내에서 언제나 추종자를 몰고 다니며 그룹의 중심에서 선망과 흠모의 시선만 받던 자신에게 이토록 적나라한 표현을 들이댄 자가 있던가.

리민은 충격에 잠시 굳었다가 이제 뭐가 뭔지도 알 수 없어 억울함을 드러내며 호소했다.

=대체, 대체 이몸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러는 건가! 평민과 서민이 귀족을 우러러보고 받드는 것은 당연한 거다! 돈이 없는 자들은 돈이 있는 자에게 따르는 것이 당연한 거고!=

“그 논리대로면 힘이 없는 자는 힘이 있는 자에게 이용당해 마땅하겠군.”

=바로 그거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를 굴복하고 따르는 게 당연한 논리가 아닌가!=

“그럼 너 역시 내 명령에 굴복하고 따라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일 텐데.”

=어……?=

=어휴. 멍청하긴.=

아영의 한숨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광명창을 발동시켰다.

작은 막대히 형태의 금속 코어가 작게 진동하며 2m의 길쭉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낸다.

그걸 붕— 위협적으로 한차례 휘두른 환인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리민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이 자리에 너보다 힘, 능력, 자질, 신분과 혈통, 어느 것 하나 떨어지는 사람은 없다. 네 주장대로라면 너보다 우월한 사람들이니 널 노예처럼 다뤄도 된다는 뜻이지.”

=그… 그건.=

“덜 여문 머리로 한 생각이 고작 그거인가.”

감흥 없이 눈을 가늘게 뜬 환인은 한 걸음, 리민에게 다가가며 묻는다.

“네가 열다섯에 이쌍익이 된 것이 오롯이 너 혼자만의 힘으로 일궈낸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틀렸다. 네 조부이신 펠드릭스 백작의 지원과, 널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 조부모님, 그 위로 대를 이어 펠드릭스 가문을 부흥시켜온 선조들의 피가 너에게 이어진 것뿐. 지금 널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 중 네 힘만으로 이뤄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조상들이 일궈온 터전에서 오직 받기만 해온 온실 속 화초 같은 인생.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 방약무인하게 살아온 인간. 그게 바로 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환인의 이야기에 리민은 하나로 분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올라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악을 썼다.

=웃기지 마! 날 태어나게 해준 부모니까 그에 걸맞게 키워주는 건 당연한 거잖아!=

“육아는 부모 된 자의 거룩한 권리이자 의무이며 고귀한 자기희생이다. 네까짓 놈이 당연하다는 듯이 입에 담을 것이 아니란 말이다.”

환인의 눈에서 분노의 기색이 한줄기 스쳐 지나가며…… 날카로움보다 단단함에 중점을 두어 형성된 광명창이 리민의 온몸에 쏟아졌다.

=큭!? 억, 끄악!=

하얗게 작열하는 빛의 창이 자신의 몸을 건드리고 지나갈 때마다 리민은 머릿속을 텅 비우는 고통에 거실 바닥을 나뒹굴었다.

생전 처음 겪는 끔찍한 고통.

손가락에 가시만 박혀도 사방팔방 히스테리를 부리던 리민에게 지금 이 고통은 그야말로 뇌를 표백시키는 수준의 통증이다.

=왜, 왜……?=

“존댓말.”

리민은 환인에게 멱살이 잡혀 일어나며 뒤에 벌어질 일을 예감하곤 벌벌 떨었다.

=사, 살려…….=

이어서 쏟아지는 무자비한 타격.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가는 와중에도 고통만은 뚜렷하다.

리민은 쓰러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망가지도 못한 채 춤추듯이 몸을 흔들었다.

일부러 춤을 추는 것이 아니다. 몸에 힘을 주지도 못하는데 몸을 치고 쳐내고 돌려치는 창술에 강제로 몸이 흔들리는 것.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아영은 왠지 소변이 마려운데다 오한이 들어 백려강의 팔을 끌어당겨 안으며 달달 떨었다.

=아영? 왜 그래? 괜찮아?=

=으. 오빠한테 얻어터지던 기억이 생각나서 좀, 춥네.=

아.

안짱다리로 살짝 몸을 떠는 아영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은 백려강은 언니가 동생을 안아주듯 포근히 감싸주며 바지 사타구니가 축축히 젖어가는 리민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미 정신을 잃었는지 눈동자가 풀린데다 입가에 게거품이 흐르고 있지만, 신들린듯한 창술은 멈추지 않는다.

멈춘 것은 지린내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영. 와서 치료해라. 환연은 저놈이 흘린걸 치우고.”

=네, 네헷!=

「어우.」

온몸이 시커멓게 멍들고 지져진채 눈이 까뒤집힌 리민의 상태에 아영은 속으로 이 천둥벌거숭이의 명복을 빌어주면서 5급 성술, 회복의 주문을 외웠다.

상처를 치료하는게 아니라 아예 상처 입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상급의 성술이 아영의 두손에서 쏟아지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리민은 어리둥절해하다가 환인의 목소리에 파랗게 질려버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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