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 잊혀진 옛 도시 미궁
벌꿀을 바른 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금발에 금색 눈동자가 돋보이는 눈꼬리는 살짝 솟아올라 사납다기보다 도도함이 느껴진다.
이목구비는 여자 같으면서도 남자 같은 수려함이 느껴지고 얼굴선 또한 신이 신경 써서 깎은 듯한 황금비율.
환인이 남성성의 알파 메일로서 여자에게는 호감의 시선을, 남자에게는 질투의 시선을 사로잡는 미인이라면 리민=펠드릭스는 같은 남자마저도 혹할 정도의 중성적인 미인.
화를 내는 그 모습마저도 평범한 여자라면 반하고 말 매력이 그에게서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환인의 여자들은 평범하지 않았고 환인도 외모에 영향을 받는 인물이 아니다.
리민=펠드릭스의 5급 빛술사 아우라와 그가 입은 순백의 귀족 제복 복장, 허리춤의 5급 빛속성 위상석을 깎아서 박아넣은 완드를 확인한 환인은 관심 없다는 투로 소파 쪽을 향해 움직였다.
자신의 고성에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 리민=펠드릭스가 입을 다물자 일시적으로 침묵이 내려앉는 거실이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걸어가 1인용 소파에 앉은 환인은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오해하고 있으시군요. 리민 펠드릭스 자작, 그대는 손님이 아니라 제자로서 이 자리에 불려온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그걸 정하는 거요?! 아무리 당신이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성제라 해도 내게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는 없소!=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건가.’
목소리 키도 낮지 않은데 언성까지 높이니 조금 톤이 낮은 여자 목소리라 해도 믿을 정도. 하지만 영혼의 눈으로 잠깐 살핀 바에 따르면 남자가 확실하다.
환인이 가만히 리민을 응시하고 있으니 문 근처에 서 있던 안느가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어,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 서서 대화는…….=
=닥쳐라! 날개도 없는 반푼이 계집 따위가 감히 어디서 끼어드는 것이냐! 이몸이 네 주인과 대화하는 것이 안 보이는 건가!=
=…….=
리민=펠드릭스의 호통에 안느는 순간 어이가 가출하는 것을 느끼며 입을 살짝 벌렸다.
아니 그냥 앉아서 이야기하라고 한 게 그렇게…… 아니, ……하.
여자들이 어이없어 말문이 막히자 리민=펠드릭스는 다시 환인을 홱 돌아보며 고함친다.
=아랫것의 품행을 보면 윗사람의 품성을 알 수 있다 하였거늘! 저것들조차 바르게 교육하지 못한 성제가 지금 누굴 교육한다는 건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군! 이몸의 말이 틀렸나!?=
“…….”
=하여 이몸은 성제 그대에게 무엇도 배울 뜻이 없음이니! 이만 돌아가겠소! 할아버지에게 받은 선급은 즉각 반납하도록 하시오!=
눈을 감은 채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을 톡, 톡, 두드리던 환인은 리민=펠드릭스가 몸을 홱 돌려 거실 출입문으로 걸어가는 소릴 듣다가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애송이로군.”
잔뜩 뿔난 시선으로 문 앞에 서 있던 여자들을 비켜서게 했던 리민=펠드릭스는 문도 열어주지 않는 그 행태에 버럭 호통을 지르려다 우뚝 멈췄다.
뭐? 애송이?
휙- 날개가 살짝 뜰 정도로 돌아서서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환인의 뒤통수에 대고 노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방금 뭐라 하시었소.=
“어린 나이에 벌써 귀가 막힌 건가.”
=……위대한 팔라툼의 귀족인 이몸에게 애송이라고! 당장 정정하시오! 그러지 아니한다면 귀족으로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를 신청하겠소!=
“그래, 정정하지. 넌 애새끼다. 아니, 애새끼만도 못한 자식이군.”
=……! ……!!=
극심한 모욕에 하얗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벌겋게 달아오르며 날개 끝이 잘게 떨릴 정도로 주먹을 부르르 떠는 리민.
그럭저럭 예상대로인 반응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계획의 다음 단계를 위해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조부의 깊은 뜻을 짐작조차 못 하고 자존심에 까마귀처럼 꽥꽥거리다 돌아가려는 꼴이라니. 호부견자라는 사자성어는 알고 있나.”
=뭐, 뭐……!=
“진정한 귀족이라면 팔라툼의 귀족적인 예법은 같은 팔라툼의 귀족에게만 요구하였겠지. 실제로 디전 펠드릭스 백작께서는 그리하셨고. 그런데 너는…….”
환인은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리민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보란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리민의 말대로 지극히 귀족적이면서도 우아한 행동거지로.
그런 행동에 리민의 얼굴이 말 그대로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게진다.
열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가 때로는 더 신경을 긁는 법. 환인의 행동이 리민의 심사를 있는 대로 박박 긁어놓았던 거다.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한 대 맞았으면 몇 배로 돌려줘야 속이 풀리는 사람이 환인이니까.
잠깐 창밖을 바라본 환인은 다시 리민을 돌아보며 ‘응?’ 하고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안 가고 있었나. 디전 펠드릭스 백작께는 내가 직접 찾아뵈어 사과드리지. 머리가 안타까운 애송이는 눈앞에서 썩 사라져라.”
=이, 이이……!=
이를 뿌득뿌득 가는 소리에 환인은 대놓고 들으란 듯이 후우 한숨을 내쉬며 다시 능청을 떤다.
“펠드릭스 백작님도 자식 복이 없으시군. 천수를 다할 시기가 다가오는데 후계자라는 것이 저런 애송이라니.”
쯧쯧, 작게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는 그 모습은 환인의 여자들에게는 대놓고 하는 도발로 보였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흥분이 치솟은 리민에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뵈는 것은 대 팔라툼의 플라비우스 귀족인 자신을 우롱하는 인간 뿐.
=건방진……!=
마악 하얀 장갑을 벗어 저 밉살맞은 인간의 면상에 집어 던지려던 리민은 순간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서슬 퍼런 기사검에 흠칫, 몸을 떨었다.
어, 어느 틈에?
=성제 님께 대한 불경은 용서 못 합니다.=
=……!=
반박하고 싶지만 등 뒤에서 심장을 꿰뚫는듯한 살기에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을 꺼냈다간 검이 자신의 목을 가를것만 같아서였다.
그런 리민의 귀에 끈적한 악녀의 속삭임이 닿는다.
=있잖니, 꼬마 도련님. 오히려 무례하고 멍청한 짓은 도련님이 저지르고 있단다? 우리 성제님은 팔라툼 식으로 말하자면 다음 대 왕위 계승 1순위의 왕족이셔. 그런 분께 고작 자작 나부랭이가 예법 운운…….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뒷감당이 가능할까~?=
=에이. 율이 언니도 참, 감당은 무슨. 테이아무스 섭정 대공께 살짝 귀띔만 드려도 펠드릭스 가문은 파멸할 텐데.=
=아. 그러려나?=
=당연하지! 레아우카 사바인 백작님이 어떻게 됐는지 기억 안 나? 그랬는데 이제 약관도 안된 꼬맹이가 어떻게 책임지겠어? 뭐랬더라. 성제의 품행은 보지 않아도 형편없다고 했던가?=
안느의 성대모사에 유르파도 비웃음이 잔뜩 담긴 콧소리를 내며 종알거린다.
=풋. 도련님은 지금 알까 몰라? 자기가 팔라툼의 왕족도 간접적으로 모욕한 거 말이야.=
=응응. 펠드릭스 백작님만 참 안되셨지. 어디서 이런 싸가지 없는 꼬맹이가 튀어나와서는 가문을 말아먹게 생겼으니~.=
하얀 머리카락 계집과 은색 머리카락 계집의 대화에 리민은 울화를 꾹 참으며(목에 아직 기사검이 겨누어져 있어서는 아니다) 길고양이가 으르릉거리듯이 말했다.
=허튼소리…! 영도는 국가가 아닌 집단이다. 영혼사도, 영성도, 성녀나 성자도 정식 작위가 아닌 명예직이거늘, 어디서 하늘 같은 팔라툼 귀족에 견주는 거냐…!=
=오, 아하하하.=
유르파는 리민의 멍청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그만 웃어버렸고 안느는 어이없음을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무리 머리에 피가 덜 마른 나이라지만 이렇게 생각이 없다니?
=야. 그럼 하늘신 교단의 교황님한테 가서 그 말 그대로 전해드려도 괜찮지? 펠드릭스 가문의 자작이 교단 신전직은 명예직일 뿐, 팔라툼 귀족 신분과 견주지 못한다고.=
=…….=
리민의 안색이 조금 안 좋아진다. 자신이 방금 한 발언이 은발 계집의 비유에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그제야 깨달은 것.
그런 리민의 표정 변화에 안느는 조금 자괴감이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이런 꼬맹이를 상대로 뭐 하는 건지. 도령 말대로 애새끼네, 애새끼야.=
=열다섯이면 애 맞지 않니?=
=언니, 촌락이나 마을에서 열다섯이면 아이도 낳을 수 있는 어른이야. 저런 소릴 밖에서 했다간 다른 어른들한테 머리 깨진다구.=
안느와 유르파가 대화하며 환인의 뒤로 자리를 옮기자 이실리테도 환인의 얼굴을 보곤 기사검을 거두고 그의 옆에 섰다.
겨누어진 검도 치워졌고 문을 막던 여자도 없어졌지만, 리민은 방을 박차고 나가지 못한 채 극심한 모멸감에 어깨만 잘게 떨었다.
심정같아서는 이대로 문을 걷어차고 나가고 싶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 또한 깨달았기에 차마 그러지 못해 망설이는 상태.
거기다 신경 쓰이는 이야기가 하나둘이 아니다.
왕족을 간접적으로 모욕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게다가 할아버지의 천수가 다해간다고? 사바인 백작님이 경질되었다니?
환인은 씩씩거리며 어깨로 숨 쉬는 리민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의 감정이 조금 숙성되었을 때, 안느에게 의자를 가져오라 한 뒤 소파에 가서 앉았다.
옆방으로 사라졌던 안느가 잠시 후 말 그대로 투박한, 귀족이라면 절대 앉지 않을 나무 삼발이 의자를 가져온다.
그녀의 악의가 귀엽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리민 펠드릭스. 와서 앉아라.”
=…….=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강압적인 명령에 리민의 가지런한 얼굴이 다시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이번에는 군말 없이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안느를 향해 버럭 고함질렀다.
=멍청한 계집 같으니! 날개가 바닥에 닿지 않느냐!=
=그게 내 잘못이야? 크기만 크고 못생긴 날개를 가진 네 잘못이지.=
=뭐라고?!!=
플라비우스의 자긍심인 날개를 모욕당해 리민이 다시 폭발하려는 찰나.
“시끄럽다.”
좀 전 호박색 머리 여자의 살기보다 더욱 농밀해 소름끼치는 살기가 목덜미며 심장을 어루만져와 리민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단지 운이 조금 좋아 빛 속성 술법사로 각성한 뒤 공부로만 얻은 깨달음. 그리고 종족적인 빛 친화력과 종족의 특수한 성장 덕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5급을 달성한 리민=펠드릭스.
그런 온실 속 화초 같은 삶 속에서 날 것 그대로의 살기를 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오라고 해서 왔다는 것은 생각이 바뀌었다고 판단해도 무방하겠지.”
=…….=
“디전 펠드릭스 백작께서는 교육 방침에 대해서 전권을 위임하셨다. 너의 수긍과 펠드릭스 백작님의 허가가 있었으니 이 시간부로 네 성질머리 교정은 내가 맡지. 앞으로 날 부를 때는 선생이라 호칭하도록.”
=서, 성질머리라고……!=
얼굴이 일그러지며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리민의 반응에도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계속 했다.
“방금 행동은 교육 방식을 알려주기 전이었으니 눈감아주지. 이후 실수하거나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을 때마다 네게 적절한 수준의 체벌이 가해질 것이다.”
=그런 엉터리 교육이 어디 있나! 교육이란 팔라툼 에브라드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하……!=
환인은 리민의 항변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그의 복부에 훅을 넣었다.
뻑!
=끄헉……!=
그리모암의 강력을 발동하지 않은 상태라지만 5셋의 효과로 신체 능력이 1.5배 가까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펀치다.
숨을 쉴 수 없는 격통에 배를 감싸 쥔 채 주저앉은 리민은 침을 주룩 흘리며 힘겹게 헐떡였다.
“존댓말.”
=……그, 그으런… 엉터리, 교육이…… 어디, 있습……니까……!=
“버릇없는 멍청이에게 이 이상 가는 교육은 없다.”
=……!=
리민이 핏발 선 눈으로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노려보지만, 환인은 계획대로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생활은 우리와 함께한다. 기간은 내가 충분하다고 할 때까지. 이실리테, 가서 애송이가 타고 온 마차를 돌려보내라. 디전 펠드릭스 백작께 사정을 설명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덧붙이고.”
=네, 주인님.=
=유르파는 애송이가 갈아입을 옷과 신발을 준비해주십시오. 대충 짠 옷이면 됩니다. 안느는 애송이에게 빈방을 안내해주고 비싼 옷은 벗겨서 치워놔라.=
=그럴게.=
=엉. 야, 꼬맹이. 따라와.”
=나……는 애송이도, 꼬맹이도 아니다!=
=여기서 넌 펠드릭스 가문의 리민 자작이 아니라 그냥 힘도 능력도 없는 애송이 꼬마 리민이야.=
=아악! 귀, 귀……!=
=참고로 집 안에서 함부로 술법을 쓰면 도령 대신 내가 죽도록 패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응?=
=아아아! 귀 떠러져어어……!=
안느에게 귀가 잡힌 리민이 망아지처럼 끌려 나가자 환인의 품 안에서 환연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작게 혀를 내두른다.
「와, 저런 인간은 처음 보네. 성질머리 뭐야?」
슁- 펑!
아아악……! 끅…!
안느에게 술법을 쐈는지 약간의 폭음 이후 들려오는 리민의 비명.
유르파가 살짝 걱정된다는 투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 이래도 괜찮을까? 그래도 정식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인데…….=
“리민 펠드릭스의 저 버릇이 안 고쳐진다면 그에게 남은 미래는 죽음뿐입니다.”
=……지, 진짜 죽이게?=
“디전 펠드릭스 백작과 그렇게 계약을 맺었으니까요.”
조용히 대답하는 환인의 목소리에는 절대 바뀌지 않을 확고한 결정만이 들어있었다.
귀찮지만 앞으로의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보수를 받은 마당이다.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남은 것은 백려강과 아영이 술법 함정 해제술을 배우는 사이 잊혀진 옛 도시 미궁을 오가며 버릇을 고쳐놓는 것뿐.
‘기간은 한 달 정도로 잡을까.’
일정을 조율하는 그의 귀로 환연의 수긍이 날아든다.
「안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빛 술법을 쐈다가 주먹에 얻어터져 기절할 정도의 성질머리니까, 교육할 맛은 있겠네.」
=……진짜 쐈니?=
「응. 그걸 안느는 한 손으로 치워버렸고.」
…….
“환연, 당분간 유르파와 붙어있어라. 리민이 혹시 유르파에게 해코지하려 한다면 팔다리를 잘라버려도 된다.”
「목은 안 자르고?」
“그건 미궁 안에서.”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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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발암 방지용 단두대 시스템
선을 넘어 깝치는 순간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마법!
리민: ㅅ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