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 잊혀진 옛 도시 미궁
새벽도 다가오지 않은 야심한 밤. 할 일 때문에 침대에서 자연스럽게 눈을 뜬 환인은 팔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팔을 끌어안고 바짝 붙어 고른 숨을 내쉬는 이실리테.
몇 시간 전 격렬한 정사의 흔적이 그녀의 뛰어난 신체 회복력에도 불구하고 알몸 곳곳에 눈에 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사라질 흐릿한 흔적이다. 작심하고 젖무덤 윗부분을 강하게 빨아서 남긴 키스 마크도 살짝 흐리게 보이는 정도니까.
=으응…… 주인님…….=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칭 메이드 아가씨의 잠꼬대에 환인은 천천히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환인의 가슴에 머리를 올린 이실리테는 잠깐 꼬물거리다 작은 신음과 함께 그의 대흉근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간지러운 손길을 느끼며 그녀의 호박색 풍성한 머릿결을 어루만져주니 몸을 움츠렸던 이실리테는 이내 그의 가슴 위로 상체를 올렸다.
위아래로 잔뜩 짓눌려 양옆에 삐져나오는 부드러운 살덩어리. 그리고 살짝 단단해진 유두가 가슴을 누르는 감각.
작게 느껴지는 그녀의 심장 박동과 서늘한 밤공기마저 날려버리는 따뜻한 체온을 만끽하며 그녀의 날씬한 허리를 쓰다듬고 있으니 느릿하게 눈을 뜨고는 으음, 응. 얕은 신음을 흘린다.
=주인님, 아직 굶주리셨어요……?=
잠기운이 섞인 다정한 목소리에 환인은 그녀의 토실탱글한 엉덩이를 살짝 두드려주며 말했다.
“이실리테. 유물 적응 훈련을 도와다오.”
환인의 요청에 호박 보석 같은 두 눈동자에서 잠기운이 순식간에 지워지며 또렷해진다.
=이 시간에 훈련을 시작하시려고요?=
“그래. 신체 능력의 검증이 필요하다.”
=네, 주인님.=
먼저 침대에서 내려가 순백의 하얀 팬티를 끌어 올리는 이실리테. 환인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허벅지 사이 대삼각형 공간에 눈길을 주었다.
분명 저곳에 세 번이나 파정했는데도 그저 일자로 단단히 맞물려 있을 뿐, 흘러나오는 것이 조금도 없다.
어젯밤 그 조임을 떠올린 환인은 자연스럽게 수긍하며 옷을 다 챙겨입은 이실리테의 시중을 받아 천릉과 그리모암의 강력을 차례대로 입었다.
“먼저 나가서 몸을 풀고 있어라. 난 아영을 깨워서 가지.”
=아영도 깨우시는 거예요?=
“그래. 회복이 필요할 수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먼저 이실리테를 보내 놓은 환인은 백려강과 아영의 방을 찾아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침대 위에서 모로 누운 채 고개만 살짝 든 자세. 달빛에 눈이 고양이처럼 신비롭게 빛난다.
=……오빠?=
“아영. 네 성술이 필요하다.”
=엇, 진짜 오빠네.=
얼른 일어난 아영은 회색 속옷 차림으로 방을 가로질러 잽싸게 간단한 옷만 걸친 뒤 짐승신 교단 징표를 챙겨 문 옆에서 기다리는 환인에게 다가갔다.
이 인기척에도 1시간 넘게 환인에게 시달려 녹초가 되었던 백려강은 잠에서 깰 기색이 없다.
백려강의 침대 쪽을 잠시 바라본 아영이 환인에게 물었다.
=혹시 이실리테 언니가 다쳤어요? 자궁이라거나 거기라거나?=
“아니. 훈련에 필요해서 그렇다.”
의외의 대답에 아영은 환인을 따라 나가며 창밖을 보았다. 아니, 볼 필요도 없이 새카맣다.
해가 뜨려면 2시간 넘게 남았는데 벌써 훈련이라니.
=그런데 안느 언니가 아니라 절 데리러 오셨네요.=
“안느를 깨우기에는 조금 그래서.”
=하긴. 어제 안느 언니를 좀 심하게 괴롭히시긴 했죠.=
킥킥 웃는 아영과 함께 정원으로 나가자 먼저 몸을 풀고 있던 이실리테가 아영에게 손을 흔든다.
=잘 잤어?=
=넵. 손장난하느라 조금 늦게 잤지만 괜찮슴다. 오히려 이실리테 언니가 얼마 못 주무셨을 텐데 괜찮으심까?=
살짝 짓궂은 대답이지만 이실리테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문제없어. 주인님, 훈련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근력과 신체 내구성 테스트다.”
유물이 모두 모여 페널티는 상쇄되었고 신체 능력은 끌어올려져서 감각에 약간 혼선이 생겼다.
이 훈련은 그런 감각을 바로잡는 과정이다.
“이실리테, 네가 손바닥을 내밀면 적당한 힘으로 손바닥을 칠 거다. 그 뒤에는 반대로 네 주먹을 손바닥으로 받아내면 테스트는 끝이다.”
=넷.=
먼저 그리모암의 강력을 발동시키지 않은 5세트 효과.
환인의 주먹이 그녀의 손바닥을 좌우 한 번씩 친다.
—쇅, 퍽!
주먹이 나가는 속도보다 늦게 울려 퍼지는 소리. 그것으로 유물의 기본 효과가 주는 힘의 가늠을 완벽하게 끝낸 환인은 그리모암의 강력을 발동했다.
약 0.5초.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연습한 덕에 위상력의 차지 속도가 눈 깜빡할 만큼 빠르게 이어진다.
‘그다지 마음에 안 드는군.’
연습을 반복해서 발동에 0.1초까지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손바닥을 내미는 이실리테에게 주의를 주었다.
“중간 힘으로 칠 거니 대비해라.”
=넷. 준비됐어요.=
눈부시게 퍼져나오는 환인의 아우라를 홀린 듯이 바라보던 이실리테의 두 다리가 굳건히 땅을 받치고 두 팔 또한 적당한 탄력을 품은 채 내밀어진다.
환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신호를 보낸 뒤 이실리테의 왼쪽 손바닥을 쳤고.
— 쾅!!
살과 살이 맞부딪쳐서 나는 소리라곤 믿기지 않는 굉음이 폭발하며 이실리테의 가녀린 신형이 수 미터나 뒤로 날려졌다.
환인의 주먹을 받아낸 왼팔이 뒤로 튕겨 날아가며 거기에 끌려간 모양새.
=……아.=
사뿐히 착지한 이실리테는 왼손의 고통보다는 놀람을 먼저 느꼈다. 그냥 제자리에서 주먹을 내질렀을 뿐인데 이런 위력이라니?
=으악. 언니 팔! 팔 괜찮아요?!=
=응? 아…….=
아영의 작은 비명에 왼팔로 시선을 돌린 이실리테는 그제야 소매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데다 평소 자신의 팔보다 2배 가까이 퉁퉁 부은 걸 눈치챘다.
달려온 아영이 자신의 팔을 치료하는 걸 보다가 환인에게 물었다.
=주인님. 방금 그거 뭐였어요? 충격량은 안느가 워 해머를 휘둘렀을 때하고 비슷한 수준이었어요.=
“받침점과 힘점, 작용점의 응용에 충격 흡수 원리를 반대로 적용한 거다. 마지막에는 회전을 주어 파괴력을 높였지.”
아영의 치유로 팔이 멀쩡해진 이실리테는 자신이 본 것과 환인의 설명에서 원리를 어렴풋이 깨닫고 주먹을 슉슉 내질러보았다.
뭔가, 이게 아닌데. 하지만 잘만 하면 검술에도 응용할…… 수 있을까?
“공격력은 확인했으니 이제 방어력을 확인해보지. 이실리테, 와라. 처음은 중간 힘으로.”
=넷.=
펑! 쿵! 쾅!
이실리테의 주먹질을 세 번, 손바닥으로 받아낸 환인은 자신의 신체 내구성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군.’
위상력으로 신체를 보호하면 차에 정면으로 치어도 어디 한 두 군데 금가는 수준으로 끝날 정도다.
트럭……도 2t 트럭 정도라면 괜찮은 수준. 덤프트럭에 치여도 내장을 보호하고 한쪽 팔을 포기한다면 위팔뼈의 골절 정도로 끝내는게 가능한 한 강인함이다.
“테스트는 끝이다. 도와줘서 고맙다.”
힘의 가늠과 힘 조절은 터득했으니 남은 건 조금 어긋난 느낌의 신체 밸런스 조정뿐.
뼈에 금이 가고 근육이 다쳐 붉게 달아오른 팔을 아영에게 치료받은 환인은 천천히 태권도의 태극품새를 펼치기 시작했다.
하나의 동작을 30초에 걸쳐 매우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이어간다.
그걸 근처에서 지켜보던 아영이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이실리테 언니. 오빠는 무술 배우신 적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슴까?=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지금 주인님이 하시는 거 엄청 수준 높은 무술 같은데요. 아까 힘점 받침점……? 그런 기술도 들어본 적 없고.=
=…….=
쒹—
8등신의 기다란 리치가 허공을 반달처럼 유려하게 가르는데 무슨 바람의 칼날을 쏜 것 같은 소리가 난다.
그냥 봐도 뭔가 본격적인 무예의 자세 같은 동작의 연속.
=사람을 상대로 습격이 아니라 정면에서 싸우기 위한 살인 무술 같긴 한데…….=
또다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환인의 모습에 말을 멈춘 아영은 눈을 번뜩이며 그 뒤에 붙어 동작을 똑같이 흉내 내기 시작했다.
이실리테도 그러고 싶었지만, 저 무술은 검술과 전혀 다른 분야라는 게 너무 크게 다가와 자신의 검술에 방해가 될 것 같다는 예감만 커진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검술이 영향을 받아 망가질 것 같은 기분.
이런 감각은 때때로 중요한 경고를 내포하기 마련인지라 이실리테는 아쉬워하며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풉, 뭐어어? 그게 단순한 체조였다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 초고추장을 찍은 신선한 브로콜리를 먹던 안느가 꿀꺽, 브로콜리를 생으로 삼키곤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까 나랑 이슬이랑 아영이는 체조에 그토록 얻어터져서 나뒹굴었단 거야?
“태권도는 체조가 아니다. 신체를 강건하게 하고 심신을 수련해 인격을 도야하며 기술 단련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엄연한 호신 무술이지.”
환인이 빵에 사과잼을 바르며 대답하자 안느가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묻는다.
=근데 도령은 체조랬잖아?=
“이 세계에는 건강 증진과 체력 단련을 목적으로 배우는 무술은 없나.”
=있겠어? 무술이란 건 괴물이나 적과 싸우기 위한 기술인데.=
“그런가. 아무튼 내가 배운 것은 무술이라기보단 체조에 가까운 거였다. 무술 유단자와 단증을 가진 정식 무도관이긴 했지만 말이다.”
햄치즈 샌드위치를 먹으며 환인과 안느의 대화를 듣던 아영이 아직 눈가에 멍이 남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빠 기술은 명백한 살인 무술이었어요. 진짜 척추가 반으로 접히는 줄 알았는데요.=
“그럴듯하게 보였던 거겠지.”
=그런가……?=
그렇게 위장에 부담 가지 않으면서도 배가 든든한 아침 식사를 마친 백려강과 아영은 술법 함정 해체술을 배우러 외출했고 환인은 다시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모암의 강력에 몸과 마음이 적응하려면 일단은 움직여야 한다.
환인은 광명창을 꺼내 가상의 적을 상대로 휘두르기 시작했고 안느도 등대의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루모를 불러 정령 친화 훈련을 이어간다.
이실리테는 새벽에 환인의 동작을 본 뒤로 뭔가 머릿속이 복잡해져 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겨 든 상태.
훈련은 기다렸던 방문자가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깥에서 마차가 서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유르파가 살짝 곤란한 얼굴로 다가와 훈련중이던 환인에게 말했다.
=자기. 리민 펠드릭스 자작이 도착했어. 거실에 일단 데려다 놓긴 했는데…….=
“성격이 대단했나 보군요.”
유르파의 표정이 미묘해진 것을 포착하고 묻자 유르파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저건 말로 표현 못 해. 직접 보는 게 더 이해가 빠를 거야.=
=어떻길래 율이 언니가 그렇게 말할 정도인지 궁금하네? 이슬아! 손님 오셨대!=
몇 시간이나 창을 휘두르느라 땀을 흘렸던 환인은 환연에게 부탁해 간단히 몸을 씻고 여자친구들과 거실 겸 응접실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반쯤 펼쳐진 두 쌍의 흰 날개.
팔라툼에 도착한 이후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플라비우스족은 겸손하거나 자존감이 낮을수록 날개를 접고 자부심이나 자만심이 높고 강할수록 날개를 펼친다.
이쪽으로 드러낸 날개는 높은 자존감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반쯤 펼쳐져 깃털을 살랑이고 있었다.
성격이야 어쨌든 두 쌍의 날개는 백조, 아니 천사처럼 깃털 한 장 한 장이 가지런하고 섬세하며 아름답다.
날개를 잠시 응시하고 있을 때, 인기척에 뒤돌아선 남자는 대놓고 환인에게 눈썹을 찌푸리며 비난을 날렸다.
=성제는 순례 이전에 부하들에게 예의범절과 귀빈을 접대하는 것부터 가르쳐야겠소! 어려운 발걸음을 한 손님을 이렇게 세워놓다니, 세상 어디에 이런 법도가 있단 말이오!=
여자…? 아니 남자인가?
환인의 여자들은 순간 헷갈릴 정도의 미소년? 미청년? 아무튼 리민=펠드릭스의 외모 때문에 그의 무례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화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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